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은 다소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송재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특히 문예슬과는 더욱.그의 목소리가 차가워지고 거리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문예슬 씨, 제가 말했을 텐데요, 그 부분에 관해선 얘기하지 말자고요.”문예슬은 차가워진 설영준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설영준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했다.“영준 씨, 전 영준 씨가 송재이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송재이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고, 영준 씨도 이젠 새로운 삶을 가야 하잖아요.”설영준은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잔뜩 엄숙해진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투는 아주 단호했다.“예슬 씨, 저를 걱정해준 건 고마운데, 저랑 재이의 일은 문예슬 씨가 함부로 말할 만큼 간단하지 않아요.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했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그러니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말아요.”문예슬은 영원히 설영준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포기가 되지 않았다. 설영준이 떠나려고 할 때 문예슬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어딘가 사악한 눈빛이었다.설영준의 뒷모습을 보니 이렇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더 강렬하게 들었다.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뛰어난 지혜로 유혹하기만 하면 넘어오지 않을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매력이 흘러넘쳤으니까.그러나 설영준의 차가운 모습과 단호함에 그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실패감을 느끼게 되었다.눈빛이 악랄하게 변한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어떻게든 설영준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리라고.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설영준이 여전히 송재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에게 송재이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은 나쁜 여자였다. 애초에 설영준은 자신의 남자였어야 했으니까.문예슬은 레스토랑에 앉아 설영준이 떠난 곳을 빤히 보았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손을 움켜쥐며 냅킨을 구겼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가락이 하얘질 정
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허둥지둥 집안의 문을 전부 열어보며 해원을 찾으려고 했지만,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그녀는 해원이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송재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문예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예슬은 평온하면서도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재이야, 해원이를 살리고 싶으면 설한그룹 옥상으로 와.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송재이는 가슴이 쿵쾅 뛰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해원이가 왜 문예슬에게 납치를 당했는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문예슬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릴 시간도 없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반드시 자신이 가서 해원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문예슬, 대체 원하는 게 뭐야?”송재이는 긴장하면서도 분노로 가득한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문예슬이 픽 웃었다.“송재이, 난 너한테 지금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영준 씨야, 해원이야.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해. 일단 와, 와보면 해원이가 어디에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송재이는 머리가 어질거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간단한 선택이 아니라 문예슬이 파놓은 함정이라는 것을.문예슬의 진정한 목적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다.송재이는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신고도 하지 않았다.문예슬이 해원이를 해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반드시 두 눈으로 해원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설한그룹에 도착한 그녀는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깊은숨을 들이쉰 그녀는 용기를 내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로 직행한 그녀는 옥상의 버튼을 꾹 눌렀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갔다. 송재이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긴장과 불안에 휩싸였다.옥상
설영준의 목소리를 들은 문예슬은 더 광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며 따져 물었다.“영준 씨, 나랑 결혼해 줄래요? 나랑 결혼해 주면 이 꼬마 놔줄게요.”설영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것이 함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해원이 다치는 걸 더 원하지 않았다.깊은숨을 들이쉰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그래요.”그러나 문예슬은 설영준의 대답을 믿지 않았고 더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말했다.“거짓말하지 말아요! 영준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송재이뿐이잖아요! 그런데 나랑 결혼해 주겠다고요?!”그녀는 말하면서 해원이를 억지로 옥상 변두리까지 끌고 갔다.해원은 공포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어른인 문예슬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송재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위험한 곳까지 끌려간 해원을 본 그녀는 울부짖었다.“문예슬, 당장 그 손 놔!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우리 해원이를 놔줘!”그러나 이성을 잃은 문예슬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송재이, 드디어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게 되었구나? 너도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기분을 알게 되었다고!”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문예슬은 갑자기 해원을 팔에서 손을 떼더니 옥상 아래로 밀쳤다.해원의 모습은 순식간에 시야에 사라졌다. 송재이는 그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안돼!!!”송재이는 울부짖었다. 문예슬이 해원을 옥상에서 밀어버리는 모습을 그대로 목격하게 되었다.그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이 핑글핑글 돌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설영준과 경찰이 바로 움직였다. 그들은 옥상 끝으로 달려가 해원을 잡아보려고 했다.그러나 늦어버린 후였다. 해원은 이미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문예슬의 행동으로 설영준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거칠게 문예슬을 잡은 뒤 경찰에게 넘겼다.그러나 문예슬이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해원을 잃은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달래줄 수 없을 것이다.깨어난 송재이는 멘탈이
송재이는 병실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녀의 두 눈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영혼이 텅 비어버려 오로지 공허함만 남아 있었다.손가락을 들어 부드러운 이불을 만졌다. 그러다가 닿은 차가운 철 침대가 마치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설영준이 그립기도 했지만 정작 그가 눈앞에 있다면 더 극심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설영준이 분명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였다.송재이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에 손을 들어 올려 움켜잡았다. 숨 쉬는 것조차 그녀에겐 고통이었다.눈을 감으며 이 현실에서 도망쳐보려고 했지만, 꿈속에 나타난 해원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나약하고, 공포에 휩싸인 아이의 두 눈, 절망 속에서 그녀를 향해 뻗은 작은 손, 전부 그녀에게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날아와 가슴을 푹푹 찔렀고 영혼이 바스라 들었다.송재이는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니 어느새 베개는 흠뻑 젖어버렸고 그녀의 마음도 눈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그녀는 점차 자신의 존재를 질책하기 시작했다.만약 그녀만 없었더라면 해원이는 이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만약 그녀가 더 일찍 위험을 눈치챘다면 이 모든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늦어버렸고 돌일 킬 수 없었다.송재이의 세상이 무너지고 점차 절망의 늪에 빨려 들어갔다.다시 눈을 떴을 때 창문 커튼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이 흘러들어와 하얀 벽에 쏟아졌다.그녀는 여전히 악몽을 꾸고 있었고, 그 악몽 속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 초점이 잡혔다. 놀란 눈으로 옆에 앉아 있는 설영준을 보았다. 그의 모습은 유난히도 선명하게 보였다.그녀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석고 붕대를 감은 그의 팔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날의 장면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해원이가 옥상으로 떨어지던 순간
설영준은 화가 난 눈빛이었다. 결국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분노와 고통을 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송재이,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영원히 네가 느끼는 고통이 어떤지 모를 거야. 하지만 잊었어? 그 두 아이도 내 아이야! 너는 나라고 마음이 편한 줄 알아? 나도 매일매일 고통스럽고 절망스럽다고. 만약 그때 내가 조금 더 잘 대처했다면, 그랬다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잖아!”송재이는 터진 설영준의 분노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의 눈빛엔 고통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제야 괴로움과 절망에 사는 사람이 그녀 혼자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설영준도 그녀와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가슴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그는 심호흡한 뒤 감정을 갈무리했다.송재이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설영준이 참았던 분노를 터뜨릴 때부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설영준이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가 느끼는 고통도 느끼고 있었다. 점차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이 그동안 설영준의 감정과 기분을 전부 무시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되었다.설영준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온화해졌다.“재이야, 난 여기 있어. 네 곁을 떠나지 않아. 우린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어.”흐느끼는 소리가 병실 안에 울려 퍼지며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눈물이 줄 끊어진 진주처럼 똑똑 흘러내렸다.설영준은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무력감을 느꼈다.그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끌어안았다.그의 품은 따듯하고 견고했다. 꼭 피난처처럼 송재이에게 안정감과 위로를 주었다.송재이의 흐느끼는 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설영준의 품에서 진정하게 된 그녀였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옷을 적셔버렸지만, 그녀는 진정된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송재이의 울음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설
송재이가 떠난 후 설영준은 혼자 서재에 앉아 있었다. 서재에 흐르는 분위기가 무거워졌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보았다. 글씨를 끄적인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아 누군가 사용했던 것 같았다.휴지통 안을 보았다. 그 안에는 구겨버린 종이가 가득했다.설영준은 손을 뻗어 휴지통에서 꺼내 천천히 펼쳐보았다. 송재이의 글씨였다.[서로 사랑하는데 이루어질 수 없네.]그녀가 쓴 이 한마디가 설영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알고 있었다. 이 한마디는 송재이가 그와의 부부관계가 끝나 고통스러움에 쓴 한 마디라는 것을. 이 한마디에 그녀의 슬픔과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설영준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눈빛이 공허해지며 손에 든 종이가 바윗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져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졌다.의자 등받이에 등을 털썩 기댄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후회했다.송재이가 이 한마디를 어떤 심정으로 끄적였을지 상상이 갔다. 분명 느껴지는 괴로움과 슬픔에 버둥거리다가 결국 그의 곁을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설영준은 무력감이 들었다. 그는 대체 어떻게 그녀와의 관계를 되돌려야 할지 몰랐고, 또 어떻게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상처를 지워야 할지도 몰랐다.세상에서 하나뿐인 보물을 잃은 사람처럼 그는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을 보았다. 너무도 쓸쓸했다.시선이 다시 그 구겨진 종이에 닿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그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을 했지만, 운명의 장난에 결국 헤어져야 하는 수밖에 없다고.설영준의 두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나왔다. 더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요한 서재에서 설영준은 혼자 송재이가 쓰다가 버린 그 한마디를 맞이해야 했고 이 비참하고 슬픈 마음을 느껴야 했다.그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쳐 설영준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다.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있던
풀려난 문예슬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송재이가 입양하려던 아이를 잃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송재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가 전혀 이해가 안 됐다.문예술의 세상에서 아이는 수단에 불과하다. 아이를 거래 목적으로 사용하는 그녀는 당연히 아이가 어머니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이날 문예슬은 송재이를 찾았다. 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비웃었다.“난 이해가 안 돼. 입양하려던 애를 잃었을 뿐이잖아. 왜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오바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문예슬을 바라보는 송재이의 눈빛에는 분노가 없었다. 오직 깊은 슬픔만 있을 뿐이다. 그녀는 문예슬의 무지함과 냉정함에 슬펐다. 문예슬은 영원히 그녀의 기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넌 모를 거야.”송재이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너한테 아이는 도구일 뿐이잖아. 하지만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혈육이야. 내가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똑같아. 똑같이 살점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파.”이 말을 들은 문예슬은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 서린 웃음이었다. 그녀는 비정상적으로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너 진짜 놀랍다. 그걸 느끼는 네가 대단하게 느껴지지? 모성애, 뭐 그런 건 줄 알지? 웃겨.”송재이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문예슬의 도발을 받고도 평온하기만 했다.문예슬의 광기는 전적으로 그녀의 문제다. 송재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므로 광기에 영향받고 싶지 않았다.“웃음으로 악행이 지워질 것 같아? 넌 모성애를 몰라. 아이를 잃은 고통도 모를 거야. 이건 네 문제야. 내가 아니라.”“악행?”문예슬의 미소는 천천히 굳었다. 그녀의 눈빛도 점차 예리해졌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랑 악행을 운운해? 넌 깨끗한 줄 알아? 네가 한 일은 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줄 아냐고!”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문예슬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이성 잃은 사람과 다퉈봤자 입만 아팠다.
송재이는 잘 알았다. 문예슬과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계략과 인내가 필요했다.다음 신경전에서 그녀는 더욱 치밀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SNS를 이용하여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 것이다. 문예슬이 고립감을 느끼도록 말이다.그녀는 신경 써서 만든 글들을 올렸다. 모든 글에 행복한 느낌이 가득 담겼다. 회식 자리에서 환히 웃고 있는 그녀의 미소도 아주 아름다웠다.그 뒤에는 일부러 남자와 다정하게 있는 사진도 올렸다. 남자의 모습이 희미해서 상상의 공간이 아주 많았다.이 글들을 보면 그녀가 아주 행복한 생활을 한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활 속에는 사랑과 우정과 성공으로 가득했다.그녀가 작성한 문구에도 현재에 대한 열정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올린 글은 문예슬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나 너보다 잘 살아.”송재이는 문예슬이 이 글들을 볼 것을 잘 알았다. 심지어 그녀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이 악문 모습도 상상되었다.송재이의 목적이 바로 문예슬의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예슬이 통제권을 잃고 불안해하기를 바라봤다.며칠 후, 송재이는 공개적인 활동에서 ‘우연히’ 문예슬과 마주쳤다. 그녀는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예슬을 향해 걸어갔다.“오랜만이야, 예슬아.”송재이는 쉽게 알아챌 수 없이 비꼬며 말을 이었다.“너 요즘 심심해 보이더라? 내가 올린 글 봤어? 난 되게 보람차게 지냈어.”문예슬의 안색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당연히 송재이가 올린 글을 봤다. 모든 글과 사진이 그녀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이런 거로 나한테 영향 줄 수 있을 줄 알았어?”문예슬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벌써 떨리기 시작했다.송재이는 피식 웃었다. 계획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던 것이다.“영향? 아, 네가 오해한 모양이구나.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일상은 계속된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물론 넌 내 인생에서 아웃됐지만.”송재이의 계획에는 작은 허점이 있었다. 불필요한 오해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