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왜 갑자기 탁유미가 감방에 있었던 일을 조사하는 거지? 설마 탁유미와 만나고 옛정이라도 생긴 건가?공수진이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이경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에 자료를 든 공수진을 보더니 표정을 조금 굳혔다.“여긴 왜 왔어?”이경빈이 물었다.“그게... 경빈 씨 주려고 쿠키를 직접 만들었거든요.”공수진은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경빈 씨, 탁유미 씨 자료는 왜 보는 거예요?”이경빈은 책상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자료를 빼앗아 들고 말했다.“양육권을 되찾으려면 상대 쪽 정보를 잘 알아둬야지.”정말 그것뿐일까?공수진은 불안을 지울 수가 없었다.“경빈 씨, 나 무서워요. 당신이 탁유미 씨한테 감정이 남아있을까 봐 무서워요.”“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이경빈은 차갑게 대꾸하더니 의자에 앉으려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공수진이 그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미안해요. 말이 헛나왔어요. 요즘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자꾸 경빈 씨와 내가 결혼할 일 없다고 해서 예민해졌나 봐요. 경빈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너무 불안해요.”공수진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이경빈은 그걸 듣더니 굳었던 표정을 풀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지난번 파티에서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왔나 보네. 미안해. 인터넷 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불안해하지 마. 나는 꼭 너랑 결혼할 테니까.”공수진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떠난 후 이경빈은 조금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그러고는 책상 가득한 탁유미의 자료들을 손으로 뒤적거렸다.아까 회의에 들어가기 전 이 자료들을 받았을 때 그는 심장이 옥죄어 오듯 고통스러웠다.감방에 들어가 고생한 것쯤은 그도 예상했던 바였지만 막상 자료로 그녀가 당했던 고통을 눈을 직접 보게 되니 숨이 막혀왔다.여자가, 그것도 임신한 여자가 비인도적인
탁유미는 아직도 자신이 골수를 기증해준 남자가 이경빈인 걸 모르고 있다.공수진은 이 비밀을 이경빈과 탁유미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다. 이건 무덤까지 안고 가야 했다.그래야만 이씨 가문의 안주인이 그녀가 될 테니까....임유진은 차 변호사로부터 서류 봉투를 건네받고서야 이걸 전달해야 하는 곳이 KS 그룹이라는 것을 알았다.순간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자 차 변호사가 물었다.“무슨 문제 있어요? 그쪽에서 급히 필요한 거라고 해서 퀵 서비스보다는 유진 씨를 보내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건네준 건데.”“아무 문제 없습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후 차 변호사 사무실을 나왔다.로펌에서 일하면서 강현수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있는 로펌뿐만이 아니라 꽤 많은 로펌이 크고 작은 법무상의 문제로 KS 그룹과 엮여있다.KS 그룹 산하의 연예인들 법적 문제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임유진은 서류 봉투를 챙겨 들고 KS 그룹에 도착했다. 프런트 데스크에 이곳에 온 이유를 전하니 직원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빌딩 문이 열리고 검은 양복 차림의 일행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그중 제일 앞에서 사람은 강현수였다. 그는 옆에 있는 중년남성과 얘기를 하며 걸어들어왔다.임유진은 그의 등장에 깜짝 놀라 서둘러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만 강현수와 눈이 마주쳐버렸다.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처음 듣는 다정한 목소리에 사람들이 전부 눈을 크게 뜬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강현수는 여자친구에게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그러나 지금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차정훈 변호사님 부탁으로 서류 전달해주려 왔어요.”“어디로 가져가는데요?”강현수의 질문에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대신 답했다.“법, 법무팀으로요. 방금 법무팀하고 연락이 됐는데 직접 가지고 오라고 하세요.”“그
회사 안에서 강현수가 어디를 가든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결국 임유진은 강현수와 함께 법무팀으로 함께 향했다. 부서에 도착했을 때 법무팀 직원들은 전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동안 얼어있었다.법무팀 팀장은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구경하다 이내 공손한 태도로 두 사람을 회의실 안으로 데려갔다.그는 임유진이 건네주는 서류 봉투를 건네받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맙습니다. 다음번에는 저희 쪽에 연락을 주시면 급한 서류는 저희 팀 직원을 그쪽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강현수가 함께 갈 정도의 여자라면 분명 중요한 인물이 분명했기에 팀장은 최대한 저자세로 얘기했다.그리고 얼마 전 강현수의 인터뷰도 봤었던지라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가 혹시 강현수가 밝힌 사랑하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했다.그날 인터뷰가 공개된 후 그룹 전체가 들썩거렸었다. 흔한 가십거리에 관심 없는 직원들조차 강현수가 얘기한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그간 강현수의 여자친구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강현수가 진정한 사랑을 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원하시는 서류가 맞는지 확인 부탁드릴게요.”임유진의 말에 팀장은 얼른 서류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 맞습니다. 저희가 원한 서류가 맞네요.”“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임유진은 가볍게 인사한 다음 회의실을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그때 강현수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벌써 가려고요?”“볼일을 끝냈으니 당연히 이만 가야겠죠?”임유진이 자신의 팔을 힐끔 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나는 아직 할 얘기가 많은데.”그 말에 눈치 빠른 법무팀 팀장이 후다닥 회의실을 나가며 문까지 조심스럽게 닫아주었다.임유진은 조금 골치 아픈 얼굴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때 강지혁이 방해하는 바람에 둘이서 제대로 얘기 못 했잖아요. 뭐
임유진은 순간 그의 올곧은 시선이 꼭 자신의 마음을 전부 꿰뚫어 보는 듯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강현수 씨.”임유진은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켜더니 진지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현수 씨 말이 맞아요. 나는 강현수 씨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지금 그저 하루하루가 평안하게 흘러가기를 원해요. 연애 놀이 같은 거 이제는 하고 싶지 않아요.”“나는 한 번도 당신을 연애 놀이 대상으로 본 적 없어요.”강현수도 똑같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혹시 내가 했던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겁니까? 그런 거면 어떻게 해야 내 진심을 믿을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알려줘요.”임유진은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나는 지쳤어요. 사랑 같은 거 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이미 지쳐있다고요.”“그러면 받기만 해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을 때, 그때 나를 사랑해줘요. 나는 지금 당신이 날 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그 말에 임유진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하필 나예요? 나는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징역형도 살다 나온 여자예요. 그리고 당신이 계속 찾아 헤맸던 사람도 아니고요.”마지막 말을 할 때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그러게요. 왜 당신일까요.”강현수는 조용히 읊조리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임유진은 그의 손길에 순간 움찔하며 피하려다가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몸이 얼어붙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쩐지 모를 처연함과 꾹꾹 눌러 담은 갈망이 잔뜩 어려있었다.“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징역형도 산 데다가 내가 찾던 사람도 아닌데 왜 하필 당신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확실히 당신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많았겠죠. 하지만...”강현수는 잠깐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고 그건 내가 당신이라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증명되는 일이
“그럼... 사무실 안에서 기다릴게요.”“아니요. 밖에서 기다려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비서의 단호한 대답에 배여진은 이를 꽉 깨물더니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그녀는 어쩐지 비서의 태도가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커피를 가져다줄 때 평소처럼 아부하는 것 같은 느낌은 확연히 사라지고 없었다.강현수가 인터뷰에서 그녀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확실히 선을 그어서일까?배여진은 그 생각만 하면 주먹이 떨렸다.강현수가 그 말을 한 탓에 학교 친구들은 그녀에게 갖은 삿대질과 조롱을 해댔고 드라마 제작팀은 평소 살가웠던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아예 그녀라는 존재를 무시하기도 했다.강현수의 관심이 그녀에게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는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그때, 회사 임원중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와 비서에게 다가와 물었다.“대표님은 아직 안 오셨나?”“네, 어떤 여성분과 함께 법무팀으로 가셨다고 합니다.”“그래, 그건 나도 들었어. 다들 그 여자가 대표님이 인터뷰에서 얘기한 여자라고 난리야. 평소 자기 할 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여자와 함께 법무팀까지 같이 갔으니 그럴 만도 하지.”임원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다.“그 여성분이 어떤 분인지 상무님은 혹시 아세요?”비서도 임유진의 얼굴은 못 봤던 터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듣기로는 로펌 직원이라는 것 같던데 자세하게는 잘 몰라.”로펌 직원?!임유진이 틀림없다!배여진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그 여자가 임유진이라고 확신했다.강현수는 지금 자신의 모든 신경을 임유진에게 쏟고 있다.‘안 돼. 이대로는 안 돼!’만약 강현수와 임유진이 함께 하게 되면 배여진은 강현수의 곁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유진아!”임유진은 회사를 나왔다가 배여진의 부름에 자리에 멈춰 섰다.배여진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다.“
“그때 경찰서에서 현수 씨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그럼 너는? 너는 어떤데? 그때 보니까 강지혁 씨는 아직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너랑 지혁 씨... 정말 헤어진 거 맞아?”배여진의 질문에 임유진은 그저 그녀를 담담히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배여진은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전에는 이상한 사람하고 결혼해 힘들게 살았어. 그러다 현수 씨를 만났고 이제 현수 씨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현수 씨를 좋아해.”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너한테는 강지혁 씨가 있잖아. 나한테 남은 사람은 현수 씨밖에 없어. 그런 나한테서 현수 씨 빼앗아 갈 건 아니지...?”임유진은 그녀를 계속 바라만 보았다.배여진은 그 시선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 혹시 내가 전에 했던 얘기 때문에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그랬다면 미안해. 하지만 현수 씨 일은 진심이야.”“그래서? 나는 강현수를 사랑하지 않아. 강현수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뭐, 이런 말을 해주길 원하는 거야? 그러면 언니 마음이 조금 안심될 것 같아? 만약 내가 언젠가 강현수를 좋아하게 되면 지금 한 말을 들먹이며 나를 막아보기라도 하게?”임유진은 기나긴 침묵 끝에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배여진의 뜨끔하는 표정을 보니 그럴 속셈이 맞는 듯했다.“언니, 이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외할머니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충고하는데 강현수는 절대 쉬운 남자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으면 어쩌면 큰 봉변은 당하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헛된 걸 욕심내면 그때는...”만약 강현수가 배여진의 거짓말을 알게 된다면 그는 절대 그녀를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어느 때보다 더 잔혹해질지도 모른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배여진의 표정은 삽
고이준은 별다른 질문 없이 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서서히 단지를 벗어났다.강지혁은 피곤한 듯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아까 임유진을 본 순간 줄곧 공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는 또다시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그의 모든 감정을 이토록 쉽게 쥐고 흔들 수 있다. 임유진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만족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그런 여자다.강지혁은 자신이 마치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게 설계된 몸이 된 것만 같았다.“고 비서는 내가 아직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 같아?”강지혁의 뜬금없는 질문이 조용한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고이준은 핸들을 꽉 쥔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대체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대표님, 저는 음... 그게...”고이준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강지혁은 그의 의도를 파악한 듯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이준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제가 느끼기에 대표님께서는 아직 임유진 씨를 사랑하시는 거로 보입니다. 아니면 강현수 씨가 임유진 씨에게 사랑을 고백한 후 그렇게 화를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예전에는 여자들이 어떻게든 강지혁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렸다면 지금은 강지혁이 어떻게든 임유진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리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내가 유진이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말이네?”어쩐지 허탈한 듯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이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는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노숙자로 알던 시절이 그리웠던 건 아닐까요?”그 시절이 그리운 거라고?강지혁의 눈이 흠칫 떨렸다.확실히 그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그때의 임유진은 강지혁을 완전히 믿고 있었으며 그에게 가족이라는 따뜻함도 주었으니까.그런 따뜻함은 그의 어머니도, 그의 할아버지도 심지어는 그
소지혜가 다시 끌려간 후 임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가 없었다.소지혜가 그토록 순순히 인정한 게 강현수와 관련 있다는 건가?한편 차 변호사는 소지혜의 말을 듣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법원에서 나와보니 입구 쪽에 마세라티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강현수가 내리더니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차 변호사는 그를 보고는 임유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강현수 씨한테는 유진 씨가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아마 강현수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못했을 테니까요.”차 변호사는 임유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강현수와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차를 타고 가버렸다.임유진은 계단 위에 멈춰선 채 시선을 내려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강현수는 고개를 들어 그런 임유진을 보며 웃었다.법원에서 나오던 사람들은 강현수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연예인보다 훨씬 더 얼굴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 어디로 가든지 항상 이목이 쏠렸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사건 무사히 해결된 거 축하해요.”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임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대뜸 이런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이것으로 소지혜가 태도를 바꾼 이유가 그와 연관이 있는 게 확실시되었다.“사건 담당 변호사는 내가 아니라 차정훈 변호사예요.”그 말에 강현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됐든 잘된 거잖아요.”“소지혜 씨가 죄를 인정하게 한 거 현수 씨예요?”임유진이 물었다.“그 여자가 그래요?”“네.”“나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강현수는 마치 이런 건 지극히 간단한 일처럼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소지혜가 인정하도록 한 건지는 모른다. 다만 해당 사건으로 소지혜는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도와줘서 고마워요.”“고마우면 지금 나랑 어디 같이 가줘요.”
하지만 잠깐 눈을 판 사이 한지영을 다치게 했고 그렇게 평생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을 잃어버렸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리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나와 결혼하고 싶은거라면 그렇게 해줄게. 이곳에서의 일이 다 끝이 나면 혼사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지.”“정말이에요?”고은채는 예상 밖의 답변에 활짝 웃었다.“너한테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백연신은 담담하게 답하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신 지영이 건드리지 마. 지영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날에는 각오해도 좋을 거야.”고은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토록 시린 눈빛은 처음이었다.아무리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들 이 남자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백연신, 네가 지금은 나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만 머지않아 곧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리게 될 거야. 그때는 아마 한지영은 생각도 안 날걸? 두고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니까.’고은채는 만약 백연신과 먼저 만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한지영 같은 건 애초에 기회도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지영은 얼굴로 보나 몸매로 보나 아니면 집안으로 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못난 여자였으니까.“알겠어요. 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연신 씨도 꼭 약속을 지켜요.”고은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한정판 블랙 드레스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하이힐을 신었다. 예쁜 드레스에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까지 하고 나니 한층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건 5년 만이라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남들에게 흠을 잡히는 일은 조금도 없어야 했으니까.사실 그녀가 원래 준비했던 목걸이는 루비 목걸이가 아닌 진주 목걸이였다. 그런데 드레스를 다 입은 후 목걸이를 하려는데 갑자기 강지혁이 다가와 그녀에게 루비 목걸이를 해주었다.“오늘 드레스에는 이게 더 어울려.”강지혁이 말했다.“뭐야?
강지혁의 마음은 어느샌가 그녀의 부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이러한 기분은 처음이라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과거의 자신은 대체 이 여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었는지 문득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별장으로 돌아온 백연신은 마치 집주인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은채를 보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멋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차가운 남자의 말에도 고은채는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왔어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 집에 오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나 당신 여자친구잖아. 안 그래요? 그보다 어디 갔다 왔어요? 설마 전 여자친구 보러 간 건 아니죠?”백연신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고은채의 말대로 그는 한지영을 보러 갔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는 것까지 보았다.그 광경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는 질투와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찼고 한지영 옆에 있는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한지영은 그의 여자였으니까.“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이 그 여자와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아주 조금도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이제 34살이나 됐죠? 그러면 머지않아 곧 선도 보고 결혼도 하겠네요. 여자들은 아닌 척해도 나이를 꽤 많이 신경 쓰고 있거든요.”고은채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백연신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유혹적인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입 다물어.”백연신은 고은채의 손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다시 거칠게 뿌리쳤다. 경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그리고 내 몸에 손대지 마.”“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였어요?”고은채는 그에게 뿌리쳐진 손을 아무렇지 않게 거두어들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만약 그때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한지영은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전에 벌써 싸늘하게 죽어버렸을 거예요. 그때 연신 씨가 한지영 살리겠다고 나한
임유진은 마치 점심 메뉴 정하듯 태연한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너는 내 거라는 것만 확실하게 그 여자한테 각인시켜주면 돼. 만약 네가 그렇게 했는데도 헛된 희망을 품고 헛된 짓을 하면 그때는 내가 알아서 상대할게. 너는 나설 필요 없어.”남편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까.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내가 네 거야?”가까스로 가라앉은 임유진의 볼이 한순간에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임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강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응, 넌 내 거야. 내 남편이고 나만 가질 수 있어.”강지혁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걸 쉽게 허락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일까, 이 여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괜히 마음이 들뜨고 이상한 만족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내가 네 거라고 확신하나 봐?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쩌려고?”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다른 여자한테 아주 잠시 끌린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네 마음을 다시 나한테로 돌려놓으려고 할 거야.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 없이는 안 될 지경에 이른 거라면... 그때는 조용히 네 곁을 떠날 거야. 그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 같으니까.”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그녀가 알고 있는 혁이가 아닐 테니 서로를 위해서라도 놓아주는 게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임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혁은 얼굴을 무섭게 굳히더니 곧바로 그녀를 제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로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까지 들었다.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누군가의 한마디로 인해
강지혁은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조금 풀어진 얼굴로 임유진의 오른손을 잡았다.“다른 남자한테는 찰나의 시선도 주지 마. 너한테 남자는 오직 나뿐이니까.”임유진은 소유욕 짙은 그의 말에 문득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이 떠올랐다.예전에도 그는 그녀의 곁에 남자가 접근하는 꼴을 보지 못했고 늘 자기만 바라보며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해주기를 바랐다.집착 가득했던 당시의 그 말도 어떤 감정으로 한 건지 모를 지금 이 말도 임유진은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그때 귓가에 따끔한 감각이 전해지고 임유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강지혁이 허리를 숙인 채 그녀의 귀를 깨물고 있었다.임유진은 그의 입술이 닿은 귓가가 한순간에 확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움찔 떨며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려고 했다.“혁아, 간지러워...”하지만 귀 쪽으로 손을 올리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잡혀버렸다.강지혁은 마치 달콤한 디저트라도 맛보듯 입술을 떼려 하지 않았다.“그러고 보니 오늘 드레스 샵에서... 흡... 꽤 많은 돈을 썼는데... 괜찮지?”임유진은 그의 움직임을 제지하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하다가는 금세 분위기에 취해 이상한 기류로 흘러갈지도 몰랐으니까.“쓰라고 준 카드야. 원하는 대로 써. 그리고 내가 가진 재산 중 절반은 원래 네 몫이야.”“내가 네 돈만 보고 좋아한 거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하지?”임유진이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돈 때문이야?”강지혁이 조금 가라앉은 말투로 물으며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랑했던 공기가 한순간에 차갑게 바뀌었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보려는 듯한 그의 눈빛에 괜히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아니.”그녀의 답에 강지혁이 다시 웃었다.“그럴 줄 알았어. 만약 너와 나를 이었던 게 돈이었으면 그렇게도 많은 일을 겪지 않았겠지.”강지혁은 임유진의 손가락을 매만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오늘 드레스 샵에서 소민아와 트러블이
“알고 있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소민아는 말을 마친 후 빠르게 가게를 벗어났다.그날 밤.임유진은 아이 둘을 다 재운 후 곧바로 침실로 돌아와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현이는 자신만의 방이 다 마련되었음에도 오빠와 함께 자고 싶다며 잠잘 때만 되면 강선율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임유진은 그런 딸의 모습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율이도 썩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고 또 두 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아 결국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자는 것을 허락했다.강선율은 이야기를 읽어달라는 동생의 말에 처음에는 조금 난감해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동화책을 고르며 현이에게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게다가 매 밤 한 권도 아니고 적어도 세 권의 책은 읽어주었다.오빠라는 호칭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아니면 피가 당겨서인지 율이는 당황한 표정은 가끔 지을지언정 짜증이나 화는 한번도 내지 않았다.임유진은 아이들의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그때 머리 바로 위쪽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연신 회장 얼굴이 네 취향인가 보지? 입꼬리가 귀에 걸렸네.”임유진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바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건지 등 바로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백연신의 기사를 보고 있는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백연신의 사진을 켜둔 채로 웃어버린 바람에 아무래도 그 미소의 상대가 백연신이라고 오해한 듯했다.“아니야! 방금은 현이랑 율이 생각하느라 괜히 좋아져서 그래. 그리고 백연신 씨는 지영이 전 남자친구잖아. 지영이 일로 백연신 씨 기사 좀 검색해 본 것뿐이야. 정말이야!”임유진은 혹여 강지혁이 이상한 오해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해명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너 혹시... 백연신 씨랑 지영이가 사귀었던 사실도 잊어버렸어?”임유진은 강지혁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알
눈앞 여자의 정체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거물의 아내임은 틀림없었다.사장과 소민아에게 잘 보이려 했던 직원은 속으로 동시에 이 생각을 하고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임유진은 고이준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후 바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신입 직원을 바라보았다.“이 드레스로 할게요. 마음에 드네요.”“네... 네! 알겠습니다!”신입은 얼떨떨한 얼굴로 허리를 바짝 편 채 대답했다. 입사한 지 불과 몇 개월 안 된 자신이 이러한 큰 주문을 따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소민아는 임유진 쪽으로 확 기운 분위기에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불려 세워지고 말았다.“소민아 씨,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소민아 씨와도 관계되는 일이니 함께 CCTV를 보는 게 어때요?”임유진이 물었다.“아, 아니요. 그럴 필요는... 제가 실수로 물을 맞아버린 것뿐인데요.”소민아는 상황을 무마하려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아까는 내 친구가 물을 끼얹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잖아요. 뭐, 좋아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럼 이제 억울한 내 친구한테 사과해야겠죠?”임유진의 말에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사과요?”“그럼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사건이 해결될 줄 알았어요?”임유진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소민아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안나가 강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간 후로 그녀는 늘 자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콧대 높은 여자들마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었으니까.그러니 누군가에게 사과한다는 일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것도 평범하디 평범한 한지영에게는 더더욱 말이다.게다가 지금은 가게 직원들 앞이라 만약 정말 사과하게 되면 체면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소민아 씨, 사
임유진이 드레스를 먼저 찜한 이상 소민아에게 해당 드레스를 욕심낼 기회는 없었다.“임유진 씨... 우연이네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소민아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소리 지르는 소리가 탈의실까지 전해오던데 그게 소민아 씨였군요?”임유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분명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라고 혁이가 얘기하지 않았나요?”소민아는 그 말에 이를 더 꽉 깨물었다.혁이라는 애칭을 부르며 강지혁과의 관계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려는 그녀의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전에 그녀가 관계를 좁히기 위해 강지혁을 ‘지혁 씨’라고 불렀을 때 강지혁은 바로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굳히며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꼭 그녀에게는 이름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네, 사모님...”소민아가 어색하게 웃었다.“방금은 오해가 좀 있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오해라뇨! 저 몰상식한 여자가 물을 끼얹었잖아요!”소민아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직원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이에 소민아는 입술을 깨물며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아니 그게... 그러니까...”“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CCTV를 돌려보면 되겠네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CCTV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만약 제 친구가 억울한 상황이면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소민아는 그 말에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오해였을 뿐인데 굳이 일을 키울 필요가 있을까요?”“일을 키운 건 내가 아닐 텐데요?”임유진은 타협 따위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한지영에게 쏘아붙였던 사장과 직원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우물쭈물하는 소민아의 모습에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소민아는 지금 행여라도 임유진을 건드릴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었다.그때 세 명의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다름 아닌 고이준이었다.고이준은 안으로 들어온 후 곧바로 임유진의 앞으로
“여기는 그쪽 같은 사람이 함부로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에요.”소민아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한지영은 그런 그녀가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지금 함부로라고 했어요? 지금 그쪽이 누리고 있는 건 모두 딸이 강씨 가문의 양녀가 된 덕에 얻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그전에는 학력도 나보다 낮고 커리어도 별 볼 일 없던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격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네?”소민아는 인플루언서였다고는 하나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지영보다 훨씬 낮았고 다른 조건을 비교해봐도 어디 하나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소민아는 한지영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아까 직원이 건넨 물컵을 한지영 쪽으로 확 기울였다.한지영은 소민아를 도발하며 줄곧 경계하고 있었기에 소민아가 손목을 꺾는 순간 바로 다시 반대로 꺾어 컵 안의 물이 전부 다 소민아에게로 쏟아지게 했다.“아악! 이게 뭐 하는 짓이야!”소민아의 날 선 외침에 가게 안 손님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두 사람 쪽으로 집중됐다.사장은 깜짝 놀라 다가오더니 소민아의 옷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며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그러자 소민아가 손가락을 길게 뻗으며 한지영을 가리켰다.“저 여자가 나한테 물을 끼얹었어요!”한지영은 이에 담담하게 대꾸했다.“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 먼저 나한테 물을 끼얹으려고 했던 게 누군데.”사장은 두 사람을 한번씩 훑어보더니 곧바로 한지영을 향해 말했다.“손님, 소민아 씨에게 당장 사과해주세요. 뭐가 됐든 손님이 물을 끼얹었잖아요.”한지영은 우습다는 듯 사장을 바라보았다.“원인은 다 제쳐주고 결과만 보겠다는 건가요?”“소민아 씨는 고객님 때문에 옷을 버렸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죠? 만약 사과 못 하시겠다면 저희는 강제로 손님을 내보낼 수밖에 없어요. 물론 소민아 씨가 손님께 어떤 책임을 묻든 저희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거고요.”사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소민아에게 아부하던 직원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직원과 달리 사장의 태도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이분은 저희한테 서비스를 제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직원으로 바꿔주세요.”임유진이 차분하게 말했다.“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사장은 간단하게 사과를 전한 후 곧바로 해당 가게에서 제일 젊은 직원을 불렀다.임유진은 직원의 명패에 달린 이름과 조금 긴장한 듯 얼굴이 빨개져 있는 신입 직원을 보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요구하는 색상과 디자인을 얘기해주었다.신입 직원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열심히 드레스를 검색했다.“이대로 끝이라고? 아까 너도 봤잖아. 서비스업 종사자로서의 소양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거.”“사장을 불렀는데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는데 거기서 뭐라고 더 하겠어. 입만 아프지. 걱정하지 마. 이따 반드시 후회할 거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다시 얌전히 드레스를 구경했다.그때 신입 직원이 다가와 임유진에게 드레스 몇 벌을 소개해 주었다. 대여섯 벌 되는 드레스 중에 한정판인 드레스가 한 벌 있었는데 신입인 그녀로서는 임유진에게 바로 시착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만약 임유진이 만약 마음에 든다고 하면 사장에게 권한을 신청해야만 했다.임유진은 직원이 한정판이라고 소개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가 군데군데 박혀있는 해당 블랙 드레스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며 은은하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5년 만에 돌아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비치는 만큼 드레스도 예쁜 것이어야 했기에 임유진은 곧바로 눈을 반짝였다.“와! 유진아, 이거 아까 네가 골랐던 드레스보다 더 예쁜데?”한지영이 감탄하며 말했다.“이거로 할게요. 시착 가능하죠?”임유진이 묻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잠시 후, 직원은 블랙 드레스를 들고 오며 임유진을 탈의실로 안내했다.그리고 한지영은 임유진이 시착을 마칠 동안 소파에 앉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아까 그들에게 불친절했던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살갑게 웃어 보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