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그녀가 갈 때 선물을 사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언니의 시어머니 때문이었다.빈손으로 가면 두고두고 언니한테 불평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백화점이 가까워지자 언니를 다그쳤다.“많이 안 사. 빨리 사이즈나 말해줘. 샀다가 작아서 못 입으면 환불하기 더 귀찮아.”“은영아!”“빨리!”고은영의 태도는 단호했다.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사이즈를 알려주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안지영이 말했다.“언니도 강성 인근에 사시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 못 보지않아?”“가정도 있는데 내가 자꾸 가면 부담될까 봐.”언니 고은지를 통해 고은영은 느낀 바가 있었다. 결혼은 두 가족의 결합이지 남녀가 사랑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오늘 나태웅이 배준우와 결혼하라고 했을 때 거부감부터 들었던 것이다.지금 배준우가 성격도 고약하고 같이 일하기 힘들지만 어차피 직장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그와 결혼하게 되면 그녀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안지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친언니 만나러 가는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안지영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친구가 불쌍했다.유일하게 그녀를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언니는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친언니니까 언니가 입장 곤란해지는 건 싫어.”언니는 어렸을 적 고은영의 정신적 지주였다. 맛있는 거 생기면 항상 동생 먼저 챙기고 운 좋게 새 옷이 생겨도 먼저 동생에게 주었다.지금도 언니 집에 놀러 가면 어떻게든 맛있는 거 차려준다고 난리를 떠니 시어머니가 고깝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백화점에 도착하자 고은영은 같이 가주겠다는 안지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들어갔다. 안지영과 쇼핑하면 대부분 그녀가 계산하기 때문이었다.이미 안지영에게는 신세를 많이 져서 자꾸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안지영이 그녀에게 카드를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늦은 시간이었다.고은영은 언니한테 가족관계증명서를 달라고 한 뒤, 작별인사를 전했다.침대를 정리하던 고은지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벌써 가게? 자고 가지.”고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안 돼. 내일 또 출근이야.”“그런데 가족관계증명서는 왜 필요한데?”고은지가 물었다. 가족관계증명서가 꼭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회사에서 연말에 단체여행을 해외로 가기로 했는데 여권이랑 비자 만들어야 해.”언니를 걱정시키기 싫었기에 고은영은 거짓말을 택했다.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이고 위장결혼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족관계증명서를 꺼내 건넸다.“다음에 올게.”“그래.”고은영은 언니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고은지는 아이를 낳은 뒤로 전보다 군살이 많아졌다.고은영은 그런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심코 물었다.“언니는 혼인신고 할 때 어땠어?”순간 고은지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고은영은 순간 뭔가 알 것 같았다. 고은지와 조용수는 선 보고 만난 사이였다. 그것도 계모인 조보은의 소개를 받아 결혼했다.아이가 벌써 다섯 살인데 아직도 혼인신고를 안 했다는 게 놀라웠다.언니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있던 고은영은 다시 잠자는 조희주에게 시선을 돌렸다.“희주도 이제 유치원 다니니까 언니도 직장 찾아서 출근해.”그녀는 명문대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졸업한 언니가 이런 시골구석에서 농촌아낙으로 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솔직히 말하면 고은영은 언니가 조보은의 말만 듣고 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사실 조은지도 후회하고 있었다.시어머니는 정말 깐깐하고 맞춰주기 힘든 성격이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고은지가 말했다.“나도 출근하고 싶지. 그런데 애는 누가 픽업하겠어.”조희주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그녀도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부탁하려고 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그러면서 둘째를 또 낳으라고 재촉하는 상황이었다.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고은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중도에 안지영에게 지원요청을 보냈는데 문자를 받은 안지영도 충격에 빠졌다.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지옥사자가 여자를 집에 데려가는 날이 오다니! 게다가 그곳은 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하원 별장이었다.게다가 더 충격적인 건 상대가 고은영이라는 사실이었다.배준우를 흠모하던 여자들이 알면 고은영의 사지를 찢으려 하지 않을까?안지영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답장을 보냈다.오늘 배준우가 먼저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했으니 이제 동거를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이상한 점은 이런 요구를 제기한 사람이 배준우라는 사실이었다.여자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는 일은 많지만 그가 먼저 여자에게 오라고 손짓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문자를 받은 고은영은 의리도 없다고 속으로 안지영을 욕했다.하지만 안지영도 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배준우를 따라 문앞까지 갔다.“저기… 저는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그녀는 포근한 자신의 기숙사가 그리웠다.배준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일 바로 구청에 혼인신고하러 갈 텐데 오늘 기숙사 가면 내일 내가 또 데리러 가야 하잖아.”“제가 알아서 갈게요!”고은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배준우의 인상이 점점 더 썩고 있었다.고은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만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신발장에 슬리퍼 있어.”말을 마친 그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고은영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에 여기 방문할 때는 항상 실내화를 따로 챙겨서 다녔었고 한 번도 허락 없이 그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신발장을 열자 가지런히 정돈된 남성용 슬리퍼가 보였다. 여자용은 없었다.그녀는 아무거나 집어서 신었다. 사이즈가 많이 컸지만 그냥 무시했다.배준우는 지금 그들을 지켜보는 자를 철저히 속이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만 고은영은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배준우는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 든 계약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고은영은 고개를 숙인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번엔 정말 끝나는 거 아니겠지? 배준우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고은영의 멘탈이 거의 나갈 때 쯤에 배준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그런 거 아니에요!”고은영이 다급히 말했다.일개 직원이 무슨 수로 상사를 협박한단 말인가.그녀는 단지 다시는 순결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배준우는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떠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하! 아니란 말이지?”‘재밌네. 저 머리에 밀당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콘돔은 다른 누가 가져다 놓았다는 건데…. 주변 청소를 좀 해야겠군!’하지만 겁쟁이 비서가 조건을 제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은영은 손에 땀을 쥐고 입을 꾹 다물었다.다행히 배준우는 더 이상 대화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는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서 자.”고은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잠자리는….”하지만 배준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겁나서 결국 하려던 말을 삼켜야 했다.“좌측 두 번째 방으로 가면 돼.”그 방은 손님용 방이었다.하지만 고은영은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탁자에 놓인 콘돔을 보면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다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쾅 하고 문을 닫았다.그리고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배준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왜 저러지? 내가 자기를 잡아먹기라도 해?’하지만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방에 들어온 고은영은 안지영의 문자를 확인했다.지난번 경험이 있어서 많이 조심스러워진 문자였다.[은영아?][그래, 나야!][지금 문자 가능해?]안지영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지난번에 고은영에게 문자를 잘못 보냈다가 배준우의 의심을 산 뒤로 모든 게 조심스러워졌다.게다가 고은영은 원래 멘탈이 약
이날 밤, 안지영은 고은영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하루아침에 배준우와 같은 집에서 동거하게 된 고은영이 너무 안쓰러우면서도 걱정됐다.고은영이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잠든 뒤에야 그녀는 잔소리를 멈추었다.그날 밤, 고은영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 낯선 환경이라 그런지,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중간에 몇 번이나 깨고 잠들고를 반복했다.결국 그녀는 아침 여섯 시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조용히 주방으로 갔다.그리고 언니가 준 반찬을 데우고 쌀을 찾았는데 빵과 우유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배준우는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 고은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고은영은 그를 보자마자 바짝 긴장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대표님, 좋은 아침이에요.”배준우는 다가가서 온통 고기반찬인 식탁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아침부터 이렇게 기름지게 먹어?”“언니가 준 반찬이라 버리기 아까워서요.”고은영이 말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음식을 버리는 습관이 없었다.매번 고은지가 반찬을 싸주면 변질해서 버리게 될까 봐 최대한 빨리 먹었다.이번에도 고은지는 하루 세끼 먹을 정도의 양을 싸주었다.배준우가 계속 밥상을 바라보고 있자 고은영이 물었다.“대표님도 좀 드실래요?”배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계란후라이 반숙 하나랑 빵, 그리고 따뜻한 우유 좀 부탁해.”고은영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이런 건 해본 적 없는데.’하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유난히 짜증이 많아 보이는 배준우를 보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배준우는 씻으러 안으로 들어갔다.고은영은 최신형 전자제품들을 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하지만 배준우에게 사용법을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인터넷으로 검색했다.여차여차 전자제품 사용법은 익혔지만 평소에 요리를 별로 해본 적 없는 그녀였기에 서툴기만 했다.결국 배준우는 씻고 나오면서 주방에서 풍기는 탄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주방으로 가보니 고은영이 서투른 솜씨로 거
그녀는 어른들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진여옥을 보며 시댁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게 된 고은영이었다.하지만 배준우와 계약결혼을 하려면 어쨌든 부모님을 만나긴 해야 했다.재벌가 후계자들은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집안 어르신들은 그렇게 재촉한다고 들었다.평소에 회사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배준우도 집에서는 결혼 재촉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니 조금 놀라웠다.“그렇다고 볼 수 있지.”배준우가 말했다.그렇다고 보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 아닌가?고은영은 말없이 식사에 전념했다. 사실 그녀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어릴 때 계모가 서정우가 먹다 남긴 음식을 준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역겹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배준우가 먹던 걸 먹는데 그다지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계란후라이와 토스트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가?“요리 뭐 할 줄 알아?”거의 식사가 끝날 때쯤 배준우가 물었다.“라면이요.”“더 없어?”“칼국수, 감자조림, 감자튀김, 감자볶음….”배준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평소에 면식이랑 감자만 먹고 살았나?’사실 고은영이 면식이나 감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생활이 어렵다 보니 밀가루 음식이나 감자가 주식이었다.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만 먹고 자라서 할 줄 아는 것도 이게 전부였다.“그럼 내일 아침부터는 국수 먹자.”배준우가 말했다.고은영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비록 어제 같은 지붕 아래서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배준우를 대하기 어려운 건 여전했다.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함께 구청으로 갔다.혼인신고서에 사인하기 전 고은영은 배준우를 빤히 쳐다보았다.배준우가 물었다.“왜 그래?”“먼저 계약서라도 써야 하지 않나요?”“내가 사기라도 칠까 봐 그래?”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를 보자 배준우는 기분이 상했다.고은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아침부터 지금까지 배준우는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먼저 이야기해서 기분이 나쁜 걸까?구청에서 나온
약간 비위가 상한듯한 말투에 고은영은 숨이 막혔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배준우는 신호등을 지나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차에서 내렸다.배준우는 놀란 토끼마냥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고 기분이 상했다.‘내가 잡아먹어? 왜 저렇게 나를 무서워하지?’회사로 돌아온 고은영은 곧장 나태웅의 사무실로 직행했다.계약서를 작성하자는 그녀의 말에 나태웅이 정색하며 그녀에게 말했다.“서면 계약서는 안 돼.”“네? 왜요?”고은영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면 계약서를 써야 계약이 유효한 거 아닌가?서면 계약서도 없이 나중에 논란이 생기면 어떻게 해명하려고?나태웅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자신의 검은색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계약서를 썼다가 유출이라도 되면 나중에 더 곤란해질 거야.”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계약서 유출로 생길 곤란한 상황을 대비해서 서면 계약서는 써줄 수 없어.”“두 사람 이혼할 때 대표님이 보수로 200억을 챙겨주실 거야.”200억?고은영은 순간 숨이 멎었다. 평생 만져보지 못한 금액이었다.그녀의 현재 월급은 세금 떼고 400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리고 부업으로 벌어들인 돈이 40만원 정도.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해야 저 금액을 벌 수 있을까?고은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그냥 계약서 쓰죠? 저 절대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요!”200억이라니!만약 배준우가 마음이 변해서 안 주기라도 하면?게다가 계약결혼이라면 당연히 기한이 있어야 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은영도 부자가 되는 것이다.고은영의 눈에 약간 욕망이 번뜩였다.나태웅이 정색하며 말했다.“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건 안 돼.”“정말 안 돼요?”“안 돼!”고은영은 울고 싶어졌다.서면 계약서도 없는 계약결혼이라니! 그것도 200억이 걸린 계약인데.배준우가 변심해서 그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고은영의 입가에 다시 경련이 일었다. 그런 곳은 도대체 언제 생긴 거지?하지만 200억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고은영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배준우가 물었다.“왜?”“그게… 조금전에 나 실장님은 서면 계약서를 못 만든다고 하시더라고요.”“이유는 나 실장이 설명했겠지?”“네.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일 끝나고 보수로 200억 준다는 게 사실이에요?”고은영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배준우 같은 부자 앞에서 돈 얘기를 하는 게 속물처럼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나태웅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는 그냥 비서실장이고 동영그룹에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배준우였다.금액이 금액인지라 고은영은 확실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배준우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금액이 적어서 그래?”“아, 그건 아니고요! 그냥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당연히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현실감이 떨어졌다.고은영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배준우는 겁 많은 고 비서가 발칙하게 그의 앞에서 돈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이 놀라웠다.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이야. 그리고 매달 따로 1000만 원씩 계좌에 입금할 거야.”고은영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진짜요?”“지금 내 말 의심해?”“아니요? 그럼 회사 월급은요?”고은영의 눈에서 희열이 차올랐다.배준우는 눈까지 반짝이는 그녀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월급은 정상적으로 지급하지!”매달 1000만 원 보너스에 월급도 정상 지급이면 매달 받는 돈이 1400만원이었다.더 이상 집대출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고은영은 거대한 금액 앞에 잠시 배준우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듯했다.배준우는 평소에 월급을 적게 준 것도 아닌데 돈 앞에서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하지만 만약 그가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알았더라면 아마 이런 그녀를 이해했을 것이다.고은영은
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여기에 같이 있을게.”“돌아가!”고은지가 한층 무거워진 말투로 강경하게 얘기했다.“...”“혼자 있고 싶어. 혼자 내버려 두라고.”“알았어. 그럼 언니는 혼자 있어. 난 옆 방에 있을게.”“제발 돌아가라니까!”고은지는 이미 인내심이 다 닳은 상태였다.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알았어. 갈게. 갈 테니까 진정해.”고은영은 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이렇게 그냥 보내는 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은지에게는 정말 고희주가 전부였다. 그래서 고희주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고희주는 안심할 수 없었다.그러니 지금은 혼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그럼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고은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고은영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병실에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호영이 보였다.진호영을 본 고은영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하필 이 상황에...’진정훈은 고은영의 표정이 확 굳은 것을 보고 짜증이 났다.뭐라고 얘기하려 했지만 아까 고은영이 한 얘기를 떠올리고는 입을 꾹 닫았다.고은영에게 있어서 그동안의 시간은 몹시 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고은영은 아마 진유경이 어떤 사람인지 진작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피가 섞인 가족한테서 차별 대우를 받았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그래서 여태껏 진호영과 거리를 둔 것일지도 몰랐다.친여동생이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겨우 진짜 가족을 찾았는데, 친오빠인 본인은 진유경 걱정부터 했으니...진호영은 가슴 깊이 반성하고 있었다.게다가 진호영은 김영희가 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간 일도 알게 되었다.그는 김영희가 이런 일을 저지를 줄 전혀 몰랐다.아무리 고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은영은 피가 섞인 친손녀인데...진유경을 데리고 배준우를 찾아가다니. 고은영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아닌가.진호영이 길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고은영이 차갑게
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속이 씁쓸해졌다.하지만 진성택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다. 진호영이 우물쭈물하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하지만 아버지가...”“그렇다고 해서 은영이를 억지로 데려올 수는 없어.”“그럼 딱 한 번만 만나게 하면 되잖아.”진호영이 난감한 듯 얘기했다.진씨 가문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진호영은 그래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열심히 모시려고 애썼다.진정훈은 그런 진호영을 보면서 또 화가 났다.“배준우 씨가 허락하지 않을 거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지키는 호위무사 같은 사람이었다.진호영은 배준우의 이름만 들어도 겁이 났다.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얘기만 해볼게. 은영이가 허락하면 데려오고 허락하지 않으면 그만할게. 그러면 되지?”진호영은 적어도 아버지의 말을 전해주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말을 전하지도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그런 진호영을 보면서 진정훈은 머리가 약간 아팠다.“가지 마!”고은영을 향한 동정심이 더욱 컸기에 진정훈은 진호영이 고은영을 건드리러 가지 않았으면 했다.고희주의 일로도 충분히 힘든 사람이다.“못 들었어?”진호영이 대답하지 않자 진정훈이 더욱 엄숙한 말투로 얘기했다.무슨 일이 있든지 진호영은 고은영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진정훈의 결연한 태도에 진호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만은 아주 답답했다.그래서 결국 30분이 지난 후 진호영이 한눈을 판 사이에 몰래 고은영을 찾아갔다.고은지의 병실에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맴돌았다.배준우가 음식을 가져왔지만 두 사람은 밥을 먹을 기분이 없어 보였다.고은영이 고은지에게 얘기했다.“언니, 좀 먹어둬.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잖아.”배준우와 고은영의 대화를 들은 후부터 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공허한 두 눈으로 절망스럽게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다.고희주는 고은지의 마지막 희망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하지만 그런 고희주가 죽었다
배준우의 뜻은 명확했다.고은영이 지금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하고 있으니 진씨 가문 사람들이 진성택의 일로 고은영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진정훈은 배준우의 뜻을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하죠.”진정훈도 배준우처럼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었다.하지만 배준우한테서 고은영의 상황을 전해 듣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시 돌아갔다.그리고 올라가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바로 진호영을 만날 수 있었다.진호영은 이제 진유경의 본모습을 알아보게 되었다.진유경이 진호영에게 같이 고은영을 찾아가자고 했을 때 진호영은 완강하게 거절했다.“아버지가 깨어나셨어. 은영이를 보고싶어 하셔.”진호영이 약간 쉰 목소리로 얘기했다.어쩌면 이게 진성택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기분이 들었다.“가지 마.”배준우의 말을 떠올린 진정훈이 바로 얘기했다.그 말에 진호영이 약간 불쾌한 듯 표정을 구겼다.“왜 가지 말라는 거야? 은영이의 친아버지잖아. 아버지가 깨어난 뒤로 계속 은영이를 찾고 계시는데 왜 말리는 거냐고!”진정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그리고 진호영 앞에서 멈춰섰다.진호영보다 키가 큰 진정훈이 진호영을 내려다보자 진호영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뒤로 약간 물러났다.그리고 아까보다 누그러진 말투로 얘기했다.“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단 말이야.”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진정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얘기했다.“지금 은영이한테도 슬픈 일이 있어. 그러니 충격이 클 거야.”“무슨 일인데.”고은영도 충격이 클 거라는 말에 진호영이 깜짝 놀랐다.드라마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진정훈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까 배준우가 한 말을 그대로 진호영에게 전해주었다.“...”고은지의 이름을 들은 진호영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러자 진정훈은 진호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진호영의 어깨를 두드린 진정훈이 얘기했다.“고은지는
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는 배준우를 보고 온몸에 힘이 풀린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더니 이내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희주의 소식을 들은 후부터 고은지는 자기가 다쳤다는 것을 자꾸만 까먹었다. 가끔은 상처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다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고은영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언니, 언니!”고은지는 절망 속에 빠진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간호사와 간호인이 와서 고은지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갔다. 그리고 고은지에게 함부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그 다리를 전혀 못 쓰잖아요. 그러니 그냥 가만히 침대에 있는 게 좋아요.”고은지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았다.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간호사와 간호인이 모두 떠났다.고은영은 옆의 의자를 갖고 와 앉은 채 고은지의 손을 꽉 잡았다.그리고 그제야 고은지가 온몸을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배준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은영의 뒷모습을 보더니 아무 말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이미 슬픔의 바다에 빠져버린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이 슬픔을 온전히 느낄 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그 슬픔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병실에서 나온 배준우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숨을 돌리려고 했다.하지만 이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진정훈을 만났다. 진정훈은 진성택의 일을 배준우에게 간단하게 알려주었다.지금 진성택은 적합한 신장을 찾는다고 해도 이식 수술을 하지 못할 만큼 쇠약해졌다. 원래 진씨 가문에서 진성택의 병을 알아차렸을 때, 한 달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돈의 힘이었다.배준우는 진성택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면서 담담하게 얘기했다.“진씨 가문 사람들이 은영이한테 연락하지
배준우와 나태현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지만 배준우는 지금 상황에서 고은지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깊은 원한이 있다고 해도 다른 여자를 이렇게 매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해외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희주의 소식을 알려줬대요.”“...”“나도 원래 안 믿었는데 준우 씨 말을 들으니 아마...”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그들에게 있어서 이 소식은 아주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배준우는 눈물을 흘리는 고은영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며 고은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고은영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위로도 소용없었다.차라리 슬픔에서 벗어날 때까지 펑펑 우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슬픔을 덜어낼 수 있다면 말이다.“지금부터 나씨 가문 사람들을 멀리해요. 나씨 가문 사람들은 다 더러운 사람들이니까.”그 말은 약간 유치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배준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얘기했다.“그래,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면 되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여전히 속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나씨 가문의 사람도 꼭 대가를 치러야 해요. 짜증 나는 사람들...”고은영은 그렇게 얘기하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나태범이 고희주의 존재를 알았을 때 보여준 행동과 태도는 한 아이의 할아버지가 보여줄 수 있는 행동과 태도가 아니었다.그런 사람들은 대가 끊겨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배준우가 고은영의 말을 듣다가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아무리 빌어도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피부를 확 벗겨서 밖에 내다 걸어버릴까?”“그건 너무 가벼운 벌이에요. 살과 뼈를 다 발라버려야죠!”“그렇게까지...?”“네!”배준우의 시선을 마주한 고은영은 더욱 목 놓아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배준우는 그런 고은영의 말을 듣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 자식들은 꼭 벌을 받게 될 거야.”
배준우의 말을 들은 고은영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다 내 탓이에요... 내가 언니한테 제대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내가...”“아니야, 네가 그때 알려줬었으면 지금 죽은 사람은 고은지가 됐을 거야.”배준우가 고은영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때의 고은지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우울증 때문에 투신한 고희주에, 량천옥이 친엄마라는 소식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까.게다가 나태현의 공격까지.고은지는 그렇게 많은 사건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버릴지도 몰랐다.고은영은 배준우의 옷을 꼭 잡고 얘기했다.“나태현 씨가 희주를 데려가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어요.”고희주가 고은지의 곁을 떠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고은영은 지금 나태현을 원망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희주가 과연 나태현의 손에서 무슨 짓을 당한 것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희주를 싫어하는 나태현이 과연...“이건 네 탓이 아니야. 네가 막으려 했어도 결국에 일어났을 거야.”“...”그래, 고은영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나태현이 마음먹고 아이를 데려가려 한다면 고은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게다가 지금 해외 쪽에서 난리가 났으니... 량천옥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고은영은 량천옥이 예전에 얼마나 악랄하고 무서운 수단을 쓰는 사람이었던지 떠올렸다.량천옥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심호흡과 함께 고은영의 두 볼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나는 차라리 량천옥 씨가 나태현 씨를 죽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나태현이 죽을 만큼 미웠다. 아니, 죽일 만큼 미웠다.배준우는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그러다 고은영의 말을 들은 후 입을 열었다.“해외에서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목숨을 걸고 싸운다.그 소식으로부터 그들은 희주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배준우 옆의 고은영은 항상 겁이 많은 착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고은영의 입에서는 차가운 말만 흘러나올 뿐이었다.“정말 량천옥 씨가
“나태현이 직접 얘기한 거야.”“...”나태현이 직접 얘기한 것이라니.그렇다면 아마 진실일 것이다.희주가 정말 죽었다는 것이다!고은영은 심장이 아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고은영의 심장을 꽉 조이는 것만 같았다.힘겹게 입을 연 고은영이 물었다.“직... 직접 자기 입으로 얘기한 거예요?”목소리는 점점 낮아져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어떻게 해야지? 언니한테는 뭐라고 해야지?’고은지가 머리를 굴렸다.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은지를 그렇게 잘 따르던 아이가 결국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다.두 사람은 서로의 전부이고 세상이었다.하지만 결국 고희주는 고은지를 만나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배준영은 고은영의 울먹임을 듣고 한숨을 내쉬더니 얘기했다.“지금 데리러 갈게.”고은영이 핸드폰을 툭 떨어뜨렸다. 희주가 죽었다니...이제 어찌해야 하는가...심호흡을 여러 번 했지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결국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다.간호인이 물을 떠 오다가 창백한 표정의 고은영을 보고 얼른 다가갔다.“사모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쉿.”간호인이 뭐라고 더 얘기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간호인은 그런 고은영을 보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왜 그러세요? 의사를 부를까요?”고은영은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괜찮아요, 그냥 혼자 내버려 두면 나아질 거예요.”고은영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고은지에게 걸려온 전화는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배준우가 알아 온 정보도 같은 내용이니...고은영은 이제 희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정말 믿게 되었다.그 작고 어린아이가 죽다니...간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러면 필요하실 때 부르세요. 전 먼저 물을 가져다드릴게요.”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고희주로 가득했다.왜 그때 고은지에게 그렇게 많은 일들을 비밀로 했었을까.만약 고은지에게 바로 알려주었다면 고은
나태현의 태도에 집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도련님,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나태현이 차갑게 되물었다.“그렇게까지?”“어르신이 그 아이를 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아시잖습니까.”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키우는지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다.집사의 그 한마디가 마치 나태현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았다.나태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집사는 들려오는 기계음 소리를 들으면서 굳은 표정으로 나태범을 쳐다보았다.“큰 도련님이 전화를 끊으셨습니다.”“아이는?”나태범이 조급해하면서 물었다.집사는 고개를 저었다.“희주 아가씨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나태범은 너무 걱정되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고 량천옥은 대체 왜 갑자기 미친 것일까.량천옥은 지금 단단히 미쳐있었다.“다시 전화 걸어!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해!”나태범이 조급해하면서 얘기했다.나태현을 해외에 두는 것이 마음 놓이지 않았다.량천옥은 그야말로 미친년이었다. 이성을 잃은 량천옥은 다 같이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를 무조건 죽일 것이다.배항준이 계속 량천옥을 어르고 달랜 덕분에 량천옥은 요즘 잠잠하게 지냈다.하지만 량천옥의 본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다.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윽고 집사가 다시 나태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태현은 받지 않았다.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은 없었다.“큰 도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십니다.”“그럼 그 주변 사람한테 전화해!”“네, 네!”집사는 나태현이 조급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당연한 일이었다.량천옥이 나태현을 정말 죽이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나태현이 낙하산을 쓸 줄 몰랐다면 아마 정말 죽었을 것이다.량천옥과 한곳에 있는 것도 하나의 위험이었다.집사는 나태현 주변 사람에게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나태범은 여전히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서 거실에서 이리저리 오갔다....고은영은 고은지 옆을 계속 지키
고은영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다.“언니...”“희주가 죽었대...”“아니, 희주는 살아있어! 날 믿어줘! 희주는 분명 살아있을 거야!”고은영이 계속해서 위로했다.하지만 고은영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나태현과 량천옥이 동시에 해외로 나갔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가 확실하니까 말이다....고은지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그리고 나씨 가문도 마찬가지였다.나태웅은 아직도 나씨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장선명과 안지영의 결혼 소식이 퍼져도, 안지영이 나태웅을 고소하겠다는 소식이 퍼져도 나태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리고 이 시점에 나태현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 소식을 들은 나태범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태현은 지금 어디 있어!”집사가 나태범을 부축해주었다.“도련님은 그저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괜찮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태범은 걱정이 되었다.“대체 왜 그렇게 된 거야. 량천옥의 짓이야?”나태범은 량천옥의 등장을 썩 반기지 않았다.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걱정하던 일이 하나둘 벌어지고 있었다.량천옥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량천옥 씨가 한 겁니다.”나태범은 그 소식을 듣고 표정이 바로 굳어버렸다.“이 사람이... 점점 담이 커져서 미친 거 아니야?”나태범이 고함을 질렀다.이윽고 그는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집사는 나태범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큰 도련님이 무슨 정보를 막아버려서 저희도 희주 아가씨의 소식을 모릅니다.”나태범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나태현이 아이를 해외로 빼돌린 후, 나태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소식도 들은 것이 없었다.아무리 그래도 나태현의 자식이니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그럼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그 아이가...”거기까지 얘기한 나태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