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샤워를 하고 일찍 자려고 했다. 잡생각을 피하고 싶어서였다.그런데 옷을 막 벗고 속옷만 입은 채로 있었는데, 설영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왜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모르겠다.송재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옷으로 가슴을 가렸다.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도 여전히 부끄러웠다.이를 본 설영준은 잠시 멈칫하다가 돌아서 나갔다.“휴...”송재이는 한숨을 쉬었다.그녀 본인도 왜 가리는지 몰랐다. 서로의 몸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그런데 옷을 다시 벗으려던 순간 설영준이 다시 들어왔다.이번에는 바람처럼 들어와 송재이를 안고 그녀의 목에 키스하기 시작했다....두 시간 후, 설영준은 몸을 돌려 송재이를 안았다.정말이지 하마터면 다리에 쥐가 날 뻔했다.그녀는 이유 없이 화가 나서 팔꿈치로 그를 치고 베개를 던졌다.만족스러웠고 기분이 좋았던 설영준은 재빠르게 피하며 웃었고, 베개는 침대 옆 바닥에 떨어졌다.“이제는 화를 내네?” 그는 가볍게 웃었다.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화난 표정으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주웠다.“마음에 안 들어?” 그가 물었다.송재이는 그와 말하기 싫어 고개를 숙이고 바지를 입었다.“샤워하러 가려던 거 아니었어? 어차피 벗어야잖아...” 설영준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가갔다. 그러나 송재이는 그를 밀어내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얼굴 바꾸는 속도도 참 빠르네. 다 쓰고 버려? 너무하다.”“맞아, 당신은 그저 도구야!” 송재이가 화가 나서 말하자, 설영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과 마주쳤다.그는 옷을 입지 않았고 짧은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져 있었는데 방금 전 그의 거친 모습이 상상됐다.젊고 매력적인 그의 피부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성적인 매력에 송재이는 다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도구한테 얼굴을 붉히다니, 당신도 참 단순하네.” 그가 그녀를 놀리자, 송재이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쏘아보았다.“짜증 나!” 그 모습이
다음 날 저녁, 송재이는 설영준의 차를 타게 되었다.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그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고, 차 안의 공기조차도 약간 무거운 느낌이었다.“어디 가는 거야?” 그녀가 물었다.“밥 먹으러 간다니까.” 설영준의 말투는 여전히 평범했다.신호등에서 멈출 때 그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웃었다. “왜 그렇게 긴장해? 내가 널 잡아먹을까 봐? 잡아먹어도 우리가 다른 사람 잡아먹어야지.”그가 ‘우리'라고 말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말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들을 같은 편으로 생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돌렸다.차창 밖으로 차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더니 한적한 곳에 멈췄다.여기는 새로 개장한 상업 거리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인테리어였다.가게는 크지 않았지만 손님들로 북적였다.“여기서 밥 먹어?” 송재이가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설영준이 웃으며 말했다. “참고로 오늘 우리 말고도 두 명의 아는 사람이 있어.”“아는 사람? 누구?”송재이는 뭔가 단순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어제 그가 밥을 먹자고 제안할 때부터 뭔가 신비로워 보였고, 그녀는 그때부터 호기심이 생겼다.설영준은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어차피 그들과의 만남은 밥 먹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었지만, 이 식당의 요리사는 솜씨가 괜찮았다.그래서 먼저 들어가서 조금 먹고 기다리기로 했다.한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여종업원이 송재이와 설영준을 방으로 안내했다.여종업원이 메뉴를 건네자 설영준은 한 번 훑어보고 송재이에게 넘겼다. “당신이 골라봐.”송재이는 약간 놀랐다. 그동안 외식을 할 때 메뉴를 고르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항상 그가 전적으로 주도했고 그녀에게는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그가 먹는 것을 그녀도 같이 먹었는데 오늘은 많이 달랐다.송재이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골랐다.설영준은 그녀의 맞은편에서 휴대
송재이는 그녀의 선글라스 너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다소 주저하고 있다는 건 알아챘다.“왜 안 들어와?” 설영준은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을 멈추며 담담하게 말했다.서도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뒤에 있는 연지수를 한번 돌아보고 그녀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어젯밤 연지수는 완전히 망가진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이번이 서도재가 그녀에게 손을 댄 두 번째였다.서도재는 원래 여자를 때리는 습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여자들이 그의 한계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어제 오후 설영준은 서도재의 회사로 와서, 그의 앞에서 연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전화는 스피커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설영준이 연지수를 약속 장소로 부를 때, 그녀의 아첨하는 듯한 흥분된 반응은 서도재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았다.하지만 설영준이 곁에 있는 상황에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착한 척했다.설영준은 전화를 끊고 나서 서도재에게 이렇게 말했다.“지수 씨는 정말 밝아. 역시나 내 타입은 아니야. 난 우리 집사람처럼 조용한 여자가 좋거든.” 서도재는 병원에서 송재이를 이미 만났었다. 송재이는 조용하고 말이 많지 않았는데 그는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간지러웠다.하지만 설영준이 “우리 집사람”이라고 말한 건 분명한 주권 선언이었다.서도재는 마음이 불편했고, 설영준이 그의 앞에서 이 전화를 건 이유를 알 수 없었다.“형, 혹시 지수 씨가 무슨 잘못을 했어? 그래서 화난 거야?”그가 탐색하듯 물었다.“내일 서 전무가 연지수 씨랑 같이 오면 알게 될 거야.” 설영준은 이 한마디만 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서도재는 그를 문까지 배웅했고 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의 웃음이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다음 연지수를 다시 보니 그녀의 웃음이 가식적이고 허영스럽게 느껴졌다.지난번에 클럽에서 남자를 만난 일은 눈감아줄 수 있었다. 어차피 그도 바람을 피우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그녀가 설영준에게 아양을 떠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자존심이 경쟁자 앞
서도재와 연지수는 오늘 설영준이 주최한 저녁 모임에 송재이가 참석할 줄 전혀 몰랐다.송재이도 설영준이 방금 말한 ‘아는 사람'이 그들일 줄은 몰랐다.네 사람은 각자 식탁의 양쪽에 앉아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아마도 설영준만이 마음속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이 네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건 처음이었다.설영준과 서도재는 먼저 사업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서도재는 설영준이 경주에서 인맥이 넓고, 사업과 정치 양쪽에 모두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설영준은 서도재와의 대화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최근 상부에서 나온 정책이 상업에 미치는 영향을 간단히 언급했다.그의 말은 핵심을 피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서도재도 사업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설영준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설영준은 에둘러서 서도재에게 그 이익 관계를 잘 판단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때가 되자 설영준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송재이의 뒤쪽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온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였는데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보호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테이블 건너편의 연지수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충분한 서두를 마친 후 설영준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지수 씨가 내 여자 친구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린 일, 내가 모를 줄 아나 봐? 만약 재이 씨가 임신했는데 당신 때문에 유산이라도 했으면 당신은 살인범이 되는 거야!”그는 일부러 말을 심각하게 했는데 듣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연지수는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방 안에 송재이가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오늘 저녁이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그래서 그녀는 내내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려고 애썼다.하지만 설영준은 결국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식탁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송재이조차도 긴장한 나머지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그녀는 설영준과 가장 가
방금 설영준이 연지수에게 말한 “당신 남자”는 분명 지금의 서도재를 가리키고 있었다.서도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하마터면 연지수에게 휘말려 큰일 날 뻔했다고 속으로 탄식했다.이 순간 그는 이 어리석은 여자와 관계를 끊고, 설영준에게 자신은 연지수의 남자가 아니니 그녀와 조금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송재이를 보고 망설였다.그렇게 했다가는 송재이가 자신을 비겁하게 여기고,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볼 것 같아 두려웠다.어느 날 밤, 서도재와 연지수가 막 잠자리를 가진 후 연지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웃으며 말했던 적이 있었다.“오늘 설 대표님이 송재이에게 큰 장미꽃다발을 보냈대요. 정말 로맨틱해요. 당신도 언제 나한테 꽃 좀 보내줄래요? 정말 기대돼요...”서도재가 보내는 꽃을 기대한 것도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사실 그녀는 설영준이 송재이에게 꽃을 보냈다는 정보를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다.설영준 같은 남자는 굳이 중시하지 않는 여자에겐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서도재는 역시나 얼굴을 굳혔다.그는 자신이 설영준과 여자를 두고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송재이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영영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송재이에 대한 더 강한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송재이 앞에서 망신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송재이는 서도재의 이런 내면의 갈등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서도재가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으니까.그녀는 젓가락을 쥐고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설영준이 방금 연달아 두 번이나 말한 “내 여자 친구”라는 말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설영준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가 정말... 그의 여자 친구일까?이 저녁 식사에서 설영준과 송재이만이 배부르게 먹었고 서도재와 연지수는 불안해하며 식욕을 잃고 말았다....결제 후, 설영준은 송재이의 손을 잡고 빠르게 레스토랑에서 나왔
다음 날, 서도재는 유 비서에게 열쇠고리를 팔던 노점을 찾아가 똑같은 열쇠고리에 ‘재’자를 새겨 달라고 부탁했다.삼 일 만에 열쇠고리가 완성되었고, 유 비서가 그 물건을 가져다주었다.그는 그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예전의 그는 연애할 때 커플들이 하는 일들을 제법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지금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매일 그의 이름이 새겨진 열쇠고리를 사용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어쩔 수 없이 참기로 했다.그는 그녀와 똑같은 열쇠고리를 맞췄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최근 설씨 그룹은 매우 바빴다. 송재이는 다음 달 동안 세 도시를 오가며 음악회에 출연했고, 항상 최선을 다해 일에 몰두했다.두 번의 공연이 있었는데 연지수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단장님은 그녀가 집안일 때문에 급히 빠졌다고 설명했다.하지만 그때 송재이는 연지수의 얼굴에 멍이 든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송재이는 그녀가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기에 딱히 위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외지에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송재이는 민효연의 별장으로 갔다.연우는 송재이가 오늘 올 것을 알고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송재이 선생님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달려가서 허리를 꼭 껴안았다.송재이는 연우를 들어 올리고 두 번 흔들어 주었다.그녀는 본래 마른 체형이라 연우를 들어 올리는 것도 꽤 힘들었지만, 이 어리고 착한 소녀가 그녀에게 이토록 의지하니 제법 사랑스럽게 여겨졌다.송재이는 심지어 나중에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연우 같은 딸을 낳고 싶다고 생각했다.둘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통한 상태였다.민효연이 계단에서 내려오며 송재이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법원의 판결이 나왔어요. 양육권은 예상대로 도정원에게 넘어갔어요. 박윤찬 씨는 정말 좋은 변호사네요.”그녀의 목소리에는 비꼬는 듯한 어조가 있었지만, 체념한 듯한 무력감도 함께 느껴졌다.주씨 집안
송재이는 일부러 그런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었다.긴장이 풀리면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는데 이런 부드러운 목소리는 설영준의 욕망을 자극했다.그는 마음속에 오랫동안 숨겨왔던 말을 꾹 참으며 송재이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그의 입술은 그녀의 향기로운 목덜미에서 불과 1c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피부에 닿자 송재이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는데 이마저 딱딱 부딪혔다.설영준은 그녀의 얼굴을 돌리고는 아직 그녀가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입을 맞추었다.송재이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고, 침대에서 거친 그의 행동에 화가 났다.그날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여자 친구라고 말한 후로, 매일 누군가에게 화풀이하듯 행동했다.침대 밖에서는 차갑고 무뚝뚝했지만, 침대 안에서는 마치 짐승처럼 그녀를 괴롭혔다.그녀에게 끝없는 분노와 억울함을 발산하는 것처럼 말이다.“가끔은 정말 너를 어떻게 해버리고 싶어!” 송재이는 그의 말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그의 분노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무고했고 또 무지했다.설영준이 왜 그렇게 그녀를 싫어하면서도 매일 밤 함께 자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것도 몇 번씩이나!설영준은 누구를 위해 애태우는 기분을 아주 싫어했다.그러나 무의식중에 송재이가 그 사람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사랑해도 얻을 수 없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으며 결국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될 것만 같았다.사랑 때문에 밤낮으로 뒤척이는 고통이 아주 싫었다.“언젠가 네가 다른 사람과 만난다면 그땐 정말 널 어떻게 해버릴 거야.”설영준은 송재이의 귀를 물며 무섭게 말했다.이런 괴롭힘에 이미 머리가 하얘진 송재이는 그의 경고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다음 날, 유은정이 그녀와 문예슬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지금 송재이와 문예슬의 관계는 조금 묘해졌다.송재이는 남자 때문에 친구와 다투고 싶지 않아, 문예슬에게 저녁 식사에 올 것인지 메시지를 보냈다.[저녁에 올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문예
송재이는 그제야 얼굴을 돌려 머리가 새집처럼 헝클어진 남자, 아니 소년을 보았다.소년의 귀에는 다이아몬드 같은 귀걸이가 반짝였는데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송재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물었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AIDS? 미쳤어요?”주변이 시끄러웠다.송재이는 혹시나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하지만 소년은 냉소적으로 웃으며 손가락으로 건너편의 유은정을 가리켰다. “제대로 못 들었어? 그럼 저 여자한테 물어봐.”문예슬과 송재이는 동시에 유은정을 바라보았다.유은정은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고, 불안한 듯 천천히 쪼그려 앉아 몸을 꼭 끌어안았다....유은정은 송재이에게 메시지로 단지 기분이 나쁘다고만 했었고, 송재이는 그저 남자친구와 다투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술을 마시며 유은정의 감정은 서서히 진정되었다.그녀는 최근의 일을 이야기했는데 그녀의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지난달, 유은정은 약혼자 하지현에게 이별을 고했다.하지현은 결사반대했고, 유은정 본인 또한 감정에서 단호하지 못해 그의 끈질긴 애원에 반달 정도 더 끌고 말았다.그러다 우연히 하지현이 밖에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끔씩 레진 호텔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유은정은 하지현을 몰래 따라갔었다. 최악의 경우는 하지현이 바람을 피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문을 열었을 때, 상반신은 벌거벗은 채 아래엔 수건만 두른 남자가 문을 열어주는 것을 보고 심장이 철렁했다.유은정과 하지현은 7-8년 동안 연애해 왔는데, 캠퍼스 커플로 시작한 그가 이런 취향을 가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고, 방으로 돌진해 하지현과 싸우기 시작했다!이별에 대해 망설였던 그녀는 이런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결심을 굳혔다.유은정은 수치심 때문에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마음이 진정된 후에야 하지현과의 이별 소식을 알리려 했다.그러나 3일 전, 하지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