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충분히 좋아!”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을 끊고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핸드폰을 골랐다.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유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유진이 아니야?”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민화영과 웬 여자 하나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역시 쇼핑하러 온 듯했다.하지만 그 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유진은 그제야 다른 한 사람도 유진의 고등학교 동창 조민혜라는 걸 발견했다.“여기에서 널 다 만나다니, 우리도 참 인연이네. 이 사람이 혹시 네 남자친구야?”화영은 유진 옆에 서 있는 지혁을 위아래로 집요하게 훑어보았다.하지만 유진이 대답도 하기 전에 민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얘, 화영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진이 남자친구는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들었는데 이 꼬라지가 어딜 봐서 부잣집 도련님이야? 다 시장바닥에서 산 옷들이고만!”말하면서 눈썹을 치켜뜨는 민혜의 얼굴에는 비아냥과 경멸의 웃음이 섞여 있었다.“아참, 미안해. 네 남자친구가 새 여친 사귀었다는 거 깜빡했네. 이제 곧 약혼도 한다지? 요 며칠 소씨 가문 도련님과 진씨 가문 아가씨가 약혼하는 뉴스로 사이트가 도배됐더라고! 하긴, 역시 어울리는 건 그 두 사람이긴 하지. 그건 그렇고, 네 새 남자친구는 네가 길바닥에서 청소하는 거 알아?”“민혜야, 뭐 하러 그런 말을 해?”“내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네가 말했잖아. 얘 환경위생과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고!”자기를 막는듯한 화영의 말투에 민혜는 오히려 더 거만한 태도로 받아쳤다.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진에게 인기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대학에 가서도 유진이 민준의 여자친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민혜는 유진을 향한 질투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왜 모든 행운이 유진한테만 가는지도 민혜로서는 의문이었다.하지만 지금 민준은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고 유진은 길바닥에서 청소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른다.눈앞의 두 사람이 일부러 자기를
자존심과 체면이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조민혜는 서둘러 자기를 창피하게 한 이곳을 떠났고 옆에서 보고 있던 민화영도 서둘러 민혜와 함께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백화점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차를 부수는 장면을 본 것도 모자라 그 차가 민혜의 차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뭐지? 쟤가 누구한테 원한 산 적 있어서 보복당하는 건가?”“그러게. 그건 모르지.”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진을 보며 강지혁의 눈은 반짝거렸다.“뭐 어찌 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말을 마친 유진은 지혁을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때, 지혁의 발이 순간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봤을 때 지혁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버스 정류장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왜 그래?”“아…… 아니야.”걱정스러운 유진의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하지만…….‘방금…… 내가 잘못 봤나?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을 그 여자로 보다니. 남편과 자식을 버린 그 여자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혁아, 넌 절대 나처럼 되지 마.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네 모든 걸 바치면서까지 좋아하지는 마.”“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같잖은 거야. 상대가 너한테 마음이 떠나면 네가 무릎을 꿇어도 붙잡을 수 없어.”“혁아, 너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상에 누군가가 너의 감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고 너의 생사까지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그런 감정은 영원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누구야? 누가 자꾸 말하는 거야? 그만 말해. 여기서 떠나! 추워…… 너무 추워…… 여기 있지 마…… 더 있으면…… 얼어 죽을 거야!’“혁아, 나 갈게. 네 아빠가 말로만 날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해, 네 아빠와 함께라면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나도 이미 할 도리 다 했어!”‘이건 또 누구야? 누가 자꾸만 말하는 거야?’“가지……
“나 계속 곁에 있어. 침대랑 바닥도 솔직히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고개만 돌리면 나 볼 수 있어.”“같이 있어 줘. 응?”강지혁은 낮은 소리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 순간 자기의 눈에 갈망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윽고 나지막한 말과 함께 베개와 이불을 들고 지혁의 옆에 누웠다.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끝내고 난 유진은 그제야 자기가 남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했다. 정말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하기야, 방금 당장이라도 깨질 수 있는 도자기 인형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기가 지혁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침대에 누운 유진은 손을 뻗어 불을 껐다. 그 시각, 유진의 오른손은 이불 아래에서 남자의 손에 꼭 잡혀 있었다.“만약 또 아프면 나 꼭 불러.”“응.”지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약 때문인지 지혁은 죽도록 자기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아프기 시작하면 이렇게 빨리 나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누나는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지?”“당연하지. 우리 서로 힘이 되어주기로 했잖아. 네가 앞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도 계속 같이 있어 줄게.”아마 그때까지 유진은 계속 누나의 신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혁이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진의 목소리는 지혁을 안심시켜 줬고 아픔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결혼이라…… 진애령이 죽은 뒤 결혼은 생각도 한 적 없는데.’“그 약속 꼭 지킬 거지?”“응.”여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듣고 나서야 지혁은 한시름 놓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그리고 지혁의 곁에 누워있던 유진도 조
임유진의 몸은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매번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유진의 기억은 유진을 다시 악몽 속으로 끄집어들이곤 한다.유진도 당연히 그 6캐럿짜리 핑크 다이아에 대해 알고 있다. 뉴스에도 대문짝만한 사진까지 첨부하며 보도해 댔으니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런 기사는 읽고 싶지 않아도 핸드폰을 켜고 웹페이지를 확인할 때면 계속 맨 위에 나타난다.오래전, 유진이 민준과 쥬얼리숍을 구경할 때 그 핑크 다이아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민준은 유진에게 마음에 들면 결혼반지로 사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하지만 민준도, 그 핑크 다이아도 결국은 유진의 것이 아니게 됐다.그렇게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그때.“유진 씨, 혹시 지금 집에 가려고요?”웬 남자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30살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직업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저 사람 곽동현 씨 아닌가?’놀라기도 잠시, 유진은 이내 남자의 물음에 대답했다.“네.”“그러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저 지금 마침 시간 있거든요.”곽동현은 어렵게 용기를 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동현의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은 상대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던 미옥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는 건 지금 눈앞의 남자가 유진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괜찮아요, 제 차 있으니 유진 씨도 편할 거예요.”유진은 완곡히 거절했지만, 동현은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방현주가 먼저 끼어들었다.“흥. 그깟 차 한번 태워주는 걸로 어디 만족하겠어요? 유진 씨는 외제 차 아니면 취급 안 해요. 동현 씨도 6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사다가 바치면 아마 좋아할지도 모르죠.”동현은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
순간 임유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됐…… 됐어. 얼른 밥 먹자. 식겠다.”유진은 대뜸 손을 빼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파묻고 앞에 놓인 죽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눈에 드리운 웃음기도 더욱 짙어졌다.“그럼 나는 어때? 난 좋아해?”“당연하지.”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이에 지혁은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었다.“나도 누나 좋아. 엄청.”이렇게 그의 흥미를 자아내는 사람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도시정비국의 며칠간의 시찰이 끝나자 민화영은 유진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유진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고교 동창 모임 있는데 너도 꼭 참석해.”‘고교 동창 모임?’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유진의 상황으로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간다면 아마 비웃음만 받을 게 뻔했다.“아니야, 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어떻게 그래. 고교 동창들 어렵게 모이는 자리인데. 그리고 네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다 같이 참석하면 좋잖아.”열성을 다해 설득하는 걸 보니 화영은 유진이 동창 모임에 꼭 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학창 시절 잘 나가던 학급 공식 여신에 1등이던 유진이 이토록 초라하게 변한 걸 다른 동창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 상황만 생각하면 화영은 유진의 추한 모습을 하루빨리 동창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나 주말도 출근해야 해. 너 설마 나한테 주말이 있다고 생각해?”유진의 말에 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그래도…….”“나 쓰레기 버리러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유진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화영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유진은 환경위생과 계장으로부터 중요한 서류를 도시정비국 직원한
‘강지혁이…… 임유진을 만나려 한다고?’진세령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진 씨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령은 강지혁의 약혼녀였던 자기 언니에게도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혁이 세령의 언니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강 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적합해서라는 것도.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눈앞의 남자는 흔들림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마치 약혼녀의 죽음이 지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듯이 말이다.그 때문에 세령은 대체 이 남자가 어떤 여자 앞에서 감정 기복을 보일지 궁금했었다.그런데 지금, 세령은 그걸 보고 말았다.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세령이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이다.‘그 이유가…… 임유진 때문이라고? 저 버러지만도 못한 여자 때문에?’세령은 얼른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민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그 시각, 지혁 옆에 있던 고이준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설마 화난 건가?’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그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난 사람을 이준은 한 번도 본적 없다.하지만 이준이 직원을 부르려던 찰나, 지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아니다. 네가 직접 가서 처리해. 너무 시끄러워!”이준은 또 다시 대답하고는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순간 유진은 마치 혁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던 혁이를 떠올리자 유진은 자기 생각을 이내 부정했다. ‘아니야, 혁이는 이렇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 혁이…… 혁이…….’이윽고 머릿속에 차갑지만 꼭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혁이는 슬퍼할까?’점점 숨이 막혀와 거의 쓰러지려던 찰나, 유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힘이 풀었다. 그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며 쉴 새 없이 기침했고 공기를 탐하 듯 크게 호흡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진세령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세령 앞에 나타났다.그는 바로 강지혁의 개인 비서 고이준이었다.“고 비서님!”이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건 사람은 오히려 황 매니저였다.하지만 이준은 대답 대신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듯 신정민을 쳐다봤다.‘그러게 건드려도 왜 하필이면 대표님이 관심 가진 사람을 건드리냐고.’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른 동안 아까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준은 생각을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아까 저 사람이 한 짓을 똑같이 돌려주세요.”이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쎄 보이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바로 명령에 따라 정민을 연못가로 끌고 가 정민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정민이 유진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돌려주었다.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려고 밖으로 달려온 동창들뿐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경호원들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황 매니저는 심지어 정민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어쨌든 주주 중 한 세력인 신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강지혁이라는 대단한 인물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을뿐더러 경쟁 상대가 골탕을 먹으면 기뻐할 다른 주주들을 의식해서였다.그때,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민준과 세령을 바라봤다.그제서야 진세령은 얼른 미소를 장착한 채 이준에게로 다가갔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저희도 얼른 올라가 볼게요.”“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두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도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의 반응 따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에 세령과 민준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세령은 이내 위험한 눈빛을 한 채 이를 갈았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임유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임유진, 너 절대 가만 안 둬
임유진은 자기의 오른손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사실 조민혜한테 밟혀서 난 상처다.하지만 혁이를 걱정하게 할 수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오늘 청소하면서 실수로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그래?”강지혁은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혹시 누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제대로 혼쭐 내줄게.”‘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이 모든 사실을 훤히 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 혼자서도 보호할 수 있어.”“만약 보호할 수 없다면?”‘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마 너한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유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혹시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싫어?”지혁의 검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유진을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유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며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가 강해지면 그때 나 보호해 줘. 지금은 내가 너 보호해 줄게.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살짝 찢어진 옷을 벗어 바느실로 꿰매기 시작했다.그리고 지혁은 그 옆에 앉아 어두운 불빛에 감싸진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동작 때문에 유진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축 늘어졌는데 영양실조로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유진의 피부는 맑아 보이지 않았고 수려한 얼굴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듯한 무기력함이 있었다.하지만 꼼꼼히 바느질하며 내뿜고 있는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