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출처 없는 처방은 부작용이 심합니다.”우성재는 방금 손해를 봐서 감히 정면으로 염구준과 대응하지 못하고 부드럽게 말했다.“개소리 지껄이지 마!”그때 참다 못한 이제마가 버럭 화를 내며 욕을 퍼부었다.“내 처방에 부작용이 심하다고? 그럼 네가 생산한 약은 독약이야!”이제마의 처방은 반복적인 실험을 거쳐 연구한 것으로 절대 부작용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본인을 욕해도 좋지만 처방을 욕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 신의 아닙니까?”그제야 얼굴을 알아본 대표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비록 이제마와 윤대약 모두 유명하지만 이제마의 약은 시장에 거의 유통되지 않아서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으니 처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의 처방은 정말 귀하고 귀했다.“역시 동업자들끼리 말이 통하네요.”염구준이 가볍게 감탄했다.제약 업계에서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이제마의 한마디와 비교할 수 없었다.오기 전에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이제마는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왜냐면 자신이 힘들게 연구한 처방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물을 모으는 도구가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뜻밖의 상황에 자극을 받아 폭주한 것이다.이제마가 본인이 직접 연구한 처방이라도 하자 대표들은 더는 고려하지 않고 열광했다.“젊은이, 조건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다 들어줄게요.”미끼를 던지자마자 거물들이 속속히 낚이기 시작했다.염구준은 눈치 빠르게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었다.이것으로 주도권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밝혔다.그는 뜸을 들이지 않고 조건을 제시했다.“저희를 도와 약을 생산해 주세요. 제가 그만 생산하라고 할 때까지요. 그러면 방금 보여준 처방을 두 손으로 바칠게요.”바로 거래였다.“어떤 약인지 모르겠지만 우선 봐도 되겠습니까?”경각심이 강한 대표가 떠보았다.처방을 내놓을 정도라면 작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바로 신의 물 해독약입니다. 총수량은 많지 않고 지속되는 시간도 길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염구준은 우성재의 멱살을 잡고 높이 쳐들었다.살기가 주변에 퍼지면서 분위기가 썰렁해졌다.그 장면을 보던 대표들은 깜짝 놀랐지만 감히 발걸음을 움직이지 못했다.“아… 아직 생산하지 않았어요.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이에요.”우성재가 버벅거리며 말했다.염구준이 삼선 클럽도 두려워하지 않고 갑자기 돌변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오로지 이제마와 윤대약만 염구준이 돌변한 이유를 알고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타닥타닥!그때 멀리서 제복을 입을 무리가 들어왔다.어느 부대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일을 통제하러 온 것 같았다.“여기 흉악범이 있어요. 빨리 구해주세요!”하지만 일행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염구준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주… 염 선생님도 여기 계셨군요.”우두머리는 백호였다.염구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삼선 클럽을 쫓지 않고 여기는 왜 왔어?”“전에 제거한 신의 물 소굴은 원래 우씨 그룹의 원재료 공장이어서 몇 가지 질문하러 왔습니다.”이 사실은 기밀이 아니어서 모두의 앞에서 보고했다.염구준은 앞뒤 상황을 종합해서 대략 추측했다.우성재와 삼선 클럽은 진작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지만 이번 일로 손실이 커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우성재는 너무 대놓고 일을 벌였다.“데리고 가. 그리고 우씨 제약 공장을 폐쇄하고 낱낱이 조사해. 용하에 어떤 좀벌레도 용납할 수 없다!”염구준은 팔을 흔들어 우성재를 백호에게 던져주었다.“네. 명심하겠습니다.”백호는 처리할 일이 많아 우성재를 끌고 가려고 했다.하지만 우성재가 가만히 있지 않고 소리를 질러 댔다.“너희들 뭐야? 날 체포할 권리가 없어. 내가 누군지 알아?”탁!고함소리에 짜증난 백호가 손에 든 검으로 그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그제야 현장이 조용해졌다.우성재는 삼선 클럽과 결탁해 국민들을 해치는 신의 물을 생산하였으니 십중팔구 사형에 처할 것이다.꿀꺽!그 장면을 보던 대표들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혹시나 연루
전체 골목에 인기척도 없고 대문은 꾹 닫혀 있었다.‘살기다.’점집 입구에 다가간 염구준은 예민한 통찰력으로 수상함을 눈치챘다.시체 산을 걸어온 사람만이 이런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들어가서 제 곁을 떠나지 마세요.”염구준은 옆을 보며 이제마에게 신신당부했다.“알았어요.”이제마도 사태 심각성을 알고 괜한 시비를 걸지 않았다.끼익!대문을 천천히 열고 염구준이 앞장서고 이제마가 바짝 뒤를 따랐다.순간 피 비린 내가 코를 찔렀다.바닥에 흥건하게 흐른 피 외에도 다툰 흔적이 곳곳에 보였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숨어 있지 말고 당장 나와!”염구준은 아무도 없는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그의 실력으로 이 정도 위장술은 바로 알 수 있었다.30분이 지났지만 방 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끼익!하지만 염구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그가 어둠속으로 기운을 발사하자 누가 밖으로 도망치는 기척이 들렸다.스스슥!공격이 멈추자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방금 그들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다.“일개 전신 경지가 부하들을 이끌고 오다니, 실력이 있나 봐.”염구준은 일행의 기운을 감지하고 실력을 판단했다.“넌 누구냐? 왜 여기 왔어? 황지혁과 무슨 사이야?”전신 경지인 우두머리가 경계하며 물었다.방금 공격으로 염구준의 실력을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질문이 많네. 난 아직 묻지도 않았어.”염구준이 대답하지 않았다.“체포해!”말이 끝나자마자 일행이 무기를 들고 염구준에게 돌진했다.그들은 여기서 한동안 매복하고 있었지만 목표물은 나타나지 않고 낯선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쿵쿵!염구준은 공격 자세를 취하더니 일격으로 돌진하는 일행을 물리쳤다.겨우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전신 지경에 이른 한 사람밖에 없었다.그가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염구준이 시탐하려고 그런 것이다.“죽여라!”우두머리는 비틀거리며 고함을 질렀다.상대방을 이길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그는
“나오세요! 밖에 매복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어요.”방안에는 일행과 한 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잠시 후, 그 사람이 방에서 나왔다.바로 점쟁이 노인 옆에 있었던 소녀였다.“대체 무슨 일이야?”염구준이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요.”소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거짓말을 했다.하지만 방금 발생한 장면을 보았는지 말소리에 힘이 없었다.“선생님, 우리 가시죠.”염구준은 소녀와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 바로 돌아섰다.“잠깐만요. 할아버지를 찾아줄 수 있어요? 지금 나쁜 놈들이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해요.”소녀가 다급하게 말했다.할아버지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그럴 실력이 없어서 염구준에게 부탁한 것이다.“마지막 기회야. 너와 할아버지 정체를 말해.”염구준은 돌아서지 않고 나지막하게 말했다.“휴.”어쩔 수 없는 소녀는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저는 황지영이고 할아버지는 황지웅이에요. 우린 삼선도에서 왔어요.”“제가 어릴 때 삼선도가 급변하여 할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여기로 도망쳤어요. 하지만 삼선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우리를 찾아다녔어요. 방금 죽은 일행이 우리를 찾아낸 거예요. 할아버지는 저를 이곳에 숨기고 적을 유인하러 나가셨어요.”그 말을 듣던 염구준은 안색을 굳혔다.실력이 강한 반천인 고수를 뒤쫓을 정도라면 상대방의 실력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하지만 삼선도에서 왜 두 사람을 끈질기게 찾아다녔을까?“저를 도와줄 수 있어요? 그동안 저축한 돈을 전부 드릴게요.”염구준이 한참이나 말하지 않자 황지영은 유일하게 내놓을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하지만 소녀는 염구준이 돈에 관심이 없다는 걸 몰랐다.“난 돈에 관심이 없어. 삼선도에 대해 얘기해 봐. 그러면 도와줄게.”염구준은 희망을 찾았다.삼선도의 정보는 너무 중요했다.필경 삼선 클럽은 표면적인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신의 물을 확실히 제거하려면 근원부터 착수해
염구준은 소녀를 안심시키려고 일단 대답했다.“좋아요. 거짓말하면 안 돼요.”황지영은 별수 없이 믿었다.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나쁜 놈과 같은 배를 탄대도 기꺼이 할 것이다.그 뒤로, 염구준은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누구도 오지 않아 청해로 돌아갔다.가족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 낯선 사람이 더 있었다.“자, 밥만 먹지 말고 반찬도 먹어.”손가을은 전복을 짚어 황지영의 그릇에 담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13, 14살 정도의 어린아이라 식구들은 편하게 대했다.“감사합니다. 언니도 어서 드세요.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해요.”황지영은 반찬으로 꽉 찬 그릇을 보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한 가족이 열정적으로 대하니 저도 모르게 어색해졌다.“하하하. 식사합시다.”염구준은 가족들과 눈빛을 마주치며 다정하게 말했다.식사를 마치고 손가을은 황지영을 데리고 밖에 나가 옷 몇 벌을 사주었다.염희주도 언니라고 친절하게 부르며 뒤를 따랐다.사건 경위에 대해 염구준이 미리 얘기했기에 손가을도 안심할 수 있었다.갑자기 외부인을 데려오면 가족들이 난처해할 것이다.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두 노인은 또 질문하기 시작했다.“구준아, 저 여자애는 어디서 데려왔어?”“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염구준은 사건 경과를 다시 한번 말했다.“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떠돌이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할아버지가 실종됐대요. 너무 안쓰럽네요.”“여기 있고 싶다면 우리 집에 있으라고 해. 희주도 친구 되고 좋잖아.”노인들은 워낙 눈물샘이 많아서 조금만 안타까운 사연을 들어도 바로 눈물을 흘렸다.세상에 비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아 전부 도와줄 수 없지만 한 명이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두 노인은 염구준의 결정에 동의했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집사람들이 동의하자 염구준도 안심했다.세 사람은 한참을 얘기하다가 염구준은 방에 돌아갔다.그리고 최근 발생한 사건을 연결하며 생각을 정리했다.삼선 클럽은 삼선도 소속이고, 삼선 클럽에서 신의 물을 판매하는
포위를 당한 초상비는 도움을 청하는 소리에 힐끔 쳐다볼 뿐 어쩔 방법이 없었다.“벽을 뚫고 벗어나!”용필은 힘이 세고 맷집이 좋지만 군체권밖에 할 줄 몰랐다.일 대 일 싸움은 괜찮은데 여러 명이 달려들면 꼼짝 못했다.“알았어!”용필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맹렬하게 벽을 향해 돌진했다.그러자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펑! 펑!상대방이 계속 따라오자 용필은 철거대처럼 계속 벽을 부수며 전진했다.깜짝 놀란 환자들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용필의 몸뚱이는 끄떡없었지만 그의 몸에 매달린 사람들은 버티지 못했다.“철수한다!”한 사람이 외치자 다들 뿔뿔이 물러섰다.“인질을 데려갔어. 빨리 막아!”그때 한 사람이 의식을 잃은 청년을 업고 병실에서 나가는 장면이 포착되었다.“거기 서!”용필은 외치면서 일행을 덮쳤다.하지만 아직 깁스를 하고 있어서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스스슥!방금 떨어진 일행이 다시 빠른 속도로 용필에게 들러붙었다.거머리 같은 놈들은 서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희한하게 작전을 진행할 때만 손발이 척척 맞았다.두 사람은 발목이 묶여 청년이 납치 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쿵, 쿵!일행은 계단에서 날아오르더니 두 사람을 경계하며 쳐다봤다.이번 작전에 다들 고수들이 출동했다.계단 입구로 들어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약한 실력은 전신 경지에 도달했고, 그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다.상대방은 강력했다.“건방진 놈들. 자기 발로 걸어왔네.”그때 염구준의 목소리가 계단 쪽에서 들리더니 청년을 겨드랑이에 끼고 올라왔다.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청년을 빼앗겼을 것이다.“하하하, 매제. 이제야 왔어?”그를 보자 자신감을 되찾은 용필은 전투력이 급격히 상승했다.“염구준이다!”“철수하자!”염구준을 발견한 상대방은 즉시 결단을 내리고 싸움을 포기했다.모두 작전을 중단하고 뿔뿔이 창밖으로 뛰쳐나갔다.다행히 2층이라 살아남았다.만약 20층이라면 바로 떨어져 즉사했을 것이다.“소란을 피우고
용필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간호사도 혼란스러워서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부상을 당한 초상비는 지금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다.그는 몸놀림이 빠르지만 용필처럼 맷집이 없어서 싸울 때 힘들게 버텼다.“다들 괜찮아?”염구준이 병실에 들어오며 초상비에게 물었다.“찰과상이야. 괜찮아.”초상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이번 일에 실수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아… 여기 어디야?”세 사람이 모여서 얘기 나눌 때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청년이 갑자기 눈을 떴다.방금 싸울 때 충격을 받고 깨어난 것 같았다.그 모습을 본 염구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누군지 알겠어?”“바다에서… 배에서 봤던 사람이요.”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회상하더니 그래도 어렴풋이 기억난 모양이었다.그날 추격당하고 배에 도착했을 때 이미 중상을 입었고, 기절하기 전에 염구준 일행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 사람이 자신을 구한 것이니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청년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서 앉을 수도 없었다.“감사 인사는 됐어. 근데 내가 궁금한 게 있어.”염구준을 손을 흔들었다.그때 각 방면으로 생각해서 청년을 구한 것이지 은혜를 받으려고 구한 것은 아니었다.염구준은 청년을 조용한 병실로 옮기고 얘기하기 시작했다.“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해도 되지만 거짓말을 하지 마.”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알고 있는 건 다 말씀드릴게요.”“먼저 네 정체부터 말해.”염구준이 첫 질문을 던졌다.당일 적들의 정체를 통해 대충 신분을 알았지만 확실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청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저는 황지천이라고 삼선도 봉래에서 왔어요. 저를 죽이려던 일행은 삼선도 사람들이에요. 우리 파벌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를 쫓아내려고 했어요.”청년의 대답에 염구준은 조금 놀랐다.전설속에서만 듣던 방장, 봉래, 영주 등 신
염구준은 속으로 욕했다.‘섬에 사는 사람들은 지리를 안 배우나?’혹은 섬의 통치자가 폭로되지 않기 위해 고위층만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염구준은 몇 가지 더 질문했다.황지천의 신분은 높지 않고 아는 것도 많지 않았다.“알았어. 먼저 쉬고 있어.”얘기를 마친 염구준은 떠나려고 했다.‘황지영과 황지천은 일단 만나게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혹시 섬에 가는 방식을 찾으면 저도 데려가 주실래요?황지천이 간청하며 물었다.“찾으면 그때 가서 얘기하자. 우선은 몸조리 잘해.”아직 확실한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대답할 리가 없었다.탁!염구준이 밖으로 나가자 입구에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치료하러 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하세요?”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삼선도에 나도 가고 싶어.”방금 한 말을 몰래 엿들은 것이다.염구준은 활기찬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상처는 다 나았어요?”“당연하지.”두 사람은 대답하며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그럼 병원에서 황지천을 잘 지켜봐요. 차질이 있으면 책임을 물을 거예요.”염구준은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병원의 보안을 확실히 하기 위해 호찬까지 불렀다.비록 황지천이 삼선도로 돌아가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날 섬에 도착하면 길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했다.옥패에 관한 일이니 염구준은 절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병원을 떠난 그는 바로 도서관에 가서 오래된 서적을 뒤적이며 단서를 찾았다.이 방법은 바다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나았다.한편, 염구준에게 당한 일행은 다양한 방식으로 윗선에 보고했다.그들이 도망친 후, 누가 미행할까 봐 바로 숨어버렸다.“젠장! 또 염구준이야?”어느 별장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보고를 듣자마자 노발대발했다.옆에 있던 우대영과 황지혁은 그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염구준이 얼마나 까다로운 상대인지 그들도 당해봐서 알고 있었다.“도명환, 화를 낼 필요 없어. 이번에 황지웅 늙은이를
“저 자식 데리고 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염구준은 꼴도 보기 싫어서 손을 내저었다.이쪽 일은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네카일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청해에 돌아가고 싶었다.양청화와 네카일이 떠난 뒤, 염구준은 볼라르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들고 듣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했다.“당신이 누군지 몰라도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퍽!그는 상대방에게 경고하고 손에 힘을 주어 휴대폰을 단번에 아작냈다.일개 백작이 왕후를 공격하는 건 말이 안 되었다.그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휴대폰 너머로 영상으로 그 장면을 본 누구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염병! 저 자식이 진짜 나섰어. 이런 빌어먹을 연놈들!”염구준의 실력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해서 정면으로 맞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시체를 분리해서 각자 집으로 보내. 저들이 나를 습격해서 내가 살해했다고 설명하면 돼.”염구준은 성 내의 군사들에게 지시했다.어차피 잡것들이 달려들어도 자신을 죽이지 못하니, 혼자 감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러면 밖에서 그가 아직도 오스크국의 고위층 2 명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염 선생님.”남은 군사들은 대부분 벨의 측근이라 이유를 묻지 않고 지시에 따라 처리했다.염구준은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서 쉬려고 했다.그런데 다급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염 선생님, 범인을 심문하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벨 왕자께서 그쪽으로 오시랍니다.”정말 쉴 틈을 주지 않고 사람을 굴려 먹는 그들 때문에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무슨 상황인지 가서 보죠.”그래도 속으로 유용한 단서가 나오길 바랬다.오스크 황실 감옥.이 감옥은 평소 귀족이나 황실의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 항상 조용했었다.하지만 오늘따라 군사들이 북적거렸다.벨 왕자가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친왕의 시종과 작위가 낮은 귀족들을 체포해, 감옥 내에 온갖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울렸다
“나의 친애하는 왕후여, 평소에 청렴하고 고상하던 분이 뒤에서 이런 남사스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앞장선 남자의 이름은 볼라르, 작위가 낮은 백작이었다.오스크국에서 귀족들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작위로 나뉘어 있었다.볼라르처럼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은 평소 왕후와 말을 건넬 자격도 없었다.“무례합니다. 본인의 신분을 알고 예를 갖추세요. 아니면 바로 벌을 내릴 것입니다.”양청화는 순식간에 기품이 흐르는 왕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염구준은 볼라르 뒤에 따라온 일행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들도 장기말일 뿐, 정작 배후는 나타나지 않았다.“왕후, 창녀처럼 천박하게 굴었으면서 나를 벌한다고요? 웃기지 마세요.”볼라르 백작은 오만하게 말하면서 한 켠으로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왕후를 완전히 보내려는 수작이었다.그와 함께 온 일행은 양청화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아는 사이었군요. 두 사람이 결탁하여 에드로 친왕을 죽인 게 확실합니다.”“애당초에 저도 그런 말을 했어요. 왕후는 우리 종족이 아니니 배척해야 한다고 했는데 국왕이 아예 듣지 않았어요.”“이건 재앙입니다. 외적은 피하기 쉬워도 집안 도둑은 막기 어려운 법이죠.”볼라르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왕후 앞에서 대놓고 거침없이 말했다.오스크국에서는 양청화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종족’이라 불렀다.심지어 그녀가 왕후 자리에 오른 후에도 일부 보수파들은 계속 불만을 품고 항상 끌어내릴 기회를 노렸다.“여군단!”스스슥!양청화의 명령이 떨어지자, 검은 그림자 무리가 그녀의 주변에 나타났다.만약 그녀에게 아무런 수단과 세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볼라르 백작, 휴대폰을 남기고 가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양청화가 마지막 통보를 보냈다.“왜요, 바람피운 것이 들통나니 죽여서 소문을 막으려고요?”볼라르 백작은 그녀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 단정하고 휴대폰을 흔들거리며 조롱했다.“이미 영상을 보냈습니다. 휴대폰을
염구준은 여러 갈래의 검기를 발사하여 네카일을 쓰러트렸지만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하하하, 쓸모없는 녀석. 이것도 막지 못해?”“내가 졌어. 그냥 죽여!”네카일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을 쳐다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어엿한 반보천인 고수가 이 정도로 슬퍼하다니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하지만 왜 우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이제 말할 수 있어?”한참 뒤, 염구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흥, 그녀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너였어. 그런데 넌 오히려 쌀쌀맞게 대하면서 상처를 주었지. 내가 대신 복수할 거야!”네카일은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그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염구준은 쓴웃음을 지었다.“나와 양청화의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 그렇다고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지. 이만 돌아가.”상대방이 이런 일로 찾아왔다면 더는 난감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네카일의 말을 들어 보면 양청화 때문에 오스크국에 남은 것 같았다.그에게 치정적인 면이 있었다니 참 의외였다.“염구준, 너 당장 이혼하고 그녀 곁으로 가. 아니면 내가 용하에 가서 네 아내를 죽여버릴 거야!”네카일은 바닥에 누워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그 말은 염구준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 자신을 협박하는 것은 괜찮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가족을 언급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가 황천길로 보내 줄게.”염구준은 살기를 뿜으며 검으로 네카일을 베려고 했다.그 순간, 한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두 팔을 벌여 네카일을 보호했다.“구준 오빠, 안 돼.”그 사람은 양청화였다.“청… 왕후, 이건 내 일이니 참견하지 마세요!”당황한 네카일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말렸다.그는 양청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오스크국에 남았지만 지금도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양청화가 그를 받아주지 않는 이유는 부귀영화를 포기하는 것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그 사람’때문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녀
염구준은 검을 뽑아들고 빠르게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네카일이 이 난동을 부리는 것인지 제대로 묻기 위해서였다. 한편, 고성 밖에서는 벨이 배치한 경비병들이 황급히 네카일을 막아서서 그를 말리고 있었다.“총사령관님, 제발 돌아가 주십시오! 염 선생님께서는 지금 벨 왕자님의 귀빈이십니다. 건드리면 큰 일 나요!”“두 분 사이 좋으셨잖아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총사령관님, 벨 왕자님께서 얼른 돌아가시랍니다.”그들 역시 자신이 상대방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벨의 충복으로서 명령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꺼져!”그러나 네카일은 그 누구의 체면도 세워주지 않고 포효하며 진기만으로 그들을 밀어냈다.그의 손에 들린 것은, 오래전 염구준이 섬멸한 조직에서 남긴 신병으로, 겉으로 보면 오래된 평범한 도에 불과했는데, 정말 긴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쓰지 않는 것이었다.슈욱.이때, 염구준이 나와 네카일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그저 상대방을 진정시키기 위해 날린 것이라 이 검기에는 많은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쾅!네카일은 쌍도를 교차시켜 제자리에 우뚝 서서 그 검기를 막아냈다. 다만 그의 눈에는 분노가 어려있었다.“왜, 전의 조직의 복수라도 하려는 거야? 갑자기 미쳤어?”염구준은 상대방이 이러는 의도를 몰라 떠물었다.“그 녀석들은 악행을 많이 저질렀으니 죽어도 싸.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건 오스타국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적으로 너와 한 번 붙기 위해서다.”“어디 한 번 붙어볼래?”네카일은 현재 매우 분노한 상태라 그가 내뿜는 기운도 이상하리만치 광포했다. 도의 손잡이를 잡은 그의 두 팔의 핏줄은 이미 불거졌다.지금 그의 눈에 염구준은 부모님을 죽인 원수와도 같았다.“난 이유 모르는 싸움은 안 해. 그러니까 이유 좀 알려주지 그래?”염구준은 이 모든 게 너무 당황스러워 상대방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자 질문했다.“싸움의 이유를 알고 싶다면, 나를 이겨라!”네카일은 말을 마치고는 한 도로 방어를 하면
왕궁은 음모와 배신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양청화가 명을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종 중 한 명이 벌써 이미 증거를 가지고 고발하려고 안드리를 찾아갔다.“안드리 친왕님, 왕후 폐하께서 조금전에 염구준을 만나셨습니다. 이건 제가 몰래카메라로 찍은 화면입니다.”시녀는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이건 엄청난 공적이니까 말이다. 이번 일로 대량의 상금은 물론 어쩌면 귀족의 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안드리 친왕은 스마트폰을 받은 뒤, 영상을 클릭했다.그러나 영상을 보면 볼 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 암캐년이 염구준과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어? 비밀 만남이라니, 왕실의 체면을 정말 깎아내리는군.”“그렇게까지 매달렸는데도 거절을 당하다니, 안타깝기도 하지. 정말 우스운 년이라니까.”시녀는 안드리 친왕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친왕께서 중요한 일이 있으시니 저는 이만 물러가 계속 왕후 폐하를 감시하겠습니다.”“잠깐.”“이 영상이거나 이 일을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줬니?”안드리 친왕은 시녀를 멈춰세우고는 자상하게 물었다. 갑자기 변한 상대방의 태도에 시녀는 망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증거를 확보하자마자 친왕님께 가져왔습니다.”“그렇다면 가서 죽으렴.”안드리 친왕은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장풍을 날려 시녀를 죽여버렸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의 손에 왕후의 약점이 있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쌍한 시녀는 죽을 때까지도 충성을 바쳤던 주군이 왜 자신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 안드리 친왕은 그녀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가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 위대한 사업을 위해 희생했으니 널 기억하마.”이런 헛소리는 그가 자신이 잔인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한 변명에 불과했고, 심리적 위로에 불과했다. 그는 동영상을 한 부 더 복제한 뒤, 밖을 향해 분부했다.
그의 말을 들은 뒤, 양청화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날 찾으러 다녔었어?”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었고,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았다고 원망해왔다.하지만 오늘에서야, 그녀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염구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에효. 그때 널 찾다가 주운 은팔찌는 네 부모님을 돌려드렸어. 그분들도 널 무척이나 그리워하셔.”그때의 일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그녀를 찾지 못한 것이 염구준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날 상처받고 도망친 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 뿐이었다.“내 잘못, 내 잘못이야! 왜 그때, 멋대로 캠프를 떠나서는..”그녀는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지금은 한 나라의 왕후로서 군림하고 있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은 고통과 외로움은 아무도 몰랐다.“후, 다 지나간 일이야. 내가 그때 너무 단호하게 거절했던 잘못도 있어.”염구준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난감한 얼굴로 휴지 한 장을 건넸다.이런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양청화는 눈물을 닦으면서 옛 기억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그때 어두운 보라색의 오피스룩을 입고 오빠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오빠가 계속 말하던 아내분이지?”“미인이시더라.”염구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는데, 목소리에는 전과는 달리 감정이 담겨 있었다.“맞아. 손가을이라고 해. 사이가 무척 좋지.”“축하해.”“솔직히 질투가 나긴 해. 내가 먼저 오빠를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양청화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지만 그녀는 눈물을 삼키고 웃어보였다.불교에서 말하는 팔고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바로 구지부득이었다.“그건 모르는 일이지. 낯선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보기 드무니까 말이야.”그는 불길 속에 있던 아내
이때, 시녀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왕후 폐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후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이에 양청화는 목욕을 마치고 서둘러 일어나며 조금 조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금방 나갈 테니.”물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물에서 갓 나온 연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한편, 후원의 석탁 옆.염구준은 차를 홀짝이며 평온하게 정원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그때의 일은 단순한 사고였다.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그는 후회하지 않았지만 조금 안타까울 뿐이었다.하지만 이제 양청화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그조차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었다.이때, 양청화가 후원에 들어오며 위엄있게 모든 시종들을 내쫓았다.“모두 나가. 내 명령 없이는 절대 들어오지 마.”왕후가 낯선 남자와 단둘이 만난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을 게 없었다.즉, 염구준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위험하고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왔네.’염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보이기도 전에 풍기는 옅은 향기에 그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나한테 이런 수작을 부릴 심산인가?”또각또각.리듬감 있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황실 예복을 입은 양청화가 염구준의 시야에 들어왔다.다른 건 일단 신경 쓰지 않고 말하자면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아니, 단순히 이쁜 것 뿐만 아니라 고귀한 아우라도 느껴졌다.“안 본지가 몇 년인데, 하나도 안 변했네.”무공을 연마한 사람들은 노화를 늦출 수 있었는데, 특히 염구준처럼 강한 무인들은 그 효과가 더욱 강했다.그러니 외모가 크게 변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염구준은 예의있는 미소를 지으며 한층 직설적인 태도로 말했다. “너도 관리 잘했네. 오늘 날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옛정을 나누기 위해서야, 아니면, 그날의 진실을 듣고 싶어서야?”이에 양청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석탁에 앉았다.
오는 길에 이미 현장 사진과 여러 정보를 검토한 덕분에 염구준은 속으로 대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현장에 아무런 저항의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에드로는 한 방에 깔끔하게 처리된 걸 거야.”“전신 위의 실력을 가진 그가 그렇게 당했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야. 하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배신했거나, 다른 하나는 더 강한 반보천인을 만났거나.”“반보천인의 수법은 다양하니, 우선 에드로의 주변 인물부터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염구준의 분석에 따라 현장에서 가장 의심되는 인물은 그와 벨, 두 명뿐이었다.그러나 이 사건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용의자였다.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염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머릿속이 확 트이는군요! 조사 방향을 명확하게 알 것 같아요.”벨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과하게 아부했다. 그는 염구준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조사를 맡긴 이상, 그는 염구준을 무조건 믿을 생각이었다.“됐어, 단서가 많지 않으니 내부 인물부터 조사해 보자.”염구준은 손을 휘저으며 벨의 아첨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겐 아첨 같은 게 통하지 않았다. 또 다른 단서는 메이슨 집사였으나, 너무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 그는 그냥 연막일 가능성이 높았다.“알겠습니다. 바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벨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옆에서 몸을 떨고 있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네카일에게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세 개 부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해.”세 개의 부대에는 총 3만 명이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쓴 걸 보아 이번 조사가 단순히 묻기만 하는 것이 아닌 전면적인 색출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는 아버지인 에드로와는 달리 네카일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었다.1단계 계획을 실행하고 잠시동안은 할 일이 없었다. 다음 계획은 조사가 끝나고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염구준은 명탐정이 아니었다. 다만 철저한 논리적 사고와 예리한 관찰력으로 타겟을 좁혀가는 것 뿐이었다.“염 선생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밀고나갈 필요도 없겠지. 다들 물러나라.”만약 이 상황에서 계속 공격하려고 든다면, 벨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는 결국 병사들에게 물러나도록 지시했다.하지만 안드리 친왕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어 계속 시비를 걸었다.“염구준, 우리 오스타국의 중요 인물 두 명이 죽은 게 모두 너와 연관이 있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는 거냐?”이름까지 부르면서 따지고 묻는 상대방의 태도에도 염구준은 겁 먹지 않고 오히려 비웃으며 대답했다. “니체르는 강제로 사람을 감금하고 연구성과를 빼앗았다. 죽어 마땅하지. 하지만 에드로 친왕의 죽음은 나와 무관해.”“이 대답에 만족해?”“참고로, 나는 지금 너희를 도와주고 있는 거니까 죄인을 심문하듯이 굴지마.”더없이 무례하게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귀족들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너...!”안드리 친왕이 다시 말을 하려는 순간, 양청화의 위엄이 담긴 목소리가 대전 안을 울렸다. “그만. 니체르가 저지른 만행은 다들 알 거라고 믿습니다. 죽어 마땅하죠. 그리고 에드로 친왕의 죽음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으니 우선 제대로 조사하고 결정을 내리죠.”“오스타국 왕실을 대표하여, 염 선생님께 감사를 표합니다.”그녀가 말을 마치자 대전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염구준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아래에 있는 귀족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지만 왕후의 말에 감히 토를 달 수는 없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오스타국의 정치는 조금 특이했는데, 전의 국왕이 늙어서 수명을 다한 탓에 합법적인 후계자인 어린 국왕이 자리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왕세자에 불과했다. 즉, 그의 어머니인 양청화가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이곳에 남기로 한 이상, 저를 모함한 범인을 반드시 잡아내고 말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과거의 인연이 있어서인지, 그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강한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