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계속 곁에 있어. 침대랑 바닥도 솔직히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고개만 돌리면 나 볼 수 있어.”“같이 있어 줘. 응?”강지혁은 낮은 소리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 순간 자기의 눈에 갈망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윽고 나지막한 말과 함께 베개와 이불을 들고 지혁의 옆에 누웠다.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끝내고 난 유진은 그제야 자기가 남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했다. 정말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하기야, 방금 당장이라도 깨질 수 있는 도자기 인형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기가 지혁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침대에 누운 유진은 손을 뻗어 불을 껐다. 그 시각, 유진의 오른손은 이불 아래에서 남자의 손에 꼭 잡혀 있었다.“만약 또 아프면 나 꼭 불러.”“응.”지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약 때문인지 지혁은 죽도록 자기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아프기 시작하면 이렇게 빨리 나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누나는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지?”“당연하지. 우리 서로 힘이 되어주기로 했잖아. 네가 앞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도 계속 같이 있어 줄게.”아마 그때까지 유진은 계속 누나의 신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혁이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진의 목소리는 지혁을 안심시켜 줬고 아픔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결혼이라…… 진애령이 죽은 뒤 결혼은 생각도 한 적 없는데.’“그 약속 꼭 지킬 거지?”“응.”여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듣고 나서야 지혁은 한시름 놓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그리고 지혁의 곁에 누워있던 유진도 조
임유진의 몸은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매번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유진의 기억은 유진을 다시 악몽 속으로 끄집어들이곤 한다.유진도 당연히 그 6캐럿짜리 핑크 다이아에 대해 알고 있다. 뉴스에도 대문짝만한 사진까지 첨부하며 보도해 댔으니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런 기사는 읽고 싶지 않아도 핸드폰을 켜고 웹페이지를 확인할 때면 계속 맨 위에 나타난다.오래전, 유진이 민준과 쥬얼리숍을 구경할 때 그 핑크 다이아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민준은 유진에게 마음에 들면 결혼반지로 사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하지만 민준도, 그 핑크 다이아도 결국은 유진의 것이 아니게 됐다.그렇게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그때.“유진 씨, 혹시 지금 집에 가려고요?”웬 남자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30살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직업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저 사람 곽동현 씨 아닌가?’놀라기도 잠시, 유진은 이내 남자의 물음에 대답했다.“네.”“그러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저 지금 마침 시간 있거든요.”곽동현은 어렵게 용기를 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동현의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은 상대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던 미옥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는 건 지금 눈앞의 남자가 유진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괜찮아요, 제 차 있으니 유진 씨도 편할 거예요.”유진은 완곡히 거절했지만, 동현은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방현주가 먼저 끼어들었다.“흥. 그깟 차 한번 태워주는 걸로 어디 만족하겠어요? 유진 씨는 외제 차 아니면 취급 안 해요. 동현 씨도 6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사다가 바치면 아마 좋아할지도 모르죠.”동현은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
순간 임유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됐…… 됐어. 얼른 밥 먹자. 식겠다.”유진은 대뜸 손을 빼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파묻고 앞에 놓인 죽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눈에 드리운 웃음기도 더욱 짙어졌다.“그럼 나는 어때? 난 좋아해?”“당연하지.”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이에 지혁은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었다.“나도 누나 좋아. 엄청.”이렇게 그의 흥미를 자아내는 사람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도시정비국의 며칠간의 시찰이 끝나자 민화영은 유진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유진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고교 동창 모임 있는데 너도 꼭 참석해.”‘고교 동창 모임?’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유진의 상황으로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간다면 아마 비웃음만 받을 게 뻔했다.“아니야, 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어떻게 그래. 고교 동창들 어렵게 모이는 자리인데. 그리고 네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다 같이 참석하면 좋잖아.”열성을 다해 설득하는 걸 보니 화영은 유진이 동창 모임에 꼭 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학창 시절 잘 나가던 학급 공식 여신에 1등이던 유진이 이토록 초라하게 변한 걸 다른 동창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 상황만 생각하면 화영은 유진의 추한 모습을 하루빨리 동창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나 주말도 출근해야 해. 너 설마 나한테 주말이 있다고 생각해?”유진의 말에 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그래도…….”“나 쓰레기 버리러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유진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화영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유진은 환경위생과 계장으로부터 중요한 서류를 도시정비국 직원한
‘강지혁이…… 임유진을 만나려 한다고?’진세령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진 씨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령은 강지혁의 약혼녀였던 자기 언니에게도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혁이 세령의 언니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강 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적합해서라는 것도.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눈앞의 남자는 흔들림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마치 약혼녀의 죽음이 지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듯이 말이다.그 때문에 세령은 대체 이 남자가 어떤 여자 앞에서 감정 기복을 보일지 궁금했었다.그런데 지금, 세령은 그걸 보고 말았다.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세령이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이다.‘그 이유가…… 임유진 때문이라고? 저 버러지만도 못한 여자 때문에?’세령은 얼른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민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그 시각, 지혁 옆에 있던 고이준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설마 화난 건가?’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그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난 사람을 이준은 한 번도 본적 없다.하지만 이준이 직원을 부르려던 찰나, 지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아니다. 네가 직접 가서 처리해. 너무 시끄러워!”이준은 또 다시 대답하고는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순간 유진은 마치 혁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던 혁이를 떠올리자 유진은 자기 생각을 이내 부정했다. ‘아니야, 혁이는 이렇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 혁이…… 혁이…….’이윽고 머릿속에 차갑지만 꼭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혁이는 슬퍼할까?’점점 숨이 막혀와 거의 쓰러지려던 찰나, 유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힘이 풀었다. 그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며 쉴 새 없이 기침했고 공기를 탐하 듯 크게 호흡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진세령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세령 앞에 나타났다.그는 바로 강지혁의 개인 비서 고이준이었다.“고 비서님!”이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건 사람은 오히려 황 매니저였다.하지만 이준은 대답 대신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듯 신정민을 쳐다봤다.‘그러게 건드려도 왜 하필이면 대표님이 관심 가진 사람을 건드리냐고.’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른 동안 아까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준은 생각을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아까 저 사람이 한 짓을 똑같이 돌려주세요.”이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쎄 보이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바로 명령에 따라 정민을 연못가로 끌고 가 정민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정민이 유진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돌려주었다.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려고 밖으로 달려온 동창들뿐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경호원들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황 매니저는 심지어 정민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어쨌든 주주 중 한 세력인 신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강지혁이라는 대단한 인물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을뿐더러 경쟁 상대가 골탕을 먹으면 기뻐할 다른 주주들을 의식해서였다.그때,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민준과 세령을 바라봤다.그제서야 진세령은 얼른 미소를 장착한 채 이준에게로 다가갔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저희도 얼른 올라가 볼게요.”“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두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도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의 반응 따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에 세령과 민준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세령은 이내 위험한 눈빛을 한 채 이를 갈았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임유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임유진, 너 절대 가만 안 둬
임유진은 자기의 오른손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사실 조민혜한테 밟혀서 난 상처다.하지만 혁이를 걱정하게 할 수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오늘 청소하면서 실수로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그래?”강지혁은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혹시 누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제대로 혼쭐 내줄게.”‘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이 모든 사실을 훤히 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 혼자서도 보호할 수 있어.”“만약 보호할 수 없다면?”‘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마 너한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유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혹시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싫어?”지혁의 검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유진을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유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며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가 강해지면 그때 나 보호해 줘. 지금은 내가 너 보호해 줄게.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살짝 찢어진 옷을 벗어 바느실로 꿰매기 시작했다.그리고 지혁은 그 옆에 앉아 어두운 불빛에 감싸진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동작 때문에 유진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축 늘어졌는데 영양실조로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유진의 피부는 맑아 보이지 않았고 수려한 얼굴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듯한 무기력함이 있었다.하지만 꼼꼼히 바느질하며 내뿜고 있는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솔
“누나가 좋다면 난 다 좋아.”“내가 좋아하는 거 고르지 말고 네가 좋아해야지. 네가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른 스타일로 찾아줄게.”“그럴 필요 없어. 이게 좋아.”“그래, 그러면 이거로 구매한다?”임유진은 말하면서 벌써 구매하기 시작했다.그런 유진을 보고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물었다.“누나,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옷에, 핸드폰에 모두 그를 위해 사주면서 자기는 아껴 쓰고 있으니 말이다.“네가 내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혁은 그 '동생'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리게만 들렸다. 정말 그가 남자라는 걸 잊은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신정민은 클럽에서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기고 집에 돌아간 뒤 아버지한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GH 그룹과 관련된 정민의 집안 모든 사업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건 사업을 하는 정민의 집안에 그야말로 큰 손실이었다.그 외에도 그날 동창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 역시 직장을 잃거나 가문이 휘말려 각자 고통을 호소했다.그 중 당연히 민화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영은 인사팀에서 나오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팀에서 계약 해지 서류를 화영에게 주면서 해고 의사를 밝혔고 화영더러 일주일 내로 퇴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해고라니! 화영은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화영이 도시정비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기저기 인맥을 통해 공무직으로 들어간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화영의 맞선 상대도, 또 그전에 만났던 상대도 모두 화영의 직업을 높이 샀기에 화영을 우러러 본거다.그런데 만약 이대로 해고된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어려울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도 깎이고 더욱 맞선 상대도 화영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화영이 해고 사유를 물었을 때 인사팀에서는 그저 상부
조민혜의 태도에 민화영은 화가 거꾸로 솟았다. 인사팀에 화영과 친분이 있던 동료가 화영에게 몰래 알려주길, 이번 해고는 화영이 권력을 남용하여 환경위생과 직원을 마음대로 지시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그 일이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유진더러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킨 일뿐인데, 그 일을 계획한 주모자는 민혜다.“내가 너 협박이라도 했어? 너도 임유진이 당하는 꼴 보고 싶었으니까 한 거잖아. 난 그저 너한테 아이디어만 제공한 거야, 네가 그런 일 벌인 건 나랑 무관하다고.”민혜는 즉시 화영에게 선을 그었다.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화영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싸움으로 번졌다.그렇게 민혜와 관계를 끊은 뒤, 화영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딸이라고 화영의 부모님은 여기저기 인맥을 찾아 일을 해결하려고 뇌물을 돌렸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누구도 그 뇌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 데다 받았다 할지라도 이틀도 안 돼서 다시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거였다.그렇게 의미 없는 행위가 지속되다가 결국 화영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지인이 몰래 그들에게 언질을 주었다.“이봐, 자네 딸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건가? 듣자하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던데. 도시정비국 국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 딸 앞으로 공무직은 더 이상 찾지 못할 것 같다더라고, 그것뿐인가? 일반 직장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그 말을 들은 화영의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해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딸에게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을 건드린 거냐고 따져 물었다.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니? 화영은 오히려 멍해졌다. 평소 일하던 도시정비국에서도 높은 분들은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던 그때 화영은 갑자기 동창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 날 막바지에 유진을 도와줬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다.‘그렇다면…… 임유진의 배후가 강지혁이란 말인가?’하지만 화영은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유진은 지혁의 약혼녀였던 진애령을 죽인 가해자이기에 절대 그럴 리 없었기 때문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준다며. 네가 그때 그랬잖아... 내가 울면, 이경빈처럼 펑펑 울면 용서 준다고 했잖아. 유진아,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평생 울면서 사죄할게. 진심으로 내가 한 짓을 뉘우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한 번만 용서해줘...”강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아래로 쏟아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리고 또 그로 인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강지혁의 눈물을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강지혁의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와 이내 임유진의 손을 뜨겁게 데웠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한쪽 손을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막상 그의 눈물 젖은 볼과 닿으려는 순간 일전 느꼈던 울렁거림이 밀려왔다.그녀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강지혁을 밀친 다음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변기를 붙잡고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입덧 시기가 지난 후 한 번도 속이 울렁거리거나 토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 참지 못할 정도로 위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유진아! 너 괜찮아?!”강지혁은 임유진이 토하는 모습에 순간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아 얼른 화장실로 달려와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하지만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임유진의 상태는 더 심해졌고 토도 더 세게 하기 시작했다.“나한테... 나한테 손대지 마.”임유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강지혁의 팔을 잡아 멀리 뿌리쳤다.그렇게 10초 정도 지났을까, 역시 강지혁의 손길이 문제였던지 임유진은 천천히 토를 멈추고 진정하기 시작했다.임유진은 티슈로 입가를 정리한 후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는 강지혁을 향한 배신감과 원망의 감정이 들어있었다.임유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그녀가 뭔가를 얘기하려던 그때, 강지혁은 마치 본능적으로 뭔가를 알아차린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안 돼... 말하지 마!’하지만 그의 간절한
“아니. 진세령은 처음부터 유진이 널 살인범으로 몰아가려고 했어...”강지혁이 말했다.“진세령은 당시 소민준의 여자친구였던 널 눈엣가시로 여겼으니까. 그래서 진애령을 제거하는 차에 너까지...”임유진은 순간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 들었다.진세령은 처음부터 자신의 계획안에 그녀를 넣었다.임유진은 우연히 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아니라 진세령의 철저한 계획 속에 살인범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억울함을 가득 안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는 이불을 말아쥔 손에 힘을 가했다.진실이란 늘 그렇듯 이렇게 잔혹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잔혹한 진실이 아직 하나 더 남았다.임유진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꽉 깨물다 한참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네가 날 도와 사건을 뒤집어 준 건 단지 내가 진실을 파헤치지 않았으면 해서였어. 그래서 일부러 빠르게 허재명을 내 눈앞에 대령해 허재명이 말한 게 모두 진실이라고 내가 생각하게끔 만든 거야. 맞아?”강지혁은 살짝 휘청거리더니 천천히 임유진 곁으로 다가갔다.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임유진의 손아귀 힘은 점점 더 세졌다.강지혁은 병상 가까이 다가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그때는 그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사건을 빨리 종결시킬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그는 그녀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이렇게도 많이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지혁은 요 며칠 입만 열었다 하면 미안해라는 말을 입가에 달고 살았고 그건 그녀가 깨어있을 때도 그러했고 그녀가 깊이 잘 때도 그러했다.“왜 날 속였어?”임유진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차라리 사건을 뒤집어주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왜 날 속였어? 왜 내가 허재명이 진범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왜 진세령을 감싸줬어?! 대답해!”그녀의 추궁은 마치 차가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미안해... 미안해...”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든 채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곱씹으며 쓰게 웃었다.차라리 이 모든 게 다 오해라면 얼마나 좋을까.강지혁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애령을 죽인 게 그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아무런 거래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날 밤, 임유진이 잠든 후 강지혁은 평소처럼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매일 밤 같은 시간, 그는 이때야 비로소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아마 임유진은 모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또 소중한지.오늘도 강지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녀의 볼과 손바닥이 닿으려는 순간 임유진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임유진과 두 눈이 마주친 강지혁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손을 거두어들이고 뒷걸음질 치더니 병실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임유진은 아직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아무리 그가 종일 병실 밖을 지켜도 그녀는 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고 퇴원이 예정돼 있던 날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원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했으니까.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그와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될 테니 그게 싫어서일 것이다.강지혁이 서둘러 병실 문을 열어젖히려던 그때 임유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잠깐만.”강지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혹시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에 헛걸 들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그래서 그녀의 말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강지혁, 나랑 얘기 좀 해.”임유진이 말했다.탁유미의 말대로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든 얘기를 해봐야만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은 그를 ‘혁이’가 아닌 ‘강지혁’으로 불렀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뒤에는 항상 다정하게 애칭으로 불러줬는데 지금은 마치 낯선 이를 부르듯 딱딱하게 불렀다.“그래.”강지혁은 천천히 돌아
강지혁은 그 사건의 진상이 그런 방식으로 임유진에게 들킬 줄도 몰랐고 그로 인해 임유진이 하마터면 아이를 잃게 될 줄도 몰랐다.만약 임유진이나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으면 아마 그는 평생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강지혁은 병상 옆으로 다가가 달빛을 빌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살짝 부어있었고 볼은 여전히 창백했다.임유진은 잠을 자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지키려는 듯 두 손을 복부에 딱 붙이고 있었다.그녀가 얼마나 아이들을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하긴 이렇게도 필사적이니 목숨을 걸고 세 명 모두 지키려고 했겠지.“미안해... 유진아, 내가 잘못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싹 잠겨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유약했다.“그때 일은 변명할 것도 없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너를 사지로 몰아갔어... 그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네가 망가지는 걸 그대로 지켜만 봤어... 정말 미안해...”당시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이해관계의 일환일 뿐이었다.사실 진씨 가문에서는 진범이 누군지 그에게 말을 해준 적은 없다. 그저 강지혁이 자료를 조사하다가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다.하지만 진세령이 범인인 걸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애초에 진애령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진씨 가문의 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으니까.강지혁에게 있어 그 사건은 그저 약혼녀가 죽은 사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약혼녀라는 건 어차피 다시 찾으면 그만일 테니까.당시 그에게는 그런 사사로운 사건보다는 회사를 더 크게 만드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익 관계를 최우선으로 뒀다.하지만 임유진을 사랑하게 된 지금 당시의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그의 방관으로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됐고 물리적인 고통도 받았다.미안하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녀가 받은 상처를 보상해줄 수는 없었다.강지혁은 두 손을 들어
임유진에게는 저택에서 들었던 얘기들이 지금도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꼭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난도질당한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하지만 그녀는 홑몸이 아니고 배 속의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이기에 마음대로 아파할 수도 없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들고 메일함으로 들어갔다.강현수가 보낸 메일... 이걸 강현수에게 보낸 사람은 강문철이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강문철이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럼... 우리 내기할까? 아가씨가 정말... 지혁이를 사랑하는지...”강문철은 아마 그때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강지혁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물론 눈을 감기 직전까지 끝끝내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대신 진실을 알릴 선택권을 강현수에게 넘겨주었다.하지만 저택에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강현수의 말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그녀는 영원히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른다. 강현수까지 입을 닫게 되면 그녀에게 진실을 얘기해줄 사람은 영원히 없을 테니까.만약 강현수가 오늘 강지혁에게 그 진실을 늘어놓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평생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대신 자신을 해한 게 누군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트린 사람이 누군지, 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평생 모르고 살게 됐을 것이다.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현명한 건지 아니면 모든 걸 다 깨닫고 사는 게 현명한 건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누구도 줄 수 없다.사람마다 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하지만 임유진은 평생 고통받더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는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보낸 메일로 들어가 내용을 훑어보았다.자료에는 당시 사건의 모든 파일과 진세령이 진범이라는 증거들이 아주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진애령의 사고는 진세령이 꾸민 일이 맞고 허재명은 그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에 불과했다. 그리고 진기태는 사고가 있고 난 뒤 곧바로 모든 걸 알고 있는 허재명을 해외로 보내
이에 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유진 씨를 정말 사랑한다면, 유진 씨를 정말 아껴주고 싶다면 유진 씨한테 상처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줘요.”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아주 작게 말을 내뱉었다.“이 세상에서 유진이가 아주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일 겁니다.”...강현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환자복을 입은 채 반쯤 누워있는 임유진의 모습이 보였다.“미안해...”강현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그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가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그는 메일로 전해 받은 진실을 가능하면 끝까지 마음속에 묻어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진세령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참으로 야속하게도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고 최악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진실을 전하게 되었다.마치 그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녀가 가장 필요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녀를 믿지 못했던 그때처럼 말이다.그녀가 강지혁을 선택하게 만든 건 결국 그였다. 그가 두 손으로 직접 그녀를 강지혁의 곁으로 밀어버렸다.“현수 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죠.”임유진이 말했다.“익명으로 받았다던 그 메일, 나한테도 보여줄래요? 내 메일로 그대로 보내줘요.”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메일을 보려고?”“네. 안 될까요?”임유진이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안될 건 없지만 너 지금 몸이...”“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요. 갑자기 흥분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임유진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그 사건의 진실을 보고 싶었다.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먼저 알았어야 하는 일이니까. 또한 진애령이 죽은 지금 당사자는 이제 그녀밖에 없으니까.강현수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
여기서 또다시 정서가 불안정해지면 그때는 아이들이 위험해질 테니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서 그녀가 더 이상 이 화제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사소한 일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뭐가 됐든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내가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진 씨 얘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니까요.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는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더 낫다고들 하잖아요.”“네, 고마워요.”“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죠. 유진 씨가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임유진은 탁유미가 억울하게 당했을 때 그녀를 위해 가장 먼저 증거를 찾아주고 몇 년 전의 사건도 적극적으로 파헤치며 그녀를 도왔다.만약 임유진이 아니었으면 이경빈에게 간이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멀쩡하게 얘기를 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탁유미는 임유진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는 듯 일부러 재밌는 얘깃거리를 꺼냈다.그렇게 얼마간 대화를 한 후 임유진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언니, 이만 병실로 돌아가요.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다시는 아이들을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탁유미는 정말 괜찮다는 듯한 임유진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됐다.“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볼게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밤늦게라도 괜찮아요.”탁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가려던 그때 임유진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언니, 밖에... 강현수 씨도 있었다고 했죠?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안으로 좀 불러줄래요?”그 말에 탁유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알겠다며 병실 문을 열었다.병실 문이 열리자 밖에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이 일제히 탁유미에게로 꽂혔다. 그리고 마치 짠 것처럼 동시에 물었다.“유진이는 좀 어때요?”초조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두 시선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했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S 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두 남자가 한 여자 때문에
30분 정도가 흐른 후 의사들이 밖으로 나왔다.“태아 상태는 양호합니다.”“유진이는요? 유진이는... 괜찮습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네, 불안정한 정서 때문에 조금 위험할 뻔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괜찮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마세요. 만약 지금 상태에서 더한 자극을 받게 되면 그때는 아이들이 35주도 채 채우지 못하고 나와야 할 테니까요.”일전의 정기검진으로 의사는 35주가 됐을 때 제왕 절개로 아이를 낳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오늘 이런 일이 생겨버렸고 만약 이대로 임유진의 정서가 더 격해지면 그때는 35주가 다 되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할 수도 있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각종 장기가 채 발육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살았다고 해도 질병 같은 걸 지니게 될 수 있다.“알겠습니다.”강지혁이 답했다.하지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왜 하필 이렇게 중요한 때에 진실을 들켜버린 걸까. 대체 왜!강지혁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현수가 그의 팔을 덥석 잡으며 막았다.“안으로 들어가려고? 유진이가 정신을 차린 뒤에 네 얼굴을 보면 또다시 흥분하지 않겠어?”그 말에 강지혁의 표정이 변하더니 강현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유진이는 내 아내야!”“그래서? 유진이가 네 아내든 아니든 나는 유진이가 상처받는 꼴 못 봐.”강현수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너 때문에 이미 한번 쓰러졌는데 너는 이 상황에서 또다시 유진이를 자극하고 싶어?”강지혁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반박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임유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VIP 병실로 옮겨진 뒤였다.그리고 그녀의 병실에는 탁유미가 와 있었다.“유미 언니...?”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계단에서 혁이랑 강현수가 대화하던 장면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뒤로...’임유진의 머릿속으로 두 사람
강지혁은 아무 말도 없다가 임유진의 두 눈과 마주치고서야 드디어 ‘응’이라는 한마디를 꺼냈다.“다 알고 있었으면서 진씨 가문과의 거래 때문에 침묵을 택한 거야? 그래?”임유진이 계속해서 물었다.강지혁의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아프게 도려냈다. 이미 피가 흥건해졌는데도 칼끝은 멈출 줄을 몰랐다.너무나도 아팠다.하지만 이 고통은 그가 받아야만 하는 고통이었다. 그에게는 변명할 자격조차 없었다.“내가 묻잖아. 대답해.”임유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표정도 조금 흥분해 있었다.“...맞아. 하지만 유진아, 나는 그때...”“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고작 이익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감방에 가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할 수가 있어? 너 그때 알고 있었잖아. 진세령이, 걔네 가족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었잖아!”강지혁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침묵을 택했다.임유진은 줄곧 강지혁이 매정했던 것이 전부 다 그녀를 진범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랑이 없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약혼녀이기에, 그래서 죗값을 치르게 한 줄 알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만큼 우스운 착각이 또 없었다.강지혁은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인 게 아니라는 것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단 일말의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았다.“미안해... 유진아, 내가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사과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그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미안하다고? 하... 너희 같은 사람한테는 한 사람 인생을 망친 게 고작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구나... 나 그때 하마터면 감옥에서 죽을 뻔했어. 손톱이 뽑히고 발에 치이면서...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그런데 네가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