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혁의 말을 듣자, 최미란은 기분이 좋아진 듯 안색이 조금 풀렸다.그러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안시연에게 물었다.“간호사가 오늘 널 병원에서 봤대. 집안싸움에 휘말렸다며?”물건을 정리하던 안시연은 움찔했다.그녀는 외할머니가 주지혁 때문에 일부러 단어를 순화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처음 이승우에 의해 병원에 왔을 때 차시훈의 아내는 여전히 욕설을 퍼부으며 안시연을 아니꼽게 봤다. 게다가 차시훈이 평소 중성적인 옷차림을 한 탓에 행인의 절반이 아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안 좋은 일에 휘말리긴 했어요.”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최미란은 바짝 긴장했다.“어떻게 된 거야?”안시연이 입을 열려던 찰나 주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선뜻 답했다.“다 오해예요. 시연이는 고객이랑 미팅한 것뿐인데 그분 아내가 오해했거든요.”“너도 알고 있었어?”최미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이런 일은 시연이가 당연히 저한테 얘기해주죠.”그 말을 들은 최미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억울한 일을 겪었을 안시연을 생각하니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사람 아내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생사람을 잡았네.”최미란은 재빨리 안시연의 팔을 붙잡았다.“시연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괜찮아요. 일부러 겁주려고 병원에 온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정말이니?”안시연이 확신에 차서 답하자 마침내 믿었다.주지혁은 그와 조이현 사이의 일은 쏙 빼놓고 평소와 같이 아주 그럴듯하게 결혼에 관해 이야기했다.결혼 얘기를 꺼내자, 최미란은 유난히 활력이 넘쳤고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말을 했다.“네가 시연이 곁에 있으니까 이 할머니는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나.”“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평생 고생시키지 않겠습니다.”한쪽에서 조용히 사과를 깎고 있던 안시연은 그의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뻔뻔스럽게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리 이 상황이 역겨워도 할머니를 위해 참을
안시연은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뒤돌아서 앞으로 걸어갔다.“정훈 씨랑 함께 있는 걸 봤으면서 나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나한테 돌아올 생각만 있다면 너랑 그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신경 쓰지 않을 자신있어.”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연정훈 씨는 너한테 명분을 주지 않을 거야.”“넌 줄 수 있고?”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주지혁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시연아, 그 사람이 지금 당장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 하지만 우린 달라.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잖아. 내가 약속할게, 몇 년만 기다려주면 무조건 이현이랑 이혼하고 너랑 결혼할 거야.”‘참 나, 누굴 바보로 아나?’안시연의 표정은 줄곧 싸늘했다.“내가 싫다면?”주지혁은 할말을 잃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면 미련 없이 포기하는 것도 일종의 방법이다.“고작 임신했다는 이유로 연정훈 씨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야? 그래서 날 거절하는 거지?”안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임신?”의아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주지혁은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임신 안 했어?”안시연은 정신 나간 사람과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싸늘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헛구역질로 힘들어했던 자기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주지혁의 이상한 눈빛과 안달복달하는 임유정이 떠오른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녀는 별안간 고개를 돌려 주지혁을 바라봤다.“설마 임신했다고 소문낸 사람이 너였어?”잔뜩 굳어있는 그의 표정을 보며 안시연은 그제야 깨달았다.그녀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날 벼랑 끝으로 밀어낸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눈앞에 있었네? 신경 쓰지 않는 사람치고 간섭이 심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주지혁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닫고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걸 만회가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시연 씨,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야. 제 발로 진
차 대표 일은 워낙 소문이 쫙 퍼진 탓에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처음에는 약간의 루머만 돌았다. 그러다가 안시연이 차시훈을 꼬시다가 수년간 사귄 여자 친구에게 들켜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맞았다는 게 퍼지면서 사람들은 확신했다.게다가 임유정의 이런 말들은 루머를 간접적으로 확인 사살하는 거나 다름없다.‘빠른 시일 내에 정직원이 될 겁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안시연은 모든 인턴의 적이 되었다. 정규직 전환에는 인원 제한이 있으니까.“차 대표처럼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다니, 비위가 정말 대단하네.”“며칠 전 회식 때는 온갖 순진한 척 했잖아요.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여자 둘이서 할 수 있나?”탕비실에서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지만, 안시연은 문밖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직 장가희만이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진실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참다못해 탕비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수군거리는 소리는 멈췄으나 그들은 안시연을 보고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가자. 쟤가 홧김에 고자질하면 우린 끝장이잖아.”곧이어 비웃음 소리가 탕비실을 가득 채웠다.그들은 안시연의 곁을 지나며 일부러 그녀의 어깨를 툭 부딪쳤다.“뭐 하는 거야!”장가희가 소리를 지르자, 안시연은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됐어요.”어차피 따져봐야 소용없겠다는 생각에 장가희는 탕비실의 문을 닫고 재빨리 그녀를 위로했다.“입이 싼 사람들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동안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이제는 무감각해졌다.장가희는 행여나 그녀가 상처받았을까 봐 끝없이 옆에서 토닥였다.“전 시연 씨가 대표님이랑 아무 사이가 아니란 걸 믿어요.”안시연은 의아했다.“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시연 씨처럼 이렇게 예쁘신 분이 뭐가 부족해서 굳이 대표님을 만나겠어요? 제가 만약 시연 씨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
계열사 연회 파티에 연정훈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워낙 마음이 가는 회사이고 대표인 권준호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선뜻 이곳까지 직접 왔다.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안시연을 발견했다.술잔을 기울이며 파티를 즐기는 직원들 사이에서 오직 그녀만이 유니폼을 입은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날이 선 고양이처럼 발톱을 드러내고 경계하던 모습과 달리 이곳에서는 사람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누군가 와인까지 쏟았으니 얼마나 서러울까.안시연은 당황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뿌리쳤다.“괜찮아요. 그냥 씻으러 갈게요.”그렇게 한마디 말만 남기고선 도망치듯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연정훈은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걸 눈치챘다.심지어 권준호마저도 조용히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있었다.“저 여자 어느 부서야? 예쁘네.”연정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화장실에서는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은 세면대 가장자리에 두 손을 얹고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그녀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정이 쌓이면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하루 종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낸 건 둘째 치고 사람들 앞에서 옷까지 더렵혀 졌으니 멘탈이 무너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목이 아프고 눈시울은 뜨거워졌다.그런데 이때 밖에서 누군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일부러 부딪힌 거 맞아. 정신 차리게 해주고 싶었거든. 평소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이런 자리에서 옷차림이 너무 과하잖아. 흰 셔츠를 메이드 복처럼 입은 거 보면 모르겠어? 남자에 미친 거지.”곧이어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퍼졌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에서는 싸늘함이 느껴졌다.“잘했어. 이렇게 망신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주효진의 목소리다.“언니
“감히 나를 모욕해?”“모욕했는지 안 했는지는 그쪽이 더 잘 알 것 같은데요?”짝!따위를 맞은 안시연은 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이내 입가에도 통증이 찾아왔다.순간 정신을 번쩍 차린 그녀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반격했고 주효진은 애써 감춰온 본모습이 까발려진 게 분한 듯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두 사람이 싸울 때는 그 누구도 밀리지 않고 팽팽했다.하지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주효진이 조이현의 시누이인 걸 알고 부랴부랴 달려들어 싸움을 말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방적으로 주효진의 편을 든 거나 다름없다.현장에 도착한 장가희는 안시연이 여러 사람에게 팔을 잡힌 채 꼼짝 못 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그 상황에서도 주효진은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기며 따귀를 내리치고 있었다.“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장가희가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은 그제야 겁을 먹은 듯 한발 물러섰다.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안시연을 부축했다. 자세히 보니 입가에는 피가 고여있었고 그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장가희는 여러 사람을 비난했다.“서로 편짜고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게 비겁하지도 않아요?”“괴롭히다뇨? 직접 봤어요?”“그쪽이 먼저 손을 썼잖아요. 양심의 가책이란 걸 못 느끼죠?”“저 여자가 먼저 사람을 모함했다고요. 뭐라고 얘기했는지 들었으면 그런 반응이 안 나올걸요?”장가희는 전혀 믿지 않았다.“헛소리 집어치워요. 어차피 CCTV 있으니까 돌려보면 알겠죠? 시연 씨는 경찰에 신고해도 될 입장이었어요.”겁에 질려 얼어붙은 사람들과 달리 주효진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비록 안시연에게 몇 대 맞았지만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더 득의양양했다.“CCTV? 돌려봐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찍혔는지 궁금하니까.”장가희는 말문이 막혔다.그녀 역시도 주효진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경찰에 신고한들 회사 입장에서는 안시연을 돕지 않을 게 뻔하다.안시연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아니나 다를까 권준호도 편파적인 사람이었다.주효진은 오빠네 일행과 임유정이 도착하는 것을 보더니 울면서 달려갔다.그녀는 오빠를 찾는 대신 조이현에게 안겼고 조이현은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볼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맞았어요?”임유정도 힐끗 보고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심하게 맞은 것 같은데요?”진짜 피해자를 눈앞에 두고 생뚱맞은 사람을 걱정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리 불공평하게 느껴져도 참견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주효진이 철없이 행동한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나 조이현과 임유정이 곁을 지키고 있으니 감히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고작 인턴 때문에 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미움을 사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니까.권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대표님, 별일 아닙니다. 직원들 사이의 말다툼일 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그 말 한마디에 사건의 본질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하지만 안시연은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고, 권준호는 현명한 결정을 내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이 자리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연정훈은 줄곧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그 순간 임유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연정훈은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권준호에게 말했다.“프로세스대로 처리해.”임유정은 가슴을 짓누르던 거대한 돌이 사라진 듯 홀가분해졌고 주효진은 이 상황이 즐거운지 일부러 안시연 쪽을 바라보며 약 올렸다.조이현의 곁에는 주지혁도 있었다. 사람들 속에 모습을 감춘 그는 착잡한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지만, 그녀가 고생하는 걸 마냥 지켜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연정훈이 돕는 건 죽어도 원치 않았다. 참 모순되는 생각이다.결국 나중에 만회할 거란 다짐하고선 걸음을 옮겼다.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복도는 순식간에 정적을 되찾았고 오직 장가희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혼자 있고 싶어요.”“알겠
안시연은 사무실로 돌아가 여분의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다른 직원들은 퇴근했거나 연회 파티에 참석 중이라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회사 건물을 나선 안시연은 연정훈이 건네준 정장 외투를 걸친 채 본사를 향해 걸어갔다.살랑살랑하게 부는 저녁 바람이 입가의 상처에 닿자 따끔함이 밀려왔고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가볍게 상처를 어루만졌다.자기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으나 민낯이 더 예쁘다는 이승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정인 그룹 안은 매우 조용했고 곳곳에 보안 검색대가 있었다.안시연은 카드를 찍은 후 곧바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정훈의 사무실로 향했다....정인 그룹은 건물 전체가 통유리로 구성되었고 인근 상권이 한 눈이 들어오는 완벽한 곳에 있다.임유정은 소파에 앉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훤칠한 남자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권준호도 외모로는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았지만, 연정훈과 함께 있으면 늘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주지혁은 비교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그녀는 옆에 있는 조이현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자랑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연정훈이 워낙 완벽한 사람이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방금 안시연의 편을 들지 않아서 신났다.아무리 예뻐도 결국에는 부질없는 것이다.“교수님, 어때요?”주지혁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자신의 아이디어를 맘껏 뽐냈고 자세한 설명을 마친 후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반응을 살폈다.그는 연정훈을 향한 질투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연정훈은 출신, 집안, 능력, 여자 모든 면에서 훨씬 뛰어났으니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하지만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를 떨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사무실에 앉아 수백억 원대의 사업을 논하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안시연뿐이다.주지혁은 언젠가 연정훈의 자리에 앉아 그녀 인생의 종착점이 자기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괜찮네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표정에는 그
그녀가 연정훈의 목을 감싼 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곧이어 연정훈이 손을 뻗어 여자를 감싸안으려고 하자 임유정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동댕이쳤다.쨍그랑!산산조각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연정훈의 품에 안겨 그의 향기와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던 안시연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흠칫 놀라 무의식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곧이어 심연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욕구는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의 셔츠를 끌어당기며 사무실 안을 목격한 그녀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 와중에 연정훈은 차분하게 손가락 마디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더니 곧이어 허리에 팔을 감았다.“안... 안시연?”조이현은 충격에 말까지 더듬었다.한편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한 주지혁은 손에 든 만년필을 꽉 쥐었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에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권준호는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고 방금 억울하게 맞았던 그 직원이라는 걸 알아차리고선 끝없는 후회가 밀려왔다.진작 알았더라면 절대 경거망동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행여나 연정훈이 원한을 품을까 봐 숨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얼어붙었던 안시연은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패닉과 충격,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그녀는 단 한 순간도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임유정의 분노와 원망의 눈길을 마주하고선 보란 듯이 그를 꽉 껴안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통쾌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이승우의 말이 맞았다.임유정이 괴롭히면 더 심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갚아주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끝없은 애정을 표현했다. 눈에서는 애틋함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에 생긴 상처에 닿자,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사적인 일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사람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나 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진수빈을 불러왔다.“대표님, 부르셨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