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임유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됐…… 됐어. 얼른 밥 먹자. 식겠다.”유진은 대뜸 손을 빼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파묻고 앞에 놓인 죽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눈에 드리운 웃음기도 더욱 짙어졌다.“그럼 나는 어때? 난 좋아해?”“당연하지.”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이에 지혁은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었다.“나도 누나 좋아. 엄청.”이렇게 그의 흥미를 자아내는 사람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도시정비국의 며칠간의 시찰이 끝나자 민화영은 유진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유진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고교 동창 모임 있는데 너도 꼭 참석해.”‘고교 동창 모임?’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유진의 상황으로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간다면 아마 비웃음만 받을 게 뻔했다.“아니야, 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어떻게 그래. 고교 동창들 어렵게 모이는 자리인데. 그리고 네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다 같이 참석하면 좋잖아.”열성을 다해 설득하는 걸 보니 화영은 유진이 동창 모임에 꼭 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학창 시절 잘 나가던 학급 공식 여신에 1등이던 유진이 이토록 초라하게 변한 걸 다른 동창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 상황만 생각하면 화영은 유진의 추한 모습을 하루빨리 동창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나 주말도 출근해야 해. 너 설마 나한테 주말이 있다고 생각해?”유진의 말에 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그래도…….”“나 쓰레기 버리러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유진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화영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유진은 환경위생과 계장으로부터 중요한 서류를 도시정비국 직원한
‘강지혁이…… 임유진을 만나려 한다고?’진세령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진 씨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령은 강지혁의 약혼녀였던 자기 언니에게도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혁이 세령의 언니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강 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적합해서라는 것도.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눈앞의 남자는 흔들림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마치 약혼녀의 죽음이 지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듯이 말이다.그 때문에 세령은 대체 이 남자가 어떤 여자 앞에서 감정 기복을 보일지 궁금했었다.그런데 지금, 세령은 그걸 보고 말았다.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세령이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이다.‘그 이유가…… 임유진 때문이라고? 저 버러지만도 못한 여자 때문에?’세령은 얼른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민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그 시각, 지혁 옆에 있던 고이준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설마 화난 건가?’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그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난 사람을 이준은 한 번도 본적 없다.하지만 이준이 직원을 부르려던 찰나, 지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아니다. 네가 직접 가서 처리해. 너무 시끄러워!”이준은 또 다시 대답하고는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순간 유진은 마치 혁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던 혁이를 떠올리자 유진은 자기 생각을 이내 부정했다. ‘아니야, 혁이는 이렇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 혁이…… 혁이…….’이윽고 머릿속에 차갑지만 꼭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혁이는 슬퍼할까?’점점 숨이 막혀와 거의 쓰러지려던 찰나, 유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힘이 풀었다. 그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며 쉴 새 없이 기침했고 공기를 탐하 듯 크게 호흡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진세령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세령 앞에 나타났다.그는 바로 강지혁의 개인 비서 고이준이었다.“고 비서님!”이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건 사람은 오히려 황 매니저였다.하지만 이준은 대답 대신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듯 신정민을 쳐다봤다.‘그러게 건드려도 왜 하필이면 대표님이 관심 가진 사람을 건드리냐고.’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른 동안 아까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준은 생각을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아까 저 사람이 한 짓을 똑같이 돌려주세요.”이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쎄 보이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바로 명령에 따라 정민을 연못가로 끌고 가 정민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정민이 유진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돌려주었다.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려고 밖으로 달려온 동창들뿐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경호원들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황 매니저는 심지어 정민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어쨌든 주주 중 한 세력인 신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강지혁이라는 대단한 인물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을뿐더러 경쟁 상대가 골탕을 먹으면 기뻐할 다른 주주들을 의식해서였다.그때,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민준과 세령을 바라봤다.그제서야 진세령은 얼른 미소를 장착한 채 이준에게로 다가갔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저희도 얼른 올라가 볼게요.”“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두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도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의 반응 따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에 세령과 민준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세령은 이내 위험한 눈빛을 한 채 이를 갈았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임유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임유진, 너 절대 가만 안 둬
임유진은 자기의 오른손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사실 조민혜한테 밟혀서 난 상처다.하지만 혁이를 걱정하게 할 수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오늘 청소하면서 실수로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그래?”강지혁은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혹시 누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제대로 혼쭐 내줄게.”‘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이 모든 사실을 훤히 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 혼자서도 보호할 수 있어.”“만약 보호할 수 없다면?”‘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마 너한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유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혹시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싫어?”지혁의 검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유진을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유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며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가 강해지면 그때 나 보호해 줘. 지금은 내가 너 보호해 줄게.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살짝 찢어진 옷을 벗어 바느실로 꿰매기 시작했다.그리고 지혁은 그 옆에 앉아 어두운 불빛에 감싸진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동작 때문에 유진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축 늘어졌는데 영양실조로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유진의 피부는 맑아 보이지 않았고 수려한 얼굴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듯한 무기력함이 있었다.하지만 꼼꼼히 바느질하며 내뿜고 있는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솔
“누나가 좋다면 난 다 좋아.”“내가 좋아하는 거 고르지 말고 네가 좋아해야지. 네가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른 스타일로 찾아줄게.”“그럴 필요 없어. 이게 좋아.”“그래, 그러면 이거로 구매한다?”임유진은 말하면서 벌써 구매하기 시작했다.그런 유진을 보고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물었다.“누나,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옷에, 핸드폰에 모두 그를 위해 사주면서 자기는 아껴 쓰고 있으니 말이다.“네가 내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혁은 그 '동생'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리게만 들렸다. 정말 그가 남자라는 걸 잊은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신정민은 클럽에서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기고 집에 돌아간 뒤 아버지한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GH 그룹과 관련된 정민의 집안 모든 사업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건 사업을 하는 정민의 집안에 그야말로 큰 손실이었다.그 외에도 그날 동창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 역시 직장을 잃거나 가문이 휘말려 각자 고통을 호소했다.그 중 당연히 민화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영은 인사팀에서 나오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팀에서 계약 해지 서류를 화영에게 주면서 해고 의사를 밝혔고 화영더러 일주일 내로 퇴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해고라니! 화영은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화영이 도시정비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기저기 인맥을 통해 공무직으로 들어간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화영의 맞선 상대도, 또 그전에 만났던 상대도 모두 화영의 직업을 높이 샀기에 화영을 우러러 본거다.그런데 만약 이대로 해고된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어려울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도 깎이고 더욱 맞선 상대도 화영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화영이 해고 사유를 물었을 때 인사팀에서는 그저 상부
조민혜의 태도에 민화영은 화가 거꾸로 솟았다. 인사팀에 화영과 친분이 있던 동료가 화영에게 몰래 알려주길, 이번 해고는 화영이 권력을 남용하여 환경위생과 직원을 마음대로 지시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그 일이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유진더러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킨 일뿐인데, 그 일을 계획한 주모자는 민혜다.“내가 너 협박이라도 했어? 너도 임유진이 당하는 꼴 보고 싶었으니까 한 거잖아. 난 그저 너한테 아이디어만 제공한 거야, 네가 그런 일 벌인 건 나랑 무관하다고.”민혜는 즉시 화영에게 선을 그었다.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화영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싸움으로 번졌다.그렇게 민혜와 관계를 끊은 뒤, 화영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딸이라고 화영의 부모님은 여기저기 인맥을 찾아 일을 해결하려고 뇌물을 돌렸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누구도 그 뇌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 데다 받았다 할지라도 이틀도 안 돼서 다시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거였다.그렇게 의미 없는 행위가 지속되다가 결국 화영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지인이 몰래 그들에게 언질을 주었다.“이봐, 자네 딸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건가? 듣자하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던데. 도시정비국 국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 딸 앞으로 공무직은 더 이상 찾지 못할 것 같다더라고, 그것뿐인가? 일반 직장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그 말을 들은 화영의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해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딸에게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을 건드린 거냐고 따져 물었다.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니? 화영은 오히려 멍해졌다. 평소 일하던 도시정비국에서도 높은 분들은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던 그때 화영은 갑자기 동창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 날 막바지에 유진을 도와줬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다.‘그렇다면…… 임유진의 배후가 강지혁이란 말인가?’하지만 화영은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유진은 지혁의 약혼녀였던 진애령을 죽인 가해자이기에 절대 그럴 리 없었기 때문
“그…… 그런데 나 동창들 앞에서 너 망신 당하게 했잖아. 신정민한테 그런 꼴도 당하게 하고…….”“그건 걔네가 그런 거지 너랑 무슨 상관인데?”‘나랑 당연히 상관있지!’민화영은 속으로 소리쳤다. 생전 처음 죄를 뒤집어쓰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됐어. 다른 일 없으면 가봐 나 일하러 가봐야 해.”말을 마친 임유진은 화영의 죽상이 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처럼 돌아서 건너편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유진은 화영이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사정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날 일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하지만 유진이 바닥을 절반쯤 쓸었을 때 웬 인형 하나가 갑자기 유진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동현이었다.동현은 얼굴을 살짝 붉힌 모습으로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유진 씨, 저 미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는 지금 연애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그런데 저 정말 진심이에요. 기다릴게요. 유진 씨가 언젠가 다시 연애하고 싶어질 때 저 찾아와 줘요.”말을 마친 동현은 자기가 한 말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바꿨다.“아니, 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저라는 사람이 유진 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기억해 줘요…….”유진은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다. 솔직히 거절당하고도 동현이 이렇게 다가온다는 게 놀라웠다.“동현 씨 충분히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요. 저 환경미화원이라서 인맥도 없고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어요. 좋은 아내감은 더욱 아니고요.”“그래도 전 유진 씨가 좋아요.”이 말을 내뱉은 동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서민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 남자친구도 없다면서요. 저 기다릴게요.”“그래도…….”유진은 끝까지 거절하고 싶었지만 붉게 상기 채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현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눈앞의 남자는 지금 유진에게 진심인 건 확실했다. 미옥이 말했던 것처럼 성실한 사람인 것도 맞고.이런 남자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유진이 감옥에 갔었다는 걸 알
‘내가 너무 갔나?’곽동현은 바삐 움직이는 임유진을 보자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유진 씨, 그…… 그러면 저는 먼저 가볼게요. 일 보세요.”홀연히 사라지는 동현의 뒷모습을 본 강지혁은 갑자기 유진의 턱을 잡으며 반강제로 유진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누나가 다른 남자를 그렇게 보는 게 싫어.”그 말에 유진은 웃음이 나왔다.“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 동현 씨한테 그런 마음 없어.”“그러면 상대도 그렇대?”하지만 지혁의 물음에 유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저 사람 동료는 맞지만 누나 좋아하는 동료 아니야?”“맞아. 나 이미 미옥 언니를 통해 거절 의사를 밝혔어.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저 사람 누나랑 어울리지 않아. 누나도 그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거절 의사를 밝혀야지.”“그건 네가 나를 너무 좋게 생각해서 그래. 솔직히 내가 오히려 동현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 동현 씨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어, 우리 환경위생과 여자들 중 동현 씨 마음에 둔 여자도 꽤 많고.”“누나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자격 있어.”지혁은 바로 유진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소유욕이 묻어있었다.유진이 청소를 마치고 도구를 환경위생과 사무실로 돌려주러 갔을 때, 민화영이 갑자기 유진에게 또 달려들었다.“유진아, 나 용서해주면 안 돼? 나 정말 그 직장 잃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 직업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제발, 네가 우리 국장님한테 나를 용서했다고 말 좀 전해줘. 국장한테 해고 명령 철회하라고 해줘. 응?”화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건드린 사람은 유진뿐이라는 결론을 얻어 이럴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화영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너 잘못된 사람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야. 너희 국장이 너 해고한 거 나랑 아무런 상관없어. 나 너희 국장 만나본 적도 없다고.”“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한 짓을 한 사람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
여동생에게 안기면 이런 느낌인 건가?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양녀로 들어온 또 다른 여동생과 많이 달랐다. 소안나는 매번 그를 보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는데 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도 모자라 엄마처럼 그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강선율은 아까 임유진도 밀쳐내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의 포옹도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이 꼭 끌어안은 채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강선율이 워낙 과묵하고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는데 수다쟁이에 애교쟁이인 딸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주니 둘 사이에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었다.게다가 강선율의 반응을 보면 현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의사인 박건태가 저택에 도착했다.서둘러 소파로 다가온 박건태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지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서서히 두 눈을 뜨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아까처럼 아프지 않아.”박건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전에는 한번 아프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팠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에게서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전과 달리 정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증상이 전보다 괜찮아진 건가...?’“그래도 검사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박건태의 노파심에 강지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2층으로 올라가 검사를 받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올라간 뒤 집사를 향해 물었다.“혁이 저러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그게... 사모님께서 곁에 없으신 뒤로 자주 두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셨어요. 근 2년간은 그래도 전보다 아프다고 하신 빈도가 줄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네요. 아마 사모님을 봬서 두통이 재발한 것 같아요.”집사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그리고
‘누나’라는 두 글자가 나왔을 때 임유진과 강지혁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소리에 조금 벙찐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당시의 강지혁은 그녀와 연인이 되어서도 가끔 둘만 있을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그에게는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강지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앞머리를 위로 젖힌 후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주었다.“혁아, 나 여기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놀람으로 머리가 아픈 것까지 다 잊어버렸다.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 거지?또한 처음 부르는 호칭일 텐데 왜 이토록 몇백 번이나 불러봤던 것처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럽게 입에서 뱉어지는 거지?“너...”강지혁이 뭔가 물으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플 때 자꾸 말하려고 하면 더 아플 거야. 이따 괜찮아지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손 좀 풀어줘. 내가 마사지해줄게.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의 손목은 빨갛게 손자국이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해방되었다.임유진은 분명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플 텐데도 마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적절히 힘을 조절해 가며 그가 아플 것 같은 곳을 세심하게 마사지해주었다.임유진의 몸은 마사지를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강지혁의 몸 가까이 기울어졌고 이에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숨결에 몸이 포근히 감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
“원해. 혁아, 나는 널 원해.”그리고 이건 임유진의 목소리였다.강지혁은 강선율을 꼭 끌어안고 있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었다. 그는 지금 마치 머리가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그럼 내 곁에서 떠나지 마. 평생 내 곁에만 있어.”“혁아, 난 널 떠나지 않아. 약속해.”“유진아... 유진아...”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임유진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중요했던 일인 것처럼 말이다.대체 이 대화들은 뭐지? 5년 전에 그와 그녀가 나눴던 대화인 건가?“윽...”“혹시 또 머리가 아프세요?!”집사가 강지혁의 상태를 눈치채고 서둘러 다가왔다.강지혁은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전에도 머리가 아픈 적이 간혹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아픈 것 같았다.강선율을 안고 있던 임유진은 집사의 말에 아이를 놓아주고 서둘러 강지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혁아, 왜 그래? 어디 아파?!”강지혁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며 두 눈에는 고통이 가득 서려 있었다.“아무래도 또다시 두통이 도진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박 선생님을 부를게요.”집사는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고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고통스러워하는 강지혁을 보다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뽑아 그의 땀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그런데 이마에 티슈가 닿기도 전에 강지혁의 손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뭐... 하는 거야...”강지혁의 입에서 힘겹게 말이 뱉어져 나왔다. 두통이 심한 탓인지 목소리까지 덜덜 떨려있었다.“너 땀 닦아주려고 그래.”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잡힌 손목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아프다는 걸 티 내지는 않았다.“혁아, 많이 아프면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을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아파질 거야. 그리고 조금만 참아. 의사
혹시 집사나 고이준이 얘기해줬나?임유진은 그 생각에 고개를 돌려 집사와 고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에 두 사람은 그녀에게 자신들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빠랑 함께 엄마 성묘하러 갔을 때 묘비 옆에 놓인 엄마 사진을 봤어요.”강선율이 답했다.임유진은 아들의 말에 이번에는 정말 사레에 들리고야 말았다.그녀는 시선을 홱 돌려 태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를 데리고 내 성묘하러 까지 갔어? 아니 뭐... 혁이는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왜 엄마 성묘하러 간 거야? 그리고 왜 묘비 옆에 엄마 사진이 있어?”그때 강선현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강선율이 대답했다.“엄마 살아 있는데?”“다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어.”“아니야. 엄마 안 죽었어.”아이들은 임유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관해 열띤 토론을 펼쳤고 임유진은 이에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두 아이 사이에 끼어들었다.“그만! 엄마는 보다시피 이렇게 잘 살아 있고 죽었다는 건... 오해야! 율아, 엄마 돌아왔어. 그간 율이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율이 곁에서 떠나지 않을게.”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메어있었다.그녀는 세쌍둥이가 그녀의 뱃속에서 힘차게 발길질을 하던 순간을 지금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전에는 기억을 잃어 현이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율이까지 만나게 되었다.다만 잔뜩 격앙된 임유진과 달리 강선율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엄마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아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엄마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강선율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떠나도 괜찮아요.”강선율이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말투까지 강지혁과 똑 닮아 있었다.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더더욱 눈시울이 빨개졌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시의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네가 뭐라고 내가 다시 널 사랑해야 하지?”강지혁은 마음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였다.하지만 목소리가 커진 탓에 어깨에 늘어져 있던 아이가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현이는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더니 고개를 살짝 들고 강지혁에게 말했다.“아빠, 시끄러워. 현이 잘 거니까 조용히 해.”아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 다시 강지혁의 볼에 뽀뽀를 했다.그리고 강지혁은 아이의 행동에 또다시 몸이 경직되었고 얼굴은 부자연스럽게 변했다.“현아, 엄마랑 같이 방에 가서 자자. 아빠 일해야 해.”임유진은 그제야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현이에게 말했다.이에 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진에게로 팔을 활짝 열었다.임유진은 조심스럽게 강지혁의 품에서 현이를 안아 들며 자신의 어깨에 아이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아이가 임유진에게로 넘어간 후 강지혁은 순간 몸의 일부가 사라진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빨리 아이를 떼어내고 싶었는데 막상 임유진이 아이를 안아가자 이상하게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아니, 오늘 대체 왜 이러는 거지?강지혁이 느낀 모든 이상한 느낌은 전부 다 눈앞에 있는 두 모녀 때문이었다.“우리는 이만 나갈게. 마저 일해.”임유진은 다시 잠이 들려고 하는 현이를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몸을 뒤로 돌렸다. 그녀는 나가기 위해 서재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다 뭔가 할 말이 남은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혁아, 나 죽은 거 아니니까 우리는 아직 부부고 나는 아직 네 와이프 맞지? 그런 거면 네가 다시 날 사랑하길 바라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임유진은 이 말을 남긴 후 그의 답변은 듣지도 않은 채 서재를 나가버렸다.그리고 강지혁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하다고?5년 전에 멋대로 떠나버린 여자에게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듣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하지만 분명히 심기가 불편해야 하는
그리고 강지혁은 아이를 품에 안아 든 채 마치 동상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왜 네가 들어와?”“어차피 누구든 현이만 데리고 나가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고 비서님 대신 내가 왔어.”임유진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아까 고이준은 그녀가 죽은 후 강지혁이 그녀의 유골함을 품에 끌어안고 이성을 잃고 절규했다고 하며 거의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했다.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임유진은 그저 그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며 아파 났다.이 남자는 대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 것일까.강지혁은 그때 그녀에게 자신의 목숨도 줄 수 있다고 했고 실제로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도 했다.자신의 목숨과 그녀의 목숨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그 날, 그는 망설임 없이 유언을 남기고 자신이 죽는 것을 택했으니까.강지혁은 정말 목숨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녀에 관한 건 추억도 감정도 뭐든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하지만 살아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면 된다. 그래서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사랑하게 하면 된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현이가 너 엄청 좋아하나 보네. 현이는 싫은 사람한테 안기거나 안겨서 자거나 하지 않아.”강지혁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더니 이내 다시 말을 내뱉었다.“애 데리고 나가.”임유진은 그 말에 딸을 안아가는 것이 아닌 한 걸음 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사실은 혁이 너도 현이 좋아하잖아. 안 그래?”그녀가 알고 있는 강지혁은 정말 싫으면 상대가 아무리 아이라도 절대 안아주지 않을뿐더러 자기 몸에 찰싹 달라붙게 하지 않는다.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왜 그렇게 확신하지?”“그야 너는 누가 네 목에 손대는 걸 쉽게 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