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는 안 다쳤대요. 큰 문제 아닙니다.”안시연이 대답했다.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용은 회사에 청구해요.”“감사합니다. 대표님.”무미건조한 대화였다.이승우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비용만 처리해 주면 끝인가? 연 대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은데? 우리 자기 다친 거 안 보여? 심각한 문제 아니라 이거지?”이승우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안시연의 옷깃에 갖다 대더니 단추를 풀려는 시늉을 했다.안시연이 화들짝 놀랐다.맞은편에 있던 연정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옆에 선 사람도 이를 말렸다.이승우는 중도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는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봤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보여주기라도 할까 봐요?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이승우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참 꿈도 야무져.”구경하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안시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 쪽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연정훈은 이미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이다.“이리 와 앉아요.”이승우는 그제야 장난을 멈추고는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음식을 이것저것 적지 않게 집어줬다.안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임유정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친절하게 다친 상황에 대해 물었다.“약은 받았어요?”안시연은 덤덤한 태도로 대꾸했다.임유정도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안색이 별로인데 다른 불편한 데는 없어요? 약은 함부로 먹으면 안 돼요. 아는 한의사가 한 분 계시는 데 조금 있다 같이 가볼래요?”“의사가 준 약인데 왜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이승우가 유령처럼 나타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임신한 것도 아닌데.”임신이라는 두 글자에 임유정은 가슴이 조여왔다. 하여 얼른 안시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안시연은 고개를 들더니 이승우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장난이 짓궂으시네요.”그 말은 임신을 부정하는 것과
이승우가 말하면 할수록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고 분위기도 야릇해졌다.남자들끼리 모여있으면 평소에 얼마나 점잖든 간에 살짝만 긴장을 풀어도 화제가 이상한 쪽으로 튀게 된다.안시연은 화제가 계속 연정훈의 입에 난 상처를 둘러싸고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자 핑계를 찾아 자리를 비켰다.“야야, 그만해. 아가씨가 부끄러워하잖아.”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그러면서 임유정을 쳐다봤다.“임유정 씨야 뭐 우리랑 하도 오래 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지만 말이야.”임유정은 허를 찌르는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수줍어하는 안시연과 다르다는 건 임유정의 낯이 두껍다는 말과도 같았다.임유정은 입을 앙다물고는 말했다.“어쩔 수 없죠. 어떤 사람인지 다 아니까 습관이 된 거지.”이승우는 입을 샐쭉거렸다. 임유정의 민낯을 까밝히기 귀찮은 듯한 눈치였다.그의 앞으로 연정훈이 그를 등진 채 살짝 고개를 돌리고 창문 쪽을 바라봤다. 그 각도에서 마침 떠나가는 안시연을 관찰할 수 있었다.안시연은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이승우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이승우는 나쁜 마음은 없어 보였지만 장난기가 너무 심했다.이렇게 생각한 안시연은 주방으로 들어가 직접 야채 과일 주스를 한잔 만들려고 했다.과일을 잘 썰어 믹서기에 넣었다.그러고는 싱크대에 기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돌아보니 연정훈이었다.안시연은 약간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이내 연정훈의 태도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까 밖에서 봤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왠지 모를 실망감이 그녀를 덮쳤지만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물 뜨러 왔어요?”“커피.”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원두를 찾았다.하지만 몸을 돌리자마자 아까 연정훈이 술을 마셨던 게 떠올랐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금방 술 마셔놓고 또 커피 마시게요?”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은 믹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야채 과일
주방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잠시 후 연정훈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냥 머리띠 돌려주려고 간 거였어.안시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그녀의 추측이 맞았다.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쉬워진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약속을 잡은 건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찾아온 거지. 나를 외국으로 연수 보내고 싶어 하더라고요.”연정훈은 손가락으로 싱크대를 톡톡 두드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거절했어요.”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얼어붙은 분위기를 아주 쉬운 방법으로 풀어주자 알아서 잘 흘러가기 시작했다.연정훈이 끝내 대꾸했다.‘입술을 깨문 건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겠네.’안시연이 이렇게 생각했다.하지만 빚진 건 아직 갚지 못했다.오늘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연정훈이 하루라도 빨리 빚진 걸 갚으라고 재촉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얼른 갚고 정리하려고 했다.하지만 임유정이 너무 쪼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승우의 시답잖은 농담에 동한 건지 잘 참았다가 임유정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연정훈이 대꾸하자 그녀는 어떻게 말을 이어갈지 고민했다.하지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안시연은 이미 누군지 알아챘다. 하여 입꼬리를 내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정서가 나타나는 제스처를 보고는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추켜세웠다.임유정이 그쪽으로 걸어갔다.둘만 있는 걸 발견하고는 몰래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연정훈에게 물었다.“전에 내가 도와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연정훈은 야채 과일 주스를 다시 집어 들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요 며칠 다시 전화해서 확인해 볼게.”임유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부탁한 일이 연정훈에겐 작은 일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났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건 그냥 얼렁뚱땅 흘려넘기겠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임유정은 안시연 앞에서 체면이 구겨지는 건 싫어 흠잡을 데 없이
별장 밖.이승우 등 사람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별장 안에서 있은 일을 토론했다.“승우 씨, 자기라면서 저렇게 양보해도 되는 거예요?”“별 수 있나요? 형제는 가족과도 같고 여자는 옷과도 같다는데. 우리 연 대표가 점 찍어둔 여자를 내가 양보해야지.”이승우가 입만 열면 헛소리를 퍼부었다.“역시 승우 씨는 의리 넘친다니까.”“그럼요. 당연하죠.”계단 아래 가방을 들고 있는 임유정은 낯빛이 하얘졌다.이승우가 마침 이를 발견하고는 유유히 1층으로 내려가 잔뜩 기를 채웠다.“아이고, 임유정 씨. 왜? 옆집이라도 같이 갈래요?”임유정은 지금 이 순간 정말 이승우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아니요.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서요.”“아, 바쁘구나?”이승우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그런 임유정이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그는 혀를 끌끌 차더니 말했다.“피부 관리 잘해요. 나이도 적은 건 아닌데.”임유정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안시연은 뒷마당 행랑에 서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에 인조 온천이 하나 있었다.여자 도우미가 다가와 그녀에게 준비한 옷을 건네줬다.“대표님께서 필요한 물품 준비해서 가져다드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반신욕을 좀 즐기세요.”안시연은 사색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도우미가 물러갔다.텅 빈 주위를 보고 그녀는 잠깐 넋을 잃었다.연정훈은 아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안시연에게 남으라고 했다. 안시연은 감히 몸을 돌려 문어구에 서 있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기 두려웠다.임유정은 옆으로 지나가며 죽일듯한 표정으로 안시연을 노려봤다.안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가슴에 난 상처가 은근히 아팠다. 의사에게 전화해 확인해 보니 확실히 온천에 몸을 담그면 통증이 완화된다고 했다.연정훈은 없었다. 안시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한창
안시연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연정훈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이승우도 숨겨진 꼼수를 눈치챘는데 그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임유정 얘기를 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참 너는 운명이 기구해.”“...”“직접 새 직장을 찾더니 꽤 위험해 보이는데?”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연정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교수님, 설마 지금 복수라도 하는 거예요?”연정훈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안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요즘 진짜 재수 없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요.”그러니 연정훈까지 거들지 말라는 소리였다.연정훈은 옆에 피워둔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힐끔 쳐다보더니 유유히 말했다.“안전한 길을 알려줬는데 네가 거절했잖아.”“내가요?”안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의 연정훈을 바라보며 최근에 자기가 겪은 일련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러더니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어떤 길을 선택하든 다 나를 괴롭힐 사람은 있어요. 그냥 상대만 다를 뿐이지.”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내 제안에 그럴 사람이 누군데?”안시연은 할말을 잃었다.물을 잔뜩 머금은 손을 온천탕 변두리에 올려놓더니 가볍게 움켜쥐었다.한참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괴롭힐 사람은 없죠. 근데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아서 미안해요. 마음도 불편하고.”“가식적이긴.”연정훈이 이렇게 평가했다.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냥 너는 내가 괴롭힐 거라고 생각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지.”안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다른 길은 너를 괴롭히려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내가 제안한 길은 너를 괴롭힐 사람이 나뿐이야.”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갈래 길인데 그렇게 어렵나?”안시연이 대답했다.“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싶어요.”“그거야 쉽지.”그는 큰 문제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서 무슨 좋은 수라도 대주듯 말을 이어갔다.“내가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게 잘 홀
연정훈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연고를 짜서는 멍이 든 자리에 꾹 눌렀다. 그 손짓이 약했다 강했다를 반복할 때마다 안시연은 작은 탄식을 뱉어냈다.“조금만 참아. 멍은 펴주면 빨리 나아.”또 이런 입에 발린 소리로 안시연을 홀렸다.안시연은 입을 앙다문 채 최대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상반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리는 점점 꽉 조여졌다.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를수록 그녀는 연정훈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감지했다.그녀는 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연정훈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연고를 다 바를 때까지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그는 아무렇게나 연고를 내려놓고 안시연을 돌아보더니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연정훈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안시연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순간 그는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다독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꽉 조이지 말고 편하게 앉아.”그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순간 안시연은 머리에서 쿵 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얼굴이 빨개진 안시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에 준 힘을 풀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중심을 잃었다.연정훈이 제때 그녀를 부드럽게 받쳐줬다.그의 체온이 얇디얇은 옷감을 통해 전해졌다. 남녀 간의 은밀한 암호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향과 함께 뇌를 자극했다.안시연은 연정훈과의 관계를 떠올렸다.그녀는 지금 연정훈에게 빚진 상태였다.하지만 그녀는 연정훈이 지금 하고 싶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말캉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외할머니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어요...”그가 하고 싶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연정훈은 여기서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장난기가 발동해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아직 4시도 안 됐어.”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역시 연정훈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그녀는 주위를 빙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연정훈의 판단은 정확했다. 찾아온 사람은 이승우가 맞았다!보통 사람은 초인종을 몇 번 눌러도 인기척이 없으면 그냥 갈 법도 한데 이승우는 달랐다. 초인종을 계속 누르면서 한편으로 놀려대기까지 했다.“연 대표, 아직 큰일 다 못 치렀나 봐?”“시간 좀 내지?”쿵! 쿵! 쿵!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셔츠를 부여잡았다. 노크 소리에 점점 몸이 굳어갔고 혀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연정훈에게 먼저 뽀뽀하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문 열어줘요. 중요한 일이면 어떡해요.”중도에 방해받았으니 그 어떤 남자도 기분이 좋지는 못할 것이다.안시연의 허리를 감싸안은 연정훈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휘감더니 다가오는 그의 키스를 살짝 피하고는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릴게요.”이 말에 연정훈의 숨결이 한층 더 가빠졌다. 달콤한 약속에 대한 타협이었다.그는 안시연의 볼에 가볍게 뽀뽀하고는 그녀를 놓아주더니 말했다.“딱 기다리고 있어.”안시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그녀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다시 의자에 살포시 내려주었다.그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기 전 고개를 숙여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운을 위로 조금 올려주었다.이에 안시연은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는 가운을 다시 고쳐 입었다.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는 앞마당으로 나가 이승우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연정훈의 발소리가 멀어졌지만 안시연의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다.앞마당.문이 열리고 이승우는 평소와는 달리 옷이 흐트러져 있는 연정훈을 보고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놀려댔다.“오늘은 먹이를 배불리 줬어? 넉넉히 줘. 그러다 또 물리는 수가 있다?”연정훈은 이승우가 약을 올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용건 있어?”“많이 급
안시연이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연정훈은 이미 소파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안시연은 연정훈을 그렇게 버려둘 수 없어 씻은 포도를 들고는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연정훈은 여전히 그녀를 자기 다리 위에 앉게 했지만 다음 액션은 없었다.안시연은 그런 연정훈을 바라보며 통화를 계속했다.하지만 통화 상대가 갑자기 바뀌었다.“시연아, 나야.”안시연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주지혁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알아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표정 변화를 읽어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지혁이 스피커폰이라고 켜고 있을까 봐 안시연은 최대한 톤을 줄였다.“병원에는 왜 간 거야?”주지혁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보러 왔지. 같이 얘기도 해드릴 겸.”안시연은 그가 아무렇게나 떠들까 봐 마음이 불안했다.하지만 주지혁은 능글맞게 얘기했다.“오늘은 한가해서 좀 더 있다가 갈 거야."“시연아, 퇴근하면 지하철 타지 말고 데리러 갈게.”“저녁에 할머니 모시고 같이 밥이나 먹자.”수화기 너머로 노인네가 주지혁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전 같으면 행복하다고 느꼈을 텐데 지금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주지혁은 할머니를 뵈러 간 게 아니라 그녀를 협박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간병인에게 신신당부했지만 결국 주지혁은 할머니를 만났다.무언가를 터트리려면 식은 죽 먹기였다.안시연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알아서 갈 테니까 할머니 잘 챙겨.”주지혁은 안시연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안시연은 온몸이 굳은 채로 핸드폰을 부여잡았다.연정훈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고 나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이 좀 풀렸다.“누구 전화야?”그는 알면서 일부러 물었다.“할머니예요.”“근데 왜 기분이 안 좋아?”안시연이 잠깐 침묵하더니 고개를 숙였다.“주지혁이 할머니 보러 갔다고 해서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설명했다.“할머니 얼마 전에 심장 수술
부승원이 이상하다.이건 며칠 동안 모든 회사 직원이 내린 결론이었다.“그제부터 자꾸 사소한 실수를 하셨어.”“맞아. 자꾸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기도 하고.”“아까는 내가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다미 씨라고 부른 거 있지? 난 강아영인데.”양시연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회의실을 지나치다가 그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양시연도 요즘 들어 부승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는데...그게 바로 반우희였다!반우희는 늘 간식 시간이 되면 시간 맞춰 양시연의 주변을 맴돌며 간식을 먹는 낙으로 살았었다.그런데 이 며칠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니 먼저 말을 걸어도 속이 불편해 간식을 끊었다며 거절했었다.‘참 이상하단 말이지!’반우희는 부승원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그래서 부승원의 비서부터 손을 쓰기로 했다비서는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으나 털어놓은 사람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시연에게 낮은 소리로 속닥였다.“백 퍼센트 두 사람이 싸운 거예요. 그것도 엄청 크게 다툰 거죠.”“정말요?”양시연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다퉈요?”사실상 부승원이 늘 우세를 가지고 반우희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비서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러니까 흥미로운 거죠. 우리 변호사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일이면 아주 큰 일 아니겠어요?”그리고 비서는 주변을 살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어쩌면 아주 민망한 일인지도 몰라요. 변호사님이 실수한 거라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그 말에 양시연은 점점 호기심이 깊어져 갔다.오후 시간, 사람이 드물 때를 틈타 양시연은 길 가던 반우희를 잡아 사무실로 끌었다.“어어! 이러시면 안 돼요!”반우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으나 양시연이 임신한 걸 생각해 결국 얌전히 끌려갔다.“시연 언니 왜 그래요?”양시
부승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어떻게 입을 열지 난감했다.그래서 말없이 조용해진 반우희를 자꾸 힐끔거렸다.‘오늘 밤 일에 대해 반우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그러다가 자신의 이미지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생각되었고 인상을 찌푸린 채로 크게 심호흡했다.다른 한편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반우희는 사실... 부승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감히 부승원을 바라볼 자신이 없는 거였다.‘젠장! 어떡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너무 어색해 죽을 것 같아.’반우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목도리를 다시 두르며 부승원을 애써 외면했다.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릴 때면 방금 부승원과 키스했던 게 떠올라 부승원이 오해라도 할까 빠르게 표정을 풀었다.‘엉엉... 어떡해.’반우희는 순결을 빼앗긴 것 같아 입술을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예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마음이 부승원의 한방에 아예 무너지고 있었다.회사 다니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집 청소 알바는 이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마주치면 그냥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을 것이다.‘내가 부자 되는 꼴을 못 봐요.’부승원은 반우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오로지 붕괴된 이미지를 되찾으려는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자신이 얼마나 반우희를 신경 쓰고 있는지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하지만 부승원은 자신이 반우희의 눈에 변태로 보이는 건 피하고 싶었다.두 사람이 동상이몽을 하는 동안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유리문을 통해 보니 부승원의 차가 도착한 게 보였다.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온몸으로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문은 무거운 편이라 반우희는 힘에 부쳤지만, 부승원이 바로 그 뒤에 서서 손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문이 손쉽게 열렸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다가 빠르게 틈을 타 밖으로 나섰다.그리고 부승원도 그 뒤를 따르려는데 반우희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오지 마세요!”반우희는 뒷걸음질하며 말했다.“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세요. 안
반우희는 어려운 고민 끝에 위층으로 올라가 핸드폰을 가져오기로 했다.‘가방만 챙기고 튀는 거야.’‘부승원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어쨌든 부승원이 먼저 시작한 거니까 나한테 책임은 없어.’‘그래. 그게 맞아!’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고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그런데 엘리베이터는 바로 1층에 멈춰 섰다.‘응?’‘이런 우연이?’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먼저 타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반우희는 그 사람이 부승원 일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고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바로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이번엔 부승원이 한발 빠르게 반우희 패딩 모자를 확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이 닫히고 반우희는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두 사람은 다른 버튼을 누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부승원은 무의식적으로 반우희를 잡았으나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했다.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자 얌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그때, 머리 위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목소리에서 알코올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집으로 가려고?”반우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걸 아는 사람이 물어?’“일단 이거부터 놓고 말해요...”반우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자에서 손을 놓았다. 자신이 모자를 움켜쥔 흔적이 남자 대신 정리도 해주었다.반우희는 모자가 불편하게 느껴져 손을 뻗어 정리하려 했다.그러다가 부승원의 손과 닿게 되었다.그 순간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했고 황급히 손을 내렸다.“...”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는 너무 이상했고 부승원은 다시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래서 모자를 정리해 주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반우희는 밖으로 쏙 나가버렸다.그 뒤의 남자도 따라 밖으로 나왔다.반
부승원은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고 현재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다만 알코올의 힘을 빌려 내일은 잠시 잊기로 했다.부승원은 키스 한 번으로 부족했고 머릿속엔 오래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엔 키스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일을 했었다.반우희와의 키스는 달콤했고 점점 더 욕심이 났다. 그래서 반우희의 손목을 잡고 품 안으로 더 넣었다.그러다가 반우희의 숨소리가 가빠지자 부승원은 다정하게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또 참지 못하고 얼굴을 맞대다가 반우희의 귓불에 키스했다.반우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먼 곳의 크리스탈 조명을 바라보다가 점점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그래서 부승원이 방심한 사이 손을 뻗어 단숨에 부승원을 밀어냈다.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던 부승원은 자칫하다가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그러나 부승원은 다행히 자세를 바로잡아 떨어지는 불상사를 피했고 반우희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다시 소파 등받이로 밀려났다.등 뒤로 푹신한 소파 쿠션이 느껴졌고 안 그래도 어지럽던 머릿속이 확 밀려 뒤죽박죽이 되어갔다.반우희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러나 고민하다가 빠르게 몸을 돌려 도망을 갔다.부승원은 소파에 멍하니 앉은 채로 머리를 재부팅했다.그때, 반우희는 빠르게 집 밖으로 나갔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어 1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의 자신을 확인하며 이마의 온도를 체크했다. 사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빨갛게 되었을지는 예상이 되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매만지며 아직 남은 온기를 느꼈다.그러자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띵.아래층에 도착하고 반우희는 멍하니 밖을 걸었다. 그리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서는 찰나 찬 바람이 불어오자 지하철을 타려면 핸드폰이 필요하다는 게 떠올랐다!‘핸드폰을 어디에 뒀더라?’‘
반우희는 이번만큼은 먼저 예상했던 터라 부승원과 너무 가깝게 붙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더니 부승원을 향해 손가락질했다.“또 볼 꼬집으려고 그러는 거죠? 흥, 꿈 깨요!”‘내가 이 볼살을 찌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걸 변호사님이 홀랑 꼬집게 할 수는 없지.’‘흥흥.’이런 생각을 하며 부승원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부승원은 가만히 자리에 기댄 채로 물끄러미 반우희를 바라봤다. 부승원의 시선은 깜빡이는 반우희의 눈에서 발그스름한 두 볼, 그리고 입술로 떨어졌다.그러다가 부승원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부승원도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러나 술을 마신 덕에 그 생각이 잘못된 거라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반우희는 여전히 부승원의 손과 씨름을 하고 있었고 부승원이 한 번 더 끌어당기자 또 눈앞으로 다가갔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젠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그만 좀 해요!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요!’그러나 그때,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던 부승원이 갑작스레 고개를 들더니 반우희의 앞으로 다가갔다.하마터면 코끝이 닿을 뻔했고 깜짝 놀란 반우희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손이 꽉 잡혀 겨우 고개만 살짝 돌릴 수 있었다.반우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부승원이 잠시 멈칫했다.그렇게 시선이 마주치고 부승원은 여전히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반우희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부승원이 키스하려는 것 같았다!그래서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뻗어 부승원을 밀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변, 변호사님, 이 집에 홈캠이 있는 걸 알고 있는데 내일 아침 후회...”부승원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입술로 향하자 반우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그리고 예상대로 부승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점점 더 다가왔다.처음 닿은 입술이 차가웠으나 말랑거렸다.반우희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쿵쿵...반우희는 머릿속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반우희는 깜짝 놀라버렸다!양시연한테 몰래 했던 말인데 부승원이 어떻게 알아버린 걸까!‘설마 시연 언니가...’‘시연 언니 나빠!’반우희는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고 따뜻한 모자까지 쓰고 있는 탓에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부정을 했고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뒤로 물러서며 손가락질했다.“변호사님 사실 취한 거 아니죠?”“그래.”‘뭐지?’방금 부승원의 볼을 잡아당기던 행동이 떠올라 반우희는 깜짝 놀라버렸고 손까지 덜덜 떨렸다.그래서 도망이라도 갈까 했는데 몰래 살펴본 부승원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왜 그러지?’반우희는 한 번 더 곁눈질했다.‘정말 취한 거야? 아닌 거야?’‘술 마신 사람들은 보통 취해도 아닌 척하잖아.’반우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다가가 부승원을 휙 밀쳤다.부승원은 여전히 표정 변화 한번 없었다.그래서 반우희는 긴장되던 기분이 조금 풀어졌고 좀 더 용기를 내어 손가락으로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부승원은 어이가 없어 차가운 시선으로 반우희를 노려보았다.그러나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는 부승원을 보며 반우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내리 쓸었다.“아, 깜짝이야. 정말 멀쩡한 줄 알았잖아요.”그리고 그 옆으로 척 앉으며 말을 꺼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건 다 시연 언니가 변호사님한테 잘 보이려고 거짓말한 거예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시연 씨가 알려줬다고 말한 적 없어.”반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겨우 안심했던 심장이 다시 쿵쿵 뛰었다. 그래서 몰래 부승원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정말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멀쩡한 것 같은데?’부승원은 반우희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가 시선을 고정했다.더 정확하게는 반우희의 볼살로 향했다.모자가 꽉 쪼인 탓에 볼살이 더 통통하게 보였다.양시연이 자주 반우희의 볼살을 꼬집던 걸 부승원도 지켜봤었다.반우희는 어떻게 변명을 늘어놓을지
부승원이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반우희는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부승원이 눈을 깜빡이자 웃음을 터뜨렸다.이어 반우희는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어서 이만 가볼게요.”그리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고쳐 썼고 부승원을 향해 말했다.“침대까지 부축해 줄 게요. 오늘엔 샤워도 하지 말고 내일 아침 일어나서 하는 게 어때요?”부승원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반우희가 눈을 반짝였다.“꿀물이 이렇게 효과가 좋은 건가?”부승원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정말 멍청하긴.’‘꿀물이 무슨 보약도 아니고.’부승원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가 떠나려는 걸 지켜봤다. 반우희는 지하철을 놓치면 높은 비용의 택시를 타야 한다고 말했다.부승원은 손을 뻗어 반우희의 손목을 잡았다.기사를 불러 반우희를 바래다주게 하겠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사실 부승원은 반우희가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계속 종알거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왜 그래요?”반우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잡힌 손을 바라봤다.“뭐예요? 손 놔야 내가 부축하죠.”부승원은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척을 했다.더 정확하게는 반우희가 바라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방으로 데려가면 반우희는 힘들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그 시선에 기분이 이상해진 반우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렇게 말했다.“부승원 씨, 손 놔줘요. 나 이만 집에 가봐야 한다니까요?”반우희는 아주 나긋하게 부승원을 타일렀다.부승원은 잡힌 손에서 땀이 나는 게 느껴졌고 또 방금 반우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게 묘하게 느껴졌다.“들려요?”반우희가 또 부승원을 톡톡 두드렸다.그러나 부승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다가 다른 손으로 반우희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었다.반우희는 깜짝 놀라 두 눈을 커다랗게 떴고 부승원은
부승원이 줄곧 한마디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이 술에 잔뜩 취해 필름이 끊긴 상황이라 짐작했다.그래서 목에 걸었던 가방을 다시 내려 두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척 끼며 말했다.“저기요. 내가 누군지 기억해요?”“...”부승원이 아무 대답 없자 반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모르면 다행이고.’그리고 그 옆으로 풀썩 주저앉더니 한참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했다.이어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향해 말했다.“이따가 꿀물 타 줄 게요. 그거 마시는 것만 보면 난 이만 갈 거예요.”부승원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해요.”반우희는 일방적으로 대답을 했다.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반우희는 빠르게 주방으로 향하더니 예쁘게 포장된 꿀을 찾아 꿀물을 타기 시작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며칠 전부터 그곳에 둔 간식을 욕심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꿀단지 옆에는 치즈와 쿠키 등 다양한 간식이 놓여 있었다.반우희는 그 안에 둔 간식을 쫙 꺼내더니 하나하나 고르며 말했다.“변호사님은 꿀만 드시고 다른 건 잘 먹지도 않으시니 그냥 두면 낭비예요. 낭비.”그리고 그 간식을 죄다 본인의 가방에 담는 게 아니겠는가?“...”‘내가 취한 거지. 죽은 것도 아니잖아.’반우희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간식을 챙겼고 부승원을 향해 아이 달리듯 말했다.“거기 가만히 누워 있어요. 바로 돌아올게요.”부승원은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나 반우희가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했던 걸 떠올리며 간신히 참았다.‘헤헤.’반우희는 술에 취해 흐트러진 부승원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그래서 다가와 두 볼을 꼭 쥐며 말했다.“아이고 착하지.”부승원은 깜짝 놀라 버렸다.‘지금 이게...’반우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꿀물에 집중했다.그리고 꿀물을 컵에 담고 빨대를 꽂아 부승원의 옆으로 다가와 건넸다.부승원은 늘 반우희가 사고뭉치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엔 컵에 빨대까지 꽂아 온 센스를 보며 너무 멍청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양시연이 연정훈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집으로 향한 것과는 달리, 술에 취한 부승원은 휘청거리며 겨우 차에 올랐다.얼마 뒤, 기사는 부승원의 오피스텔 아래로 주차했다.부승원은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핸드폰에 찍힌 월급이 눈에 들어왔다.‘부부가 그래도 양심은 있군. 돈은 넉넉하네.’그러나 부승원은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너무 어지럽기도 하고 연정훈이 늘 씀씀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대표님, 위층으로 모실까요?”“괜찮아요.”부승원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몸을 바로 세웠다.기사는 안심이 되지 않아 차에서 내려 부승원의 팔을 부축했다.차에서 내린 부승원은 찬 바람을 좀 쐬고 나니 취기가 좀 가시는 것 같아 기사를 먼저 보냈다.그리고 밝은 달빛을 빌어 오피스텔 안으로 걸어갔다.그런데 왠지 술김에 뭔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그때 오피스텔 안에서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려왔고 부승원은 그제야 그게 무엇인지 떠올랐다.바로 반우희였다.반우희가 지금 본인의 집에 있는 것이었다.부승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예상 대로 하얀 토끼 모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반우희는 오늘도 긴 토끼 모자를 쓰고 눈 코 입을 제외한 머리는 꽁꽁 싸매진 상태였다. 그리고 하얀색 패딩까지 입어 더 동글동글해 보였다.부승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섰고 하얀 토끼는 눈을 깜빡깜빡했다.부승원이 술을 많이 마신 걸 알아차린 반우희는 눈치를 보다가 몰래 도망칠 생각을 했다.반우희가 인사를 할 생각이 없자 부승원은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내가 반우희한테 못해 준 게 뭐가 있어? 일자리도 찾아주고 골치 아픈 소송도 해결해 주고 집에 둔 간식도 먹게 해줬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라고 인사도 하지 않고 날 피하는 거야!’그 생각을 하며 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했고 반우희가 슬쩍 자리를 떠나자 너무 화가 나 호흡이 거칠어졌다.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