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임유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됐…… 됐어. 얼른 밥 먹자. 식겠다.”유진은 대뜸 손을 빼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파묻고 앞에 놓인 죽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눈에 드리운 웃음기도 더욱 짙어졌다.“그럼 나는 어때? 난 좋아해?”“당연하지.”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이에 지혁은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었다.“나도 누나 좋아. 엄청.”이렇게 그의 흥미를 자아내는 사람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도시정비국의 며칠간의 시찰이 끝나자 민화영은 유진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유진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고교 동창 모임 있는데 너도 꼭 참석해.”‘고교 동창 모임?’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유진의 상황으로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간다면 아마 비웃음만 받을 게 뻔했다.“아니야, 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어떻게 그래. 고교 동창들 어렵게 모이는 자리인데. 그리고 네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다 같이 참석하면 좋잖아.”열성을 다해 설득하는 걸 보니 화영은 유진이 동창 모임에 꼭 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학창 시절 잘 나가던 학급 공식 여신에 1등이던 유진이 이토록 초라하게 변한 걸 다른 동창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 상황만 생각하면 화영은 유진의 추한 모습을 하루빨리 동창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나 주말도 출근해야 해. 너 설마 나한테 주말이 있다고 생각해?”유진의 말에 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그래도…….”“나 쓰레기 버리러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유진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화영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유진은 환경위생과 계장으로부터 중요한 서류를 도시정비국 직원한
‘강지혁이…… 임유진을 만나려 한다고?’진세령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진 씨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령은 강지혁의 약혼녀였던 자기 언니에게도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혁이 세령의 언니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강 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적합해서라는 것도.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눈앞의 남자는 흔들림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마치 약혼녀의 죽음이 지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듯이 말이다.그 때문에 세령은 대체 이 남자가 어떤 여자 앞에서 감정 기복을 보일지 궁금했었다.그런데 지금, 세령은 그걸 보고 말았다.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세령이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이다.‘그 이유가…… 임유진 때문이라고? 저 버러지만도 못한 여자 때문에?’세령은 얼른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민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그 시각, 지혁 옆에 있던 고이준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설마 화난 건가?’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그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난 사람을 이준은 한 번도 본적 없다.하지만 이준이 직원을 부르려던 찰나, 지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아니다. 네가 직접 가서 처리해. 너무 시끄러워!”이준은 또 다시 대답하고는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순간 유진은 마치 혁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던 혁이를 떠올리자 유진은 자기 생각을 이내 부정했다. ‘아니야, 혁이는 이렇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 혁이…… 혁이…….’이윽고 머릿속에 차갑지만 꼭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혁이는 슬퍼할까?’점점 숨이 막혀와 거의 쓰러지려던 찰나, 유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힘이 풀었다. 그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며 쉴 새 없이 기침했고 공기를 탐하 듯 크게 호흡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진세령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세령 앞에 나타났다.그는 바로 강지혁의 개인 비서 고이준이었다.“고 비서님!”이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건 사람은 오히려 황 매니저였다.하지만 이준은 대답 대신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듯 신정민을 쳐다봤다.‘그러게 건드려도 왜 하필이면 대표님이 관심 가진 사람을 건드리냐고.’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른 동안 아까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준은 생각을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아까 저 사람이 한 짓을 똑같이 돌려주세요.”이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쎄 보이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바로 명령에 따라 정민을 연못가로 끌고 가 정민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정민이 유진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돌려주었다.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려고 밖으로 달려온 동창들뿐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경호원들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황 매니저는 심지어 정민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어쨌든 주주 중 한 세력인 신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강지혁이라는 대단한 인물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을뿐더러 경쟁 상대가 골탕을 먹으면 기뻐할 다른 주주들을 의식해서였다.그때,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민준과 세령을 바라봤다.그제서야 진세령은 얼른 미소를 장착한 채 이준에게로 다가갔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저희도 얼른 올라가 볼게요.”“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두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도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의 반응 따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에 세령과 민준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세령은 이내 위험한 눈빛을 한 채 이를 갈았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임유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임유진, 너 절대 가만 안 둬
임유진은 자기의 오른손 손등을 빤히 바라봤다. 그건 사실 조민혜한테 밟혀서 난 상처다.하지만 혁이를 걱정하게 할 수 없었기에 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오늘 청소하면서 실수로 부딪혔어. 아무것도 아니야.”“그래?”강지혁은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혹시 누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제대로 혼쭐 내줄게.”‘그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서 앞으로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지혁이 모든 사실을 훤히 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나 혼자서도 보호할 수 있어.”“만약 보호할 수 없다면?”‘만약 정말 그렇다면 아마 너한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유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들려왔다.“혹시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싫어?”지혁의 검은 눈동자는 집요하게 유진을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유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며 한참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네가 강해지면 그때 나 보호해 줘. 지금은 내가 너 보호해 줄게. 누구든 우리를 괴롭히지 않도록.”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하지만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저녁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살짝 찢어진 옷을 벗어 바느실로 꿰매기 시작했다.그리고 지혁은 그 옆에 앉아 어두운 불빛에 감싸진 유진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동작 때문에 유진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축 늘어졌는데 영양실조로 약간 누렇게 변해 있었다. 3년간의 감옥 생활과 지금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유진의 피부는 맑아 보이지 않았고 수려한 얼굴에는 생활고에 시달린 듯한 무기력함이 있었다.하지만 꼼꼼히 바느질하며 내뿜고 있는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솔
“누나가 좋다면 난 다 좋아.”“내가 좋아하는 거 고르지 말고 네가 좋아해야지. 네가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른 스타일로 찾아줄게.”“그럴 필요 없어. 이게 좋아.”“그래, 그러면 이거로 구매한다?”임유진은 말하면서 벌써 구매하기 시작했다.그런 유진을 보고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물었다.“누나,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옷에, 핸드폰에 모두 그를 위해 사주면서 자기는 아껴 쓰고 있으니 말이다.“네가 내 동생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혁은 그 '동생'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리게만 들렸다. 정말 그가 남자라는 걸 잊은 건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신정민은 클럽에서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기고 집에 돌아간 뒤 아버지한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GH 그룹과 관련된 정민의 집안 모든 사업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건 사업을 하는 정민의 집안에 그야말로 큰 손실이었다.그 외에도 그날 동창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 역시 직장을 잃거나 가문이 휘말려 각자 고통을 호소했다.그 중 당연히 민화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화영은 인사팀에서 나오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팀에서 계약 해지 서류를 화영에게 주면서 해고 의사를 밝혔고 화영더러 일주일 내로 퇴사하라고 했기 때문이다.해고라니! 화영은 한 번도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화영이 도시정비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모른다. 그렇게 여기저기 인맥을 통해 공무직으로 들어간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화영의 맞선 상대도, 또 그전에 만났던 상대도 모두 화영의 직업을 높이 샀기에 화영을 우러러 본거다.그런데 만약 이대로 해고된다면 다른 직업을 찾는 게 어려울뿐더러 친구들 사이에서 체면도 깎이고 더욱 맞선 상대도 화영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을지도 모른다.화영이 해고 사유를 물었을 때 인사팀에서는 그저 상부
조민혜의 태도에 민화영은 화가 거꾸로 솟았다. 인사팀에 화영과 친분이 있던 동료가 화영에게 몰래 알려주길, 이번 해고는 화영이 권력을 남용하여 환경위생과 직원을 마음대로 지시한 것 때문이라고 했다.그 일이라면 생각나는 거라곤 유진더러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킨 일뿐인데, 그 일을 계획한 주모자는 민혜다.“내가 너 협박이라도 했어? 너도 임유진이 당하는 꼴 보고 싶었으니까 한 거잖아. 난 그저 너한테 아이디어만 제공한 거야, 네가 그런 일 벌인 건 나랑 무관하다고.”민혜는 즉시 화영에게 선을 그었다.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화영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싸움으로 번졌다.그렇게 민혜와 관계를 끊은 뒤, 화영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지만 그래도 딸이라고 화영의 부모님은 여기저기 인맥을 찾아 일을 해결하려고 뇌물을 돌렸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누구도 그 뇌물을 받으려 하지 않는 데다 받았다 할지라도 이틀도 안 돼서 다시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거였다.그렇게 의미 없는 행위가 지속되다가 결국 화영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지인이 몰래 그들에게 언질을 주었다.“이봐, 자네 딸 대체 누구를 건드린 건가? 듣자하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던데. 도시정비국 국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네 딸 앞으로 공무직은 더 이상 찾지 못할 것 같다더라고, 그것뿐인가? 일반 직장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아.”그 말을 들은 화영의 부모님은 어안이 벙벙해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딸에게 대체 어떤 대단한 인물을 건드린 거냐고 따져 물었다.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니? 화영은 오히려 멍해졌다. 평소 일하던 도시정비국에서도 높은 분들은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말이다.그러던 그때 화영은 갑자기 동창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그 날 막바지에 유진을 도와줬던 사람은 다름 아닌 강지혁이었다.‘그렇다면…… 임유진의 배후가 강지혁이란 말인가?’하지만 화영은 곧바로 생각을 부정했다. 유진은 지혁의 약혼녀였던 진애령을 죽인 가해자이기에 절대 그럴 리 없었기 때문
“그…… 그런데 나 동창들 앞에서 너 망신 당하게 했잖아. 신정민한테 그런 꼴도 당하게 하고…….”“그건 걔네가 그런 거지 너랑 무슨 상관인데?”‘나랑 당연히 상관있지!’민화영은 속으로 소리쳤다. 생전 처음 죄를 뒤집어쓰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됐어. 다른 일 없으면 가봐 나 일하러 가봐야 해.”말을 마친 임유진은 화영의 죽상이 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처럼 돌아서 건너편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유진은 화영이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사정하는지는 몰랐지만 그날 일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하지만 유진이 바닥을 절반쯤 쓸었을 때 웬 인형 하나가 갑자기 유진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동현이었다.동현은 얼굴을 살짝 붉힌 모습으로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유진 씨, 저 미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는 지금 연애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그런데 저 정말 진심이에요. 기다릴게요. 유진 씨가 언젠가 다시 연애하고 싶어질 때 저 찾아와 줘요.”말을 마친 동현은 자기가 한 말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바꿨다.“아니, 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저라는 사람이 유진 씨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 기억해 줘요…….”유진은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다. 솔직히 거절당하고도 동현이 이렇게 다가온다는 게 놀라웠다.“동현 씨 충분히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요. 저 환경미화원이라서 인맥도 없고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어요. 좋은 아내감은 더욱 아니고요.”“그래도 전 유진 씨가 좋아요.”이 말을 내뱉은 동현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서민옥 씨한테 들었는데 유진 씨 남자친구도 없다면서요. 저 기다릴게요.”“그래도…….”유진은 끝까지 거절하고 싶었지만 붉게 상기 채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현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눈앞의 남자는 지금 유진에게 진심인 건 확실했다. 미옥이 말했던 것처럼 성실한 사람인 것도 맞고.이런 남자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유진이 감옥에 갔었다는 걸 알
‘내가 너무 갔나?’곽동현은 바삐 움직이는 임유진을 보자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유진 씨, 그…… 그러면 저는 먼저 가볼게요. 일 보세요.”홀연히 사라지는 동현의 뒷모습을 본 강지혁은 갑자기 유진의 턱을 잡으며 반강제로 유진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누나가 다른 남자를 그렇게 보는 게 싫어.”그 말에 유진은 웃음이 나왔다.“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 동현 씨한테 그런 마음 없어.”“그러면 상대도 그렇대?”하지만 지혁의 물음에 유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저 사람 동료는 맞지만 누나 좋아하는 동료 아니야?”“맞아. 나 이미 미옥 언니를 통해 거절 의사를 밝혔어.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저 사람 누나랑 어울리지 않아. 누나도 그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거절 의사를 밝혀야지.”“그건 네가 나를 너무 좋게 생각해서 그래. 솔직히 내가 오히려 동현 씨한테 어울리지 않아. 동현 씨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안정된 직장도 있어, 우리 환경위생과 여자들 중 동현 씨 마음에 둔 여자도 꽤 많고.”“누나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자격 있어.”지혁은 바로 유진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소유욕이 묻어있었다.유진이 청소를 마치고 도구를 환경위생과 사무실로 돌려주러 갔을 때, 민화영이 갑자기 유진에게 또 달려들었다.“유진아, 나 용서해주면 안 돼? 나 정말 그 직장 잃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 직업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제발, 네가 우리 국장님한테 나를 용서했다고 말 좀 전해줘. 국장한테 해고 명령 철회하라고 해줘. 응?”화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건드린 사람은 유진뿐이라는 결론을 얻어 이럴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화영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너 잘못된 사람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야. 너희 국장이 너 해고한 거 나랑 아무런 상관없어. 나 너희 국장 만나본 적도 없다고.”“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한 짓을 한 사람은
몇 분 전.현이는 자신을 챙기던 도우미에게서 강지혁이 서재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서재가 어디인지 물은 후 곧바로 그곳으로 뛰어갔다.하고 싶은 얘기가 가득했기에 아이는 한시라도 빨리 강지혁이 보고 싶었다.“누가 함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강지혁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는 평소에도 혼자 조용히 서재에 있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타인의 방해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특히 지금은 임유진에 관해 생각하고 있던 터라 마침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복사하고 붙여놓은 듯한 아이의 얼굴이 보이자 더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구체적으로 그게 왜 심기가 불편한지는 그조차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아이가 턱을 치켜들며 당돌하게 말했다.“아빠 얼굴 제대로 보고 싶어서 현이가 멋대로 들어왔어. 아빠도 현이 얼굴 제대로 잘 봐. 현이는 이제부터 아빠 딸이니까 절대 현이 얼굴 잊어버리면 안 돼!”현이는 아까 경찰서 앞에서 한눈에 강지혁이 아빠라는 걸 알아본 것에 상당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누가 아빠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아이는 임유진과 똑 닮은 두 눈을 깜빡이며 또박또박 대꾸했다.“엄마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는데? 아빠 사진 보여주면서 현이 아빠라고 했어. 아빠 만나기 전에 아빠 사진이 찢어져서 속상했는데 엄마가 아빠 만나면 마음껏 사진 찍을 수 있다고 했어. 참, 내 이름은 강선현이야. 원래는 임현이었고 지금도 임현이 더 좋은데 엄마가 이제부터는 강선현이라고 했어. 그리고 나는...”아이는 자그마한 입술로 좋아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색상, 그리고 좋아하는 이야기까지 미주알고주알 쉴 틈 없이 그에게 얘기해주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과묵한 아들인 강선율과 달리 딸인 강선현은 상당한 수다쟁이였으니까.그리고 사진이라니,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임유진이라는 여자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딸에게 멋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을 해버
“회장님께서 소안나를 입양한 건 도련님이 우연히 두 모녀가 괴롭힘당하는 걸 봤다가 갑자기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해서 입양한 겁니다.”고이준은 임유진이 괜한 오해를 할까 봐 서둘러 해명했다.“도련님이라는 건... 선율이요?”임유진은 아들 얘기에 눈이 반짝였다.“네, 아마 조금 있으면 하원 하실 겁니다.”“그럼 나머지 한 명은요? 세쌍둥이였잖아요. 내가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는 현이 밖에 없었어요. 이쪽에 두 명 다 있는 건가요?”임유진이 조금 급하게 물었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고이준과 집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아니요. 저택에 보내진 건 도련님뿐이었습니다.”“아...”임유진은 그 말에 순간 심장을 누군가가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닌데 막상 정말 없다는 걸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세쌍둥이이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싶었던 그녀의 소중한 아이들이었다.그런데 한 명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김재호가 도련님을 이쪽으로 보내왔을 때 살아있는 아이는 한 명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가씨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잖습니까! 어쩌면 나머지 한 명도 살아있을지도 몰라요.”집사가 말했다.소안나를 아가씨로 부를 때는 썩 내키지 않았는데 진짜 딸이 돌아오니 호칭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임유진은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현이도 살아있었으니 어쩌면 그 아이도 살아있을 수 있다. 그리고 아이를 빠르게 찾기 위해서는 김재호가 필요하다. 김재호라면 반드시 알 수 있을 것이다.“김재호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임유진이 물었다.“사람을 불러 회장님께 최면을 걸게 한 뒤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도망갔어요. 그 뒤로 깜깜무소식이었고요.”고이준이 답했다.“그런데 오늘 김재호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알아냈다고 하더라고요. 아까 경찰서에서 나왔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그 말에 임유진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고이준을 바
이 얘기는 아는 사람이 몇 없다.“사모님께서 절벽으로 떨어졌을 때 회장님은 하마터면 정신을 놓으실 뻔했어요. 그 상황에 김재호가 아이를 한 명 집으로 보냈고 회장님께는 유골함을 건네줬죠. 회장님은 사모님의 유골함을 안고 거의 이성을 잃으시고 절규했어요. 만약 그때 사모님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으면 회장님은 아마 살 수 없으셨을 겁니다.”고이준의 말에 임유진은 마치 마음에 파도가 치는 기분이었다.‘대체 내가 잃은 기억이 뭐지? 정신을 놓을 뻔했다니... 혁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단 말이야?’“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내가 왜 절벽에서 떨어져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는 지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시라도 빨리 기억해내고 싶었다.이에 고이준은 당시 임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져야만 했던 그 날의 일을 전부 다 그녀에게 얘기해주었다.“사모님 유골함을 들고 있던 회장님의 모습은 정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김재호가 제안을 해왔죠. 사모님과 관련된 기억만 지우자고요. 그러면 회장님께서 정신을 차리신다고요.”“지워요? 어떻게요? 어떻게 저와 관련된 기억만 지울 수 있는 거죠?”“최면으로요. 김재호가 최면 쪽으로 유명한 의사를 불러왔고 결국 성공적으로 사모님 관련 기억들만 사라졌어요. 그런데 가끔 회장님께서 얘기하시는 걸 들어보면 뜨문뜨문 파편 같은 기억들은 떠오른대요. 그런데 사모님과 나눴던 감정 같은 건 아마...”고이준은 말을 마치고 괜히 임유진과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시선을 내렸다.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은 임유진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지만 기억이 사라진 지금은 아마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말이다.하지만 강지혁은 오늘 임유진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먼저 임유진을 차로 데려갔다. 그런 걸 보면 아무리 최면으로 기억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임유진을 대할 때만은 다른 것 같았다.임유진은 고이준의 말에 그제야 강지혁이 왜 그
임유진은 차 안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던 자신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사실 그녀도 설마 자신이 그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그저 강지혁을 만난 후 모든 게 그렇게 당연하게 흘러갔다.다만 당시 그녀는 강지혁과의 순간에 너무 심취되어 차량 밖에는 아직 한 무리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그래서 잠깐 차에서 내려 딸을 데리러 갔을 때 사람들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차 안에서 둘이 뭘 했는지 다 알고 있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볼 게 뻔했으니까.그런데 그때 현이가 해맑은 얼굴로 물어왔다.“엄마, 아빠랑 왜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거야? 아빠한테 이야기라도 들려줬어?”임유진은 그 말에 하마터면 중심을 못 잡아 넘어질 뻔했다. 현이가 이야기 얘기를 한 건 딸이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임유진이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으로 나쁜 생각을 잊게 해주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어린 현이는 아까 강지혁이 울었으니 그가 속상해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그녀가 함께 차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응... 아빠한테 이야기 들려주고 있었어.”임유진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그녀가 그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시 현재.임유진이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자 그녀를 모셨던 도우미들이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그리고 집사는 잔뜩 격앙된 얼굴로 몇 번이나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살아있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사모님,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네... 저 돌아왔어요.”임유진이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혁이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정말...”“돌아오셨으면 됐죠! 살아계시면 된 겁니다!”집사의 눈시울은 어느새 빨갛게 변해있었다.강지혁은 저택으로 들어온 후 바로 2층으로 올랐다. 그래서 임유진은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집사와 고이준이 다 있을 때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강지혁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지만 그녀를 밀쳐내지는 않았다.그렇다는 건 싫은 게 아니라는 뜻일까?임유진은 그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확 편안해져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5년이나 지났는데 그는 여전히 그녀의 기억 속의 5년 전 그 남자였다. 세월이 마치 강지혁만 비켜나간 것 같은 느낌이다.하지만 굳이 다른 점을 찾으라면 전보다 더 성숙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물론 그 느낌은 이렇게 눈물을 보이기 이전에 한해서지만.눈물을 흘리는 걸 보니 어쩐지 조금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보면 눈물을 잔뜩 흘린 탓에 가뜩이나 매력적인 눈동자가 더 촉촉해졌다.그리고 그런 눈으로 지금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데 임유진은 왜인지 그가 노려보는 게 꼭 자신을 꼬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어떻게 이 남자는 모순 가득한 이 상반되는 감정을 담은 눈으로도 이렇게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거지?강지혁은 알까? 지금 그의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임유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혁아, 보고 싶었어. 엄청... 매일... 계속해서 네가 보고 싶었어. 빨리 너 만나서 얘기해주고 싶었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임유진의 얼굴이 다가오면 올수록 그의 몸이 굳어갔다.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그녀가 내뱉은 이 말에 그의 몸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금씩 부드럽게 떨리기 시작했다.임유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입술을 그의 입술 위에 포갰다.5년 만의 입맞춤이었다.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5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낯선 느낌보다 익숙한 느낌이 먼저 들 수가 있지?강지혁의 입술은 부드럽지만 아주 조금 찼다.하지만 그 체온 또한 너무 익숙했다. 그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마치 선물로 다가왔다.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남자를 드디어 실물로 볼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은 천천히 눈을 감고 더 깊이 입술을 부딪쳤다.강지혁
“그저 뭐? 설마 날 사랑해서 돌아왔다는 소리라도 하려고?”강지혁이 비아냥대며 물었다.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지혁의 태도가 모순적인 이유를 모르겠다. 분명히 그녀를 그리워하는 눈물인데 왜 이렇게 냉랭한 거지?“응, 널 사랑해. 그래서 너 찾으러 돌아왔어.”강지혁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이 한마디가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이었던 것처럼.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호흡이 곤란해질 정도다.왜.왜 이 여자는 이렇게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걸까.“내가 5년이나 날 떠났던 사람의 말을 믿을 것 같아?”한참 후에야 강지혁이 힘겹게 마을 내뱉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하면 날 믿어줄래?”임유진이 되물었다.이에 강지혁은 한순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아파!”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외쳤다.강지혁의 몸은 그 말에 본능적으로 힘을 거두어들이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제야 자신의 손목을 뺄 수 있었다.어쩐지 아프더라니 손목에 빨갛게 자국이 났다.강지혁은 텅 비어버린 자신의 손바닥을 조금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방금 그녀가 손을 뺀 순간 뭔가 보물 같은 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보물이라고? 대체 뭐가? 설마 이 여자가?강지혁은 말도 안 된다며 자조하듯 웃었다.그런데 그때 임유진이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왜 계속 울어. 울지 마. 응? 뚝. 네가 이러면 꼭 내가 너 울린 거 같잖아.”울려? 임유진이? 강지혁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하지만 그의 몸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반응하게 설계된 듯 그의 통제를 받지 않고 눈물을 계속해서 쏟아냈다.“증명하라고 하면...”그때 임유진이 중얼거리거니 이내 입술을 그의 볼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눈물을 입에 머금었다.강지혁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밀어내려다가 손이 막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고이준은 말을 하면서 자꾸 목이 메고 코가 찡해 났다.“난 고이준 아저씨야. 아빠의 부하직원이지. 자, 그럼 이제 아저씨한테 이름이 뭔지 알려줄래?”“원래는 임현이었는데 엄마가 강선현으로 바꾸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강선현이에요.”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이름을 일부러 선율 도련님과 비슷하게 맞춘 건가? 그리고 현... 혁이... 늘 회장님을 부르시던 호칭이 생각나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으신 건가?’임유진이 돌아온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강지혁은 지금 임유진과의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 심지어 그들은 당시 임유진의 사망을...고이준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사모님이 돌아왔으니 이제 회장님도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있는 건가? 드디어 그 묵은 상처에 매듭이 지어지는 건가?’고이준은 강지혁과 임유진의 사이를 처음부터 지켜봐 온 사람이기에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두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또한 곁에서 계속 지켜봤었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지금이 얼마나 값진 순간인지 알 수 있었다.한편 소민아는 고이준과 얘기하는 현이를 질투와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강지혁을 멋대로 아빠라고 불렀던 주제도 모르는 어린애가 정말 강지혁의 친딸일 줄은 아주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이제 그녀의 딸은 상황이 무척이나 난처해졌다.강씨 가문에 진정한 친딸이 돌아왔는데 누가 과연 입양 딸 따위를 신경 쓸까.소민아는 순간 자신의 딸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모든 게 갑자기 튀어나온 진짜 딸 때문에 빼앗겨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더 불안한 건 언젠가는 그녀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은 죽었을 때나 살아있는 지금이나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으니까.그녀는 그 강지혁의 두 눈에서 눈물까지 보이게 한 여자였으니까.이제 그녀가 꿈꾸던 재벌가의 안주인이 되는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같은 시각, 벤틀리 안.강지혁은 빨개진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예전에 이 여자에게 해줬던 말인가?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물이 떨어져나왔다.이에 임유진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지혁이 설마 만나자마자 이렇게 울 줄 몰랐으니까.그녀는 허둥지둥하며 자신의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혁아, 뚝. 울지 마.”하지만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그의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쏟아져나왔다.사람들은 조금 전 상황으로 이미 충분히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그 강지혁이 울다니, 그것도 길 한복판에서!지금껏 강지혁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오늘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자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오늘 본 이 광경을 멋대로 떠벌리고 다녀도 누구 하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게 분명했다.강지혁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리는 분명히 이만 눈물을 멈추라고 하는데 몸은 통제를 잃은 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심해져만 갈 뿐이었다.왜일까...대체 왜 이 여자의 한마디에 이렇게도 눈물이 흐르는 걸까.왜 이 여자의 손길이 이렇게도 그립고 가슴이 아픈 걸까.이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라서?이미 세상에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온 그의 아내라서?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라서?사랑했다고 한들 그는 결국 그녀의 모든 걸 잊어버렸다. 그렇다는 건 고작 그만큼일 뿐인 사랑이라는 게 아닐까?강지혁은 갑자기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옆에 주차된 차량으로 향했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임유진과 강지혁은 검은색 벤틀리 속으로 몸을 숨겨버렸다.두 사람이 차에 타는 걸 봤음에도 그 누구도 차량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엄마랑 아빠는 왜 둘이서만 차에 탔어요?”순수한 호기심이 묻은 아이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이준은 눈앞에 서 있는 귀여운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