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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은영은 멈칫하며 다시 발신자를 확인했다.

대표님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고 싶었다!

그녀는 바로 태도를 바꾸어 공손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다른 사람인 줄 착각했습니다.”

“당장 회사로 와.”

남자는 차가운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고은영은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였다. 또 꿀 같은 휴식일에 불러내다니!

그녀는 다급히 마트에 들러서 안지영에게 줄 라면 하나 사고 기숙사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바로 돌아온 그녀를 보자 안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처에 은행 새로 섰어?”

고은영은 뛰어오느라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대표님이 지금 바로 회사로 오래. 일단 라면이나 먹고 있어.”

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오피스룩으로 갈아입었다.

배준우는 정말 깐깐한 상사였는데 직원들이 일하는 시간에 편한 복장으로 오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녀가 다급히 현관으로 다시 나가는데 뒤에서 불만 섞인 안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도 참, 한달이나 출장을 다녀왔는데 쉬는 날에 또 불러내? 그럴 줄 알았으면 너 마케팅부서에 추천할걸 그랬어.”

“나 말을 잘 못해서 마케팅 부서는 어울리지 않아.”

말을 마친 고은영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기숙사에서 회사까지는 10분 거리였다.

이런 지리적 우세 때문에 그녀는 자기 집을 두고 기숙사에서 출퇴근했다. 아침에 잠을 더 자고 교통비도 아낄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

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바로 대표 사무실로 직행했다.

안에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는 배준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그는 뒷모습만 봐도 귀티 나고 멋져 보였다.

고은영은 공손히 다가가서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대표님, 저 왔어요.”

배준우는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은영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대표가 저런 눈으로 볼 때면 괜히 긴장했다.

다행히 배준우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해상그룹 계약서 좀 가져와.”

고은영은 허무한 감정이 들었다.

계약서는 배 대표가 직접 발품을 팔며 협상에 성공했다.

법무부에 전화하면 바로 가져올 일을 굳이 쉬고 있는 비서를 불러내야 했을까?

그의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고은영은 바로 법무부로 가서 계약서를 가지고 배준우에게로 돌아갔다.

배준우는 펜을 들고 여기저기 슥슥 밑줄을 치더니 고은영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이 부분 수정 좀 해줘.”

“네.”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안지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제 끝나? 끝나고 쇼핑이나 나갈까?”

고은영은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면 된다는 생각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해상과의 계약서에 수정할 부분이 좀 있긴 한데… 30분이면 끝날 것 같아.”

계약서 수정하는데 30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잘 수정해서 가져갔더니 배준우는 또 수정할 부분을 표시해 주었다. 그렇게 몇번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평소에 인내심 강하던 고은영도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그렇게 두 시간 뒤….

배준우는 드디어 계약서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고은영은 서류를 다시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해상에서 계약서에 사인하러 오나요?”

만약 해상에서 사람이 온다면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퇴근할 수 없었다.

배준우가 잠시 움찔하더니 대답했다.

“계약서 사인은 다음 주 월요일에 할 거야!”

순간 고은영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월요일에 필요한 서류를 굳이 쉬는 사람 불러내서 마무리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온기 한점 찾아볼 수 없는 남자의 눈빛을 잠시 응시하다가 용기 내서 물었다.

“제가 더 해야 할 일 있나요?”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배준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진한 니코틴 향기가 코를 찔렀다.

고은영은 상사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배준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는 남자친구랑 통화 중이었어?”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은영은 순간 당황했다.

조금 전 회사 오기 전에 그와 통화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에 대고 화를 낸 것이 실수였다.

그녀가 뭐라고 해명하려는데 배준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회사는 25세 미만의 여직원은 연애금지라는 조항 있는데 몰랐어?”

이런 조항이 있었다고?

고은영은 회사에 금방 들어왔을 때 인사부에서 들었던 주의사항을 애써 떠올렸지만 이런 내용은 없었던 것 같았다.

여직원이 너무 일찍 결혼해서 육아휴직을 쓰거나 퇴사할까 봐 미연에 방지하려는 규정인가?

이유야 어찌됐건 지금 솔로인 건 사실이었기에 고은영은 당당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현재 솔로이고 아직까지 결혼 계획은 없습니다.”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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