세 사람은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한지영은 얼마 전 중환자실에서 나온 후 곧바로 VIP 병실로 옮겨졌다.VIP 병실은 채광도 좋고 또 일반 1인실보다 많이 넓었으며 보호자용 침대도 따로 있었다.그래서 한씨 부부는 매일 한 사람씩 병원에 남아 한지영을 보살펴 주었다.한지영은 안정을 취한 후 조용히 몸을 일으켜 병상 위에 앉았다.환자복도 전과 달리 많이 정돈된 상태였다.그녀의 머리에는 여전히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고 청초하고 귀여웠던 얼굴은 두 번의 큰 수술로 어느새 창백하고 또 초췌해졌다.생기 넘치고 장난기 가득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한씨 부부는 그런 딸의 옆을 지키며 그녀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한번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들의 딸이라는 걸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몇 년 전 임유진을 구하겠다고 해외로 나가 공부할 기회도 때려치우고 돌아왔으니까.정말 좋은 기회라 귀국하면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는데도 한지영은 끝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서 한씨 부부는 한지영이 백연신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 별말 없이 알겠다고 했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임유진과 강지혁이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리고 두 사람 뒤로 백연신도 얼굴을 드러냈다.한지영의 시선은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백연신부터 찾았다.방금까지만 해도 초조해 보였던 얼굴이 백연신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금세 한시름 놓은 듯 풀어졌다.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켠 후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다들... 잠깐 나가줘요. 연신 씨랑 둘이서... 얘기하고 싶어요.”임유진은 백연신이 혹시라도 냉정하고 충격받을 말을 할까 봐 나가는 것을 망설였다.그러자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일단 나가자. 백연신 씨도 생각이 있을 거야.”“유진아,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한지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진을 안심시켰다.이에 임유진은 그제야 무거운 발을 떼어내며 병실을 나섰고 그 뒤로 한씨 부부도 머뭇머뭇 병실을 나갔다.
아까 고은채와 함께 나타났을 때 백연신은 일부러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하지만 그것도 한지영의 얘기를 듣고는 완전히 무너졌다.“하지만 고은채 씨와...”임유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지금 상황으로는 그게 가문을 되찾는 일인 것 같기는 하지만.”“네 말은 백연신 씨가 가문을 돌려받기 위해서 고은채 씨를 선택했다는 거야?”“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임유진은 그 말에 입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백연신이 정말 가문 때문에 한지영을 포기한 거라고?그러면 한지영에게는 뭐라고 할 생각인 거지?강지혁은 불안해 보이는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병실 안.한지영과 백연신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한지영은 백연신이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는데도 어쩐지 그가 엄청 멀게만 느껴졌다.백연신을 만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거리감이었다.“기사 내용... 정말 사실이에요?”한지영은 깨어난 지 벌써 며칠이나 되었지만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하지만 여전히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백연신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조용히 ‘응.’이라고 대답했다.이에 한지영의 몸이 움찔 떨렸다.“정말... 다른 여자랑... 결혼하기로 했어요...?”한지영은 백연신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백연신은 천천히 한지영의 병상 곁으로 다가오더니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턱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지영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전에는 너랑 함께 하는 것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백연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또 부드러웠다.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차갑기 그지없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백씨 가문의 사생아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항상 아주 당연하
한지영은 힘겹게 손을 들더니 백연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습관이 될 정도로 많이 만졌던 얼굴이다.이미 질리도록 봤음에도 여전히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던 얼굴이다.그런데 그랬던 얼굴이 지금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한지영은 처음 기사 내용을 봤을 때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백연신의 말을 듣고도 눈물 한 방울 없이 평온한 채로 있었다.백연신이 오기 전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뒀던 것일까?“알겠어요. 헤어져... 줄게요.”한지영은 그의 볼을 만지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그의 입술을 만졌다.“연신 씨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한지영은 눈물을 훌쩍이는 이별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미치도록 사랑했던 사람을 원수 보듯 하고 싶지 않았다.아무리 이 관계가 백연신이 일방적으로 끊은 관계라고 해도 그래도 그녀는 평화롭게 헤어지고 싶었다.정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첫 번째 남자였으니까.백연신과는 그저 원하는 바가 달랐을 뿐이다.백연신은 그저 그녀가 주는 사랑보다 자신이 얻는 것이 더 소중했던 것뿐이다.한지영의 담담한 말에 백연신의 몸이 굳어버렸다.그녀는 울면서 그를 붙잡지도 않았고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냐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두어 번의 질문으로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그렇게 그와의 헤어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좋아해야 하는 게 맞다.그녀가 별다른 집착 없이 헤어져 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다.하지만 후련하고 고맙기는커녕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듯 고통스럽기만 했다.한지영은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라겠다고 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날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고은채를 선택한 순간부터 백연신은 자기 인생이 이대로 영원히 어둠에 갇힐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공수진은 수중에 들린 검사 결과지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내가 임신이라고?!’그녀는 이 상황이 믿
게다가 근 몇 년간 이경빈은 공수진과 잠자리를 한 적이 없다.3개월 전 이경빈이 술에 잔뜩 취한 채 들어왔을 때 잠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기만 술에 취한 이경빈이 계속해서 탁유미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날은 그렇게 물 건너 가버렸다.하지만 공수진은 이경빈의 술주정을 듣고도 그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그때처럼 이경빈에게 술을 먹여 둘이 잠자리를 한다고 해도 아이의 출산 시기와 맞지 않기에 어차피 금방 들통나게 된다.공수진은 뱃속에 자리 잡은 아이보다는 이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더 중요했다.“그럼 결혼식 올리기 전에 빨리 애 지워버려. 결혼하기 전에 잠시 여행이라도 갔다 오겠다고 하면 별 의심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거다.”공수진의 아버지인 이한철이 말했다.그 말에 공수진은 생각에 잠겼다.어차피 아이는 무슨 일이 있든 지워야 한다.하지만 그전에 배 속의 아이를 이용하면 탁유미를 향한 이경빈의 마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엄마, 아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공수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부모님께 방금 떠오른 기가 막힌 생각을 공유했다....임유진은 병상 위에서 열심히 음식을 먹는 친구를 바라보았다.그날 백연신이 병실에서 나온 후 임유진과 한씨 부부는 한지영이 상처를 받은 게 아닌가 싶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심지어 임유진은 미리 강지혁에게 만약 한지영이 정말 충격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의사에게 연락하도록 얘기해놓기도 했다.하지만 막상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지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나 조금... 피곤해. 먼저 잘게...”그러고는 정말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그리고 다음 날인 지금, 한지영은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이 행동했고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하지만 그녀가 밝아 보일수록 임유진은 마음이 불안해졌다.“왜... 그렇게 봐?”한지영이 물었다.이제 그녀는 어느 정도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 괜찮아?”병실에는
다만 정말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라 헤어짐이 달갑지 않았고 마음도 많이 아팠다.하지만 한지영은 헤어짐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친구와 가족들이 더 소중했다.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기에, 그들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해주는지 알기에 한지영은 하루라도 빨리 완치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유진아, 나는 이제 연신 씨를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릴 거야... 그리고 천천히 연신 씨와의 모든 추억을 내려놓을 거야. 미움도 분노도 배신도... 다 내려놓을 거야. 우리가 헤어진 건... 그냥 가치관 때문이니까.”임유진은 그 말에 코가 찡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백연신을 저주할 만도 한데 그녀는 그저 내려놓겠다고만 했다.한지영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씩씩하게 이겨내 가고 있었다.오후가 되고 탁유미도 한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그녀는 한지영과 백연신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한지영이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는다는 건,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그래서 탁유미는 한지영이 정말 대견해 보였다.한지영은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피곤하다며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지영 씨는 정말 강한 사람인 것 같아요. 엄청 힘들고 속상할 텐데 그걸 이겨내려고 하고 있잖아요.”탁유미가 말했다.“네, 맞아요. 지영이가 평소에는 철없는 애 같아도 맺고 끊는 것에는 언제나 확실한 애였어요. 그런데 솔직히 아직도 조금 걱정이 돼요. 백연신을 내려놓겠다고는 했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내려놓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임유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지영을 바라보았다.그녀도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기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지금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그리고 내려놓아야만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니까요.”탁유미의 말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언니는 이제 정말 괜찮은 거예요?”탁유
“그러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후회 같은 거 하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잘 살고 가려고요. 이번 생에는 지독하게 엮었으니 다음 생에는 서로 만날 일 없겠죠.”탁유미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는 이대로 탁유미를 보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탁유미를 살게 할 생각이었다....병원에서 나온 후 임유진은 GH 그룹으로 향했다.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임유진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를 알아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일전 건물 앞에서 강지혁을 만나게 해달라고 장장 몇 시간을 밖에 서 있었으니까.게다가 만나주지 않을 것 같던 강지혁도 결국에는 고이준을 보내 그녀를 대표이사실로 불러들였다.하지만 그때 강지혁을 만났다고 해서 오늘도 강지혁이 허락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임유진은 안에 들어선 후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걸려던 찰나 고이준이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고 비서님!”고이준을 부르자 고이준은 그녀를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사모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사모님이라는 호칭에 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물론이고 고이준 옆에 있던 직원들도 깜짝 놀랐다.“혁이 보러 왔는데 전화한다는 걸 깜빡한 거 있죠.”“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니 제가 대표님 사무실까지 모시겠습니다.”고이준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고이준은 옆에 있는 직원에게 두어 마디 건네더니 임유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그러고는 직접 층수까지 눌러주었다.고이준은 그저 일개 비서에 불과하지만 강지혁의 직속 비서이기에 평사원은 물론이고 임원진들도 고이준에게 만큼은 예의를 갖췄다.즉 회사 내부에서 고이준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할 수 있는 건 강지혁밖에 없다는 소리였다.그런데 그런 고이준이 부름 한 번에 망설임 없이 뛰어가고 예의를 갖춰 직접 모시기까지 하니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오게 된 지금, 그런 감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다가가 보니 상당히 많은 서류가 이곳저곳 흐트러져있었다.강지혁이 이 책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멋대로 그려지는 듯했다.그때 흐트러진 서류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진가원]이라고 적혀 있는 서류 봉투가 보였다.진가원은 진씨 가문에서 주관하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로 듣기로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땅 부지를 사는 데만 천억 원도 넘게 들었다고 하며 근 2년간 대외홍보에도 역시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그런데 그 중요한 서류가 왜 강지혁의 책상 위에 있는 거지?임유진이 의문을 가진 그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이에 깜짝 놀란 임유진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그만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봉투가 열리고 안에 든 것들이 하나둘 밖으로 튀어나왔다.그리고 임유진은 그것들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봉투 안에서 나온 것들이 전부 진애령의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강지혁의 유일한 약혼녀였던 진애령 말이다.진애령의 사진이 왜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거지? 그것도 엄청 많이?진애령은 강지혁의 약혼녀로 안타깝게도 차 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고로 임유진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하나의 교통사고로 두 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흘러가게 되었다.임유진이 멍하니 사진을 구경하고 있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사진을 주웠다.임유진은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떨어진 사진과 서류 봉투를 줍는 그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어...”그녀는 어쩐지 목이 말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영이 보러 병원에 갔다가 너 보고 싶어서 왔어.”“한지영은 좀 어때?”강지혁이 물었다.“괜찮아.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고 있어.”임유진은 사진들을 아무렇게나 서류 봉투에 넣어버리는 강지혁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진들은 뭐야?”“신경 쓰여?”“그거 진애령
“소민준...”강지혁의 입에서 세글자가 흘러나왔다.“만약 소민준이 그때 너를 배신 안 했으면 지금쯤 소민준과 결혼했을 수도 있었겠네?”“아니.”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어. 그래서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몰랐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결혼하겠다고 해도 소민준네 집안에서 반대했을 거야.”임유진은 그때 너무 어렸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리고 소민준도 나를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호감 정도의 좋아함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주변 여자들이랑 다르다는 신선함이 더 컸을 거야. 소민준은 나를 위해 자기 부모님의 반대까지 무릅쓸 사람이 아니야. 그건 이미 진애령 씨 사건으로 증명이 됐고. 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버리지 않았겠지.”“만약 소민준이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널 선택했다면?”임유진은 강지혁이 엄청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세상에 만약에는 없어. 그리고 나도 마치 장기 말 버리듯 날 버린 사람으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싶지 않고.”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꽉 쥐었다.“조금만 기다려. 소씨 가문도 곧 조용히 사라질 테니까. 그렇게도 진세령과 진세령네 집안이 좋다면 그 인간들과 같은 말로를 맞게 해야지.”임유진이 흠칫하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소씨 가문을 없애려고?”“진씨 가문은 조만간 사라질 거야. 소씨 가문은 진씨 가문과 엮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같이 사라지게 되겠지.”강지혁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무서운 얘기를 꺼냈다.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농담이겠거니 할 테지만 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아마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은 정말 머지않아 조용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있는 두 가문인데...’특히 진씨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