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감옥에 있을 때 한지영이 시간 날 때마다 면회 와주고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또 임유진을 도와주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유진은 아마 살아서 나올 수 없었을 거다.그 힘든 3년 지영이 곁에 있어 줬기에 유진이 버틸 수 있었다.‘생명줄이라고?’강지혁의 눈빛은 순간 번쩍였다.‘한지영이라는 그 여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네?’“그런데 누군가를 생명줄이라고 여기는 거 바보 같은 생각 아닌가? 만약 언젠가 그 사람한테 버려지면 더 절망적이잖아.”“지영은 그럴 리 없어.”유진의 눈빛에는 확신과 절대적인 믿음이 차 있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한테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는 게 심술이 났고, 유진이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칠 것 같다는 게 불편했다.--그 후 며칠 동안 상급 부서에서 환경위생과에 검사하러 온다는 소식 때문에 유진의 업무량도 늘어나 야근이 잦아졌다.다행히 집에 도착할 때마다 지혁이 미리 음식 준비를 마치고 유진을 기다렸기에 번거로움은 덜 수 있었다. 심지어 늦게 들어올 수 있으니 먼저 먹으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자신을 기다리는 지혁을 볼 때마다 유진의 마음은 따뜻한 기운이 솟곤 했다.그 때문인지 유진은 가끔 두 사람이 이 작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동생이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네.’새벽, 길거리를 청소한 뒤 유진은 환경위생과로 돌아가 모든 청소도구를 공구함에 넣고 빈자리에 섰다.잠시 뒤 도시정비국에서 검사하러 온다는 말에 모든 사람이 업무 보고를 위해 담당자를 맞이하는 중이었다.가녀린 몸을 가진 유진이 4, 50대 되는 아줌마들 사이에 서 있으니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유진? 너 임유진 맞지?”검사하러 나온 도시정비국 사람들 사이에 웬 20대 후반으로 돼 보이는 여자가 유진을 보자마자 유진을 불렀다.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남색 수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여자가 서 있었다. 좁은 눈매에 평범한 외모 하지만 화
“이런 것도 충분히 좋아!”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을 끊고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핸드폰을 골랐다.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유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유진이 아니야?”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민화영과 웬 여자 하나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역시 쇼핑하러 온 듯했다.하지만 그 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유진은 그제야 다른 한 사람도 유진의 고등학교 동창 조민혜라는 걸 발견했다.“여기에서 널 다 만나다니, 우리도 참 인연이네. 이 사람이 혹시 네 남자친구야?”화영은 유진 옆에 서 있는 지혁을 위아래로 집요하게 훑어보았다.하지만 유진이 대답도 하기 전에 민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얘, 화영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진이 남자친구는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들었는데 이 꼬라지가 어딜 봐서 부잣집 도련님이야? 다 시장바닥에서 산 옷들이고만!”말하면서 눈썹을 치켜뜨는 민혜의 얼굴에는 비아냥과 경멸의 웃음이 섞여 있었다.“아참, 미안해. 네 남자친구가 새 여친 사귀었다는 거 깜빡했네. 이제 곧 약혼도 한다지? 요 며칠 소씨 가문 도련님과 진씨 가문 아가씨가 약혼하는 뉴스로 사이트가 도배됐더라고! 하긴, 역시 어울리는 건 그 두 사람이긴 하지. 그건 그렇고, 네 새 남자친구는 네가 길바닥에서 청소하는 거 알아?”“민혜야, 뭐 하러 그런 말을 해?”“내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네가 말했잖아. 얘 환경위생과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고!”자기를 막는듯한 화영의 말투에 민혜는 오히려 더 거만한 태도로 받아쳤다.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진에게 인기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대학에 가서도 유진이 민준의 여자친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민혜는 유진을 향한 질투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왜 모든 행운이 유진한테만 가는지도 민혜로서는 의문이었다.하지만 지금 민준은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고 유진은 길바닥에서 청소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른다.눈앞의 두 사람이 일부러 자기를
자존심과 체면이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조민혜는 서둘러 자기를 창피하게 한 이곳을 떠났고 옆에서 보고 있던 민화영도 서둘러 민혜와 함께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백화점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차를 부수는 장면을 본 것도 모자라 그 차가 민혜의 차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뭐지? 쟤가 누구한테 원한 산 적 있어서 보복당하는 건가?”“그러게. 그건 모르지.”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진을 보며 강지혁의 눈은 반짝거렸다.“뭐 어찌 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말을 마친 유진은 지혁을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때, 지혁의 발이 순간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봤을 때 지혁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버스 정류장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왜 그래?”“아…… 아니야.”걱정스러운 유진의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하지만…….‘방금…… 내가 잘못 봤나?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을 그 여자로 보다니. 남편과 자식을 버린 그 여자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혁아, 넌 절대 나처럼 되지 마.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네 모든 걸 바치면서까지 좋아하지는 마.”“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같잖은 거야. 상대가 너한테 마음이 떠나면 네가 무릎을 꿇어도 붙잡을 수 없어.”“혁아, 너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상에 누군가가 너의 감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고 너의 생사까지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그런 감정은 영원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누구야? 누가 자꾸 말하는 거야? 그만 말해. 여기서 떠나! 추워…… 너무 추워…… 여기 있지 마…… 더 있으면…… 얼어 죽을 거야!’“혁아, 나 갈게. 네 아빠가 말로만 날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해, 네 아빠와 함께라면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나도 이미 할 도리 다 했어!”‘이건 또 누구야? 누가 자꾸만 말하는 거야?’“가지……
“나 계속 곁에 있어. 침대랑 바닥도 솔직히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고개만 돌리면 나 볼 수 있어.”“같이 있어 줘. 응?”강지혁은 낮은 소리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 순간 자기의 눈에 갈망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윽고 나지막한 말과 함께 베개와 이불을 들고 지혁의 옆에 누웠다.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끝내고 난 유진은 그제야 자기가 남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했다. 정말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하기야, 방금 당장이라도 깨질 수 있는 도자기 인형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기가 지혁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침대에 누운 유진은 손을 뻗어 불을 껐다. 그 시각, 유진의 오른손은 이불 아래에서 남자의 손에 꼭 잡혀 있었다.“만약 또 아프면 나 꼭 불러.”“응.”지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약 때문인지 지혁은 죽도록 자기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아프기 시작하면 이렇게 빨리 나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누나는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지?”“당연하지. 우리 서로 힘이 되어주기로 했잖아. 네가 앞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도 계속 같이 있어 줄게.”아마 그때까지 유진은 계속 누나의 신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혁이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진의 목소리는 지혁을 안심시켜 줬고 아픔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결혼이라…… 진애령이 죽은 뒤 결혼은 생각도 한 적 없는데.’“그 약속 꼭 지킬 거지?”“응.”여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듣고 나서야 지혁은 한시름 놓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그리고 지혁의 곁에 누워있던 유진도 조
임유진의 몸은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매번 두 사람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유진의 기억은 유진을 다시 악몽 속으로 끄집어들이곤 한다.유진도 당연히 그 6캐럿짜리 핑크 다이아에 대해 알고 있다. 뉴스에도 대문짝만한 사진까지 첨부하며 보도해 댔으니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런 기사는 읽고 싶지 않아도 핸드폰을 켜고 웹페이지를 확인할 때면 계속 맨 위에 나타난다.오래전, 유진이 민준과 쥬얼리숍을 구경할 때 그 핑크 다이아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민준은 유진에게 마음에 들면 결혼반지로 사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하지만 민준도, 그 핑크 다이아도 결국은 유진의 것이 아니게 됐다.그렇게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그때.“유진 씨, 혹시 지금 집에 가려고요?”웬 남자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맑으면서도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30살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직업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저 사람 곽동현 씨 아닌가?’놀라기도 잠시, 유진은 이내 남자의 물음에 대답했다.“네.”“그러면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저 지금 마침 시간 있거든요.”곽동현은 어렵게 용기를 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동현의 말을 듣는 순간 유진은 상대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던 미옥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는 건 지금 눈앞의 남자가 유진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진은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괜찮아요, 제 차 있으니 유진 씨도 편할 거예요.”유진은 완곡히 거절했지만, 동현은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도구를 정리하고 있던 방현주가 먼저 끼어들었다.“흥. 그깟 차 한번 태워주는 걸로 어디 만족하겠어요? 유진 씨는 외제 차 아니면 취급 안 해요. 동현 씨도 6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사다가 바치면 아마 좋아할지도 모르죠.”동현은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
순간 임유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북을 치기 시작했다.‘맙소사,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됐…… 됐어. 얼른 밥 먹자. 식겠다.”유진은 대뜸 손을 빼더니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파묻고 앞에 놓인 죽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눈에 드리운 웃음기도 더욱 짙어졌다.“그럼 나는 어때? 난 좋아해?”“당연하지.”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이에 지혁은 입꼬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기분 좋은 듯 입을 열었다.“나도 누나 좋아. 엄청.”이렇게 그의 흥미를 자아내는 사람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았다.--도시정비국의 며칠간의 시찰이 끝나자 민화영은 유진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유진아, 우리 이번 주 일요일에 고교 동창 모임 있는데 너도 꼭 참석해.”‘고교 동창 모임?’유진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유진의 상황으로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간다면 아마 비웃음만 받을 게 뻔했다.“아니야, 난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어떻게 그래. 고교 동창들 어렵게 모이는 자리인데. 그리고 네가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다 같이 참석하면 좋잖아.”열성을 다해 설득하는 걸 보니 화영은 유진이 동창 모임에 꼭 나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학창 시절 잘 나가던 학급 공식 여신에 1등이던 유진이 이토록 초라하게 변한 걸 다른 동창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 상황만 생각하면 화영은 유진의 추한 모습을 하루빨리 동창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나 주말도 출근해야 해. 너 설마 나한테 주말이 있다고 생각해?”유진의 말에 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그래도…….”“나 쓰레기 버리러 갈 테니까 나중에 얘기해.”유진은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유진은 바보가 아니다. 화영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유진은 환경위생과 계장으로부터 중요한 서류를 도시정비국 직원한
‘강지혁이…… 임유진을 만나려 한다고?’진세령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진 씨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령은 강지혁의 약혼녀였던 자기 언니에게도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혁이 세령의 언니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강 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적합해서라는 것도.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눈앞의 남자는 흔들림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마치 약혼녀의 죽음이 지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듯이 말이다.그 때문에 세령은 대체 이 남자가 어떤 여자 앞에서 감정 기복을 보일지 궁금했었다.그런데 지금, 세령은 그걸 보고 말았다.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세령이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이다.‘그 이유가…… 임유진 때문이라고? 저 버러지만도 못한 여자 때문에?’세령은 얼른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민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상대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그 시각, 지혁 옆에 있던 고이준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설마 화난 건가?’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그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난 사람을 이준은 한 번도 본적 없다.하지만 이준이 직원을 부르려던 찰나, 지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아니다. 네가 직접 가서 처리해. 너무 시끄러워!”이준은 또 다시 대답하고는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순간 유진은 마치 혁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던 혁이를 떠올리자 유진은 자기 생각을 이내 부정했다. ‘아니야, 혁이는 이렇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 혁이…… 혁이…….’이윽고 머릿속에 차갑지만 꼭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혁이는 슬퍼할까?’점점 숨이 막혀와 거의 쓰러지려던 찰나, 유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은 힘이 풀었다. 그 순간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며 쉴 새 없이 기침했고 공기를 탐하 듯 크게 호흡했다.그렇게 한참 동안
진세령이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의외의 인물이 세령 앞에 나타났다.그는 바로 강지혁의 개인 비서 고이준이었다.“고 비서님!”이준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 건 사람은 오히려 황 매니저였다.하지만 이준은 대답 대신 마치 곧 죽을 사람을 바라보는 듯 신정민을 쳐다봤다.‘그러게 건드려도 왜 하필이면 대표님이 관심 가진 사람을 건드리냐고.’그러고 보니 참 공교로웠다. 하필이면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른 동안 아까 같은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이준은 생각을 던져 버리고 옆에 있는 경호원을 바라봤다.“아까 저 사람이 한 짓을 똑같이 돌려주세요.”이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쎄 보이는 두 명의 경호원이 바로 명령에 따라 정민을 연못가로 끌고 가 정민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그리고 정민이 유진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돌려주었다.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려고 밖으로 달려온 동창들뿐만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소민준과 진세령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경호원들은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황 매니저는 심지어 정민을 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어쨌든 주주 중 한 세력인 신 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강지혁이라는 대단한 인물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을뿐더러 경쟁 상대가 골탕을 먹으면 기뻐할 다른 주주들을 의식해서였다.그때, 이준은 고개를 돌려 민준과 세령을 바라봤다.그제서야 진세령은 얼른 미소를 장착한 채 이준에게로 다가갔다.“죄송해요. 강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겠네요. 저희도 얼른 올라가 볼게요.”“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오늘 두 분을 만날 시간이 없다면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도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이준은 두 사람의 반응 따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이에 세령과 민준은 어안이 벙벙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세령은 이내 위험한 눈빛을 한 채 이를 갈았다. ‘어렵게 만든 자리인데, 임유진 그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임유진, 너 절대 가만 안 둬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경빈 씨!”공수진은 이경빈의 이름을 외치며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이경빈은 시선을 내려 탁유미의 떨리는 손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공수진을 향해 말했다.“먼저 올라가. 금방 갈게.”“네?”공수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열림 버튼을 결국 누르지 못하고 그렇게 문이 닫힐 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불안함과 초조함이 밀려왔다.그도 그럴 것이 문이 닫히기 전 이경빈이 그녀가 탁유미를 바라보았으니까.게다가 그 눈빛은 누가 봐도 망설이는 눈빛이었다.뭘 망설이는 거지?왜 탁유미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거지?4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이경빈은 탁유미만 보면 흔들리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탁유미 그 여자가 뭐라고?공수진은 이를 꽉 깨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어차피 죽을 거 그냥 지금 빨리 죽어버리지! 왜 또 경빈 씨 앞에서 알짱대는 건데!?’엘리베이터 앞.이경빈은 지금 자기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다.탁유미가 ‘잠깐만’이라고 외치며 팔을 잡았을 때 정말 발걸음이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할 말이 뭐야. 빨리 말해.”이경빈이 그녀에게 잡힌 팔을 우악스럽게 빼내며 말했다.더 이상 그녀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싫었다.“나랑 윤이한테 시간 좀 내줘. 같이 놀이공원 가자. 윤이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엄마랑 아빠랑 같이 놀이공원을 가본 적이 없어. 그래서 윤이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주고 싶어.”“좋은 추억?”이경빈이 차갑게 웃었다.“탁유미, 너랑 내가 윤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가는 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해?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들을 포기하는 척 이렇게 다시 나한테 접근하는 게 목적이야? 새삼 이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그립기라도 해?”탁유미는 떨리기도 하고 또 불안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상처를 받았다던가 분노했다던가 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이경빈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으니까.탁유미는 그저 이경빈이 자
탁유미는 이경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와 프런트 데스크 직원에게 물었다.“이경빈 씨를 만나고 싶은데 지금 호텔에 있나요?”“이경빈 고객님은 현재 외출 중이세요. 용건이 있으신 거면 직접 연락을 해보시거나 로비에서 기다려주세요.”직원이 예의 있게 답해주었다.탁유미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연락하고 싶어도 이경빈의 연락처 같은 건 진작 삭제했으니까. 그녀가 이경빈과 연락할 수 있는 루트는 양육권 분쟁 준비 당시 연락을 취했었던 그의 변호사와 연락하는 방법뿐이었다.탁유미는 넓은 로비 한쪽에 가만히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시간이 정처 없이 흐르고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때 문이 열리고 드디어 이경빈이 모습을 드러냈다.그의 옆에는 공수진도 함께 있었다.이경빈은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탁유미의 모습을 발견했다.로비에 사람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그의 눈은 마치 자석처럼 단번에 탁유미 쪽으로 이끌렸다.“네가 왜 여기 있어?”이경빈이 자기 앞으로 걸어오는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할 말이 있어.”탁유미가 조금 쭈뼛거리며 말했다.“할 말?”이경빈이 코웃음 쳤다.“나한테는 3개월 동안 만큼은 찾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하더니 네가 찾아오는 건 또 괜찮나 보지?”비아냥 섞인 그의 말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옆에 있던 공수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경빈 씨는 왜 찾아왔어요? 설마 이제 와서 양육권은 못 주겠다고 하려는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해도 안 돼요. 약속은 약속이니까!”말을 마친 후 공수진은 이경빈의 팔을 더 꽉 잡았다.“경빈 씨, 이만 가요.”“그래.”이경빈이 지나쳐 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자 탁유미가 손을 뻗어 이경빈의 앞을 막아섰다.“나랑 잠깐 얘기 좀 해. 몇 분이면 돼!”그러자 이경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우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더 남았나? 3개월 얘기를 꺼낸 건 너야. 나도 더는 너 안 찾아갈 테니까 너도 나 찾아오지 마. 그리고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면 꿈 깨!”
한지영은 깨어났다고 해도 한두 시간가량 뒤면 또다시 잠이 들고는 했다.오늘도 새벽녘에 잠시 눈을 떴다가 몇 시간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탁유미는 임유진보다 일찍 와 있었기에 투명 유리 너머로 한지영이 눈을 뜬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녀는 줄곧 한지영에게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었기에 누워있는 한지영을 보는 게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다.탁유미는 자신은 얼마 안 가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한지영은 이번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잘 살기를 바랐다.물론 지금껏 한지영에게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병문안을 다 마친 후 탁유미와 임유진은 함께 병원을 나섰다.“언니, 몸은 좀 어때요? 실력 좋은 선생님들한테 한번 봐달라고 할까요?”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괜찮아요. 약만 꾸준히 먹으면 통증도 가벼워지거든요. 그리고 지금 봐주는 선생님도 실력 있는 분이에요.”탁유미의 말은 사실이었다.임유진이 걱정되어 탁유미의 주치의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쪽으로는 유명한 의사였다.“그럼 금전적으로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알겠어요. 고마워요.”탁유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인생이 평탄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임유진 같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 그녀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행운아처럼 느껴졌다.“참, 윤이는요? 윤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지난번에 사준 옷이랑 장난감은 마음에 든대요?”임유진이 물었다.“엄청 좋아했어요. 요 며칠은 유진 씨가 사준 장난감만 가지고 놀아요. 그리고 옷은 한번 입어 보더니 자기 마음에 쏙 들었는지 특별한 날 입을 거라며 옷장에 고이 모셔둔 거 있죠?”그 말에 임유진은 윤이와는 정반대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새 옷을 사게 되면 근처 편의점을 가는데도 그 옷을 입으려 했고 다른 옷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다음에 윤이 데리고 놀이공원이라도 가야겠어요. 윤이가 새 옷 입은 모습이 궁금해요.”“그래요.”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뭔가 떠오른
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움찔했다.임유진의 목소리와 그녀의 따뜻한 품이 마치 끝이 없는 바다처럼 그의 모든 불안을 다 잠재워주고 있었다.아마 그녀가 있어 살아있는 게 이토록 감사하게 느껴질 것이다.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렇게까지 다채롭고 즐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저 매일매일 의미 없는 하루만 보낼 뿐 삶에 대한 더 큰 욕망은 없었을 것이다.“유진아, 너랑 있으면 꼭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강지혁이 중얼거렸다.“꿈 아니야. 너랑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내게 꿈이 아닌 듯 나도 너한테 꿈이 아니야.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이를 가진 것도 이렇게 함께 사는 것도 전부 꿈이 아니야.”임유진이 진지하게 답했다.“그러니까 혁아, 나한테 조금만 더 기대줘. 우리한테는 앞으로 좋은 일밖에 없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얼굴을 가까이해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왔다.“응. 그럴게.”두 사람의 미래가 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좋은 일밖에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만 그는 지금 이 달콤함이 영원하기만은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만약 그녀가 곁에 있어 주는 지금이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하면 그는 기꺼이 눈을 가린 채 이 꿈속에 갇히고 싶었다....임유진은 한지영 부모님으로부터 한지영이 깨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임유진은 눈가가 다 빨개졌다.깨어났다고는 하나 그저 눈만 뜨고 조금의 반응만 있을 뿐 여전히 목소리는 내지 못해 무슨 이유로 이런 꼴을 당했는지 물어보기는커녕 간단한 인사조차 건넬 수 없었다.게다가 임유진이 막 중환자실 도착하고 얼마 안 가 한지영은 또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아주머니,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몸이 차차 회복되면 말을 할 수 있게 될 거예요.”임유진이 한지영 부모님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러자 이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거렸
“그래?”강지혁이 피식 웃으며 임유진을 안아 자기 다리 위에 앉혔다.임유진은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강지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정말 나한테 소홀한 적 없어?”강지혁의 얼굴은 어느새 임유진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밤하늘처럼 예쁜 눈동자가 다정하고 또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혁이 이럴 때면 임유진은 꼭 여우에게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참, 너 생일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지?”임유진이 핑크색으로 물든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생일 선물로 뭘 줄지는 이미 다 생각해뒀어. 대신 뭘 받든 싫어하면 안 돼.”그 말에 강지혁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네가 뭘 주든 난 기쁘게 받을 거야. 그런데 내 생일날은...”강지혁이 잠깐 뜸을 들였다.“나는 그날 우리 둘이서만 있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 말고.”그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우리 둘이서만?”“응. 내 생일이잖아. 나는 다른 사람이 오는 거 싫어.”강지혁의 목소리가 어쩐지 묘하게 가라앉았다.그리고 눈가에는 언뜻 쓸쓸함도 스쳐 지나갔다.“이유 물어봐도 돼?”강지혁의 기분 변화를 감지한 임유진이 물었다.그 질문에 강지혁은 입을 꾹 닫은 채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깊이 묻었다.그의 호흡이 어딘가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꼭 어두운 무언가가 강지혁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혁아, 우리 이제 부부야. 부부끼리는 좋은 일은 물론이고 힘든 일도 다 공유하는 거야. 너한테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 마음이 편해지게 들어줄 수는 있어.”임유진의 다정한 말에 강지혁은 더 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임유진은 이제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그녀 앞에서는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내 생일 다음 날, 그 여자가 나랑 아버지를 떠났어.”임유진은 그 말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강지혁이 말한 ‘그 여자’가 그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날은 모든 게 다 꿈만 같았어. 정말 모든 게 다 평화로웠
“못 들어주겠네, 정말. 이경빈 씨, 뚫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그때 옆에 있던 임유진이 참지 못하고 셋 사이에 끼어들었다.아직 당시 골수를 이식해준 실질적인 증거를 못 찾았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그녀는 아마 바로 이경빈에게 골수 기증가자 탁유미라고 말했을 것이다.이경빈은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임유진 씨, 당신이 아무리 강지혁 씨의 아내라고 해도 나한테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은 없습니다.”이에 임유진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 이경빈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이경빈 씨, 내 말 허투루 듣지 마세요. 당신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지 곧 알게 될 테니까.”탁유미는 임유진과 이경빈 사이에 트러블이라도 생길까 봐 서둘러 임유진의 팔을 끌어당겼다.임유진은 지금 뱃속에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품고 있기에 이렇게 화를 내게 하면 안 된다.“유진 씨, 난 괜찮으니까 화내지 말아요.”탁유미는 말을 마치고 임유진을 자기 뒤쪽으로 보낸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조금전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쓸쓸한 감정 따위 보이지 않았다.그 대신 자리 잡은 건 마치 낯선 타인을 보는 듯한 냉랭함이었다.“이경빈,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윤이한테 잘하는 거, 그거 하나야.”다른 건 이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이 남자 때문에 탁유미는 그간 너무 많은 감정을 써버렸다.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이 남자에게 쓸 여력의 감정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설사 감정이 남아 있다고 한들 이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돌려 임유진의 팔을 잡았다.“유진 씨, 이만 가요.”탁유미와 임유진이 매장을 완전히 떠나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을 때까지 이경빈은 그 자리에 선 채 탁유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해지고 또 초조해지는 걸까.꼭 줄곧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하지만 대체 뭘...?뭘 잃
약 처방을 다 받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유진은 윤이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고 싶다며 탁유미와 함께 근처 백화점에 들렀다.“장난감은 이미 많아요. 동현 씨가 준 것만 해도 한가득 이에요.”탁유미가 거절하려 하자 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언니, 장난감이 많아서 싫어할 애들은 없어요. 이왕 나온 김에 윤이 겨울옷도 좀 사줘야겠다. 슬슬 날씨가 쌀쌀해지니까요.”임유진은 장난감을 다 고른 후 탁유미를 데리고 키즈 코너 쪽으로 걸어갔다.예쁜 옷들을 가득 고른 다음 돈을 지급하고 매장을 떠나려는데 그때 익숙한 두 명이 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임유진은 그 두 사람을 보고는 바로 안색을 굳혔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필이면 이 넓은 백화점 안에서 이경빈과 공수진을 마주쳐 버렸다.물론 상대방도 임유진과 탁유미를 보고는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 흠칫했다.이경빈은 탁유미 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탁유미는 오늘 안색이 무척이나 안 좋아 보였고 가뜩이나 가녀린 몸인데 옷도 얇은 것을 입고 있어 더욱더 왜소해 보였다.실내에서는 큰 문제가 될 게 없는 옷이지만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람 하나 제대로 막아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이 여자는 날씨 변화도 제대로 못 느끼나?“어머,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공수진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하듯 이경빈의 팔짱을 더 세게 꼈다.“지난번에는 썩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서로서로 다 잊어버리는 거로 해요. 제가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참, 안 그래도 윤이 옷 사러 온 건데 이렇게 된 거 예쁜 옷 고를 때까지 잠깐 기다려 줄래요? 지난번에 보니까 제대로 된 옷 하나 없더라고요. 윤이도 이제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데 허름한 옷을 입힐 수는 없잖아요.”퍽 아이를 위한 말인 것 같지만 말투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마치 불쌍한 사람들에게 적선해준다는 듯한 느낌이었다.“필요 없어.”아니나 다를까 탁유미가 차가운 목소리
임유진은 기사님이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탁유미와 함께 병원으로 왔다.줄을 서서 접수를 기다리는 동안 탁유미의 안색이 또다시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임유진은 그 모습에 어제 강지혁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아주머니 말대로 당시 언니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을 찾으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그러자 탁유미가 애써 미소를 지어보았다.“유진 씨도 엄마랑 같은 생각인 거예요?”“간이식만이 살길이잖아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간 기증은 가망이 없어요. 엄마가 나 몰래 병원에 연락해서 당시 내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어제 병원 측에서 전화가 와 받아봤더니 기증받은 사람이 간 기증을 거부했대요.”“네? 그럴 리가요.”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당연한 일이죠.”탁유미가 웃으며 답했다.“나랑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간을 떼어내 주는 리스크를 감당하려고 할 리가 없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삼켰던 말을 입밖에 내뱉고 말았다.“만약 그 사람이 이경빈이라면요? 언니한테서 골수를 이식받은 사람이 이경빈이라면요?”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을 듣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이경빈이라뇨? 유진 씨,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어제 강지혁이 알아낸 것들을 전부 다 얘기해주었다.“그래서 나는 언니 골수를 받은 사람이 이경빈이라고 생각해요. 공수진은 골수를 기증한 적 따위 없는 거죠.”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 입만 달싹일 뿐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세 사람의 혈액형이 다 똑같은 특수한 혈액형이라니, 이런 우연이 정말 가능할까?탁유미는 자신이 구한 사람이 이경빈이라는 말에 문득 그때 의사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의사는 당시 골수 이식을 받는 사람은 젊은 남자고 외동아들이라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했었다.누군가를 특징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들이었고 이런 사람들은 거리에 수두
물론 이경빈이 탁유미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다면 말이다.“만약 거부하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수술대 위에 올려놓을 거야!”임유진이 이를 꽉 깨문채 단호하게 말했다.이에 강지혁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신기해서. 넌 이제껏 그 어떤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통제한다거나 법망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려고 한 적 없잖아.”그 말에 임유진이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흥분한 나머지 변호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언니한테 감정이입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봐. 만약 이대로 언니가 세상을 떠나면 공수진은 그때부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기 세상인 것처럼 굴 거니까. 애초에 죄책감 따위 없는 인간이겠지만.”임유진은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이경빈이 정말 기증을 거부하면 혁이 너는 내가 하려는 일에 동의해줄 수 있어? 날... 도와줄 수 있어?”임유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복잡했다.그도 그럴 것이 이건 그녀가 평소 지키던 선을 벗어나는 일이니까.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윤이가 엄마를 잃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강지혁은 그녀의 질문에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전에도 말했지.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해주겠다고. 그게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해도 난 널 위해 해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강지혁은 지금 충동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단지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그는 정말 임유진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만약 네가 날 도운 거로 인해 너한테 불필요한 일이 생기면?”강지혁은 그 질문에 임유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게 뭐? 유진아, 나는 너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 그 무엇 하나 달갑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강지혁에게 잡힌 손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더니 눈을 맞추고 자기 진심을 내보였다.“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