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설영준이 질투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쳤다. 송재이는 잔뜩 신이 난 채 말했다.“영준 씨, 지금 질투하는 거야? 젠틀하고 다정한 카를로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거든.”설영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내가 당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그 사람이랑 같이 있었어? 나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송재이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어머, 날 걱정했구나. 난 또 영준 씨가 일만 하느라 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지.”설영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재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건 죽기보다도 더 싫어. 특히 카를로스는 더 싫다고!”송재이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장난기를 거두었다.“미안해, 내가 장난이 심했어. 거리 둘 테니까 날 믿어줘.”두 사람이 대화하는 도중에 도경욱이 갑자기 전화를 빼앗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영준아, 나야. 우리 할 얘기가 남은 것 같은데.”설영준은 바짝 긴장한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아저씨, 잘 지내셨어요?”그러고는 직설적으로 도경욱에게 물었다.“재이랑 카를로스가 같이 찍은 사진을 왜 인스타그램에 올리셨는지 여쭙고 싶었어요. 아저씨가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도경욱이 침묵하자 설영준은 마른침을 삼켰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아저씨, 저는 재이가 걱정되어서 그래요. 재이가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도경욱은 날이 선 말투로 대답했다.“영준아, 내가 내 딸 하나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할 것 같아? 재이는 네 화풀이 대상이 아니야. 재이가 간만에 편하게 쉬는데 이참에 좀 내버려둬.”설영준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아저씨.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도경욱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설씨 가문 사모님께 앞으로 아기를 가지는 일로 더는 재이를 힘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전해줘. 누구도 재이의 미래와 행복에 간섭할 자격이 없어.”설영준은 도경욱이
세 날 뒤, 송재이와 도경욱은 남도로 돌아왔다. 설영준이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갔고 입꼬리에 귀에 걸려있었다. 송재이가 귀국함으로써 설영준의 마음에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송재이는 또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상사의 칭찬을 한 몸에 받으며 연출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완벽한 연출을 위해 악착같이 연습했고 가끔 연습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설영준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출장 갔고 두 사람은 자기 전에 꼭 영상 통화하자고 약속했었다. 떨어져 있으면서 애틋한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설영준이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받지 않았다. 걱정된 설영준은 연거푸 전화를 걸었고 몇 번의 시도 끝에야 송재이가 전화를 받았다.영상통화가 연결되자 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재이야,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송재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영준 씨, 나 열나는 것 같아. 팔에 힘이 안 들어가네.”설영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당신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송재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영준 씨, 나 괜찮아. 다른 분이 의사를 부르러 갔고 난 연습실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설영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아픈데 나라도 당신 곁에 있어야지.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송재이는 미소를 지으며 설영준을 말렸다.“처리할 업무도 많을 텐데 그러지 않아도 돼. 여기에 의사 선생님이랑 동료들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불안해진 설영준은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박윤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윤찬은 설영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설영준이 얼마나 불안하고 조급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송재이는 호텔 방에서 휴식을 취했고 잠깐 눈 붙인 사이에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다. 송재이가 힘겹게 전화를 받자 박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재이 씨, 저 박윤찬이에요. 영준 씨가 저한테 직접 재이 씨를 만
박윤찬은 송재이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더니 피곤했는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고요한 방에 갑자기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송재이는 고열에 시달렸고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겨우 침대에서 내려온 송재이는 휘청거리며 거실로 나가 박윤찬을 찾았다.“윤찬 씨,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요...”얼굴이 창백한 송재이는 목소리마저 떨려왔고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윤찬은 재빨리 일어나더니 다급히 물었다.“재이 씨, 괜찮아요? 같이 병원으로 가요!”송재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윤찬은 송재이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갔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했다. 병원에 도착한 뒤, 박윤찬은 송재이를 휠체어에 앉히고는 응급실로 향했고 복도의 코너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아!”부딪힌 사람은 문예슬의 비서 김소희였다. 최근 들어 실수가 잦아지고 업무 시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사퇴 위기에 놓여있었다. 마음이 급한 박윤찬은 송재이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못했기에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김소희는 어깨를 매만지며 화내려 하는데 박윤찬을 보고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저 사람 송재이잖아? 무슨 일로 여기까지...”김소희는 문예슬이 송재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걸 알기에 문예슬한테 잘 보이면 사퇴 당할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여겼고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박윤찬과 송재이가 혹여나 눈치챌까 봐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이때 박윤찬은 응급실 앞까지 도착했고 의사와 간호사가 송재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박윤찬은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김소희는 박윤찬이 세심하게 송재이를 보살피는 모습, 응급실로 들여보낸 뒤의 불안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긴박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과 표정이 박윤찬의 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김소희는 이 영상을 문예슬에게 전송했다.이런 ‘특급 정보’는 문예슬의 인정을 받을 기회였다. 한편, 문정 그룹의 회의실에서 문예슬과 문성호
응급실에서 한창 구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송재이의 상태는 점점 회복되었고 열이 내렸으며 심박수와 호흡도 안정되었다. 박윤찬은 응급실에서 나온 의사의 말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김소희는 구석에서 이 광경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 문예슬의 인정을 받기 위해 송재이를 감시했고 승진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히죽 웃다가 문예슬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한 후과에 두려워하기도 했다.한편, 문정 그룹 회의실.회의를 끝마친 뒤, 문예슬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성호한테 말했다.“오빠,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문성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문예슬은 회의실을 나서면서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이 영상을 손에 넣은 한, 중요한 시점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병원 내부는 조용했고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와 환자의 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박윤찬은 응급실 밖의 의자에 앉아서 설영준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송재이를 걱정하는 설영준한테 부담을 줄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박윤찬은 설영준이 송재이의 상황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배터리가 다 나간 상태였다. 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송재이는 응급실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설영준과 행복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고 송재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갑자기 음습하게 돌변하더니 주현아와 지민건이 송재이의 아기를 마구 괴롭히는 장면이 나타났다. 절망과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송재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거친 호흡과 함께 악몽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침대맡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송재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박윤찬이었다. 송재이는 이럴 때 친구가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겼고 더는 외롭지 않았다.박윤찬이 다급히 물었다.“재이 씨, 괜찮아요? 불편한 곳은 없어요?”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악몽을 꿨어요.”박윤찬이 잔에 물을 떠 오며 위로해
설영준은 심호흡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송재이와 박윤찬이 함께하면서 설영준을 불안하게 했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설영준은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고 남도로 돌아가는 일정을 배정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류지안 생각이 났다.한편, 박윤찬은 병원 의자에 앉아 응급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재이의 상태를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응급실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책했다.박윤찬은 송재이 곁에 설영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감정의 끈을 놓지 못했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는 설영준이었다. 설영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윤찬 씨, 재이 좀 어때요?”박윤찬이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안정을 취한 상태지만 의사 선생님이 계속 지켜봐야 한다더라고요.”설영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일 남도로 돌아갈 거예요. 재이 곁에 제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박윤찬은 설영준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설영준이 얼마나 송재이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다.“영준 씨가 올 때까지 제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전화를 끊은 뒤, 박윤찬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설영준이 돌아오면 송재이를 직접 보살펴 주지 못할 것이고 미묘한 신경전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송재이가 하루빨리 낫는 것이다.침대에 누워있던 송재이는 머리가 점점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박윤찬이 건네준 잔을 꼭 쥐고는 미소를 지었다. 박윤찬한테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박윤찬의 표정에서 송재이에 대한 감정이 드러났기에 송재이는 설영준의 여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때 류지안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잠에서 금방 깬 송재이는 류지안을 보더니 눈을 비비고는 다시 크게 떴다. 흐릿했던 초점이 확대되면서 류지안과 마주하게 된 송재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류지안 씨,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송재이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류지안은 침대맡으로 다가가 송재이를 눕히
그 시각 설영준은 비행기의 일등석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두터운 구름층은 마치 그의 가슴 위에 얹힌 무거운 돌처럼 느껴졌다.설영준은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서는 바로 얼마 전 문예슬이 보낸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영상 속에서 박윤찬이 송재이를 얼마나 신경 쓰고 걱정하는지가 너무도 뚜렷이 드러났다. 하나하나의 세세한 행동들이 설영준에게 박윤찬이 여전히 송재이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때문에 설영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고 있었다.류지안이 송재이 곁에 있어 준다면 박윤찬의 영향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송재이에게는 여성 친구의 위로가 큰 힘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영상 속 박윤찬의 시선과 다정한 행동들, 그 모든 것이 설영준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설영준은 잘 알고 있었다. 송재이는 지금 그의 강인함과 지지가 필요했다.하지만 그의 이성적이고 자제력 있는 모습으로도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질투와 불안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설영준은 다시 한번 그 영상을 재생하며 박윤찬이 송재이에 대해 가진 감정의 깊이를 찾으려 애썼다.이런 행동이 지나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다.마음속 깊은 곳에서 송재이를 믿어야 한다는 작은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신뢰를 놓지 말아야 한다고.비행기가 가볍게 흔들리자 설영준은 그제야 생각에서 벗어나 핸드폰 화면을 끄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안 돼. 냉철한 정신을 유지해야 해.’남도에 도착하면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송재이의 병세, 박윤찬의 마음, 그리고 문예슬의 의도까지 설영준이 마주해야 할 문제들은 많았다.눈을 다시 떴을 때, 그의 눈빛은 다시금 결의와 냉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도의 병원에서 송재이는 류지안과
설영준은 송재이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병실의 고요함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설영준은 화면을 확인하더니 발신자가 문예슬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속에서는 문예슬에 대한 불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하지만 그녀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문예슬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늘 숨겨진 의도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잠시 망설이던 설영준은 결국 전화를 받았다.“설 대표님이시죠? 저예요. 문예슬.”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졌다.“무슨 일입니까, 문예슬 씨?”그녀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는지라 설영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대표님과 만나야 할 일이 있어요.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문예슬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순간 설영준의 마음은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직감했으니 말이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설영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하지만 내일로 미룹시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요.”그러자 문예슬은 전혀 놀란 기색 없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내일 봅시다. 기대하고 있을게요.”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설영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문예슬과의 만남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확인하고 다가올 위협에 대비해야 했다.다음 날 설영준은 사람들에게 송재이를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한 후, 문예슬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그는 안전을 위해 사람들이 많은 공개된 장소를 선택했다.약속된 카페에 도착했을 때, 문예슬이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게 보였다. 그녀는 우아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완벽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하지만 설영준은 그녀를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았다.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문예슬은 이 상황을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었다. 그녀는 기자들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자리를 일부러 선택했고 이
설영준이 떠난 후, 문예슬은 그를 뒤쫓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눈물 자국이 사라진 대신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냉정하고 계산적인 표정이 자리 잡았다.문예슬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가볍게 닦았다. 마치 방금 벌어진 독백 연기의 여운을 즐기는 듯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카페 구석구석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었고 이내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기자를 발견했다. 그는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도 조금 전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고 기자는 거의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긍정하는 듯한 신호를 작게 보냈다.모든 것이 조용히 진행되었고 주위 사람들은 이들 사이의 교감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문예슬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좋아. 계획이 절반은 성공했어.’자리에서 일어난 문예슬은 기자 쪽으로 걸어가며 놀란 척 인사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장 기자님이시잖아? 여기서 뵙다니 우연이네요.”그러자 장 기자는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문예슬 씨, 정말 우연이네요. 사실 여기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문예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저도 친구랑 잠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잠깐 같이 앉아 얘기할까요?”장 기자는 당연히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이어갔다.대화 중 문예슬은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며 장 기자가 자신이 알리고 싶어 하는 내용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했다.장 기자도 눈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 동의했다.이 교묘하게 짜인 만남은 문예슬에게는 원하는 ‘증거'를, 장 기자에게는 훌륭한 기사 소재를 제공해주었다.그렇게 둘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한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카페를 떠났다.하지만 설영준은 문예슬의 의도를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기자를 이용해 여론을 조성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는 병원으로 돌아와 송재이를 지키며 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