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직!”그녀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 목걸이를 하지 않았지만 여름이라 그걸 본 직원이 적지 않을 것이다.나태웅이 회사 직원들에게까지 탐문조사를 할까 봐 걱정이었다.“그거 주면 안 되지!”“하지만 나 실장님 태도가 아주 강경했어. 안 가져가면 분명 날 의심할 거야.”고은영의 말에 안지영은 미칠 것 같았다.사실 자신의 말이 억지라는 건 알 고 있었다.나 실장은 자타공인 회사의 2인자였다.배준우가 조사를 하라고 지시한 일은 전부 나 실장이 도맡아서 했고 한 번도 배준우를 실망시킨 적 없었다.하지만 그걸 넘기면….“아, 정말 답 없네!”안지영은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고은영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의 기억에서 그날 밤을 지우고 싶었다.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안지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걸 넘겨야겠지?”“지금 상황에 아무래도 넘길 수밖에 없어!”만약 그걸 안 넘긴다면 나 실장은 결국 고은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은영 위주로 조사를 시작한다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게다가 고은영은 그와 같이 이 임무에 합류하게 되었다.안지영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친구가 사실대로 자백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고은영은 고통스럽게 머리카락을 쥐여뜯었다.“내가 그거 하고 다니는 거 본 동료들이 수두룩할 텐데.”회사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그녀라는 게 들통날 것이다.안지영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은영에게 말했다.“그럼 네가 말해봐. 이제 어떻게 할 거야?”고은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울지 마. 지금 너 달래줄 기분 아니야.”“하지만 정말 무섭다고!”“그래, 알아.”겁 많은 고은영이야 무서운 건 당연하고 안지영도 이제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주문한 메뉴가 나왔지만 두 사람 다 입맛이 없었다.안지영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대표님이 사실은 너라는
수화기 너머로 배준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으로 가서 서류 좀 가져다 줘. 그리고 옷장에 있는 자주색 넥타이도 좀 부탁해.”“네, 알겠습니다.”고은영은 공손히 대답한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자 그녀는 안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차키 좀 빌려줘. 대표님 집으로 좀 가봐야 해!”“대표님도 참, 평소에 집으로 심부름도 자주 보내면서 업무용 차 한대도 안 뽑아 주다니!”안지영은 불평하면서도 순순히 차키를 꺼내 고은영에게 건넸다.차키를 건네 받은 고은영은 담담히 대답했다.“서류만 가지고 나올 거야. 차비 받으면 나중에 너 다 줄게!”“요즘 기름값 엄청 비싸다고! 그깟 차비 얼마나 준다고!”안지영이 투덜거렸다.그녀는 예전부터 회사의 복지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배준우는 짠돌이 중의 짠돌이었다.고은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내 사비로 기름 한번 넣어줄게.”“매달 대출로 400만원이나 갚는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그러니까 좀 도와줘.”“불만도 얘기하면 안 돼?”안지영이 뾰로통하게 말했다.고은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어려서부터 곱게 자란 이 재벌 아가씨는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배준우가 짠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사실은 그냥 회사에 불만이 많은 거였다.엘리베이터를 나선 고은영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녀는 배준우의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블랙톤 위주의 인테리어는 적절한 소품들로 잘 조화를 이루어 너무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고은영은 일단 서재로 가서 서류를 챙긴 뒤, 익숙하게 옷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그런데 장롱 문을 열자마자 툭 하고 무언가 떨어져 나왔다.고은영은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하지만 물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포장지도 안 뜯은 콘돔이었다!줄곧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그녀는 얼른 그것을 도로 장롱에 넣었다.평소에 금욕적으로 보이는 배 대표가
나태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영은 그와 함께 조사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그녀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나태웅이 귀찮은 듯이 말했다.“이제 일하자!”“네, 나 실장님!”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나태웅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배준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온 고은영은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휴게실에서 봤던 장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이러다가 정말 크게 사고 한번 칠 것 같아!’무슨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지 나태웅은 한 시간 뒤에야 배준우의 사무실에서 나왔다.그가 나오자 마자 고은영의 업무용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대표 사무실 쪽을 바라보다가 남자의 냉랭한 눈빛과 마주쳤다.고은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았다.“네.”“들어와!”남자는 간단하게 지시를 내린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은영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다음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연 순간, 벌써 풍겨져 나오는 숨막히는 압박감에 그녀의 긴장감도 최고조에 달했다.“대표님, 다음 회의에 필요한 자료입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공손히 서류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그 무심한 동작에 고은영의 긴장감은 다시 고조되었다.배준우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점점 더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꼈다.한참이 지난 뒤, 그녀의 등이 축축하게 젖었을 때, 배준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아까 뭘 봤지?”“아니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고은영은 다급히 말했다.상사 앞에서 당신의 나체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그런데 그의 눈빛에서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건 착각일까?고은영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재차 말했다.“정말 아무것도 못봤어요.”“그래?”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차가
하지만 날카로운 나태웅의 눈빛을 마주하자 도망칠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고 비서, 괜찮아?”그녀가 멍하니 있자 나태웅의 말투가 차가워졌다.“아… 괜찮습니다.”그녀가 다가가자 나태웅은 노트북 화면을 그녀에게 돌렸다. 화면에서 그녀가 배준우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날짜가 맞았다.고은영은 머리 속이 완전히 하얘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런데 몇 초 정도 지나자 화면에 지저분한 점들이 생기더니 꺼져 버렸다.안지영이 삭제한 부분일 것이다.고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태웅에게 말했다.“이 영상 맞아요. 안지영 씨랑 아침까지 지켜봤는데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었습니다.”그녀가 그 방에 밤새도록 있었기에 그날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영상이 손상되었으니 고은영과 안지영, 그리고 매수한 보안센터 직원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고은영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태웅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이 영상 복구해 주세요!”고은영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와 나태웅을 번갈아 보았다.“이분은….”“강성 IT센터 팀장, 진재한 씨야!”진재한!그 이름을 들은 순간 고은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컴퓨터 기술자가 바로 진재한이었다.배준우는 그를 본사로 데려오고 싶어했지만 진재한은 줄곧 제안을 거절해 왔다.나태웅이 그 여자를 찾으려고 진재한까지 동원할 줄이야!진재한은 노트북을 건네 받고 자신감 있게 휘파람을 불고는 말했다.“이런 건 일도 아니죠! 맡겨만 주세요!”고은영은 등 뒤가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그녀는 어렵게 정신을 차리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제가 따로 할 일은 있나요?”고은영의 질문에 나태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고 비서는 일단 나가서 일해!”“네.”그녀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고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밖으로
고은영은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눈알이 새빨개진 상태로 비상계단에서 나갔다.비서실 직원 민초희가 그녀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비서님, 울었어요?”“아… 아니에요! 괜찮아요!”고은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민초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많이 힘들면 장기 휴가 신청하고 쉬는 것도 방법이에요!”동영그룹 직원이라면 배준우 밑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물론 급여는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많았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위치였다. 고은영은 감격한 표정으로 민초희를 바라보며 말했다.“감사해요. 안 그래도 지금 휴가 신청하러 가는 길이었어요.”더 이상 회사에 있다가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민초희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고은영도 자리로 돌아가서 휴가 신청서를 작성한 뒤, 나태웅의 사무실로 갔다.영상이 어디까지 복구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휴가를 내려면 나태웅의 동의가 필요했다.그 뒤에 배준우에게 보고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은영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나태웅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영상 파손 정도가 심각하네요.”“복구가 불가능해요?”나태웅이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고은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었다.진재한도 복구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렇다면….고은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던 순간, 진재한이 말했다.“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3일 정도면 될 것 같네요.”“진 팀장에게 3일이나 쓰게 하다니. 장난을 친 자가 실력이 좀 되나 보네요!”나태웅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고은영은 다시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지금 당장은 복구하지 못했지만 3일 뒤에 만약 그가 성공적으로 복구해 낸다면?진재한도 정색하며 말했다.“네 실력이 상당한 자입니다.”“알았어요. 3일 드리죠.”다시 자리로 돌아간 고은영은 휴대폰으로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복귀할 필요 없어.
고은영은 심장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반면 배준우는 해커까지 동원했다는 얘기에 잠시 표정을 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체할 시간이 없어.”고은영은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태영은 그 의미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 일이 있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그 여자가 숨었다는 건 아마 임신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여자의 배후도 그걸 바라고 행동했을 것이다.그렇다는 건 그 여자는 자신에게 가장 유력한 무기를 들고 나중에 배준우를 찾아올 가능성이 컸다.“그럼 어떻게 할까요?”배준우는 계모가 추천한 여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결국 이 순간을 위해서 그 난리를 부렸던 거잖아? 그럼 계획을 무효로 만들어야지!”그 여자가 자신의 측근을 그에게 결혼상대로 들이밀기 전에 결혼하면 그만이다.세 사람 중 고은영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결혼상대를 물색할까요?”고은영은 순간 놀라서 사레들려서 쿨럭거렸다.무거웠던 흐름이 그녀의 요란한 기침소리에 잠시 끊어졌다.배준우와 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바라보자 고은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사과했다.“죄송합니다!”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도망치듯 배준우의 사무실을 나갔다.너무 충격적이 소식이었다.어떻게 저런 분위기에서 결혼상대를 슈퍼에서 물건 고르듯이 얘기할 수 있지?사람이 짐승도 아닌데 성별만 여자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은영은 휴게실로 달려가서 생수를 찾아 벌컥벌컥 들이켰다.나태웅과 배준우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태웅이 물었다.“생각해둔 상대가 있나요?”배준우는 담배 한모금 길게 들이마시고 서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친모가 돌아가신 뒤, 계모라고 들어온 여자는 어떻게든 그를 통제하려고 했다.지금 그 여자는 동영그룹 전체를 손아귀에 잡고 흔들려는 게 분명
손상된 영상을 떠올린 나태웅이 심각한 표정으로 배준우에게 물었다.“고 비서가 사모님 측근일 가능성은요?”하필이면 고은영이 CCTV를 조회한 뒤에 그날 밤 영상만 손상되었다는 게 어쩐지 의심스러웠다.나태웅의 질문에 배준우는 코웃음쳤다.“겁이 많아서 그런 짓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야.”나태웅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고은영은 수상할 정도로 배준우를 두려워했다. 배준우의 계모처럼 계산적인 사람이 저런 허술한 상대를 측근으로 골랐을 리 없었다.“그럼 고 비서한테는 제가 말할게요.”“회사 내부에는 잠시 비밀로 해!”나태웅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결혼 자체가 계획의 일부인데 숨기는 게 당연했다.모든 게 끝나면 배준우야 타격이 없겠지만 고은영의 입장은 많이 난처해질 것이다.나태웅은 자신의 상사가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비록 고은영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혼한 뒤의 그녀의 처지도 고려한 결정이었다.한편, 자리에 돌아온 고은영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나태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내 사무실로 잠깐 와봐!”“네, 실장님.”고은영은 또 혼나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일부러 분위기 깬 것도 아니고… 누가 신성한 회사에서 결혼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래?’그녀는 투덜거리며 나태웅의 사무실로 향했다.“실장님, 저 왔어요.”“문 닫아.”나태웅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영은 순순히 문을 닫고 지시를 기다렸다.나태웅은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내일 출근할 때 가족관계증명서 챙겨서 와. 고은영 씨는 내일 배 대표님이랑 혼인신고 할 거야.”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고은영은 너무 당황해서 또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나태웅은 실성한 것 같은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사의 이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순간 의심이 갔다.하지만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었기에 이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의심을 치워버렸다.고은영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
고은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싫다고 하면요?”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로 쉽게 결정할 리 없고, 강요에 의한 결혼이라면 더더욱 사양이었다.결혼은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비록 연기라고는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나태웅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아까 대표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지?”만약에 그녀가 거절한다면 강성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은영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나태웅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 거절의 말을 다시 삼켜야 했다.그녀가 말이 없자 나태웅이 물었다.“가족관계증명서 발급해 놓은 거 있어?”“언니한테 있어요.”고은영이 말했다.나태웅은 시간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오후에 반차를 주지. 가서 가져와.”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배준우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예전에 결혼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낭만을 뜻하는 장미와 촛불 이벤트, 그리고 쌍방 부모가 한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가지는 등등.하지만 이 모든 걸 생략하고 가족관계증명서부터 내놓으라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협박의 의미가 명확했지만 고은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기간은… 얼마나 될까요?”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무슨 기간을 말하는 거지?”“위장결혼이라면서요?”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기간은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나태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그건 대표님한테 물어봐야지.”지금 당장은 그 여자의 계획을 파탄내려는 의도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배준우의 의사에 달렸다.고은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배준우에게 대놓고 물어볼 용기는 그녀에게 없었다.그녀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태웅의 사무실을 나왔다.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배준우는 창밖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고은영을 잠시 바라보았다.넋이 나간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나태웅이 들어오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잘 얘기했어?”나태웅은
나태현이 의사를 따라 나갔다. 그러자 지신혜가 바로 간호사들을 향해 화를 냈다.“이 쓸데없는 것들! 한 달이나 걸린다고? 나 일주일 뒤면 약혼인 거 몰라?”약혼식에 입을 드레스도 다 준비되었는데, 한 달이나 기다리라고 하다니.지신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량천옥을 향한 증오가 극에 다다랐다.긴호사는 갑자기 화를 내는 지신혜를 보고 깜짝 놀라서 주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그런 간호사를 보면서 지신혜는 더욱 화가 났다.“당장 전문가를 불러와! 일주일 내에 낫게 만들란 말이야!”“네 다리는 골절이야. 일주일 만에 어떻게 나아?”량천옥이 병실에 나타나서 비웃는 표정으로 지신혜를 쳐다보았다.지신혜는 그런 량천옥을 보고 더욱 화가 났다.량천옥이 들어와서 간호사에게 얘기했다.“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먼저 나가 계세요. 진정하게요.”“네.”간호사는 량천옥의 말에 구원이라도 받은 듯 도망쳤다.지신혜는 량천옥의 표정을 보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하지만 지신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일부러 그런 거지.”지신혜가 이를 꽉 깨물고 물었다.량천옥은 담담하게 듣다가 차갑게 대답했다.“네가 지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나태현이랑 약혼한다고 이렇게 나대는 것 같은데...”“...”량천옥이 사실을 얘기하자 지신혜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지신혜는 사생아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왔다.지신혜가 쓰고 먹는 것은 다 사생아들보다 못한 것이었다.량천옥이 지신혜 앞에 와서 귓가에 속삭였다.“누가 너한테 은지를 괴롭혀도 된다고 했지? 천박한 년 같으니라고. 이번에는 경고로 끝나지만 다음에는 아니야.”“당신...”“기억해. 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야. 나태현과 약혼한다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은지를 괴롭히려면 먼저 량천옥, 나부터 밟고 넘어가야 할 거야.”“...”량천옥의 말은 차갑고도 딱딱했다.그 순간 지신혜는 량천옥이 소문과 똑같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러니까 오늘 본 그 여자가
“그 말은...”“혼자 있고 싶어.”정록담은 그렇게 말하는 량천옥이 걱정되었다.“돌아가.”량천옥이 강조하면서 얘기했다.정록담은 뭐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량천옥의 결연한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정록담이 가자 량천옥은 바로 운전대를 잡았다.그리고 먼저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나태현이 그 여자를 데리고 어디로 간 건지 알아봐.”“네.”전화를 끊은 량천옥의 머릿속에는 고은지의 상처뿐이었다.그 장면이 마치 비수처럼 량천옥의 심장에 박혀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서홍 클럽으로 갔습니다.”“그래, 그리고 고은지가 어디 사는지도 알아봐 줘.”고은지는 고은영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량천옥은 고은지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전화를 끊은 량천옥의 머릿속에는 연약한 척하는 지신혜의 모습으로 가득했다.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뻗쳐올랐다....저녁 열 시.두 사람은 서홍 클럽에서 세 시간가량 있다가 나왔다. 천략 그룹 앞에서 지신혜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하지만 지금은 아주 밝게 웃고 있었다. 그건 나태현 덕분일 것이다.그 모습을 보면서 량천옥은 화가 끓어올랐다.나태현이 지신혜를 위해 차 문을 연 순간, 량천옥이 두 사람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피할 시간도 없었다.차량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지신혜는 이미 차에 발을 걸친 상태였다.량천옥의 차가 달려오는 순간, 나태현은 본능적으로 지신혜를 끌어내렸다.하지만 량천옥의 속도가 더 빨랐다.지신혜는 그 충격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발목은 아까의 충돌로 완전히 골절되었다.량천옥은 떠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보더니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머? 다쳤어? 정말 미안해. 나도 실수로 그런 거야. 미안해.”나태현은 량천옥을 보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량천옥!”“얼른 경찰에 신고해. 구급차도 불러야지. 내 책임이니까 피해보상은 완벽하게 해줄게.”“당신 이거 살인 미수예요!”“하
량천옥이 손을 놓자 고은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량천옥은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고은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량천옥이 떠나려던 순간, 나태현이 입구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나태현을 본 량천옥은 바로 나태현을 향해 걸어갔다.나태현은 량천옥을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량천옥은 나태현 뒤에 서 있는 지신혜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알아냈다.“쯧쯧, 지씨 가문의 아가씨라서 선을 지킬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네.”량천옥을 본 지신혜는 숨도 쉬지 못했다.“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오다니. 지씨 가문에서 그렇게 가르쳤나 보지?”천락 그룹의 사람들도 퇴근해서 나오는 중이었다.회사 앞에서 이런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으니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지켜보았다.하지만 그 주인공이 나태현이라는 것을 보고는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러갔다.그저 나태현 옆에 있는 지신혜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지신혜는 그 눈빛에 표정이 굳어버렸다.“태현 씨.”억울한 표정으로 나태현의 팔을 그러안았다.그러자 량천옥은 멸시의 시선을 보냈다.“요즘 사람들이 이렇게 개방적이라는 걸 까먹을 뻔했네.”“태현 씨!”지신혜는 나태현의 팔을 더욱 세게 그러안았다.지씨 가문의 딸로서, 이런 취급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상대가 량천옥이다보니, 지신혜는 나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먼저 차에 있어.”지신혜는 량천옥을 보면서 눈을 부릅떴다.모든 사람들은 량천옥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량천옥은 강성의 미친개였으니까 말이다.사업이 성공한 남자들은 량천옥을 더욱 경계했다.여자에게 홀린 남자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다들 봐왔으니까 말이다.얼마나 많은 사모님들이 량천옥 때문에 마음 아파했는가.지신혜는 량천옥과 싸울 담이 없었기에 얼른 차에 올라탔다.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량천옥을 쳐다보았다.“은지 손의 상처, 네가 한 거야? 아니면 지신혜가 한 거야.”량천옥의 말투
이현은 계속 해외에 있었다. 연구 때문에 계속 돌아오지 못했는데 겨우 연구를 끝낸 후 돌아오자마자 바로 익산으로 갔다.이현의 마음속에는 고은지와 고은영이 어렵게 살던 모습이 계속 남아있었다.“동생은 잘 지내?”고은지의 삶은 너무 우여곡절이 많았기에 이현은 먼저 고은영에 대해서 물었다.고은영을 떠올린 고은지는 마음이 편해져서 대답했다.“은영이는 잘 지내고 있어.”“그래?”이현은 약간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이현이 기억하는 고은영은 겁이 많은 아이라서 고은지의 보살핌이 필요했다.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배씨 가문 며느리가 되었거든. 배준우 씨랑 결혼했어.”“배준우?”이현은 깜짝 놀랐다.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이현을 보면서 물었다.“아는 사람이야?”“당연하지.”배준우가 유학할 때, 그들은 항상 함께였다. 아는 사이일 뿐만이 아니라 아주 친했다.고은지는 깜짝 놀랐다.“이런 우연이 있다니.”“배준우와 결혼하다니. 좋네.”이현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배준우는 주견이 뚜렷한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리 배준우의 부모라고 해도 배준우의 일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고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배준우 씨도 은영이한테 잘해주니까.”그 덕분에 고은지는 마음 놓고 배준우에게 고은영을 맡길 수가 있었다.배준우가 고은영에게 잘해준다는 말을 들은 이현은 마음이 놓였다.고은지의 일도 묻고 싶었지만 조금 전 고은지의 표정을 떠올린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계속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은지는 그제야 이현이 왜 중학교 이후부터 익산에 오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유학 때문에 계속 해외에만 있었으니까 말이다.대화를 나누면서 이현이 원래 강성에서 자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헤어질 때 이현은 명함을 고은지에게 건네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했다.그리고 또 좋은 변호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은지는 법적으로 아이를 데려오지 못한다고 알려주었다.고은지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저
점심. 한 레스토랑에서.고은지는 오랜만에 이현과 만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고은지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이현을 알아볼 수 있었다.이현도 고은지를 알아보았다.너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고은지는 웃으면서 말했다.“몇 년이 지나도 넌 계속 그대로네.”“넌 조금 변한 것 같아.”이현은 그렇게 얘기하면서 고은지에게 물을 따라주었다.“고마워.”고은지가 잔을 들었다.이현은 고은지의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굳어서 물었다.“네 손, 무슨 일이야.”“조금 다쳤어. 지금은 괜찮아.”고은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마치 아까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이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무슨 일을 하는데 손을 다친 거야?”“그냥 평범한 비서 업무야. 칼날을 폐기 처리하다가 다친 거야.”“네가 왜 폐기 처리를 하는데.”“그대로 버리면 다른 사람이 다치니까.”“결국 네가 다쳤잖아.”이현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이윽고 말을 이었다.“넌 여전히 어릴 때랑 다른 바가 없네. 본인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잖아.”“...”그 말을 들은 고은지는 컵을 들고 있던 왼손을 바르르 떨었다.중학교 전까지만 해도 이현은 여름 방학마다 익산시에 와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익산시는 몹시 가난한 곳이었다.잘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이현은 고은지와 고은영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동생은?”이현이 물었다.사실 이현은 전에 익산시에 가서 고은지와 고은영을 찾으러 갔다.하지만 마을의 사람들은 고은지와 고은영이 강성에 갔다고 했다.그리고 조보은이 잘 못 지낸다고 얘기했다.이현은 조보은이 왜 그렇게 된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고은지와 고은영이 강성에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강성에 온 것이다.“결혼했어.”“결혼했다고?”“응. 나도 결혼했다가 이혼했어.”고은지가 말했다.“...”고은지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는 말을 들은 이현
나태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지훈을 쳐다보았다.이지훈은 그 눈빛을 마주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차가운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꾹 참고 이어서 얘기했다.“고은지 씨는 그래도 대표님 아이의 엄마입니다.”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기는 하나 그건 고은지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니테현이 고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고희주를 싫어한다고 해도 이런 과분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그래서 마음 아파?”나태현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지훈은 그 생각에 온몸이 굳어버렸다.“그 누구라도 고은지 씨의 모습을 보면 동정심이 생길 겁니다.”이지훈의 말이 맞았다.천락 그룹에서는 고은지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고은지와 고희주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은지가 조영수와 결혼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고은지를 우습게 보던 사람들이 있었다.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나태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이지훈의 말이 맞았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은지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할 것이다.나태현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동정한다고? 하하하... 고은지가 동정이 필요한 사람인가?”고은지는 량천옥의 딸이다.량천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그런 량천옥의 딸이 동정을 얻고 산다니.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이지훈은 비꼬는 듯한 나태현의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태현은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라는 사실을 싫어했다.만약 고은지가 량천옥의 딸이 아니었다면 나태현은 고희주를 빼앗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고은지 씨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량천옥 씨의 사랑을 받아온 것도 아닌데 지금은 량천옥 씨 때문에 복수의 대상이 되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됩니다.”이지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얘기했다.량천옥은 나쁜 여자다. 강성에서도 유명한 나쁜 여자다.죄는 량천옥이 짓고 벌은 고은지가 갚는다.이건 누가 봐도 불공평한 일이었다.“모든 일이 공평할 수는 없지만 고
고은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숨기고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가서 처리하면 됩니다.”“아까 피를 얼마나 흘린 건지 알아요?”이지훈이 진지하게 얘기했다.고은지는 손이 아픈지도 몰랐다.그저 심장이 몹시 아픈 것만 같았다.유리가 손바닥을 파고들던 고통이 심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결국 이지훈은 고은지를 데리고 내려갔다.이지훈의 생각이 맞았다. 고은지의 상처는 아주 심했다. 이지훈이 고은지의 손바닥을 보려고 손을 폈을 때, 고은지는 아파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겨우 손을 다 펴자, 상처 안에 작은 유리 조각들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이지훈 같은 남자도 그 상처를 보고 놀라서 몸이 약간 굳을 정도였다.이지훈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병원에 가서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처 안에 박힌 유리 조각들을 다 빼내야죠.”얼마나 많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괜찮아요.”“...”이지훈이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지는 주먹을 폈다. 아까는 아파서 바들바들 떨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것만 같았다.이윽고 고은지는 손톱으로 그 유리 조각들을 빼냈다.전문가가 아닌 데다, 아무렇게 처리하고 있으니 상처가 더더욱 커지고 깊어졌다.피도 더욱 많이 났다.“이건...”이지훈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하지만 고은지는 무표정으로 구급상자에서 솜을 꺼내 피를 대충 닦았다.“이러면 안 돼요. 유리 조각이 안에 있으면 어떡합니까.”이지훈이 물었다.이번 일은 지신혜가 선을 넘은 것이다. 천락 그룹에 찾아와 고은지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말이다.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러는 것을 보니 결혼하게 되면 얼마나 심해질지 몰랐다.이지훈은 속으로 화를 내면서 생각했다.고은지는 손가락으로 상처를 꾹 눌렀다.멎었던 피가 또 흘러내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지훈이 놀라서 고은지의 손목을 잡아챘다.본인이 어떻게 병원에서 퇴원한 것인지 잊은 건가? 이 피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잊은 건가?“만져봤는데, 안에 남은 유리 조각은 없어요.”
하지만 지신혜의 힘은 너무 셌다.지신혜가 힘을 더 주자 상처가 더욱 깊어졌다.“그래서, 그 옆자리를 노려보겠다는 거야? 네까짓 게?”나태현은 핸드폰을 챙기지 않아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윽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지훈도 약을 들고 돌아왔다.나태현의 뒤에 서 있던 이지훈은 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얼른 다가갔다.“지신혜 씨, 오셨군요.”이지훈이 입을 열자 팽팽했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지신혜는 사무실 입구 쪽에 서 있는 나태현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을 치워버렸다.“태현 씨, 왔어요? 아까 어디 갔던 거예요.”말투도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고은지를 대하던 태도와는 180도 달랐다.나태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지신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서 일어서는 고은지를 쳐다보았다.손의 상처는 아주 심해서 피가 카펫에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이지훈이 얼른 고은지의 곁으로 왔다.“얼른 지혈부터 해요.”고은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지신혜를 쳐다보았다.그리고 또 나태현을 바라보았다.나태현은 지신혜를 향해 부드럽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올 거면 온다고 먼저 얘기라도 하지. 저 여자가 널 괴롭힌 거야?”“상사의 약혼녀를 향한 존중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말투도 차갑고요.”지신혜가 억울한 듯 얘기했다.지신혜는 아버지가 데려오는 사생아들이 본인을 깔보거나 존중하지 않을 때마다 화를 잔뜩 냈었다.그래서 지신혜는 위아래가 없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다.이 여자는 지신혜가 나태현의 약혼녀인 것을 알면서도 그런 태도로 지신혜를 대했으니, 이런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그 말을 들은 나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 사람은 혼을 내야지.”그 말을 들은 이지훈과 고은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이지훈은 붕대와 소독약을 찾아서 고은지에게 건네주었다. 고은지는 고맙다고 하면서 약을 받았다.고은지가 사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 나태현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사과해.”“.
사무실의 문을 열자 아까보다 더욱 난장판이 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지훈은 고은지의 뒤에 서서 얘기했다.“대표님은 방금 나가셨습니다. 청소부를 부를까요?”“괜찮습니다.”고은지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이윽고 사무실에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지훈은 그런 고은지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푹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태현의 곁을 오랜 시간 지킨 만큼, 이지훈은 나태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지훈이 아는 나태현은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고은지가 고희주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학교에서의 일만 보면 알 수 있다.그런데 지금 나태현이 고희주를 빼돌렸으니 고은지는 나태현이 하라는 일을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아...”이지훈이 생각에 빠져있을 때, 고은지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유리 조각에 손을 베인 것 같았다.이지훈은 바로 달려가서 물었다.“무슨 일이죠? 다쳤어요?”고은지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약을 가져오라고 할게요.”말을 마친 이지훈은 사무실에서 나가 구급상자를 찾으러 갔다.이지훈이 떠나자마자 사무실에는 불청객이 들이닥쳤다.바로 지신혜였다.고은지가 나태현 사무실 소파에 앉아 휴지를 뽑고 있는 것을 본 지신혜가 차갑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피를 닦던 고은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지 지신혜가 차가운 눈으로 고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지씨 가문은 강성에서 유명한 가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씨 가문 사람들은 항상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지신혜가 다가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물었잖아.”고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을 보았다.지신혜도 고은지의 시선을 따라 손가락을 감싼 휴지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모습에 지신혜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비웃었다.“하, 정말 천박한 수단이네. 그 정도로 돈이 필요해?”지신혜는 눈앞의 사람이 고은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그저 이 여자가 젊은 비서들처럼 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