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혹시 꺼리는 행동이 있나요?”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연정훈은 최대한 맞춰줬다.“없어.”“음...”“갑자기 그건 왜 물어?”안시연은 얌전한 자세로 테이블에 엎드렸다.“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교수님이 어떤 걸 싫어하는지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하나라도 더 알게 되면 조심할 수 있잖아요.”“조심했다고? 뭘?”그녀는 순진한 눈망울로 교활함을 한껏 뽐내며 진지하게 말했다.“교수님은 뒤끝이 엄청 심한 사람이니까 절대 밉보이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평소 잘 웃지 않은 탓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으나 미소 한방에 싸늘함마저 눈 녹듯 사라졌다. 거기에 훈훈한 외모까지 더해지자, 보는 눈이 즐거웠다.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더니 힘이 잔뜩 들어간 팔로 안시연을 일으켜 세웠다.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속박당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쳤다.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제압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고민 끝에 힘을 풀었다.연정훈은 자신을 보게끔 그녀의 턱을 잡고 치켜세웠다.“계약서에 적힌 시간 봤어?”“네.”“1년이 지나면 넌 언제든지 우리의 관계를 끝낼 권리가 있어. 서류에 사인하는 순간 우리의 계약은 시작된 거야.”비록 계약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 마음이 심란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은 거친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고?”“농담이었어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뒤끝 있는 거 맞아. 난 아무리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거든.”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던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난 계약을 어기는 사람이 제일 싫어. 그러니까 또 지난번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1년 후에 떠나도 좋아. 절대 잡지 않을게. 하지만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그 말인즉 떠나는 순간 돌아올 자리도 없다는
맞닿은 두 볼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안시연은 누군가에게 아부를 떠는 게 익숙하지 않았으나 필요한 상황에서는 애교를 부릴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고 고집이 세긴 하지만 때로는 굽힐 줄도 안다. 지금 막 심리적 방어선을 뚫고 연정훈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한 사람치고는 그의 팔을 감싸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교태를 부리는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따뜻하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여자가 품에 안기니 연성훈도 점점 자제력을 잃었다.욕구가 끓어오르는 강렬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안시연의 허리를 감쌌다.분위기를 보니 오늘 밤은 그와 함께 보내야 할 듯싶다.안시연은 긴장감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팔을 더 조였다. 고양이처럼 그의 어깨에 살며시 엎드린 안시연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남자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계약이 끝나면 구매자는 물건을 가져가기 마련이다.연정훈은 서두르지 않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볼에 입맞춤하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단추를 풀었다.단추가 하나둘씩 풀리자 서늘한 기운이 몸에 스며들었고 안시연의 몸도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그러자 연정훈은 단번에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놀리듯이 입을 열었다.“상처를 보려고 하는 건데 왜 이렇게 긴장했어?”안시연은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속을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른해진 몸을 그에게 맡기듯 힘을 풀었다.여기저기 다친 만큼 조심스럽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불편함을 알아차렸는지 손을 뻗어 번쩍 안고선 짙은 색의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그를 등지고 앉아있던 안시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상자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곧이어 연정훈은 연고 뚜껑을 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안시연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망설이더니 그가 다가오기 전에 재빨리 셔츠를 끌어 내렸다.어깨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린 셔츠는
연정훈은 머리를 말린 후 전화 한 통을 받고서야 침대로 돌아왔다.그 시각 안시연은 침대 머리맡의 램프를 껐다.이불을 젖히고 안시연을 품에 안은 연정훈은 그제야 그녀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그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쉬운 여자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밀당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불장난에 맛 들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온몸에 상처를 입은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연정훈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끝없는 자기암시로 마침내 결단을 내린 안시연은 자신이 한 발 내디디면 연정훈이 알아서 눈치껏 움직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흘러가는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용기를 내어 연정훈을 바라봤으나 그는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릴 뿐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다 나으면 얘기하자.”안시연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분명히 배려하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유혹’이 실패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품에 안긴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연정훈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잠이 안 와?”안시연은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옷 입으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그제야 터프하게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고 곧바로 이불을 덮어줬다.“그냥 자.”...연정훈을 만나기 전 안시연은 그 어떤 남자와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서로의 품에 안겨 잠을 잔 적도 없었다.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남자의 은은한 향기는 긴장의 끈을 풀어주었고 서서히 마음이 안정되었다.그렇게 연정훈의 곁에서 아침을 맞이했다.따스한 햇볕은 여전히 커튼에 의해 가려졌고, 오직 커튼 사이를 통과한 한 줄기 빛만이 안을 환하게 비췄다.눈을 떴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던 안시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남자의 잘생기고 입체적인
연정훈의 사무실은 매우 넓었다. 정면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대형 통유리가 있었고 또한 실내에서 자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튼튼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곧이어 아침 식사가 식탁에 차려졌고, 안시연은 햇빛을 받으며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개미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문득 어젯밤 그녀의 곁에서 잠든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몸소 깨달았다.비서는 늘 그렇듯 연정훈에게 당일 일정을 보고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연정훈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마치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있는 학생처럼 얌전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듯 흐뭇하게 입을 열었다.“안으로 가서 넥타이 좀 골라줘.”갑작스러운 제안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해하며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비서는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연정훈이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더니 고개를 숙였다.안시연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주로 어두운 계열의 넥타이를 선호하는 그의 스타일이 떠올라 네이비색과 은색 두 개를 골랐다.아니나 다를까 두 개 중에 연정훈은 고민도 없이 네이비색 넥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시연은 주기 싫은지 장난스럽게 손을 등 뒤로 감췄고 연정훈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평소에 어두운색만 하죠?”“별로야?”“그런 건 아닌데...”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은색의 넥타이를 꺼냈다.“뭔가 나이 들어 보여요. 이런 색이 훨씬 더 어려 보이고 잘 어울려요.”연정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쓸데없는 일에 함부로 참견한 건가 싶은 걱정이 밀려왔고 넥타이를 손에 든 채 안절부절못했다.비서는 연정훈이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가볍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시연 씨 말이 맞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는 네이비색보다는 이런 밝은색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겁니다.”연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셔츠 칼라를 올리더니 안시연의 손에 있는 은색의 넥타이를 가져갔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비서
비서가 시간을 알리느라 문을 두드려서야 풀려난 안시연은 책상 옆에 앉아 단추를 채웠고, 연정훈은 깔끔한 옷차림으로 그녀의 앞에 점잖게 서 있었다.아침에 꽃이 피는 절경을 보면서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안시연이 흘깃 쳐다보자 그는 또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그는 안시연의 볼을 꼬집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지그시 바라보자, 안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교수님, 왜 그러세요?”“입을 벌려봐.”안시연은 그의 요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벌렸다.연정훈은 그녀의 가지런한 이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이는 멀쩡하네.”안시연이 멍해 있는데, 장난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사람을 물지는 모르겠지만.”이 말에 안시연은 멈칫했다. 전에 연정훈에게 실례되는 일을 많이 하긴 했다.그의 입술에 난 상처 자국이 많이 옅어진 것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연정훈이 놀리자, 그녀는 무슨 담력이 생겼는지 고개를 돌려 얼굴 옆에 있던 그의 검지를 살짝 물었다.그녀가 숨을 쉼에 따라 연정훈의 손끝은 온기에 휩싸였다.사람을 문다고 놀리니까 그 자리에서 깨문 것이다. 다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점차 이빨에 힘을 주었다.연정훈은 짜릿한 느낌이 손가락 끝에서 시작하여 혈액 속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역시 요정이다. 계속 물게 놔두면 오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그는 손가락을 빼낸 후, 그녀를 와락 품에 안고 빨개진 그녀의 귀를 꼬집었다.“뭐 하려고? 나 30분 후에 회의가 있어.”방탕하게 행동한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나지막이 말했다.“또 물겠냐고 물어서 한번 해 봤어요.”“...”연정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원래는 톡톡히 혼내주려 했지만 그녀가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검은 비단 같은 안시연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서랍에 머리끈이 있어. 이따 머리를 묶어.”안시연은
안시연은 아침을 먹은 후, 연정훈의 말대로 서랍에서 머리끈을 꺼냈다.비서가 산 것인 줄 알았는데, 서랍을 열어 보니 그날 연정훈이 그녀의 머리에서 풀어간 것이었다.값싼 작은 물건이 비싼 시계들 사이에 섞여 있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하지만 안시연은 연정훈이 이 보잘것없는 것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감동했다.안시연은 머리를 묶은 후 곧바로 비서를 부르지 않고, 아침 회의가 끝나서 비서가 덜 바쁠 것 같을 때 데려달라고 부탁했다.“그런 걸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다음에는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셔도 돼요.”비서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바쁘지 않아요.”안시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비서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혼자 정인과학기술로 돌아갔다.문에 들어서는 그녀와 마주친 장가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휴가를 내지 않았어요?”“아침에 일어나니 괜찮은 것 같아서 나왔어요.”“시연 씨도 참...”장가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곧바로 그녀를 끌어당기며 흥분해서 말했다.“근데 마침 잘 왔어요. 아주 좋은 일이 있어요.”안시연이 의아해하자 장가희는 그녀를 데리고 게시판 앞으로 갔다.“봐요.”게시판에는 징계 통보가 붙어있었는데, 관련 직원은 주효진이었다.회사에서 말썽을 일으킨 것, 내부 결속을 저해한 것 등 여러 가지 안 좋은 행위로 해고 처분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잠시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연정훈이 주효진에게 엄벌을 내린 것이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회사 분위기가 나빠질까 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시원하죠?”장가희가 그녀를 툭 쳤다.안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주효진이 하이힐을 신은 채 사무용품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워낙 안색이 안 좋았는데, 안시연을 보더니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 즉시 달려들려고 했다.다행히 같이 오던 경비원이 양옆에서 그녀를 붙잡았다.장가희가
안시연을 두 번째로 보는 도우미 아주머니는 전혀 의아해하지 않고 지난번보다 더 친절하게 대했다.연정훈이 돌아오기 전에 어떤 브랜드 매장에서 옷을 가득 보내왔다.겉옷과 치마부터 속옷과 소품까지 빠진 것이 없었다.좀 피곤했던 안시연은 원래 두 벌만 고르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연정훈의 흥을 깨뜨릴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옷장을 가득 채웠고, 잠옷도 10여 벌 골랐다.그러는 사이에 8시가 다 됐다.어둠이 짙어지고 정원에 부드러운 노란색 불빛이 켜진 후에야 연정훈은 집에 들어섰다.식탁 위에는 요리들과 두 쌍의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아담한 체구의 안시연은 흰색 샤스커트 차림으로 발만 살짝 드러낸 채 담요를 덮고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연정훈이 최대한 가볍게 걸었는데도 그녀는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깼다.눈을 뜬 그녀는 연정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며 담요를 젖혔다.“오셨어요?”연정훈은 그녀가 강남시티에 돌아온 것을 알면서도 밖에서 일할 때는 그녀 생각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에 들어서기 직전에 발걸음이 빨라졌다.그녀의 부드러운 한마디에 연정훈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역시 집에 식구가 늘어난 느낌은 좋았다.“왜 올라가 자지 않고?”안시연은 코트와 넥타이를 받아서 옷장에 넣은 후 말했다.“당신이 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잘까 봐 걱정돼서요.”“그럼 뭐 어때?”연정훈은 그녀를 껴안고 자연스럽게 말했다.“자고 있으면 되지. 내가 방에 돌아가면 부를 텐데.”“저를 부른다고요?”안시연은 연정훈을 올려다보며 일부러 장난쳤다.“제가 아까워서 편하게 자라는 뜻인 줄 알았어요.”연정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소매의 단추를 풀면서 식탁 위의 요리를 훑어보았다.“저 많은 요리를 혼자 소리 없이 먹기는 아깝잖아.”안시연은 연정훈이 말한 것이 요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아주머니는?”“쉬라고 했어요.”안시연은 말하면서 가스레인지를 켜서 국을 데우고 밥을 펐다.연정훈이 먹고 싶은 건 그녀인데, 그녀는 밥을 퍼놓고 팽이처럼
예쁜 접시에 먹기 편한 크기로 잘랐거나 껍질을 벗긴 과일들이 담겨 있었고, 심지어 포도도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안시연의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가 포크로 과일을 찍어주려 할 때쯤 연정훈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그녀를 불렀다.“시연아.”안시연은 멜론을 손에 든 채 그를 돌아다보았다.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교수님...”연정훈은 그녀의 손에 있던 멜론을 먹고, 포크를 옆에 있는 접시에 던졌다.쨍그랑! 안시연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렸다.‘화 나셨나?’연정훈은 천천히 씹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입맛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잠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시연 학생, 교수님이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건 남자의 위에 담을 수 있는 음식물의 양이 제한돼 있다는 거야.”“...”안시연이 입을 벌린 채 말을 못하고 있을 때, 남자가 먼저 벌칙으로 그녀의 턱을 꼬집었다.“식탁에서 국 두 그릇을 먹이고 욕실에서 사탕수수 주스 한 잔을 먹이고.”그는 접시에 가득 담긴 과일을 보며 말했다.“아직도 부족해?”안시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설명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이런 작은 일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당신을 잘 보살피려고...”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남자의 팔에 힘이 실렸다.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입술과 혀가 빨려 들어가면서 멜론의 달콤함이 그의 혀끝을 따라 넘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어깨에 매달렸다. 강한 남성적 기운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모으고 나른하게 남자의 품에 기댔다.그녀의 입속을 구석구석 누빈 후 연정훈은 동작을 멈추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보살피면 돼. 다른 건 쓸데없이 하지 마.”“...”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알았다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