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자기의 오른손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사실 조민혜한테 밟혀서 난 상처다.하지만 혁이를 걱정하게 할 수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오늘 청소하면서 실수로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그래?”강지혁은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혹시 누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제대로 혼쭐 내줄게.”‘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이 모든 사실을 훤히 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 혼자서도 보호할 수 있어.”“만약 보호할 수 없다면?”‘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마 너한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유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혹시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싫어?”지혁의 검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유진을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유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며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가 강해지면 그때 나 보호해 줘. 지금은 내가 너 보호해 줄게.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살짝 찢어진 옷을 벗어 바느실로 꿰매기 시작했다.그리고 지혁은 그 옆에 앉아 어두운 불빛에 감싸진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동작 때문에 유진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축 늘어졌는데 영양실조로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유진의 피부는 맑아 보이지 않았고 수려한 얼굴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듯한 무기력함이 있었다.하지만 꼼꼼히 바느질하며 내뿜고 있는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솔
“누나가 좋다면 난 다 좋아.”“내가 좋아하는 거 고르지 말고 네가 좋아해야지. 네가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른 스타일로 찾아줄게.”“그럴 필요 없어. 이게 좋아.”“그래, 그러면 이거로 구매한다?”임유진은 말하면서 벌써 구매하기 시작했다.그런 유진을 보고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물었다.“누나,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옷에, 핸드폰에 모두 그를 위해 사주면서 자기는 아껴 쓰고 있으니 말이다.“네가 내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혁은 그 '동생'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리게만 들렸다. 정말 그가 남자라는 걸 잊은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신정민은 클럽에서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기고 집에 돌아간 뒤 아버지한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GH 그룹과 관련된 정민의 집안 모든 사업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건 사업을 하는 정민의 집안에 그야말로 큰 손실이었다.그 외에도 그날 동창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 역시 직장을 잃거나 가문이 휘말려 각자 고통을 호소했다.그 중 당연히 민화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영은 인사팀에서 나오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팀에서 계약 해지 서류를 화영에게 주면서 해고 의사를 밝혔고 화영더러 일주일 내로 퇴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해고라니! 화영은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화영이 도시정비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기저기 인맥을 통해 공무직으로 들어간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화영의 맞선 상대도, 또 그전에 만났던 상대도 모두 화영의 직업을 높이 샀기에 화영을 우러러 본거다.그런데 만약 이대로 해고된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어려울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도 깎이고 더욱 맞선 상대도 화영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화영이 해고 사유를 물었을 때 인사팀에서는 그저 상부
조민혜의 태도에 민화영은 화가 거꾸로 솟았다. 인사팀에 화영과 친분이 있던 동료가 화영에게 몰래 알려주길, 이번 해고는 화영이 권력을 남용하여 환경위생과 직원을 마음대로 지시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그 일이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유진더러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킨 일뿐인데, 그 일을 계획한 주모자는 민혜다.“내가 너 협박이라도 했어? 너도 임유진이 당하는 꼴 보고 싶었으니까 한 거잖아. 난 그저 너한테 아이디어만 제공한 거야, 네가 그런 일 벌인 건 나랑 무관하다고.”민혜는 즉시 화영에게 선을 그었다.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화영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싸움으로 번졌다.그렇게 민혜와 관계를 끊은 뒤, 화영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딸이라고 화영의 부모님은 여기저기 인맥을 찾아 일을 해결하려고 뇌물을 돌렸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누구도 그 뇌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 데다 받았다 할지라도 이틀도 안 돼서 다시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거였다.그렇게 의미 없는 행위가 지속되다가 결국 화영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지인이 몰래 그들에게 언질을 주었다.“이봐, 자네 딸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건가? 듣자하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던데. 도시정비국 국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 딸 앞으로 공무직은 더 이상 찾지 못할 것 같다더라고, 그것뿐인가? 일반 직장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그 말을 들은 화영의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해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딸에게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을 건드린 거냐고 따져 물었다.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니? 화영은 오히려 멍해졌다. 평소 일하던 도시정비국에서도 높은 분들은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던 그때 화영은 갑자기 동창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 날 막바지에 유진을 도와줬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다.‘그렇다면…… 임유진의 배후가 강지혁이란 말인가?’하지만 화영은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유진은 지혁의 약혼녀였던 진애령을 죽인 가해자이기에 절대 그럴 리 없었기 때문
“그…… 그런데 나 동창들 앞에서 너 망신 당하게 했잖아. 신정민한테 그런 꼴도 당하게 하고…….”“그건 걔네가 그런 거지 너랑 무슨 상관인데?”‘나랑 당연히 상관있지!’민화영은 속으로 소리쳤다. 생전 처음 죄를 뒤집어쓰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됐어. 다른 일 없으면 가봐 나 일하러 가봐야 해.”말을 마친 임유진은 화영의 죽상이 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처럼 돌아서 건너편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유진은 화영이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사정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날 일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하지만 유진이 바닥을 절반쯤 쓸었을 때 웬 인형 하나가 갑자기 유진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동현이었다.동현은 얼굴을 살짝 붉힌 모습으로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유진 씨, 저 미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는 지금 연애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그런데 저 정말 진심이에요. 기다릴게요. 유진 씨가 언젠가 다시 연애하고 싶어질 때 저 찾아와 줘요.”말을 마친 동현은 자기가 한 말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바꿨다.“아니, 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저라는 사람이 유진 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기억해 줘요…….”유진은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다. 솔직히 거절당하고도 동현이 이렇게 다가온다는 게 놀라웠다.“동현 씨 충분히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요. 저 환경미화원이라서 인맥도 없고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어요. 좋은 아내감은 더욱 아니고요.”“그래도 전 유진 씨가 좋아요.”이 말을 내뱉은 동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서민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 남자친구도 없다면서요. 저 기다릴게요.”“그래도…….”유진은 끝까지 거절하고 싶었지만 붉게 상기 채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현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눈앞의 남자는 지금 유진에게 진심인 건 확실했다. 미옥이 말했던 것처럼 성실한 사람인 것도 맞고.이런 남자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유진이 감옥에 갔었다는 걸 알
‘내가 너무 갔나?’곽동현은 바삐 움직이는 임유진을 보자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유진 씨, 그…… 그러면 저는 먼저 가볼게요. 일 보세요.”홀연히 사라지는 동현의 뒷모습을 본 강지혁은 갑자기 유진의 턱을 잡으며 반강제로 유진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누나가 다른 남자를 그렇게 보는 게 싫어.”그 말에 유진은 웃음이 나왔다.“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 동현 씨한테 그런 마음 없어.”“그러면 상대도 그렇대?”하지만 지혁의 물음에 유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저 사람 동료는 맞지만 누나 좋아하는 동료 아니야?”“맞아. 나 이미 미옥 언니를 통해 거절 의사를 밝혔어.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저 사람 누나랑 어울리지 않아. 누나도 그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거절 의사를 밝혀야지.”“그건 네가 나를 너무 좋게 생각해서 그래. 솔직히 내가 오히려 동현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 동현 씨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어, 우리 환경위생과 여자들 중 동현 씨 마음에 둔 여자도 꽤 많고.”“누나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자격 있어.”지혁은 바로 유진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소유욕이 묻어있었다.유진이 청소를 마치고 도구를 환경위생과 사무실로 돌려주러 갔을 때, 민화영이 갑자기 유진에게 또 달려들었다.“유진아, 나 용서해주면 안 돼? 나 정말 그 직장 잃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 직업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제발, 네가 우리 국장님한테 나를 용서했다고 말 좀 전해줘. 국장한테 해고 명령 철회하라고 해줘. 응?”화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건드린 사람은 유진뿐이라는 결론을 얻어 이럴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화영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너 잘못된 사람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야. 너희 국장이 너 해고한 거 나랑 아무런 상관없어. 나 너희 국장 만나본 적도 없다고.”“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한 짓을 한 사람은
집으로 가는 길, 임유진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강지혁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소민준이라고 알아?”“SY 그룹 대표 말하는 거야?”“너도 아는구나. 맞아, 뉴스에 진세령의 약혼 상대로 보도되던 그 남자. 그 사람이…….”유진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내 전 남자친구야.”지혁도 갑자기 가던 걸음을 멈추고 유진의 곁에 가만히 서서 유진을 바라봤다.어쩌면 너무 오래 가슴속에 누르고 있던 감정이라 그런지 그 순간 유진은 저도 모르게 지난 일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놀랍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이 예전에 그런 사람의 여자친구였다는 게?”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나 그때 대학 졸업하자마자 변호사 됐었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랑 결혼도 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생각지 못한 교통 사고로 내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명을 쓰게 됐는데 그때 소민준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차버리더라. 심지어…….”잠시 뜸을 들이던 유진은 감옥에서 있었던 일만큼은 끝내 입에 담지 못했다.그때 생각을 하니 손끝에서 다시 고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은 새로운 손톱이 자랐고 부러졌던 손가락도 다시 나았다곤 하지만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다 지난 일이야.”유진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그걸 듣고 있던 지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진이 계속 말하지 않아도 지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고이준이 그에게 줬던 자료 속에 유진이 그간 겪었던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으니.그 자료를 볼 때만 해도 지혁은 솔직히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쿡쿡 찔려왔다.지금껏 여자를 위해 마음 아파한 적 없는 지혁에게 있어 유진의 과거를 마음 아파하는 이 감정이 너무나 생소했다.그때 유진이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그때부터 난 사랑을,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을 쉽게 믿지 않아. 오늘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이 내
임유진은 강지혁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이건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 두 재벌 집안이 서로 사돈 관계를 맺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그런데 누가 감히 광고를 내리라 마라 해?’그때, 유진의 눈앞을 가리던 지혁의 손은 갑자기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돼었다. 잠시 후,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자신의 눈에서 떼며 그를 바라봤다. “고마워, 혁아.” 유진은 지혁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이제 우리 집에 갈까? 집에 가서 우리 같이 밥이나 먹자!”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지혁은 커다란 옥외 전광판 광고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유진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유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경비실에 들러 택배를 찾았다. 유진이 산 니트 스웨터가 도착한 것이었다.유진은 얼른 택배상자를 열어 스웨터를 꺼냈다. 괜찮은 소재에 이만하면 가성비도 좋은 편이었다. “혁아, 이거 너한테 맞는지 한번 입어 볼래.”유진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후, 청록색 계열의 체크무늬 스웨터를 걸친 지혁을 보고, 유진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음, 역시 잘 맞는군. 이 스웨터를 입으니까 더 멋있는데?’유진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혁아, 허리 좀 굽혀봐.”지혁은 유진의 말 대로 허리를 굽혔다. 유진은 빗으로 지혁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얼굴 윤곽이 환하게 드러났다. 유진은 전부터 지혁이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혁은 늘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유진은 오늘 완전히 드러낸 지혁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동생 정말 예쁜데?”유진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만약 네가 이렇게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길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준다면, 여자들이 너도나도 전단지를 받으려고 몰려들 걸?”지혁은 ‘우리’라는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시간 있을 때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좀 다듬을까? 우리 동생 예쁜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서 너무 안타까워!”
강지혁은 조용히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누나는 내가 돈이 너무 없어 보여??”“아니, 아니야!”유진은 고개를 저었다.“나는 단지 네가 더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야.” 아마도 유진은 평생 이런 삶을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지혁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걱정 마. 그렇게 될 거니까. 그때가 되면 난 누나가 어떤 삶을 원하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거야.”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았다.지혁은 단지 게임일 뿐일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유진의 삶을 바꾸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일은 지혁에게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지혁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진은 지혁이 정말 그렇게 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유진은 지혁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좋아! 그럼 나는 이제 우리 동생만 믿는다? 그럼 난 아무 일도 안하고 편하게 앉아서 돈만 펑펑 써야지! 백수처럼!”“그래, 그렇게 해.”지혁의 깊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나가 원하기만 한다면, 평생 돈만 쓰는 백수로 살 수 있게 해 줄게.’다음날, 고이준은 휴게실에서 직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오늘 우리 강 대표님 입은 니트 스웨터 봤어?][아니, 왜?][지금 인터넷 상에서 가장 핫한 스웨터인 것 같아서 말이야.][그럴 리가 있겠어? 강 대표님이 그런 옷을 입는다는 게 말이 돼?][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혹시 유명 브랜드 옷을 짝퉁으로 제작되어서 유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긴, 대표님이 입고 계신 옷은 느낌이 다르기는 해. 나도 우리 남편에게 사주고 싶을 정도라니까.][그 정도야? 그럼, 나도 그 옷 살 수 있는 링크 좀 보내줘.]이준은 조용히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이준은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오늘 보스가 입고 있는 옷은 지금 인터넷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 니트 스웨터가 맞았다. 심지어 보스가 입은 것과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한 직원도 보았다. 정작 보스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경빈 씨!”공수진은 이경빈의 이름을 외치며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이경빈은 시선을 내려 탁유미의 떨리는 손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공수진을 향해 말했다.“먼저 올라가. 금방 갈게.”“네?”공수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열림 버튼을 결국 누르지 못하고 그렇게 문이 닫힐 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불안함과 초조함이 밀려왔다.그도 그럴 것이 문이 닫히기 전 이경빈이 그녀가 탁유미를 바라보았으니까.게다가 그 눈빛은 누가 봐도 망설이는 눈빛이었다.뭘 망설이는 거지?왜 탁유미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거지?4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이경빈은 탁유미만 보면 흔들리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탁유미 그 여자가 뭐라고?공수진은 이를 꽉 깨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어차피 죽을 거 그냥 지금 빨리 죽어버리지! 왜 또 경빈 씨 앞에서 알짱대는 건데!?’엘리베이터 앞.이경빈은 지금 자기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다.탁유미가 ‘잠깐만’이라고 외치며 팔을 잡았을 때 정말 발걸음이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할 말이 뭐야. 빨리 말해.”이경빈이 그녀에게 잡힌 팔을 우악스럽게 빼내며 말했다.더 이상 그녀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싫었다.“나랑 윤이한테 시간 좀 내줘. 같이 놀이공원 가자. 윤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엄마랑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을 가본 적이 없어. 그래서 윤이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주고 싶어.”“좋은 추억?”이경빈이 차갑게 웃었다.“탁유미, 너랑 내가 윤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가는 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해?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들을 포기하는 척 이렇게 다시 나한테 접근하는 게 목적이야? 새삼 이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그립기라도 해?”탁유미는 떨리기도 하고 또 불안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상처를 받았다던가 분노했다던가 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이경빈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으니까.탁유미는 그저 이경빈이 자
탁유미는 이경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와 프런트 데스크 직원에게 물었다.“이경빈 씨를 만나고 싶은데 지금 호텔에 있나요?”“이경빈 고객님은 현재 외출 중이세요. 용건이 있으신 거면 직접 연락을 해보시거나 로비에서 기다려주세요.”직원이 예의 있게 답해주었다.탁유미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연락하고 싶어도 이경빈의 연락처 같은 건 진작 삭제했으니까. 그녀가 이경빈과 연락할 수 있는 루트는 양육권 분쟁 준비 당시 연락을 취했었던 그의 변호사와 연락하는 방법뿐이었다.탁유미는 넓은 로비 한쪽에 가만히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시간이 정처 없이 흐르고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때 문이 열리고 드디어 이경빈이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옆에는 공수진도 함께 있었다.이경빈은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탁유미의 모습을 발견했다.로비에 사람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그의 눈은 마치 자석처럼 단번에 탁유미 쪽으로 이끌렸다.“네가 왜 여기 있어?”이경빈이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할 말이 있어.”탁유미가 조금 쭈뼛거리며 말했다.“할 말?”이경빈이 코웃음 쳤다.“나한테는 3개월 동안 만큼은 찾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하더니 네가 찾아오는 건 또 괜찮나 보지?”비아냥 섞인 그의 말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옆에 있던 공수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경빈 씨는 왜 찾아왔어요? 설마 이제 와서 양육권은 못 주겠다고 하려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해도 안 돼요. 약속은 약속이니까!”말을 마친 후 공수진은 이경빈의 팔을 더 꽉 잡았다.“경빈 씨, 이만 가요.”“그래.”이경빈이 지나쳐 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자 탁유미가 손을 뻗어 이경빈의 앞을 막아섰다.“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몇 분이면 돼!”그러자 이경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우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더 남았나? 3개월 얘기를 꺼낸 건 너야. 나도 더는 너 안 찾아갈 테니까 너도 나 찾아오지 마. 그리고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면 꿈 깨!”
한지영은 깨어났다고 해도 한두 시간가량 뒤면 또다시 잠이 들고는 했다.오늘도 새벽녘에 잠시 눈을 떴다가 몇 시간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탁유미는 임유진보다 일찍 와 있었기에 투명 유리 너머로 한지영이 눈을 뜬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줄곧 한지영에게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었기에 누워있는 한지영을 보는 게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탁유미는 자신은 얼마 안 가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한지영은 이번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잘 살기를 바랐다.물론 지금껏 한지영에게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병문안을 다 마친 후 탁유미와 임유진은 함께 병원을 나섰다.“언니, 몸은 좀 어때요? 실력 좋은 선생님들한테 한번 봐달라고 할까요?”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괜찮아요. 약만 꾸준히 먹으면 통증도 가벼워지거든요. 그리고 지금 봐주는 선생님도 실력 있는 분이에요.”탁유미의 말은 사실이었다.임유진이 걱정되어 탁유미의 주치의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쪽으로는 유명한 의사였다.“그럼 금전적으로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알겠어요. 고마워요.”탁유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생이 평탄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임유진 같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 그녀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행운아처럼 느껴졌다.“참, 윤이는요? 윤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지난번에 사준 옷이랑 장난감은 마음에 든대요?”임유진이 물었다.“엄청 좋아했어요. 요 며칠은 유진 씨가 사준 장난감만 가지고 놀아요. 그리고 옷은 한번 입어 보더니 자기 마음에 쏙 들었는지 특별한 날 입을 거라며 옷장에 고이 모셔둔 거 있죠?”그 말에 임유진은 윤이와는 정반대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새 옷을 사게 되면 근처 편의점을 가는데도 그 옷을 입으려 했고 다른 옷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다음에 윤이 데리고 놀이공원이라도 가야겠어요. 윤이가 새 옷 입은 모습이 궁금해요.”“그래요.”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뭔가 떠오른
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움찔했다.임유진의 목소리와 그녀의 따뜻한 품이 마치 끝이 없는 바다처럼 그의 모든 불안을 다 잠재워주고 있었다.아마 그녀가 있어 살아있는 게 이토록 감사하게 느껴질 것이다.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렇게까지 다채롭고 즐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저 매일매일 의미 없는 하루만 보낼 뿐 삶에 대한 더 큰 욕망은 없었을 것이다.“유진아, 너랑 있으면 꼭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강지혁이 중얼거렸다.“꿈 아니야. 너랑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내게 꿈이 아닌 듯 나도 너한테 꿈이 아니야.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이를 가진 것도 이렇게 함께 사는 것도 전부 꿈이 아니야.”임유진이 진지하게 답했다.“그러니까 혁아, 나한테 조금만 더 기대줘. 우리한테는 앞으로 좋은 일밖에 없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얼굴을 가까이해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왔다.“응. 그럴게.”두 사람의 미래가 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좋은 일밖에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만 그는 지금 이 달콤함이 영원하기만은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만약 그녀가 곁에 있어 주는 지금이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하면 그는 기꺼이 눈을 가린 채 이 꿈속에 갇히고 싶었다....임유진은 한지영 부모님으로부터 한지영이 깨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임유진은 눈가가 다 빨개졌다.깨어났다고는 하나 그저 눈만 뜨고 조금의 반응만 있을 뿐 여전히 목소리는 내지 못해 무슨 이유로 이런 꼴을 당했는지 물어보기는커녕 간단한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게다가 임유진이 막 중환자실 도착하고 얼마 안 가 한지영은 또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아주머니,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몸이 차차 회복되면 말을 할 수 있게 될 거예요.”임유진이 한지영 부모님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자 이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거렸
“그래?”강지혁이 피식 웃으며 임유진을 안아 자기 다리 위에 앉혔다.임유진은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강지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정말 나한테 소홀한 적 없어?”강지혁의 얼굴은 어느새 임유진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밤하늘처럼 예쁜 눈동자가 다정하고 또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혁이 이럴 때면 임유진은 꼭 여우에게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참, 너 생일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지?”임유진이 핑크색으로 물든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생일 선물로 뭘 줄지는 이미 다 생각해뒀어. 대신 뭘 받든 싫어하면 안 돼.”그 말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네가 뭘 주든 난 기쁘게 받을 거야. 그런데 내 생일날은...”강지혁이 잠깐 뜸을 들였다.“나는 그날 우리 둘이서만 있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 말고.”그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우리 둘이서만?”“응. 내 생일이잖아. 나는 다른 사람이 오는 거 싫어.”강지혁의 목소리가 어쩐지 묘하게 가라앉았다.그리고 눈가에는 언뜻 쓸쓸함도 스쳐 지나갔다.“이유 물어봐도 돼?”강지혁의 기분 변화를 감지한 임유진이 물었다.그 질문에 강지혁은 입을 꾹 닫은 채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그의 호흡이 어딘가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꼭 어두운 무언가가 강지혁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혁아, 우리 이제 부부야. 부부끼리는 좋은 일은 물론이고 힘든 일도 다 공유하는 거야. 너한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 마음이 편해지게 들어줄 수는 있어.”임유진의 다정한 말에 강지혁은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임유진은 이제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그녀 앞에서는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내 생일 다음 날, 그 여자가 나랑 아버지를 떠났어.”임유진은 그 말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강지혁이 말한 ‘그 여자’가 그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날은 모든 게 다 꿈만 같았어. 정말 모든 게 다 평화로웠
“못 들어주겠네, 정말. 이경빈 씨, 뚫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그때 옆에 있던 임유진이 참지 못하고 셋 사이에 끼어들었다.아직 당시 골수를 이식해준 실질적인 증거를 못 찾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그녀는 아마 바로 이경빈에게 골수 기증가자 탁유미라고 말했을 것이다.이경빈은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임유진 씨, 당신이 아무리 강지혁 씨의 아내라고 해도 나한테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은 없습니다.”이에 임유진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 이경빈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이경빈 씨, 내 말 허투루 듣지 마세요. 당신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지 곧 알게 될 테니까.”탁유미는 임유진과 이경빈 사이에 트러블이라도 생길까 봐 서둘러 임유진의 팔을 끌어당겼다.임유진은 지금 뱃속에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품고 있기에 이렇게 화를 내게 하면 안 된다.“유진 씨, 난 괜찮으니까 화내지 말아요.”탁유미는 말을 마치고 임유진을 자기 뒤쪽으로 보낸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조금전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쓸쓸한 감정 따위 보이지 않았다.그 대신 자리 잡은 건 마치 낯선 타인을 보는 듯한 냉랭함이었다.“이경빈,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윤이한테 잘하는 거, 그거 하나야.”다른 건 이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이 남자 때문에 탁유미는 그간 너무 많은 감정을 써버렸다.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이 남자에게 쓸 여력의 감정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설사 감정이 남아 있다고 한들 이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돌려 임유진의 팔을 잡았다.“유진 씨, 이만 가요.”탁유미와 임유진이 매장을 완전히 떠나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을 때까지 이경빈은 그 자리에 선 채 탁유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해지고 또 초조해지는 걸까.꼭 줄곧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하지만 대체 뭘...?뭘 잃
약 처방을 다 받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유진은 윤이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고 싶다며 탁유미와 함께 근처 백화점에 들렀다.“장난감은 이미 많아요. 동현 씨가 준 것만 해도 한가득 이에요.”탁유미가 거절하려 하자 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언니, 장난감이 많아서 싫어할 애들은 없어요. 이왕 나온 김에 윤이 겨울옷도 좀 사줘야겠다. 슬슬 날씨가 쌀쌀해지니까요.”임유진은 장난감을 다 고른 후 탁유미를 데리고 키즈 코너 쪽으로 걸어갔다.예쁜 옷들을 가득 고른 다음 돈을 지급하고 매장을 떠나려는데 그때 익숙한 두 명이 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임유진은 그 두 사람을 보고는 바로 안색을 굳혔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필이면 이 넓은 백화점 안에서 이경빈과 공수진을 마주쳐 버렸다.물론 상대방도 임유진과 탁유미를 보고는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 흠칫했다.이경빈은 탁유미 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탁유미는 오늘 안색이 무척이나 안 좋아 보였고 가뜩이나 가녀린 몸인데 옷도 얇은 것을 입고 있어 더욱더 왜소해 보였다.실내에서는 큰 문제가 될 게 없는 옷이지만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람 하나 제대로 막아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이 여자는 날씨 변화도 제대로 못 느끼나?“어머,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공수진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이경빈의 팔짱을 더 세게 꼈다.“지난번에는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서로서로 다 잊어버리는 거로 해요. 제가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참, 안 그래도 윤이 옷 사러 온 건데 이렇게 된 거 예쁜 옷 고를 때까지 잠깐 기다려 줄래요? 지난번에 보니까 제대로 된 옷 하나 없더라고요. 윤이도 이제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데 허름한 옷을 입힐 수는 없잖아요.”퍽 아이를 위한 말인 것 같지만 말투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마치 불쌍한 사람들에게 적선해준다는 듯한 느낌이었다.“필요 없어.”아니나 다를까 탁유미가 차가운 목소리
임유진은 기사님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탁유미와 함께 병원으로 왔다.줄을 서서 접수를 기다리는 동안 탁유미의 안색이 또다시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그 모습에 어제 강지혁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아주머니 말대로 당시 언니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을 찾으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그러자 탁유미가 애써 미소를 지어보았다.“유진 씨도 엄마랑 같은 생각인 거예요?”“간이식만이 살길이잖아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간 기증은 가망이 없어요. 엄마가 나 몰래 병원에 연락해서 당시 내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어제 병원 측에서 전화가 와 받아봤더니 기증받은 사람이 간 기증을 거부했대요.”“네? 그럴 리가요.”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연한 일이죠.”탁유미가 웃으며 답했다.“나랑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간을 떼어내 주는 리스크를 감당하려고 할 리가 없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삼켰던 말을 입밖에 내뱉고 말았다.“만약 그 사람이 이경빈이라면요? 언니한테서 골수를 이식받은 사람이 이경빈이라면요?”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을 듣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이경빈이라뇨? 유진 씨,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어제 강지혁이 알아낸 것들을 전부 다 얘기해주었다.“그래서 나는 언니 골수를 받은 사람이 이경빈이라고 생각해요. 공수진은 골수를 기증한 적 따위 없는 거죠.”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 입만 달싹일 뿐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세 사람의 혈액형이 다 똑같은 특수한 혈액형이라니, 이런 우연이 정말 가능할까?탁유미는 자신이 구한 사람이 이경빈이라는 말에 문득 그때 의사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의사는 당시 골수 이식을 받는 사람은 젊은 남자고 외동아들이라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했었다.누군가를 특징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들이었고 이런 사람들은 거리에 수두
물론 이경빈이 탁유미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다면 말이다.“만약 거부하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수술대 위에 올려놓을 거야!”임유진이 이를 꽉 깨문채 단호하게 말했다.이에 강지혁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신기해서. 넌 이제껏 그 어떤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통제한다거나 법망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려고 한 적 없잖아.”그 말에 임유진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흥분한 나머지 변호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언니한테 감정이입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봐. 만약 이대로 언니가 세상을 떠나면 공수진은 그때부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기 세상인 것처럼 굴 거니까. 애초에 죄책감 따위 없는 인간이겠지만.”임유진은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이경빈이 정말 기증을 거부하면 혁이 너는 내가 하려는 일에 동의해줄 수 있어? 날... 도와줄 수 있어?”임유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복잡했다.그도 그럴 것이 이건 그녀가 평소 지키던 선을 벗어나는 일이니까.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윤이가 엄마를 잃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강지혁은 그녀의 질문에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전에도 말했지.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주겠다고. 그게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해도 난 널 위해 해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강지혁은 지금 충동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단지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그는 정말 임유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만약 네가 날 도운 거로 인해 너한테 불필요한 일이 생기면?”강지혁은 그 질문에 임유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게 뭐? 유진아, 나는 너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 하나 달갑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강지혁에게 잡힌 손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더니 눈을 맞추고 자기 진심을 내보였다.“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