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된 영상을 떠올린 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배준우에게 물었다.“고 비서가 사모님 측근일 가능성은요?”하필이면 고은영이 CCTV를 조회한 뒤에 그날 밤 영상만 손상되었다는 게 어쩐지 의심스러웠다.나태웅의 질문에 배준우는 코웃음쳤다.“겁이 많아서 그런 짓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야.”나태웅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고은영은 수상할 정도로 배준우를 두려워했다. 배준우의 계모처럼 계산적인 사람이 저런 허술한 상대를 측근으로 골랐을 리 없었다.“그럼 고 비서한테는 제가 말할게요.”“회사 내부에는 잠시 비밀로 해!”나태웅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결혼 자체가 계획의 일부인데 숨기는 게 당연했다.모든 게 끝나면 배준우야 타격이 없겠지만 고은영의 입장은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나태웅은 자신의 상사가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비록 고은영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혼한 뒤의 그녀의 처지도 고려한 결정이었다.한편, 자리에 돌아온 고은영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나태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내 사무실로 잠깐 와봐!”“네, 실장님.”고은영은 또 혼나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일부러 분위기 깬 것도 아니고… 누가 신성한 회사에서 결혼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래?’그녀는 투덜거리며 나태웅의 사무실로 향했다.“실장님, 저 왔어요.”“문 닫아.”나태웅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영은 순순히 문을 닫고 지시를 기다렸다.나태웅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내일 출근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챙겨서 와. 고은영 씨는 내일 배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할 거야.”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고은영은 너무 당황해서 또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나태웅은 실성한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사의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순간 의심이 갔다.하지만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었기에 이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의심을 치워버렸다.고은영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
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싫다고 하면요?”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쉽게 결정할 리 없고, 강요에 의한 결혼이라면 더더욱 사양이었다.결혼은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비록 연기라고는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나태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아까 대표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지?”만약에 그녀가 거절한다면 강성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은영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나태웅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 거절의 말을 다시 삼켜야 했다.그녀가 말이 없자 나태웅이 물었다.“가족관계증명서 발급해 놓은 거 있어?”“언니한테 있어요.”고은영이 말했다.나태웅은 시간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오후에 반차를 주지. 가서 가져와.”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배준우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예전에 결혼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낭만을 뜻하는 장미와 촛불 이벤트, 그리고 쌍방 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가지는 등등.하지만 이 모든 걸 생략하고 가족관계증명서부터 내놓으라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협박의 의미가 명확했지만 고은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기간은… 얼마나 될까요?”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무슨 기간을 말하는 거지?”“위장결혼이라면서요?”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기간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그건 대표님한테 물어봐야지.”지금 당장은 그 여자의 계획을 파탄내려는 의도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배준우의 의사에 달렸다.고은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배준우에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배준우는 창밖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고은영을 잠시 바라보았다.넋이 나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태웅이 들어오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잘 얘기했어?”나태웅은
게다가 그녀가 갈 때 선물을 사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언니의 시어머니 때문이었다.빈손으로 가면 두고두고 언니한테 불평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고은영은 백화점이 가까워지자 언니를 다그쳤다.“많이 안 사. 빨리 사이즈나 말해줘. 샀다가 작아서 못 입으면 환불하기 더 귀찮아.”“은영아!”“빨리!”고은영의 태도는 단호했다.고은지는 어쩔 수 없이 사이즈를 알려주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안지영이 말했다.“언니도 강성 인근에 사시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 못 보지않아?”“가정도 있는데 내가 자꾸 가면 부담될까 봐.”언니 고은지를 통해 고은영은 느낀 바가 있었다. 결혼은 두 가족의 결합이지 남녀가 사랑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오늘 나태웅이 배준우와 결혼하라고 했을 때 거부감부터 들었던 것이다.지금 배준우가 성격도 고약하고 같이 일하기 힘들지만 어차피 직장상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그와 결혼하게 되면 그녀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안지영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친언니 만나러 가는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안지영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친구가 불쌍했다.유일하게 그녀를 예뻐해 주시던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언니는 그다지 풍족하지 못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친언니니까 언니가 입장 곤란해지는 건 싫어.”언니는 어렸을 적 고은영의 정신적 지주였다. 맛있는 거 생기면 항상 동생 먼저 챙기고 운 좋게 새 옷이 생겨도 먼저 동생에게 주었다.지금도 언니 집에 놀러 가면 어떻게든 맛있는 거 차려준다고 난리를 떠니 시어머니가 고깝게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백화점에 도착하자 고은영은 같이 가주겠다는 안지영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들어갔다. 안지영과 쇼핑하면 대부분 그녀가 계산하기 때문이었다.이미 안지영에게는 신세를 많이 져서 자꾸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안지영이 그녀에게 카드를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늦은 시간이었다.고은영은 언니한테 가족관계증명서를 달라고 한 뒤, 작별인사를 전했다.침대를 정리하던 고은지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벌써 가게? 자고 가지.”고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안 돼. 내일 또 출근이야.”“그런데 가족관계증명서는 왜 필요한데?”고은지가 물었다. 가족관계증명서가 꼭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회사에서 연말에 단체여행을 해외로 가기로 했는데 여권이랑 비자 만들어야 해.”언니를 걱정시키기 싫었기에 고은영은 거짓말을 택했다.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사이고 위장결혼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족관계증명서를 꺼내 건넸다.“다음에 올게.”“그래.”고은영은 언니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고은지는 아이를 낳은 뒤로 전보다 군살이 많아졌다.고은영은 그런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심코 물었다.“언니는 혼인신고 할 때 어땠어?”순간 고은지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고은영은 순간 뭔가 알 것 같았다. 고은지와 조용수는 선 보고 만난 사이였다. 그것도 계모인 조보은의 소개를 받아 결혼했다.아이가 벌써 다섯 살인데 아직도 혼인신고를 안 했다는 게 놀라웠다.언니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 있던 고은영은 다시 잠자는 조희주에게 시선을 돌렸다.“희주도 이제 유치원 다니니까 언니도 직장 찾아서 출근해.”그녀는 명문대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며 졸업한 언니가 이런 시골구석에서 농촌아낙으로 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솔직히 말하면 고은영은 언니가 조보은의 말만 듣고 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사실 조은지도 후회하고 있었다.시어머니는 정말 깐깐하고 맞춰주기 힘든 성격이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고은지가 말했다.“나도 출근하고 싶지. 그런데 애는 누가 픽업하겠어.”조희주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그녀도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부탁하려고 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그러면서 둘째를 또 낳으라고 재촉하는 상황이었다.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고은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중도에 안지영에게 지원요청을 보냈는데 문자를 받은 안지영도 충격에 빠졌다.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지옥사자가 여자를 집에 데려가는 날이 오다니! 게다가 그곳은 그가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무는 하원 별장이었다.게다가 더 충격적인 건 상대가 고은영이라는 사실이었다.배준우를 흠모하던 여자들이 알면 고은영의 사지를 찢으려 하지 않을까?안지영은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답장을 보냈다.오늘 배준우가 먼저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했으니 이제 동거를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이상한 점은 이런 요구를 제기한 사람이 배준우라는 사실이었다.여자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는 일은 많지만 그가 먼저 여자에게 오라고 손짓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문자를 받은 고은영은 의리도 없다고 속으로 안지영을 욕했다.하지만 안지영도 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배준우를 따라 문앞까지 갔다.“저기… 저는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그녀는 포근한 자신의 기숙사가 그리웠다.배준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일 바로 구청에 혼인신고하러 갈 텐데 오늘 기숙사 가면 내일 내가 또 데리러 가야 하잖아.”“제가 알아서 갈게요!”고은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배준우의 인상이 점점 더 썩고 있었다.고은영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방문하는 곳이지만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신발장에 슬리퍼 있어.”말을 마친 그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고은영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에 여기 방문할 때는 항상 실내화를 따로 챙겨서 다녔었고 한 번도 허락 없이 그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신발장을 열자 가지런히 정돈된 남성용 슬리퍼가 보였다. 여자용은 없었다.그녀는 아무거나 집어서 신었다. 사이즈가 많이 컸지만 그냥 무시했다.배준우는 지금 그들을 지켜보는 자를 철저히 속이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만 고은영은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배준우는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 든 계약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고은영은 고개를 숙인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이번엔 정말 끝나는 거 아니겠지? 배준우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고은영의 멘탈이 거의 나갈 때 쯤에 배준우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그런 거 아니에요!”고은영이 다급히 말했다.일개 직원이 무슨 수로 상사를 협박한단 말인가.그녀는 단지 다시는 순결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배준우는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떠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하! 아니란 말이지?”‘재밌네. 저 머리에 밀당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콘돔은 다른 누가 가져다 놓았다는 건데…. 주변 청소를 좀 해야겠군!’하지만 겁쟁이 비서가 조건을 제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은영은 손에 땀을 쥐고 입을 꾹 다물었다.다행히 배준우는 더 이상 대화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는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서 자.”고은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잠자리는….”하지만 배준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겁나서 결국 하려던 말을 삼켜야 했다.“좌측 두 번째 방으로 가면 돼.”그 방은 손님용 방이었다.하지만 고은영은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탁자에 놓인 콘돔을 보면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다급히 방으로 들어가서 쾅 하고 문을 닫았다.그리고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배준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왜 저러지? 내가 자기를 잡아먹기라도 해?’하지만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방에 들어온 고은영은 안지영의 문자를 확인했다.지난번 경험이 있어서 많이 조심스러워진 문자였다.[은영아?][그래, 나야!][지금 문자 가능해?]안지영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지난번에 고은영에게 문자를 잘못 보냈다가 배준우의 의심을 산 뒤로 모든 게 조심스러워졌다.게다가 고은영은 원래 멘탈이 약
이날 밤, 안지영은 고은영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하루아침에 배준우와 같은 집에서 동거하게 된 고은영이 너무 안쓰러우면서도 걱정됐다.고은영이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잠든 뒤에야 그녀는 잔소리를 멈추었다.그날 밤, 고은영은 깊게 잠들지 못했다. 낯선 환경이라 그런지, 아니면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중간에 몇 번이나 깨고 잠들고를 반복했다.결국 그녀는 아침 여섯 시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조용히 주방으로 갔다.그리고 언니가 준 반찬을 데우고 쌀을 찾았는데 빵과 우유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배준우는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 고은영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고은영은 그를 보자마자 바짝 긴장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대표님, 좋은 아침이에요.”배준우는 다가가서 온통 고기반찬인 식탁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아침부터 이렇게 기름지게 먹어?”“언니가 준 반찬이라 버리기 아까워서요.”고은영이 말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힘들게 자라서 그런지 음식을 버리는 습관이 없었다.매번 고은지가 반찬을 싸주면 변질해서 버리게 될까 봐 최대한 빨리 먹었다.이번에도 고은지는 하루 세끼 먹을 정도의 양을 싸주었다.배준우가 계속 밥상을 바라보고 있자 고은영이 물었다.“대표님도 좀 드실래요?”배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계란후라이 반숙 하나랑 빵, 그리고 따뜻한 우유 좀 부탁해.”고은영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이런 건 해본 적 없는데.’하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유난히 짜증이 많아 보이는 배준우를 보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배준우는 씻으러 안으로 들어갔다.고은영은 최신형 전자제품들을 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하지만 배준우에게 사용법을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인터넷으로 검색했다.여차여차 전자제품 사용법은 익혔지만 평소에 요리를 별로 해본 적 없는 그녀였기에 서툴기만 했다.결국 배준우는 씻고 나오면서 주방에서 풍기는 탄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주방으로 가보니 고은영이 서투른 솜씨로 거
그녀는 어른들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진여옥을 보며 시댁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게 된 고은영이었다.하지만 배준우와 계약결혼을 하려면 어쨌든 부모님을 만나긴 해야 했다.재벌가 후계자들은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집안 어르신들은 그렇게 재촉한다고 들었다.평소에 회사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배준우도 집에서는 결혼 재촉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니 조금 놀라웠다.“그렇다고 볼 수 있지.”배준우가 말했다.그렇다고 보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 아닌가?고은영은 말없이 식사에 전념했다. 사실 그녀는 약간의 결벽증이 있었다.어릴 때 계모가 서정우가 먹다 남긴 음식을 준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역겹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배준우가 먹던 걸 먹는데 그다지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계란후라이와 토스트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가?“요리 뭐 할 줄 알아?”거의 식사가 끝날 때쯤 배준우가 물었다.“라면이요.”“더 없어?”“칼국수, 감자조림, 감자튀김, 감자볶음….”배준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평소에 면식이랑 감자만 먹고 살았나?’사실 고은영이 면식이나 감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생활이 어렵다 보니 밀가루 음식이나 감자가 주식이었다.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만 먹고 자라서 할 줄 아는 것도 이게 전부였다.“그럼 내일 아침부터는 국수 먹자.”배준우가 말했다.고은영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비록 어제 같은 지붕 아래서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배준우를 대하기 어려운 건 여전했다.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함께 구청으로 갔다.혼인신고서에 사인하기 전 고은영은 배준우를 빤히 쳐다보았다.배준우가 물었다.“왜 그래?”“먼저 계약서라도 써야 하지 않나요?”“내가 사기라도 칠까 봐 그래?”무슨 도살장에 끌려가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를 보자 배준우는 기분이 상했다.고은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아침부터 지금까지 배준우는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먼저 이야기해서 기분이 나쁜 걸까?구청에서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