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나는 오예라의 호통에 아무 말도 못한 채, 억울해서 입술만 꽉 깨물었다.오후 촬영에서 그녀가 대사를 까먹은 것 때문에 NG를 한 번 낸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촬영당시, 오예라의 눈빛이 이상해서 흠칫 놀라서 NG를 낸 것이다.하지만 감독님은 컷을 외치지 않았고 우희나가 대사를 이어가려던 순간, 오예라가 갑자기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대꾸조차 하지 못하는 우희나를 보자 오예라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서민우를 공격했다.“그리고 당신! 기본적인 스케줄 조율도 안 되면서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거예요? 전 처음부터 이 드라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강 감독님 체면을 봐서 출연을 결심한 거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촬영 현장에 와보니 역시나 너무 실망스럽네요!”오예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니저도 얼른 말을 보탰다.“맞아요! 우리 예라 같은 대스타가 당신들과 합작하는 건 당신들의 영광이라고요! 그런데 이런 태도를 보이시면 저희도 더 이상 같이 일을 못합니다! 오늘 강 대표님이 계신 자리에서 저희도 털어놓고 얘기할게요! 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저희는 더 이상 촬영에 임하지 않겠습니다!”오예라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곁에 서서 서민우와 우희나가 사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었다. 스텝들 대부분은 모른 척 가만히 있을 것이고 그녀보다 인지도가 낮은 연기자들은 묵묵히 참고 견딜 것이다. 겁이 많고 이 바닥에서 힘이 없었던 서민우와 우희나는 어떻게든 조용하게 이 일을 처리하려고 할 것이다.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으면 사과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오늘 강유리만 대충 속이고 넘어가면 오예라는 기분이 좋아져서 이 사람들의 장단에 조금 더 맞춰줄 생각이었다.조용히 의자에 앉아 오예라와 그녀의 매니저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강유리가 고개를 돌려 서민우에게 물었다.“사실이 맞나요?”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서민우는 착잡한 눈빛으로
강유리의 대사들은 서민우가조금 전에 했던 말과 똑같았지만 단지 전달한 방식과 말투가 달랐다.서민우는 배우들에게 재촬영에 대해 부드럽게 설명했지만, 강유리는 단순 명료하게 반드시 다시 찍어야 한다고 전했으며 상대방에게 훈수까지 두었다.또한 서민우는 촬영장 분위기가 어순해지면 조금만 집중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강유리는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못 간다고 명령을 내렸다.그리고 강유리는 투자자를 언급하면서 배우의 눈치따위를 보려고 해당 배우를 캐스팅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일 중 그녀가 모르는 일은 없다는 것을 경고했다.그녀는 오예라가 했던 헛소리를 추호도 믿지 않았다.사람들은 강유리의 말에 마음이 뻥 뚫리는 듯 너무도 통쾌했다.사실 오예라는 지금까지 보여주기 식으로 강덕준과 작가가 있을 때만 열심히 하는 척했고 그들이 현장에 없으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듯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촬영에 태클을 걸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으며 얼리고 달래서 촬영하느라 바빴는데 드디어 그녀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마음속으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과는 달리 서민우는 등골에 소름이 돋아 식은땀까지 흘렸다.강유리가 들어오자마자 오예라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은 건, 서민우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만약 그가 이 일을 조용히 넘어가기 위해 사과를 했다면 강유리는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했을 것이다.아무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원치 않을 것이다.다행히 서민우는 그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대표님,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죠?”화가 잔뜩 난 오예라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고 강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뭐 하자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오예라도 강유리의 뜻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창피를 줄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처지가 너무 난처했다.눈치를 살피던 매니저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말을 꺼냈
다음 촬영을 준비하겠다는 서민우의 말에 스텝들은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혹시라도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전전긍긍했다.한편, 긴장되긴 했지만 기분이 약간 좋아진 우희나는 메이크업을 고치기 위해 대기실로 갔다. 그녀는 강유리가 오예라의 헛소리를 믿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다만 자신의 연기를 보고 강유리가 실망이라도 할까 봐 약간 긴장됐다.회사에서 우희나에게 레슨 선생님도 여러 명 붙여주고 그녀에게 공도 많이 들였기에 그녀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는 없었다.“우희나 씨, 이리 오세요.”덤덤한 강유리의 목소리에 멈칫하던 우희나가 덜덜 떨면서 조심스럽게 강유리에게 다가갔다.“강 대표님…”“겁먹은 어린애처럼 뭐 하는 거예요?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강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우희나를 쳐다보았고 깜짝 놀란 우희나가 연신 손을 저었다.“아닙니다!”“회사로 돌아가면 여한영 본부장님한테 액션 선생님 한 명 붙여달라고 하세요.”강유리는 우희나 얼굴에 선명하게 새겨진 손바닥 자국을 바라보며 눈살을 더욱 깊이 찌푸렸다.“네? 다음 드라마에서 제 역할이 그런 쪽인가요?”우희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그들의 대화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 귀에 똑똑히 들렸다.특히 곁에 멍하니 서있던 오예라와 매니저는 그 대화에 질투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만약 오예라가 유강 엔터를 떠나지 않았다면, 원태영이라는 썩은 동아줄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 이 모든 건 전부 자기가 누렸을 거라고 오예리는 착각했다.“아니요. 우희나 씨가 싸움도 못하고 너무 바보 같이 굴어서 그래요.”강유리는 진지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고 그 말에 우희나는 더욱 어안이 벙벙했다.우희나보다 먼저 강유리의 말을 알아들은 건 오예라였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가 강유리에게 따지려고 달려들자 매니저가 그녀를 꽉 잡은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흥분하지 마. 이 드라마 인기가 지금 어마어마해. 우린
오예라가 5섯번째 따귀 씬을 찍을 현장의 분위기는 이미 살얼음판이었다. 그녀는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서민우는 컷 소리와 함께 몰래 강유리의 눈치를 살폈다.촬영 전, 강유리가 막무가내인 사람에게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야 한다고 그에게 조언했다. 그녀의 사람일 수록 당하지만 말고 상대에 맞서 싸우리거 했다.그는 긴가민가해사 우희나를 걸고 넘어지며 생트집을 잡았보았다. 강유리는 정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녀가 한 말이 어떤 것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하여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그의 긴장한 시선을 받은 강유리가 한숨을 내 쉬었다. 자신이 하는 수 없이 총대를 메야 겠다고 생각한 강유가 입을 열었다.“여전히 별로네요. 처음 씬으로 하죠.”‘괘씸한 것, 그녀는 분명 고의적이다!’오예라는 퉁퉁 부은 자신의 뺨을 보다가 강유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하지만 강유리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멀지 않은 곳에 멍하니 서있는 비서 우희나의 매니저를 보며 입을 열었다.“얼음주머니를 갖다 드리지 않고 뭐 해!”오예라는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강유리의 행동에 냉소를 지었다.그렇게 행동한한들 그녀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희나 씨 손에 문제라도 생기면 내일 촬영은 어떡해?”“...”‘우희나의 손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강유리 이 몹쓸 년, 분명히 그녀를 골탕먹였으면서 사과 한마디 없다니?젠장.’강유리는 아무리 유명하다고 한들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누구도 그녀의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걸 행동으로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강유리는 몸을 일으켜 1층 화장실로 향했다.그녀는 속이 불편했다. 아마도 어젯밤에 마신 술때문에 숙취가 남아 오늘 제대로 된 한끼도 못 먹어서 인 것 같다. 그래서 장이 탈이 났나 보다.급했던 그녀는 먼 곳의 동태까지 살 필 여유가 없었다.거기에는 한참 전부터 그녀를 지켜보는 두 실루엣이 있었다.육시준은 두번째 씬을 찍을 때부터 이미 현장에
강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머리속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갔다.‘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 알았을까?사람이라도 심었나?’수많은 우려 중에서도 그가 그녀를 조롱하고 있지 않는지가 제일 중요했다.잠깐의 고민끝에 그녀는 3개의 물음표만 조심스럽게 보내보았다.[???]이내 간단명료한 몇마디로 답장이 왔다.[촬영지에 있다고 해서 널 데리러 온 거야.]강유리는 생각에 잠겼다.‘이건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통화하려다 이내 다시 종료버튼을 눌렀다.‘어떤 말투로 말해야 할까?너무 부탁하는 말투면 비굴하지 않을까?’한참 망설이다가 대화창에 타자를 했다.[뭐 좀 사다줘...]지우고.당당하게.[뭐 좀 사와.]콧대 높은 이 남자가 여자의 생리현상에 대한 것들을 알 리 없었다. 강유리가 어플을 클릭해 자신이 사용하는 브랜드를 캡쳐해서 보내려는데 문자가 또 다시 울렸다.[샀어. 그런데 내가 들고 들어가야 한다고?]문자를 보내고 있는 육시준도 망설이고 있었다.그의 문자를 계속 기다린 것인지, 그가 선물을 들고 사과하기를 기다린 것인지 몰라 망설였다.특별한 날을 맞은 선물이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보다 낭만적인 분위기속에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적어도 깨끗한 곳에서 선물해야 하지 않을까?진심이라고?이런 더러운 화장실에서?’한편, 문자를 확인한 강유리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나쁜 자식, 사람을 붙인 게 확실하네!이 자식 변태 아니야?어떻게정확하게 알 수 있어?소름이야!’강유리는 휴대폰을 보며 씩씩거렸다.[그래! 직접 들고 들어와!]‘이렇게 된 이상 될대로 되라고 하지 뭐.’그가 이 일로 그녀를 비웃기라도 한다면 그녀도 화장실에 들어온 그를 똑같이 비웃을 것이다.답장을 받은 육시준이 입술을 깨물었다.난감해하는 그의 표정을 본 임강준이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에요?”육시준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런 건 아닌데 요구가 점점 과해
“이 상태로 주라는 거야?”밖에서 또 소리가 들렸다. 짜증스런 그의 말투에 불만이 묻어 있었다.다행이 강유리가 눈치 채지못했다. 그녀는 그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아니면 어디까지 해주려고 그래?”아마도 이 난처한 상황이 옥신각신한 말투로 무마된 듯했다. 강유리는 문을 빼꼼 열고 그 좁은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빨리 줘!”문이 열리자 육시준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잘 배운 덕에 곁눈질 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육시준은 한참을 망설이며 겨우 뻣뻣하게 손을 뻗어 물건을 건네줬다.작은 상자 하나.물건을 건네 받은 강유리는 즉시 문을 닫고 안으로 잠갔다.손에 들려있는 곱게 포장된 상자에 그녀의 눈썹이 희한한 곡선을 그렸다. ‘이게 뭐야?새로 출시한 삽입형인가?’상자가 열리고 눈앞에 반짝이는 다이아가 나타났다. 어둡고 쾨쾨한 작은 공간이 삽시에 환해졌다......하지만 강유리의 화는 머리끝까지 치미르고 말았다.“육시준! 장난쳐?”“탁!”다이아를 담았던 상자가 밖으로 던져졌다.상자는 데구르르 굴러가다 열렸다. 유일무이한 그 다이아는 그렇게 버려졌다. 육시준은 마치 그의 진심이 버려져 바닥에 뒹굴고 여기없이 밟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화를 애써 참았다.“강유리!”강유리는 저린 다리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하마터면 중심을 놓칠 뻔했다.또 한켠에서는 세차게 쏟아내고 있었다.자신이 행동이 과했다는 것을 직감한 강유리는 그제야 그 비싸 보이는 다이아를 던진 걸 후회했다.더군다나 밖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던 남편이 아니라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하지만 건물을 통틀어 그밖에 알지 못하기에 그의 심기를 건드려 그가 떠난다면 그녀는 끝이었다.강유리의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워졌다.“난, 그게 아니라, 다른 게 필요해.”“...”긴 침묵이 흘렀다.육시준은 아직 흥분해선 안 된다고, 그녀에게 잘못한 걸 생각하며 화를 억눌렀다.
앞뒤 퍼즐을 맞춘 그는 깨달았다. 강유리가 왜 그렇게 화를 낸 것인지, 왜 장난치냐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그가 오해한 것 같다.머리가 윙윙 울렸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임강준을 보았다.‘내 와이프의 비밀을 다른 남자가 알게 되었다.’육시준의 살벌한 눈빛에 임강준의 등골이 오싹했다.“사, 사장님, 학교 대문앞에 편의점이 열었는지 제가 가볼까요?”“필요없어.”육시준이 차갑게 덧붙였다.“넌 여기를 지켜.”임강준은 걱정어린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대표님이 사실 줄 알까?’워낙 종류도 많아서 아주 복잡해 보였다.‘낮용...밤용...슈퍼롱...’육시준도 뭐가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가벼운 손짓으로 진열해 놓은 것들을 모조리 쓸어 담는 것으로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강유리는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신주리에게 끝내 답장왔다.무심한 네글자가 왔다.[살아있니?]강유리가 그녀에게 답장했다.[매우 급함, 구출 요망.]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답장하려는데 그녀가 문자 테러를 시작했다.[와! 너의 남편이 재벌이라고 안영이 그러던데 진짜야? 오늘이 만우절은 아니지?][어젯밤에 어린 오빠들과 신나게 논 걸 들켰다며? 하하하하 안영이랑 어울리더니 쌤통이야, 그러게 행동거지를 잘했어야지!][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가정은 무사하고?][그러고 보니 내가 너의 남편을 못 봤네? 어떻게 생겼어? 듣기론 못생겨서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근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데 재벌이라면서 왜 너랑 결혼하려는 거야?]그녀의 궁금증과 못 믿겠다는 표정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강유리는 말없이 휴대폰을 도로 넣었다.대꾸하고 싶지 않았다.‘중요한 순간에는 의지가 되지 않는다......’그러다 다시 생각했다. ‘육시준도 믿지 말아야 하나?다시 올까?왜 아직도 안 오지?’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다시 꺼내 또 다른 사람에게 그녀의 화장실에 갇긴 상황을 알리려는 그때, 문밖에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문을 두
그의 행동으로 아무 감각 없었던 그녀의 다리가 조금씩 찌릿찌릿하기 시작했다.“아!”그녀가 신음소리를 반복했다.끝음을 길게 끌다가 억누르는 것이 너무 야릇하게 들려서 못된 상상을 하게 했다.육시준이 그녀를 흘겼다.강유리도 자신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이상한 소리에 흠칫 놀랐다. 발그스레해진 볼을 하고는 결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조심 좀 해. 다리가 불편...”남자는 그저 피식 웃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화장실 입구를 두줄로 늘어서서 지키던 보디가드들은 이미 돌아갔다. 생존욕구가 강한 임강준도 어디로 갔는 지 보이지 않았다.어둠이 드리우고 학교 정원에 가로등이 켜졌다.불빛이 나무잎 사이로 길을 비췄다. 두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조용하니 꽤 낭막적이었다.하지만 이건 연기일 뿐이다. 강유리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다행인지 불행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다행은 육시준이외에 누구도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고, 불행은 육시준이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본 것이다.‘어떻게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할 것인가?’그가 하루 아침에 재벌이 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자격을 잃었던 것 같았다.그녀는 체념한 듯 그의 품에 안겨 찍소리도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위상을 촘촘히 느끼고 있었다.차에 오른 후에도 침묵은 계속 되었다.그러다 어느순간, 강유리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고개를 돌려 입을 열려는데 뒤쪽의 검은 물체에 시선을 뺏꼈다.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짜증스럽게 물었다.“뒤쪽에 저건 뭐야?”육시준은 앞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네가 원했거.”그녀는 손을 뻗어 검은색 주머니를 헤쳐보았다.그녀의 눈꼬리에 격련이 이렀다.‘재벌이면 이렇게 제멋대로야?롤스로이스를 생리대로 채운다고?’“이렇게 많이 사면 어떡해?”중얼거리는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육시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대꾸했다.“좋아하잖아?”‘어느 누가 생리대를 좋아하는가?잠깐.’그녀는 조금전 상황을 골똘히 회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