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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작가: 송언희
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싫다고 하면요?”

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쉽게 결정할 리 없고, 강요에 의한 결혼이라면 더더욱 사양이었다.

결혼은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비록 연기라고는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태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아까 대표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지?”

만약에 그녀가 거절한다면 강성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고은영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나태웅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 거절의 말을 다시 삼켜야 했다.

그녀가 말이 없자 나태웅이 물었다.

“가족관계증명서 발급해 놓은 거 있어?”

“언니한테 있어요.”

고은영이 말했다.

나태웅은 시간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오후에 반차를 주지. 가서 가져와.”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배준우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예전에 결혼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낭만을 뜻하는 장미와 촛불 이벤트, 그리고 쌍방 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가지는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걸 생략하고 가족관계증명서부터 내놓으라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협박의 의미가 명확했지만 고은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간은… 얼마나 될까요?”

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기간을 말하는 거지?”

“위장결혼이라면서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기간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건 대표님한테 물어봐야지.”

지금 당장은 그 여자의 계획을 파탄내려는 의도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배준우의 의사에 달렸다.

고은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배준우에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배준우는 창밖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고은영을 잠시 바라보았다.

넋이 나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태웅이 들어오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잘 얘기했어?”

나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이건 대표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야 했어요. 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잖아요.”

강성에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는 수두룩하지만 요구에 부합한 사람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배준우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은영이 싫은 티를 내는 게 여전히 불쾌했다.

“오후에 반차를 줘서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고 비서 위로 언니가 한 명 있는 것 같더군요.”

배준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위장결혼이고 굳이 절차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회사에서 나온 고은영은 가장 먼저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회사와 멀지 않은 공원에서 안지영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안지영이 숨을 헐떡이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햄버거 하나와 음료수를 건네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또 무슨 일인데?”

고은영은 햄버거를 입에 베어 물며 대답했다.

“나 결혼해!”

그 말을 들은 안지영이 먹던 음료수를 뿜으며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같이 30살 넘어서 결혼하자고 약속까지 한 친구가 자기를 버리고 결혼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랑 나 결혼해.”

“아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안지영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비록 나태웅이 위장결혼이고 언제까지나 비공개로 한다고 했지만 안지영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고은영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해서 안지영에게 설명했고 안지영은 충격에 빠졌다.

“그날 밤 범인이 너라는 거 아셔?”

안지영의 질문에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라. 하지만 지금부터 누가 물어보면 나라고 하래.”

안지영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준우가 그날 밤 같이 보낸 여자가 고은영인 걸 모르면서 결혼 상대로 지목했다니!

게다가 고은영에게 그날 밤 그 여자가 자기라고 말하라고 했다니!

왜? 누군가의 음모를 파탄내기 위해서?

안지영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너랑 배 대표님… 이만하면 정말 악연 아니니?”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정이 험악했다.

만약 배준우가 그날 밤 그 여자가 고은영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겠다고 해야지!”

안지영이 말했다.

고은영이 거절한다면 불똥이 자신에게까지 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싫으면 강성에서 꺼지래.”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나 포함해서 우리 집안까지 쫓겨날 지도 모른다고!”

어차피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거, 두 사람은 끝까지 진상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고은영이 말이 없자 안지영이 물었다.

“언니 집에 가서 가족관계증명서 가져와야지. 발급 받은거 있을거야.”

안지영은 간다는 말에 얼른 차키를 고은영에게 건넸다.

“자.”

하지만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차 안 가지고 갈 거야.”

언니와 형부는 강성 인근에 있는 소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포르쉐를 끌고 가기에는 시선을 너무 끌었다.

안지영도 그걸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지하철까지 태워줄게.”

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백화점 가서 선물도 좀 사려고.”

언니와 비교적 가까이 있었지만 고은영은 언니의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되도록 방문을 자제했다.

그리고 매번 방문할 때마다 시부모님 눈치 보지 말라고 조카 줄 선물을 가득 사갔다.

“그럼 백화점까지 태워줄게.”

안지영의 말에 고은영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지영아, 고마워. 넌 어쩜 이렇게 착해?”

그녀는 사춘기를 한창 겪던 시절에 안지영을 처음 만났고 첫눈에 마음이 맞아 친해지게 되었다.

그때 다른 친구들은 그녀가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따돌렸지만 집이 부자인 안지영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안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럼 저녁은 언니네서 먹고 오는 거야?”

“몰라. 늦을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 마.”

“알았어.”

그렇게 두 사람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오른 고은영은 언니인 고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은영의 씀씀이를 잘 아는 고은지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 선물은 사지 마. 옷 넘쳐나. 월급 받은 거로 너나 맛있는 거 사먹고 저축 좀 해.”

고은영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졌다.

언니는 굉장히 절약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매번 갈 때마다 사이즈가 작은 옷을 입은 조카가 안쓰러웠다.

언니는 아껴서 생활하다 보니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거의 옷을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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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그녀가 갈 때 선물을 사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언니의 시어머니 때문이었다.빈손으로 가면 두고두고 언니한테 불평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백화점이 가까워지자 언니를 다그쳤다.“많이 안 사. 빨리 사이즈나 말해줘. 샀다가 작아서 못 입으면 환불하기 더 귀찮아.”“은영아!”“빨리!”고은영의 태도는 단호했다.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사이즈를 알려주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안지영이 말했다.“언니도 강성 인근에 사시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 못 보지않아?”“가정도 있는데 내가 자꾸 가면 부담될까 봐.”언니 고은지를 통해 고은영은 느낀 바가 있었다. 결혼은 두 가족의 결합이지 남녀가 사랑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오늘 나태웅이 배준우와 결혼하라고 했을 때 거부감부터 들었던 것이다.지금 배준우가 성격도 고약하고 같이 일하기 힘들지만 어차피 직장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그와 결혼하게 되면 그녀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안지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친언니 만나러 가는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안지영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친구가 불쌍했다.유일하게 그녀를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언니는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친언니니까 언니가 입장 곤란해지는 건 싫어.”언니는 어렸을 적 고은영의 정신적 지주였다. 맛있는 거 생기면 항상 동생 먼저 챙기고 운 좋게 새 옷이 생겨도 먼저 동생에게 주었다.지금도 언니 집에 놀러 가면 어떻게든 맛있는 거 차려준다고 난리를 떠니 시어머니가 고깝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백화점에 도착하자 고은영은 같이 가주겠다는 안지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들어갔다. 안지영과 쇼핑하면 대부분 그녀가 계산하기 때문이었다.이미 안지영에게는 신세를 많이 져서 자꾸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안지영이 그녀에게 카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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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늦은 시간이었다.고은영은 언니한테 가족관계증명서를 달라고 한 뒤, 작별인사를 전했다.침대를 정리하던 고은지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벌써 가게? 자고 가지.”고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안 돼. 내일 또 출근이야.”“그런데 가족관계증명서는 왜 필요한데?”고은지가 물었다. 가족관계증명서가 꼭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회사에서 연말에 단체여행을 해외로 가기로 했는데 여권이랑 비자 만들어야 해.”언니를 걱정시키기 싫었기에 고은영은 거짓말을 택했다.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이고 위장결혼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족관계증명서를 꺼내 건넸다.“다음에 올게.”“그래.”고은영은 언니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고은지는 아이를 낳은 뒤로 전보다 군살이 많아졌다.고은영은 그런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심코 물었다.“언니는 혼인신고 할 때 어땠어?”순간 고은지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고은영은 순간 뭔가 알 것 같았다. 고은지와 조용수는 선 보고 만난 사이였다. 그것도 계모인 조보은의 소개를 받아 결혼했다.아이가 벌써 다섯 살인데 아직도 혼인신고를 안 했다는 게 놀라웠다.언니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있던 고은영은 다시 잠자는 조희주에게 시선을 돌렸다.“희주도 이제 유치원 다니니까 언니도 직장 찾아서 출근해.”그녀는 명문대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졸업한 언니가 이런 시골구석에서 농촌아낙으로 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솔직히 말하면 고은영은 언니가 조보은의 말만 듣고 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사실 조은지도 후회하고 있었다.시어머니는 정말 깐깐하고 맞춰주기 힘든 성격이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고은지가 말했다.“나도 출근하고 싶지. 그런데 애는 누가 픽업하겠어.”조희주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그녀도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부탁하려고 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그러면서 둘째를 또 낳으라고 재촉하는 상황이었다.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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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중도에 안지영에게 지원요청을 보냈는데 문자를 받은 안지영도 충격에 빠졌다.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지옥사자가 여자를 집에 데려가는 날이 오다니! 게다가 그곳은 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하원 별장이었다.게다가 더 충격적인 건 상대가 고은영이라는 사실이었다.배준우를 흠모하던 여자들이 알면 고은영의 사지를 찢으려 하지 않을까?안지영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답장을 보냈다.오늘 배준우가 먼저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했으니 이제 동거를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이상한 점은 이런 요구를 제기한 사람이 배준우라는 사실이었다.여자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는 일은 많지만 그가 먼저 여자에게 오라고 손짓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문자를 받은 고은영은 의리도 없다고 속으로 안지영을 욕했다.하지만 안지영도 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배준우를 따라 문앞까지 갔다.“저기… 저는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그녀는 포근한 자신의 기숙사가 그리웠다.배준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일 바로 구청에 혼인신고하러 갈 텐데 오늘 기숙사 가면 내일 내가 또 데리러 가야 하잖아.”“제가 알아서 갈게요!”고은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배준우의 인상이 점점 더 썩고 있었다.고은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만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신발장에 슬리퍼 있어.”말을 마친 그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고은영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에 여기 방문할 때는 항상 실내화를 따로 챙겨서 다녔었고 한 번도 허락 없이 그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신발장을 열자 가지런히 정돈된 남성용 슬리퍼가 보였다. 여자용은 없었다.그녀는 아무거나 집어서 신었다. 사이즈가 많이 컸지만 그냥 무시했다.배준우는 지금 그들을 지켜보는 자를 철저히 속이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만 고은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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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배준우는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 든 계약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고은영은 고개를 숙인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번엔 정말 끝나는 거 아니겠지? 배준우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고은영의 멘탈이 거의 나갈 때 쯤에 배준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그런 거 아니에요!”고은영이 다급히 말했다.일개 직원이 무슨 수로 상사를 협박한단 말인가.그녀는 단지 다시는 순결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배준우는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떠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하! 아니란 말이지?”‘재밌네. 저 머리에 밀당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콘돔은 다른 누가 가져다 놓았다는 건데…. 주변 청소를 좀 해야겠군!’하지만 겁쟁이 비서가 조건을 제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은영은 손에 땀을 쥐고 입을 꾹 다물었다.다행히 배준우는 더 이상 대화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는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서 자.”고은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잠자리는….”하지만 배준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겁나서 결국 하려던 말을 삼켜야 했다.“좌측 두 번째 방으로 가면 돼.”그 방은 손님용 방이었다.하지만 고은영은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탁자에 놓인 콘돔을 보면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다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쾅 하고 문을 닫았다.그리고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배준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왜 저러지? 내가 자기를 잡아먹기라도 해?’하지만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방에 들어온 고은영은 안지영의 문자를 확인했다.지난번 경험이 있어서 많이 조심스러워진 문자였다.[은영아?][그래, 나야!][지금 문자 가능해?]안지영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지난번에 고은영에게 문자를 잘못 보냈다가 배준우의 의심을 산 뒤로 모든 게 조심스러워졌다.게다가 고은영은 원래 멘탈이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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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밤, 안지영은 고은영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하루아침에 배준우와 같은 집에서 동거하게 된 고은영이 너무 안쓰러우면서도 걱정됐다.고은영이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잠든 뒤에야 그녀는 잔소리를 멈추었다.그날 밤, 고은영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 낯선 환경이라 그런지,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중간에 몇 번이나 깨고 잠들고를 반복했다.결국 그녀는 아침 여섯 시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조용히 주방으로 갔다.그리고 언니가 준 반찬을 데우고 쌀을 찾았는데 빵과 우유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배준우는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 고은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고은영은 그를 보자마자 바짝 긴장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대표님, 좋은 아침이에요.”배준우는 다가가서 온통 고기반찬인 식탁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아침부터 이렇게 기름지게 먹어?”“언니가 준 반찬이라 버리기 아까워서요.”고은영이 말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음식을 버리는 습관이 없었다.매번 고은지가 반찬을 싸주면 변질해서 버리게 될까 봐 최대한 빨리 먹었다.이번에도 고은지는 하루 세끼 먹을 정도의 양을 싸주었다.배준우가 계속 밥상을 바라보고 있자 고은영이 물었다.“대표님도 좀 드실래요?”배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계란후라이 반숙 하나랑 빵, 그리고 따뜻한 우유 좀 부탁해.”고은영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이런 건 해본 적 없는데.’하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유난히 짜증이 많아 보이는 배준우를 보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배준우는 씻으러 안으로 들어갔다.고은영은 최신형 전자제품들을 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하지만 배준우에게 사용법을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인터넷으로 검색했다.여차여차 전자제품 사용법은 익혔지만 평소에 요리를 별로 해본 적 없는 그녀였기에 서툴기만 했다.결국 배준우는 씻고 나오면서 주방에서 풍기는 탄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주방으로 가보니 고은영이 서투른 솜씨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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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어른들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진여옥을 보며 시댁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게 된 고은영이었다.하지만 배준우와 계약결혼을 하려면 어쨌든 부모님을 만나긴 해야 했다.재벌가 후계자들은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집안 어르신들은 그렇게 재촉한다고 들었다.평소에 회사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배준우도 집에서는 결혼 재촉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니 조금 놀라웠다.“그렇다고 볼 수 있지.”배준우가 말했다.그렇다고 보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 아닌가?고은영은 말없이 식사에 전념했다. 사실 그녀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어릴 때 계모가 서정우가 먹다 남긴 음식을 준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역겹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배준우가 먹던 걸 먹는데 그다지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계란후라이와 토스트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가?“요리 뭐 할 줄 알아?”거의 식사가 끝날 때쯤 배준우가 물었다.“라면이요.”“더 없어?”“칼국수, 감자조림, 감자튀김, 감자볶음….”배준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평소에 면식이랑 감자만 먹고 살았나?’사실 고은영이 면식이나 감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생활이 어렵다 보니 밀가루 음식이나 감자가 주식이었다.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만 먹고 자라서 할 줄 아는 것도 이게 전부였다.“그럼 내일 아침부터는 국수 먹자.”배준우가 말했다.고은영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비록 어제 같은 지붕 아래서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배준우를 대하기 어려운 건 여전했다.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함께 구청으로 갔다.혼인신고서에 사인하기 전 고은영은 배준우를 빤히 쳐다보았다.배준우가 물었다.“왜 그래?”“먼저 계약서라도 써야 하지 않나요?”“내가 사기라도 칠까 봐 그래?”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를 보자 배준우는 기분이 상했다.고은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아침부터 지금까지 배준우는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먼저 이야기해서 기분이 나쁜 걸까?구청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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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 비위가 상한듯한 말투에 고은영은 숨이 막혔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배준우는 신호등을 지나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차에서 내렸다.배준우는 놀란 토끼마냥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고 기분이 상했다.‘내가 잡아먹어? 왜 저렇게 나를 무서워하지?’회사로 돌아온 고은영은 곧장 나태웅의 사무실로 직행했다.계약서를 작성하자는 그녀의 말에 나태웅이 정색하며 그녀에게 말했다.“서면 계약서는 안 돼.”“네? 왜요?”고은영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면 계약서를 써야 계약이 유효한 거 아닌가?서면 계약서도 없이 나중에 논란이 생기면 어떻게 해명하려고?나태웅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자신의 검은색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계약서를 썼다가 유출이라도 되면 나중에 더 곤란해질 거야.”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계약서 유출로 생길 곤란한 상황을 대비해서 서면 계약서는 써줄 수 없어.”“두 사람 이혼할 때 대표님이 보수로 200억을 챙겨주실 거야.”200억?고은영은 순간 숨이 멎었다. 평생 만져보지 못한 금액이었다.그녀의 현재 월급은 세금 떼고 400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리고 부업으로 벌어들인 돈이 40만원 정도.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해야 저 금액을 벌 수 있을까?고은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그냥 계약서 쓰죠? 저 절대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요!”200억이라니!만약 배준우가 마음이 변해서 안 주기라도 하면?게다가 계약결혼이라면 당연히 기한이 있어야 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은영도 부자가 되는 것이다.고은영의 눈에 약간 욕망이 번뜩였다.나태웅이 정색하며 말했다.“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건 안 돼.”“정말 안 돼요?”“안 돼!”고은영은 울고 싶어졌다.서면 계약서도 없는 계약결혼이라니! 그것도 200억이 걸린 계약인데.배준우가 변심해서 그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26화

    고은영의 입가에 다시 경련이 일었다. 그런 곳은 도대체 언제 생긴 거지?하지만 200억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고은영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배준우가 물었다.“왜?”“그게… 조금전에 나 실장님은 서면 계약서를 못 만든다고 하시더라고요.”“이유는 나 실장이 설명했겠지?”“네.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일 끝나고 보수로 200억 준다는 게 사실이에요?”고은영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배준우 같은 부자 앞에서 돈 얘기를 하는 게 속물처럼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나태웅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는 그냥 비서실장이고 동영그룹에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배준우였다.금액이 금액인지라 고은영은 확실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배준우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금액이 적어서 그래?”“아, 그건 아니고요! 그냥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당연히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현실감이 떨어졌다.고은영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배준우는 겁 많은 고 비서가 발칙하게 그의 앞에서 돈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이 놀라웠다.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이야. 그리고 매달 따로 1000만 원씩 계좌에 입금할 거야.”고은영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진짜요?”“지금 내 말 의심해?”“아니요? 그럼 회사 월급은요?”고은영의 눈에서 희열이 차올랐다.배준우는 눈까지 반짝이는 그녀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월급은 정상적으로 지급하지!”매달 1000만 원 보너스에 월급도 정상 지급이면 매달 받는 돈이 1400만원이었다.더 이상 집대출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고은영은 거대한 금액 앞에 잠시 배준우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듯했다.배준우는 평소에 월급을 적게 준 것도 아닌데 돈 앞에서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하지만 만약 그가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알았더라면 아마 이런 그녀를 이해했을 것이다.고은영은

최신 챕터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54화

    나태웅은 이런 일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기를 원했다.나태웅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진이훈은 그런 나태웅을 말리고 싶었으나 차가운 나태웅의 모습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삼켜버렸다.몸 돌려 사무실을 떠나던 진이훈은 문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물었다.“정, 정말 보내실 겁니까?”“2만 송이!”“...”재차 확인하려 했으나 꽃만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진이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안지영이 왜 갑자기 그렇게 많은 국화를 보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태웅은 화가 많이 났다.퇴근 전, 2만 송이의 국화가 안지영의 하늘 그룹에 도착했다.너무 많아서 프런트와 홀에도 꽃이 가득했다.안지영은 부승호와 얘기를 나눈 후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문을 여는 순간 안지영의 앞에는 하얀색 파도가 일렁였다.안지영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부승호는 눈앞의 모습을 보고 멍해졌다.“이건...”“...”안지영은 화가 난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안열, 안열!”안지영은 이를 꽉 깨물고 안열을 불렀다.안열이 당장 달려왔다.“대표님.”“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안지영이 분노에 차서 물었다.이 재수 없는 것은 분명 하늘 그룹에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들여오지 않으면 하늘 그룹 외벽을 둘러쌀 겁니다.”그렇다면 밖에서 본 기자들이 재미난 기사들을 써 내려갈 것이다.“...”안지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나태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이 개 같은 놈이...’말하지 않아도 나태웅이 한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뭐해요! 지금 당장 돌려보내요. 천락 그룹 안에 가져갈 필요 없어요. 밖에 쌓아둬요!”안열은 하늘 그룹이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했지만 안지영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지금 당장 천락 그룹을 영안실로 만들어버릴 예상이었다.안지영은 화가 나서 충동적이었다.부승호는 이 꽃들을 천락 그룹에 돌려보낸다는 말을 듣고 머리가 아팠다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53화

    안지영은 그딴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몰라요. 당장 보내버려요!”만나서 또 다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런 비열하고 쪼잔한 방법이라도 쓰는 것이다.안지영은 나태웅에게 몇 배로 갚아줄 생각이었다.안열은 그런 안지영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시켜 꽃을 돌려보내겠습니다.”사무실의 국화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하지만 국화의 향은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안지영은 그것 때문에 아주 짜증이 났다.한 시간 후, 천락 그룹.나태웅의 사무실과 사무실 밖의 복도까지 국화꽃으로 가득 찼다.흰색과 노란색이 섞여 눈을 사로잡았다.사무실의 사람들은 놀라고 또 의아해했다. 이건 그야말로 사무실이 아니라 장례식장이었다.진이훈은 이 국화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대, 대표님...”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도 또 뭐를 말해야 할지 몰랐다.게다가 이 모든 것이 안지영이 보내온 것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뭐 하자는 거지? 저주인가?요즘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해서 저주라도 하는 건가?나태웅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었다.“안지영!”나태웅은 이를 꽉 깨물었다.진이훈은 그 목소리를 듣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안지영 씨한테 돌려보낼까요?”그 말을 꺼낸 후 진이훈은 후회하고 말았다.나태웅의 성격을 알면서도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 되었다.나태웅의 성격대로라면 정말 안지영에게 돌려보낼 수도 있다. 그것도 몇 배로 말이다.안지영 때문에 사무실은 장례식장이 되어버렸다. 나태웅이 정말 이성을 잃는다면 국화꽃으로 하늘 그룹을 묻어버릴지도 모른다.아니나 다를까 나태웅은 진이훈의 말을 듣고 바로 대답했다.“당연히 돌려보내야지. 만 송이 더 얹어서 가!”‘누구는 저주할 줄 모르나?’“...”진이훈은 본인의 뺨을 때려버리고 싶었다. 왜 굳이 그 질문을 했을까 후회했다.“그... 안 좋지 않을까요?”“뭐가!”“지금 안진섭 씨가 병원에 있는 시점에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52화

    지금 고은지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그래서 고은영의 도움도 마다하고 홀로서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고은지는 인생이 참으로 버겁게 느껴졌다.그리고 그 시각.안지영도 비슷한 기분이었다.점심에 장선명과 같이 밥을 먹고 돌아와 보니 사무실에 꽃이 가득했다.안지영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물었다.“이게 다 뭐예요?”“나태웅 대표님이 보낸 겁니다.”안열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안지영을 향해 대답했다.웃음을 참느라고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안지영은 테이블에 놓인 꽃을 보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어젯밤 나태웅은 킹덤 타운에 쳐들어와 싸움했다. 그리고 오늘 갑자기 꽃을 선물하다니.게다가 하얀 국화꽃이었다.‘이제는 내가 죽기를 저주하는 건가?’“왜 갖고 들어오게 한 거예요!”안지영이 겨우 화를 참고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왜 나태웅 같은 인간쓰레기와 엮이게 된 건지.전에 동영 그룹에 있을 때, 나태웅은 배준우의 믿을만한 오른팔이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나태웅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일을 수도 없이 그르쳤을 것만 같았다.안열은 안지영이 화내는 모습을 보고 마른기침을 하고 대답했다.“꽃집에서 직접 배송한 겁니다.”“앞으로 이런 재수 없는 일은 쳐내도록 해요.”“네. 알겠습니다.”안열은 계속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웃음을 참느라 안면근육이 뻐근할 정도였다.안지영은 그런 안열을 보면서 화가 나서 얘기했다.“웃지 마요! 이게 웃겨요?”안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아마 장미를 선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장미랑 국화도 구분하지 못할 사람 같아요?”눈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장미와 국화 정도는 쉽게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안열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네요.”나태웅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여자한테 국화를 보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사실 안지영은 나태웅이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51화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찌하겠는가.량천옥은 하마터면 고은지를 죽일 뻔했고 고희주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그러니...“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뭘 할지 잘 알 거예요.”고은영이 보충해서 얘기했다.량천옥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모든 대가는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량천옥은 잘 알고 있었다.고은지가 나태현과 손을 잡고 량천옥을 공격할 것이라는 걸....고은지는 천락 그룹으로 돌아왔다. 감정을 추스른 후 다시 본인의 위치로 돌아가 앉았다.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고은지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었다. 이지훈은 돌아온 고은지를 보고 물었다.“오셨군요.”“네.”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나 대표님께서 사무실로 부르셨습니다.”컵을 들었던 고은지는 이지훈의 말을 듣고 손에 힘을 주게 되었다.기운 또한 더욱 차가워졌다.이윽고 정신을 차린 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그래요.”“얼른 가요. 한참 기다리셨습니다.”이지훈이 덧붙였다.고은지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훈을 쳐다보았다. 이제 가겠다는 눈빛을 보내자 이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지는 아무것도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이지훈은 고은지 주변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고은지는 대표 사무실로 와서 노크를 했다.안에서는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고은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나태현은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날카로운 나태현의 옆태는 아주 차가워 보였다.대표 사무실에서는 차가운 기운과 하얀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고은지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냄새를 뺐다.뒤에 있는 나태현이 물었다.“공항에 간 거야?”“네.”고은지는 담담하게 한 글자로 대답했다.“나랑 오래 일 했으면서 왜 아직도 무의미한 일을 하려고 그래.”고은지는 창문을 닫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손톱에 살갗을 파고들 정도였다.고은지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 얘기했다.“아이의 일로 저를 협박하지 마셨어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50화

    낯빛이 창백해진 고은지를 보면서, 고은영은 고은지가 얼마나 힘든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그래도...”“은영아, 너랑 희주는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희주는 그래도 친아빠한테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너도 꼭 아프지 말아야 해. 알았지?”중요한 사람이라는 말에 고은영은 약간 가슴이 아팠다.량천옥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다가 고은지의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고은영과 고희주는 고은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고은지가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도 사랑하지 않지. 저 사람처럼 말이야.”그렇게 말하면서 고은지는 량천옥을 쳐다보았다.“...”“...”그 순간 호흡마저 무거워졌다.량천옥은 고은지를 쳐다보면서 바르르 떨었다.고은영도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언니...”량천옥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량천옥은 고은지가 본인의 신분을 모르길 바랐다. 고은지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두려웠다.그리고 이 순간, 량천옥은 고은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면 량천옥은 고은지의 무슨 사람인가.혈연관계가 있는 사람? 엄마나 어머니 같은 이름은 량천옥에게 어울리지 않았다.량천옥 또한 본인이 자격 미달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언니...”고은영이 굳은 채로 입을 열었다.고은영은 고은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맞지?”고은영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고은지의 차갑고 증오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 대답이 목에 턱 막힌 기분이었다.결국 고개만 끄덕였다.고은지는 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그 웃음에는 비웃음과 풍자가 가득했다.“...”량천옥은 고은지를 향해 걸어가려고 했지만 두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49화

    량천옥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이제 고은지에게는 온화한 모습은 사라지고 상대방을 압도하는 차가운 기운만이 남아있었다. 온화한 고은지의 모습을 떠올린 고은영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마음이 아팠다.“언니.”고은영이 앞으로 다가가 고은지의 손을 꼭 잡았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그렇게 말하는 고은지에게서는 차가움만이 느껴졌다.그 말투는 마치 날카로운 침처럼 량천옥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너무 아파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량천옥은 겨우 참느라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서 있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먼저 희주부터 찾자.”고희주가 이 공항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고은영의 말에 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고은영이 얼른 고은지를 따라갔다.량천옥은 제 자리에 서서 고은영과 고은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량천옥은 절망스러움을 느꼈다.결국 모든 것에는 인과응보가 있는 법이다. 본인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다.량천옥은 돌아선 후 고객센터 쪽을 찾아갔다.그들은 빠른 속도로 고희주가 국내에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결국 그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나태현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진작 전용기를 이용해 고희주를 데려갔던 것이다.고은지는 온몸에 맥이 풀려 공항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고은영이 고은지 앞에 쪼그려 앉았다.“언니...”“왜 나한테 일찍 알려주지 않은 거야?”고은지는 고은영을 보면서 겨우 물었다.차가운 시선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만약 진작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태현이 아이를 데려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때는 많은 일들을 확인해야 했었어, 그리고 나태현 씨도...”지신혜와 약혼했으니 말이다.고은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처음에는 고은지의 건강 때문에, 후에는 나태현의 약혼 때문에.결국 따지고 보면 고은지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48화

    량천옥을 만날 것인지 물으려던 이지훈은 나태현의 태도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지훈이 나가고 사무실에는 나태현만이 남았다. 나태현이 내뿜던 차가운 기운은 어느새 무거운 슬픔으로 바뀌어있었다....고은지는 천락그룹에서 나와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그리고 동시에 고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은영은 바로 그 전화를 받았다.“언니.”“은영아, 마지막으로 나 한 번만 도와줘.”고은영은 마침 량천옥과 같이 있었는데 고은지가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언니, 난 언니가 도와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도와줄 거야. 왜 마지막이라고 그래?”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은 고은영은 마음이 아팠다.고은지가 자꾸만 고은영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것 같아서였다.아무리 홀로서기를 한다고 해도 이렇게 급할 것 없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 고은지가 입을 열었다.“배준우의 사람을 시켜서 공항 이륙을 연착시켜 줘. 가능해?”고은지는 배준우가 강성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것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두 시간이면 돼!”고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은지가 덧붙였다.“그래.”“빨리. 급해. 희주가 공항에 있을 수도 있어.”“뭐?”놀란 고은영이 좀 큰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맞은편에 앉은 량천옥을 쳐다보았다. 량천옥은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고은지의 말을 들었다.고희주가 공항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량천옥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먼저 준우 씨한테 연락해 볼게.”말을 마친 고은영이 전화를 끊었다.‘희주가 공항에 있다고? 나태현 씨가 데려간 거 아니었나? 도대체 뭘 하려고? 해외로 보내는 거지?’거기까지 생각한 고은영은 잠시도 쉴 수 없었다. 얼른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여보, 공항 쪽에 연락해서 모든 비행기를 두 시간 정도 연착시켜 줄 수 있어요?”“무슨 일인데?”“나태현 씨가 희주를 해외로 보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누가 봐도 나태현이 복수를 위해 이런다는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47화

    친모라는 두 글자에 고은지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느꼈다.하지만 더욱 메스꺼운 것은 나태현이 고은지에게 한 모든 행동들이었다.고은지는 핸드폰을 나태현에게 주면서 말했다.“희주를 란완 리조트로 돌려보내요. 거래는 아직 유효해요.”고은지는 아이와 량천옥 사이에서 자기 아이를 선택했다. 량천옥이 자기 친모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량천옥을 떠올리면 남는 것은 증오뿐이었다.나태현은 고개를 들어 고은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그리고 바로 시선을 내렸다.“너도 알잖아. 선택지가 없다는 걸.”“아이가 없어도 난 당신이랑 계속 거래를 할 거예요.”현재 고은지는 량천옥을 증오할 뿐만이 아니라 나태현도 증오하고 있었다.고은영을 만나고 온 후 고은지는 나태현을 향한 증오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고은지는 여전히 이성적이고 차가운 사람이었다.그래서 나태현과 담담하게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실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말을 마친 나태현은 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꺼버렸다. 불꽃이 물에 닿는 그 순간 불꽃이 꺼지면서 치익 소리가 났다. 나태현의 차가운 말투를 들으면서 고은지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눈에 넘실대는 증오를 감췄다.“희주, 깨어날 수 있는 거죠?”“당연하지.”“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믿겠어요?”고은지가 차갑게 물었다.“희주는 내 딸이야. 내가 내 딸을 해칠 것 같아?”그녀가 병원에 있을 때부터 나태현은 희주가 자기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하지만...‘됐어!’고은지는 나태현과 연관된 일에 많은 생각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그저 나태현의 차가운 말투를 들으면서 나태현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태현과 량천옥의 복수에 고은지를 끌어오다니.“그러면 언제 만나게 해줄 거예요?”고은지가 바로 물었다.나태현이 고희주를 란완 리조트에서 데려간 그 순간부터, 고은지는 앞으로 쉽게 고희주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

  •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246화

    고은지는 아주 빠르게 나태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지훈은 좋지 않은 고은지의 표정을 보고 얼른 고은지의 앞을 막아 나섰다.“나 대표님은 곧 회의 때문에 바쁘십니다. 이만하시죠.”이지훈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고은지의 표정만 보고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지훈은 고은지가 진정한 후 다시 찾아왔으면 했다.하지만 고은지는 그런 이지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지훈을 피해 바로 나태현의 사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제가 분명...”나태현은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시선을 들었다.고은지를 마주한 나태현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뭐 하자는 거지? 아프더니 기본적인 사회생활도 다 까먹은 건가?”나태현이 차갑게 얘기했다.이지훈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졸였다.고은지는 나태현의 차가운 말에 동요하지 않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나태현은 그런 고은지를 보면서 말했다.“지금은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단계일 텐데. 얼른 돌아가지 못해?”“날 이용한 거예요?”고은지가 바로 얘기했다.여기까지 오는 길, 고은지는 엘리베이터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고은영이 왜 말을 하다가 만 것인지, 나태현이 왜 자기를 찾아온 것인지.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대충 알 것 같았다.고은지는 총명한 사람이니 그 짧은 시간 안에 사건의 자초지종을 다 알 수 있었다. 나태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서류를 내려놓고는 담뱃갑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이고 차갑게 물었다.“이제야 안 거야?”“나태현!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고은지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찾아온 사람이다.나태현은 그런 고은지의 말을 들으면서 고은지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구나 짐작하게 되었다.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담배 연기를 토해낸 나태현이 물었다.“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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