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우가 왜 그녀를 계속 옆에 두고 있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해서 여느 여자들처럼 쉽게 접근하지 못할걸 알아서일까?나태웅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고은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밖에 놔두고 온 게 있어서 찾으러 가야 해요. 저는 직원용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갈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도망칠 준비를 했다.“같이 타고 가라고 했으면 그냥 타고 가!”배준우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직속 상사의 명령인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고은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다. 고은영은 벽면에 바짝 붙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배준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따가 재무부에 가서 재무제표 가지고 내 사무실로 와.”“네, 대표님.”고은영은 자세를 바로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재무부서가 있는 층에 도착하자 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배준우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나태웅은 옆에서 풀풀 풍기는 냉기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도대체 또 왜 기분이 안 좋아지신 거지? 고 비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는군.’한편, 복도로 나온 고은영은 연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역시 사람은 죄를 짓고 못 살아.’그녀는 다음에는 절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재무부서로 가서 재무제표를 챙긴 뒤, 고은영은 기분을 추스르고 배준우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때 언제 다가온 건지, 나태웅이 그녀를 따로 불렀다.“고 비서,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내 사무실로 와.”“하지만 대표님께서….”“대표님께서는 회의 들어가셨어.”나태웅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고은영은 배준우 사무실 방향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태웅을 따라갔다.사무실로 들어간 나태웅이 말했다.“문 닫고 들어와.”“네.”고은영은 조용히 문을 닫은 뒤, 나태웅의 책상 앞에 가서 섰다.“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나태웅은
지금으로서는 그 직원이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태웅은 뭘 알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고은영은 그가 무슨 생각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나태웅은 담배 재를 털며 다시 물었다.“대표님이 방에서 발견했다면서 팬던트 하나 주지 않았어? 그거 지금 어디 있어?”팬던트?그건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녀에게 물려주신 유품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고은영은 항상 그걸 목에 걸고 다녔다.그 일이 있은 뒤로는 서랍에 깊이 보관하고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고은영은 손에 땀을 쥐고 대답했다.“예전 투숙객이 두고 간 거라고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어디 버렸는데 구체적으로 어디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그녀는 안내데스크에 맡겼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배준우가 지금도 그 여자를 찾고 있는데 호텔에 맡겼다고 하면 바로 그쪽으로 연락할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나태웅의 말은 가히 청천벽력이었다.“그럼 수고스럽지만 잘 찾아봐. 그거 진짜 중요한 물건이야!”고은영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착각인지는 모르나, 나태웅은 지금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날카로웠다.배준우에 준하는 압박감에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무슨 정신으로 그의 사무실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자신을 심문하듯이 빤히 바라보던 나태웅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나태웅의 태도로 보아 배준우는 그날 밤 그 여자를 무조건 색출해 내려고 하고 있었다.어떡하지?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지영아, 우리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안지영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우리가 아니라 너야. 나까지 엮지 마.]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안지영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잠시 후, 안지영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명심해. 그날 밤 그 일과 너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이것만 기억하면 돼.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다.그런데 상황은 점점 꼬이고 있었다.고은영은 선뜻 수락하기도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배준우는 그녀가 말이 없자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하기 싫어?”당연히 하기 싫죠….하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배준우는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고 비서, 지금 실력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많이 봐준 거 알지? 비서실장으로 진급하려면 아직 멀었어.”고은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 실장 따라다니면서 배우라고 한 것이 날 밀어주기 위해서라고?수행비서가 되면 연봉은 네 배로 뛸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숨막히는 대출을 생각하면 이건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나 실장님이 잘 하고 계시잖아요.”“나 실장은 연말에 퇴사할 거야. 가업을 이어받는대!”고은영은 나 실장이 진짜 재벌2세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눈썰미가 이렇게나 좋았었나?그러고 보면 주변 사람들은 다 이어받을 가업이 있는데 자신만 없다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그녀는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그녀가 말했다.하지만 조사에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곧 후회가 되었다.배 대표를 덮친 범인이 자신인데 자신을 추적하는 조사에 협조해야 한다니!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기에 물릴 수도 없었다.배준우는 갑자기 바뀐 그녀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흔쾌히 동의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이제 나가 봐.”“네, 대표님!”고은영은 공손히 인사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향했다.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그녀의 태도에 배준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뒷모습을 노려보았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점심시간.고은영은 배준우를 위해 음식을 주문한 뒤, 안지영과 함께 회사를 나섰다.평소에는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하지만 오늘은 급한 일이 있었기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직!”그녀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 목걸이를 하지 않았지만 여름이라 그걸 본 직원이 적지 않을 것이다.나태웅이 회사 직원들에게까지 탐문조사를 할까 봐 걱정이었다.“그거 주면 안 되지!”“하지만 나 실장님 태도가 아주 강경했어. 안 가져가면 분명 날 의심할 거야.”고은영의 말에 안지영은 미칠 것 같았다.사실 자신의 말이 억지라는 건 알 고 있었다.나 실장은 자타공인 회사의 2인자였다.배준우가 조사를 하라고 지시한 일은 전부 나 실장이 도맡아서 했고 한 번도 배준우를 실망시킨 적 없었다.하지만 그걸 넘기면….“아, 정말 답 없네!”안지영은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고은영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의 기억에서 그날 밤을 지우고 싶었다.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안지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걸 넘겨야겠지?”“지금 상황에 아무래도 넘길 수밖에 없어!”만약 그걸 안 넘긴다면 나 실장은 결국 고은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은영 위주로 조사를 시작한다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게다가 고은영은 그와 같이 이 임무에 합류하게 되었다.안지영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친구가 사실대로 자백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고은영은 고통스럽게 머리카락을 쥐여뜯었다.“내가 그거 하고 다니는 거 본 동료들이 수두룩할 텐데.”회사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그녀라는 게 들통날 것이다.안지영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은영에게 말했다.“그럼 네가 말해봐. 이제 어떻게 할 거야?”고은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울지 마. 지금 너 달래줄 기분 아니야.”“하지만 정말 무섭다고!”“그래, 알아.”겁 많은 고은영이야 무서운 건 당연하고 안지영도 이제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주문한 메뉴가 나왔지만 두 사람 다 입맛이 없었다.안지영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대표님이 사실은 너라는
수화기 너머로 배준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으로 가서 서류 좀 가져다 줘. 그리고 옷장에 있는 자주색 넥타이도 좀 부탁해.”“네, 알겠습니다.”고은영은 공손히 대답한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자 그녀는 안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차키 좀 빌려줘. 대표님 집으로 좀 가봐야 해!”“대표님도 참, 평소에 집으로 심부름도 자주 보내면서 업무용 차 한대도 안 뽑아 주다니!”안지영은 불평하면서도 순순히 차키를 꺼내 고은영에게 건넸다.차키를 건네 받은 고은영은 담담히 대답했다.“서류만 가지고 나올 거야. 차비 받으면 나중에 너 다 줄게!”“요즘 기름값 엄청 비싸다고! 그깟 차비 얼마나 준다고!”안지영이 투덜거렸다.그녀는 예전부터 회사의 복지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배준우는 짠돌이 중의 짠돌이었다.고은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내 사비로 기름 한번 넣어줄게.”“매달 대출로 400만원이나 갚는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그러니까 좀 도와줘.”“불만도 얘기하면 안 돼?”안지영이 뾰로통하게 말했다.고은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어려서부터 곱게 자란 이 재벌 아가씨는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배준우가 짠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사실은 그냥 회사에 불만이 많은 거였다.엘리베이터를 나선 고은영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녀는 배준우의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블랙톤 위주의 인테리어는 적절한 소품들로 잘 조화를 이루어 너무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고은영은 일단 서재로 가서 서류를 챙긴 뒤, 익숙하게 옷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그런데 장롱 문을 열자마자 툭 하고 무언가 떨어져 나왔다.고은영은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하지만 물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포장지도 안 뜯은 콘돔이었다!줄곧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그녀는 얼른 그것을 도로 장롱에 넣었다.평소에 금욕적으로 보이는 배 대표가
나태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영은 그와 함께 조사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그녀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나태웅이 귀찮은 듯이 말했다.“이제 일하자!”“네, 나 실장님!”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나태웅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배준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온 고은영은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휴게실에서 봤던 장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이러다가 정말 크게 사고 한번 칠 것 같아!’무슨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지 나태웅은 한 시간 뒤에야 배준우의 사무실에서 나왔다.그가 나오자 마자 고은영의 업무용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표 사무실 쪽을 바라보다가 남자의 냉랭한 눈빛과 마주쳤다.고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네.”“들어와!”남자는 간단하게 지시를 내린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은영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다음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연 순간, 벌써 풍겨져 나오는 숨막히는 압박감에 그녀의 긴장감도 최고조에 달했다.“대표님, 다음 회의에 필요한 자료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공손히 서류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그 무심한 동작에 고은영의 긴장감은 다시 고조되었다.배준우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점점 더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꼈다.한참이 지난 뒤, 그녀의 등이 축축하게 젖었을 때, 배준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까 뭘 봤지?”“아니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고은영은 다급히 말했다.상사 앞에서 당신의 나체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그런데 그의 눈빛에서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 착각일까?고은영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재차 말했다.“정말 아무것도 못봤어요.”“그래?”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차가
하지만 날카로운 나태웅의 눈빛을 마주하자 도망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고 비서, 괜찮아?”그녀가 멍하니 있자 나태웅의 말투가 차가워졌다.“아… 괜찮습니다.”그녀가 다가가자 나태웅은 노트북 화면을 그녀에게 돌렸다. 화면에서 그녀가 배준우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날짜가 맞았다.고은영은 머리 속이 완전히 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런데 몇 초 정도 지나자 화면에 지저분한 점들이 생기더니 꺼져 버렸다.안지영이 삭제한 부분일 것이다.고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태웅에게 말했다.“이 영상 맞아요. 안지영 씨랑 아침까지 지켜봤는데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었습니다.”그녀가 그 방에 밤새도록 있었기에 그날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영상이 손상되었으니 고은영과 안지영, 그리고 매수한 보안센터 직원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고은영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태웅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이 영상 복구해 주세요!”고은영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와 나태웅을 번갈아 보았다.“이분은….”“강성 IT센터 팀장, 진재한 씨야!”진재한!그 이름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컴퓨터 기술자가 바로 진재한이었다.배준우는 그를 본사로 데려오고 싶어했지만 진재한은 줄곧 제안을 거절해 왔다.나태웅이 그 여자를 찾으려고 진재한까지 동원할 줄이야!진재한은 노트북을 건네 받고 자신감 있게 휘파람을 불고는 말했다.“이런 건 일도 아니죠! 맡겨만 주세요!”고은영은 등 뒤가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그녀는 어렵게 정신을 차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제가 따로 할 일은 있나요?”고은영의 질문에 나태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고 비서는 일단 나가서 일해!”“네.”그녀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고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밖으로
고은영은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눈알이 새빨개진 상태로 비상계단에서 나갔다.비서실 직원 민초희가 그녀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비서님, 울었어요?”“아… 아니에요! 괜찮아요!”고은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민초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많이 힘들면 장기 휴가 신청하고 쉬는 것도 방법이에요!”동영그룹 직원이라면 배준우 밑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물론 급여는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많았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위치였다. 고은영은 감격한 표정으로 민초희를 바라보며 말했다.“감사해요. 안 그래도 지금 휴가 신청하러 가는 길이었어요.”더 이상 회사에 있다가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민초희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고은영도 자리로 돌아가서 휴가 신청서를 작성한 뒤, 나태웅의 사무실로 갔다.영상이 어디까지 복구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휴가를 내려면 나태웅의 동의가 필요했다.그 뒤에 배준우에게 보고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은영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나태웅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상 파손 정도가 심각하네요.”“복구가 불가능해요?”나태웅이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고은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다.진재한도 복구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렇다면….고은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순간, 진재한이 말했다.“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3일 정도면 될 것 같네요.”“진 팀장에게 3일이나 쓰게 하다니. 장난을 친 자가 실력이 좀 되나 보네요!”나태웅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고은영은 다시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지금 당장은 복구하지 못했지만 3일 뒤에 만약 그가 성공적으로 복구해 낸다면?진재한도 정색하며 말했다.“네 실력이 상당한 자입니다.”“알았어요. 3일 드리죠.”다시 자리로 돌아간 고은영은 휴대폰으로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복귀할 필요 없어.
량천옥은 고은지의 말을 듣고 마음이 더욱 아팠다. 깊게 심호흡한 량천옥이 말을 이었다.“여기서 살지 말고 다른 곳에서 사는 게 어때? 내 집에서 살아.”고은지가 여기서 사는 것을 보니 량천옥은 가슴이 아팠다.고은지가 차갑게 량천옥을 쳐다보았다.“내가 이렇게 빌게. 응?”량천옥은 본인의 딸이 이런 곳에 사는 게 마음이 아팠다. 이곳은 낡고 습했다.“이만 가세요.”“은지야!”“전에 은영이랑 살던 곳이에요. 당신이 더럽다고 여기는 곳이, 우리의 집이었다고요.”조영수와 이혼한 후, 고은지와 고은영은 이곳에서 살았다.량천옥은 고은지와 고은영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듣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고은지가 불쌍했을 뿐만이 아니라 고희주도 불쌍했다.하지만 고은지의 말을 듣고 나니 이사를 시키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래도 고은지 혼자서 이곳에서 사는 건...“내가 희주를 되찾아줄게. 나태현을 떠나, 응?”량천옥이 얘기했다.그녀는 고은지와 나태현이 더 엮이지 않았으면 했다.량일과는 달랐다. 아이를 잃어본 량천옥은 고은지가 본인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명문가 따위는 관심도 없다.“이제 잘 거예요.”량천옥의 질문에 고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량천옥이 무슨 말을 해도 고은지의 대답은 차가울 뿐이다.마치 사람은 눈앞에 있어도 마음의 거리는 한참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량천옥은 고은지의 차가운 거절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결국 마음 아파하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낡고 허름한 아파트를 보면서 량천옥은 마음이 아팠다.별장에 돌아오니 시간은 12시였다.량일은 아직 잠에 들지 않았다.량천옥이 돌아온 것을 본 량일이 다가가서 물었다.“또 은지를 보러 간 거야? 곧 추석인데 은지도 돌아오라고 해.”“은지를 버릴 때는 곧 새해였죠? 설이라도 같이 쇠게 하지 왜...”“...”량일의 말을 들은 량천옥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이윽고 두 눈에서 죄책감이 눈물을 타고 흘러내렸다.량천옥은 량일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 시간 후.샤워를 마친 고은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고은지는 머리를 닦으면서 문을 열려고 나갔다. 하지만 문을 열기 전에 경계심을 세우고 물었다.“누구세요?”이곳은 낡은 동네라서 치안이 좋지 않았다.문밖에서 량천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지야, 나야.”’량천옥의 목소리를 들은 고은지는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리고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량천옥은 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서 있었다. 그녀의 차림새는 이 허름한 복도와 어울리지 않았다.량천옥은 고은지 손에 있는 붕대가 피로 물든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아까 지신혜 앞에서는 고고하고 강한 여자였지만 결국 고은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기만 한다.“들어가도 될까?”량천옥이 겨우 입을 열었다.고은지는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시간이 늦었어요. 저는 쉬러 갈 겁니다.”“10분만 내어줘. 응?”량천옥이 10분을 위해 이렇게 빌 줄 누가 알았을까.고은지가 미간을 찌푸리고 량천옥을 바라보았다.“그... 미안해.”말하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입을 열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목도 아팠다.고은지는 결국 비켜섰다. 량천옥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량천옥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낡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하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방이 허전해 보였다.고은지가 이런 곳에서 산다니 량천옥은 마음이 아팠다.“왜 여기서 사는 거야. 전에는 그린빌에서 살았잖아.”량천옥은 그린빌에 투자도 했었다. 집이 큰 것은 아니나 새집이라서 전체적인 환경이 더욱 좋았다.게다가 아까 올라올 때 1층 복도에서 쥐도 발견했다.“그건 은영이 집이에요.”“은영이가 널 쫓아낸 거야?”“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악독한 줄 알아요?”고은지가 목소리를 높였다.량천옥은 호흡이 무거워졌다. 마음도 같이 무거워졌다.“미안해, 난...”“모든 사람이 당신 같은 건 아니에요.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의 것도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다고요.”량천옥이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지가 차갑
나씨 가문 사모님?나태현이 나중에 고은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해도 량천옥이 반대할 것이다.아마 고은지도 반대할 거다.량천옥은 고은지가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량천옥의 말에 지신혜는 표정이 굳어버렸다.“그러면 나태현 곁에서 떨어지라고 해요!”“은지가 원해서 나태현 곁에 있는 줄 알아? 다 아이 때문이야. 네가 고희주가 어디 있는지 알아주면 우리는 당장 나태현 곁을 떠날 거야.”모든 것은 고희주 때문이다.그건 량천옥이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다.본인의 손녀가 나태현의 딸이라니. 이건 운명의 장난임이 틀림없다.그 아이 때문에 고은지와 나태현 사이의 원한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어떻든 량천옥은 고은지가 본인과 같은 고생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아이의 행방...지신혜는 나태현이 아이를 해외로 빼돌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디로 빼돌렸는지는 몰랐다.지신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량천옥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물론 나태현이 계속해서 아이를 내놓지 않는다면 너는 그 아이의 계모가 되겠지.”량천옥이 계모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얘기했다.그러자 지신혜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졌다.지신혜는 피도 섞이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량천옥은 그런 지신혜의 표정에 만족한 듯 웃었다.“기억해. 다시는 고은지를 건들지 마.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네 엄마도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말을 마친 량천옥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지신혜는 량천옥의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졌다.량천옥은 그야말로 미친년이었다.오늘 고은지를 밟은 것으로 지신혜의 다리를 박살 내지 않았는가.일주일만 지나면 약혼식인데...지신혜는 미칠 것만 같았다.집안에 다쳤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지신혜의 어머니만 혼나게 될 것이다.‘어떻게 해야지...’...량천옥은 병원에서 나와 하늘을 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신혜의 다리를 박살 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은지의 상처가 얼마나 엄중한지 알고 싶었다.그 순간 핸드폰
나태현이 의사를 따라 나갔다. 그러자 지신혜가 바로 간호사들을 향해 화를 냈다.“이 쓸데없는 것들! 한 달이나 걸린다고? 나 일주일 뒤면 약혼인 거 몰라?”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도 다 준비되었는데, 한 달이나 기다리라고 하다니.지신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량천옥을 향한 증오가 극에 다다랐다.긴호사는 갑자기 화를 내는 지신혜를 보고 깜짝 놀라서 주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그런 간호사를 보면서 지신혜는 더욱 화가 났다.“당장 전문가를 불러와! 일주일 내에 낫게 만들란 말이야!”“네 다리는 골절이야. 일주일 만에 어떻게 나아?”량천옥이 병실에 나타나서 비웃는 표정으로 지신혜를 쳐다보았다.지신혜는 그런 량천옥을 보고 더욱 화가 났다.량천옥이 들어와서 간호사에게 얘기했다.“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먼저 나가 계세요. 진정하게요.”“네.”간호사는 량천옥의 말에 구원이라도 받은 듯 도망쳤다.지신혜는 량천옥의 표정을 보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하지만 지신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일부러 그런 거지.”지신혜가 이를 꽉 깨물고 물었다.량천옥은 담담하게 듣다가 차갑게 대답했다.“네가 지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나태현이랑 약혼한다고 이렇게 나대는 것 같은데...”“...”량천옥이 사실을 얘기하자 지신혜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지신혜는 사생아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왔다.지신혜가 쓰고 먹는 것은 다 사생아들보다 못한 것이었다.량천옥이 지신혜 앞에 와서 귓가에 속삭였다.“누가 너한테 은지를 괴롭혀도 된다고 했지? 천박한 년 같으니라고. 이번에는 경고로 끝나지만 다음에는 아니야.”“당신...”“기억해. 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야. 나태현과 약혼한다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은지를 괴롭히려면 먼저 량천옥, 나부터 밟고 넘어가야 할 거야.”“...”량천옥의 말은 차갑고도 딱딱했다.그 순간 지신혜는 량천옥이 소문과 똑같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러니까 오늘 본 그 여자가
“그 말은...”“혼자 있고 싶어.”정록담은 그렇게 말하는 량천옥이 걱정되었다.“돌아가.”량천옥이 강조하면서 얘기했다.정록담은 뭐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량천옥의 결연한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정록담이 가자 량천옥은 바로 운전대를 잡았다.그리고 먼저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나태현이 그 여자를 데리고 어디로 간 건지 알아봐.”“네.”전화를 끊은 량천옥의 머릿속에는 고은지의 상처뿐이었다.그 장면이 마치 비수처럼 량천옥의 심장에 박혀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서홍 클럽으로 갔습니다.”“그래, 그리고 고은지가 어디 사는지도 알아봐 줘.”고은지는 고은영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량천옥은 고은지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전화를 끊은 량천옥의 머릿속에는 연약한 척하는 지신혜의 모습으로 가득했다.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뻗쳐올랐다....저녁 열 시.두 사람은 서홍 클럽에서 세 시간가량 있다가 나왔다. 천략 그룹 앞에서 지신혜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하지만 지금은 아주 밝게 웃고 있었다. 그건 나태현 덕분일 것이다.그 모습을 보면서 량천옥은 화가 끓어올랐다.나태현이 지신혜를 위해 차 문을 연 순간, 량천옥이 두 사람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피할 시간도 없었다.차량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지신혜는 이미 차에 발을 걸친 상태였다.량천옥의 차가 달려오는 순간, 나태현은 본능적으로 지신혜를 끌어내렸다.하지만 량천옥의 속도가 더 빨랐다.지신혜는 그 충격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발목은 아까의 충돌로 완전히 골절되었다.량천옥은 떠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보더니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머? 다쳤어? 정말 미안해. 나도 실수로 그런 거야. 미안해.”나태현은 량천옥을 보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량천옥!”“얼른 경찰에 신고해. 구급차도 불러야지. 내 책임이니까 피해보상은 완벽하게 해줄게.”“당신 이거 살인 미수예요!”“하
량천옥이 손을 놓자 고은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량천옥은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고은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량천옥이 떠나려던 순간, 나태현이 입구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나태현을 본 량천옥은 바로 나태현을 향해 걸어갔다.나태현은 량천옥을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량천옥은 나태현 뒤에 서 있는 지신혜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알아냈다.“쯧쯧, 지씨 가문의 아가씨라서 선을 지킬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네.”량천옥을 본 지신혜는 숨도 쉬지 못했다.“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오다니. 지씨 가문에서 그렇게 가르쳤나 보지?”천락 그룹의 사람들도 퇴근해서 나오는 중이었다.회사 앞에서 이런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으니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지켜보았다.하지만 그 주인공이 나태현이라는 것을 보고는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러갔다.그저 나태현 옆에 있는 지신혜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지신혜는 그 눈빛에 표정이 굳어버렸다.“태현 씨.”억울한 표정으로 나태현의 팔을 그러안았다.그러자 량천옥은 멸시의 시선을 보냈다.“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개방적이라는 걸 까먹을 뻔했네.”“태현 씨!”지신혜는 나태현의 팔을 더욱 세게 그러안았다.지씨 가문의 딸로서, 이런 취급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상대가 량천옥이다보니, 지신혜는 나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먼저 차에 있어.”지신혜는 량천옥을 보면서 눈을 부릅떴다.모든 사람들은 량천옥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량천옥은 강성의 미친개였으니까 말이다.사업이 성공한 남자들은 량천옥을 더욱 경계했다.여자에게 홀린 남자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다들 봐왔으니까 말이다.얼마나 많은 사모님들이 량천옥 때문에 마음 아파했는가.지신혜는 량천옥과 싸울 담이 없었기에 얼른 차에 올라탔다.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량천옥을 쳐다보았다.“은지 손의 상처, 네가 한 거야? 아니면 지신혜가 한 거야.”량천옥의 말투
이현은 계속 해외에 있었다. 연구 때문에 계속 돌아오지 못했는데 겨우 연구를 끝낸 후 돌아오자마자 바로 익산으로 갔다.이현의 마음속에는 고은지와 고은영이 어렵게 살던 모습이 계속 남아있었다.“동생은 잘 지내?”고은지의 삶은 너무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이현은 먼저 고은영에 대해서 물었다.고은영을 떠올린 고은지는 마음이 편해져서 대답했다.“은영이는 잘 지내고 있어.”“그래?”이현은 약간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이현이 기억하는 고은영은 겁이 많은 아이라서 고은지의 보살핌이 필요했다.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배씨 가문 며느리가 되었거든. 배준우 씨랑 결혼했어.”“배준우?”이현은 깜짝 놀랐다.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이현을 보면서 물었다.“아는 사람이야?”“당연하지.”배준우가 유학할 때, 그들은 항상 함께였다. 아는 사이일 뿐만이 아니라 아주 친했다.고은지는 깜짝 놀랐다.“이런 우연이 있다니.”“배준우와 결혼하다니. 좋네.”이현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배준우는 주견이 뚜렷한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리 배준우의 부모라고 해도 배준우의 일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배준우 씨도 은영이한테 잘해주니까.”그 덕분에 고은지는 마음 놓고 배준우에게 고은영을 맡길 수가 있었다.배준우가 고은영에게 잘해준다는 말을 들은 이현은 마음이 놓였다.고은지의 일도 묻고 싶었지만 조금 전 고은지의 표정을 떠올린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계속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은지는 그제야 이현이 왜 중학교 이후부터 익산에 오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유학 때문에 계속 해외에만 있었으니까 말이다.대화를 나누면서 이현이 원래 강성에서 자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헤어질 때 이현은 명함을 고은지에게 건네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다.그리고 또 좋은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은지는 법적으로 아이를 데려오지 못한다고 알려주었다.고은지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저
점심. 한 레스토랑에서.고은지는 오랜만에 이현과 만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고은지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이현을 알아볼 수 있었다.이현도 고은지를 알아보았다.너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고은지는 웃으면서 말했다.“몇 년이 지나도 넌 계속 그대로네.”“넌 조금 변한 것 같아.”이현은 그렇게 얘기하면서 고은지에게 물을 따라주었다.“고마워.”고은지가 잔을 들었다.이현은 고은지의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굳어서 물었다.“네 손, 무슨 일이야.”“조금 다쳤어. 지금은 괜찮아.”고은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마치 아까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이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무슨 일을 하는데 손을 다친 거야?”“그냥 평범한 비서 업무야. 칼날을 폐기 처리하다가 다친 거야.”“네가 왜 폐기 처리를 하는데.”“그대로 버리면 다른 사람이 다치니까.”“결국 네가 다쳤잖아.”이현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이윽고 말을 이었다.“넌 여전히 어릴 때랑 다른 바가 없네. 본인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잖아.”“...”그 말을 들은 고은지는 컵을 들고 있던 왼손을 바르르 떨었다.중학교 전까지만 해도 이현은 여름 방학마다 익산시에 와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익산시는 몹시 가난한 곳이었다.잘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이현은 고은지와 고은영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동생은?”이현이 물었다.사실 이현은 전에 익산시에 가서 고은지와 고은영을 찾으러 갔다.하지만 마을의 사람들은 고은지와 고은영이 강성에 갔다고 했다.그리고 조보은이 잘 못 지낸다고 얘기했다.이현은 조보은이 왜 그렇게 된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고은지와 고은영이 강성에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강성에 온 것이다.“결혼했어.”“결혼했다고?”“응. 나도 결혼했다가 이혼했어.”고은지가 말했다.“...”고은지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는 말을 들은 이현
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지훈을 쳐다보았다.이지훈은 그 눈빛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차가운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꾹 참고 이어서 얘기했다.“고은지 씨는 그래도 대표님 아이의 엄마입니다.”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기는 하나 그건 고은지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니테현이 고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고희주를 싫어한다고 해도 이런 과분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그래서 마음 아파?”나태현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지훈은 그 생각에 온몸이 굳어버렸다.“그 누구라도 고은지 씨의 모습을 보면 동정심이 생길 겁니다.”이지훈의 말이 맞았다.천락 그룹에서는 고은지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고은지와 고희주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은지가 조영수와 결혼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고은지를 우습게 보던 사람들이 있었다.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나태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이지훈의 말이 맞았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은지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할 것이다.나태현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동정한다고? 하하하... 고은지가 동정이 필요한 사람인가?”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다.량천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런 량천옥의 딸이 동정을 얻고 산다니.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이지훈은 비꼬는 듯한 나태현의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태현은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라는 사실을 싫어했다.만약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 아니었다면 나태현은 고희주를 빼앗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고은지 씨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량천옥 씨의 사랑을 받아온 것도 아닌데 지금은 량천옥 씨 때문에 복수의 대상이 되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됩니다.”이지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얘기했다.량천옥은 나쁜 여자다. 강성에서도 유명한 나쁜 여자다.죄는 량천옥이 짓고 벌은 고은지가 갚는다.이건 누가 봐도 불공평한 일이었다.“모든 일이 공평할 수는 없지만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