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로 배준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으로 가서 서류 좀 가져다 줘. 그리고 옷장에 있는 자주색 넥타이도 좀 부탁해.”“네, 알겠습니다.”고은영은 공손히 대답한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자 그녀는 안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차키 좀 빌려줘. 대표님 집으로 좀 가봐야 해!”“대표님도 참, 평소에 집으로 심부름도 자주 보내면서 업무용 차 한대도 안 뽑아 주다니!”안지영은 불평하면서도 순순히 차키를 꺼내 고은영에게 건넸다.차키를 건네 받은 고은영은 담담히 대답했다.“서류만 가지고 나올 거야. 차비 받으면 나중에 너 다 줄게!”“요즘 기름값 엄청 비싸다고! 그깟 차비 얼마나 준다고!”안지영이 투덜거렸다.그녀는 예전부터 회사의 복지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배준우는 짠돌이 중의 짠돌이었다.고은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내 사비로 기름 한번 넣어줄게.”“매달 대출로 400만원이나 갚는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그러니까 좀 도와줘.”“불만도 얘기하면 안 돼?”안지영이 뾰로통하게 말했다.고은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어려서부터 곱게 자란 이 재벌 아가씨는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배준우가 짠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사실은 그냥 회사에 불만이 많은 거였다.엘리베이터를 나선 고은영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녀는 배준우의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블랙톤 위주의 인테리어는 적절한 소품들로 잘 조화를 이루어 너무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고은영은 일단 서재로 가서 서류를 챙긴 뒤, 익숙하게 옷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그런데 장롱 문을 열자마자 툭 하고 무언가 떨어져 나왔다.고은영은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하지만 물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포장지도 안 뜯은 콘돔이었다!줄곧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그녀는 얼른 그것을 도로 장롱에 넣었다.평소에 금욕적으로 보이는 배 대표가
나태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영은 그와 함께 조사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그녀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나태웅이 귀찮은 듯이 말했다.“이제 일하자!”“네, 나 실장님!”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나태웅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배준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온 고은영은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휴게실에서 봤던 장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이러다가 정말 크게 사고 한번 칠 것 같아!’무슨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지 나태웅은 한 시간 뒤에야 배준우의 사무실에서 나왔다.그가 나오자 마자 고은영의 업무용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표 사무실 쪽을 바라보다가 남자의 냉랭한 눈빛과 마주쳤다.고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네.”“들어와!”남자는 간단하게 지시를 내린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은영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다음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연 순간, 벌써 풍겨져 나오는 숨막히는 압박감에 그녀의 긴장감도 최고조에 달했다.“대표님, 다음 회의에 필요한 자료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공손히 서류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그 무심한 동작에 고은영의 긴장감은 다시 고조되었다.배준우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점점 더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꼈다.한참이 지난 뒤, 그녀의 등이 축축하게 젖었을 때, 배준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까 뭘 봤지?”“아니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고은영은 다급히 말했다.상사 앞에서 당신의 나체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그런데 그의 눈빛에서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 착각일까?고은영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재차 말했다.“정말 아무것도 못봤어요.”“그래?”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차가
하지만 날카로운 나태웅의 눈빛을 마주하자 도망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고 비서, 괜찮아?”그녀가 멍하니 있자 나태웅의 말투가 차가워졌다.“아… 괜찮습니다.”그녀가 다가가자 나태웅은 노트북 화면을 그녀에게 돌렸다. 화면에서 그녀가 배준우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날짜가 맞았다.고은영은 머리 속이 완전히 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런데 몇 초 정도 지나자 화면에 지저분한 점들이 생기더니 꺼져 버렸다.안지영이 삭제한 부분일 것이다.고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태웅에게 말했다.“이 영상 맞아요. 안지영 씨랑 아침까지 지켜봤는데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었습니다.”그녀가 그 방에 밤새도록 있었기에 그날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영상이 손상되었으니 고은영과 안지영, 그리고 매수한 보안센터 직원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고은영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태웅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이 영상 복구해 주세요!”고은영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와 나태웅을 번갈아 보았다.“이분은….”“강성 IT센터 팀장, 진재한 씨야!”진재한!그 이름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컴퓨터 기술자가 바로 진재한이었다.배준우는 그를 본사로 데려오고 싶어했지만 진재한은 줄곧 제안을 거절해 왔다.나태웅이 그 여자를 찾으려고 진재한까지 동원할 줄이야!진재한은 노트북을 건네 받고 자신감 있게 휘파람을 불고는 말했다.“이런 건 일도 아니죠! 맡겨만 주세요!”고은영은 등 뒤가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그녀는 어렵게 정신을 차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제가 따로 할 일은 있나요?”고은영의 질문에 나태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고 비서는 일단 나가서 일해!”“네.”그녀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고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밖으로
고은영은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눈알이 새빨개진 상태로 비상계단에서 나갔다.비서실 직원 민초희가 그녀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비서님, 울었어요?”“아… 아니에요! 괜찮아요!”고은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민초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많이 힘들면 장기 휴가 신청하고 쉬는 것도 방법이에요!”동영그룹 직원이라면 배준우 밑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물론 급여는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많았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위치였다. 고은영은 감격한 표정으로 민초희를 바라보며 말했다.“감사해요. 안 그래도 지금 휴가 신청하러 가는 길이었어요.”더 이상 회사에 있다가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민초희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고은영도 자리로 돌아가서 휴가 신청서를 작성한 뒤, 나태웅의 사무실로 갔다.영상이 어디까지 복구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휴가를 내려면 나태웅의 동의가 필요했다.그 뒤에 배준우에게 보고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은영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나태웅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상 파손 정도가 심각하네요.”“복구가 불가능해요?”나태웅이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고은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다.진재한도 복구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렇다면….고은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순간, 진재한이 말했다.“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3일 정도면 될 것 같네요.”“진 팀장에게 3일이나 쓰게 하다니. 장난을 친 자가 실력이 좀 되나 보네요!”나태웅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고은영은 다시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지금 당장은 복구하지 못했지만 3일 뒤에 만약 그가 성공적으로 복구해 낸다면?진재한도 정색하며 말했다.“네 실력이 상당한 자입니다.”“알았어요. 3일 드리죠.”다시 자리로 돌아간 고은영은 휴대폰으로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복귀할 필요 없어.
고은영은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반면 배준우는 해커까지 동원했다는 얘기에 잠시 표정을 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체할 시간이 없어.”고은영은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태영은 그 의미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 일이 있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그 여자가 숨었다는 건 아마 임신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여자의 배후도 그걸 바라고 행동했을 것이다.그렇다는 건 그 여자는 자신에게 가장 유력한 무기를 들고 나중에 배준우를 찾아올 가능성이 컸다.“그럼 어떻게 할까요?”배준우는 계모가 추천한 여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결국 이 순간을 위해서 그 난리를 부렸던 거잖아? 그럼 계획을 무효로 만들어야지!”그 여자가 자신의 측근을 그에게 결혼상대로 들이밀기 전에 결혼하면 그만이다.세 사람 중 고은영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결혼상대를 물색할까요?”고은영은 순간 놀라서 사레들려서 쿨럭거렸다.무거웠던 흐름이 그녀의 요란한 기침소리에 잠시 끊어졌다.배준우와 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바라보자 고은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사과했다.“죄송합니다!”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도망치듯 배준우의 사무실을 나갔다.너무 충격적이 소식이었다.어떻게 저런 분위기에서 결혼상대를 슈퍼에서 물건 고르듯이 얘기할 수 있지?사람이 짐승도 아닌데 성별만 여자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은영은 휴게실로 달려가서 생수를 찾아 벌컥벌컥 들이켰다.나태웅과 배준우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태웅이 물었다.“생각해둔 상대가 있나요?”배준우는 담배 한모금 길게 들이마시고 서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친모가 돌아가신 뒤, 계모라고 들어온 여자는 어떻게든 그를 통제하려고 했다.지금 그 여자는 동영그룹 전체를 손아귀에 잡고 흔들려는 게 분명
손상된 영상을 떠올린 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배준우에게 물었다.“고 비서가 사모님 측근일 가능성은요?”하필이면 고은영이 CCTV를 조회한 뒤에 그날 밤 영상만 손상되었다는 게 어쩐지 의심스러웠다.나태웅의 질문에 배준우는 코웃음쳤다.“겁이 많아서 그런 짓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야.”나태웅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고은영은 수상할 정도로 배준우를 두려워했다. 배준우의 계모처럼 계산적인 사람이 저런 허술한 상대를 측근으로 골랐을 리 없었다.“그럼 고 비서한테는 제가 말할게요.”“회사 내부에는 잠시 비밀로 해!”나태웅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결혼 자체가 계획의 일부인데 숨기는 게 당연했다.모든 게 끝나면 배준우야 타격이 없겠지만 고은영의 입장은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나태웅은 자신의 상사가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비록 고은영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혼한 뒤의 그녀의 처지도 고려한 결정이었다.한편, 자리에 돌아온 고은영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나태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내 사무실로 잠깐 와봐!”“네, 실장님.”고은영은 또 혼나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일부러 분위기 깬 것도 아니고… 누가 신성한 회사에서 결혼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래?’그녀는 투덜거리며 나태웅의 사무실로 향했다.“실장님, 저 왔어요.”“문 닫아.”나태웅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영은 순순히 문을 닫고 지시를 기다렸다.나태웅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내일 출근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챙겨서 와. 고은영 씨는 내일 배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할 거야.”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고은영은 너무 당황해서 또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나태웅은 실성한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사의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순간 의심이 갔다.하지만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었기에 이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의심을 치워버렸다.고은영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
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싫다고 하면요?”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쉽게 결정할 리 없고, 강요에 의한 결혼이라면 더더욱 사양이었다.결혼은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비록 연기라고는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나태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아까 대표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지?”만약에 그녀가 거절한다면 강성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은영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나태웅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 거절의 말을 다시 삼켜야 했다.그녀가 말이 없자 나태웅이 물었다.“가족관계증명서 발급해 놓은 거 있어?”“언니한테 있어요.”고은영이 말했다.나태웅은 시간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오후에 반차를 주지. 가서 가져와.”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배준우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예전에 결혼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낭만을 뜻하는 장미와 촛불 이벤트, 그리고 쌍방 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가지는 등등.하지만 이 모든 걸 생략하고 가족관계증명서부터 내놓으라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협박의 의미가 명확했지만 고은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기간은… 얼마나 될까요?”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무슨 기간을 말하는 거지?”“위장결혼이라면서요?”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기간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그건 대표님한테 물어봐야지.”지금 당장은 그 여자의 계획을 파탄내려는 의도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배준우의 의사에 달렸다.고은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배준우에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배준우는 창밖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고은영을 잠시 바라보았다.넋이 나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태웅이 들어오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잘 얘기했어?”나태웅은
게다가 그녀가 갈 때 선물을 사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언니의 시어머니 때문이었다.빈손으로 가면 두고두고 언니한테 불평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백화점이 가까워지자 언니를 다그쳤다.“많이 안 사. 빨리 사이즈나 말해줘. 샀다가 작아서 못 입으면 환불하기 더 귀찮아.”“은영아!”“빨리!”고은영의 태도는 단호했다.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사이즈를 알려주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안지영이 말했다.“언니도 강성 인근에 사시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 못 보지않아?”“가정도 있는데 내가 자꾸 가면 부담될까 봐.”언니 고은지를 통해 고은영은 느낀 바가 있었다. 결혼은 두 가족의 결합이지 남녀가 사랑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오늘 나태웅이 배준우와 결혼하라고 했을 때 거부감부터 들었던 것이다.지금 배준우가 성격도 고약하고 같이 일하기 힘들지만 어차피 직장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그와 결혼하게 되면 그녀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안지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친언니 만나러 가는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안지영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친구가 불쌍했다.유일하게 그녀를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언니는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친언니니까 언니가 입장 곤란해지는 건 싫어.”언니는 어렸을 적 고은영의 정신적 지주였다. 맛있는 거 생기면 항상 동생 먼저 챙기고 운 좋게 새 옷이 생겨도 먼저 동생에게 주었다.지금도 언니 집에 놀러 가면 어떻게든 맛있는 거 차려준다고 난리를 떠니 시어머니가 고깝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백화점에 도착하자 고은영은 같이 가주겠다는 안지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들어갔다. 안지영과 쇼핑하면 대부분 그녀가 계산하기 때문이었다.이미 안지영에게는 신세를 많이 져서 자꾸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안지영이 그녀에게 카드를
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여기에 같이 있을게.”“돌아가!”고은지가 한층 무거워진 말투로 강경하게 얘기했다.“...”“혼자 있고 싶어. 혼자 내버려 두라고.”“알았어. 그럼 언니는 혼자 있어. 난 옆 방에 있을게.”“제발 돌아가라니까!”고은지는 이미 인내심이 다 닳은 상태였다.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알았어. 갈게. 갈 테니까 진정해.”고은영은 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이렇게 그냥 보내는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은지에게는 정말 고희주가 전부였다. 그래서 고희주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고희주는 안심할 수 없었다.그러니 지금은 혼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그럼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고은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고은영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병실에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호영이 보였다.진호영을 본 고은영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하필 이 상황에...’진정훈은 고은영의 표정이 확 굳은 것을 보고 짜증이 났다.뭐라고 얘기하려 했지만 아까 고은영이 한 얘기를 떠올리고는 입을 꾹 닫았다.고은영에게 있어서 그동안의 시간은 몹시 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고은영은 아마 진유경이 어떤 사람인지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피가 섞인 가족한테서 차별 대우를 받았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그래서 여태껏 진호영과 거리를 둔 것일지도 몰랐다.친여동생이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겨우 진짜 가족을 찾았는데, 친오빠인 본인은 진유경 걱정부터 했으니...진호영은 가슴 깊이 반성하고 있었다.게다가 진호영은 김영희가 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간 일도 알게 되었다.그는 김영희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 전혀 몰랐다.아무리 고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은영은 피가 섞인 친손녀인데...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가다니. 고은영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아닌가.진호영이 길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고은영이 차갑게
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속이 씁쓸해졌다.하지만 진성택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다. 진호영이 우물쭈물하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하지만 아버지가...”“그렇다고 해서 은영이를 억지로 데려올 수는 없어.”“그럼 딱 한 번만 만나게 하면 되잖아.”진호영이 난감한 듯 얘기했다.진씨 가문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진호영은 그래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열심히 모시려고 애썼다.진정훈은 그런 진호영을 보면서 또 화가 났다.“배준우 씨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지키는 호위무사 같은 사람이었다.진호영은 배준우의 이름만 들어도 겁이 났다.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얘기만 해볼게. 은영이가 허락하면 데려오고 허락하지 않으면 그만할게. 그러면 되지?”진호영은 적어도 아버지의 말을 전해주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말을 전하지도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그런 진호영을 보면서 진정훈은 머리가 약간 아팠다.“가지 마!”고은영을 향한 동정심이 더욱 컸기에 진정훈은 진호영이 고은영을 건드리러 가지 않았으면 했다.고희주의 일로도 충분히 힘든 사람이다.“못 들었어?”진호영이 대답하지 않자 진정훈이 더욱 엄숙한 말투로 얘기했다.무슨 일이 있든지 진호영은 고은영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진정훈의 결연한 태도에 진호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만은 아주 답답했다.그래서 결국 30분이 지난 후 진호영이 한눈을 판 사이에 몰래 고은영을 찾아갔다.고은지의 병실에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맴돌았다.배준우가 음식을 가져왔지만 두 사람은 밥을 먹을 기분이 없어 보였다.고은영이 고은지에게 얘기했다.“언니, 좀 먹어둬.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잖아.”배준우와 고은영의 대화를 들은 후부터 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공허한 두 눈으로 절망스럽게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고희주는 고은지의 마지막 희망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하지만 그런 고희주가 죽었다
배준우의 뜻은 명확했다.고은영이 지금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하고 있으니 진씨 가문 사람들이 진성택의 일로 고은영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진정훈은 배준우의 뜻을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하죠.”진정훈도 배준우처럼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었다.하지만 배준우한테서 고은영의 상황을 전해 듣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시 돌아갔다.그리고 올라가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바로 진호영을 만날 수 있었다.진호영은 이제 진유경의 본모습을 알아보게 되었다.진유경이 진호영에게 같이 고은영을 찾아가자고 했을 때 진호영은 완강하게 거절했다.“아버지가 깨어나셨어. 은영이를 보고싶어 하셔.”진호영이 약간 쉰 목소리로 얘기했다.어쩌면 이게 진성택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기분이 들었다.“가지 마.”배준우의 말을 떠올린 진정훈이 바로 얘기했다.그 말에 진호영이 약간 불쾌한 듯 표정을 구겼다.“왜 가지 말라는 거야? 은영이의 친아버지잖아. 아버지가 깨어난 뒤로 계속 은영이를 찾고 계시는데 왜 말리는 거냐고!”진정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그리고 진호영 앞에서 멈춰섰다.진호영보다 키가 큰 진정훈이 진호영을 내려다보자 진호영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뒤로 약간 물러났다.그리고 아까보다 누그러진 말투로 얘기했다.“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단 말이야.”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진정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얘기했다.“지금 은영이한테도 슬픈 일이 있어. 그러니 충격이 클 거야.”“무슨 일인데.”고은영도 충격이 클 거라는 말에 진호영이 깜짝 놀랐다.드라마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진정훈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까 배준우가 한 말을 그대로 진호영에게 전해주었다.“...”고은지의 이름을 들은 진호영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러자 진정훈은 진호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진호영의 어깨를 두드린 진정훈이 얘기했다.“고은지는
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는 배준우를 보고 온몸에 힘이 풀린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더니 이내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희주의 소식을 들은 후부터 고은지는 자기가 다쳤다는 것을 자꾸만 까먹었다. 가끔은 상처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다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고은영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언니, 언니!”고은지는 절망 속에 빠진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간호사와 간호인이 와서 고은지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고은지에게 함부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그 다리를 전혀 못 쓰잖아요. 그러니 그냥 가만히 침대에 있는 게 좋아요.”고은지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았다.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간호사와 간호인이 모두 떠났다.고은영은 옆의 의자를 갖고 와 앉은 채 고은지의 손을 꽉 잡았다.그리고 그제야 고은지가 온몸을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배준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은영의 뒷모습을 보더니 아무 말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이미 슬픔의 바다에 빠져버린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이 슬픔을 온전히 느낄 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그 슬픔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병실에서 나온 배준우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숨을 돌리려고 했다.하지만 이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진정훈을 만났다. 진정훈은 진성택의 일을 배준우에게 간단하게 알려주었다.지금 진성택은 적합한 신장을 찾는다고 해도 이식 수술을 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졌다. 원래 진씨 가문에서 진성택의 병을 알아차렸을 때, 한 달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돈의 힘이었다.배준우는 진성택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서 담담하게 얘기했다.“진씨 가문 사람들이 은영이한테 연락하지
배준우와 나태현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지만 배준우는 지금 상황에서 고은지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깊은 원한이 있다고 해도 다른 여자를 이렇게 매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해외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희주의 소식을 알려줬대요.”“...”“나도 원래 안 믿었는데 준우 씨 말을 들으니 아마...”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그들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아주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배준우는 눈물을 흘리는 고은영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고은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고은영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위로도 소용없었다.차라리 슬픔에서 벗어날 때까지 펑펑 우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슬픔을 덜어낼 수 있다면 말이다.“지금부터 나씨 가문 사람들을 멀리해요.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더러운 사람들이니까.”그 말은 약간 유치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얘기했다.“그래,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면 되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여전히 속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나씨 가문의 사람도 꼭 대가를 치러야 해요. 짜증 나는 사람들...”고은영은 그렇게 얘기하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나태범이 고희주의 존재를 알았을 때 보여준 행동과 태도는 한 아이의 할아버지가 보여줄 수 있는 행동과 태도가 아니었다.그런 사람들은 대가 끊겨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배준우가 고은영의 말을 듣다가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아무리 빌어도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피부를 확 벗겨서 밖에 내다 걸어버릴까?”“그건 너무 가벼운 벌이에요. 살과 뼈를 다 발라버려야죠!”“그렇게까지...?”“네!”배준우의 시선을 마주한 고은영은 더욱 목 놓아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배준우는 그런 고은영의 말을 듣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 자식들은 꼭 벌을 받게 될 거야.”
배준우의 말을 들은 고은영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다 내 탓이에요... 내가 언니한테 제대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내가...”“아니야, 네가 그때 알려줬었으면 지금 죽은 사람은 고은지가 됐을 거야.”배준우가 고은영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때의 고은지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우울증 때문에 투신한 고희주에, 량천옥이 친엄마라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까.게다가 나태현의 공격까지.고은지는 그렇게 많은 사건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버릴지도 몰랐다.고은영은 배준우의 옷을 꼭 잡고 얘기했다.“나태현 씨가 희주를 데려가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어요.”고희주가 고은지의 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고은영은 지금 나태현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희주가 과연 나태현의 손에서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희주를 싫어하는 나태현이 과연...“이건 네 탓이 아니야. 네가 막으려 했어도 결국에 일어났을 거야.”“...”그래, 고은영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나태현이 마음먹고 아이를 데려가려 한다면 고은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게다가 지금 해외 쪽에서 난리가 났으니... 량천옥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고은영은 량천옥이 예전에 얼마나 악랄하고 무서운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던지 떠올렸다.량천옥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심호흡과 함께 고은영의 두 볼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나는 차라리 량천옥 씨가 나태현 씨를 죽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나태현이 죽을 만큼 미웠다. 아니, 죽일 만큼 미웠다.배준우는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그러다 고은영의 말을 들은 후 입을 열었다.“해외에서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목숨을 걸고 싸운다.그 소식으로부터 그들은 희주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배준우 옆의 고은영은 항상 겁이 많은 착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영의 입에서는 차가운 말만 흘러나올 뿐이었다.“정말 량천옥 씨가
“나태현이 직접 얘기한 거야.”“...”나태현이 직접 얘기한 것이라니.그렇다면 아마 진실일 것이다.희주가 정말 죽었다는 것이다!고은영은 심장이 아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고은영의 심장을 꽉 조이는 것만 같았다.힘겹게 입을 연 고은영이 물었다.“직... 직접 자기 입으로 얘기한 거예요?”목소리는 점점 낮아져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어떻게 해야지? 언니한테는 뭐라고 해야지?’고은지가 머리를 굴렸다.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은지를 그렇게 잘 따르던 아이가 결국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전부이고 세상이었다.하지만 결국 고희주는 고은지를 만나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배준영은 고은영의 울먹임을 듣고 한숨을 내쉬더니 얘기했다.“지금 데리러 갈게.”고은영이 핸드폰을 툭 떨어뜨렸다. 희주가 죽었다니...이제 어찌해야 하는가...심호흡을 여러 번 했지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결국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다.간호인이 물을 떠 오다가 창백한 표정의 고은영을 보고 얼른 다가갔다.“사모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쉿.”간호인이 뭐라고 더 얘기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간호인은 그런 고은영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러세요? 의사를 부를까요?”고은영은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괜찮아요, 그냥 혼자 내버려 두면 나아질 거예요.”고은영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고은지에게 걸려온 전화는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배준우가 알아 온 정보도 같은 내용이니...고은영은 이제 희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정말 믿게 되었다.그 작고 어린아이가 죽다니...간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러면 필요하실 때 부르세요. 전 먼저 물을 가져다드릴게요.”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고희주로 가득했다.왜 그때 고은지에게 그렇게 많은 일들을 비밀로 했었을까.만약 고은지에게 바로 알려주었다면 고은
나태현의 태도에 집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도련님,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나태현이 차갑게 되물었다.“그렇게까지?”“어르신이 그 아이를 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아시잖습니까.”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키우는지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다.집사의 그 한마디가 마치 나태현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았다.나태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집사는 들려오는 기계음 소리를 들으면서 굳은 표정으로 나태범을 쳐다보았다.“큰 도련님이 전화를 끊으셨습니다.”“아이는?”나태범이 조급해하면서 물었다.집사는 고개를 저었다.“희주 아가씨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나태범은 너무 걱정되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고 량천옥은 대체 왜 갑자기 미친 것일까.량천옥은 지금 단단히 미쳐있었다.“다시 전화 걸어!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해!”나태범이 조급해하면서 얘기했다.나태현을 해외에 두는 것이 마음 놓이지 않았다.량천옥은 그야말로 미친년이었다. 이성을 잃은 량천옥은 다 같이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무조건 죽일 것이다.배항준이 계속 량천옥을 어르고 달랜 덕분에 량천옥은 요즘 잠잠하게 지냈다.하지만 량천옥의 본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다.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윽고 집사가 다시 나태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태현은 받지 않았다.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은 없었다.“큰 도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그럼 그 주변 사람한테 전화해!”“네, 네!”집사는 나태현이 조급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당연한 일이었다.량천옥이 나태현을 정말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나태현이 낙하산을 쓸 줄 몰랐다면 아마 정말 죽었을 것이다.량천옥과 한곳에 있는 것도 하나의 위험이었다.집사는 나태현 주변 사람에게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나태범은 여전히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서 거실에서 이리저리 오갔다....고은영은 고은지 옆을 계속 지키
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다.“언니...”“희주가 죽었대...”“아니, 희주는 살아있어! 날 믿어줘! 희주는 분명 살아있을 거야!”고은영이 계속해서 위로했다.하지만 고은영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나태현과 량천옥이 동시에 해외로 나갔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가 확실하니까 말이다....고은지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그리고 나씨 가문도 마찬가지였다.나태웅은 아직도 나씨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장선명과 안지영의 결혼 소식이 퍼져도, 안지영이 나태웅을 고소하겠다는 소식이 퍼져도 나태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리고 이 시점에 나태현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 소식을 들은 나태범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태현은 지금 어디 있어!”집사가 나태범을 부축해주었다.“도련님은 그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태범은 걱정이 되었다.“대체 왜 그렇게 된 거야. 량천옥의 짓이야?”나태범은 량천옥의 등장을 썩 반기지 않았다.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걱정하던 일이 하나둘 벌어지고 있었다.량천옥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량천옥 씨가 한 겁니다.”나태범은 그 소식을 듣고 표정이 바로 굳어버렸다.“이 사람이... 점점 담이 커져서 미친 거 아니야?”나태범이 고함을 질렀다.이윽고 그는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집사는 나태범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큰 도련님이 무슨 정보를 막아버려서 저희도 희주 아가씨의 소식을 모릅니다.”나태범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나태현이 아이를 해외로 빼돌린 후, 나태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소식도 들은 것이 없었다.아무리 그래도 나태현의 자식이니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그럼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그 아이가...”거기까지 얘기한 나태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