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한 개인 별장 앞에서 멈췄다. 이승우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외국으로 연수 가라고 했는데 거절했다면서요?”“네...”“그럼 기대해요. 앞으로 많은 일이 일어날 거예요.”이승우는 안전벨트를 풀더니 편한 자세로 고쳐 앉고는 선글라스를 낀 채 나른하게 안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대처할 거예요?”안시연이 말했다.“닥치는 대로 해결해야죠 뭐.”이승우가 고개를 저었다.“그런 생각으로 응하면 안 돼요. 내가 방법 알려줄게요. 단번에 해결할 방법.”안시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방법이라면 오늘 밤 바로 정훈이랑 잠자리를 가지는 거예요.”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안시연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확인한 이승우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임유정이 당신을 괴롭히면 당신은 임유정이 좋아하는 남자를 괴롭히는 거예요. 말 되죠?”안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임유정이 안시연 씨를 그렇게 괴롭히는 데 그냥 참고만 있을 거예요?”“사람이 참고만 살면 안 돼요. 다혈질로 살 필요도 있다니까요.”“내가 안시연 씨면 지금 당장 정훈이를 찾아서 잠자리를 가질 거예요.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엄청 시끌벅적하게요. 다른 건 몰라도 임유정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으니까요.”이 말에 안시연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이승우는 어여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내 말 틀려요?”“모르겠어요. 근데 자꾸만 나쁜 짓 하게 부추기는 것 같아요.”“그럴 리가요. 저는 다 시연 씨를 위해서 그러는 거죠.”창밖에서 누군가 지나가더니 도어를 두드렸다.이승우가 도어를 열더니 그 사람과 몇 마디 너스레를 떨었다.“그래. 먼저 들어가. 금방 갈게.”이승우는 이렇게 말하더니 안시연을 돌아봤다.“내려서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안시연은 차시훈을 얼버무리기 위해 점심에 대강 샐러드만 먹었더니 지금 배고파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저는 다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해요...”“다시 들어가기는, 지각하든 안 하든 임
안시연은 아직 벙찐 상태였다. 하지만 이승우는 그녀를 끌고 사람들 앞으로 다가갔다.그녀는 심장이 덜컹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연정훈의 시선을 피했다.연정훈 옆에 선 젠틀해 보이는 남자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정훈 씨가 자기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처음 보는 이분은 누구세요?”이승우는 연정훈을 한번 쓱 훑더니 일부러 안시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안시연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놀란 토끼 눈으로 이승우를 쳐다봤다.하지만 이승우는 이를 무시한 채 오버하며 말했다.“자기 중에서도 제일 아끼는 자기죠. 일반적인 장소에는 아까워서 부르지도 않아요.”질문을 던진 남자는 분칠하지 않아도 빼어난 안시연의 미모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럴만하네요.”“그렇죠?”이승우는 입을 샐쭉거리더니 연정훈을 향해 턱을 빼 들며 말했다.“연 대표는 어떻게 생각해?”연정훈은 와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시연에게는 아예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괜찮네.”사람들이 놀랐다.연정훈이 여자를 칭찬하는 건 드물었기 때문이다.이승우는 속으로 그런 연정훈에게 콧방귀를 뀌었다.‘괜찮네? 좋아 죽으면서.’이승우가 입을 열려는데 연정훈이 그를 쳐다보며 유유히 입을 열었다.“너랑 있기엔 아깝다.”연정훈의 허를 찌르는 공격에 이승우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화제의 중심에 있는 안시연은 말할 틈이 없었다.이 자리가 너무 불편해 살짝 몸을 돌려 이승우에게서 벗어나려 했다.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말 하는데 이렇게 즐거워요?”여자 목소리였다.그 소리를 들은 안시연은 순간 얼굴이 굳었다.여느 사람들처럼 위로 시선을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임유정이 2층에 서있었다.임유정도 안시연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긴장한 듯한 기색이 스쳤다.안시연은 당하지 않아도 될 변을 당한 걸 생각하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승우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지금이에요. 한 방 제대로 먹어야죠.
“뼈는 안 다쳤대요. 큰 문제 아닙니다.”안시연이 대답했다.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용은 회사에 청구해요.”“감사합니다. 대표님.”무미건조한 대화였다.이승우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비용만 처리해 주면 끝인가? 연 대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은데? 우리 자기 다친 거 안 보여? 심각한 문제 아니라 이거지?”이승우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안시연의 옷깃에 갖다 대더니 단추를 풀려는 시늉을 했다.안시연이 화들짝 놀랐다.맞은편에 있던 연정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옆에 선 사람도 이를 말렸다.이승우는 중도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봤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보여주기라도 할까 봐요?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이승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참 꿈도 야무져.”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안시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 쪽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연정훈은 이미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이리 와 앉아요.”이승우는 그제야 장난을 멈추고는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음식을 이것저것 적지 않게 집어줬다.안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임유정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친절하게 다친 상황에 대해 물었다.“약은 받았어요?”안시연은 덤덤한 태도로 대꾸했다.임유정도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안색이 별로인데 다른 불편한 데는 없어요? 약은 함부로 먹으면 안 돼요. 아는 한의사가 한 분 계시는 데 조금 있다 같이 가볼래요?”“의사가 준 약인데 왜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이승우가 유령처럼 나타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임신한 것도 아닌데.”임신이라는 두 글자에 임유정은 가슴이 조여왔다. 하여 얼른 안시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안시연은 고개를 들더니 이승우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장난이 짓궂으시네요.”그 말은 임신을 부정하는 것과
이승우가 말하면 할수록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고 분위기도 야릇해졌다.남자들끼리 모여있으면 평소에 얼마나 점잖든 간에 살짝만 긴장을 풀어도 화제가 이상한 쪽으로 튀게 된다.안시연은 화제가 계속 연정훈의 입에 난 상처를 둘러싸고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자 핑계를 찾아 자리를 비켰다.“야야, 그만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잖아.”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그러면서 임유정을 쳐다봤다.“임유정 씨야 뭐 우리랑 하도 오래 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지만 말이야.”임유정은 허를 찌르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수줍어하는 안시연과 다르다는 건 임유정의 낯이 두껍다는 말과도 같았다.임유정은 입을 앙다물고는 말했다.“어쩔 수 없죠. 어떤 사람인지 다 아니까 습관이 된 거지.”이승우는 입을 샐쭉거렸다. 임유정의 민낯을 까밝히기 귀찮은 듯한 눈치였다.그의 앞으로 연정훈이 그를 등진 채 살짝 고개를 돌리고 창문 쪽을 바라봤다. 그 각도에서 마침 떠나가는 안시연을 관찰할 수 있었다.안시연은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이승우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이승우는 나쁜 마음은 없어 보였지만 장난기가 너무 심했다.이렇게 생각한 안시연은 주방으로 들어가 직접 야채 과일 주스를 한잔 만들려고 했다.과일을 잘 썰어 믹서기에 넣었다.그러고는 싱크대에 기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돌아보니 연정훈이었다.안시연은 약간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이내 연정훈의 태도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까 밖에서 봤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왠지 모를 실망감이 그녀를 덮쳤지만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물 뜨러 왔어요?”“커피.”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원두를 찾았다.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아까 연정훈이 술을 마셨던 게 떠올랐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금방 술 마셔놓고 또 커피 마시게요?”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은 믹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야채 과일
주방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잠시 후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냥 머리띠 돌려주려고 간 거였어.안시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그녀의 추측이 맞았다.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쉬워진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약속을 잡은 건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찾아온 거지. 나를 외국으로 연수 보내고 싶어 하더라고요.”연정훈은 손가락으로 싱크대를 톡톡 두드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거절했어요.”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얼어붙은 분위기를 아주 쉬운 방법으로 풀어주자 알아서 잘 흘러가기 시작했다.연정훈이 끝내 대꾸했다.‘입술을 깨문 건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겠네.’안시연이 이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빚진 건 아직 갚지 못했다.오늘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연정훈이 하루라도 빨리 빚진 걸 갚으라고 재촉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얼른 갚고 정리하려고 했다.하지만 임유정이 너무 쪼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승우의 시답잖은 농담에 동한 건지 잘 참았다가 임유정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연정훈이 대꾸하자 그녀는 어떻게 말을 이어갈지 고민했다.하지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안시연은 이미 누군지 알아챘다. 하여 입꼬리를 내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정서가 나타나는 제스처를 보고는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추켜세웠다.임유정이 그쪽으로 걸어갔다.둘만 있는 걸 발견하고는 몰래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연정훈에게 물었다.“전에 내가 도와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연정훈은 야채 과일 주스를 다시 집어 들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요 며칠 다시 전화해서 확인해 볼게.”임유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부탁한 일이 연정훈에겐 작은 일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났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건 그냥 얼렁뚱땅 흘려넘기겠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임유정은 안시연 앞에서 체면이 구겨지는 건 싫어 흠잡을 데 없이
별장 밖.이승우 등 사람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별장 안에서 있은 일을 토론했다.“승우 씨, 자기라면서 저렇게 양보해도 되는 거예요?”“별 수 있나요? 형제는 가족과도 같고 여자는 옷과도 같다는데. 우리 연 대표가 점 찍어둔 여자를 내가 양보해야지.”이승우가 입만 열면 헛소리를 퍼부었다.“역시 승우 씨는 의리 넘친다니까.”“그럼요. 당연하죠.”계단 아래 가방을 들고 있는 임유정은 낯빛이 하얘졌다.이승우가 마침 이를 발견하고는 유유히 1층으로 내려가 잔뜩 기를 채웠다.“아이고, 임유정 씨. 왜? 옆집이라도 같이 갈래요?”임유정은 지금 이 순간 정말 이승우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아니요.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요.”“아, 바쁘구나?”이승우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그런 임유정이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그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피부 관리 잘해요. 나이도 적은 건 아닌데.”임유정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안시연은 뒷마당 행랑에 서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에 인조 온천이 하나 있었다.여자 도우미가 다가와 그녀에게 준비한 옷을 건네줬다.“대표님께서 필요한 물품 준비해서 가져다드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반신욕을 좀 즐기세요.”안시연은 사색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도우미가 물러갔다.텅 빈 주위를 보고 그녀는 잠깐 넋을 잃었다.연정훈은 아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안시연에게 남으라고 했다. 안시연은 감히 몸을 돌려 문어구에 서 있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기 두려웠다.임유정은 옆으로 지나가며 죽일듯한 표정으로 안시연을 노려봤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가슴에 난 상처가 은근히 아팠다. 의사에게 전화해 확인해 보니 확실히 온천에 몸을 담그면 통증이 완화된다고 했다.연정훈은 없었다. 안시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한창
안시연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연정훈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이승우도 숨겨진 꼼수를 눈치챘는데 그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임유정 얘기를 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참 너는 운명이 기구해.”“...”“직접 새 직장을 찾더니 꽤 위험해 보이는데?”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연정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교수님, 설마 지금 복수라도 하는 거예요?”연정훈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안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요즘 진짜 재수 없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요.”그러니 연정훈까지 거들지 말라는 소리였다.연정훈은 옆에 피워둔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힐끔 쳐다보더니 유유히 말했다.“안전한 길을 알려줬는데 네가 거절했잖아.”“내가요?”안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의 연정훈을 바라보며 최근에 자기가 겪은 일련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러더니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어떤 길을 선택하든 다 나를 괴롭힐 사람은 있어요. 그냥 상대만 다를 뿐이지.”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내 제안에 그럴 사람이 누군데?”안시연은 할말을 잃었다.물을 잔뜩 머금은 손을 온천탕 변두리에 올려놓더니 가볍게 움켜쥐었다.한참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괴롭힐 사람은 없죠. 근데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아서 미안해요. 마음도 불편하고.”“가식적이긴.”연정훈이 이렇게 평가했다.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냥 너는 내가 괴롭힐 거라고 생각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지.”안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다른 길은 너를 괴롭히려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내가 제안한 길은 너를 괴롭힐 사람이 나뿐이야.”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갈래 길인데 그렇게 어렵나?”안시연이 대답했다.“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싶어요.”“그거야 쉽지.”그는 큰 문제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서 무슨 좋은 수라도 대주듯 말을 이어갔다.“내가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게 잘 홀
연정훈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연고를 짜서는 멍이 든 자리에 꾹 눌렀다. 그 손짓이 약했다 강했다를 반복할 때마다 안시연은 작은 탄식을 뱉어냈다.“조금만 참아. 멍은 펴주면 빨리 나아.”또 이런 입에 발린 소리로 안시연을 홀렸다.안시연은 입을 앙다문 채 최대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상반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리는 점점 꽉 조여졌다.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를수록 그녀는 연정훈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감지했다.그녀는 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연정훈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연고를 다 바를 때까지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그는 아무렇게나 연고를 내려놓고 안시연을 돌아보더니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연정훈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안시연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순간 그는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다독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꽉 조이지 말고 편하게 앉아.”그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순간 안시연은 머리에서 쿵 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얼굴이 빨개진 안시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에 준 힘을 풀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중심을 잃었다.연정훈이 제때 그녀를 부드럽게 받쳐줬다.그의 체온이 얇디얇은 옷감을 통해 전해졌다. 남녀 간의 은밀한 암호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향과 함께 뇌를 자극했다.안시연은 연정훈과의 관계를 떠올렸다.그녀는 지금 연정훈에게 빚진 상태였다.하지만 그녀는 연정훈이 지금 하고 싶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말캉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외할머니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어요...”그가 하고 싶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연정훈은 여기서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장난기가 발동해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아직 4시도 안 됐어.”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역시 연정훈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그녀는 주위를 빙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승우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동생이라니? 내 작은고모!”부승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안 믿어.”이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신 양시연과 잡담을 나누며 웨이터에게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그러다 부승희가 갑작스레 이승우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양시연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지만, 부승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다.옆에서 연정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 상황을 구경했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왜? 내 약점을 들춰내려는 거야?”부승희는 물러설 기미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말했잖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이승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이승우의 어색한 침묵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승우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성격답게 대답을 내뱉었다.“헤어졌어.”부승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그래? 왜?”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그는 결국 혀를 차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부승희의 머리를 밀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그때 모연준이 화원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이승우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려다 잠시 멈칫하고 다시 넣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이승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동생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아니지, 고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승희는 이승우가 받기도 전에 손을 놓아 종이봉투가 떨어질 뻔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어 앉아 이승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과 눈을 맞췄다.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정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불편한 상황이 더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조용히 양시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옷 갈아입어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알게 될 거야.”부승희는 ‘으악’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무서워. 진짜 무서워.”부승희는 팔을 내밀어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요. 소름 돋는 거 봐요. 완전 실시간 소름 돋았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심코 던진 고백 같은 말에 이미 당황해 심장이 두근거리던 참이었다.부승희의 말에 더해 머리까지 뜨거워진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승희의 팔을 잡고 살짝 움켜쥐었다.부승희는 침묵했다.“...”‘정말 어이없네.’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승우가 젊은 여자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훈남 훈녀 조합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부승희는 헉하는 소리를 내며 관심을 보였다.양시연은 이 틈을 타 어색함을 벗어나려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건가요?”연정훈은 힐끔 그쪽을 보며 답했다.“잘 모르겠어. 별 얘기 없었는데.”대화하는 동안 이승우와 그 여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부승희는 의자에 기대어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이승우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가벼운 태도로 여자를 소개했다.“윤린아 씨, 내 친구야.”부승희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친구라고?”이승우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왜? 친구가 뭔지 몰라?”“다른 사람 친구는 아는데 넌 잘 모르겠네.”“...”윤린아는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정확히 말하면 이승우 도련님은 제 클라이언트예요. 아주 중요한 고객이죠.”그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밝게 웃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윤린아가 떠나자 부승희는 이승우를 힐끔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여자친구야?”이승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너는 생각이 왜 이렇게 복잡해? 친구라고 했잖아.”부승희는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짓고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바
주변은 다시 한번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부승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술잔에 과일 주스를 채우려 했다. 이승우의 주책을 떠드는 입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연정훈은 술잔을 살짝 옮겨 부승희의 손길을 피했다.다들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부승원은 차분한 얼굴로 부승희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됐어. 앉아. 연정훈의 작전 방해하지 마. 인생에서 한 번뿐인 대사건이라고.”부승희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시연 씨, 내가 도우려 했는데 소용없네요. 오늘 밤 스스로 조심해야겠어요.”양시연은 침묵했다.“...”주변 사람들이 또 한 번 들고 일어나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 양시연의 손을 잡고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술잔을 올리는 틈을 타서 연정훈은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가리고 낮게 말했다.“술 좀 적게 마셔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았다.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투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보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연정훈은 입술을 살짝 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그 후에는 못 피할 거야.”양시연은 당황했다.???아직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주변에서 누군가 빠르게 외쳤다.“다들 들었어요? 신랑이 신부를 협박했어요! 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이후에는 못 피한다네요!” “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짓고 말을 꺼낸 사람과 잔을 부딪치며 술을 단숨에 비웠다.그 사람도 금방 눈치를 채고 한 잔을 비우며 웃었다.“형, 신혼여행 가서는 너무 심하게 굴지 말아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이 사람들 정말...’양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술잔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으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했지만, 손을 내밀기 무섭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손을 꽉 잡았다.연정훈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양지원은 계속해서 양시연 쪽 상황을 신경 쓰고 있었다. 비록 민수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기분이 상한 양지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양석진이 양지원을 붙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가서 시연을 좀 봐야겠어요.”“거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시연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수 없어.”양지원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맞은편 테이블에 고정돼 있었다.연씨 가문의 테이블에서는 모두가 동시에 민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그 안에 비난의 기류가 느껴졌다.‘제발 이성적으로 행동해 주시길.’민수희는 침묵했다.“...”사실 민수희는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기분까지 엉망인 상태에서 억지로 이 자리에 나왔다. 그런 와중에 이런 상황을 마주하자 갑작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민수희의 가족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지 않는 듯했다.“시연아,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오늘은 술을 마시기 힘드신가 보다.”표세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양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표세연은 직접 민수희의 잔에 주스를 따르며 다정하게 몇 마디를 건네려 했다.그러나 민수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그녀를 바라봤다.표세연의 손이 멈췄고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연호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수희의 얼굴이 굳어졌다.“할머니가 오늘 몸이 좀 불편하시니 이 잔은 할아버지가 대신할게. 너희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연호민은 말을 마치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잔을 두 사람을 향해 들어 올렸다.양시연과 연정훈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잔을 낮춰 깊이 예를 표했다.연호민이 자리에 앉자 민수희는 무언가 말하려다 연호민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삼켰다.“세연아,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아 보이신다. 안으로 가서 쉬실 수 있도록 부축해 드리거
양시연은 연정훈의 이마를 만져보고 자기 이마도 만져보며 온도를 비교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양시연의 맑고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연정훈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더구나 그녀는 도망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변명까지 해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괜히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결국 문제는 자신의 질투심이었다.특히 양혁수와 얽힐 때마다 몸이 시큰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별일 아니야. 며칠 밤새웠더니 좀 어지러워서 그래.”“밤새웠어요?”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밤새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저도 이틀 전부터 일부러 일찍 자고 있었는데.”그녀는 가방을 열어 에너지 음료 몇 개를 꺼냈다.포장을 뜯어 하나씩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마셔요.”연정훈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이게 다 뭐야?”“청심환이에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마셔요. 우리 이제 결혼까지 했잖아요. 제가 결혼하자마자 과부 되려고 정훈 씨를 해코지라도 하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양시연은 직접 음료 하나를 집어 들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옷에 흘리지 않으려 양시연의 손목을 살짝 잡고 음료를 마셨다.“남은 것도 다 마셔요.”양시연이 단호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치 독약이라도 마시는 듯한 표정으로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전부 마시고 나서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연정훈은 짧게 생각한 뒤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달달하네.”양시연은 두 손을 모으며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했다.“세상에! 맛까지 맞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맞아요. 달달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단맛이요. 제가 물어
“네. 맹세합니다.”양시연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자 연정훈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객석에서는 이승우와 다른 하객들이 저마다 속삭이며 미소를 지었다.‘다행이다. 모든 게 완벽해.’단상 위에서 사회자가 말했다.“이제 양가의 신랑과 신부가 결혼반지를 교환하겠습니다.”부승희가 조심스럽게 반지 상자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왔다.상자 안에는 양시연의 외할머니가 남긴 유품인 반지가 담겨 있었다.그 반지는 결혼식 며칠 전 연정훈이 직접 양시연에게 부탁해 받아 간 것이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셈이라 생각해.”양시연은 처음에는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반지를 내어주기 꺼렸지만, 결국 마음을 열었다.그녀는 결혼이라는 큰 순간이 단순히 계약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유산으로 증명되는 한 조각의 따스함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위안을 삼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들어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그 반지는 그녀의 손에 완벽히 맞았다.분명 그의 세심한 배려로 조정되었을 것이다.“이제 신부님 차례입니다.”부승희가 조용히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들어 올렸다.잠시 연정훈을 바라본 뒤 그의 손을 가만히 떠받치며 반지를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그 순간 그녀는 베일 너머로 나지막이 속삭였다.“이번엔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잘못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잠긴 무거운 감정을 씻어내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감정은 한순간 억눌리며 불쾌함보다는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왔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입술을 열었다.“그럴 일 없을 거야.”양시연은 그제야 반지를 끝까지 밀어서 끼워줬다.현장에는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사회자가 위쪽에서 말했다.“신랑님, 이제 신부에게 입맞춤하셔도 됩니다.”이때 관객석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승우 등 하객들이 여기저기서 장난스럽게 외쳤다.부승희는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시끄럽게 굴긴.”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희를 힐끗 보
결혼식 입구 모퉁이에 서서 바깥 햇빛이 발끝에 딱 맞게 드리워졌다.양시연은 결혼행진곡 멜로디를 가볍게 흥얼거리며 잠시 후 발을 잘못 내딛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양석진이 부드럽게 말했다.“긴장하지 마. 설령 실수하더라도 괜찮아.”양시연은 베일 너머로 고개를 돌려 양석진을 바라봤다.“긴장되세요?”양석진은 잠시 멈칫했다.오늘에 이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양석진은 오랜 세월 동안 충분히 단련되었기에 긴장할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양시연의 말에 맞춰 양석진은 이렇게 말했다.“긴장되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마침내 잔디 쪽에서 음악이 울려 퍼졌다.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양석진의 팔을 잡았다.그녀가 첫발을 내딛자 뒤따르던 두 명의 브라이드 메이드가 양시연의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야외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차양이 설치되어 있었고 위에는 냉방 장치가 있어 온도는 적당했으며 햇살은 길 전체에 찬란히 비추고 있었다.잔디 구역 모퉁이를 돌며 걸을 때까지는 양시연도 비교적 평온했지만, 연정훈을 향해 곧바로 이어지는 하얀 실크 러그 위에 발을 디딘 순간 양시연은 자기 심장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주변의 시선은 모두 차단되었다.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연정훈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그 순간마다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이 떠올랐다.첫 만남은 대학교에서였다.그 당시 그는 교양 강의를 맡은 교수였고 멀리서 보았을 때 양시연은 연정훈이 젊고 준수하며 뛰어난 기품을 지닌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다.그렇게 쉽게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연정훈을 부러워했었다.그 후로 이어진 만남은 하나하나 양시연에게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었다.심지어 황당했던 재회조차 양시연은 연정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 후로는 더 황당한 관계가 지속되었다.연정훈과의 만남과 사랑은 마치 꿈과 같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꿈은 깨어났고 남은 것은 참담한 기억과 되돌아보기 힘든 고통뿐이었다.양
“다행히 따로 준비한 웨딩드레스가 있어서요. 게다가 지금 메이크업이랑도 딱 어울리네요.”직원이 말했다.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여러분, 정말 죄송해요.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나중에 제가 모두에게 작은 감사 선물을 준비할게요.”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힘들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다들 최선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시간을 계산해 보며 크게 지연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휴대폰을 꺼내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하자 연정훈의 답장은 단 한 글자였다.[응.]‘응?’양시연은 의아했다.연정훈을 하루 이틀 아는 것도 아니고 특히 최근엔 그가 이렇게 건성으로 대답한 적이 거의 없었다.‘무슨 일이지?’아까의 상황을 곰곰이 떠올리던 양시연은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맙소사. 정훈 씨, 혹시 내가 도망치려고 한 거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그런 게 아니었고 양시연은 양지원을 찾으러 간 거였다!양시연은 황급히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 아까 엄마를 찾으러 간 거예요.]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연정훈의 답장은 짧았다.[알았어.]연정훈은 이모티콘 하나 없이 대답했지만, 양시연은 그가 딱딱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을 것 같아 괜히 긴장되었다.얼굴을 한 번 비비며 다시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저 정말로...]도망가려던 게 아니라는 말이 채 쓰이기도 전에 연정훈의 답장이 먼저 왔다.[괜찮아. 어머니 찾는 거 도와줄까? 아까 우연히 뵀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그 메시지를 보고 한 글자씩 천천히 해독하듯 읽어보았다.‘겉으로 보기엔 문제없어 보이는데?’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결혼식 끝나고 말할게요. 여기 거의 다 준비됐어요.][알았어. 기다릴게.]마지막 메시지를 보자 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다행이다. 다행이야.’그녀는 다시 한번 연정훈은 이렇게 예민할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
양지원이 전화를 받지 않자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웨딩드레스를 움켜쥐고 급히 걷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코너를 돌자마자 연정훈을 마주쳤다.연정훈은 양시연의 다급한 표정과 웨딩드레스를 움켜쥔 모습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어디 가는 거야?”“저...”말끝이 채 맺히기도 전에 양시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하였고 그것이 양혁수였다!그녀는 얼굴이 밝아지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여보세요?”“응...”양혁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연정훈과 눈을 마주친 후 옆으로 밀고는 물었다.“괜찮아? 부하가 너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이어갔다.연정훈은 옆에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시선을 돌렸다.양혁수는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 친구가 좀 과장했나 봐.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약간 흔들렸는데 내가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어서 허리를 살짝 부딪혔어.”“정말 괜찮은 거지?”“응. 멀쩡해. 그냥 검진받고 이따가 협력사랑 식사 약속도 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행이다.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겠어.”“알았어. 알았어. 그 정도로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끊을게. 검진받아야 하거든.”“그래. 검사 다 끝나고 아무 이상 없으면 나랑 어머니한테 안부 꼭 전해.”“알았어.”양혁수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양시연은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연정훈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방금 양혁수가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대요.”‘다행히 아무 일 없다. 하지만 방금 일이 있었으면 양시연은 결혼식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려 했던 걸까?’연정훈은 목이 마른 듯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어서 다행이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돌아서려다 갑자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