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류지안과 박윤찬은 사전에 합을 맞춰 모든 멘트와 액션을 꼼꼼하게 연습해 디테일마저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보이도록 했다.박윤찬의 손을 살며시 잡은 류지안의 모습은 다정하면서 확신이 넘쳤고, 행복한 표정은 만족감이 묻어났다.이내 설영준을 돌아보며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영준 씨, 사람 일은 워낙 모르는 법이에요. 비록 과거에 작은 오해로 헤어진 적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한층 더 성숙하고 나니 역시나 서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다행히 박윤찬도 아직 싱글인지라 새로운 기회라고 여기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요.”박윤찬은 옆에 잠자코 있었다. 비록 표정은 어딘가 어색했지만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그리고 류지안을 지지한다는 듯 손을 살포시 포갰다. 그와 동시에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치 설영준에게 둘은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사이니까 거짓말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설영준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내 박윤찬과 류지안을 번갈아 훑어보며 표정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찾아내려고 했다.하지만 두 사람의 찰떡 호흡과 진솔한 모습을 보자 속으로 품었던 의심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그제야 한시름 놓게 되었고, 물론 친구로서 류지안과 박윤찬을 지지하고 믿어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설영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이게 둘의 결정이라면 존중해 줄게요.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비록 겉으로 수긍하긴 했으나 운전하고 돌아가는 길에 마음속을 가득 채운 의구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또다시 가라앉았고, 고요함은 무형의 벽처럼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에 송재이는 왠지 모르게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유는 설영준의 침묵뿐만 아니라 자신을 의심하는 그의 불신 때문이기도 했다.결국 참다못해 한마디 했고, 떨리는 목소리는 단호함이 묻어났다.“설영준, 차 세워!”송
설영준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박윤찬과 류지안의 갑작스러운 재결합이 의아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다른 속셈이 숨어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왜냐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수시로 송재이를 향하는 박윤찬의 시선을 모를 리 있겠는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눈빛은 전 여친과 다시 만난다고 해서 숨기기 힘들 것이다. 설영준의 마음은 질투로 가득 찼다. 박윤찬이 송재이를 위해 이런 희생까지 감수한다는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박윤찬이 대체 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심을 지우려는지 그 의도에 대해 당최 짐작이 안 갔다.왠지 모르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그는 자존심이 상하고 감정적으로 타격이 컸다.“재이야, 넌 몰라.”설영준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박 변호사님은 단지 널 지켜주고, 네가 내 의심받지 않게 하도록 그랬을 뿐이야.”송재이는 어리둥절했다. 생각지도 못한 설영준의 답변에 눈빛은 의혹으로 가득했다.“날 지켜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설영준은 속으로 망설였다. 송재이가 박윤찬의 집착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물론 그녀에게 질투로 똘똘 뭉친 자기 모습도 보여주기 싫었다.이내 입만 벙긋하다가 결국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아니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살짝 떨렸지만 거의 티가 안 났다.“이만 돌아가자.”송재이는 설영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미묘한 기분 변화를 눈치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어차피 하기 싫은 말을 물어봤자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결국 묵묵히 차에 다시 올라탔고,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설영준은 시동을 걸었다. 어두운 밤, 차는 송재이의 집을 향해 천천히 달렸다.가는 내내 둘을 아무 말도 안 했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끔 반짝이는 전조등만이 침묵의 귀갓길에 위로가 되어주었다.송재이를 집까지 데려다준 다음 그는 지체하지 않고 작별 인사만 건네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그리고 일주일 동안 두 사람은 거의 교류도 없다시피 보냈고, 사실상 냉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송재이를 바라보는 성수연의 눈빛은 추억에 젖어 들었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싶었다.잠시 후, 그녀는 남편과의 러브스토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당시 우리 남편을 대학교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죠.”나긋한 목소리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마치 옛날 영화처럼 소박하고 순수한 러브스토리였는데...”송재이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성수연의 말투에 담긴 애틋함과 슬픔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그리고 둘이 함께 아름다운 시간을 수도 없이 많이 보냈어요.”성수연이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사이의 감정도 점점 변해갔죠.”이내 한숨을 내쉬며 착잡한 눈빛으로 말했다.“사소한 일로 다투기 시작하다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점점 사라지더니 결국 좋게 헤어지기로 했어요.”회상에 잠긴 성수연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남편과 함께 보내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싶었다.“우리 남편은 정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성수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복잡한 개념도 알기 쉽게 설명해줄 정도로 학문적 조예가 남달랐는데 당시 지식에 대한 열망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는 남편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거로 기억해요.”송재이는 가만히 들어주었고, 성수연이 그나마 추억을 회상하며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남편은 학자일 뿐만 아니라 자상한 남편이기도 했어요.”성수연이 다시 입을 열었고, 목소리에 그리움이 묻어났다.“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시절에 남편은 타고난 지혜와 유머 감각으로 크고 작은 갈등을 해결해 주었죠. 설령 나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긴 했으나 남편과 함께 보냈던 시간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이내 멈칫하더니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그리고 남편에게 특별한 버릇이 있었는데 매번 의견 충돌이 생길 때면 다음 날 항상 꽃다발과 함께 자기 생각과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적은 쪽지를 선물로 주곤 했어요. 이는 본인의 자존심도 지키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남편만의 독특한 화해 방식이었죠.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밤바람이 송재이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성수연을 향한 동정과 박윤찬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그리고 마침 떠나려는 찰나 문 앞에서 설영준을 마주쳤다.설영준은 그녀를 만날 줄 예상하지 못한 듯 착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여기서 기다려.”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무의식중에 한 손으로 어깨를 살짝 짓눌렀다.비록 통증이 밀려왔지만 송재이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제 자리에 잠자코 서서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설영준을 지켜보았다.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만감이 교차했다.물론 설영준도 마음이 마냥 편치 않으리라 믿었고, 침묵으로 일관해도 이해는 갔다.따라서 혼자 묵념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송재이는 박윤찬의 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한밤중의 미풍이 불어와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이내 시선은 저도 모르게 설영준이 사라진 방향을 향했고 속으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설영준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무거울 것이며, 박윤찬 아버지의 비보에 비통하고 무기력할 가능성이 컸다.송재이는 저도 모르게 그를 동정했다. 지금이라도 가서 위로를 건네주고 싶었지만 설영준의 선택을 존중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30분 뒤, 설영준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이내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조용히 손을 끌어당겼다.남자의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고, 비록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분위기만큼은 살벌했다.송재이는 손아귀의 힘과 그가 내뿜는 아우라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설영준이 곧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뒤돌아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아버님의 비보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캐물었다.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송재이는 어리둥절하더니 당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지안 씨가 알려줬어.
송재이와 설영준의 대화는 결국 말다툼으로 끝났고, 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계속되는 추궁과 불신에 송재이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아무 말 없이 박윤찬의 집을 떠났다. 쓸쓸한 밤하늘 아래 설영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그리고 한 달 동안 일에 몰두한 그녀는 일부러 바쁘게 보냄으로 최대한 다른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설영준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기회는 피했고, 둘의 관계는 또다시 냉전 중인 상태로 돌아갔다.그러던 어느 날, 회사 인사팀에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진행하라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워낙 허약 체질이라 임신하기 어려웠다.괜스레 다른 직원에게 사생활까지 드러내고 싶지 않아 건강검진 하는 당일에 휴가를 내서 일부러 빠졌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날 저녁 설영준이 불쑥 찾아왔다.그녀의 집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왜 건강검진 받으러 안 갔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의혹으로 가득했다.송재이는 흠칫 놀랐다. 설영준이 이런 일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이내 속으로 만감이 교차했고, 경악하면서도 허탈했다.“단지 필요성을 못 느껴서...”송재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설영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재이야, 널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다만 네 건강이 걱정되어서 그랬을 뿐, 안 그래도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데...”“영준 씨가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거 알아.”송재이가 불쑥 끼어들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나한테 스스로 난관을 마주하고 극복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설영준은 묵묵부답했다. 착잡한 눈빛은 마치 마땅한 답변을 찾는 듯싶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최근에 나 때문에 힘들어한 걸 알아...”“사과할 필요 없어.”송재이는 또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도 이 화제에 대해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 송재이의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녀는 유은정이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따라서 그동안 설영준과 있었던 갈등과 자신의 고민에 대해 낱낱이 털어놓았다.유은정은 진지하게 듣다가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 공감해주었다.그리고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송재이의 처지에 대해 걱정을 표했다.송재이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손을 살포시 잡고 위로를 건넸다.“재이야, 네 마음 이해해. 비록 감정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지만 너랑 영준 씨라면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로 믿어.”송재이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은정은 이성적이고 강한 사람인 만큼 항상 자신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고마워, 은정아. 너라는 친구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유은정이 피식 웃었다.“우린 절친이잖아, 서로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이야. 그나저나 요즘 일은 어때? 새로운 이슈는 없어?”송재이는 미소를 지으며 유은정과 업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둘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고,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레스토랑에서 두 여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회포를 풀었고, 덕분에 잠시 고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송재이의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유은정이라는 절친이 곁에서 응원해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그리고 나중에 기분을 추스른 다음 설영준과 대화를 통해 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유은정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친구로서 당연히 서로 응원해야지 않겠어? 참, 내가 자리는 비우는 동안 문예슬이 애를 꽤 많이 먹였다고 하던데?”문예슬의 이름을 듣자 송재이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이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속으로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송재이는 문예슬만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한동안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설영준 때문에 소원해지고 심지어 서로 등을 돌리기까지 했다.“맞아. 은정아, 그거 알아? 네가 떠난 이후로 문예슬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어.”송재이의 목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박윤찬과 마음을 감추는 송재이로 인해 식탁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면서도 미묘했다.박윤찬은 그의 신사적 품격을 유지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변호사의 근엄함과 침착함을 드러냈다.그는 최대한 송재이가 불편해할 화제를 피하면서 일상의 소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와 법률 지식을 알려주었다.이는 유씨 집안으로 하여금 더없이 친근하고 유익한 느낌을 받았다.그러나 송재이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치열한 감정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송재이는 박윤찬이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관심 어린 눈빛과 조심스러운 말투를 모두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행동은 전부 박윤찬이 그녀에 대한 소리 없는 표현들이었다.하지만 송재이의 마음은 이미 설영준을 향해있었고 박윤찬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고마움과 우정일 뿐이었다.“박 변호사, 어린 나이에 이런 성과를 다 얻고 정말 대단하네.”유중건이 박윤찬을 칭찬하며 말했다.박윤찬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과찬이세요. 아저씨, 저 배워야 할 게 아직도 많아요.”송재이는 묵묵히 만두를 먹으며 속으로는 설영준을 생각했다.말이 없는 송재이를 본 유은정은 조용히 송재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송재이의 마음이 복잡하다는 걸 유은정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저녁이 끝난 후 송재이는 유은정을 도와 설거지를 하며 주방에서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재이야, 너랑 박윤찬 사이에 별일 없는 거지?”유은정이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송재이는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없어, 우린 그냥 친구일 뿐이야.”유은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럼 됐어, 난 또 너희 둘 사이가 불편해질까 봐.”송재이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은정아,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저녁이 다 되어 유은정의 집에서 나온 송재이는 기분은 조금 나아졌지만, 마음 한편에 차지한 당혹감과 불안감은 여전했다.송재이가 집으로 들어서자 설영준은 마침 통화 중이었기 때문에 송재이가 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듯했다.설영준은 피곤하면서도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영준은 송재이에게 방금 통화 내용에 대해 해명하고 싶었다.유산 문제가 물론 현실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설영준이이 송재이에 대한 사랑은 그 어떤 외적인 요인에도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진심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송재이가 방금 박윤찬을 만났고, 송재이에 대한 박윤찬의 감정을 알고 있는 설영준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그의 맘속에서는 질투심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상심이 큰 박윤찬이 지금 필요한 건 위로와 응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박윤찬을 동정하며 위로해주는 송재이가 그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될까 봐 설영준은 걱정스러웠다.이런 의심과 불안감은 설영준을 더욱더 초조하게 만들었다.송재이에 대한 진심과 박윤찬에 대한 질투로 하여 기분이 엉망이 된 설영준은 자기감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했지만, 불만과 걱정은 줄어들지가 않았다.“재이야, 너 착한 거 알아. 그래서 박윤찬을 돕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아.”설영준은 목멘 목소리로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하지만 이런 일 때문에 우리 관계가 영향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송재이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설영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영준아, 박윤찬은 그냥 친구로서 보러 간 것 뿐이야. 그게 우리 사이랑 무슨 상관인데?”설영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고고 질투와 불안감으로 더는 침착해질 수가 없었다.설영준의 말투는 날카로워지기 시작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송재이의 마음속에 비수로 꽂히기 시작했다.“재이야, 넌 참 천진난만해.”설영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담겨있었다.“정말 박윤찬이 널 그냥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아? 박윤찬이 널 보는 눈빛 하며,너한테 잘해주는 거 하며, 진짜 너는 박윤찬이 뭘 원하는지 몰라?”설영준의 가시 돋친 말에 송재이는 기분이 언짢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설영준, 너 너무 억지 아니야?. 박윤찬은 지금 힘들 때잖아.그는 지금 친구의 이해와 응원이 필요할 뿐이야.”안색이 더욱 어두워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