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갔나?’곽동현은 바삐 움직이는 임유진을 보자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유진 씨, 그…… 그러면 저는 먼저 가볼게요. 일 보세요.”홀연히 사라지는 동현의 뒷모습을 본 강지혁은 갑자기 유진의 턱을 잡으며 반강제로 유진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누나가 다른 남자를 그렇게 보는 게 싫어.”그 말에 유진은 웃음이 나왔다.“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 동현 씨한테 그런 마음 없어.”“그러면 상대도 그렇대?”하지만 지혁의 물음에 유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저 사람 동료는 맞지만 누나 좋아하는 동료 아니야?”“맞아. 나 이미 미옥 언니를 통해 거절 의사를 밝혔어.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저 사람 누나랑 어울리지 않아. 누나도 그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거절 의사를 밝혀야지.”“그건 네가 나를 너무 좋게 생각해서 그래. 솔직히 내가 오히려 동현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 동현 씨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어, 우리 환경위생과 여자들 중 동현 씨 마음에 둔 여자도 꽤 많고.”“누나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자격 있어.”지혁은 바로 유진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소유욕이 묻어있었다.유진이 청소를 마치고 도구를 환경위생과 사무실로 돌려주러 갔을 때, 민화영이 갑자기 유진에게 또 달려들었다.“유진아, 나 용서해주면 안 돼? 나 정말 그 직장 잃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 직업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제발, 네가 우리 국장님한테 나를 용서했다고 말 좀 전해줘. 국장한테 해고 명령 철회하라고 해줘. 응?”화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건드린 사람은 유진뿐이라는 결론을 얻어 이럴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화영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너 잘못된 사람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야. 너희 국장이 너 해고한 거 나랑 아무런 상관없어. 나 너희 국장 만나본 적도 없다고.”“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한 짓을 한 사람은
집으로 가는 길, 임유진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강지혁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소민준이라고 알아?”“SY 그룹 대표 말하는 거야?”“너도 아는구나. 맞아, 뉴스에 진세령의 약혼 상대로 보도되던 그 남자. 그 사람이…….”유진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내 전 남자친구야.”지혁도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 유진의 곁에 가만히 서서 유진을 바라봤다.어쩌면 너무 오래 가슴속에 누르고 있던 감정이라 그런지 그 순간 유진은 저도 모르게 지난 일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놀랍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이 예전에 그런 사람의 여자친구였다는 게?”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나 그때 대학 졸업하자마자 변호사 됐었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랑 결혼도 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생각지 못한 교통 사고로 내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명을 쓰게 됐는데 그때 소민준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차버리더라. 심지어…….”잠시 뜸을 들이던 유진은 감옥에서 있었던 일만큼은 끝내 입에 담지 못했다.그때 생각을 하니 손끝에서 다시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은 새로운 손톱이 자랐고 부러졌던 손가락도 다시 나았다곤 하지만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다 지난 일이야.”유진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그걸 듣고 있던 지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진이 계속 말하지 않아도 지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고이준이 그에게 줬던 자료 속에 유진이 그간 겪었던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으니.그 자료를 볼 때만 해도 지혁은 솔직히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쿡쿡 찔려왔다.지금껏 여자를 위해 마음 아파한 적 없는 지혁에게 있어 유진의 과거를 마음 아파하는 이 감정이 너무나 생소했다.그때 유진이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그때부터 난 사랑을,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을 쉽게 믿지 않아. 오늘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이 내
임유진은 강지혁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이건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 두 재벌 집안이 서로 사돈 관계를 맺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그런데 누가 감히 광고를 내리라 마라 해?’그때, 유진의 눈앞을 가리던 지혁의 손은 갑자기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돼었다. 잠시 후,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자신의 눈에서 떼며 그를 바라봤다. “고마워, 혁아.” 유진은 지혁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이제 우리 집에 갈까? 집에 가서 우리 같이 밥이나 먹자!”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지혁은 커다란 옥외 전광판 광고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유진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유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경비실에 들러 택배를 찾았다. 유진이 산 니트 스웨터가 도착한 것이었다.유진은 얼른 택배상자를 열어 스웨터를 꺼냈다. 괜찮은 소재에 이만하면 가성비도 좋은 편이었다. “혁아, 이거 너한테 맞는지 한번 입어 볼래.”유진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청록색 계열의 체크무늬 스웨터를 걸친 지혁을 보고, 유진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음, 역시 잘 맞는군. 이 스웨터를 입으니까 더 멋있는데?’유진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혁아, 허리 좀 굽혀봐.”지혁은 유진의 말 대로 허리를 굽혔다. 유진은 빗으로 지혁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얼굴 윤곽이 환하게 드러났다. 유진은 전부터 지혁이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혁은 늘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유진은 오늘 완전히 드러낸 지혁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동생 정말 예쁜데?”유진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만약 네가 이렇게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길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준다면, 여자들이 너도나도 전단지를 받으려고 몰려들 걸?”지혁은 ‘우리’라는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시간 있을 때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좀 다듬을까? 우리 동생 예쁜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서 너무 안타까워!”
강지혁은 조용히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누나는 내가 돈이 너무 없어 보여??”“아니, 아니야!”유진은 고개를 저었다.“나는 단지 네가 더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야.” 아마도 유진은 평생 이런 삶을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지혁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걱정 마. 그렇게 될 거니까. 그때가 되면 난 누나가 어떤 삶을 원하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거야.”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았다.지혁은 단지 게임일 뿐일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유진의 삶을 바꾸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일은 지혁에게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지혁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진은 지혁이 정말 그렇게 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유진은 지혁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좋아! 그럼 나는 이제 우리 동생만 믿는다? 그럼 난 아무 일도 안하고 편하게 앉아서 돈만 펑펑 써야지! 백수처럼!”“그래, 그렇게 해.”지혁의 깊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나가 원하기만 한다면, 평생 돈만 쓰는 백수로 살 수 있게 해 줄게.’다음날, 고이준은 휴게실에서 직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오늘 우리 강 대표님 입은 니트 스웨터 봤어?][아니, 왜?][지금 인터넷 상에서 가장 핫한 스웨터인 것 같아서 말이야.][그럴 리가 있겠어? 강 대표님이 그런 옷을 입는다는 게 말이 돼?][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혹시 유명 브랜드 옷을 짝퉁으로 제작되어서 유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긴, 대표님이 입고 계신 옷은 느낌이 다르기는 해. 나도 우리 남편에게 사주고 싶을 정도라니까.][그 정도야? 그럼, 나도 그 옷 살 수 있는 링크 좀 보내줘.]이준은 조용히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이준은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오늘 보스가 입고 있는 옷은 지금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 니트 스웨터가 맞았다. 심지어 보스가 입은 것과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한 직원도 보았다. 정작 보스
“아마도 99개쯤 되는 것 같습니다.”고이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준은 신문에 나왔던 소민준의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었다. 민준은 당시 취재진에게 99개의 전광판 광고를 내준 의미는 99번의 생을 다시 살아도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이것은 한때 진세령의 팬들로부터 최고의 사랑 고백으로 추앙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세령은 현재 연예계에서 인기 있는 여자 스타였고 세령을 아끼는 팬들도 많았다.“다 내려!” 강지혁이 단호히 말했다.“전부 다요?” 이준은 의아한 표정이었다.“전부 다.” 지혁은 다시 한번 확실하게 일렀다.“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이준은 대답은 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갑자기 소민준의 옥외 전광판 광고를 왜 내리라고 하시지, 설마 소 씨 가문이나 진 씨 가문이 우리 보스에게 미움을 산 건가? 하지만, 보스는 이미 그들에게서 약혼식 초대장도 받았잖아…….’이준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설마, 우리 보스가 광고를 내리라고 하는 이유가…… 혹시 임유진 씨 때문인가?’이준은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우리 보스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단 말이야? 고작 그 여자 한 사람을 위해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 반대편에 선다고? 하지만, 전에 아내가 될 뻔했던 여자인 진애령을 위해서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잖아!’‘임유진이라는 여자는 우리 보스에게 대체 어떤 존재지?’이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보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임유라는 호텔 복도에 서서 멀끔한 정장에 고급 구두를 신고 신사다운 모습으로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형부…… 아니, 이제는 형부라고 부를 수 없지요. 소 대표님과 우리언니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유라는 민준이 이곳 호텔에서 식사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알아내 민준을 만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유진이 오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자기라도 올 수밖에 없었다.민준은 유라의 입에서 언니
“누가 형부라는 거죠?”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 코트에 세련된 차림의 아름다운 여자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여자는 임유라를 발견하고는 냉소를 지었다.“누군가 했더니, 살인자의 여동생이군요.’여자의 말에 유라의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라는 눈 앞의 여자가 진세령, 즉 소민준의 현재 약혼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세령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유라를 쳐다보았다. “기억나요. 당신은 이름도 없는 배우잖아요. 왜 우리 민준 씨 앞에 나타나서 형부라고 부르는 거죠? 혹시 여주인공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요?”유라는 아무런 반격도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좋은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유라는 속으로 세령을 욕하며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사람만 치지 않았어도, 이미 인기 스타가 되었을 테고 그랬다면 오늘 같은 모욕은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순간, 유라는 자신이 애초에 괜찮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임유진 덕분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왜 안 가고 그러고 있죠?” 세령은 불쾌한 얼굴이었다.유라는 미소를 지으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봤다. ‘그냥 이대로 돌아간다면, 애당초 내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지.’“그만 돌아가. 나는 네 언니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민준이 냉정하게 말했다.“하지만…….” 유라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머뭇거렸다.그러자 세령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당신이 가지 않고 계속 버티고 있겠다면, 경비원을 부를 수밖에 없어요!”유라는 할 수 없이 입술을 깨물며 그곳을 떠났다. 나중에 다시 기회를 잡으려는 생각이었다.세령은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봤다.“당신 아직까지 임유진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건 아니죠? 방금 임유라가 당신에게 형부라고 부르던데, 당신은 강지혁이 두렵지도 않아요? 잊지 말아요. 우리 언니는 그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이 말은 그에게 마치
진세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민준을 바라보았다. 이번 광고는 소 씨 가문이 주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소민준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볼게…….”민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민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뭐? 내렸다고? 전부 다? 위약금은 어떻게 하고?”“그쪽에서 위약금을 전액 배상하더라도 광고를 내리겠다고 했어요.”담당 매니저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그리고 대표님, 다른 회사에도 연락해 봤는데 광고를 받으려는 곳이 하나도 없어요.”이 말은,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은 자기 회사 말고는 다른 곳에 더는 광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대체 누가 감이 이런 짓을 한 거야?” 민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렸다.“GH 그룹이에요.”매니저가 대답했다.“이번 일은 GH 그룹의 비서 고이준이 직접 지시한 거예요.”민준은 일순간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고이준……. 그 사람은 강지혁의 개인 비서잖아! 설마 이 모든 일 강지혁의 뜻인가? 그가 정말 전광판 광고를 다 내리라고 했다는 거야?’‘이게 무얼 뜻하는 거지? 그는 소 씨, 진 씨 두 가문의 결합을 반대하는 건가?’민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소 씨 가문이 도시전체에 내걸었던 99개의 전광판 광고는 하룻밤 사이에 전부 사라졌다. 이것은 S시의 제일 핫한 화제로 되었으며, 인터넷에서는 민준과 세령의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냐는 찌라시까지 떠돌았다.그날 밤, 민준과 세령은 둘의 관계에는 이상이 없으며 옥외 전광판 광고가 내려간 건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기 때문임을 밝혔다. 또한,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렸다. 두 사람의 입장 표명에 세령의 팬들은 세령을 더욱 추앙하게 됐다.유진은 월셋방에 앉아 뉴스를 보다가 어리둥절해졌다. ‘혁이에게 광고 이야기를 한 게 어제인데, 다음 날 바로 광고가 내려가다니!’“광고가 사라지니까 기분이 좋아?” 갑자기 지혁의 목소리가 들려
지혁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저항하지 않았고 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은은하고 향긋한 향기는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마치 유진의 곁에 있으면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 같았다.“혁아, 너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의 곁에 있을 거야.”유진의 목소리가 천천히 그의 귓가에 울렸다.“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을 거야?”지혁이 중얼중얼 물었다.“그럼.”유진은 당연하게 대답했다.“날 무서워하지 않을 거지?”지혁이 말하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내가 왜 너를 무서워하겠어, 우리 혁이는 이토록 착한데 널 이뻐할 시간도 부족해. ”우리 혁이.이런 호칭은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점찍은 것 같았다.하지만 지혁은 이런 호칭을 싫다고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했다.그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얼굴이 거의 붙어 코끝이 부딪힐 것 같았다.유진은 순간 얼굴이 빨개져서 무의식적으로 뒤로 피하려고 했지만 지혁이 그녀의 허리에 껴안으며 그녀가 뒤로 피하려는 것을 막았다.“누나, 내가 착해서 좋아하는 거야?”지혁이 나지막하게 물었다.지혁의 잘 생긴 얼굴이 보이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볼이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분명 평범한 말인데 왜 그의 입에서 나오자 그렇게 달콤한 것일까?“음.”한참이 지나서야 유진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그럼 내가 더 착하면 누나가 저를 더 좋아할 거야?”그가 말했다.“…….”어린아이가 말하면 천진하고 귀엽게 느껴질 것이지만 지혁이 말하니 아주 매혹적이었다.“그럴 거야?”그는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갔고 얇은 입술이 거의 유진의 입술에 붙을 뻔했다.“……그럴 거야.”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유진은 분명히 지혁을 동생으로 여기는데 왜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올 때 그녀는 마치 모든 피가 머리 위로 솟아나는 것처럼 온몸이 뻣뻣해지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