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웅이 업무적인 일로 사무실에 방문하면서 고은영은 그제야 그 숨막히는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배준우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앞에서는 조신하게 행동하던 그녀가 밖에 나가서는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나태웅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바깥을 내다보니 고은영이 무언가를 바쁘게 찾고 있었다.‘고 비서는 여전히 덜렁거리는군.’고개를 돌린 그는 봉투 하나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대표님, 조사해 본 결과, 역시 그날 사모님이 술에 약을 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나태웅이 확인해 보니 캐릭터 모양의 핸드폰 케이스가 보였다. 당연히 배준우의 것은 아니었다.아까 사무실에 들어왔던 고은영이 부주의로 핸드폰을 두고 나간 것이다.한참 핸드폰을 찾아 헤매던 고은영은 다시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문앞에 도착하자 배준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그 여자는 찾았어?”방 문을 노크하려던 고은영은 순간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아직도 그 여자를 찾고 있었나?곧이어 나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마 사모님께서 대표님 결혼을 추진하려고 보낸 여자일 테니 사모님 측근임이 틀림없겠네요.”“측근이라! 웃기지도 않는군!”잔뜩 날이 선 배준우의 목소리도 들려왔다.“한달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찾아서 해결해.”“네, 대표님.”나태웅의 목소리마저 차가워졌다.고은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골칫거리가 생겼을 때 그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만약 그날의 진실이 탄로난다면 자신이 어떤 처참한 처지가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밖으로 나온 나태웅이 고은영을 보고 아는체했다.“고 비서?”“나 실장님, 오랜만이네요.”고은영은 곧장 정신을 가다듬고 공손히 인사했다.하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나태웅은 그녀의 안색을 잠깐 살피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비서 어디 아파? 안색이 왜 이래?”“감기기운이 좀 있어서요.”고은영은 황급히 변명했다.나태웅은 고개를 끄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배준우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고은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손에서 땀이 났다.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안지영에게 더 이상의 문자를 보내지 말라고 속으로 기도했다.그녀가 온몸에 힘이 다 풀려서 거의 쓰러지기 직전에 배준우가 입을 열었다.“무슨 알바지?”“일러스트레이터요.”“그림?”배준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네. 벽화 그리는 일이에요.”회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배준우의 눈치를 살폈다. 이대로 넘어가 주는 걸까?배준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더니 차갑게 물었다.“월급이 마음에 안 들어?”“아… 아닙니다.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다.남자에게서 풍기는 냉기를 느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만둘게요.”입사할 때, 회사 인사부에서 명확히 안 된다고 했던 사항이었다.아마 산업 스파이나 경쟁 업체에서 의도적으로 직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한바탕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배준우는 의외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알았어, 나가 봐.”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이미 노트북에 시선을 돌리고 열심히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다.배준우가 그날 밤 그녀의 알리바이를 꼬치꼬치 캐물었더라면 아마 그녀는 오늘 무사히 사무실을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고은영은 창백한 얼굴로 안지영을 찾아갔다.안지영은 그녀를 이끌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30분이면 끝난다며? 왜 문자했는데 답장을 안 해?”문자 이야기가 나오자 고은영은
같이 쇼핑하러 갈 예정이었지만 이 해프닝으로 무산되었다.그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기숙사로 돌아갔다.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안지영이 말했다.“은영아, 우리 그냥 퇴사하자.”고은영은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안 돼. 지금 그만두면 집 대출은 어떡하라고? 매달 400만원씩 들어간단 말이야!”안지영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그녀는 쿠션을 끌어안고 한참을 정신을 추스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면 너 집 그냥 팔래?”집 대출이 없으면 퇴사해도 걱정할 것 없었다. 이 사건은 고은영이 퇴사해야 끝날 것 같았다.조금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두 사람 다 살려면 배준우에게서 멀어지는 게 상책이었다!“그거 산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못 팔아!”아직 부동산 계약서에 도장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섣불리 집을 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고은영에게는 매달 4백만 원 정도의 대출이 나가고 정작 안지영 본인은 카드를 아버지에게 몰수 당해서 월급 없이는 생활비 충당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두 사람 다 쉽게 퇴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배준우를 계속 속이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아니야, 됐다! 우리가 더 조심하는 수밖에!”한참 생각하던 고은영이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차라리 내가 부서를 옮길까?”그러자 안지영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너 잊었어? 너는 배 대표가 직접 뽑았어.”원래 고은영은 경영지원팀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이력서를 확인한 배준우가 그녀를 비서실로 부른 것이었다.그때 회사 여직원들 중에 배준우가 고은영 외모에 반해서 데려갔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었다.나중에는 고은영이 일을 열심히 하고 배준우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했기에 소문이 사라졌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배준우가 그녀를 지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고은영이 자처해서 부서를 옮기겠다고 해도 인사부에서 그걸 받아들여 줄지가 의문이었다.그 말을 들은 고은영이 다시 기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그럼 이제 어
배준우가 왜 그녀를 계속 옆에 두고 있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해서 여느 여자들처럼 쉽게 접근하지 못할걸 알아서일까?나태웅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고은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밖에 놔두고 온 게 있어서 찾으러 가야 해요. 저는 직원용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갈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도망칠 준비를 했다.“같이 타고 가라고 했으면 그냥 타고 가!”배준우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직속 상사의 명령인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고은영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다. 고은영은 벽면에 바짝 붙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배준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따가 재무부에 가서 재무제표 가지고 내 사무실로 와.”“네, 대표님.”고은영은 자세를 바로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재무부서가 있는 층에 도착하자 고은영은 도망치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배준우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나태웅은 옆에서 풀풀 풍기는 냉기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도대체 또 왜 기분이 안 좋아지신 거지? 고 비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는군.’한편, 복도로 나온 고은영은 연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역시 사람은 죄를 짓고 못 살아.’그녀는 다음에는 절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재무부서로 가서 재무제표를 챙긴 뒤, 고은영은 기분을 추스르고 배준우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때 언제 다가온 건지, 나태웅이 그녀를 따로 불렀다.“고 비서,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내 사무실로 와.”“하지만 대표님께서….”“대표님께서는 회의 들어가셨어.”나태웅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고은영은 배준우 사무실 방향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태웅을 따라갔다.사무실로 들어간 나태웅이 말했다.“문 닫고 들어와.”“네.”고은영은 조용히 문을 닫은 뒤, 나태웅의 책상 앞에 가서 섰다.“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나태웅은
지금으로서는 그 직원이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태웅은 뭘 알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고은영은 그가 무슨 생각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그가 왜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나태웅은 담배 재를 털며 다시 물었다.“대표님이 방에서 발견했다면서 팬던트 하나 주지 않았어? 그거 지금 어디 있어?”팬던트?그건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녀에게 물려주신 유품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고은영은 항상 그걸 목에 걸고 다녔다.그 일이 있은 뒤로는 서랍에 깊이 보관하고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고은영은 손에 땀을 쥐고 대답했다.“예전 투숙객이 두고 간 거라고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어디 버렸는데 구체적으로 어디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그녀는 안내데스크에 맡겼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배준우가 지금도 그 여자를 찾고 있는데 호텔에 맡겼다고 하면 바로 그쪽으로 연락할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나태웅의 말은 가히 청천벽력이었다.“그럼 수고스럽지만 잘 찾아봐. 그거 진짜 중요한 물건이야!”고은영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착각인지는 모르나, 나태웅은 지금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날카로웠다.배준우에 준하는 압박감에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무슨 정신으로 그의 사무실을 빠져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애써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자신을 심문하듯이 빤히 바라보던 나태웅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나태웅의 태도로 보아 배준우는 그날 밤 그 여자를 무조건 색출해 내려고 하고 있었다.어떡하지?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안지영에게 문자를 보냈다.[지영아, 우리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안지영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우리가 아니라 너야. 나까지 엮지 마.]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안지영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잠시 후, 안지영에게서 또 문자가 왔다.[명심해. 그날 밤 그 일과 너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이것만 기억하면 돼.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다.그런데 상황은 점점 꼬이고 있었다.고은영은 선뜻 수락하기도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배준우는 그녀가 말이 없자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하기 싫어?”당연히 하기 싫죠….하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배준우는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고 비서, 지금 실력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많이 봐준 거 알지? 비서실장으로 진급하려면 아직 멀었어.”고은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 실장 따라다니면서 배우라고 한 것이 날 밀어주기 위해서라고?수행비서가 되면 연봉은 네 배로 뛸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숨막히는 대출을 생각하면 이건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나 실장님이 잘 하고 계시잖아요.”“나 실장은 연말에 퇴사할 거야. 가업을 이어받는대!”고은영은 나 실장이 진짜 재벌2세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눈썰미가 이렇게나 좋았었나?그러고 보면 주변 사람들은 다 이어받을 가업이 있는데 자신만 없다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그녀는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그녀가 말했다.하지만 조사에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곧 후회가 되었다.배 대표를 덮친 범인이 자신인데 자신을 추적하는 조사에 협조해야 한다니!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기에 물릴 수도 없었다.배준우는 갑자기 바뀐 그녀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흔쾌히 동의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이제 나가 봐.”“네, 대표님!”고은영은 공손히 인사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향했다.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그녀의 태도에 배준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뒷모습을 노려보았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점심시간.고은영은 배준우를 위해 음식을 주문한 뒤, 안지영과 함께 회사를 나섰다.평소에는 구내식당을 자주 이용하지만 오늘은 급한 일이 있었기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직!”그녀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 목걸이를 하지 않았지만 여름이라 그걸 본 직원이 적지 않을 것이다.나태웅이 회사 직원들에게까지 탐문조사를 할까 봐 걱정이었다.“그거 주면 안 되지!”“하지만 나 실장님 태도가 아주 강경했어. 안 가져가면 분명 날 의심할 거야.”고은영의 말에 안지영은 미칠 것 같았다.사실 자신의 말이 억지라는 건 알 고 있었다.나 실장은 자타공인 회사의 2인자였다.배준우가 조사를 하라고 지시한 일은 전부 나 실장이 도맡아서 했고 한 번도 배준우를 실망시킨 적 없었다.하지만 그걸 넘기면….“아, 정말 답 없네!”안지영은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고은영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의 기억에서 그날 밤을 지우고 싶었다.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안지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걸 넘겨야겠지?”“지금 상황에 아무래도 넘길 수밖에 없어!”만약 그걸 안 넘긴다면 나 실장은 결국 고은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은영 위주로 조사를 시작한다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게다가 고은영은 그와 같이 이 임무에 합류하게 되었다.안지영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친구가 사실대로 자백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고은영은 고통스럽게 머리카락을 쥐여뜯었다.“내가 그거 하고 다니는 거 본 동료들이 수두룩할 텐데.”회사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그녀라는 게 들통날 것이다.안지영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은영에게 말했다.“그럼 네가 말해봐. 이제 어떻게 할 거야?”고은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울지 마. 지금 너 달래줄 기분 아니야.”“하지만 정말 무섭다고!”“그래, 알아.”겁 많은 고은영이야 무서운 건 당연하고 안지영도 이제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주문한 메뉴가 나왔지만 두 사람 다 입맛이 없었다.안지영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대표님이 사실은 너라는
수화기 너머로 배준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으로 가서 서류 좀 가져다 줘. 그리고 옷장에 있는 자주색 넥타이도 좀 부탁해.”“네, 알겠습니다.”고은영은 공손히 대답한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문이 열리자 그녀는 안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차키 좀 빌려줘. 대표님 집으로 좀 가봐야 해!”“대표님도 참, 평소에 집으로 심부름도 자주 보내면서 업무용 차 한대도 안 뽑아 주다니!”안지영은 불평하면서도 순순히 차키를 꺼내 고은영에게 건넸다.차키를 건네 받은 고은영은 담담히 대답했다.“서류만 가지고 나올 거야. 차비 받으면 나중에 너 다 줄게!”“요즘 기름값 엄청 비싸다고! 그깟 차비 얼마나 준다고!”안지영이 투덜거렸다.그녀는 예전부터 회사의 복지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배준우는 짠돌이 중의 짠돌이었다.고은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내 사비로 기름 한번 넣어줄게.”“매달 대출로 400만원이나 갚는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서!”“그러니까 좀 도와줘.”“불만도 얘기하면 안 돼?”안지영이 뾰로통하게 말했다.고은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어려서부터 곱게 자란 이 재벌 아가씨는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배준우가 짠돌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사실은 그냥 회사에 불만이 많은 거였다.엘리베이터를 나선 고은영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비서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녀는 배준우의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블랙톤 위주의 인테리어는 적절한 소품들로 잘 조화를 이루어 너무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고은영은 일단 서재로 가서 서류를 챙긴 뒤, 익숙하게 옷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그런데 장롱 문을 열자마자 툭 하고 무언가 떨어져 나왔다.고은영은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하지만 물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포장지도 안 뜯은 콘돔이었다!줄곧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그녀는 얼른 그것을 도로 장롱에 넣었다.평소에 금욕적으로 보이는 배 대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