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계속 곁에 있어. 침대랑 바닥도 솔직히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고개만 돌리면 나 볼 수 있어.”“같이 있어 줘. 응?”강지혁은 낮은 소리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 순간 자기의 눈에 갈망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윽고 나지막한 말과 함께 베개와 이불을 들고 지혁의 옆에 누웠다.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끝내고 난 유진은 그제야 자기가 남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했다. 정말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하기야, 방금 당장이라도 깨질 수 있는 도자기 인형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기가 지혁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침대에 누운 유진은 손을 뻗어 불을 껐다. 그 시각, 유진의 오른손은 이불 아래에서 남자의 손에 꼭 잡혀 있었다.“만약 또 아프면 나 꼭 불러.”“응.”지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약 때문인지 지혁은 죽도록 자기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아프기 시작하면 이렇게 빨리 나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누나는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지?”“당연하지. 우리 서로 힘이 되어주기로 했잖아. 네가 앞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도 계속 같이 있어 줄게.”아마 그때까지 유진은 계속 누나의 신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혁이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진의 목소리는 지혁을 안심시켜 줬고 아픔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결혼이라…… 진애령이 죽은 뒤 결혼은 생각도 한 적 없는데.’“그 약속 꼭 지킬 거지?”“응.”여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듣고 나서야 지혁은 한시름 놓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그리고 지혁의 곁에 누워있던 유진도 조
임유진의 몸은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매번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유진의 기억은 유진을 다시 악몽 속으로 끄집어들이곤 한다.유진도 당연히 그 6캐럿짜리 핑크 다이아에 대해 알고 있다. 뉴스에도 대문짝만한 사진까지 첨부하며 보도해 댔으니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런 기사는 읽고 싶지 않아도 핸드폰을 켜고 웹페이지를 확인할 때면 계속 맨 위에 나타난다.오래전, 유진이 민준과 쥬얼리숍을 구경할 때 그 핑크 다이아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민준은 유진에게 마음에 들면 결혼반지로 사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하지만 민준도, 그 핑크 다이아도 결국은 유진의 것이 아니게 됐다.그렇게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그때.“유진 씨, 혹시 지금 집에 가려고요?”웬 남자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30살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직업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저 사람 곽동현 씨 아닌가?’놀라기도 잠시, 유진은 이내 남자의 물음에 대답했다.“네.”“그러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저 지금 마침 시간 있거든요.”곽동현은 어렵게 용기를 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동현의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은 상대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던 미옥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는 건 지금 눈앞의 남자가 유진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괜찮아요, 제 차 있으니 유진 씨도 편할 거예요.”유진은 완곡히 거절했지만, 동현은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방현주가 먼저 끼어들었다.“흥. 그깟 차 한번 태워주는 걸로 어디 만족하겠어요? 유진 씨는 외제 차 아니면 취급 안 해요. 동현 씨도 6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사다가 바치면 아마 좋아할지도 모르죠.”동현은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
순간 임유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됐…… 됐어. 얼른 밥 먹자. 식겠다.”유진은 대뜸 손을 빼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파묻고 앞에 놓인 죽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눈에 드리운 웃음기도 더욱 짙어졌다.“그럼 나는 어때? 난 좋아해?”“당연하지.”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이에 지혁은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었다.“나도 누나 좋아. 엄청.”이렇게 그의 흥미를 자아내는 사람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도시정비국의 며칠간의 시찰이 끝나자 민화영은 유진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유진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고교 동창 모임 있는데 너도 꼭 참석해.”‘고교 동창 모임?’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유진의 상황으로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간다면 아마 비웃음만 받을 게 뻔했다.“아니야, 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어떻게 그래. 고교 동창들 어렵게 모이는 자리인데. 그리고 네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다 같이 참석하면 좋잖아.”열성을 다해 설득하는 걸 보니 화영은 유진이 동창 모임에 꼭 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학창 시절 잘 나가던 학급 공식 여신에 1등이던 유진이 이토록 초라하게 변한 걸 다른 동창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 상황만 생각하면 화영은 유진의 추한 모습을 하루빨리 동창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나 주말도 출근해야 해. 너 설마 나한테 주말이 있다고 생각해?”유진의 말에 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그래도…….”“나 쓰레기 버리러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유진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화영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유진은 환경위생과 계장으로부터 중요한 서류를 도시정비국 직원한
‘강지혁이…… 임유진을 만나려 한다고?’진세령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진 씨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령은 강지혁의 약혼녀였던 자기 언니에게도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혁이 세령의 언니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강 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적합해서라는 것도.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눈앞의 남자는 흔들림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마치 약혼녀의 죽음이 지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듯이 말이다.그 때문에 세령은 대체 이 남자가 어떤 여자 앞에서 감정 기복을 보일지 궁금했었다.그런데 지금, 세령은 그걸 보고 말았다.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세령이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이다.‘그 이유가…… 임유진 때문이라고? 저 버러지만도 못한 여자 때문에?’세령은 얼른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민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그 시각, 지혁 옆에 있던 고이준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설마 화난 건가?’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그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난 사람을 이준은 한 번도 본적 없다.하지만 이준이 직원을 부르려던 찰나, 지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아니다. 네가 직접 가서 처리해. 너무 시끄러워!”이준은 또 다시 대답하고는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순간 유진은 마치 혁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던 혁이를 떠올리자 유진은 자기 생각을 이내 부정했다. ‘아니야, 혁이는 이렇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 혁이…… 혁이…….’이윽고 머릿속에 차갑지만 꼭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혁이는 슬퍼할까?’점점 숨이 막혀와 거의 쓰러지려던 찰나, 유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힘이 풀었다. 그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며 쉴 새 없이 기침했고 공기를 탐하 듯 크게 호흡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진세령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세령 앞에 나타났다.그는 바로 강지혁의 개인 비서 고이준이었다.“고 비서님!”이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건 사람은 오히려 황 매니저였다.하지만 이준은 대답 대신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듯 신정민을 쳐다봤다.‘그러게 건드려도 왜 하필이면 대표님이 관심 가진 사람을 건드리냐고.’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른 동안 아까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준은 생각을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아까 저 사람이 한 짓을 똑같이 돌려주세요.”이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쎄 보이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바로 명령에 따라 정민을 연못가로 끌고 가 정민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정민이 유진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돌려주었다.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려고 밖으로 달려온 동창들뿐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경호원들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황 매니저는 심지어 정민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어쨌든 주주 중 한 세력인 신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강지혁이라는 대단한 인물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을뿐더러 경쟁 상대가 골탕을 먹으면 기뻐할 다른 주주들을 의식해서였다.그때,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민준과 세령을 바라봤다.그제서야 진세령은 얼른 미소를 장착한 채 이준에게로 다가갔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저희도 얼른 올라가 볼게요.”“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두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도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의 반응 따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에 세령과 민준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세령은 이내 위험한 눈빛을 한 채 이를 갈았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임유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임유진, 너 절대 가만 안 둬
임유진은 자기의 오른손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사실 조민혜한테 밟혀서 난 상처다.하지만 혁이를 걱정하게 할 수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오늘 청소하면서 실수로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그래?”강지혁은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혹시 누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제대로 혼쭐 내줄게.”‘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이 모든 사실을 훤히 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 혼자서도 보호할 수 있어.”“만약 보호할 수 없다면?”‘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마 너한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유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혹시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싫어?”지혁의 검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유진을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유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며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가 강해지면 그때 나 보호해 줘. 지금은 내가 너 보호해 줄게.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살짝 찢어진 옷을 벗어 바느실로 꿰매기 시작했다.그리고 지혁은 그 옆에 앉아 어두운 불빛에 감싸진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동작 때문에 유진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축 늘어졌는데 영양실조로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유진의 피부는 맑아 보이지 않았고 수려한 얼굴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듯한 무기력함이 있었다.하지만 꼼꼼히 바느질하며 내뿜고 있는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솔
“누나가 좋다면 난 다 좋아.”“내가 좋아하는 거 고르지 말고 네가 좋아해야지. 네가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른 스타일로 찾아줄게.”“그럴 필요 없어. 이게 좋아.”“그래, 그러면 이거로 구매한다?”임유진은 말하면서 벌써 구매하기 시작했다.그런 유진을 보고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물었다.“누나,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옷에, 핸드폰에 모두 그를 위해 사주면서 자기는 아껴 쓰고 있으니 말이다.“네가 내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혁은 그 '동생'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리게만 들렸다. 정말 그가 남자라는 걸 잊은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신정민은 클럽에서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기고 집에 돌아간 뒤 아버지한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GH 그룹과 관련된 정민의 집안 모든 사업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건 사업을 하는 정민의 집안에 그야말로 큰 손실이었다.그 외에도 그날 동창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 역시 직장을 잃거나 가문이 휘말려 각자 고통을 호소했다.그 중 당연히 민화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영은 인사팀에서 나오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팀에서 계약 해지 서류를 화영에게 주면서 해고 의사를 밝혔고 화영더러 일주일 내로 퇴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해고라니! 화영은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화영이 도시정비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기저기 인맥을 통해 공무직으로 들어간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화영의 맞선 상대도, 또 그전에 만났던 상대도 모두 화영의 직업을 높이 샀기에 화영을 우러러 본거다.그런데 만약 이대로 해고된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어려울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도 깎이고 더욱 맞선 상대도 화영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화영이 해고 사유를 물었을 때 인사팀에서는 그저 상부
조민혜의 태도에 민화영은 화가 거꾸로 솟았다. 인사팀에 화영과 친분이 있던 동료가 화영에게 몰래 알려주길, 이번 해고는 화영이 권력을 남용하여 환경위생과 직원을 마음대로 지시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그 일이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유진더러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킨 일뿐인데, 그 일을 계획한 주모자는 민혜다.“내가 너 협박이라도 했어? 너도 임유진이 당하는 꼴 보고 싶었으니까 한 거잖아. 난 그저 너한테 아이디어만 제공한 거야, 네가 그런 일 벌인 건 나랑 무관하다고.”민혜는 즉시 화영에게 선을 그었다.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화영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싸움으로 번졌다.그렇게 민혜와 관계를 끊은 뒤, 화영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딸이라고 화영의 부모님은 여기저기 인맥을 찾아 일을 해결하려고 뇌물을 돌렸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누구도 그 뇌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 데다 받았다 할지라도 이틀도 안 돼서 다시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거였다.그렇게 의미 없는 행위가 지속되다가 결국 화영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지인이 몰래 그들에게 언질을 주었다.“이봐, 자네 딸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건가? 듣자하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던데. 도시정비국 국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 딸 앞으로 공무직은 더 이상 찾지 못할 것 같다더라고, 그것뿐인가? 일반 직장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그 말을 들은 화영의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해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딸에게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을 건드린 거냐고 따져 물었다.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니? 화영은 오히려 멍해졌다. 평소 일하던 도시정비국에서도 높은 분들은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던 그때 화영은 갑자기 동창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 날 막바지에 유진을 도와줬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다.‘그렇다면…… 임유진의 배후가 강지혁이란 말인가?’하지만 화영은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유진은 지혁의 약혼녀였던 진애령을 죽인 가해자이기에 절대 그럴 리 없었기 때문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임유진은 볼 때마다 그의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연예인 중에도 내로라하는 잘생긴 얼굴들이 많은데 왜 그 사람들에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팬들이 세상을 구한 얼굴이라고 자기 아이돌을 치켜세워도 잠깐 동조만 할 뿐이지 그 뒤로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하지만 강지혁의 얼굴은 아무리 많이 봐도 질리지 않는다.“좋은 아침. 생일 축하해, 혁아.”임유진의 아침 인사에 강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좋은 아침.”“오늘은 출근 안 하는 거지?”“응, 안 해.”강지혁이 옷장에서 옷을 꺼내며 입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항상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야 만다.부부가 된 지도 이제 한 달이 다 되고 이제는 볼 것도 다 본 사이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강지혁이 옷을 갈아입을 때면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녀가 그럴 때면 일부러 더 보라는 듯 옷을 느긋하게 갈아입고는 한다.“혁아, 우리 아이들 말이야. 누구를 더 닮게 될까? 아무래도 너를 더 닮게 되겠지?”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은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미소를 지었다.“왜? 나를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어?”“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너 닮았으면 좋겠어. 만약 아들이 나오면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는 아이가 될 테고 딸이 나오면 남자들이 우리 딸 차지하겠다고 엄청 많이 싸워댈 거야. 분명해.”“나는 반대로 아이들이 너 닮았으면 좋겠어. 아들이고 딸이고 다 너를 닮는 게 좋아.”“나?”임유진은 그 말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닮으면 억울하지 않겠어? 네 예쁜 얼굴을 하나도 남기지 못하게 되는데?”“내가 예뻐?”강지혁이 침대 곁으로 다가와 두 손을 임유진의 곁에 두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나한테는 네가 제일 예뻐.”펑.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자기보다 예쁜 남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다음 주 주말이요...?”탁유미가 멈칫하며 말끝을 흐렸다.“왜요? 그날 무슨 일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다음 주 주말에 이경빈이랑 같이 윤이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어요.”토요일이 될지 일요일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이경빈과 약속한 건 다음 주 주말이었다.탁유미의 말에 윤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엄마, 정말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가요?”“응, 정말이야.”탁유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윤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무릎을 꿇은 것도, 자존심이 박살 난 것도 다 괜찮아진 것 같았다.한편 임유진은 탁유미의 말을 듣더니 집에서 나가기 전 작은 목소리로 탁유미에게 물었다.“셋이 함께 가는 거예요?”“네.”탁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윤이가 유치원에서 소원 적는 놀이할 때 엄마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가고 싶다고 적었어요. 그래서 그 소원 들어주려고요.”“하지만 언니는 지금 몸이...”“어차피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할 생각이에요. 노는 건 윤이가 할 거니까 괜찮아요.”임유진도 곧 엄마가 될 몸이기에 탁유미가 무슨 마음인지 이해가 됐다.“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요.”“네, 그럴게요.”탁유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탁유미가 어떤 방법으로 이경빈을 설득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집으로 돌아온 후, 임유진은 강지혁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아이들이 태어나면 놀이공원에 자주 가는 게 어때?”이에 강지혁이 그녀를 안아주며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오늘 유미 언니 보러 갔는데 윤이가 엄마랑 아빠랑 놀이공원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대. 태어나서 지금까지 엄마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으로 간 적이 없으니까... 언니가 사랑을 많이 주고 있어도 윤이한테는 이경빈이 필요해. 이경빈은 정말 구제 불능 인간이지만 그래도... 윤이한테는 필요한
3년 반이라는 형을 받았을 때도 탁유미는 여전히 자신을 무죄라고 주장했었다.그게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하지만 오늘, 이경빈 때문에 그 자존심이 짓이겨져 버렸다.‘차라리 잘 됐어.’이로써 이경빈과 그녀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으니까.룸 안.공수진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이경빈 쪽으로 다가갔다.“경빈 씨, 화내지 말아요. 애초에 탁유미 씨 사과 같은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았어요. 나는 경빈 씨만 있으면 돼요.”이경빈은 피곤한지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진작 받아야 할 사과였어.”“하지만 진심이 아닌 사과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공수진은 말을 하며 이경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탁유미 씨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마 내가 경빈 씨랑 결혼하는 게 배가 아파서일 거예요.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을 보내주는 게 쉽지 않은 거겠죠. 경빈 씨가 여지를 주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난 정말 더 이상은 탁유미 씨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여지를 주지 않는 건 당연한 거야. 걱정하지 마. 우리 결혼식은 예정일에 정상적으로 진행될 테니까. 나랑 결혼할 여자는 수진이 너야. 다른 사람은 있을 수 없어.”그 말에 공수진은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경빈에게 뽀뽀하려는 듯 발꿈치를 들었다.하지만 입술이 부딪히려는 순간 이경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을 피해버렸다.이에 공수진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난 피곤해서 이만 들어갈게. 항공권은 예매해 뒀으니까 시간이 되면 김 비서가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제 품에서 공수진을 떼어냈다.공수진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그의 품에서 나오더니 이경빈이 뒤돌았을 때 한마디 물었다.“경빈 씨, 아까 탁유미 씨가 마지막에 약속을 지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약속을 한 거예요?”“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이경빈은 그녀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이에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
탁유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굳어졌다.공수진에게 가서 사과하라고?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피해자가 보상을 받지는 못할망정 가해자에게 사과까지 해야 한다니,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4년이나 빚을 진 건 그녀가 아니라 이경빈과 공수진이었다.“너한테는 네 아들 곁에 좀 있어 달라는 부탁이 그딴 조건 없이는 못 하겠는 일이야?”탁유미의 얼굴이 무섭게 일렁였다.이에 이경빈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내가 무슨 조건을 걸던 그건 내 자유야!”이경빈의 말에 탁유미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더니 평정심을 되찾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았어.”...공수진은 이경빈의 방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경빈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하지만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은 탁유미의 얼굴이었다.그리고 그 뒤로 이경빈도 들어왔다.“경빈 씨, 이게 지금 무슨...”공수진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이경빈은 아무 말이 없었고 그 대신 탁유미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공수진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4년 전 일은 미안해요.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그래서 공수진 씨가 아이를 잃게 된 것도 전부 제 잘못이에요. 그간 제대로 된 사과를 못 했어요.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공수진은 그 말에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경빈 씨,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너한테 사과하고 싶대. 용서해줄 거야?”이경빈의 말에 공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경빈이 탁유미에게 뭐라고 얘기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이경빈은 아무 말 없는 공수진을 한번 보더니 시선을 돌려 싸늘한 눈으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사과에 성의가 없잖아. 고작 그런 말로 4년 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갈 거라고 생각해?”그러자 탁유미가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공수진에게 무릎을 꿇었다.“용서해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슬픔도 분노도 들어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경빈 씨!”공수진은 이경빈의 이름을 외치며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이경빈은 시선을 내려 탁유미의 떨리는 손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공수진을 향해 말했다.“먼저 올라가. 금방 갈게.”“네?”공수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열림 버튼을 결국 누르지 못하고 그렇게 문이 닫힐 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불안함과 초조함이 밀려왔다.그도 그럴 것이 문이 닫히기 전 이경빈이 그녀가 탁유미를 바라보았으니까.게다가 그 눈빛은 누가 봐도 망설이는 눈빛이었다.뭘 망설이는 거지?왜 탁유미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거지?4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이경빈은 탁유미만 보면 흔들리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탁유미 그 여자가 뭐라고?공수진은 이를 꽉 깨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어차피 죽을 거 그냥 지금 빨리 죽어버리지! 왜 또 경빈 씨 앞에서 알짱대는 건데!?’엘리베이터 앞.이경빈은 지금 자기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다.탁유미가 ‘잠깐만’이라고 외치며 팔을 잡았을 때 정말 발걸음이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할 말이 뭐야. 빨리 말해.”이경빈이 그녀에게 잡힌 팔을 우악스럽게 빼내며 말했다.더 이상 그녀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싫었다.“나랑 윤이한테 시간 좀 내줘. 같이 놀이공원 가자. 윤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엄마랑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을 가본 적이 없어. 그래서 윤이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주고 싶어.”“좋은 추억?”이경빈이 차갑게 웃었다.“탁유미, 너랑 내가 윤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가는 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해?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들을 포기하는 척 이렇게 다시 나한테 접근하는 게 목적이야? 새삼 이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그립기라도 해?”탁유미는 떨리기도 하고 또 불안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상처를 받았다던가 분노했다던가 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이경빈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으니까.탁유미는 그저 이경빈이 자
탁유미는 이경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와 프런트 데스크 직원에게 물었다.“이경빈 씨를 만나고 싶은데 지금 호텔에 있나요?”“이경빈 고객님은 현재 외출 중이세요. 용건이 있으신 거면 직접 연락을 해보시거나 로비에서 기다려주세요.”직원이 예의 있게 답해주었다.탁유미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연락하고 싶어도 이경빈의 연락처 같은 건 진작 삭제했으니까. 그녀가 이경빈과 연락할 수 있는 루트는 양육권 분쟁 준비 당시 연락을 취했었던 그의 변호사와 연락하는 방법뿐이었다.탁유미는 넓은 로비 한쪽에 가만히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시간이 정처 없이 흐르고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때 문이 열리고 드디어 이경빈이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옆에는 공수진도 함께 있었다.이경빈은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탁유미의 모습을 발견했다.로비에 사람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그의 눈은 마치 자석처럼 단번에 탁유미 쪽으로 이끌렸다.“네가 왜 여기 있어?”이경빈이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할 말이 있어.”탁유미가 조금 쭈뼛거리며 말했다.“할 말?”이경빈이 코웃음 쳤다.“나한테는 3개월 동안 만큼은 찾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하더니 네가 찾아오는 건 또 괜찮나 보지?”비아냥 섞인 그의 말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옆에 있던 공수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경빈 씨는 왜 찾아왔어요? 설마 이제 와서 양육권은 못 주겠다고 하려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해도 안 돼요. 약속은 약속이니까!”말을 마친 후 공수진은 이경빈의 팔을 더 꽉 잡았다.“경빈 씨, 이만 가요.”“그래.”이경빈이 지나쳐 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자 탁유미가 손을 뻗어 이경빈의 앞을 막아섰다.“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몇 분이면 돼!”그러자 이경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우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더 남았나? 3개월 얘기를 꺼낸 건 너야. 나도 더는 너 안 찾아갈 테니까 너도 나 찾아오지 마. 그리고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면 꿈 깨!”
한지영은 깨어났다고 해도 한두 시간가량 뒤면 또다시 잠이 들고는 했다.오늘도 새벽녘에 잠시 눈을 떴다가 몇 시간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탁유미는 임유진보다 일찍 와 있었기에 투명 유리 너머로 한지영이 눈을 뜬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줄곧 한지영에게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었기에 누워있는 한지영을 보는 게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탁유미는 자신은 얼마 안 가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한지영은 이번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잘 살기를 바랐다.물론 지금껏 한지영에게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병문안을 다 마친 후 탁유미와 임유진은 함께 병원을 나섰다.“언니, 몸은 좀 어때요? 실력 좋은 선생님들한테 한번 봐달라고 할까요?”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괜찮아요. 약만 꾸준히 먹으면 통증도 가벼워지거든요. 그리고 지금 봐주는 선생님도 실력 있는 분이에요.”탁유미의 말은 사실이었다.임유진이 걱정되어 탁유미의 주치의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쪽으로는 유명한 의사였다.“그럼 금전적으로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알겠어요. 고마워요.”탁유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생이 평탄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임유진 같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 그녀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행운아처럼 느껴졌다.“참, 윤이는요? 윤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지난번에 사준 옷이랑 장난감은 마음에 든대요?”임유진이 물었다.“엄청 좋아했어요. 요 며칠은 유진 씨가 사준 장난감만 가지고 놀아요. 그리고 옷은 한번 입어 보더니 자기 마음에 쏙 들었는지 특별한 날 입을 거라며 옷장에 고이 모셔둔 거 있죠?”그 말에 임유진은 윤이와는 정반대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새 옷을 사게 되면 근처 편의점을 가는데도 그 옷을 입으려 했고 다른 옷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다음에 윤이 데리고 놀이공원이라도 가야겠어요. 윤이가 새 옷 입은 모습이 궁금해요.”“그래요.”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뭔가 떠오른
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움찔했다.임유진의 목소리와 그녀의 따뜻한 품이 마치 끝이 없는 바다처럼 그의 모든 불안을 다 잠재워주고 있었다.아마 그녀가 있어 살아있는 게 이토록 감사하게 느껴질 것이다.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렇게까지 다채롭고 즐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저 매일매일 의미 없는 하루만 보낼 뿐 삶에 대한 더 큰 욕망은 없었을 것이다.“유진아, 너랑 있으면 꼭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강지혁이 중얼거렸다.“꿈 아니야. 너랑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내게 꿈이 아닌 듯 나도 너한테 꿈이 아니야.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이를 가진 것도 이렇게 함께 사는 것도 전부 꿈이 아니야.”임유진이 진지하게 답했다.“그러니까 혁아, 나한테 조금만 더 기대줘. 우리한테는 앞으로 좋은 일밖에 없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얼굴을 가까이해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왔다.“응. 그럴게.”두 사람의 미래가 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좋은 일밖에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만 그는 지금 이 달콤함이 영원하기만은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만약 그녀가 곁에 있어 주는 지금이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하면 그는 기꺼이 눈을 가린 채 이 꿈속에 갇히고 싶었다....임유진은 한지영 부모님으로부터 한지영이 깨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임유진은 눈가가 다 빨개졌다.깨어났다고는 하나 그저 눈만 뜨고 조금의 반응만 있을 뿐 여전히 목소리는 내지 못해 무슨 이유로 이런 꼴을 당했는지 물어보기는커녕 간단한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게다가 임유진이 막 중환자실 도착하고 얼마 안 가 한지영은 또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아주머니,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몸이 차차 회복되면 말을 할 수 있게 될 거예요.”임유진이 한지영 부모님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자 이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거렸
“그래?”강지혁이 피식 웃으며 임유진을 안아 자기 다리 위에 앉혔다.임유진은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강지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정말 나한테 소홀한 적 없어?”강지혁의 얼굴은 어느새 임유진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밤하늘처럼 예쁜 눈동자가 다정하고 또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혁이 이럴 때면 임유진은 꼭 여우에게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참, 너 생일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지?”임유진이 핑크색으로 물든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생일 선물로 뭘 줄지는 이미 다 생각해뒀어. 대신 뭘 받든 싫어하면 안 돼.”그 말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네가 뭘 주든 난 기쁘게 받을 거야. 그런데 내 생일날은...”강지혁이 잠깐 뜸을 들였다.“나는 그날 우리 둘이서만 있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 말고.”그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우리 둘이서만?”“응. 내 생일이잖아. 나는 다른 사람이 오는 거 싫어.”강지혁의 목소리가 어쩐지 묘하게 가라앉았다.그리고 눈가에는 언뜻 쓸쓸함도 스쳐 지나갔다.“이유 물어봐도 돼?”강지혁의 기분 변화를 감지한 임유진이 물었다.그 질문에 강지혁은 입을 꾹 닫은 채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그의 호흡이 어딘가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꼭 어두운 무언가가 강지혁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혁아, 우리 이제 부부야. 부부끼리는 좋은 일은 물론이고 힘든 일도 다 공유하는 거야. 너한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 마음이 편해지게 들어줄 수는 있어.”임유진의 다정한 말에 강지혁은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임유진은 이제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그녀 앞에서는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내 생일 다음 날, 그 여자가 나랑 아버지를 떠났어.”임유진은 그 말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강지혁이 말한 ‘그 여자’가 그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날은 모든 게 다 꿈만 같았어. 정말 모든 게 다 평화로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