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세령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세령 앞에 나타났다.그는 바로 강지혁의 개인 비서 고이준이었다.“고 비서님!”이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건 사람은 오히려 황 매니저였다.하지만 이준은 대답 대신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듯 신정민을 쳐다봤다.‘그러게 건드려도 왜 하필이면 대표님이 관심 가진 사람을 건드리냐고.’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른 동안 아까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준은 생각을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아까 저 사람이 한 짓을 똑같이 돌려주세요.”이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쎄 보이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바로 명령에 따라 정민을 연못가로 끌고 가 정민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정민이 유진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돌려주었다.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려고 밖으로 달려온 동창들뿐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경호원들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황 매니저는 심지어 정민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어쨌든 주주 중 한 세력인 신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강지혁이라는 대단한 인물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을뿐더러 경쟁 상대가 골탕을 먹으면 기뻐할 다른 주주들을 의식해서였다.그때,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민준과 세령을 바라봤다.그제서야 진세령은 얼른 미소를 장착한 채 이준에게로 다가갔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저희도 얼른 올라가 볼게요.”“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두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도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의 반응 따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에 세령과 민준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세령은 이내 위험한 눈빛을 한 채 이를 갈았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임유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임유진, 너 절대 가만 안 둬
임유진은 자기의 오른손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사실 조민혜한테 밟혀서 난 상처다.하지만 혁이를 걱정하게 할 수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오늘 청소하면서 실수로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그래?”강지혁은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혹시 누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제대로 혼쭐 내줄게.”‘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이 모든 사실을 훤히 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 혼자서도 보호할 수 있어.”“만약 보호할 수 없다면?”‘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마 너한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유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혹시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싫어?”지혁의 검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유진을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유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며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가 강해지면 그때 나 보호해 줘. 지금은 내가 너 보호해 줄게.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살짝 찢어진 옷을 벗어 바느실로 꿰매기 시작했다.그리고 지혁은 그 옆에 앉아 어두운 불빛에 감싸진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동작 때문에 유진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축 늘어졌는데 영양실조로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유진의 피부는 맑아 보이지 않았고 수려한 얼굴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듯한 무기력함이 있었다.하지만 꼼꼼히 바느질하며 내뿜고 있는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솔
“누나가 좋다면 난 다 좋아.”“내가 좋아하는 거 고르지 말고 네가 좋아해야지. 네가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른 스타일로 찾아줄게.”“그럴 필요 없어. 이게 좋아.”“그래, 그러면 이거로 구매한다?”임유진은 말하면서 벌써 구매하기 시작했다.그런 유진을 보고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물었다.“누나,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옷에, 핸드폰에 모두 그를 위해 사주면서 자기는 아껴 쓰고 있으니 말이다.“네가 내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혁은 그 '동생'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리게만 들렸다. 정말 그가 남자라는 걸 잊은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신정민은 클럽에서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기고 집에 돌아간 뒤 아버지한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GH 그룹과 관련된 정민의 집안 모든 사업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건 사업을 하는 정민의 집안에 그야말로 큰 손실이었다.그 외에도 그날 동창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 역시 직장을 잃거나 가문이 휘말려 각자 고통을 호소했다.그 중 당연히 민화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영은 인사팀에서 나오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팀에서 계약 해지 서류를 화영에게 주면서 해고 의사를 밝혔고 화영더러 일주일 내로 퇴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해고라니! 화영은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화영이 도시정비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기저기 인맥을 통해 공무직으로 들어간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화영의 맞선 상대도, 또 그전에 만났던 상대도 모두 화영의 직업을 높이 샀기에 화영을 우러러 본거다.그런데 만약 이대로 해고된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어려울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도 깎이고 더욱 맞선 상대도 화영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화영이 해고 사유를 물었을 때 인사팀에서는 그저 상부
조민혜의 태도에 민화영은 화가 거꾸로 솟았다. 인사팀에 화영과 친분이 있던 동료가 화영에게 몰래 알려주길, 이번 해고는 화영이 권력을 남용하여 환경위생과 직원을 마음대로 지시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그 일이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유진더러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킨 일뿐인데, 그 일을 계획한 주모자는 민혜다.“내가 너 협박이라도 했어? 너도 임유진이 당하는 꼴 보고 싶었으니까 한 거잖아. 난 그저 너한테 아이디어만 제공한 거야, 네가 그런 일 벌인 건 나랑 무관하다고.”민혜는 즉시 화영에게 선을 그었다.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화영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싸움으로 번졌다.그렇게 민혜와 관계를 끊은 뒤, 화영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딸이라고 화영의 부모님은 여기저기 인맥을 찾아 일을 해결하려고 뇌물을 돌렸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누구도 그 뇌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 데다 받았다 할지라도 이틀도 안 돼서 다시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거였다.그렇게 의미 없는 행위가 지속되다가 결국 화영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지인이 몰래 그들에게 언질을 주었다.“이봐, 자네 딸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건가? 듣자하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던데. 도시정비국 국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 딸 앞으로 공무직은 더 이상 찾지 못할 것 같다더라고, 그것뿐인가? 일반 직장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그 말을 들은 화영의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해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딸에게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을 건드린 거냐고 따져 물었다.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니? 화영은 오히려 멍해졌다. 평소 일하던 도시정비국에서도 높은 분들은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던 그때 화영은 갑자기 동창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 날 막바지에 유진을 도와줬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다.‘그렇다면…… 임유진의 배후가 강지혁이란 말인가?’하지만 화영은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유진은 지혁의 약혼녀였던 진애령을 죽인 가해자이기에 절대 그럴 리 없었기 때문
“그…… 그런데 나 동창들 앞에서 너 망신 당하게 했잖아. 신정민한테 그런 꼴도 당하게 하고…….”“그건 걔네가 그런 거지 너랑 무슨 상관인데?”‘나랑 당연히 상관있지!’민화영은 속으로 소리쳤다. 생전 처음 죄를 뒤집어쓰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됐어. 다른 일 없으면 가봐 나 일하러 가봐야 해.”말을 마친 임유진은 화영의 죽상이 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처럼 돌아서 건너편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유진은 화영이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사정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날 일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하지만 유진이 바닥을 절반쯤 쓸었을 때 웬 인형 하나가 갑자기 유진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동현이었다.동현은 얼굴을 살짝 붉힌 모습으로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유진 씨, 저 미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는 지금 연애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그런데 저 정말 진심이에요. 기다릴게요. 유진 씨가 언젠가 다시 연애하고 싶어질 때 저 찾아와 줘요.”말을 마친 동현은 자기가 한 말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바꿨다.“아니, 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저라는 사람이 유진 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기억해 줘요…….”유진은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다. 솔직히 거절당하고도 동현이 이렇게 다가온다는 게 놀라웠다.“동현 씨 충분히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요. 저 환경미화원이라서 인맥도 없고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어요. 좋은 아내감은 더욱 아니고요.”“그래도 전 유진 씨가 좋아요.”이 말을 내뱉은 동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서민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 남자친구도 없다면서요. 저 기다릴게요.”“그래도…….”유진은 끝까지 거절하고 싶었지만 붉게 상기 채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현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눈앞의 남자는 지금 유진에게 진심인 건 확실했다. 미옥이 말했던 것처럼 성실한 사람인 것도 맞고.이런 남자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유진이 감옥에 갔었다는 걸 알
‘내가 너무 갔나?’곽동현은 바삐 움직이는 임유진을 보자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유진 씨, 그…… 그러면 저는 먼저 가볼게요. 일 보세요.”홀연히 사라지는 동현의 뒷모습을 본 강지혁은 갑자기 유진의 턱을 잡으며 반강제로 유진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누나가 다른 남자를 그렇게 보는 게 싫어.”그 말에 유진은 웃음이 나왔다.“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 동현 씨한테 그런 마음 없어.”“그러면 상대도 그렇대?”하지만 지혁의 물음에 유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저 사람 동료는 맞지만 누나 좋아하는 동료 아니야?”“맞아. 나 이미 미옥 언니를 통해 거절 의사를 밝혔어.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저 사람 누나랑 어울리지 않아. 누나도 그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거절 의사를 밝혀야지.”“그건 네가 나를 너무 좋게 생각해서 그래. 솔직히 내가 오히려 동현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 동현 씨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어, 우리 환경위생과 여자들 중 동현 씨 마음에 둔 여자도 꽤 많고.”“누나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자격 있어.”지혁은 바로 유진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소유욕이 묻어있었다.유진이 청소를 마치고 도구를 환경위생과 사무실로 돌려주러 갔을 때, 민화영이 갑자기 유진에게 또 달려들었다.“유진아, 나 용서해주면 안 돼? 나 정말 그 직장 잃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 직업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제발, 네가 우리 국장님한테 나를 용서했다고 말 좀 전해줘. 국장한테 해고 명령 철회하라고 해줘. 응?”화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건드린 사람은 유진뿐이라는 결론을 얻어 이럴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화영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너 잘못된 사람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야. 너희 국장이 너 해고한 거 나랑 아무런 상관없어. 나 너희 국장 만나본 적도 없다고.”“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한 짓을 한 사람은
집으로 가는 길, 임유진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강지혁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소민준이라고 알아?”“SY 그룹 대표 말하는 거야?”“너도 아는구나. 맞아, 뉴스에 진세령의 약혼 상대로 보도되던 그 남자. 그 사람이…….”유진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내 전 남자친구야.”지혁도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 유진의 곁에 가만히 서서 유진을 바라봤다.어쩌면 너무 오래 가슴속에 누르고 있던 감정이라 그런지 그 순간 유진은 저도 모르게 지난 일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놀랍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이 예전에 그런 사람의 여자친구였다는 게?”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나 그때 대학 졸업하자마자 변호사 됐었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랑 결혼도 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생각지 못한 교통 사고로 내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명을 쓰게 됐는데 그때 소민준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차버리더라. 심지어…….”잠시 뜸을 들이던 유진은 감옥에서 있었던 일만큼은 끝내 입에 담지 못했다.그때 생각을 하니 손끝에서 다시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은 새로운 손톱이 자랐고 부러졌던 손가락도 다시 나았다곤 하지만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다 지난 일이야.”유진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그걸 듣고 있던 지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진이 계속 말하지 않아도 지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고이준이 그에게 줬던 자료 속에 유진이 그간 겪었던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으니.그 자료를 볼 때만 해도 지혁은 솔직히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쿡쿡 찔려왔다.지금껏 여자를 위해 마음 아파한 적 없는 지혁에게 있어 유진의 과거를 마음 아파하는 이 감정이 너무나 생소했다.그때 유진이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그때부터 난 사랑을,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을 쉽게 믿지 않아. 오늘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이 내
임유진은 강지혁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이건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 두 재벌 집안이 서로 사돈 관계를 맺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그런데 누가 감히 광고를 내리라 마라 해?’그때, 유진의 눈앞을 가리던 지혁의 손은 갑자기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돼었다. 잠시 후,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자신의 눈에서 떼며 그를 바라봤다. “고마워, 혁아.” 유진은 지혁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이제 우리 집에 갈까? 집에 가서 우리 같이 밥이나 먹자!”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지혁은 커다란 옥외 전광판 광고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유진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유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경비실에 들러 택배를 찾았다. 유진이 산 니트 스웨터가 도착한 것이었다.유진은 얼른 택배상자를 열어 스웨터를 꺼냈다. 괜찮은 소재에 이만하면 가성비도 좋은 편이었다. “혁아, 이거 너한테 맞는지 한번 입어 볼래.”유진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청록색 계열의 체크무늬 스웨터를 걸친 지혁을 보고, 유진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음, 역시 잘 맞는군. 이 스웨터를 입으니까 더 멋있는데?’유진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혁아, 허리 좀 굽혀봐.”지혁은 유진의 말 대로 허리를 굽혔다. 유진은 빗으로 지혁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얼굴 윤곽이 환하게 드러났다. 유진은 전부터 지혁이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혁은 늘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유진은 오늘 완전히 드러낸 지혁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동생 정말 예쁜데?”유진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만약 네가 이렇게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길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준다면, 여자들이 너도나도 전단지를 받으려고 몰려들 걸?”지혁은 ‘우리’라는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시간 있을 때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좀 다듬을까? 우리 동생 예쁜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서 너무 안타까워!”
소안나의 질문에 현이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율이가 현이를 자기 등 뒤에 세우며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사과 다 했으면 이만 집으로 돌아가.”소안나는 축객령을 내리는 율이의 말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마치 나쁜 사람으로부터 동생을 지키려 하는 그 모습이 같잖고 눈꼴이 시렸다.‘내 오빠였잖아! 나만의 오빠였잖아! 그런데 왜 내가 아닌 저 애를 감싸고 있는 거야!’“율이 오빠...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 오빠 엄마한테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됐는데... 미안해. 용서해줘. 나도 오빠 동생이니까 한 번만 봐줘...”소안나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목소리만 작았지 진정성은 현이 때보다 훨씬 많았다. 율이에게 미움받는 건 싫다는 마음은 진심인 듯했다.하지만 강선율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강지혁 역시 똑같은 눈빛으로 소안나를 바라보았다.“소안나, 방금 그 말은 누가 가르쳐줬지?”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소안나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제, 제가 사과하고 싶어서 엄마한테 여기로 오자고 한 거고 언니한테 한 말도 제가 엄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보게 된 거예요...”강지혁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한 집사, 애들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네, 회장님.”집사는 아이 셋을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아가씨, 사모님께서 사다 주신 말차 케이크가 있는데 그거 드릴까요?”“난 말차 케이크 같은 거 안 먹어요.”소안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대꾸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맛이 바로 말차맛이었으니까.집사는 소안나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더니 정중한 얼굴로 정정했다.“제가 물은 건 안나 아가씨가 아니라 현이 아가씨였습니다.”소안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집사의 말이 꼭 너는 양녀이니 주제를 알라는 식의 말로 들려왔기 때문이다.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제는 정말 이 집에서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가 점점 더 없
임유진은 딸의 옷매무새를 바로 해주며 웃었다.“현이랑 율이가 서로를 지켜주려 하는 모습은 아주 좋아. 현이가 엄마랑 지영이 이모를 엄청 많이 아끼고 좋아한다는 것도 아주 잘 알겠어. 하지만 두 사람 다 명심해. 싸우기만 해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오히려 갈등을 더 키우고 작은 일도 크게 만들 뿐이지.”강선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것이 문제 해결의 좋은 수단이 아니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현이는 그런 율이와 달리 볼을 부풀리며 납득이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말로 하는 것보다 주먹을 쓰는 게 훨씬 더 깔끔하고 쉬웠으니까. 게다가 아까 소안나를 제지할 때도 일전에 임유진과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 처음에는 말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안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였고 그렇게 결국 현이도 주먹을 쓸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아들과 딸의 전혀 다른 반응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현이는 똑똑한 아이지만 정의감이 넘쳐서인지 다른 건 다 하라는 대로 하는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타협이 없었다.“괜찮아. 지금은 모를 수 있어. 나중에 크면 현이도 차차 알게 될 거야.”임유진은 아이의 생각을 꺾으며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해보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도 있으니까....저녁 7시경.갑작스럽게 울린 초인종 소리와 함께 두 모녀가 강씨 저택에 찾아왔다.소민아는 거실에 들어선 후 소안나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기며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앞머리가 휑한 딸을 옆에 세우며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다.“밤늦게 죄송합니다. 이렇게 찾아온 건 현이한테 사과하고 싶어서예요.”“사과?”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아... 혹시 사모님한테서 오늘 일에 대해 전혀 전해 듣지 못하신 건가요?”소민아는 당황한 듯한 얼굴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그게 오늘 유치원에서 안나가 말을 잘못하는 바람에 현이가 우리 안나를
“기사? 소민아 씨는 평소 아이한테 그런 기사를 보여주나 봐요?”임유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서, 설마 내가 보여줬겠어요? 아이가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누르다 우연히 보게 된 거지?”소민아는 마른기침을 하며 슬며시 눈을 피했다.“그래요? 그렇다는 건 안나가 기사 내용을 완전히 다 이해한다는 말이 되는데 어디 아무 기사나 하나 안나한테 보여주고 내용이 뭔지 물어볼까요?”“영상으로 봤을 거예요. 요즘은 뉴스 영상도 첨부되잖아요!”소민아가 다급하게 말했다.“뉴스 영상?”임유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럼 그 ‘상간녀’라는 세글자가 나온 뉴스 영상을 나한테도 좀 보여줄래요?”임유진은 ‘상간녀’나 ‘세컨드’라는 단어는 기사의 댓글에만 존재하는 단어고 뉴스나 기사에는 전부 우회적인 표현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일전에 과격한 댓글로 한지영이 상처를 받을까 봐 강지혁에게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을 때 관련 기사와 뉴스를 한번 쭉 훑은 적이 있었으니까.그리고 설령 자극적인 기사 제목만 쓰는 언론사가 생긴다고 해도 백연신이 손을 쓸 게 분명했기에 그런 단어를 언급하는 기사나 뉴스가 떠돌 리가 없다.소민아는 상황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자 상당히 당황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뭐... 뭐가 됐든 남의 머리카락을 이렇게 뜯어 놓으면 안 되죠. 애들 모발이 얼마나 약한데 이러다 평생 자라나지 않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예요? 이런 건...”“안나 머리카락은 의사한테 봐달라고 할 생각이에요.”임유진이 말을 끊었다.“그리고 진찰과 치료에 드는 돈은 모두 내가 대줄 생각이고요.”‘고작 그거로 될 것 같아?!’소민아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평소 잘 보이려고 굽신거리던 선생님들이 가득 있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전에 현이 보고 우리 안나한테 사과하라고 하세요.”“사과는 현이뿐만이 아니라 안나도 해야 해요.”“안나가 사과를 왜 해요?”소민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도
강선율은 차가운 눈길로 소씨 모녀를 보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가 한 선택을 후회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여동생이 갖고 싶다는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그리고 소민아는 율이가 소안나를 많이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율이는 한번도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예전에 소안나와 소민아가 길바닥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그저 가엽다는 마음만 들었을 뿐 소안나가 자기 동생이었으면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그리고 지금은 소민아와 소안나가 이러는 게 불편하고 또 참을 수 없을 만큼 언짢았다.“그야 현이는 내 동생이니까.”율이의 단호한 한마디에 소안나는 얼굴이 화끈해졌다.‘그럼 나는... 나는 오빠 동생이 아니야? 나는 동생으로 인정 안 해주는 거야? 왜? 내가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서?’이 순간 소안나는 소민아의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임유진 때문에 엄마가 강지혁과 결혼을 못 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 역시 강지혁의 진정한 딸이 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소안나는 단 한 번도 양녀라는 말이 고까웠던 적이 없다. 어른들에게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로, 그리고 유치원에서는 율이 동생이라고 불리는 것이 좋았다.하지만 강선현이 유치원으로 온 순간부터 저택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르며 예뻐하지 않았고 유치원 친구들은 율이 동생이라고 하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돌려 현이만 바라보았다.어느 하루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강선율의 동생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도 강선율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났으며 소안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쟤네 엄마 친구는 상간녀야. 그리고 쟤네 엄마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쟤는 커서 꼭 똑같은 상간녀가 될 거야. 오빠는 자기 동생이 상간녀여도 괜찮아?”소안나가 씩씩거리며 외쳤다.그리고 아이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된 아이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릴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당장 그 말 취소해! 그리고 우리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번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그때는 내가 보란 듯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집으로 갈 거니까.”한지영은 배시시 웃으며 이해영의 근심을 덜어주었다.부모님에게는 이미 너무 많은 걱정을 끼쳤기에 그녀는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남자를 만나볼 생각이다. 결혼하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생각이다....임유진은 느긋하게 앉아 서류를 정리하다가 유치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현이 어머니, 지금 바로 유치원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다급해 보이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현이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그게... 현이가 안나랑 싸웠어요. 그런데 말싸움에서 그치지 않고...”통화내용은 이러했다. 현이와 소안나가 유치원에서 대판 싸웠고 몸싸움까지 번졌는데 그 과정에서 소안나에게 가벼운 상처가 생기고 머리 역시 현이 때문에 잔뜩 뽑혔다고 한다.그리고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 달려온 선생님들은 두 아이 모두 강씨 집안의 아이들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결국 이렇게 아이들의 엄마에게 전화를 건 것이라고 한다.임유진은 통화를 마친 후 곧바로 유치원으로 향했다.유치원에 도착하고 교무실 쪽으로 뛰어간 그녀는 채 도착하기도 전에 복도 전체를 울리는 소민아의 호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너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너희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안나는 네 동생인데 대체 우리 안나 머리카락은 왜 뜯어? 너 일부러 그랬지? 어린 게 어쩜 이렇게 독해?”“소안나가 왜 내 동생이에요? 아니에요!”현이가 맞받아치며 외쳤다.“얘가 진짜! 안나도 회장님 딸인데 그럼 당연히 네 동생이지!”“아니에요! 나한테는 오빠밖에 없어요!”현이는 소민아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너 그 말 너희 엄마가 가르쳐준 거지? 일부러 네 동생한테 모질게 굴라고 너희 엄마가 시켰지?!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렇게 못 된 짓만 하지?”소민아 역시 아이를 상대로 점점 더 목소리
사람들에게 요즘 제일 핫한 뉴스가 뭐냐고 물으면 아마 고민도 하지 않고 고씨 가문과 그 가문이 경영하고 있는 해진 그룹의 일이라고 얘기할 것이다.해진 그룹이 장기간 추진하고 있던 대규모의 부동산 프로젝트는 현재 중지된 상태고 백선 그룹은 얼마 전에 해진 그룹과의 협력을 완전히 중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략결혼 얘기까지 나왔던 두 가문이라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또한 해진 그룹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가짜 장부와 비리들이 쏟아져 나왔다.앞으로 어떤 일이 더 생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것만으로도 해진 그룹 이미지는 이미 바닥을 친 거나 다름없다.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해진 그룹의 경제적 상황이 위태로워 제대로 돈을 갚지도 못하고 있다고 하며 3일 뒤까지 자금을 마련하지 않으면 그때는 회사 전체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고 했다.연이은 해진 그룹의 얘기에 한지영의 일은 어느 정도 열기가 식었고 치정으로 시작했던 흐름은 어느새 비즈니스상의 문제로 변해버렸다.[백씨 가문이랑 고씨 가문은 이제 완전히 척을 진 건가요?][자세하게는 몰라도 결혼은 물 건너갔겠죠.][설마 그 세컨드 때문에 고은채랑 관계를 끊은 건가?][그럴 리가 있겠어요? 누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소란을 일으켜요. 다 돈 때문이지. 내가 볼 때는 그냥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나도 여자 때문은 아니라고 봐요. 고씨 가문과 결혼을 맺으면 어마어마한 돈이 알아서 굴러올 텐데 고작 여자, 그것도 세컨드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백연신이 사랑에 미친 놈도 아니고. 내가 볼 때 백연신은 결혼에 매이지 않은 채로 고씨 가문을 먹고 싶었던 거라고 봐요. 비즈니스맨이잖아요, 백연신은.]‘비즈니스맨이라...’한지영은 복잡한 얼굴로 네티즌들의 댓글을 읽어내려갔다.‘며칠만 기다려달라는 게 고씨 가문의 일이 터지길 기다려달라는 뜻이었나? 하지만...’아무리 해진 그룹 일로 인터넷이 들끓고 있다고는 하나 그녀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세컨드 또는 상간녀라고 불
하지만 이제는 그 확신이 점점 사라져갔다.“나를 허울뿐인 회장으로 내세우고 이익은 다 너희 쪽에서 챙길 생각에 기분이 좋았을 거야, 아마?”백연신은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섬뜩했던지 고은채는 몸이 다 움찔 떨렸다.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손아귀에 잡힌 것 같은 기분은 지금이 처음이었다.줄곧 자신이 모든 걸 틀어쥔 채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만약 백연신이 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씨 가문의 지시만 듣고 과하게 순정적이었으면 의심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연신은 그간 권세에 대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고 고씨 가문과의 사사로운 충돌에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녀와도 많은 갈등을 빚었다.그래서 고은채는 오히려 안심했고 오히려 그를 더 믿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건 모두 연기에 불과했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세상에 이보다 더 무서운 남자가 또 있을까?고은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하지만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갑자기 백연신이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뭐 하는 거예요?”고은채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당분간 이곳에 있어 줘야겠어.”“날 감금이라도 할 생각이에요?”“감금이라니. 그저 여자친구가 내 집에 머물렀으면 남자친구의 소소한 바람일 뿐인데. 걱정하지 마. 오래 안 걸려. 며칠 뒤면 나가고 싶지 않다고 해도 보내줄 거야.”백연신의 말에 고은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며칠 뒤? 설마... 그간 뭘 준비라도 한 거야?’“난 이곳에 머물 생각 같은 거 없어요. 비켜요.”고은채는 단호하게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호원들이 다가와 그녀의 양팔을 잡으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방으로 데려가. 내가 내보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게 하지 마.”백연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말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인플루언서에 기자들, 그리고 댓글 알바까지 돈을 꽤 다양하게 뿌렸던데.”고은채는 이 말로 확신했다. 백연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고은채, 나는 그저 네 장난질에 어울려 선택을 했을 뿐이야. 날 몰아세운 건 너라고.”고은채는 백연신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모든 걸 다 꿰뚫어 보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녀가 이번 일을 벌인 건 백연신을 시험해보고 싶어서다. 일부러 한지영을 궁지로 내몰고 그녀를 인터넷 한가운데 던져 뭇매를 맞게 한 다음 백연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싶었다.만약 백연신이 단호하게 한지영을 끊어내면 그때는 정말 마음 놓고 그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하지만 기대했던 그림과 달리 백연신은 한지영을 선택했다. 기자들 가득한 그곳에서 그는 한지영의 손을 잡는 선택을 했다.“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생각 안 해봤어요? 우리 가문과 척이라도 지고 싶은 거냐고요. 당신이 지금 그 자리에 있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죠?”고은채가 은근히 협박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러든 말든 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손에 든 칵테일에만 집중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한지영이 제일 좋아하는 맛으로 그녀가 몇 번이나 만들어달라고 했던 칵테일이다.지난 5년간 백연신은 이 칵테일을 수도 없이 마셨고 마실 때마다 한지영에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는 훨씬 더 능숙한 솜씨로 만들어 줄 수 있게 됐으니까.“다시 한번 말하지만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건 너야. 두 가문이 계속해서 원만한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랐으면 내가 선택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백연신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내가 지금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누구 도움이 제일 컸는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5년 전에 고씨 가문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역시 한번도 잊은 적이 없어.”고은채는 그 말에 몸을 움찔 떨며 아주 잠깐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
한지영은 임유진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임유진은 항상 이랬다. 백연신을 만나러 갔다가 목숨이 간신히 달린 상태로 돌아왔을 때도 임유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어서라도 도움을 주려고 했었다.“응, 고마워.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고은채는 차가운 얼굴로 영상을 바라보았다. 내용은 다름 아닌 백연신이 기자들 다 있는 곳에서 한지영의 손을 잡고 차에 올라타는 장면이었다.1분도 채 안 되는 영상이었지만 그녀는 벌써 해당 영상을 스무 번이나 넘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그녀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이제는 무섭게 굳어지기까지 했다.백연신과 한지영의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 후 고은채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고은채는 이에 백연신과 얘기를 해볼 테니 기다려보라며 짜증을 냈다.하지만 아무리 전화를 걸어봐도 백연신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백연신의 부하직원에게 전화를 걸어도 말을 돌리며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백연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끝까지 함구했다.결국 고은채는 이를 꽉 깨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백연신의 별장으로 향했다.별장 대문 앞에 다다르고 당연하게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경호원이 갑자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내가 누군지 몰라?”고은채가 사납게 쳐다보며 물었다.“회장님께서 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별장에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경호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백연신에게서 지시받은 내용을 전했다.“그럼 그 잘난 회장님께 전해. 지금 나 안 들여보내면 당신이 아껴마지않는 그 여자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처리해버리겠다고!”고은채의 강경한 말투에 경호원은 어쩔 수 없이 별장 내부로 전화를 걸었고 1분 정도 흐른 후 별장 대문이 스르르 열렸다.고은채는 한지영의 이름을 대고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는 게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득바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곧 터질듯한 분노를 끌어안고 별장 내부로 들어가자 백연신이 거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칵테일을 마시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