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연정훈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이승우도 숨겨진 꼼수를 눈치챘는데 그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는 임유정 얘기를 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참 너는 운명이 기구해.”“...”“직접 새 직장을 찾더니 꽤 위험해 보이는데?”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연정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교수님, 설마 지금 복수라도 하는 거예요?”연정훈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안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요즘 진짜 재수 없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요.”그러니 연정훈까지 거들지 말라는 소리였다.연정훈은 옆에 피워둔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힐끔 쳐다보더니 유유히 말했다.“안전한 길을 알려줬는데 네가 거절했잖아.”“내가요?”안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의 연정훈을 바라보며 최근에 자기가 겪은 일련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러더니 그런 자신을 비웃었다.“어떤 길을 선택하든 다 나를 괴롭힐 사람은 있어요. 그냥 상대만 다를 뿐이지.”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내 제안에 그럴 사람이 누군데?”안시연은 할말을 잃었다.물을 잔뜩 머금은 손을 온천탕 변두리에 올려놓더니 가볍게 움켜쥐었다.한참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괴롭힐 사람은 없죠. 근데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아서 미안해요. 마음도 불편하고.”“가식적이긴.”연정훈이 이렇게 평가했다.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그냥 너는 내가 괴롭힐 거라고 생각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지.”안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다른 길은 너를 괴롭히려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내가 제안한 길은 너를 괴롭힐 사람이 나뿐이야.”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두 갈래 길인데 그렇게 어렵나?”안시연이 대답했다.“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고 싶어요.”“그거야 쉽지.”그는 큰 문제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서 무슨 좋은 수라도 대주듯 말을 이어갔다.“내가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게 잘 홀
연정훈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연고를 짜서는 멍이 든 자리에 꾹 눌렀다. 그 손짓이 약했다 강했다를 반복할 때마다 안시연은 작은 탄식을 뱉어냈다.“조금만 참아. 멍은 펴주면 빨리 나아.”또 이런 입에 발린 소리로 안시연을 홀렸다.안시연은 입을 앙다문 채 최대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상반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리는 점점 꽉 조여졌다.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를수록 그녀는 연정훈의 몸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감지했다.그녀는 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연정훈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그러면서도 연고를 다 바를 때까지 동작은 멈추지 않았다.그는 아무렇게나 연고를 내려놓고 안시연을 돌아보더니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연정훈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안시연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순간 그는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다독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꽉 조이지 말고 편하게 앉아.”그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순간 안시연은 머리에서 쿵 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얼굴이 빨개진 안시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에 준 힘을 풀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중심을 잃었다.연정훈이 제때 그녀를 부드럽게 받쳐줬다.그의 체온이 얇디얇은 옷감을 통해 전해졌다. 남녀 간의 은밀한 암호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향과 함께 뇌를 자극했다.안시연은 연정훈과의 관계를 떠올렸다.그녀는 지금 연정훈에게 빚진 상태였다.하지만 그녀는 연정훈이 지금 하고 싶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말캉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외할머니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어요...”그가 하고 싶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연정훈은 여기서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말에 장난기가 발동해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아직 4시도 안 됐어.”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역시 연정훈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그녀는 주위를 빙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연정훈의 판단은 정확했다. 찾아온 사람은 이승우가 맞았다!보통 사람은 초인종을 몇 번 눌러도 인기척이 없으면 그냥 갈 법도 한데 이승우는 달랐다. 초인종을 계속 누르면서 한편으로 놀려대기까지 했다.“연 대표, 아직 큰일 다 못 치렀나 봐?”“시간 좀 내지?”쿵! 쿵! 쿵!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셔츠를 부여잡았다. 노크 소리에 점점 몸이 굳어갔고 혀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연정훈에게 먼저 뽀뽀하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문 열어줘요. 중요한 일이면 어떡해요.”중도에 방해받았으니 그 어떤 남자도 기분이 좋지는 못할 것이다.안시연의 허리를 감싸안은 연정훈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휘감더니 다가오는 그의 키스를 살짝 피하고는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릴게요.”이 말에 연정훈의 숨결이 한층 더 가빠졌다. 달콤한 약속에 대한 타협이었다.그는 안시연의 볼에 가볍게 뽀뽀하고는 그녀를 놓아주더니 말했다.“딱 기다리고 있어.”안시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그녀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다시 의자에 살포시 내려주었다.그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기 전 고개를 숙여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운을 위로 조금 올려주었다.이에 안시연은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는 가운을 다시 고쳐 입었다.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는 앞마당으로 나가 이승우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연정훈의 발소리가 멀어졌지만 안시연의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다.앞마당.문이 열리고 이승우는 평소와는 달리 옷이 흐트러져 있는 연정훈을 보고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놀려댔다.“오늘은 먹이를 배불리 줬어? 넉넉히 줘. 그러다 또 물리는 수가 있다?”연정훈은 이승우가 약을 올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용건 있어?”“많이 급
안시연이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연정훈은 이미 소파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안시연은 연정훈을 그렇게 버려둘 수 없어 씻은 포도를 들고는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연정훈은 여전히 그녀를 자기 다리 위에 앉게 했지만 다음 액션은 없었다.안시연은 그런 연정훈을 바라보며 통화를 계속했다.하지만 통화 상대가 갑자기 바뀌었다.“시연아, 나야.”안시연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주지혁의 목소리임을 단번에 알아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표정 변화를 읽어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지혁이 스피커폰이라고 켜고 있을까 봐 안시연은 최대한 톤을 줄였다.“병원에는 왜 간 거야?”주지혁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보러 왔지. 같이 얘기도 해드릴 겸.”안시연은 그가 아무렇게나 떠들까 봐 마음이 불안했다.하지만 주지혁은 능글맞게 얘기했다.“오늘은 한가해서 좀 더 있다가 갈 거야."“시연아, 퇴근하면 지하철 타지 말고 데리러 갈게.”“저녁에 할머니 모시고 같이 밥이나 먹자.”수화기 너머로 노인네가 주지혁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예전 같으면 행복하다고 느꼈을 텐데 지금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주지혁은 할머니를 뵈러 간 게 아니라 그녀를 협박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간병인에게 신신당부했지만 결국 주지혁은 할머니를 만났다.무언가를 터트리려면 식은 죽 먹기였다.안시연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알아서 갈 테니까 할머니 잘 챙겨.”주지혁은 안시연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안시연은 온몸이 굳은 채로 핸드폰을 부여잡았다.연정훈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고 나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이 좀 풀렸다.“누구 전화야?”그는 알면서 일부러 물었다.“할머니예요.”“근데 왜 기분이 안 좋아?”안시연이 잠깐 침묵하더니 고개를 숙였다.“주지혁이 할머니 보러 갔다고 해서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설명했다.“할머니 얼마 전에 심장 수술
해가 지고 연정훈은 차로 안시연을 병원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시간을 보니 6시도 채 되지 않았다.안시연은 차에서 내리려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봤다.“교수님, 죄송해요. 오늘은... (빚을 갚지 못했네요).”말끝을 맺지 못했지만 연정훈은 알아들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젠틀하고 부드러워 보였다.“난 그렇게 각박한 채권자가 아니야.”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말을 이어갔다.“혹시 뒤에 다른 방법으로 빚을 갚고 싶어 할 수도 있지.”안시연은 반박하지 않았다.흔들린 건 사실이었다.애초에 그녀는 주지혁의 애인이 되는 게 싫었다. 뒤에는 연정훈과도 연락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조용한 삶을 살고 싶었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삶 말이다.하지만 온 세상이 그녀의 계획을 망치려 들고 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음을 느낀다.조금만 더 눌렀다간 정말 그대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더니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정훈과의 거리를 좁혔다.앞자리에 탄 진수빈과 기사님도 눈치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입가에 뽀뽀했다.둘은 애정행각이 적은 건 아니었다. 한 시간 전에도 이것보다 더한 딥키스를 했었다.하지만 이 키스는 전에 한 다른 키스와 다르다는 걸 안시연만 알고 있었다.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입장권을 구한 거나 다름없었다.연정훈은 거절하지 않았다. 뜻은 명확했다.언제든 그를 찾아와도 된다는 의미였다.“교수님, 이제 가볼게요.”안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여름밤이라 바닥은 아직도 지열이 남아 있었다.어제처럼 그렇게 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심장에 무언의 힘이 주입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녀는 맞은편으로 걸어갔다.연정훈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안시연이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누군가 그녀를 데리러 나왔다.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연정훈은 그 사람이 주지혁임을 알아봤다.잠깐 시선이 닿았지만 연정훈은 태연했다
주지혁의 말을 듣자, 최미란은 기분이 좋아진 듯 안색이 조금 풀렸다.그러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안시연에게 물었다.“간호사가 오늘 널 병원에서 봤대. 집안싸움에 휘말렸다며?”물건을 정리하던 안시연은 움찔했다.그녀는 외할머니가 주지혁 때문에 일부러 단어를 순화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처음 이승우에 의해 병원에 왔을 때 차시훈의 아내는 여전히 욕설을 퍼부으며 안시연을 아니꼽게 봤다. 게다가 차시훈이 평소 중성적인 옷차림을 한 탓에 행인의 절반이 아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안 좋은 일에 휘말리긴 했어요.”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최미란은 바짝 긴장했다.“어떻게 된 거야?”안시연이 입을 열려던 찰나 주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선뜻 답했다.“다 오해예요. 시연이는 고객이랑 미팅한 것뿐인데 그분 아내가 오해했거든요.”“너도 알고 있었어?”최미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이런 일은 시연이가 당연히 저한테 얘기해주죠.”그 말을 들은 최미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억울한 일을 겪었을 안시연을 생각하니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사람 아내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생사람을 잡았네.”최미란은 재빨리 안시연의 팔을 붙잡았다.“시연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괜찮아요. 일부러 겁주려고 병원에 온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정말이니?”안시연이 확신에 차서 답하자 마침내 믿었다.주지혁은 그와 조이현 사이의 일은 쏙 빼놓고 평소와 같이 아주 그럴듯하게 결혼에 관해 이야기했다.결혼 얘기를 꺼내자, 최미란은 유난히 활력이 넘쳤고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말을 했다.“네가 시연이 곁에 있으니까 이 할머니는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나.”“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평생 고생시키지 않겠습니다.”한쪽에서 조용히 사과를 깎고 있던 안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뻔뻔스럽게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리 이 상황이 역겨워도 할머니를 위해 참을
안시연은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뒤돌아서 앞으로 걸어갔다.“정훈 씨랑 함께 있는 걸 봤으면서 나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나한테 돌아올 생각만 있다면 너랑 그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신경 쓰지 않을 자신있어.”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연정훈 씨는 너한테 명분을 주지 않을 거야.”“넌 줄 수 있고?”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주지혁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시연아, 그 사람이 지금 당장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 하지만 우린 달라.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잖아. 내가 약속할게, 몇 년만 기다려주면 무조건 이현이랑 이혼하고 너랑 결혼할 거야.”‘참 나, 누굴 바보로 아나?’안시연의 표정은 줄곧 싸늘했다.“내가 싫다면?”주지혁은 할말을 잃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면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것도 일종의 방법이다.“고작 임신했다는 이유로 연정훈 씨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야? 그래서 날 거절하는 거지?”안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임신?”의아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주지혁은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임신 안 했어?”안시연은 정신 나간 사람과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싸늘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헛구역질로 힘들어했던 자기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주지혁의 이상한 눈빛과 안달복달하는 임유정이 떠오른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녀는 별안간 고개를 돌려 주지혁을 바라봤다.“설마 임신했다고 소문낸 사람이 너였어?”잔뜩 굳어있는 그의 표정을 보며 안시연은 그제야 깨달았다.그녀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날 벼랑 끝으로 밀어낸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눈앞에 있었네? 신경 쓰지 않는 사람치고 간섭이 심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주지혁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닫고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걸 만회가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시연 씨,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야. 제 발로 진
차 대표 일은 워낙 소문이 쫙 퍼진 탓에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처음에는 약간의 루머만 돌았다. 그러다가 안시연이 차시훈을 꼬시다가 수년간 사귄 여자 친구에게 들켜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맞았다는 게 퍼지면서 사람들은 확신했다.게다가 임유정의 이런 말들은 루머를 간접적으로 확인 사살하는 거나 다름없다.‘빠른 시일 내에 정직원이 될 겁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안시연은 모든 인턴의 적이 되었다. 정규직 전환에는 인원 제한이 있으니까.“차 대표처럼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다니, 비위가 정말 대단하네.”“며칠 전 회식 때는 온갖 순진한 척 했잖아요.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여자 둘이서 할 수 있나?”탕비실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지만, 안시연은 문밖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직 장가희만이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진실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참다못해 탕비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수군거리는 소리는 멈췄으나 그들은 안시연을 보고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가자. 쟤가 홧김에 고자질하면 우린 끝장이잖아.”곧이어 비웃음 소리가 탕비실을 가득 채웠다.그들은 안시연의 곁을 지나며 일부러 그녀의 어깨를 툭 부딪쳤다.“뭐 하는 거야!”장가희가 소리를 지르자, 안시연은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됐어요.”어차피 따져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에 장가희는 탕비실의 문을 닫고 재빨리 그녀를 위로했다.“입이 싼 사람들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동안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이제는 무감각해졌다.장가희는 행여나 그녀가 상처받았을까 봐 끝없이 옆에서 토닥였다.“전 시연 씨가 대표님이랑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걸 믿어요.”안시연은 의아했다.“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시연 씨처럼 이렇게 예쁘신 분이 뭐가 부족해서 굳이 대표님을 만나겠어요? 제가 만약 시연 씨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
방 안이 갑자기 어둠에 잠겼다.연정훈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멈춰 섰다.그 순간 양시연이 말했다."저도 너무 피곤해요. 정말 졸려요."마지막 말은 하품하며 입을 벌리는 바람에 한층 더 나약하고 안쓰럽게 들리게 했다.연정훈은 침묵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연정훈은 어금니를 꽉 물며 순간적으로 기세가 꺾였다.어둠 속에서 양시연의 숨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호흡이 점차 고르게 변하며 금세 깊은 잠에 빠질 듯 보였다.연정훈은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화가 나 몸을 침대에 세게 던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양시연은 귀를 기울이다 몰래 한쪽 눈을 떠 근처에 있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잠들었다.양시연은 곧 깊이 잠들었지만, 연정훈은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연정훈은 옆으로 돌아누워 낮에 남산 저택에서 그녀가 민희수와 나눴던 대화와 USB에 담긴 수많은 영상을 떠올렸다.그리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이 인생에서 겪은 모든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처럼 느껴졌다.‘다른 건 그렇다 치고 신혼 첫날 밤에 이렇게 적반하장이라니.’게다가 조금 전 욕실에서 곁에 있어 주겠다던 그녀는 중간에 사라졌고 연정훈은 욕실에서 넘어져 자칫 큰일 날 뻔했다.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화가 날수록 그 일이 계속 떠올랐다.결국 연정훈은 다시 돌아누워 양시연을 마주했다.어둠에 익숙해진 연정훈의 눈에는 양시연의 얼굴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양시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표정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연정훈은 손을 뻗어 양시연의 얼굴을 한번 꼬집고 싶었다!그런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꼬집어서 뭐 하겠어? 무슨 의미가 있다고?’결국 연정훈은 몸을 양시연 쪽으로 기울여 양손을 그녀의 옆에 두고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너무 가까워져 서로의 숨결이 섞이기 시작했다.연정훈의 숨소리는 점점 거
연정훈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 분노가 절반쯤 가라앉았는데 방금 넘어지면서 다시 화가 났다.‘이 잔인한 여자 아프다고 해서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연정훈의 머리는 윙윙거리며 바닥에 앉아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양시연은 아래층에서 올라오며 작은 오이 하나를 들고 안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듣고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잠시 후 양시연은 유리문을 두드렸다."연정훈 씨, 괜찮아요?”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뭐지?’양시연은 눈을 깜박이며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이번에는 안에서 물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나왔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톡톡 쳤다.“빨리 나와요 너무 오래 있지 말고요.”양시연은 말을 끝내고 돌아섰다.실내에서 연정훈은 샤워기 아래에 서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있었다. 이전에는 화가 치솟았지만, 양시연이 다가와서 대충 걱정하는 척하자 그 분노는 또 다시 사라졌다.양시연의 그의 마음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아 더 짜증이 났다.그는 급히 물을 틀어놓던 수도꼭지를 세게 잠갔다.양시연은 영리하게 물이 멈춘소리를 듣었다. 연정훈이 빨리 씻고 나오려는 줄 알고 옷을 가져와 욕실로 갔다.두 사람은 방에서 마주쳤고 연정훈은 머리를 말리며 양시연을 보았다.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약간 불안한 느낌을 받았고 힘없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물컵을 들고 나가며 마치 물을 따르러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선물과 돈을 보관하는 큰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찾으러 와도 그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양시연은 커다란 카펫 위에 앉아 기쁜 마음으로 돈을 셈하기 시작했다.침실에서 연정훈은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오지 않는 걸 보며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다.‘그래. 버텨보자.’그녀가 하룻밤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기다려 볼 작정이었다.양시연은 선물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졌고 결국 시간이 흐르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고 깜짝 놀랐다. 양시연은 얼른 몸을 돌려 가슴 부분의 지퍼를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휴.’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소파에 손을 올리고 눈을 돌리며 말했다.“어때요? 괜찮아요? 힘들면 제가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갈까요?”연정훈은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머리가 좀 어지러워.”연정훈은 자신의 상태를 말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해장국 좀 끓여 드릴까요?”연정훈은 대답 없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괜찮아.”“그럼 잠깐 누워 있으세요. 저는 짐 정리 좀 할게요.”“...응.”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빨간색 캐리어를 열었다.며칠 전 양시연의 일상용품은 이미 일부 보내졌고 연정훈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지만, 양시연은 최근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져왔다.그녀는 짐을 안방에 놓을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연정훈이 차가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캑캑.’나쁜 짓만 안 하면 된다. 다른 방에서 자는 건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한참을 생각한 후 양시연은 결국 짐을 안고 안방으로 갔다.그때 연정훈이 일어나 위층으로 가려는 길이었다. 계단에서 마주친 양시연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속이 안 좋으면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요.”양시연은 말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방에 도착한 양시연은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연정훈을 보며 바쁘게 움직였다.기운이 넘치는 양시연은 부엌에서 오이를 꺼냈다.한참을 들락날락하다가 마침내 연정훈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샤워 안 해요?”“너 먼저 해.”“먼저 해요.”양시연은 예의 있게 말했다.“이 상태로는 걱정돼요. 먼저 씻으세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들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옷이 젖어도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가 말로만 하는 것이라 짐작했고 실제
양지원은 양혁수의 상황을 방금 알았지만, 양시연이 말하자 양혁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양혁수는 양시연의 결혼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했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마 양혁수가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바로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을 것 같았다.양지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혁수가 나에게 큰 문제 없다고 말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다행이네요.”양지원은 양시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시간도 많이 늦었어.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집에 가서 푹 쉬어. 내일 아침에 집에 가서 아침 먹고 어머니가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할게.”양시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양지원을 꼭 안았다.“오늘 밤은 집에 가면 안 되는 거예요?”양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가능하지만, 연정훈한테 먼저 물어봐야지. 그래도 연정훈에게 조금의 체면은 줘야지.”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고 싶으면 갈 거예요.”양지원은 애정 어린 손길로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들은 잠시 더 이야기한 후 양지원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서 양시연은 손을 흔들며 먼저 가 보라고 했다.복도에서 양지원은 전화를 받으며 급히 걸어갔다.양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지원이 ‘연정훈에게도 체면을 줘야 한다’는 말이 양시연의 마음에 남았다.‘신혼 밤 정도는 함께 보내겠지.’그녀는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연정훈이 모든 손님을 다 보내고 같이 차를 타고 강남시티로 돌아갈 때 그녀의 마음은 결혼식 날 연정훈을 향해 걸어갔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집 가는 길은 조용했고 연정훈은 술을 꽤 마신 상태여서 눈에 띄게 취한 기색이 있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았다.‘취했구나. 취한 게 좋겠다. 집에 돌아가서 그냥 곯아떨어질 수 있겠네.’양시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속
이승우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동생이라니? 내 작은고모!”부승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안 믿어.”이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신 양시연과 잡담을 나누며 웨이터에게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그러다 부승희가 갑작스레 이승우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양시연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지만, 부승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다.옆에서 연정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 상황을 구경했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왜? 내 약점을 들춰내려는 거야?”부승희는 물러설 기미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말했잖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이승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이승우의 어색한 침묵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승우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성격답게 대답을 내뱉었다.“헤어졌어.”부승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그래? 왜?”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그는 결국 혀를 차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부승희의 머리를 밀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그때 모연준이 화원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이승우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려다 잠시 멈칫하고 다시 넣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이승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동생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아니지, 고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승희는 이승우가 받기도 전에 손을 놓아 종이봉투가 떨어질 뻔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어 앉아 이승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과 눈을 맞췄다.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정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불편한 상황이 더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조용히 양시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옷 갈아입어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알게 될 거야.”부승희는 ‘으악’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무서워. 진짜 무서워.”부승희는 팔을 내밀어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요. 소름 돋는 거 봐요. 완전 실시간 소름 돋았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심코 던진 고백 같은 말에 이미 당황해 심장이 두근거리던 참이었다.부승희의 말에 더해 머리까지 뜨거워진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승희의 팔을 잡고 살짝 움켜쥐었다.부승희는 침묵했다.“...”‘정말 어이없네.’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승우가 젊은 여자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훈남 훈녀 조합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부승희는 헉하는 소리를 내며 관심을 보였다.양시연은 이 틈을 타 어색함을 벗어나려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건가요?”연정훈은 힐끔 그쪽을 보며 답했다.“잘 모르겠어. 별 얘기 없었는데.”대화하는 동안 이승우와 그 여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부승희는 의자에 기대어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이승우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가벼운 태도로 여자를 소개했다.“윤린아 씨, 내 친구야.”부승희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친구라고?”이승우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왜? 친구가 뭔지 몰라?”“다른 사람 친구는 아는데 넌 잘 모르겠네.”“...”윤린아는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정확히 말하면 이승우 도련님은 제 클라이언트예요. 아주 중요한 고객이죠.”그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밝게 웃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윤린아가 떠나자 부승희는 이승우를 힐끔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여자친구야?”이승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너는 생각이 왜 이렇게 복잡해? 친구라고 했잖아.”부승희는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짓고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바
주변은 다시 한번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부승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술잔에 과일 주스를 채우려 했다. 이승우의 주책을 떠드는 입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연정훈은 술잔을 살짝 옮겨 부승희의 손길을 피했다.다들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부승원은 차분한 얼굴로 부승희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됐어. 앉아. 연정훈의 작전 방해하지 마. 인생에서 한 번뿐인 대사건이라고.”부승희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시연 씨, 내가 도우려 했는데 소용없네요. 오늘 밤 스스로 조심해야겠어요.”양시연은 침묵했다.“...”주변 사람들이 또 한 번 들고 일어나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 양시연의 손을 잡고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술잔을 올리는 틈을 타서 연정훈은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가리고 낮게 말했다.“술 좀 적게 마셔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았다.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투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보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연정훈은 입술을 살짝 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그 후에는 못 피할 거야.”양시연은 당황했다.???아직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주변에서 누군가 빠르게 외쳤다.“다들 들었어요? 신랑이 신부를 협박했어요! 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이후에는 못 피한다네요!” “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짓고 말을 꺼낸 사람과 잔을 부딪치며 술을 단숨에 비웠다.그 사람도 금방 눈치를 채고 한 잔을 비우며 웃었다.“형, 신혼여행 가서는 너무 심하게 굴지 말아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이 사람들 정말...’양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술잔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으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했지만, 손을 내밀기 무섭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손을 꽉 잡았다.연정훈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양지원은 계속해서 양시연 쪽 상황을 신경 쓰고 있었다. 비록 민수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기분이 상한 양지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양석진이 양지원을 붙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가서 시연을 좀 봐야겠어요.”“거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시연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수 없어.”양지원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맞은편 테이블에 고정돼 있었다.연씨 가문의 테이블에서는 모두가 동시에 민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그 안에 비난의 기류가 느껴졌다.‘제발 이성적으로 행동해 주시길.’민수희는 침묵했다.“...”사실 민수희는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기분까지 엉망인 상태에서 억지로 이 자리에 나왔다. 그런 와중에 이런 상황을 마주하자 갑작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민수희의 가족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지 않는 듯했다.“시연아,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오늘은 술을 마시기 힘드신가 보다.”표세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양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표세연은 직접 민수희의 잔에 주스를 따르며 다정하게 몇 마디를 건네려 했다.그러나 민수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그녀를 바라봤다.표세연의 손이 멈췄고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연호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수희의 얼굴이 굳어졌다.“할머니가 오늘 몸이 좀 불편하시니 이 잔은 할아버지가 대신할게. 너희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연호민은 말을 마치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잔을 두 사람을 향해 들어 올렸다.양시연과 연정훈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잔을 낮춰 깊이 예를 표했다.연호민이 자리에 앉자 민수희는 무언가 말하려다 연호민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삼켰다.“세연아,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아 보이신다. 안으로 가서 쉬실 수 있도록 부축해 드리거
양시연은 연정훈의 이마를 만져보고 자기 이마도 만져보며 온도를 비교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양시연의 맑고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연정훈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더구나 그녀는 도망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변명까지 해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괜히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결국 문제는 자신의 질투심이었다.특히 양혁수와 얽힐 때마다 몸이 시큰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별일 아니야. 며칠 밤새웠더니 좀 어지러워서 그래.”“밤새웠어요?”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밤새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저도 이틀 전부터 일부러 일찍 자고 있었는데.”그녀는 가방을 열어 에너지 음료 몇 개를 꺼냈다.포장을 뜯어 하나씩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마셔요.”연정훈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이게 다 뭐야?”“청심환이에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마셔요. 우리 이제 결혼까지 했잖아요. 제가 결혼하자마자 과부 되려고 정훈 씨를 해코지라도 하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양시연은 직접 음료 하나를 집어 들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옷에 흘리지 않으려 양시연의 손목을 살짝 잡고 음료를 마셨다.“남은 것도 다 마셔요.”양시연이 단호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치 독약이라도 마시는 듯한 표정으로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전부 마시고 나서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연정훈은 짧게 생각한 뒤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달달하네.”양시연은 두 손을 모으며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했다.“세상에! 맛까지 맞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맞아요. 달달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단맛이요. 제가 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