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유미는 아직도 자신이 골수를 기증해준 남자가 이경빈인 걸 모르고 있다.공수진은 이 비밀을 이경빈과 탁유미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다. 이건 무덤까지 안고 가야 했다.그래야만 이씨 가문의 안주인이 그녀가 될 테니까....임유진은 차 변호사로부터 서류 봉투를 건네받고서야 이걸 전달해야 하는 곳이 KS 그룹이라는 것을 알았다.순간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자 차 변호사가 물었다.“무슨 문제 있어요? 그쪽에서 급히 필요한 거라고 해서 퀵 서비스보다는 유진 씨를 보내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건네준 건데.”“아무 문제 없습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후 차 변호사 사무실을 나왔다.로펌에서 일하면서 강현수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있는 로펌뿐만이 아니라 꽤 많은 로펌이 크고 작은 법무상의 문제로 KS 그룹과 엮여있다.KS 그룹 산하의 연예인들 법적 문제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임유진은 서류 봉투를 챙겨 들고 KS 그룹에 도착했다. 프런트 데스크에 이곳에 온 이유를 전하니 직원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빌딩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 차림의 일행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그중 제일 앞에서 사람은 강현수였다. 그는 옆에 있는 중년남성과 얘기를 하며 걸어들어왔다.임유진은 그의 등장에 깜짝 놀라 서둘러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만 강현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처음 듣는 다정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전부 눈을 크게 뜬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강현수는 여자친구에게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그러나 지금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차정훈 변호사님 부탁으로 서류 전달해주려 왔어요.”“어디로 가져가는데요?”강현수의 질문에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대신 답했다.“법, 법무팀으로요. 방금 법무팀하고 연락이 됐는데 직접 가지고 오라고 하세요.”“그
회사 안에서 강현수가 어디를 가든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결국 임유진은 강현수와 함께 법무팀으로 함께 향했다. 부서에 도착했을 때 법무팀 직원들은 전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동안 얼어있었다.법무팀 팀장은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구경하다 이내 공손한 태도로 두 사람을 회의실 안으로 데려갔다.그는 임유진이 건네주는 서류 봉투를 건네받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맙습니다. 다음번에는 저희 쪽에 연락을 주시면 급한 서류는 저희 팀 직원을 그쪽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강현수가 함께 갈 정도의 여자라면 분명 중요한 인물이 분명했기에 팀장은 최대한 저자세로 얘기했다.그리고 얼마 전 강현수의 인터뷰도 봤었던지라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가 혹시 강현수가 밝힌 사랑하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했다.그날 인터뷰가 공개된 후 그룹 전체가 들썩거렸었다. 흔한 가십거리에 관심 없는 직원들조차 강현수가 얘기한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그간 강현수의 여자친구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강현수가 진정한 사랑을 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원하시는 서류가 맞는지 확인 부탁드릴게요.”임유진의 말에 팀장은 얼른 서류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 맞습니다. 저희가 원한 서류가 맞네요.”“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임유진은 가볍게 인사한 다음 회의실을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그때 강현수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벌써 가려고요?”“볼일을 끝냈으니 당연히 이만 가야겠죠?”임유진이 자신의 팔을 힐끔 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나는 아직 할 얘기가 많은데.”그 말에 눈치 빠른 법무팀 팀장이 후다닥 회의실을 나가며 문까지 조심스럽게 닫아주었다.임유진은 조금 골치 아픈 얼굴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때 강지혁이 방해하는 바람에 둘이서 제대로 얘기 못 했잖아요. 뭐
임유진은 순간 그의 올곧은 시선이 꼭 자신의 마음을 전부 꿰뚫어 보는 듯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강현수 씨.”임유진은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켜더니 진지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현수 씨 말이 맞아요. 나는 강현수 씨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지금 그저 하루하루가 평안하게 흘러가기를 원해요. 연애 놀이 같은 거 이제는 하고 싶지 않아요.”“나는 한 번도 당신을 연애 놀이 대상으로 본 적 없어요.”강현수도 똑같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혹시 내가 했던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겁니까? 그런 거면 어떻게 해야 내 진심을 믿을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알려줘요.”임유진은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나는 지쳤어요. 사랑 같은 거 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이미 지쳐있다고요.”“그러면 받기만 해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을 때, 그때 나를 사랑해줘요. 나는 지금 당신이 날 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그 말에 임유진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하필 나예요? 나는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징역형도 살다 나온 여자예요. 그리고 당신이 계속 찾아 헤맸던 사람도 아니고요.”마지막 말을 할 때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그러게요. 왜 당신일까요.”강현수는 조용히 읊조리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임유진은 그의 손길에 순간 움찔하며 피하려다가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몸이 얼어붙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쩐지 모를 처연함과 꾹꾹 눌러 담은 갈망이 잔뜩 어려있었다.“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징역형도 산 데다가 내가 찾던 사람도 아닌데 왜 하필 당신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확실히 당신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많았겠죠. 하지만...”강현수는 잠깐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고 그건 내가 당신이라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증명되는 일이
“그럼... 사무실 안에서 기다릴게요.”“아니요. 밖에서 기다려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비서의 단호한 대답에 배여진은 이를 꽉 깨물더니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그녀는 어쩐지 비서의 태도가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커피를 가져다줄 때 평소처럼 아부하는 것 같은 느낌은 확연히 사라지고 없었다.강현수가 인터뷰에서 그녀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확실히 선을 그어서일까?배여진은 그 생각만 하면 주먹이 떨렸다.강현수가 그 말을 한 탓에 학교 친구들은 그녀에게 갖은 삿대질과 조롱을 해댔고 드라마 제작팀은 평소 살가웠던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아예 그녀라는 존재를 무시하기도 했다.강현수의 관심이 그녀에게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는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그때, 회사 임원중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와 비서에게 다가와 물었다.“대표님은 아직 안 오셨나?”“네, 어떤 여성분과 함께 법무팀으로 가셨다고 합니다.”“그래, 그건 나도 들었어. 다들 그 여자가 대표님이 인터뷰에서 얘기한 여자라고 난리야. 평소 자기 할 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여자와 함께 법무팀까지 같이 갔으니 그럴 만도 하지.”임원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다.“그 여성분이 어떤 분인지 상무님은 혹시 아세요?”비서도 임유진의 얼굴은 못 봤던 터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듣기로는 로펌 직원이라는 것 같던데 자세하게는 잘 몰라.”로펌 직원?!임유진이 틀림없다!배여진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그 여자가 임유진이라고 확신했다.강현수는 지금 자신의 모든 신경을 임유진에게 쏟고 있다.‘안 돼. 이대로는 안 돼!’만약 강현수와 임유진이 함께 하게 되면 배여진은 강현수의 곁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유진아!”임유진은 회사를 나왔다가 배여진의 부름에 자리에 멈춰 섰다.배여진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다.“
“그때 경찰서에서 현수 씨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그럼 너는? 너는 어떤데? 그때 보니까 강지혁 씨는 아직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너랑 지혁 씨... 정말 헤어진 거 맞아?”배여진의 질문에 임유진은 그저 그녀를 담담히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배여진은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전에는 이상한 사람하고 결혼해 힘들게 살았어. 그러다 현수 씨를 만났고 이제 현수 씨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현수 씨를 좋아해.”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너한테는 강지혁 씨가 있잖아. 나한테 남은 사람은 현수 씨밖에 없어. 그런 나한테서 현수 씨 빼앗아 갈 건 아니지...?”임유진은 그녀를 계속 바라만 보았다.배여진은 그 시선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 혹시 내가 전에 했던 얘기 때문에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그랬다면 미안해. 하지만 현수 씨 일은 진심이야.”“그래서? 나는 강현수를 사랑하지 않아. 강현수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뭐, 이런 말을 해주길 원하는 거야? 그러면 언니 마음이 조금 안심될 것 같아? 만약 내가 언젠가 강현수를 좋아하게 되면 지금 한 말을 들먹이며 나를 막아보기라도 하게?”임유진은 기나긴 침묵 끝에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배여진의 뜨끔하는 표정을 보니 그럴 속셈이 맞는 듯했다.“언니, 이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외할머니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충고하는데 강현수는 절대 쉬운 남자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으면 어쩌면 큰 봉변은 당하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헛된 걸 욕심내면 그때는...”만약 강현수가 배여진의 거짓말을 알게 된다면 그는 절대 그녀를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어느 때보다 더 잔혹해질지도 모른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배여진의 표정은 삽
고이준은 별다른 질문 없이 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서서히 단지를 벗어났다.강지혁은 피곤한 듯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아까 임유진을 본 순간 줄곧 공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는 또다시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그의 모든 감정을 이토록 쉽게 쥐고 흔들 수 있다. 임유진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만족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그런 여자다.강지혁은 자신이 마치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게 설계된 몸이 된 것만 같았다.“고 비서는 내가 아직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 같아?”강지혁의 뜬금없는 질문이 조용한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고이준은 핸들을 꽉 쥔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대체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대표님, 저는 음... 그게...”고이준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강지혁은 그의 의도를 파악한 듯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이준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제가 느끼기에 대표님께서는 아직 임유진 씨를 사랑하시는 거로 보입니다. 아니면 강현수 씨가 임유진 씨에게 사랑을 고백한 후 그렇게 화를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예전에는 여자들이 어떻게든 강지혁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렸다면 지금은 강지혁이 어떻게든 임유진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리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내가 유진이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말이네?”어쩐지 허탈한 듯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이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는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노숙자로 알던 시절이 그리웠던 건 아닐까요?”그 시절이 그리운 거라고?강지혁의 눈이 흠칫 떨렸다.확실히 그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그때의 임유진은 강지혁을 완전히 믿고 있었으며 그에게 가족이라는 따뜻함도 주었으니까.그런 따뜻함은 그의 어머니도, 그의 할아버지도 심지어는 그
소지혜가 다시 끌려간 후 임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가 없었다.소지혜가 그토록 순순히 인정한 게 강현수와 관련 있다는 건가?한편 차 변호사는 소지혜의 말을 듣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법원에서 나와보니 입구 쪽에 마세라티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강현수가 내리더니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차 변호사는 그를 보고는 임유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강현수 씨한테는 유진 씨가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아마 강현수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못했을 테니까요.”차 변호사는 임유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강현수와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차를 타고 가버렸다.임유진은 계단 위에 멈춰선 채 시선을 내려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강현수는 고개를 들어 그런 임유진을 보며 웃었다.법원에서 나오던 사람들은 강현수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연예인보다 훨씬 더 얼굴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 어디로 가든지 항상 이목이 쏠렸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사건 무사히 해결된 거 축하해요.”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임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대뜸 이런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이것으로 소지혜가 태도를 바꾼 이유가 그와 연관이 있는 게 확실시되었다.“사건 담당 변호사는 내가 아니라 차정훈 변호사예요.”그 말에 강현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됐든 잘된 거잖아요.”“소지혜 씨가 죄를 인정하게 한 거 현수 씨예요?”임유진이 물었다.“그 여자가 그래요?”“네.”“나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강현수는 마치 이런 건 지극히 간단한 일처럼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소지혜가 인정하도록 한 건지는 모른다. 다만 해당 사건으로 소지혜는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도와줘서 고마워요.”“고마우면 지금 나랑 어디 같이 가줘요.”
“안 봐도 돼요. 전에 손 때문에 강지혁이랑 같이 병원에 간 적 있었거든요.”임유진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거절했다.강지혁과 함께 병원에 갔었을 때 의사는 치료 가능한 최적기를 놓쳤다며 그녀에게 통증을 완화하는 약만 처방해주었다. 다만 비 오는 날만 되면 약 효과가 없는 것인지 으슬으슬 아프기는 했지만 말이다.“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선생님한테 한번 보여요.”강현수는 임유진의 손을 잡고 반강제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안으로 들어와 보니 안은 훨씬 더 썰렁했고 진료실로 들어가니 백발에 흰 수염을 가진 노인 한 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진료실 벽면에는 작은 티비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해당 드라마는 임유진도 직장 동료들이 얘기한 적 있어 알고 있었다.감동적이고 재밌는 드라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진료시간에 이토록 열심히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노인은 마치 시사 토론이라도 보는 것처럼 표정이 진지했다.“여사님이 최근 꽂힌 드라마인가 보죠?”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영훈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를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이런 드라마 좀 안 찍을 순 없어? 마누라가 혼자 보면 될 것을 기어코 나와 함께 보겠다고 매일 밤 난리야. 안 보고 잠이라도 들면 다음 날에 재방송으로 꼭 보라고 신신당부까지 해.”어제저녁 많이 피곤했던 터라 드라마 시작과 함께 잠이 드니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어떻게 보다가 잠들 수 있냐며, 오늘 내로 재방송을 보고 오라고 출근 때까지 시달렸다.이딴 드라마가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묻자 자고로 부부란 취미도 같이 해야 한다며, 그래야 감정이 식지 않고 오래간다고 일리 있는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이에 소영훈은 결국 꼬리를 내렸지만 이런 드라마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공부한다 생각하고 열심히 보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이 드라마 우리 회사 작품 아니에요.”소영훈은 혀를 차더니 티비를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