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혹시 꺼리는 행동이 있나요?”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연정훈은 최대한 맞춰줬다.“없어.”“음...”“갑자기 그건 왜 물어?”안시연은 얌전한 자세로 테이블에 엎드렸다.“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교수님이 어떤 걸 싫어하는지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하나라도 더 알게 되면 조심할 수 있잖아요.”“조심했다고? 뭘?”그녀는 순진한 눈망울로 교활함을 한껏 뽐내며 진지하게 말했다.“교수님은 뒤끝이 엄청 심한 사람이니까 절대 밉보이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요.”연정훈은 웃음을 터뜨렸다.평소 잘 웃지 않은 탓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으나 미소 한방에 싸늘함마저 눈 녹듯 사라졌다. 거기에 훈훈한 외모까지 더해지자, 보는 눈이 즐거웠다.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더니 힘이 잔뜩 들어간 팔로 안시연을 일으켜 세웠다.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안시연은 속박당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쳤다.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제압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고민 끝에 힘을 풀었다.연정훈은 자신을 보게끔 그녀의 턱을 잡고 치켜세웠다.“계약서에 적힌 시간 봤어?”“네.”“1년이 지나면 넌 언제든지 우리의 관계를 끝낼 권리가 있어. 서류에 사인하는 순간 우리의 계약은 시작된 거야.”비록 계약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 마음이 심란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은 거친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고?”“농담이었어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뒤끝 있는 거 맞아. 난 아무리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거든.”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던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난 계약을 어기는 사람이 제일 싫어. 그러니까 또 지난번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1년 후에 떠나도 좋아. 절대 잡지 않을게. 하지만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그 말인즉 떠나는 순간 돌아올 자리도 없다는
맞닿은 두 볼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안시연은 누군가에게 아부를 떠는 게 익숙하지 않았으나 필요한 상황에서는 애교를 부릴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고 고집이 세긴 하지만 때로는 굽힐 줄도 안다. 지금 막 심리적 방어선을 뚫고 연정훈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한 사람치고는 그의 팔을 감싸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교태를 부리는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따뜻하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여자가 품에 안기니 연성훈도 점점 자제력을 잃었다.욕구가 끓어오르는 강렬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안시연의 허리를 감쌌다.분위기를 보니 오늘 밤은 그와 함께 보내야 할 듯싶다.안시연은 긴장감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팔을 더 조였다. 고양이처럼 그의 어깨에 살며시 엎드린 안시연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남자의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계약이 끝나면 구매자는 물건을 가져가기 마련이다.연정훈은 서두르지 않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볼에 입맞춤하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단추를 풀었다.단추가 하나둘씩 풀리자 서늘한 기운이 몸에 스며들었고 안시연의 몸도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그러자 연정훈은 단번에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놀리듯이 입을 열었다.“상처를 보려고 하는 건데 왜 이렇게 긴장했어?”안시연은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속을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른해진 몸을 그에게 맡기듯 힘을 풀었다.여기저기 다친 만큼 조심스럽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불편함을 알아차렸는지 손을 뻗어 번쩍 안고선 짙은 색의 시트가 깔린 커다란 침대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그를 등지고 앉아있던 안시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상자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곧이어 연정훈은 연고 뚜껑을 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안시연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망설이더니 그가 다가오기 전에 재빨리 셔츠를 끌어 내렸다.어깨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린 셔츠는
연정훈은 머리를 말린 후 전화 한 통을 받고서야 침대로 돌아왔다.그 시각 안시연은 침대 머리맡의 램프를 껐다.이불을 젖히고 안시연을 품에 안은 연정훈은 그제야 그녀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그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쉬운 여자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밀당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불장난에 맛 들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온몸에 상처를 입은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연정훈은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끝없는 자기암시로 마침내 결단을 내린 안시연은 자신이 한 발 내디디면 연정훈이 알아서 눈치껏 움직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흘러가는 상황이 혼란스러운 듯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용기를 내어 연정훈을 바라봤으나 그는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릴 뿐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다 나으면 얘기하자.”안시연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분명히 배려하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유혹’이 실패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품에 안긴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연정훈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잠이 안 와?”안시연은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옷 입으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그제야 터프하게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고 곧바로 이불을 덮어줬다.“그냥 자.”...연정훈을 만나기 전 안시연은 그 어떤 남자와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서로의 품에 안겨 잠을 잔 적도 없었다.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남자의 은은한 향기는 긴장의 끈을 풀어주었고 서서히 마음이 안정되었다.그렇게 연정훈의 곁에서 아침을 맞이했다.따스한 햇볕은 여전히 커튼에 의해 가려졌고, 오직 커튼 사이를 통과한 한 줄기 빛만이 안을 환하게 비췄다.눈을 떴지만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던 안시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남자의 잘생기고 입체적인
연정훈의 사무실은 매우 넓었다. 정면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내려오는 대형 통유리가 있었고 또한 실내에서 자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튼튼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곧이어 아침 식사가 식탁에 차려졌고, 안시연은 햇빛을 받으며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개미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문득 어젯밤 그녀의 곁에서 잠든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몸소 깨달았다.비서는 늘 그렇듯 연정훈에게 당일 일정을 보고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연정훈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마치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있는 학생처럼 얌전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선 만족스러운 듯 흐뭇하게 입을 열었다.“안으로 가서 넥타이 좀 골라줘.”갑작스러운 제안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해하며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비서는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연정훈이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더니 고개를 숙였다.안시연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주로 어두운 계열의 넥타이를 선호하는 그의 스타일이 떠올라 네이비색과 은색 두 개를 골랐다.아니나 다를까 두 개 중에 연정훈은 고민도 없이 네이비색 넥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안시연은 주기 싫은지 장난스럽게 손을 등 뒤로 감췄고 연정훈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평소에 어두운색만 하죠?”“별로야?”“그런 건 아닌데...”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은색의 넥타이를 꺼냈다.“뭔가 나이 들어 보여요. 이런 색이 훨씬 더 어려 보이고 잘 어울려요.”연정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쓸데없는 일에 함부로 참견한 건가 싶은 걱정이 밀려왔고 넥타이를 손에 든 채 안절부절못했다.비서는 연정훈이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가볍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시연 씨 말이 맞습니다. 나이 들어 보이는 네이비색보다는 이런 밝은색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겁니다.”연정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셔츠 칼라를 올리더니 안시연의 손에 있는 은색의 넥타이를 가져갔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비서
비서가 시간을 알리느라 문을 두드려서야 풀려난 안시연은 책상 옆에 앉아 단추를 채웠고, 연정훈은 깔끔한 옷차림으로 그녀의 앞에 점잖게 서 있었다.아침에 꽃이 피는 절경을 보면서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안시연이 흘깃 쳐다보자 그는 또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그는 안시연의 볼을 꼬집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지그시 바라보자, 안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교수님, 왜 그러세요?”“입을 벌려봐.”안시연은 그의 요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벌렸다.연정훈은 그녀의 가지런한 이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이는 멀쩡하네.”안시연이 멍해 있는데, 장난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사람을 물지는 모르겠지만.”이 말에 안시연은 멈칫했다. 전에 연정훈에게 실례되는 일을 많이 하긴 했다.그의 입술에 난 상처 자국이 많이 옅어진 것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연정훈이 놀리자, 그녀는 무슨 담력이 생겼는지 고개를 돌려 얼굴 옆에 있던 그의 검지를 살짝 물었다.그녀가 숨을 쉼에 따라 연정훈의 손끝은 온기에 휩싸였다.사람을 문다고 놀리니까 그 자리에서 깨문 것이다. 다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점차 이빨에 힘을 주었다.연정훈은 짜릿한 느낌이 손가락 끝에서 시작하여 혈액 속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역시 요정이다. 계속 물게 놔두면 오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그는 손가락을 빼낸 후, 그녀를 와락 품에 안고 빨개진 그녀의 귀를 꼬집었다.“뭐 하려고? 나 30분 후에 회의가 있어.”방탕하게 행동한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나지막이 말했다.“또 물겠냐고 물어서 한번 해 봤어요.”“...”연정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원래는 톡톡히 혼내주려 했지만 그녀가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그는 검은 비단 같은 안시연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서랍에 머리끈이 있어. 이따 머리를 묶어.”안시연은
안시연은 아침을 먹은 후, 연정훈의 말대로 서랍에서 머리끈을 꺼냈다.비서가 산 것인 줄 알았는데, 서랍을 열어 보니 그날 연정훈이 그녀의 머리에서 풀어간 것이었다.값싼 작은 물건이 비싼 시계들 사이에 섞여 있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하지만 안시연은 연정훈이 이 보잘것없는 것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감동했다.안시연은 머리를 묶은 후 곧바로 비서를 부르지 않고, 아침 회의가 끝나서 비서가 덜 바쁠 것 같을 때 데려달라고 부탁했다.“그런 걸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다음에는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셔도 돼요.”비서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바쁘지 않아요.”안시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비서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혼자 정인과학기술로 돌아갔다.문에 들어서는 그녀와 마주친 장가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휴가를 내지 않았어요?”“아침에 일어나니 괜찮은 것 같아서 나왔어요.”“시연 씨도 참...”장가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곧바로 그녀를 끌어당기며 흥분해서 말했다.“근데 마침 잘 왔어요. 아주 좋은 일이 있어요.”안시연이 의아해하자 장가희는 그녀를 데리고 게시판 앞으로 갔다.“봐요.”게시판에는 징계 통보가 붙어있었는데, 관련 직원은 주효진이었다.회사에서 말썽을 일으킨 것, 내부 결속을 저해한 것 등 여러 가지 안 좋은 행위로 해고 처분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잠시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연정훈이 주효진에게 엄벌을 내린 것이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회사 분위기가 나빠질까 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시원하죠?”장가희가 그녀를 툭 쳤다.안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주효진이 하이힐을 신은 채 사무용품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워낙 안색이 안 좋았는데, 안시연을 보더니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 즉시 달려들려고 했다.다행히 같이 오던 경비원이 양옆에서 그녀를 붙잡았다.장가희가
안시연을 두 번째로 보는 도우미 아주머니는 전혀 의아해하지 않고 지난번보다 더 친절하게 대했다.연정훈이 돌아오기 전에 어떤 브랜드 매장에서 옷을 가득 보내왔다.겉옷과 치마부터 속옷과 소품까지 빠진 것이 없었다.좀 피곤했던 안시연은 원래 두 벌만 고르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연정훈의 흥을 깨뜨릴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옷장을 가득 채웠고, 잠옷도 10여 벌 골랐다.그러는 사이에 8시가 다 됐다.어둠이 짙어지고 정원에 부드러운 노란색 불빛이 켜진 후에야 연정훈은 집에 들어섰다.식탁 위에는 요리들과 두 쌍의 수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아담한 체구의 안시연은 흰색 샤스커트 차림으로 발만 살짝 드러낸 채 담요를 덮고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연정훈이 최대한 가볍게 걸었는데도 그녀는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깼다.눈을 뜬 그녀는 연정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며 담요를 젖혔다.“오셨어요?”연정훈은 그녀가 강남시티에 돌아온 것을 알면서도 밖에서 일할 때는 그녀 생각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에 들어서기 직전에 발걸음이 빨라졌다.그녀의 부드러운 한마디에 연정훈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역시 집에 식구가 늘어난 느낌은 좋았다.“왜 올라가 자지 않고?”안시연은 코트와 넥타이를 받아서 옷장에 넣은 후 말했다.“당신이 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잘까 봐 걱정돼서요.”“그럼 뭐 어때?”연정훈은 그녀를 껴안고 자연스럽게 말했다.“자고 있으면 되지. 내가 방에 돌아가면 부를 텐데.”“저를 부른다고요?”안시연은 연정훈을 올려다보며 일부러 장난쳤다.“제가 아까워서 편하게 자라는 뜻인 줄 알았어요.”연정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소매의 단추를 풀면서 식탁 위의 요리를 훑어보았다.“저 많은 요리를 혼자 소리 없이 먹기는 아깝잖아.”안시연은 연정훈이 말한 것이 요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아주머니는?”“쉬라고 했어요.”안시연은 말하면서 가스레인지를 켜서 국을 데우고 밥을 펐다.연정훈이 먹고 싶은 건 그녀인데, 그녀는 밥을 퍼놓고 팽이처럼
예쁜 접시에 먹기 편한 크기로 잘랐거나 껍질을 벗긴 과일들이 담겨 있었고, 심지어 포도도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안시연의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가 포크로 과일을 찍어주려 할 때쯤 연정훈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그녀를 불렀다.“시연아.”안시연은 멜론을 손에 든 채 그를 돌아다보았다.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교수님...”연정훈은 그녀의 손에 있던 멜론을 먹고, 포크를 옆에 있는 접시에 던졌다.쨍그랑! 안시연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렸다.‘화 나셨나?’연정훈은 천천히 씹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입맛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잠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시연 학생, 교수님이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건 남자의 위에 담을 수 있는 음식물의 양이 제한돼 있다는 거야.”“...”안시연이 입을 벌린 채 말을 못하고 있을 때, 남자가 먼저 벌칙으로 그녀의 턱을 꼬집었다.“식탁에서 국 두 그릇을 먹이고 욕실에서 사탕수수 주스 한 잔을 먹이고.”그는 접시에 가득 담긴 과일을 보며 말했다.“아직도 부족해?”안시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설명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이런 작은 일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당신을 잘 보살피려고...”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남자의 팔에 힘이 실렸다. 남자는 그녀의 턱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갰다.입술과 혀가 빨려 들어가면서 멜론의 달콤함이 그의 혀끝을 따라 넘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어깨에 매달렸다. 강한 남성적 기운이 그녀를 완전히 감쌌다. 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모으고 나른하게 남자의 품에 기댔다.그녀의 입속을 구석구석 누빈 후 연정훈은 동작을 멈추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보살피면 돼. 다른 건 쓸데없이 하지 마.”“...”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알았다고
양시연이 마른기침을 했다.그러자 나비에게 간식을 먹이던 연정훈의 손이 뚝 멈춰 섰다. 그러나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또 이어 간식을 먹였다.‘쳇.’양시연이 입을 삐죽이고 계단 손잡이에 몸을 기댔다.“큼큼. 셋 셀 동안 계속 모르는 척하면 오늘 밤엔 그냥 소파에서 자요.”“...”‘양시연 정말...’‘내가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지?’연정훈이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바라봤다.양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미소를 지었다.“셋, 둘...”연정훈이 몸을 일으켰다.“...”‘흥.’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기양양해진 양시연은 턱을 살짝 쳐들고 말했다.“이젠 빨리 자요. 술도 많이 마신 사람이 왜 애꿎은 알파카를 잡고 그래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놀릴 거예요.”연정훈은 빠르게 계단으로 올라가 양시연의 앞에 섰다.그렇게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양시연은 눈만 깜빡였다.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오자 양시연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고 연정훈이 멈추지 않자 계속 뒷걸음질을 했다.한참 뒷걸음치던 양시연은 마음이 급해 양손으로 연정훈을 막아섰다.“뭐 하는 거예요?”연정훈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낮은 소리로 말했다.“결혼 첫날 밤을 같이 보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꾹 참고 있는데 내가 알파카랑 대화하는 걸 창피해할 것 같아?”“...”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그리고 연정훈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그래서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해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렇게 큰 노력을 들여 겨우 한 결혼인데 소감이 어때요?”양시연이 인터뷰하듯 물었다.“...”그러자 연정훈이 몰래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꾹 참고 있는 게 보여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미안한 것도 잠시,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또 기쁜 마음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과거의 연정훈은 나이가 많고 가진 게 많다는 걸 빌미로 양시연을 압도했었다. 그러니 이제 과거에 저지른 자기 잘못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 같았
양시연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딸깍.욕실 문이 열리고 양시연은 빠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연정훈은 수건으로 목에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척하는 양시연을 향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연기 참 못해.”연정훈이 톡 쏘는 말 한마디에 양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내 체면이 뭐가 돼.’눈꺼풀에 경련이 올 것 같았지만 양시연은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잠결에 뒤척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등을 돌렸다.이에 연정훈은 몰래 웃음을 터뜨렸고 수건을 내려 두고 바로 침대로 향하지는 않았다.술기운이 올라오고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던 연정훈은 잠기운은 이미 모두 사라진 터였다. 그리고 왠지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양시연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던 연정훈은 시선을 거두고 컵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위층에는 도우미 하나 없었다.오직 검은색과 흰색의 알파카가 걱정 하나 없는 얼굴로 간식을 먹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두 알파카는 평소보다 더 풍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영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고 나비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입속의 음식을 씹으며 빤히 바라봤다.연정훈은 왠지 나비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물을 따르러 가는 내내 나비는 연정훈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연정훈이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자, 나비는 말린 바나나 간식을 머리로 밀어 연정훈의 곁에 내려놓았다.‘먹여줘.’마침 한가한 연정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한 입 한 입 먹이기 시작했다.나비는 쉬지도 않고 삼켰다.이런 나비를 보고 있자니 절로 양시연의 생각이 나고 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갔다.“바나나가 그렇게 맛있어? 이번 달에 살이 얼마나 쪘는지 알기나 해?”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나비는 입안의 바나나를 꿀꺽 삼키고 또 간식을 빤히 바라봤다.연정훈은 간식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쪽!양시연은 가볍게 키스를 마친 후 바로 자리에 누웠다.“이 정도면 된 거죠?”연정훈은 내려다보며 말했다.“아까 내가 너한테 한 키스랑 똑같아? 그렇게 대충 넘어가려고?"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있어요? 규칙도 어기고 기준까지 올리겠다고요?”“난 몰라. 그냥 네가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양시연은 혀를 차며 그와 말싸움을 벌일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말싸움하기 싫었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밀릴 걸 알았기에 아예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그는 그냥 다시 다가가 입술을 가까이 댔다.양시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연정훈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알았어요! 내가 다시 제대로 키스해 줄게요. 됐죠?”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그럼 해봐.”양시연은 이를 악물고 가볍게 기침을 내었다.그녀는 다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눈빛이 조금 더 진지해졌고 살짝 몸을 일으키며 눈을 깜빡이며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쪽.마치 식전의 애피타이저를 먹는 것처럼 가볍게 했다.그러고는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더 세게 감아 붙잡았다. 입술이 서로 스치며 한 번 더 그 사이를 깊게 탐색했다.연정훈은 그녀가 발휘하는 모습을 지켜보려 했으나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양시연이 지치지 않도록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양시연을 자신의 팔 안에 부드럽게 안았다.처음엔 약속된 조건에 따라 금방 끝내야 했지만, 연정훈의 부드러운 태도와 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이 더해져 키스는 점점 깊어졌다.둘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교차하더니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더욱 깊은 밀착으로 이어졌다.“음...”양시연의 몸이 완전히 풀렸다.어느새 그녀는 그의 손바닥을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목을 감싸고 있던 손은 점점 힘을 잃고 느슨해졌다.연정훈은 몸을 낮춰 양시연을 거의 완전히 눌렀다.잠시 숨을 고르는 틈에 그는 양시연의 입술을 한 번 더
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양시연의 피부를 달구는 듯했다양시연은 눈앞이 아찔해지며 순간 별이 떠오르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턱이 다시 잡히고 그는 또다시 입술을 차지했다.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억지로 이번 깊은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자 양시연은 힘없이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그의 입술을 손으로 급히 막았다.그녀의 손바닥이 연정훈의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에 닿았다.양시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그를 통제할 수 없을까 봐 다른 손까지 내밀어 양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힘을 주어 떼려던 순간 그녀의 화가 섞인 숨 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훈.”연정훈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어둠 속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눈빛은 서로 빛났다.양시연은 헐떡이며 짜증과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이 밤중에!’연정훈은 태연하게 양시연의 손을 뿌리쳤다.“신혼 첫날 밤인데 내가 뭘 하는 것 같아?”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입안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빠르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따졌다.“약속 어겼잖아요! 저와 한 약속 기억 안 나요? 사기꾼!”양시연은 연정훈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 했다.연정훈은 천천히 물었다.“네가 기분 좋으면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기억하는데도 왜 이러는데요!”“오늘 네 기분이 꽤 좋아 보이던데.”연정훈은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누가 그래요!”연정훈은 대답했다.“결혼식 같은 날도 안 좋다면 대체 언제 좋겠어?”“저...”연정훈은 이어서 말했다.“오늘도 안 된다면 이번 생엔 절대 못 하겠네.”양시연은 여전히 어이없었다.“...”‘이 여우 같은 남자.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해.’양시연은 그를 째려보며 온화한 가면을 벗어던지며 이불 아래서 연
방 안이 갑자기 어둠에 잠겼다.연정훈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멈춰 섰다.그 순간 양시연이 말했다."저도 너무 피곤해요. 정말 졸려요."마지막 말은 하품하며 입을 벌리는 바람에 한층 더 나약하고 안쓰럽게 들리게 했다.연정훈은 침묵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연정훈은 어금니를 꽉 물며 순간적으로 기세가 꺾였다.어둠 속에서 양시연의 숨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호흡이 점차 고르게 변하며 금세 깊은 잠에 빠질 듯 보였다.연정훈은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화가 나 몸을 침대에 세게 던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양시연은 귀를 기울이다 몰래 한쪽 눈을 떠 근처에 있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잠들었다.양시연은 곧 깊이 잠들었지만, 연정훈은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연정훈은 옆으로 돌아누워 낮에 남산 저택에서 그녀가 민희수와 나눴던 대화와 USB에 담긴 수많은 영상을 떠올렸다.그리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이 인생에서 겪은 모든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처럼 느껴졌다.‘다른 건 그렇다 치고 신혼 첫날 밤에 이렇게 적반하장이라니.’게다가 조금 전 욕실에서 곁에 있어 주겠다던 그녀는 중간에 사라졌고 연정훈은 욕실에서 넘어져 자칫 큰일 날 뻔했다.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화가 날수록 그 일이 계속 떠올랐다.결국 연정훈은 다시 돌아누워 양시연을 마주했다.어둠에 익숙해진 연정훈의 눈에는 양시연의 얼굴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양시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표정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연정훈은 손을 뻗어 양시연의 얼굴을 한번 꼬집고 싶었다!그런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꼬집어서 뭐 하겠어? 무슨 의미가 있다고?’결국 연정훈은 몸을 양시연 쪽으로 기울여 양손을 그녀의 옆에 두고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너무 가까워져 서로의 숨결이 섞이기 시작했다.연정훈의 숨소리는 점점 거
연정훈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 분노가 절반쯤 가라앉았는데 방금 넘어지면서 다시 화가 났다.‘이 잔인한 여자 아프다고 해서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연정훈의 머리는 윙윙거리며 바닥에 앉아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양시연은 아래층에서 올라오며 작은 오이 하나를 들고 안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듣고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잠시 후 양시연은 유리문을 두드렸다."연정훈 씨, 괜찮아요?”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뭐지?’양시연은 눈을 깜박이며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이번에는 안에서 물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나왔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톡톡 쳤다.“빨리 나와요 너무 오래 있지 말고요.”양시연은 말을 끝내고 돌아섰다.실내에서 연정훈은 샤워기 아래에 서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있었다. 이전에는 화가 치솟았지만, 양시연이 다가와서 대충 걱정하는 척하자 그 분노는 또 다시 사라졌다.양시연의 그의 마음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아 더 짜증이 났다.그는 급히 물을 틀어놓던 수도꼭지를 세게 잠갔다.양시연은 영리하게 물이 멈춘소리를 듣었다. 연정훈이 빨리 씻고 나오려는 줄 알고 옷을 가져와 욕실로 갔다.두 사람은 방에서 마주쳤고 연정훈은 머리를 말리며 양시연을 보았다.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약간 불안한 느낌을 받았고 힘없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물컵을 들고 나가며 마치 물을 따르러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선물과 돈을 보관하는 큰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찾으러 와도 그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양시연은 커다란 카펫 위에 앉아 기쁜 마음으로 돈을 셈하기 시작했다.침실에서 연정훈은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오지 않는 걸 보며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다.‘그래. 버텨보자.’그녀가 하룻밤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기다려 볼 작정이었다.양시연은 선물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졌고 결국 시간이 흐르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고 깜짝 놀랐다. 양시연은 얼른 몸을 돌려 가슴 부분의 지퍼를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휴.’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소파에 손을 올리고 눈을 돌리며 말했다.“어때요? 괜찮아요? 힘들면 제가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갈까요?”연정훈은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머리가 좀 어지러워.”연정훈은 자신의 상태를 말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해장국 좀 끓여 드릴까요?”연정훈은 대답 없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괜찮아.”“그럼 잠깐 누워 있으세요. 저는 짐 정리 좀 할게요.”“...응.”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빨간색 캐리어를 열었다.며칠 전 양시연의 일상용품은 이미 일부 보내졌고 연정훈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지만, 양시연은 최근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져왔다.그녀는 짐을 안방에 놓을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연정훈이 차가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캑캑.’나쁜 짓만 안 하면 된다. 다른 방에서 자는 건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한참을 생각한 후 양시연은 결국 짐을 안고 안방으로 갔다.그때 연정훈이 일어나 위층으로 가려는 길이었다. 계단에서 마주친 양시연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속이 안 좋으면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요.”양시연은 말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방에 도착한 양시연은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연정훈을 보며 바쁘게 움직였다.기운이 넘치는 양시연은 부엌에서 오이를 꺼냈다.한참을 들락날락하다가 마침내 연정훈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샤워 안 해요?”“너 먼저 해.”“먼저 해요.”양시연은 예의 있게 말했다.“이 상태로는 걱정돼요. 먼저 씻으세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들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옷이 젖어도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가 말로만 하는 것이라 짐작했고 실제
양지원은 양혁수의 상황을 방금 알았지만, 양시연이 말하자 양혁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양혁수는 양시연의 결혼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했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마 양혁수가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바로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을 것 같았다.양지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혁수가 나에게 큰 문제 없다고 말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다행이네요.”양지원은 양시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시간도 많이 늦었어.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집에 가서 푹 쉬어. 내일 아침에 집에 가서 아침 먹고 어머니가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할게.”양시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양지원을 꼭 안았다.“오늘 밤은 집에 가면 안 되는 거예요?”양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가능하지만, 연정훈한테 먼저 물어봐야지. 그래도 연정훈에게 조금의 체면은 줘야지.”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고 싶으면 갈 거예요.”양지원은 애정 어린 손길로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들은 잠시 더 이야기한 후 양지원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서 양시연은 손을 흔들며 먼저 가 보라고 했다.복도에서 양지원은 전화를 받으며 급히 걸어갔다.양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지원이 ‘연정훈에게도 체면을 줘야 한다’는 말이 양시연의 마음에 남았다.‘신혼 밤 정도는 함께 보내겠지.’그녀는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연정훈이 모든 손님을 다 보내고 같이 차를 타고 강남시티로 돌아갈 때 그녀의 마음은 결혼식 날 연정훈을 향해 걸어갔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집 가는 길은 조용했고 연정훈은 술을 꽤 마신 상태여서 눈에 띄게 취한 기색이 있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았다.‘취했구나. 취한 게 좋겠다. 집에 돌아가서 그냥 곯아떨어질 수 있겠네.’양시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속
이승우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동생이라니? 내 작은고모!”부승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안 믿어.”이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신 양시연과 잡담을 나누며 웨이터에게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그러다 부승희가 갑작스레 이승우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양시연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지만, 부승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다.옆에서 연정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 상황을 구경했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왜? 내 약점을 들춰내려는 거야?”부승희는 물러설 기미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말했잖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이승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이승우의 어색한 침묵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승우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성격답게 대답을 내뱉었다.“헤어졌어.”부승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그래? 왜?”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그는 결국 혀를 차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부승희의 머리를 밀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그때 모연준이 화원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이승우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려다 잠시 멈칫하고 다시 넣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이승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동생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아니지, 고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승희는 이승우가 받기도 전에 손을 놓아 종이봉투가 떨어질 뻔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어 앉아 이승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과 눈을 맞췄다.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정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불편한 상황이 더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조용히 양시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옷 갈아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