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사무실로 돌아가 여분의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다른 직원들은 퇴근했거나 연회 파티에 참석 중이라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회사 건물을 나선 안시연은 연정훈이 건네준 정장 외투를 걸친 채 본사를 향해 걸어갔다.살랑살랑하게 부는 저녁 바람이 입가의 상처에 닿자 따끔함이 밀려왔고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가볍게 상처를 어루만졌다.자기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으나 민낯이 더 예쁘다는 이승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정인 그룹 안은 매우 조용했고 곳곳에 보안 검색대가 있었다.안시연은 카드를 찍은 후 곧바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정훈의 사무실로 향했다....정인 그룹은 건물 전체가 통유리로 구성되었고 인근 상권이 한 눈이 들어오는 완벽한 곳에 있다.임유정은 소파에 앉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훤칠한 남자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권준호도 외모로는 어디 가서 뒤처지지 않았지만, 연정훈과 함께 있으면 늘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주지혁은 비교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그녀는 옆에 있는 조이현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자랑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연정훈이 워낙 완벽한 사람이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방금 안시연의 편을 들지 않아서 신났다.아무리 예뻐도 결국에는 부질없는 것이다.“교수님, 어때요?”주지혁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자신의 아이디어를 맘껏 뽐냈고 자세한 설명을 마친 후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반응을 살폈다.그는 연정훈을 향한 질투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연정훈은 출신, 집안, 능력, 여자 모든 면에서 훨씬 뛰어났으니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하지만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를 떨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사무실에 앉아 수백억 원대의 사업을 논하는 와중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안시연뿐이다.주지혁은 언젠가 연정훈의 자리에 앉아 그녀 인생의 종착점이 자기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괜찮네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표정에는 그
그녀가 연정훈의 목을 감싼 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곧이어 연정훈이 손을 뻗어 여자를 감싸안으려고 하자 임유정은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동댕이쳤다.쨍그랑!산산조각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연정훈의 품에 안겨 그의 향기와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던 안시연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흠칫 놀라 무의식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곧이어 심연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욕구는 파도처럼 밀려왔고 그의 셔츠를 끌어당기며 사무실 안을 목격한 그녀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 와중에 연정훈은 차분하게 손가락 마디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더니 곧이어 허리에 팔을 감았다.“안... 안시연?”조이현은 충격에 말까지 더듬었다.한편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한 주지혁은 손에 든 만년필을 꽉 쥐었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에 차마 움직일 수가 없었다.권준호는 그제야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고 방금 억울하게 맞았던 그 직원이라는 걸 알아차리고선 끝없는 후회가 밀려왔다.진작 알았더라면 절대 경거망동하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행여나 연정훈이 원한을 품을까 봐 숨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얼어붙었던 안시연은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패닉과 충격,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그녀는 단 한 순간도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임유정의 분노와 원망의 눈길을 마주하고선 보란 듯이 그를 꽉 껴안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통쾌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이승우의 말이 맞았다.임유정이 괴롭히면 더 심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갚아주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끝없은 애정을 표현했다. 눈에서는 애틋함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손가락이 그녀의 입가에 생긴 상처에 닿자,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사적인 일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사람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나 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진수빈을 불러왔다.“대표님, 부르셨
가벼운 말 한마디에 안시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연정훈을 제외한 다른 남자들은 이런 안정감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오직 연정훈이 내뱉은 말에만 믿음이 갔다.바깥세상은 너무 험악하여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앞의 남자가 알 수 없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밀어내기는커녕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마치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 사람처럼 말이다.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고 그렇게 한참이 흘러 가슴팍에 촉촉한 느낌이 들고서야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안시연은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후 곧바로 몸을 곧게 폈다. 그제야 가슴 한구석이 젖어있는 걸 발견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그를 바라봤다.연정훈이 물었다.“어떡할 거야?”생각에 잠긴 그녀는 갑자기 행동이 대담해지더니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입을 맞췄다.가벼운 입맞춤은 부드럽고 짜릿했다.연정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선 고개를 들었고 곧바로 조심스러워하며 눈치를 보는 여자의 시선과 마주쳤다.이미 품에 안겨있으니 뭘 어떻게 하든 그건 연정훈의 마음이다.안시연이 물러서기도 전에 연정훈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고 그녀도 싫지 않은 듯 조심스럽게 입술을 포갰다.그렇게 십 분 동안 두 사람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키스를 나눴다.부드러운 입술과 촉촉한 혀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뒤섞였고 연정훈은 강한 욕구가 밀려왔다.안시연은 견디다 못해 몇 번이나 뒤로 넘어질 뻔했으나 그럴 때마다 연정훈이 그녀를 품 안에 안았다.“아파요...”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며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고 연정훈은 위로하듯 다정하게 그녀의 입가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어디가?”안시연은 그의 셔츠를 꼭 쥐고 놓지 않았다.“여기저기 다 아파요.”거짓말이 아니다. 주효진과 싸울 때 무자비하게 그녀를 때렸던 사람은 여럿이었다.연정훈은 허리를 껴안고 있던 손을 살며시 풀었고 이런 작은 디테일에 안시연은 또 한 번 감동
그 시각 라운지.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씻을 시간을 줬다.그녀가 나왔을 때 라운지의 문은 열려 있었고 연정훈은 복도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옷장에서 내 옷 있으니까, 아무거나 골라서 입어.”타월로 몸을 감싼 안시연은 고개를 끄떡이며 옷장으로 걸어갔다.안에는 검은색과 흰색뿐인 남성 셔츠가 가득했다. 평소 흰색 셔츠를 선호하는 연정훈과 달리 옷장에는 의외로 검은색이 더 많았다.안시연은 행여나 속옷이 비칠까 일부러 검은색을 골랐다.셔츠를 입자마자 담배를 다 피운 연정훈이 안으로 들어오며 라운지의 문을 닫았다.셔츠 한 장을 걸친 탓에 저도 모르게 긴장됐는지 안시연은 뒤에 있는 사람이 연정훈인 걸 뻔히 알면서도 움찔했다.연정훈은 1인용 가죽 소파에 앉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봤다.“이리 와.”안시연은 그에게 다가갔다.어두컴컴한 조명은 셔츠 뒤에 가려진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극대화했고 살짝 풀어헤친 머리와 백옥처럼 하얀 다리는 매우 유혹적이었다.심지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향기로운 살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연정훈은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봤고 소파 팔걸이에 걸친 손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한시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다.안시연의 시선은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엔 구급상자가 놓여있었고 옆에는 여러 장의 서류와 만년필이 있었다.서류에 관심조차 없었던 그녀는 오직 약을 발라야겠다는 생각만으로 테이블 앞 카펫에 조신하게 앉았다.곧이어 옆에 있는 연정훈이 신경 쓰이는 듯 쭈뼛거리며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연정훈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일단 계약서부터 봐.”계약서라니?흠칫 놀란 안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집었다.주택 구입 계약서 2장과 주식 양도 계약서 1장이 들어있었는데 대충 예상만 해도 260억 원 정도다.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훈훈한 이목구비와 깊은 눈망울을 한껏 뽐내며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이해가 안 돼?”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몸
안시연은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혹시 꺼리는 행동이 있나요?”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연정훈은 최대한 맞춰줬다.“없어.”“음...”“갑자기 그건 왜 물어?”안시연은 얌전한 자세로 테이블에 엎드렸다.“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교수님이 어떤 걸 싫어하는지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하나라도 더 알게 되면 조심할 수 있잖아요.”“조심했다고? 뭘?”그녀는 순진한 눈망울로 교활함을 한껏 뽐내며 진지하게 말했다.“교수님은 뒤끝이 엄청 심한 사람이니까 절대 밉보이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평소 잘 웃지 않은 탓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으나 미소 한방에 싸늘함마저 눈 녹듯 사라졌다. 거기에 훈훈한 외모까지 더해지자, 보는 눈이 즐거웠다.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더니 힘이 잔뜩 들어간 팔로 안시연을 일으켜 세웠다.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속박당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쳤다.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제압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고민 끝에 힘을 풀었다.연정훈은 자신을 보게끔 그녀의 턱을 잡고 치켜세웠다.“계약서에 적힌 시간 봤어?”“네.”“1년이 지나면 넌 언제든지 우리의 관계를 끝낼 권리가 있어. 서류에 사인하는 순간 우리의 계약은 시작된 거야.”비록 계약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 마음이 심란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은 거친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고?”“농담이었어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뒤끝 있는 거 맞아. 난 아무리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거든.”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던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난 계약을 어기는 사람이 제일 싫어. 그러니까 또 지난번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1년 후에 떠나도 좋아. 절대 잡지 않을게. 하지만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그 말인즉 떠나는 순간 돌아올 자리도 없다는
맞닿은 두 볼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안시연은 누군가에게 아부를 떠는 게 익숙하지 않았으나 필요한 상황에서는 애교를 부릴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고 고집이 세긴 하지만 때로는 굽힐 줄도 안다. 지금 막 심리적 방어선을 뚫고 연정훈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한 사람치고는 그의 팔을 감싸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교태를 부리는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따뜻하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여자가 품에 안기니 연성훈도 점점 자제력을 잃었다.욕구가 끓어오르는 강렬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안시연의 허리를 감쌌다.분위기를 보니 오늘 밤은 그와 함께 보내야 할 듯싶다.안시연은 긴장감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팔을 더 조였다. 고양이처럼 그의 어깨에 살며시 엎드린 안시연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남자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계약이 끝나면 구매자는 물건을 가져가기 마련이다.연정훈은 서두르지 않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볼에 입맞춤하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단추를 풀었다.단추가 하나둘씩 풀리자 서늘한 기운이 몸에 스며들었고 안시연의 몸도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그러자 연정훈은 단번에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놀리듯이 입을 열었다.“상처를 보려고 하는 건데 왜 이렇게 긴장했어?”안시연은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속을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른해진 몸을 그에게 맡기듯 힘을 풀었다.여기저기 다친 만큼 조심스럽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불편함을 알아차렸는지 손을 뻗어 번쩍 안고선 짙은 색의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그를 등지고 앉아있던 안시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상자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곧이어 연정훈은 연고 뚜껑을 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안시연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망설이더니 그가 다가오기 전에 재빨리 셔츠를 끌어 내렸다.어깨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린 셔츠는
연정훈은 머리를 말린 후 전화 한 통을 받고서야 침대로 돌아왔다.그 시각 안시연은 침대 머리맡의 램프를 껐다.이불을 젖히고 안시연을 품에 안은 연정훈은 그제야 그녀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그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쉬운 여자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밀당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불장난에 맛 들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온몸에 상처를 입은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연정훈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끝없는 자기암시로 마침내 결단을 내린 안시연은 자신이 한 발 내디디면 연정훈이 알아서 눈치껏 움직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흘러가는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용기를 내어 연정훈을 바라봤으나 그는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릴 뿐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다 나으면 얘기하자.”안시연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분명히 배려하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유혹’이 실패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품에 안긴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연정훈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잠이 안 와?”안시연은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옷 입으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그제야 터프하게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고 곧바로 이불을 덮어줬다.“그냥 자.”...연정훈을 만나기 전 안시연은 그 어떤 남자와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서로의 품에 안겨 잠을 잔 적도 없었다.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남자의 은은한 향기는 긴장의 끈을 풀어주었고 서서히 마음이 안정되었다.그렇게 연정훈의 곁에서 아침을 맞이했다.따스한 햇볕은 여전히 커튼에 의해 가려졌고, 오직 커튼 사이를 통과한 한 줄기 빛만이 안을 환하게 비췄다.눈을 떴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던 안시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남자의 잘생기고 입체적인
연정훈의 사무실은 매우 넓었다. 정면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대형 통유리가 있었고 또한 실내에서 자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튼튼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곧이어 아침 식사가 식탁에 차려졌고, 안시연은 햇빛을 받으며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개미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문득 어젯밤 그녀의 곁에서 잠든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몸소 깨달았다.비서는 늘 그렇듯 연정훈에게 당일 일정을 보고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연정훈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마치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있는 학생처럼 얌전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듯 흐뭇하게 입을 열었다.“안으로 가서 넥타이 좀 골라줘.”갑작스러운 제안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해하며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비서는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연정훈이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더니 고개를 숙였다.안시연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주로 어두운 계열의 넥타이를 선호하는 그의 스타일이 떠올라 네이비색과 은색 두 개를 골랐다.아니나 다를까 두 개 중에 연정훈은 고민도 없이 네이비색 넥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시연은 주기 싫은지 장난스럽게 손을 등 뒤로 감췄고 연정훈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평소에 어두운색만 하죠?”“별로야?”“그런 건 아닌데...”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은색의 넥타이를 꺼냈다.“뭔가 나이 들어 보여요. 이런 색이 훨씬 더 어려 보이고 잘 어울려요.”연정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쓸데없는 일에 함부로 참견한 건가 싶은 걱정이 밀려왔고 넥타이를 손에 든 채 안절부절못했다.비서는 연정훈이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가볍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시연 씨 말이 맞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는 네이비색보다는 이런 밝은색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겁니다.”연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셔츠 칼라를 올리더니 안시연의 손에 있는 은색의 넥타이를 가져갔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비서
방 안이 갑자기 어둠에 잠겼다.연정훈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멈춰 섰다.그 순간 양시연이 말했다."저도 너무 피곤해요. 정말 졸려요."마지막 말은 하품하며 입을 벌리는 바람에 한층 더 나약하고 안쓰럽게 들리게 했다.연정훈은 침묵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연정훈은 어금니를 꽉 물며 순간적으로 기세가 꺾였다.어둠 속에서 양시연의 숨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호흡이 점차 고르게 변하며 금세 깊은 잠에 빠질 듯 보였다.연정훈은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화가 나 몸을 침대에 세게 던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양시연은 귀를 기울이다 몰래 한쪽 눈을 떠 근처에 있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잠들었다.양시연은 곧 깊이 잠들었지만, 연정훈은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연정훈은 옆으로 돌아누워 낮에 남산 저택에서 그녀가 민희수와 나눴던 대화와 USB에 담긴 수많은 영상을 떠올렸다.그리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이 인생에서 겪은 모든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처럼 느껴졌다.‘다른 건 그렇다 치고 신혼 첫날 밤에 이렇게 적반하장이라니.’게다가 조금 전 욕실에서 곁에 있어 주겠다던 그녀는 중간에 사라졌고 연정훈은 욕실에서 넘어져 자칫 큰일 날 뻔했다.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화가 날수록 그 일이 계속 떠올랐다.결국 연정훈은 다시 돌아누워 양시연을 마주했다.어둠에 익숙해진 연정훈의 눈에는 양시연의 얼굴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양시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표정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연정훈은 손을 뻗어 양시연의 얼굴을 한번 꼬집고 싶었다!그런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꼬집어서 뭐 하겠어? 무슨 의미가 있다고?’결국 연정훈은 몸을 양시연 쪽으로 기울여 양손을 그녀의 옆에 두고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너무 가까워져 서로의 숨결이 섞이기 시작했다.연정훈의 숨소리는 점점 거
연정훈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 분노가 절반쯤 가라앉았는데 방금 넘어지면서 다시 화가 났다.‘이 잔인한 여자 아프다고 해서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연정훈의 머리는 윙윙거리며 바닥에 앉아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양시연은 아래층에서 올라오며 작은 오이 하나를 들고 안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듣고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잠시 후 양시연은 유리문을 두드렸다."연정훈 씨, 괜찮아요?”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뭐지?’양시연은 눈을 깜박이며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이번에는 안에서 물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나왔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톡톡 쳤다.“빨리 나와요 너무 오래 있지 말고요.”양시연은 말을 끝내고 돌아섰다.실내에서 연정훈은 샤워기 아래에 서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있었다. 이전에는 화가 치솟았지만, 양시연이 다가와서 대충 걱정하는 척하자 그 분노는 또 다시 사라졌다.양시연의 그의 마음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아 더 짜증이 났다.그는 급히 물을 틀어놓던 수도꼭지를 세게 잠갔다.양시연은 영리하게 물이 멈춘소리를 듣었다. 연정훈이 빨리 씻고 나오려는 줄 알고 옷을 가져와 욕실로 갔다.두 사람은 방에서 마주쳤고 연정훈은 머리를 말리며 양시연을 보았다.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약간 불안한 느낌을 받았고 힘없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물컵을 들고 나가며 마치 물을 따르러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선물과 돈을 보관하는 큰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찾으러 와도 그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양시연은 커다란 카펫 위에 앉아 기쁜 마음으로 돈을 셈하기 시작했다.침실에서 연정훈은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오지 않는 걸 보며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다.‘그래. 버텨보자.’그녀가 하룻밤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기다려 볼 작정이었다.양시연은 선물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졌고 결국 시간이 흐르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고 깜짝 놀랐다. 양시연은 얼른 몸을 돌려 가슴 부분의 지퍼를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휴.’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소파에 손을 올리고 눈을 돌리며 말했다.“어때요? 괜찮아요? 힘들면 제가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갈까요?”연정훈은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머리가 좀 어지러워.”연정훈은 자신의 상태를 말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해장국 좀 끓여 드릴까요?”연정훈은 대답 없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괜찮아.”“그럼 잠깐 누워 있으세요. 저는 짐 정리 좀 할게요.”“...응.”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빨간색 캐리어를 열었다.며칠 전 양시연의 일상용품은 이미 일부 보내졌고 연정훈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지만, 양시연은 최근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져왔다.그녀는 짐을 안방에 놓을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연정훈이 차가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캑캑.’나쁜 짓만 안 하면 된다. 다른 방에서 자는 건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한참을 생각한 후 양시연은 결국 짐을 안고 안방으로 갔다.그때 연정훈이 일어나 위층으로 가려는 길이었다. 계단에서 마주친 양시연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속이 안 좋으면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요.”양시연은 말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방에 도착한 양시연은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연정훈을 보며 바쁘게 움직였다.기운이 넘치는 양시연은 부엌에서 오이를 꺼냈다.한참을 들락날락하다가 마침내 연정훈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샤워 안 해요?”“너 먼저 해.”“먼저 해요.”양시연은 예의 있게 말했다.“이 상태로는 걱정돼요. 먼저 씻으세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들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옷이 젖어도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가 말로만 하는 것이라 짐작했고 실제
양지원은 양혁수의 상황을 방금 알았지만, 양시연이 말하자 양혁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양혁수는 양시연의 결혼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했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마 양혁수가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바로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을 것 같았다.양지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혁수가 나에게 큰 문제 없다고 말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다행이네요.”양지원은 양시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시간도 많이 늦었어.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집에 가서 푹 쉬어. 내일 아침에 집에 가서 아침 먹고 어머니가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할게.”양시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양지원을 꼭 안았다.“오늘 밤은 집에 가면 안 되는 거예요?”양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가능하지만, 연정훈한테 먼저 물어봐야지. 그래도 연정훈에게 조금의 체면은 줘야지.”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고 싶으면 갈 거예요.”양지원은 애정 어린 손길로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들은 잠시 더 이야기한 후 양지원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서 양시연은 손을 흔들며 먼저 가 보라고 했다.복도에서 양지원은 전화를 받으며 급히 걸어갔다.양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지원이 ‘연정훈에게도 체면을 줘야 한다’는 말이 양시연의 마음에 남았다.‘신혼 밤 정도는 함께 보내겠지.’그녀는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연정훈이 모든 손님을 다 보내고 같이 차를 타고 강남시티로 돌아갈 때 그녀의 마음은 결혼식 날 연정훈을 향해 걸어갔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집 가는 길은 조용했고 연정훈은 술을 꽤 마신 상태여서 눈에 띄게 취한 기색이 있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았다.‘취했구나. 취한 게 좋겠다. 집에 돌아가서 그냥 곯아떨어질 수 있겠네.’양시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속
이승우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동생이라니? 내 작은고모!”부승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안 믿어.”이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신 양시연과 잡담을 나누며 웨이터에게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그러다 부승희가 갑작스레 이승우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양시연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지만, 부승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다.옆에서 연정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 상황을 구경했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왜? 내 약점을 들춰내려는 거야?”부승희는 물러설 기미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말했잖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이승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이승우의 어색한 침묵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승우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성격답게 대답을 내뱉었다.“헤어졌어.”부승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그래? 왜?”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그는 결국 혀를 차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부승희의 머리를 밀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그때 모연준이 화원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이승우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려다 잠시 멈칫하고 다시 넣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이승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동생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아니지, 고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승희는 이승우가 받기도 전에 손을 놓아 종이봉투가 떨어질 뻔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어 앉아 이승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과 눈을 맞췄다.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정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불편한 상황이 더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조용히 양시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옷 갈아입어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알게 될 거야.”부승희는 ‘으악’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무서워. 진짜 무서워.”부승희는 팔을 내밀어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요. 소름 돋는 거 봐요. 완전 실시간 소름 돋았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심코 던진 고백 같은 말에 이미 당황해 심장이 두근거리던 참이었다.부승희의 말에 더해 머리까지 뜨거워진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부승희의 팔을 잡고 살짝 움켜쥐었다.부승희는 침묵했다.“...”‘정말 어이없네.’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승우가 젊은 여자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훈남 훈녀 조합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부승희는 헉하는 소리를 내며 관심을 보였다.양시연은 이 틈을 타 어색함을 벗어나려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물었다.“이승우 씨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건가요?”연정훈은 힐끔 그쪽을 보며 답했다.“잘 모르겠어. 별 얘기 없었는데.”대화하는 동안 이승우와 그 여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부승희는 의자에 기대어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이승우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가벼운 태도로 여자를 소개했다.“윤린아 씨, 내 친구야.”부승희는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친구라고?”이승우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왜? 친구가 뭔지 몰라?”“다른 사람 친구는 아는데 넌 잘 모르겠네.”“...”윤린아는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정확히 말하면 이승우 도련님은 제 클라이언트예요. 아주 중요한 고객이죠.”그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밝게 웃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윤린아가 떠나자 부승희는 이승우를 힐끔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야. 여자친구야?”이승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너는 생각이 왜 이렇게 복잡해? 친구라고 했잖아.”부승희는 어이없다는 듯 표정을 짓고 양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바
주변은 다시 한번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부승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술잔에 과일 주스를 채우려 했다. 이승우의 주책을 떠드는 입을 막으려 했다.하지만 연정훈은 술잔을 살짝 옮겨 부승희의 손길을 피했다.다들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부승원은 차분한 얼굴로 부승희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됐어. 앉아. 연정훈의 작전 방해하지 마. 인생에서 한 번뿐인 대사건이라고.”부승희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시연 씨, 내가 도우려 했는데 소용없네요. 오늘 밤 스스로 조심해야겠어요.”양시연은 침묵했다.“...”주변 사람들이 또 한 번 들고 일어나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연정훈은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 양시연의 손을 잡고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술잔을 올리는 틈을 타서 연정훈은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가리고 낮게 말했다.“술 좀 적게 마셔요.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았다.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투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홍조 띤 얼굴을 보자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연정훈은 입술을 살짝 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그 후에는 못 피할 거야.”양시연은 당황했다.???아직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주변에서 누군가 빠르게 외쳤다.“다들 들었어요? 신랑이 신부를 협박했어요! 하루는 피할 수 있어도 이후에는 못 피한다네요!” “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짓고 말을 꺼낸 사람과 잔을 부딪치며 술을 단숨에 비웠다.그 사람도 금방 눈치를 채고 한 잔을 비우며 웃었다.“형, 신혼여행 가서는 너무 심하게 굴지 말아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이 사람들 정말...’양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술잔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으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했지만, 손을 내밀기 무섭게 연정훈이 양시연의 손을 꽉 잡았다.연정훈의 손바닥은 건조하고 따뜻했다. 그의 강한 손길에
양지원은 계속해서 양시연 쪽 상황을 신경 쓰고 있었다. 비록 민수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기분이 상한 양지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양석진이 양지원을 붙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가서 시연을 좀 봐야겠어요.”“거기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시연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 수 없어.”양지원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맞은편 테이블에 고정돼 있었다.연씨 가문의 테이블에서는 모두가 동시에 민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그 안에 비난의 기류가 느껴졌다.‘제발 이성적으로 행동해 주시길.’민수희는 침묵했다.“...”사실 민수희는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기분까지 엉망인 상태에서 억지로 이 자리에 나왔다. 그런 와중에 이런 상황을 마주하자 갑작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민수희의 가족이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지 않는 듯했다.“시연아,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오늘은 술을 마시기 힘드신가 보다.”표세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양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표세연은 직접 민수희의 잔에 주스를 따르며 다정하게 몇 마디를 건네려 했다.그러나 민수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그녀를 바라봤다.표세연의 손이 멈췄고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연호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민수희의 얼굴이 굳어졌다.“할머니가 오늘 몸이 좀 불편하시니 이 잔은 할아버지가 대신할게. 너희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연호민은 말을 마치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잔을 두 사람을 향해 들어 올렸다.양시연과 연정훈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잔을 낮춰 깊이 예를 표했다.연호민이 자리에 앉자 민수희는 무언가 말하려다 연호민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삼켰다.“세연아,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아 보이신다. 안으로 가서 쉬실 수 있도록 부축해 드리거
양시연은 연정훈의 이마를 만져보고 자기 이마도 만져보며 온도를 비교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양시연의 맑고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연정훈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더구나 그녀는 도망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변명까지 해주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괜히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결국 문제는 자신의 질투심이었다.특히 양혁수와 얽힐 때마다 몸이 시큰거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별일 아니야. 며칠 밤새웠더니 좀 어지러워서 그래.”“밤새웠어요?”양시연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밤새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저도 이틀 전부터 일부러 일찍 자고 있었는데.”그녀는 가방을 열어 에너지 음료 몇 개를 꺼냈다.포장을 뜯어 하나씩 연정훈에게 건넸다.“이거 마셔요.”연정훈은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이게 다 뭐야?”“청심환이에요.”연정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마셔요. 우리 이제 결혼까지 했잖아요. 제가 결혼하자마자 과부 되려고 정훈 씨를 해코지라도 하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양시연은 직접 음료 하나를 집어 들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옷에 흘리지 않으려 양시연의 손목을 살짝 잡고 음료를 마셨다.“남은 것도 다 마셔요.”양시연이 단호히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치 독약이라도 마시는 듯한 표정으로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전부 마시고 나서 양시연은 활짝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연정훈은 짧게 생각한 뒤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달달하네.”양시연은 두 손을 모으며 과장된 표정으로 감탄했다.“세상에! 맛까지 맞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맞아요. 달달하죠.”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단맛이요. 제가 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