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비위가 상한듯한 말투에 고은영은 숨이 막혔다.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배준우는 신호등을 지나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차에서 내렸다.배준우는 놀란 토끼마냥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고 기분이 상했다.‘내가 잡아먹어? 왜 저렇게 나를 무서워하지?’회사로 돌아온 고은영은 곧장 나태웅의 사무실로 직행했다.계약서를 작성하자는 그녀의 말에 나태웅이 정색하며 그녀에게 말했다.“서면 계약서는 안 돼.”“네? 왜요?”고은영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면 계약서를 써야 계약이 유효한 거 아닌가?서면 계약서도 없이 나중에 논란이 생기면 어떻게 해명하려고?나태웅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자신의 검은색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계약서를 썼다가 유출이라도 되면 나중에 더 곤란해질 거야.”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계약서 유출로 생길 곤란한 상황을 대비해서 서면 계약서는 써줄 수 없어.”“두 사람 이혼할 때 대표님이 보수로 200억을 챙겨주실 거야.”200억?고은영은 순간 숨이 멎었다. 평생 만져보지 못한 금액이었다.그녀의 현재 월급은 세금 떼고 400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리고 부업으로 벌어들인 돈이 40만원 정도.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해야 저 금액을 벌 수 있을까?고은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그냥 계약서 쓰죠? 저 절대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요!”200억이라니!만약 배준우가 마음이 변해서 안 주기라도 하면?게다가 계약결혼이라면 당연히 기한이 있어야 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은영도 부자가 되는 것이다.고은영의 눈에 약간 욕망이 번뜩였다.나태웅이 정색하며 말했다.“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건 안 돼.”“정말 안 돼요?”“안 돼!”고은영은 울고 싶어졌다.서면 계약서도 없는 계약결혼이라니! 그것도 200억이 걸린 계약인데.배준우가 변심해서 그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없었다.나태웅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고은영의 입가에 다시 경련이 일었다. 그런 곳은 도대체 언제 생긴 거지?하지만 200억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고은영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배준우가 물었다.“왜?”“그게… 조금전에 나 실장님은 서면 계약서를 못 만든다고 하시더라고요.”“이유는 나 실장이 설명했겠지?”“네. 그냥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일 끝나고 보수로 200억 준다는 게 사실이에요?”고은영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배준우 같은 부자 앞에서 돈 얘기를 하는 게 속물처럼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나태웅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는 그냥 비서실장이고 동영그룹에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배준우였다.금액이 금액인지라 고은영은 확실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배준우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금액이 적어서 그래?”“아, 그건 아니고요! 그냥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당연히 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현실감이 떨어졌다.고은영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배준우는 겁 많은 고 비서가 발칙하게 그의 앞에서 돈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이 놀라웠다.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이야. 그리고 매달 따로 1000만 원씩 계좌에 입금할 거야.”고은영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진짜요?”“지금 내 말 의심해?”“아니요? 그럼 회사 월급은요?”고은영의 눈에서 희열이 차올랐다.배준우는 눈까지 반짝이는 그녀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월급은 정상적으로 지급하지!”매달 1000만 원 보너스에 월급도 정상 지급이면 매달 받는 돈이 1400만원이었다.더 이상 집대출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고은영은 거대한 금액 앞에 잠시 배준우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듯했다.배준우는 평소에 월급을 적게 준 것도 아닌데 돈 앞에서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하지만 만약 그가 그녀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알았더라면 아마 이런 그녀를 이해했을 것이다.고은영은
어젯밤에도 단단히 당부했지만 사실상 안지영은 어제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배준우의 행보로 보아 그들의 계약결혼은 동거를 전제로 하는 게 분명했다.순진해 빠진 고은영이 언제 자신들의 비밀을 전부 털어놓을지 안심할 수 없었다.“몰라. 하지만 그 뒤로 더 이상 그날 밤 얘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어. 아마 괜찮을 거야.”“만약에 대표님이 물어보면?”안지영이 씩씩거리며 되물었다.고은영은 멍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내가 어제 말한 거 다 잊었어?”“뭐를?”“내가 어제 말했잖아. 그날 밤 얘기가 나오면 최대한 빨리 화제를 돌리라고!”그 얘기를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했다.고은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 주의할게.”“바로 당장 화제를 돌릴 자신 있어?”“아니 없어.”고은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배준우 같은 능구렁이 앞에서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낌새를 보인다면 바로 눈치챌지도 모른다.안지영의 불안감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예전에는 낮에만 배준우를 상대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밤에도 그와 같은 공간에서 보내야 한다.밤에는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해서 가장 실수하기 좋은 시간이었다.안지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가문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구나!”두 사람이 이미 결혼한 이상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혹시 들통나더라도 절대 너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할게.”그게 네 맘대로 되겠어?배준우는 끝까지 사건의 경과를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고은영을 2년이나 옆에서 지켜봤으니 그녀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는 그가 가장 잘 알 것이다.영상 파괴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한다면 공범이 있다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고은영은 대범하게 그런 짓을 벌일만한 능력이 없었으니까.안지영은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나왔다.결국 그녀는 또 한바탕 고은영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기분이 좋았던 고은영은 그녀가 뭐라고 하든 흔쾌히 받아들였다.안지영이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물었다.“너 오늘
고은영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차분하게 말했다.“김 비서님이 직접 가셔야겠는데요?”같은 비서실이라도 각자 맡은 업무는 스스로 처리하는 게 원칙이었다.그리고 그녀와 김연화는 업무 상 접점이 없었다.“난 이따가 배 대표님이 회의 들어가실 때 같이 들어가기로 했어요. 시급한 사안이에요.”옆자리에 앉은 민초희가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그건 제가 갈게요.”배준우가 회의 들어갈 때 항상 고은영이 같이 들어갔는데 김연화가 언제 대표와 회의를 같이 들어갔다고 저럴까?고은영은 배준우의 사무실에 시선을 돌렸지만 블라인드 커튼이 쳐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김연화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왜요? 내 말 못 믿겠으면 대표님한테 가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고은영은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알았어요. 제가 갈게요.”평소에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비서실장 자리가 난다는 얘기가 돌아서 신경전이 벌써 시작된 것 같았다.김연화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떴다.민초희가 다가와서 말했다.“은영 씨는 대표님 직속 비서잖아요. 김 비서는 뭘 믿고 은영 씨한테 명령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저 주세요.”“제가 갈게요.”고은영이 웃으며 말했다.배준우가 30분 뒤 회의에 김연화를 데리고 들어가기로 했다면 벌써 비서실장으로 그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배준우는 예전에 그녀에게 실력을 좀 더 늘려야겠다는 식의 말을 했으니 고은영은 자신은 승진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니 나태웅의 뒤를 잇는 사람은 김연화가 될 것이다.민초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빨리 갔다와요.”대표실 직속 비서가 자리를 비우면 배준우가 또 성질을 부릴지도 모른다.고은영은 일단 명성에 서류를 전달한 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식자재를 구매하기로 했다.그런데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배준우에게서 내선전화가 걸려왔고 민초희가 받았다.고은영의 목소리가 아닌 것을 눈치챈 배준우가 굳은 어투로 물었다.“고 비서는?”“김 비서가 고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달라졌다. 나태웅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대표님이 가장 잘 아시겠죠. 대표님이 남편이시잖아요!”보스의 사모님이나 되는 사람을 누가 감히 함부로 부릴 수 있을까?그런데 아침에 혼인신고까지 하고 온 사람이 어딜 사라진 거지?배준우가 담배를 꺼내며 차갑게 말했다.“명성에 서류 전달하러 갔어!”그 말을 들은 나태웅은 가슴이 철렁했다.“고 비서가 명성에 갔다고?”명성 지사에는 변태로 소문난 장 사장이 있어 김연화도 매번 거기 가기 싫어했다.고은영은 장 사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텐데 혹시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배준우가 음침한 얼굴로 말했다.“명성 지사 담당이 누구지?”나태웅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김연화 이 멍청한….’그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지금 처리할게.”말을 마친 그는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서며 고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은영은 가는 길에 음료수 하나 구매하려고 슈퍼에 가다 나태웅의 전화를 받았다.“고 비서 지금 어디야?”“아직 버스 타기 전이예요. 30분 정도 뒤에 명성에 도착할 것 같아요.”나태웅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안 갔으면 됐어. 당장 회사로 복귀해!”“네?”“당장 복귀해. 대표님이 찾으셔!”고은영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회의에는 김연화가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었나? 또 무슨 일로 찾으시지?불만이 많았지만 결국 그녀는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고은영은 곧장 회사로 돌아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민초희가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김연화는 배준우가 회의 들어가는 시간에 맞춰서 비서실로 복귀했다.서류를 들고 있는 고은영을 보자 그녀는 굳은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아직도 안 갔어요?”“그게….”“일 지체되면 고 비서가 책임질 거예요?”김연화는 시간을 확인하며 짜증을 부렸다.소리를 들은 나태웅이 음침한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왔다.“김연화 씨.”나태웅의 목소리를 들은 김연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은 표정
나태웅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김연화를 바라보며 말했다.“김 비서는 다 좋은데 성격이 너무 급한 게 문제야!”조금만 차분하게 일을 처리했더라면 오늘 같은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조급해진 김연화는 계속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나태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정유비는 한창 혼나는 김연화를 보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훈계를 마친 뒤, 나태웅이 말했다.“앞으로 고은영 씨는 대표님이 직접 지시한 업무만 진행할 거야. 다른 업무는 자네들이 알아서 분담해!”알아서 분담하라니?그 말은, 그들이 고은영이 원래 하던 몫까지 완성해야 한다는 의미였다.“정 비서, 따라와!”나태웅은 그 말을 끝으로 차갑게 등을 돌렸다.빨리 발견해서 다행이지 만약 고은영이 명성에서 나쁜 일을 당했다면 배준우는 비서실 전체를 상대로 칼춤을 출 게 분명했다.나태웅은 배준우가 시골 처녀 고은영을 왜 이렇게까지 감싸고 도는지 가끔 이해를 할 수 없었다.신원조사도 해봤지만 두 사람은 과거에 접점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정유비는 김연화의 옆을 지나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김연화는 화가 울컥 치밀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정유비가 나태웅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김연화는 민초희한테 화풀이했다.“뭘 그렇게 봐요?”민초희는 상대하기 싫었기에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할 일을 했다.김연화는 정유비한테 밀렸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명성 서류를 다시 민초희한테 던지며 말했다.“민 비서가 이거 전달해요.”민초희는 냉랭한 말투로 대꾸했다.“나 실장님 말씀하신 거 못 들었어요? 고 비서님 업무 대신해야 해서 시간 없거든요? 김 비서님 일은 김 비서님이 직접 하세요!”“이게….”김연화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동영그룹에서 5년이나 일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실력이 워낙 출중했기에 다른 부서 상사들도 그녀만 떠받들었다.민초희가 말했다.“비서실에서 비서실장 후임을 뽑겠다고 말했지 김 비서님이라고 꼭 집어 말한 적은 없잖아요!”하지만
배 대표님 맞아?억대의 프로젝트 회의를 하고 있는중에, 지금 여기서 사생활에 대해 묻고 있다고!?민초희와 재무 경리는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눈에 스치는 경악을 보게 됐다!두 사람은 배준우가 크게 화를 내며 고은영을 멍청하다고 욕할 줄 알았다.그런데, 순간 배준우의 말투에 부드러움이 추가됐다.“다 사면 들 수 있어?”민초희.“…….”재무 관리자.“…….”두 사람은 심장이 움츠러들고 곧이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저 사람이 정말 고비서 맞아?별거 아닌…… 비서!?고은영은 자신이 들 수 있다고 하더니 부엌에 아무것도 없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배준우는 그녀에게 일단 조금만 사라고 말했다. 그녀가 다 들지 못할 까 봐 걱정하는 둣했다.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앉아 전화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해 모두 배준우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추측하고 있었다.배 대표의 이런 부드러운 모습을 보게 되다니!방금 전화 너머의 대상을 향한 배준우의 말투는 이전에 모두가 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말투였다.민초희과 재무 매니저는 특히 더욱 큰 충격에 빠졌다. 이전에 배준우는 고은영에게 엄청 사납게 굴어 고은영도 그를 무서워했다…….그러나 이 통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들이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아무튼 사장님과 비서 그런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배준우가 전화를 끊자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방금 전의 부드러움은 착각인 듯 그의 무거운 목소리만 들렸다.“계속해.”모든 사람들이 순간 정신을 차리고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고은영은 자신이 방금 도대체 무슨 놀라운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녀는 통 밀가루 한 봉지, 국수, 양념 몇 개를 사고, 야채 코너에 가서 녹색 야채를 골라서 샀고, 양념은 모두 소포장된 것으로 골랐다.비록 그녀가 고른 것은 작은 포장들 이었지만, 양이 많아서 계산할 때는 한 봉지 가득이었다.생각보다 들기에 무거웠다!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던 그녀는
배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국수야?”“야채 국수예요.”고은영이 진지하게 말했다.배준우도 야채 국수인 걸 눈치챘다. 면과 녹색 잎 야채가 모두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름도 없는 것 같았다. 예상이 맞다면 물국수인 것 같은데?배준우는 앉아서 젓가락을 들고 뒤적거렸으나, 역시 다진 고기조차 없는 간단한 물국수였다.한 입 맛본 배준우는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고은영은 그의 표정을 보고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맛, 맛이 없나요?”“소금 말고는 아무맛도 안 나네. ”배준우는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아침에 그녀는 여러 가지 면을 만들 줄 안다고 해서 한 번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배준우는 앞으로 고은영의 일에 대해 너무 궁금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은영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저희는 예전에 모두 이렇게 만들었어요!”그녀가 밥을 짓는 것을 접하는 유일한 시간, 즉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였다. 할머니는 이렇게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줄곧 말하셨다. 그래서 면을 만들 때마다 소금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그녀는 요 몇 년 동안 모두 이렇게 먹어와서 이 맛에 익숙해졌지만, 배준우는 처음이었다.이 맛은 그에게 있어서 보통 맛없는 것이 아니었다.“휴…….”결국 한숨을 쉬며 일어나 국수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고은영은 따라가야 할지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그녀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해야 맞을지 몰랐다.곧 주방에서 '타닥타닥’ 기름이 튀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의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가 퍼졌다.배준우가 다시 나왔을 때, 그 하얀 국수에 토마토 계란 볶음이 추가되었었고, 다진 고기도 볶았져 있었다. 고은영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배준우가 낮게 말했다.“네 건 주방에 있어.”그녀 것도 있다고?그녀는 아까 자신이 먹을 것을 만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배 대표와 함께 식사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언니가 싸준 음
전화를 끊은 진윤이 고은영을 보면서 물었다.“지금은 좀 속이 풀렸어?”“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응.”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영은 약간 감동하긴 했지만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고은영의 곁에 무조건적인 자기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도움을 거절할 것이었지만 이번 일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지금 해외에서 난리가 났어. 이 시점에 나태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도 좋지.”량천옥도 나쁜 사람이긴 하지만 량천옥이 나태현과 싸우고 있는 건 고은지 때문이었다.그러니 지금 진윤이나 배준우가 나태현의 시선을 자꾸만 국내로 돌리게 해서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건 량천옥에게 좋은 일이다.“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진윤이 고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고은영은 진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나태현은 해외에 있고, 나태웅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이제는 나태범이 움직일 것이다. 나태범 세대가 싸운다면 젊은 세대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고은영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나씨 가문보다 더욱 위태로운 건 우리 언니니까요.”희주가 죽었다.그걸 떠올리면 고은영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은지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나씨 가문 사람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갈라내고 싶었다.진윤은 고은영 눈에 비친 슬픔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직 희주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눈으로 본 것도 거짓일 수 있는데, 귀로 들은 것은 오죽하겠냐는 말이었다.진윤은 제삼자로서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딱 짚어 말할 수 없었기에 말을 아끼고 있었다.“그 소식이 가짜였으면 좋겠어요.”고은영은 고희주를 불쌍하게 여겼다. 조씨 가문 사람들은 희주가 조영수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
‘아까 왜 돈이 없다는 얘기를 해서는...’진윤은 고은영의 손을 잡고 쇼핑을 계속했다.점심쯤이 되자 진윤은 지친 고은영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가서 식사했다.테이블 앞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보면서 고은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요?”“안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진윤이 대답했다.진윤은 진정훈이 왜 그때 그렇게 심하게 날뛰었는지 이해가 갔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조사한 사람이다.그래서 고은영의 아픔을 알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해 온 세상의 좋은 것들을 고은영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그러니 고은영의 몫이 진유경에게로 넘어간 걸 알고 미쳐버린 것이다.지금의 진윤도 마찬가지였다.“이거 먹어.”진윤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썰어서 고은영의 그릇에 담아주었다.“고마워요, 오빠도 얼른 먹어요.”“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 우리 아내가 또 요리를 잘하거든.”“그런데 지금 임신한 거 아니에요? 저까지 가면 민폐죠.”“그래도 요즘 매일 요리하고 있어.”“네?”고은영이 깜짝 놀랐다.“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은영은 임신했을 때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원하는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하긴.게다가 임산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잘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윤설이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직접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쁜 건 아니었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그럼 최대한 덜 힘들게 옆에서 보살펴줘요.”진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그건 나태현이 건 전화였다.“나태현이야.”“계약 해지 때문에 전화한 거겠죠?”고은영이 물었다.아까 차에서 진윤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나씨 가문과 연관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하기로 했다. 배준우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나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진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형, 지금
진호영이 사람들 앞에서 진유경, 김영희와 싸울 줄은 전혀 몰랐다.진유경과 김영희는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었다.그 시각.진윤은 고은영을 데리고 쇼핑하러 다니고 있었다.김영희와 진유경은 진정훈과 진윤이 장례식 준비도 돕지 않고 서로 재산을 빼앗느라 바쁘다고 했지만 사실 진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중이었다.진성택이 진유경에게 남겨준 물건은 많지 않았다. 차라리 진윤이 지금 고은영에게 쓰는 돈이 더욱 많을 것이다.“오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명품을 너무 많이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기다란 영수증 위의 숫자를 본 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배준우와 결혼한 후 돈이 모자랐던 적은 없지만 돈을 이렇게 많이 쓴 적도 거의 없었다.진윤은 경호원을 데리고 왔다. 네 명의 경호원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부는 란완 리조트로 배송시켰다.“괜찮아. 많이 사. 우리 아내 것도 골라줘야지.”진윤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오빠는 정말 좋은 남자 같아요.”자세히 생각해보니 배준우는 직접 무언가를 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대부분은 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란완 리조트로 가져오게 했던 것 같다.그리고 고은영은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니 직접 사는 편이 많았다.하지만 진윤은 쇼핑하면서도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진윤이 웃으면서 얘기했다.“배준우도 좋은 남자야. 그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거야.”“그 사람이 전에 얼마나 나빴는지 몰라서 그래요.”진윤이 배준우를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자 고은영이 입을 비죽거리면서 대답했다.배준우와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좋은 남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그때의 배준우는 정말... 악랄한...고은영은 그때 유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고은영은 또 나태웅을 떠올렸다.나태웅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나태웅과 배준우가 같이 고은영을 위협했으니까 말이다.고은영은 나태웅이 안지영을
결국 진호영이 다가가서 말했다.“할머니, 지금 이 장소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진윤과 진정훈이 오늘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도 명백했다.진성택이 두 사람을 너무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진유경은 진호영이 진윤과 진정훈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더욱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호영 오빠, 진윤 오빠랑 정훈 오빠한테 연락해주면 안 돼요? 적어도 아버지 보내드리는 길은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은영이도요... 아버지는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잖아요.”“그만 떠들어.”진유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진호영이 싸늘하게 얘기했다.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에서 고은영의 얘기를 꺼내다니.진호영은 진유경에게서 이례 없는 메스꺼움을 느꼈다.진유경은 진호영의 반응에 멍해졌다.하지만 사람들의 화제는 이미 고은영으로 넘어가 버렸다.다들 고은영을 불효녀라고, 은혜도 모르는 매정한 여자라고 욕했다.진호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진유경을 노려보며 얘기했다.“너 때문에 은영이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했다고?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네 눈은 장식이야?”예뻐한 적이 있었나?한 번도 없었다.진성택이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줬다면 고은영이 진씨 가문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아니, 그게 아니라...”“아버지는 남은 주식을 모두 너한테 남겨줬어. 하지만 친딸인 은영이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그런데 아버지가 은영이를 가장 예뻐하셨다고?”진호영이 모든 것을 까밝히자 진유경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호영 오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진유경은 더욱 크게 울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진유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호영은 진유경의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이게 다 고은영 때문이야! 대체 무슨 수로 꼬드겼기에 오빠들이 다 고은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냐고!’“왜 이러냐고? 우리 어머니가 은영이에게 남겨준
이윽고 고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진호영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고은영이 진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 진호영과 고은영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진호영은 보통 직접 찾아와서 문제를 얘기하는 편이기에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진호영이 전화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은영은 잘 알고 있었다.진윤에게 전화하자마자 또 고은영에게 전화하다니.고은영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진윤이 고은영의 전화를 빼앗아갔다.“오빠...”진윤은 바로 전화를 꺼버렸다.“꺼버리면 어떡해요. 혹시 언니가 전화라도 하면...”“걱정하지 마. 네 언니는 너한테 연락하지 않을 거야.”“...”그렇다고 해도 마음대로 핸드폰을 꺼버리는 건 좀...게다가 고은지가 정말 무슨 일이 생겨서 고은영을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진윤은 자연스럽게 고은영의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돌려주지 않았다.“오빠.”“오늘은 나한테 집중해.”그 말투는 아주 강압적이었다.“...”마치 그동안 진윤에게 신경 써주지 않아 삐진 것만 같았다.하지만 고은영도 어쩔 수 없었다.고희주와 고은지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사실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 고은지는 고은영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고희주의 일 때문에 고은지는 언제든지 화를 낼 수 있었다.“그래요.”“...”“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너한테 뭘 좀 사주려고.”“...”사준다고?고은영은 진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진성택이 죽었다.장례식에 안 가는 건 이해가 되지만 굳이 고은영을 데리고 나와 쇼핑을 하는 목적은 뭘까.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윤설의 전화가 걸려왔다.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그런 진윤을 보면서 고은영은 진윤이 참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진윤과 비교하면 나태현은 정신병이 틀림없었다....진성택은 오늘 화장하게 된다.김영희, 진유경과 진호영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진윤과 진정훈은 결국
숨을 깊게 내쉰 나태현이 얘기했다.“량천옥이 나씨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 지금...”“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배준우가 나태현의 말을 끊었다.그때 나씨 가문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었다. 게다가 량천옥을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나태현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나태현의 어머니도 그 시기에 돌아갔다.그 모든 모순의 시작은 량천옥이었다.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씨 가문은 여전히 량천옥과 원한이 있었다.다들 그저 그 원함을 꾹 참고 있었는데 고은지가 나타났다.량천옥의 딸이면서 나태현의 딸 엄마인 고은지 때문에 나씨 가문과 량천옥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되었다.“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요.”우정과 사랑 중에서 배준우는 당연히 사랑이었다.게다가 이번 일에는 나씨 가문에서 숨기는 것이 너무 많았다.또 나태현이 회사의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보니 프로젝트가 위험했다.나태현은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소리를 들은 배준우는 핸드폰을 소파에 툭 던졌다....다른 한편.고은영과 진윤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진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씨 가문과 엮인 프로젝트를 모두 엎어버리라고 명령했다.옆에 있는 고은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걱정했다. 진윤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고은영이 진윤의 손을 잡았다.“오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나씨 가문이 밉긴 하지만 진윤의 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다.진윤이 계약을 많이 해지할수록 진윤에게 영향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진윤은 본인을 걱정해주는 고은영을 보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부드러운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진윤이 얘기했다.“다 필요 없는 것들이야. 나태현은 지금 당장 귀국해야 해.”그 말을 들은 고은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릿속에는 병원에 있는 고은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은지는 나태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눈치채고 얘기했다.“지금 나태현과 량천옥이 해외에서 서로 죽이고 난리가 났어. 만
화가 난 나태범을 보면서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합니다.”생각하던 집사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진씨 가문 쪽도 걱정해야 합니다.”“진씨 가문? 거기는 왜.”나태현과 량천옥이 싸우는 것만으로도 나태범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이러다가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씨 가문에서 계약까지 해지했지...이러다가는 그룹이 파산될지도 몰랐다.“배준우 씨 아내가 진윤 씨와 진정훈 씨의 친여동생입니다. 그러니 이 세 사람 다 그 고은지 씨의 동생을 위해 움직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나태범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저 진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성택이 친딸보다 양딸을 더욱 아낀다는 것까지 말이다.배준우가 고은영과 결혼할 때 강성의 사람들은 배준우가 많이 아깝다고 생각했다.일반적인 신분으로는 배준우의 옆에 설 수 없으니까 말이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은영이 진짜 진씨 가문의 친딸이었다.나태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튿날 아침.고은영이 아침을 다 먹자마자 진윤이 도착했다.그리고 조카를 위한 선물도 가득 가져왔다.고용인들이 진윤이 가져온 물건을 보관해주었다.약간 붉어진 고은영의 눈가를 보면서, 진윤이 배준우한테 물었다.“어젯밤 계속 운 거예요?”배준우도 머리가 약간 아팠다.“제대로 자지 못했어요.”진윤이 다가가서 고은영을 마주 보더니 고은영이 입고 있는 귀여운 잠옷으로 눈을 돌렸다.배준우는 정말 딸을 키우는 것처럼 고은영을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고은영은 원래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면 아주 작아보였다.“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하자.”“정말 나가야 해요?”고은영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고은영은 병원에 가서 고은지를 보고 싶었다.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진윤은 그런 고은영의 생각을 진작 알아차렸다는 듯이 얘기했다.“병원 쪽에는 내가 사람들을 깔아놨어. 무슨 일 없을 거야. 가자.”진윤의 말을 들은
하지만 진윤이 내일 고은영을 데리고 나가는 것의 목적을 떠올리면 고은영은 어쩔 수 없었다.“당연한 거 아닌가요?”진윤이 당당하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배준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고은영을 쳐다보았다.“이미 다 들었지?”“네.”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성택은 사망했다.진정훈은 고은영이 장례식에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하지만 진윤은 장례식에 가지 말고 나가서 쇼핑하자고 했다.그것도 웃으면서 말이다.“넌 어떻게 하고 싶어?”“안 가도 돼요?”고은영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웃으면서 쇼핑해야 한다니. 고은영에게 있어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배준우도 짐작하고 있었다.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배준우가 얘기했다.“아마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쇼핑이 최종 목적이 아닐 거야.”“위로하는 거예요?”진윤은 배준우더러 고은영을 잘 위로해주라고 했다.“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 큰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야. 단순하게 쇼핑하는 게 목적일 리 없어.”배준우가 확신하면서 얘기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배준우는 허락하는 고은영을 보면서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고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걱정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나씨 가문 쪽은...”거기까지 말한 고은영은 고개를 들고 배준우를 쳐다보았다.고희주의 일로 마음 아팠지만 배준우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배준우는 고은영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은영에게 짧게 키스한 배준우가 이어서 얘기했다.“나씨 가문과 협업하는 프로젝트 두 개가 있었는데 이미 계약을 해지했어.”“주주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고은영이 걱정하면서 물었다.“그 두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야. 아마도 량천옥 씨가 한 일 같은데.”그래서 배준우도 큰 문제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지나간 일에 대해 배준우는 뭐라고 할 수 없
진정훈이 전화를 건 것은 진정훈에게도 계획이 있어서였다.“진유경을 조심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유경에게 남긴 주식이 있는데 꼭 되찾아올 겁니다.”진유경이라...진정훈은 진유경이 왜 계속 고은영을 끌어내리려는지 깨달았다.그건 바로 진유경이 아직 자기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니 이제라도 제대로 알게 해줘야 했다.배준우는 진정훈의 말을 알아듣고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장례식은 와도 되고 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요.”“네.”진정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은영의 뜻을 존중해주었다.하지만 장례식에 고은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장례식은 언제입니까.”“이틀 뒤입니다.”“알겠습니다.”이틀 뒤라니. 생각보다 장례를 서두르는 모습에 배준우는 약간 의아했다.진정훈은 그저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그래서 그동안 배준우가 고은영을 잘 지켜줄 수 있도록 전화를 건 것이다....진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배준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이번에는 진정훈이 아닌 진윤이 걸어온 전화였다.배준우는 고은영을 안고 소파에 앉았다. 영원히 고은영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고은영을 꼭 안고 있었다.“여보세요.”배준우는 진윤을 존경하는 편이었다.진윤은 정말 가문의 도움 없이 지금 그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다.“은영이는요? 연락이 안 돼서.”“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이죠?”“왜 기분이 안 좋은 거죠?”“고은지 씨한테 일이 좀 생겨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고은지의 상황을 전해 들은 진윤은 머리가 아팠다.지금 고은영에게는 모든 일이 설상가상이었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내가 데리러 간다고 전해줘요.”“내일이요?”“네.”진윤이 대답했다.배준우는 진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진윤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씨 가문이 얼마나 엉망인지 광고할 셈이었다.진윤이 진성택의 장례식에도 나서지 않고 친여동생인 고은영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다닌다면...“어디로 갈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