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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싫다고 하면요?”

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쉽게 결정할 리 없고, 강요에 의한 결혼이라면 더더욱 사양이었다.

결혼은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비록 연기라고는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태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아까 대표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지?”

만약에 그녀가 거절한다면 강성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고은영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나태웅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 거절의 말을 다시 삼켜야 했다.

그녀가 말이 없자 나태웅이 물었다.

“가족관계증명서 발급해 놓은 거 있어?”

“언니한테 있어요.”

고은영이 말했다.

나태웅은 시간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오후에 반차를 주지. 가서 가져와.”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배준우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예전에 결혼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낭만을 뜻하는 장미와 촛불 이벤트, 그리고 쌍방 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가지는 등등.

하지만 이 모든 걸 생략하고 가족관계증명서부터 내놓으라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협박의 의미가 명확했지만 고은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간은… 얼마나 될까요?”

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기간을 말하는 거지?”

“위장결혼이라면서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기간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건 대표님한테 물어봐야지.”

지금 당장은 그 여자의 계획을 파탄내려는 의도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배준우의 의사에 달렸다.

고은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배준우에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배준우는 창밖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고은영을 잠시 바라보았다.

넋이 나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태웅이 들어오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잘 얘기했어?”

나태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이건 대표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야 했어요. 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잖아요.”

강성에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는 수두룩하지만 요구에 부합한 사람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배준우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은영이 싫은 티를 내는 게 여전히 불쾌했다.

“오후에 반차를 줘서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고 비서 위로 언니가 한 명 있는 것 같더군요.”

배준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위장결혼이고 굳이 절차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회사에서 나온 고은영은 가장 먼저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회사와 멀지 않은 공원에서 안지영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안지영이 숨을 헐떡이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햄버거 하나와 음료수를 건네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또 무슨 일인데?”

고은영은 햄버거를 입에 베어 물며 대답했다.

“나 결혼해!”

그 말을 들은 안지영이 먹던 음료수를 뿜으며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같이 30살 넘어서 결혼하자고 약속까지 한 친구가 자기를 버리고 결혼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랑 나 결혼해.”

“아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안지영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비록 나태웅이 위장결혼이고 언제까지나 비공개로 한다고 했지만 안지영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고은영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해서 안지영에게 설명했고 안지영은 충격에 빠졌다.

“그날 밤 범인이 너라는 거 아셔?”

안지영의 질문에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몰라. 하지만 지금부터 누가 물어보면 나라고 하래.”

안지영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준우가 그날 밤 같이 보낸 여자가 고은영인 걸 모르면서 결혼 상대로 지목했다니!

게다가 고은영에게 그날 밤 그 여자가 자기라고 말하라고 했다니!

왜? 누군가의 음모를 파탄내기 위해서?

안지영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너랑 배 대표님… 이만하면 정말 악연 아니니?”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정이 험악했다.

만약 배준우가 그날 밤 그 여자가 고은영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겠다고 해야지!”

안지영이 말했다.

고은영이 거절한다면 불똥이 자신에게까지 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싫으면 강성에서 꺼지래.”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나 포함해서 우리 집안까지 쫓겨날 지도 모른다고!”

어차피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거, 두 사람은 끝까지 진상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고은영이 말이 없자 안지영이 물었다.

“언니 집에 가서 가족관계증명서 가져와야지. 발급 받은거 있을거야.”

안지영은 간다는 말에 얼른 차키를 고은영에게 건넸다.

“자.”

하지만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차 안 가지고 갈 거야.”

언니와 형부는 강성 인근에 있는 소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포르쉐를 끌고 가기에는 시선을 너무 끌었다.

안지영도 그걸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지하철까지 태워줄게.”

고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백화점 가서 선물도 좀 사려고.”

언니와 비교적 가까이 있었지만 고은영은 언니의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되도록 방문을 자제했다.

그리고 매번 방문할 때마다 시부모님 눈치 보지 말라고 조카 줄 선물을 가득 사갔다.

“그럼 백화점까지 태워줄게.”

안지영의 말에 고은영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지영아, 고마워. 넌 어쩜 이렇게 착해?”

그녀는 사춘기를 한창 겪던 시절에 안지영을 처음 만났고 첫눈에 마음이 맞아 친해지게 되었다.

그때 다른 친구들은 그녀가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따돌렸지만 집이 부자인 안지영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안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럼 저녁은 언니네서 먹고 오는 거야?”

“몰라. 늦을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 마.”

“알았어.”

그렇게 두 사람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오른 고은영은 언니인 고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은영의 씀씀이를 잘 아는 고은지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 선물은 사지 마. 옷 넘쳐나. 월급 받은 거로 너나 맛있는 거 사먹고 저축 좀 해.”

고은영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졌다.

언니는 굉장히 절약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매번 갈 때마다 사이즈가 작은 옷을 입은 조카가 안쓰러웠다.

언니는 아껴서 생활하다 보니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거의 옷을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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