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강지혁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많이 기대한 것인지 그는 지금 몸 전체가 다 떨렸다.“날 사랑한다고? 정말...?”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안에서 흘러나왔다.“응. 난 이런 거로 거짓말 안 해. 혁아, 나는 널 사랑하고 있어. 널 전처럼 사랑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널 다시 사랑하는 것과 시간의 흐름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어.”대단히 큰일을 겪은 것도 아니고 그럴 만한 특별한 계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그저 원래부터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임유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마음을 깨달았다.전에 강현수 앞에서 얘기했을 때보다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강지혁은 다시 한번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분명히 날 사랑한다고 했어. 네가 네 입으로 말한 거야. 절대 못 물러.”“응, 무를 생각 없어.”임유진은 조금 울먹거리는 듯한 강지혁의 목소리에 그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혁아, 너 울어?”강지혁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더 깊게 얼굴을 파묻었다.임유진은 어깨가 젖어가는 걸 느끼며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묘원 입구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이준은 임유진과 함께 묘원에서 걸어 나오는 강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보면 안 될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깜빡거렸다.강지혁의 눈가가 빨개진 것도 모자라 살짝 부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반면 임유진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고이준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두 사람이 꼭 애먼 여자애를 울린 다 큰 남정네와 그런 남정네에게 괴롭힘을 당해 눈물을 흘린 여자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만 성별이 바뀌었을 뿐.‘그런데... 대표님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그래서 울기도 하고? 아니, 애초에 대표님이 울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대표님이 울기는 왜 울어. 분명히 모래 같은 게 눈에 들어가서 그걸 빼려다 눈물이 나온 게 틀림없어!’고이준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
강지혁은 한참이나 임유진의 손길을 느낀 뒤에야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제 가자.”그러고는 아직도 벙쪄 있는 고이준을 힐끔 노려보았다.이에 고이준은 움찔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강지혁의 반응으로 보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게 틀림없었다.‘난 이제 죽었다...’차에 올라타고 이제 막 시동을 걸려는 그때 고이준의 휴대폰이 울렸다.고이준은 바로 전화를 받고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얘기를 듣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를 돌아 강지혁에게 보고했다.“백연신 씨가 나타났습니다.”“네?!”그 말에 먼저 반응한 건 임유진이었다.“어디 있대요, 지금?”“재원시에 있는 고씨 가문에 있다고 합니다. 비밀스럽게 나타난 거라 경찰 측도 백씨 가문도 아직 모르는 것 같고요.”고이준의 말에 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고씨 가문?“고유정 씨 집안 말인가요?”임유진이 물었다.그녀는 전에 고유정이 백연신의 약혼녀라고 한지영을 찾아갔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 뒤에 한지영이 하마터면 크게 사고 날 뻔한 것도 모두 고유정의 짓이었고 말이다.백연신이 백씨 가문으로 급히 돌아간 건 고유정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유정 씨는 고씨 가문의 양녀입니다. 그리고 고씨 가문은 현재 친딸을 찾았고요. 백연신 씨는 그 집 친딸인 고은채 씨와 함께 고씨 가문으로 돌아갔습니다.”그 말에 임유진이 멈칫했다.백연신이 왜 고은채와 함께 있는 거지?왜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고씨 가문을 찾아간 거지?“백연신 씨와 연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임유진의 말에 고이준이 고개를 저었다.“재원시는 저희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서 백연신 씨와 컨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그 말에 임유진이 입술을 깨물었다.백연신이 왜 고씨 가문 사람과 함께 있는 거지?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그만 생각해. 최소한 백연신 씨가 살아있다는 건 확인했잖아. 고씨 가문과 엮인 이유는 천천히 알아보면 돼.”임유진은 그 말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네 말대로 너는 내... 남편이고 아이들 아빠잖아.”“만약 내가 아이들 아빠가 아니었으면? 그래도 내 생각을 했을까?”강지혁이 되물었다.마치 아이들에게도 질투를 느끼는 듯한 그를 보며 임유진은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당연히 하지!”임유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녀는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고,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기에 아이들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진 것이다.임유진은 한 손을 들어 또다시 부드럽게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유미 언니랑 지영이 일에 열성인 건 두 사람이 지금 내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야. 두 사람 모두 나한테 많은 도움을 줬으니까 나도 갚고 싶어. 특히 지영이한테는 더 그렇고. 만약 지영이가 없었으면 나는 너랑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아마 차가운 감옥 안에서 희망도 뭣도 없이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강지혁은 그녀의 눈빛에서 뭔가 읽은 듯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이 너한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친구인지 잘 알고 있어. 그래서 한지영 일이라면 네가 어떻게든 돕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네 마음속에 한지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어쩌면 나보다 더 클지도 모르지.”그 말에 임유진이 웃었다.“너랑 지영이를 어떻게 비교해. 애초에 두 사람을 대하는 내 감정이 다른데.”“굳이 비교하자면?”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내가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사실 그도 알고 있다. 임유진이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잘해주는 것의 두 배를 갚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당시 한지영은 임유진을 위해 자기 앞날을 포기했고 3년이나 옆을 지켜주며 임유진이 절망에 빠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강지혁은 오히려 한지영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3년을 그가 아닌 누군가가 메꿔주었다는 것에.또한 그런 한지영과
임유진은 음식이 입에 잘 맞는지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하지만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강지혁에게 토하고 오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서둘러 룸을 빠져나가 화장실로 달려갔다.룸 밖을 지키던 여경호원은 자연스럽게 그런 임유진의 뒤를 따라갔다.강지혁은 임유진이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휴대폰을 꺼내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는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까 차에서 못했던 말, 지금 해봐.”고이준은 그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사실 아까 고이준은 차 안에 임유진이 있어 전부 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꾹 닫았다. 그런데 그 짧은 찰나의 망설임을 강지혁이 눈치를 챈 것이다.“보고에 따르면 백연신 씨와 고은채 씨가 함께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연인 같아 보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고씨 가문에서 비밀리에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도 했고요. 아마 백연신 씨를 도와 권력을 다시 빼앗으려는 것 같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은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일단 이 얘기는 유진이한테 계속 비밀로 해.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내면 그때 내가 다시 얘기할 거야. 그러니까 백연신과 고은채가 어떤 사이인지 정확하게 알아봐.”“네, 알겠습니다.”한편, 임유진은 토하고 나니 그제야 속이 조금 편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사실 입덧은 3개월째에 들어서면 그만 멎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녀는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료도 찾아보고 의사에게도 물어보니 입덧은 임산부의 체질에 따라 다르며 어떤 임산부들은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계속 입덧을 한다고 했다.입덧하게 되면 먹었던 것들을 다 토하게 되기에 아이에게 충분한 영양소를 전해주기 위해서는 많이 먹는 것밖에 없었다.임유진은 그 생각에 쓰게 웃으며 아직 전혀 임산부 같지 않은 평탄한 자기 복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더 많이 먹도록 할게.”그녀는 세면대에서 간단히
소민준은 임유진을 보며 넋을 잃었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룸을 착각했네요.”그러고는 룸을 나가려는 듯 바로 몸을 돌렸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소민준 일행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롱 가득 섞인 얼굴로 말했다.“정말 착각 맞아요? 난 왜 유진 씨가 우리 민준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일부러 들어온 것 같지? 출소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우리 민준이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어떡합니까.”사람들은 그 말에 박장대소하며 웃었다.“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아직 민준이 앞에 나타나는지 모르겠네.”“유진 씨, 설마 세령 씨 누님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는 상간녀가 돼서 세령 씨랑 우리 민준이 사이에서 분탕질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죠? 물론 분탕질하려 해도 민준이가 봐줘야 말이지.”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말하는 내용으로 보아 당시 진애령 사건의 진범이 잡혔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듯했다.하지만 소민준과 진세령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그런데도 친구들이 아직 모르고 있다는 건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임유진의 추측대로 소민준과 진세령은 강지혁에게 호되게 당한 일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 임유진 얘기를 아예 꺼내지 않았다.사실 임유진 사건은 당시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사람들과 변호사업계 사람들만 알고 있을 뿐 아직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그러니 이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방금 하신 말들, 모욕죄로 고소당할 수도 있어요.”임유진이 차가운 얼굴로 경고했다.“아이고 무서워라. 어디 한번 해보던가요.”그녀의 말에 아까 제일 먼저 입을 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에게로 다가왔다.“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대로 사과를 하는 건 어때요? 그럼 혹시 알아요? 세령 씨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줄지?”남자가 건들거리며 임유진의 어깨를 잡으려는데 닿기도 전에 임유진의 뒤에 있던 경호원에게 손이 잡혀버렸다.경호원은 남자의 팔을 잡은 후 그대
소민준도 옆에서 거들었다.“들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세령이야. 네가 아무리 우연인 척 이렇게 아등바등해봤자 나는 너 안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추잡스러운 짓 좀 그만해.”“룸을 착각한 거라고 이미 두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너 청력에 무슨 문제 있니? 그리고 너는 내가 잊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여전히 널 만난 게 내 인생 최대 실수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나 추잡스러운 생각 좀 그만해.”임유진의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 임유진에게 손을 올렸다.하지만 뺨을 내리치려는 그때 임유진의 경호원이 소민준 친구를 옆으로 던져버리더니 바로 옆으로 다가와 소민준의 팔을 잡고 바닥에 제압해버렸다.“사모님, 이 남자 어떻게 처리할까요?”경호원이 물었다.“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할 테니 그대로 계속 제압해주세요. 또 달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도 제압해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두 사람의 말에 룸 안에 정적이 흘렀다.소민준을 간단히 제압한 여경호원의 몸놀림에 다들 그대로 굳어버려 소민준을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소민준은 바닥에 얼굴이 찰싹 달라붙은 채로 소리를 지르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경호원의 힘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임유진,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이 사람한테 민준이 풀어주라고 해! 내 말대로 안 하면 소씨 가문과 진씨 가문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이 S 시에서 발도 못 붙이게 될 거라고!”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 한번 해봐. 어떤 방법을 쓸지 궁금하니까.”남자는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의 바로 옆에 섰다.남자는 다름 아닌 바로 강지혁이었다.룸에는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고 강지혁을 아는 사람들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중에는 물론 소민준과 진세령도 있었다.방금까지만 해도 소리를 지르던 소민준은 목소리 내는 법을 잊어버린 듯 입을 꾹 닫았고 진세령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뭐, 뭔가 오해가
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가자. 음식 다 차가워지겠다.”“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나 방금 경찰 불렀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한테 모욕적인 말을 내뱉었거든. 아마 금방 도착할 거야.”“그건 황채린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강지혁이 말한 황채린이라는 여자는 바로 임유진 옆에 있던 여자 경호원이다.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소민준은 경호원의 손에서 풀려난 후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를 꽉 깨물고 강지혁과 임유진을 바라보았다.한때 마치 장기 말처럼 버렸던 여자가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남자 옆에 서 있다.그래서 소민준은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상대는 강지혁이니까.한편 진세령은 지금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한때 형부가 될 뻔했던 남자가, 언니가 미치도록 사랑했던 남자가, 언니 장례식에서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내내 냉랭한 얼굴로 있더니 지금은 다른 여자에게 이토록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지어주고 있었니 말이다.그리고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였던 임유진이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후 룸을 나가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내려 수중에 있는 삐뚤빼뚤한 여자의 손을 한번 바라보았다.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진세령을 향해 말했다.“그러고 보니 그때 내 와이프가 감옥에서 진씨 가문의 신세를 많이 졌더라고. 그리고 너는 그때 내 와이프가 평생 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했었지, 아마?”그 말에 진세령의 얼굴이 하얘지더니 두 손이 덜덜 떨렸다.강지혁은 그런 진세령을 빤히 바라보고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임유진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두 사람이 떠난 후 진세령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방금 강지혁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민준의 집.“뭐? 임유진이 강지혁이랑 결혼했다고?!”소민영이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물었다.그녀는 강지혁이 그 많은 여자를 다 제쳐두고 임유진과 결혼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과 결혼할 자격 같은 게 없는 여자니까.“오빠가 뭐 잘못 들은 건 아니고?”“강지혁이 직접 자기 입으로 자신이 임유진 남편이라고 했어. 그리고 옆에 있던 경호원 여자도 임유진을 사모님이라고 불렀고.”소민준이 다시금 룸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말했다.사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경호원에게 제압당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대로 임유진의 뺨을 내리쳤으면 그때는 멀쩡한 손이 그 자리에서 바로 잘려나갔을 테니까.당시 소민준은 진세령이 감옥에 있는 사람을 시켜 임유진의 손톱을 하나하나 뜯어버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었다.임유진이 아프다며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보이는데도 그저 차가운 눈으로 구경하기만 했다.그러니 아마 강지혁은 그때 임유진이 받았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에게 주려고 할 것이다.“참 운이 좋아? 강지혁이 여자 보는 눈이 없는 덕에 언감생심 바라보지도 못할 곳에 오르게 됐잖아. 길바닥 쓰레기나 줍던 년이.”소민영이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소민준이 무서운 눈빛으로 소민영을 바라보았다.“남은 한쪽 다리마저 부러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제부터 그런 말은 자제해. 특히 밖에서는 더.”이에 소민영이 도끼눈을 뜨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만약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멀쩡했던 다리가 부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사실 소민영은 강지혁이 임유진을 완전히 버린 후 기회를 봐 임유진을 완전히 처리해버리려고 했었다.그런데 이제는 임유진에게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그럼 사돈네는 지금...”소민준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아마 지금 상당히 골치 아파하고 있을 거예요. 진씨 가문에서 저지른 일이 있으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복수하려고 들면 세령이네 집안은 쫄딱 망해버릴지도 몰라요.”“세상에!”소민준의 어머니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소
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 아이는 사랑만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아이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하는 새엄마와 아이에게 관심조차 없는 아빠의 보호 아래 있다. 말이 보호지 실상은 아마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전처의 애’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그러고 보니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많이 혼났을까? 맞은 애들은 많이 다쳤나?’“무슨 생각해?”강지혁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려 퍼졌다.“아... 별건 아니고 오늘 놀이공원에서 봤던 그 어린 남자애가 갑자기 생각나서. 그 왜 애들 노는 곳에서 자기보다 덩치도 큰 애들을 때려눕힌 애 있잖아. 아마 그 일로 엄청 혼났을 거야.”“그 아이가 걱정돼?”강지혁은 말을 하며 임유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응. 걱정되고 신경 쓰여. 나 사실 아까 그 애 얼굴을 봤을 때 너랑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 그 애가 너랑 닮아서 이렇게도 신경이 쓰이나 봐.”“나와 닮았다고?”강지혁은 그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얼굴이 닮았다기보다는 눈빛이랑 표정이 그때의 너랑 많이 닮았어. 도무지 아이의 얼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었어. 그런데 분명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자기 누나는 끔찍이 여기더라고. 아마 키 큰 남자애들이 그 여자애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 남자애도 손을 대지 않았을 거야.”“그래?”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확실히 신경 쓰이고 지켜주고 싶은 누나가 있는 점에서는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그 역시 임유진을 마치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만약 그날 임유진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강지혁은 아마 전과 다를 것 없이 쭉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이렇게도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인지도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그 남자애 가족을 찾아내 그 일로 그 애가 벌을 받는다거나 하지 않도록 조치할게.”“정말?”“응. 그러니까 이제 걱
임유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내가 왜 여기 있어?”“기억 안 나? 너 아까 거기서 기절했었어. 혹시 몰라 병원으로 왔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대”강지혁은 말을 하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혁아, 어떡해... 흑... 우리 아이가... 아이가... 흑...”아이를 향한 미안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인지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목 놓아 울기만 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김재호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어. 만약 그 아이가 정말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뒀다면 우리한테 애가 묻힌 곳이라도 얘기해줬을 거야. 절대 경찰에게 끌려가면서까지 입을 닫고 있지는 않았을 거야.”강지혁은 나머지 한 아이가 살아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김재호가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까지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살아있다고...?”임유진은 그제야 눈물을 그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응, 분명히 살아있을 거야. 아이의 행방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찾아낼게.”강지혁은 손을 들어 임유진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나더러 울지 말라더니 이제는 네가 우네.”임유진은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위로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강지혁의 팔을 꽉 잡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우리 아이, 정말 살아있어...?”“응.”“정말...?”“응, 정말.”임유진은 강지혁의 품에 기댄 채 계속해서 질문했고 강지혁은 그 질문에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그러기를 몇 번, 임유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지혁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혁아, 우리 아이 꼭 찾아줘...”5년이나
김재호는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마구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애초에 임유진을 제거하려고 한 건 강씨 가문을 책임질 강지혁에게 약점이 생겨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했던 강문철의 유언 때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은 강문철이 내린 시험에 망설임 없이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강지혁도 구하고 스스로의 목숨도 구했다.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똑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한편 임유진의 말을 들은 강지혁은 순간 심장을 누군가가 강하게 틀어쥐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해 보이는 말투로 얘기했다.“설령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내가 해결해!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까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마. 알았어?!”임유진은 시선을 옮겨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임유진!”강지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이었다.“그럼 영원히 그런 날이 오지 않게 하자.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나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순간 머리가 찌릿하는 느낌과 함께 익숙하지만 낯선 무언가가 스쳐 가는 듯한 느낌이 들이 들었다.그때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김재호가 입을 열었다.“제 조건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행방에 관해 얘기는 해드리죠. 나머지 한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숨이 멎었습니다.”“거짓말!”임유진이 반박했다.“사실입니다. 애초에 살아있었다면 두 분 중 한 분한테 보냈거나 제가 데리고 있었겠죠.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이는 없잖습니까.”김재호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답했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확실히 김재호 곁에 아이가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다. 또한 방 내부를 이곳저곳 둘러봐도 아이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품 같은 것은 없다.그러면 나머지 아이는 정말 5년 전에 살아남지 못한 건가? 정말 태어나자마자 숨이 멎어버린 건가?아이가 없을지도
김재호의 말대로 강지혁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물론 아이도 너무 중요하지만 임유진이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만약 임유진이 또다시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강지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얼굴도 강지혁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낼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김재호가 아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초조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임유진은 마치 심장을 누군가가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다시는 강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응, 널 믿을게.”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김재호는 임유진의 말에 빈정거리며 웃었다.“역시 임유진 씨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겠나 보죠?”임유진은 앞으로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혁아, 울지 마. 나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는 강지혁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강지혁이 더 이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김재호의 멱살을 스르르 놓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할게.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김재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비아냥거렸다.“아이의 생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나 보네요. 엄마가 돼서.”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물을 어느 정도 닦아준 후
“저는 어르신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그분의 충견으로 남을 겁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꾸지.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진이가 사라진 뒤에 네가 아이를 데려온 거지? 너는 우리 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움직인 건 전부 다 노인네 지시인 건가?”강지혁이 손에 힘을 가하며 그를 압박했다.김재호는 목이 서서히 졸려오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이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당시 최면으로 봉인됐던 기억이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기억이 모두 회복됐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테니까.임유진 역시 다시 강지혁 곁으로 돌아온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부 다 회복한 건 아닐 테지만 아마 사라진 그 날의 기억은 고이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 수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그 사실을 강지혁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강지혁의 멘탈이 완전히 부서질까 봐.김재호는 강지혁의 말로 아주 많은 것을 파악했다.그는 강지혁의 최면에 직접 개입한 사람이기에 강제로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절벽에서의 일을 강지혁 스스로가 기억해낸 게 아니면 얘기조차 꺼내지 말라고 고이준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다 이유 때문이다.‘당부한 대로 그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나 보네.’“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으세요?”김재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임유진은 그 말에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외쳤다.“안 돼!”그녀의 외침에 강지혁과 김재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강지혁은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김재호는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제가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고 말 테니까.”“응.”두 사람은 어딘가 결연한 얼굴로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경호원 세 명과 중년남성 한 명이 있었다.임유진은 몇 초과량 흐르고 나서야 그 중년남성이 바로 김재호라는 것을 알아챘다. 5년이나 지나 있어 그런지 그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주름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전과 달리 흰머리도 나고 수염도 생겼으며 못 보던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일반 시민이었다.만약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났다면 아마 김재호인 걸 인지도 못 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김재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태연하게 미소를 띄웠다.“역시 회장님 곁으로 돌아오셨네요.”임유진은 천천히 자리에 멈춰서며 답했다.“네, 돌아왔어요.”5년이라는 시간 끝에 그녀는 드디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나가봐.”강지혁의 말에 경호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방에서 나갔다.“아이는 어디 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라면 보내드렸잖아요. 한 명은 회장님 곁으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임유진 씨 곁으로.”“내가 어떤 아이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유진이 배 속에 있었던 건 세쌍둥이였어. 우리한테 한 명씩 보냈으면 나머지 한 명 또한 당연히 있어야지.”“회장님, 세쌍둥이 중에 두 명이나 생존했는데 그거로는 만족이 안 되세요? 실제로 세쌍둥이 중에 세 명 다 태어나는 경우는 적어요.”김재호의 빈정거림에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우리 아이... 살아있는 거죠? 그렇죠?”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설령 김재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엄마로서 아이의 행방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