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는 안 다쳤대요. 큰 문제 아닙니다.”안시연이 대답했다.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용은 회사에 청구해요.”“감사합니다. 대표님.”무미건조한 대화였다.이승우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비용만 처리해 주면 끝인가? 연 대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은데? 우리 자기 다친 거 안 보여? 심각한 문제 아니라 이거지?”이승우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안시연의 옷깃에 갖다 대더니 단추를 풀려는 시늉을 했다.안시연이 화들짝 놀랐다.맞은편에 있던 연정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옆에 선 사람도 이를 말렸다.이승우는 중도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봤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보여주기라도 할까 봐요?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이승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참 꿈도 야무져.”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안시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 쪽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연정훈은 이미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이리 와 앉아요.”이승우는 그제야 장난을 멈추고는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음식을 이것저것 적지 않게 집어줬다.안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임유정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친절하게 다친 상황에 대해 물었다.“약은 받았어요?”안시연은 덤덤한 태도로 대꾸했다.임유정도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안색이 별로인데 다른 불편한 데는 없어요? 약은 함부로 먹으면 안 돼요. 아는 한의사가 한 분 계시는 데 조금 있다 같이 가볼래요?”“의사가 준 약인데 왜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이승우가 유령처럼 나타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임신한 것도 아닌데.”임신이라는 두 글자에 임유정은 가슴이 조여왔다. 하여 얼른 안시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안시연은 고개를 들더니 이승우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장난이 짓궂으시네요.”그 말은 임신을 부정하는 것과
이승우가 말하면 할수록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고 분위기도 야릇해졌다.남자들끼리 모여있으면 평소에 얼마나 점잖든 간에 살짝만 긴장을 풀어도 화제가 이상한 쪽으로 튀게 된다.안시연은 화제가 계속 연정훈의 입에 난 상처를 둘러싸고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자 핑계를 찾아 자리를 비켰다.“야야, 그만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잖아.”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그러면서 임유정을 쳐다봤다.“임유정 씨야 뭐 우리랑 하도 오래 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지만 말이야.”임유정은 허를 찌르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수줍어하는 안시연과 다르다는 건 임유정의 낯이 두껍다는 말과도 같았다.임유정은 입을 앙다물고는 말했다.“어쩔 수 없죠. 어떤 사람인지 다 아니까 습관이 된 거지.”이승우는 입을 샐쭉거렸다. 임유정의 민낯을 까밝히기 귀찮은 듯한 눈치였다.그의 앞으로 연정훈이 그를 등진 채 살짝 고개를 돌리고 창문 쪽을 바라봤다. 그 각도에서 마침 떠나가는 안시연을 관찰할 수 있었다.안시연은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이승우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이승우는 나쁜 마음은 없어 보였지만 장난기가 너무 심했다.이렇게 생각한 안시연은 주방으로 들어가 직접 야채 과일 주스를 한잔 만들려고 했다.과일을 잘 썰어 믹서기에 넣었다.그러고는 싱크대에 기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돌아보니 연정훈이었다.안시연은 약간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이내 연정훈의 태도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까 밖에서 봤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왠지 모를 실망감이 그녀를 덮쳤지만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물 뜨러 왔어요?”“커피.”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원두를 찾았다.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아까 연정훈이 술을 마셨던 게 떠올랐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금방 술 마셔놓고 또 커피 마시게요?”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은 믹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야채 과일
주방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잠시 후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냥 머리띠 돌려주려고 간 거였어.안시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그녀의 추측이 맞았다.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쉬워진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약속을 잡은 건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찾아온 거지. 나를 외국으로 연수 보내고 싶어 하더라고요.”연정훈은 손가락으로 싱크대를 톡톡 두드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거절했어요.”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얼어붙은 분위기를 아주 쉬운 방법으로 풀어주자 알아서 잘 흘러가기 시작했다.연정훈이 끝내 대꾸했다.‘입술을 깨문 건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겠네.’안시연이 이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빚진 건 아직 갚지 못했다.오늘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연정훈이 하루라도 빨리 빚진 걸 갚으라고 재촉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얼른 갚고 정리하려고 했다.하지만 임유정이 너무 쪼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승우의 시답잖은 농담에 동한 건지 잘 참았다가 임유정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연정훈이 대꾸하자 그녀는 어떻게 말을 이어갈지 고민했다.하지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안시연은 이미 누군지 알아챘다. 하여 입꼬리를 내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정서가 나타나는 제스처를 보고는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추켜세웠다.임유정이 그쪽으로 걸어갔다.둘만 있는 걸 발견하고는 몰래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연정훈에게 물었다.“전에 내가 도와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연정훈은 야채 과일 주스를 다시 집어 들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요 며칠 다시 전화해서 확인해 볼게.”임유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부탁한 일이 연정훈에겐 작은 일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났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건 그냥 얼렁뚱땅 흘려넘기겠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임유정은 안시연 앞에서 체면이 구겨지는 건 싫어 흠잡을 데 없이
별장 밖.이승우 등 사람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별장 안에서 있은 일을 토론했다.“승우 씨, 자기라면서 저렇게 양보해도 되는 거예요?”“별 수 있나요? 형제는 가족과도 같고 여자는 옷과도 같다는데. 우리 연 대표가 점 찍어둔 여자를 내가 양보해야지.”이승우가 입만 열면 헛소리를 퍼부었다.“역시 승우 씨는 의리 넘친다니까.”“그럼요. 당연하죠.”계단 아래 가방을 들고 있는 임유정은 낯빛이 하얘졌다.이승우가 마침 이를 발견하고는 유유히 1층으로 내려가 잔뜩 기를 채웠다.“아이고, 임유정 씨. 왜? 옆집이라도 같이 갈래요?”임유정은 지금 이 순간 정말 이승우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아니요.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요.”“아, 바쁘구나?”이승우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그런 임유정이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그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피부 관리 잘해요. 나이도 적은 건 아닌데.”임유정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안시연은 뒷마당 행랑에 서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에 인조 온천이 하나 있었다.여자 도우미가 다가와 그녀에게 준비한 옷을 건네줬다.“대표님께서 필요한 물품 준비해서 가져다드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반신욕을 좀 즐기세요.”안시연은 사색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도우미가 물러갔다.텅 빈 주위를 보고 그녀는 잠깐 넋을 잃었다.연정훈은 아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안시연에게 남으라고 했다. 안시연은 감히 몸을 돌려 문어구에 서 있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기 두려웠다.임유정은 옆으로 지나가며 죽일듯한 표정으로 안시연을 노려봤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가슴에 난 상처가 은근히 아팠다. 의사에게 전화해 확인해 보니 확실히 온천에 몸을 담그면 통증이 완화된다고 했다.연정훈은 없었다. 안시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한창
안시연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연정훈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이승우도 숨겨진 꼼수를 눈치챘는데 그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임유정 얘기를 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참 너는 운명이 기구해.”“...”“직접 새 직장을 찾더니 꽤 위험해 보이는데?”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연정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교수님, 설마 지금 복수라도 하는 거예요?”연정훈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안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요즘 진짜 재수 없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요.”그러니 연정훈까지 거들지 말라는 소리였다.연정훈은 옆에 피워둔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힐끔 쳐다보더니 유유히 말했다.“안전한 길을 알려줬는데 네가 거절했잖아.”“내가요?”안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의 연정훈을 바라보며 최근에 자기가 겪은 일련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러더니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어떤 길을 선택하든 다 나를 괴롭힐 사람은 있어요. 그냥 상대만 다를 뿐이지.”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내 제안에 그럴 사람이 누군데?”안시연은 할말을 잃었다.물을 잔뜩 머금은 손을 온천탕 변두리에 올려놓더니 가볍게 움켜쥐었다.한참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괴롭힐 사람은 없죠. 근데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아서 미안해요. 마음도 불편하고.”“가식적이긴.”연정훈이 이렇게 평가했다.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냥 너는 내가 괴롭힐 거라고 생각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지.”안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다른 길은 너를 괴롭히려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내가 제안한 길은 너를 괴롭힐 사람이 나뿐이야.”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갈래 길인데 그렇게 어렵나?”안시연이 대답했다.“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싶어요.”“그거야 쉽지.”그는 큰 문제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서 무슨 좋은 수라도 대주듯 말을 이어갔다.“내가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게 잘 홀
연정훈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연고를 짜서는 멍이 든 자리에 꾹 눌렀다. 그 손짓이 약했다 강했다를 반복할 때마다 안시연은 작은 탄식을 뱉어냈다.“조금만 참아. 멍은 펴주면 빨리 나아.”또 이런 입에 발린 소리로 안시연을 홀렸다.안시연은 입을 앙다문 채 최대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상반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리는 점점 꽉 조여졌다.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를수록 그녀는 연정훈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감지했다.그녀는 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연정훈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연고를 다 바를 때까지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그는 아무렇게나 연고를 내려놓고 안시연을 돌아보더니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연정훈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안시연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순간 그는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다독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꽉 조이지 말고 편하게 앉아.”그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순간 안시연은 머리에서 쿵 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얼굴이 빨개진 안시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에 준 힘을 풀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중심을 잃었다.연정훈이 제때 그녀를 부드럽게 받쳐줬다.그의 체온이 얇디얇은 옷감을 통해 전해졌다. 남녀 간의 은밀한 암호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향과 함께 뇌를 자극했다.안시연은 연정훈과의 관계를 떠올렸다.그녀는 지금 연정훈에게 빚진 상태였다.하지만 그녀는 연정훈이 지금 하고 싶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말캉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외할머니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어요...”그가 하고 싶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연정훈은 여기서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장난기가 발동해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아직 4시도 안 됐어.”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역시 연정훈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그녀는 주위를 빙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연정훈의 판단은 정확했다. 찾아온 사람은 이승우가 맞았다!보통 사람은 초인종을 몇 번 눌러도 인기척이 없으면 그냥 갈 법도 한데 이승우는 달랐다. 초인종을 계속 누르면서 한편으로 놀려대기까지 했다.“연 대표, 아직 큰일 다 못 치렀나 봐?”“시간 좀 내지?”쿵! 쿵! 쿵!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셔츠를 부여잡았다. 노크 소리에 점점 몸이 굳어갔고 혀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연정훈에게 먼저 뽀뽀하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문 열어줘요. 중요한 일이면 어떡해요.”중도에 방해받았으니 그 어떤 남자도 기분이 좋지는 못할 것이다.안시연의 허리를 감싸안은 연정훈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휘감더니 다가오는 그의 키스를 살짝 피하고는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릴게요.”이 말에 연정훈의 숨결이 한층 더 가빠졌다. 달콤한 약속에 대한 타협이었다.그는 안시연의 볼에 가볍게 뽀뽀하고는 그녀를 놓아주더니 말했다.“딱 기다리고 있어.”안시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그녀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다시 의자에 살포시 내려주었다.그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기 전 고개를 숙여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운을 위로 조금 올려주었다.이에 안시연은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는 가운을 다시 고쳐 입었다.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는 앞마당으로 나가 이승우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연정훈의 발소리가 멀어졌지만 안시연의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다.앞마당.문이 열리고 이승우는 평소와는 달리 옷이 흐트러져 있는 연정훈을 보고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놀려댔다.“오늘은 먹이를 배불리 줬어? 넉넉히 줘. 그러다 또 물리는 수가 있다?”연정훈은 이승우가 약을 올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용건 있어?”“많이 급
안시연이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연정훈은 이미 소파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안시연은 연정훈을 그렇게 버려둘 수 없어 씻은 포도를 들고는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연정훈은 여전히 그녀를 자기 다리 위에 앉게 했지만 다음 액션은 없었다.안시연은 그런 연정훈을 바라보며 통화를 계속했다.하지만 통화 상대가 갑자기 바뀌었다.“시연아, 나야.”안시연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주지혁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알아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표정 변화를 읽어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지혁이 스피커폰이라고 켜고 있을까 봐 안시연은 최대한 톤을 줄였다.“병원에는 왜 간 거야?”주지혁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보러 왔지. 같이 얘기도 해드릴 겸.”안시연은 그가 아무렇게나 떠들까 봐 마음이 불안했다.하지만 주지혁은 능글맞게 얘기했다.“오늘은 한가해서 좀 더 있다가 갈 거야."“시연아, 퇴근하면 지하철 타지 말고 데리러 갈게.”“저녁에 할머니 모시고 같이 밥이나 먹자.”수화기 너머로 노인네가 주지혁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전 같으면 행복하다고 느꼈을 텐데 지금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주지혁은 할머니를 뵈러 간 게 아니라 그녀를 협박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간병인에게 신신당부했지만 결국 주지혁은 할머니를 만났다.무언가를 터트리려면 식은 죽 먹기였다.안시연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알아서 갈 테니까 할머니 잘 챙겨.”주지혁은 안시연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안시연은 온몸이 굳은 채로 핸드폰을 부여잡았다.연정훈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고 나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이 좀 풀렸다.“누구 전화야?”그는 알면서 일부러 물었다.“할머니예요.”“근데 왜 기분이 안 좋아?”안시연이 잠깐 침묵하더니 고개를 숙였다.“주지혁이 할머니 보러 갔다고 해서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설명했다.“할머니 얼마 전에 심장 수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