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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늦은 시간이었다.

고은영은 언니한테 가족관계증명서를 달라고 한 뒤, 작별인사를 전했다.

침대를 정리하던 고은지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 가게? 자고 가지.”

고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내일 또 출근이야.”

“그런데 가족관계증명서는 왜 필요한데?”

고은지가 물었다. 가족관계증명서가 꼭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회사에서 연말에 단체여행을 해외로 가기로 했는데 여권이랑 비자 만들어야 해.”

언니를 걱정시키기 싫었기에 고은영은 거짓말을 택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이고 위장결혼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족관계증명서를 꺼내 건넸다.

“다음에 올게.”

“그래.”

고은영은 언니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고은지는 아이를 낳은 뒤로 전보다 군살이 많아졌다.

고은영은 그런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심코 물었다.

“언니는 혼인신고 할 때 어땠어?”

순간 고은지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고은영은 순간 뭔가 알 것 같았다. 고은지와 조용수는 선 보고 만난 사이였다. 그것도 계모인 조보은의 소개를 받아 결혼했다.

아이가 벌써 다섯 살인데 아직도 혼인신고를 안 했다는 게 놀라웠다.

언니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있던 고은영은 다시 잠자는 조희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희주도 이제 유치원 다니니까 언니도 직장 찾아서 출근해.”

그녀는 명문대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졸업한 언니가 이런 시골구석에서 농촌아낙으로 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고은영은 언니가 조보은의 말만 듣고 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조은지도 후회하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정말 깐깐하고 맞춰주기 힘든 성격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고은지가 말했다.

“나도 출근하고 싶지. 그런데 애는 누가 픽업하겠어.”

조희주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그녀도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부탁하려고 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그러면서 둘째를 또 낳으라고 재촉하는 상황이었다.

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희주 유치원 다니는 시간에 맞춰 적당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을 텐데?”

고은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둘째를 고민할 때가 아니야!”

고은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실 그녀도 줄곧 둘째 계획을 미루고 있었다.

어차피 낳아도 그녀가 혼자 돌봐야 하고 아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결국 눈치 보고 욕먹어야 했다.

이런 생활이 고은지도 지긋지긋하던 참이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준우에게서 근처에 와서 기다린다는 연락이 왔다.

전화를 끊은 고은영은 아쉬운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생활비 하라고 돈을 건넸지만 언니는 한사코 거절했다.

“정우도 맨날 너한테 손 내미는데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서정우는 배다른 남동생이었다.

조보은은 고은지가 강성 사람과 결혼해서 풍족하게 사는 줄 알고 매번 생활비를 요구했다.

결국 고은지는 여유가 없어서 매번 동생인 고은영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그렇게 반복되다 보니 서정우도 당당하게 고은영에게 돈을 요구했다.

동생 얘기가 나오자 고은영은 기분이 잡쳤다.

“어차피 곧 졸업하고 직장 구할 텐데 걔를 내가 왜 신경 써?”

어제도 서정우에게서 연락이 왔었지만 받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서정우에게 돈을 안 보낸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났다.

고은지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성격 알잖아. 돈을 안 주면 강성까지 찾아와서 소란을 피울 수도 있어.”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고은지는 언성부터 높이고 보는 계모를 생각하면 두려움부터 앞섰다.

고은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수록 들어주면 안 돼!”

“그래. 너도 부담되면 모르는 척해.”

“알았어, 나 갈게.”

배준우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대화를 질질 끌 수는 없었다.

매번 서정우 얘기만 나오면 항상 안 좋게 대화가 끝났다.

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밑반찬을 쇼핑백에 담아 고은영에게 건넸다.

고은영은 극구 사양했지만 고은지는 사람은 그래도 집밥을 먹어야 한다며 끝내는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고은영은 배준우와 마주칠까 봐, 배웅한다는 언니를 뒤로 하고 홀로 밖으로 나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반찬통을 들고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자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색 마이바흐가 보였다.

배준우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은영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가서 인사했다.

“대표님 오셨어요?”

“가족관계증명서는 챙겼어?”

“네.”

배준우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

고은영은 갑자기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배준우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또 왜?”

“저기… 대표님, 바쁘실 텐데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돼요.”

고은영은 배준우가 차에서 또 무슨 요구를 할까 봐 두려웠다.

배준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일부러 고 비서 데리러 온 거야.”

고은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부러 데리러 왔다고?

고개를 들자 자신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배준우가 보였다.

그는 고개짓을 하며 어서 타라고 했다.

고은영은 감히 타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차에 올랐다.

배준우는 친절하게 문까지 닫아주고 돌아가서 운전석에 올랐다.

배준우의 비서로 꽤 오래 일했지만 그의 차에 타는 건 처음이었다.

차안은 매우 청결했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배준우는 그녀가 품에 안은 반찬통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언니가 싸준 거야?”

“네.”

매번 언니 보러 올 때면 언니는 항상 동생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싸서 손에 들려주었다.

차가 출발하고 차 안에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차는 배준우의 별장 앞에 도착했다.

왜 여기로 왔는지 모르는 고은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 따로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요?”

그녀는 추가근무라고만 생각했다.

상사를 대신해 잔심부름을 하는 것도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배준우도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게. 왜 여기로 왔지?’

고은영은 바짝 경계했다.

설마 오늘부터 여기서 살라는 건 아니겠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고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계약 결혼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배준우가 차에서 내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계약결혼이라고 해도 앞으로 여기서 살아야 해.”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명령을 내리는 그의 태도에 고은영은 당황했다.

그녀는 반찬통을 꼭 끌어안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마주하는 것만 해도 숨막혀 죽겠는데!

밤에도 같이 생활해야 한다니!

고은영은 이러다가 밤에 심장병으로 즉사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밖에서 배준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내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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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연
흥미진진하네요 ㅡ무슨 개목걸이 채운 것도 아니고 싱장이 빵스빵스 ㅡ좋음 나쁨,경계선의 촉이 살아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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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 여주인공이 너무 억압되게 가는데 로맨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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