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얼굴이 새빨개졌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내일 병원에 갈게요.”그러자 연정훈이 그녀에게 뽀뽀를 했다.“가는 김에 보약도 좀 처방받아.”“네?”안시연은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저 건강해요.”“건강하다고?”연정훈은 그녀를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데.”안시연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차마 손을 댈 수 없잖아.”“...”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교수님은 목적성이 너무 강해요.”연정훈은 씩 웃으며 손바닥으로 그녀의 허리를 끈적하게 눌렀다. 이어서 하얀 치마가 벗겨졌다. 안시연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긴 채 머리를 어깨에 개대고 얼굴을 돌렸다.남자는 티가 없는 아름다운 옥을 다루듯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안시연은 손가락을 깨물며 가볍게 끙끙거렸다.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린 후, 볼에 뽀뽀했다. 그 와중에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입가의 상처는 다 나았어?”안시연은 그가 뭘 암시하는지 알았다.그녀의 입가에 있던 상처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효진에게 뺨을 맞은 흔적이 사라지는 데는 하루로 충분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이미 그녀를 카펫 위에 내려놓았다.그녀는 그의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소파에 기대어 앉은 남자의 살짝 열린 옷깃 사이로 단단하고 다부진 몸매가 은근히 드러났다. 그는 욕망에 찬 눈으로 안시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정사에서도 여유로워 보였다.그녀의 몸을 염려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괜찮은 인간이다.그녀는 연정훈이 욕망을 억누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그녀는 묵묵히 일어나 소파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그의 몸을 넘어 뒤에 있는 작은 스탠드를 껐다.실내가 어두워진 후 그녀는 연정훈의 목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서 키스하기 시작했다.-이튿날 아침, 안시연이 눈을 뜨니 욕실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러시아워 시간대의 지하철에서 안시연은 아침 식사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연정훈과 가장 익숙할 때는 아마 침대 위에 있을 때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침대에서 내려오면 그 남자는 냉담했다.하지만 원래부터 연인 사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원하고 그녀는 그의 권세와 돈을 원하니 누구도 손해 보는 것은 없다.그녀는 회사에 들어갔고, 점심 때쯤 진수빈이 전화로 어떤 집과 차를 좋아하는지 물었다.“자그마한 집에, 튀지 않는 차로 해주세요.”“50평 정도의 집에, 8,000만 원 정도의 차로 하면 될까요?”“...”진 비서는 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무슨 오해가 있는 건가?“혼자 살 거니까 10여 평짜리 원룸이면 충분하고, 차는 4,000만 정도 가격대면 될 것 같아요.”진수빈이 씩 웃었다.“농담이시죠?”안시연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가 사는 곳에 연정훈도 갈 거니까 완전히 그녀의 기준에 따를 수는 없다.“알아서 하세요. 저는 다 좋아요.”“네.”오후에 회사에서 나와 병원에 가기 전에 외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빨리 와. 너의 시부모님이 오셨어.”기쁨에 겨운 외할머니의 말을 듣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주지혁과 결혼 얘기가 오갔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말하는 시부모는 당연히 주지혁의 부모다.그녀는 주지혁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밖에 도착하니 안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안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미연이 반갑게 맞이했다.“시연아, 이제 퇴근해?”주씨 집안이 이전에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지혁의 부모님은 동년배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중년 여성의 소박하고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안시연은 한순간 마음이 헷갈렸다.그녀가 인사하자, 박미연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유능하다고 한바탕 칭찬했다.“시연이 더 예뻐졌네.”그녀는 말하면서 안시연의 옷을 훑어보았다.“이 치마도 예쁘네.”안시연은 침묵했다.그녀가 입은 것은 엄청나게 비싼 새 치마였다.박미연은 알아본 눈치다.
안시연은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주씨 집안의 사실 왜곡 능력은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또박또박 말했다.“주효진이 회사에서 잘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주지혁의 사업에 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신분 상승을 했으니 좋든 나쁘든 다 그 사람 일이죠.”박미연은 화를 냈다.“시연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하룻밤 부부라도 그 정은 오래간다고 했는데.”“저는 주지혁과 부부였던 적이 없습니다.”박미연은 할 말이 없었다.전혀 먹히지 않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우리 지혁이 쉽지 않은 거 너도 알잖아.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일해서 여기까지 왔어. 시연아, 너는 젊고 예뻐서 얼마든지 대단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만 지혁이는 너와 달라.”“지혁이 그동안 너의 외할머니를 돌봐드렸던 것을 봐서라도 너그러이 용서하고, 그 사장님한테 우리 지혁이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해줘.”주지혁이 부지런하고 착실하다고? 안시연은 역겨워 토할 것 같았다.주지혁이 변심하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빌붙은 것이고, 그녀는 단지 반격했을 뿐인데, 박미연은 모두 그녀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안시연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이를 본 박미연은 급히 그녀를 잡았고,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무릎을 꿇으려 했다.안시연은 깜짝 놀랐다.“시연아, 제발 도와줘.”“엄마!”박미연이 무릎을 꿇기 전에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 나는 쪽을 보니 주지혁과 주효진이 왔다.주효진은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오더니 박미연을 일으켜 세운 후 안시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양심이 있어? 우리 엄마가 그래도 어른인데.”허! 안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주지혁이 외할머니를 가지고 협박할 때는 외할머니를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나?박미연은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여전히 안시연에게 사정했다.주지혁이 앞에 나서며 미간을 찌푸렸다.“엄마, 소란을 피우지 마세요.”박미연은 눈 밑이 거뭇한 아들을
“너 정말 연정훈과 사귀어?”주지혁의 질문에 안시연은 부인하지 않았다.주지혁은 눈을 감고 몹시 마음 아파했다.“시연아.”“돌아서라고 설득하고 싶다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역질 날 뿐이니까.”주지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내뱉지 못했다.그는 안시연이 어느 날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는 쓰라린 감정을 억누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너를 말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진짜 모습을 알려주려는 거야.”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지?”주지혁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안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위선자야. 그동안 너에게 관심이 없는 척했어. 강 건너 불구경하면서 네가 궁지에 몰려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린 거야.”안시연이 사무실에서 연정훈에게 키스하는 순간, 그는 자기가 직접 안시연을 연정훈에게 밀어냈다는 것을 알았다. 연정훈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안시연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연정훈이 자기에게 어떤 감정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육체적인 관계일 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그렇다면 그가 수단을 좀 썼다고 해서 크게 비난할 것은 없다.“그 사람이 위선적이라고? 난 상관없어. 당신이 그 사람을 비난할 자격도 없고. 어쨌든 나를 압박하라고 당신 목에 칼을 들이댄 사람은 없었으니까.”주지혁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후회막급이었다.“내 방식이 잘못됐지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야.”그는 안시연을 바라보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연정훈이 너를 위해 효진을 해고하고 내가 진행 중인 몇 개 큰 프로젝트를 망쳐버렸는데, 이 모든 것은 단지 자기 권리를 과시해 네가 순순히 말을 듣게 하기 위한 거야.”안시연은 놀랐다.“연정훈이 네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망쳤다고?”그녀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주지혁은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어서 말했다.“기다려 봐. 며칠 있으면 알려줄 거야. 그걸 가지고 너를 감지
양혁수는 휴대폰을 맞은편의 귀부인 앞에 던지고는 건들거리며 턱을 치켜올렸다.“보세요. 굉장한 미녀예요.”양지원은 여자가 뺨을 때릴 때부터 끝까지 아래층의 해프닝을 구경했다.그녀는 권력자에게 빌붙는 이런 여자를 질색하는데, 연정훈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50대의 나이에도 관리를 잘해서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별로 남지 않았고 30-40대로 보이는 얼굴에는 도도함과 부티가 철철 흘렀다.눈앞의 싸구려 커피를 그녀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물 한 잔만 마셨다.아들의 휴대폰에서 동영상을 힐끗 훑어본 후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양혁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의자에 기대앉아 시비를 걸었다.“이 여자가 이렇게 매혹적인 외모에 뺨을 때린 것으로 봤을 때 성깔도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연정훈이라도 그녀의 손에 죽고 싶었을 거예요. 이렇게 강력한 경쟁상대가 있는데도 양민아를 연정훈에게 시집보내고 싶어요?”양지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누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너나 잘해.”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거칠고 버릇없이 행동했다.양지원은 휴대폰을 던져주며 센 말투로 말했다.“누나한테 전화해서 언제 도착하는지 물어봐. 벌써 15분이나 늦었어.”“알았어요.”-정인그룹의 어느 탁 트인 공간,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연정훈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없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연정훈은 탁자 옆에 앉아서 아무 감정 기복이 없는 덤덤한 얼굴로 자사호를 들고 최고급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차향이 사방으로 퍼졌다.그의 어깨 너머로는 강향단 나무가 파릇파릇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그는 차를 마신 후 몸을 뒤로 기대며 휴대폰의 영상을 정지시켰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남자가 휴대폰을 집어 들자, 손목에서 시계가 번쩍번쩍 빛났다.일어나서 창가로 간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원 이모, 모처럼 경인에 오셨는데, 제 체면부터 깎네요?”“어찌 감히 우리 연 대
안시연은 똑똑하고 자기 처지도 잘 알지만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도 마음속으로 살짝 기뻤다.브랜드 매장 직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면서 그저 안시연에게 보석의 디테일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2019년 4월 17일 연정훈 씨가 이 스타티스-라벤더 목걸이를 주문하셨습니다. 메인 보석은...”직원이 목걸이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었다.2019년이라는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안색이 변하더니 문득 안시연을 쳐다보았다.안시연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확인이 끝나셨으면 사인해 주세요.”직원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사인했다.화려하고 값비싼 보석 목걸이를 그녀는 그저 슬쩍 엿보았다. 2019년 그 당시 연정훈은 그녀에게 아주 먼 전설에 불과했다.이 목걸이는 그녀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직원이 떠난 후 아주머니는 조리대 뒤에 서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시연 아가씨...”안시연은 방긋 웃으며 보석을 내려놓았다.“괜찮아요. 교수님이 돌아오시면 제가 말씀드릴게요.”아주머니는 머쓱해하며 대답하더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차분하게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목걸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그 목걸이의 주인은 누굴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그녀가 일어나서 문어귀로 가니 연정훈이 밖에서 들어왔다. 옷에서 살짝 술 냄새가 나고 얼굴은 멀쩡한 것을 보니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것 같다.“뭐 좀 드시겠어요?”안시연이 묻자, 연정훈은 손목시계를 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헐렁한 셔츠와 옅은 색의 프린트 스커트 차림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마치 그림 속의 사람처럼 아름다웠다.살뜰히 챙기는 것을 보고,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연정훈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는 어젯밤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물었다.“뭐 했어?”“너무 늦었어요. 제가 만둣국을 끓여드릴까요?”안시연이 어깨에 기대자 남자는 그녀에게 키스했다.“좋아.”안시
그날 밤 안시연은 연정훈의 서재에 가지 않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연정훈이 지금 자기와 만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연정훈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침실로 돌아왔다.그는 이불을 젖히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안시연이 눈치 있게 돌아눕자, 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아직 안 잤어?”안시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당신을 기다리고 싶었어요.”여인의 따뜻한 한마디는 연정훈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오래된 주름살을 펴주었다. 그는 살며시 몸을 뒤집어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연정훈이 흥분하며 스탠드 조명을 어둡게 조절하자, 안시연은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고 받아주는 자세를 취했다.그녀는 키스할 때 몸이 나른해지고 고양이처럼 가볍게 읊조리는데 그것이 정말 매혹적이다.연정훈은 안시연 같은 여자가 집에 두고 데리고 놀기 좋다고 생각했었다. 몸매가 예쁘고 나른해 빠져들게 된다.다만 오늘 밤 그는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누비다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했다.그녀는 매혹적이고 충분히 농염한 요물이다.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고혹미만 있고 사랑은 없다.연정훈은 갑자기 동영상에서 그녀가 당당하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이 생동한 눈동자에 사랑을 담아 한 남자를 바라본다면 어떤 유혹일까?남자의 원시적인 영역 본능이 작용한 것인지, 연정훈은 갑자기 손에 힘을 주더니 안시연의 귀에 키스하며 저음의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전에 주지혁과 이런 거 했었어?”안시연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던 그녀는 갑자기 이 질문을 듣고 즉시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남자의 속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안다.연정훈 같은 남자는 여자의 순결을 더 중요시할 것이다.그녀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목에 키스했다.“저의 첫 경험은... 교수님과 했어요.”연정훈은 당연히 안다. 다만 그날 밤 차 안에서 한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돈과 보석만 준 것이 아니다.그날 밤이 지나고 안시연은 외할머니의 주치의와 간병인이 모두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진수빈이 직접 처리한 것이다. 어르신이 눈치챌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면 연정훈은 병원까지 옮길 생각이었다.집도 이내 구했고, 진수빈이 안시연의 취향에 따라 긴박하게 인테리어를 진행했다.심지어 회사에서도 안시연은 아랫사람을 잘 이끌고 키우는 베테랑 팀장 밑에서 일하게 됐다.처음에는 감동했다. 하지만 얻는 것이 많아지니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졌고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훔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어느 날 오전 결국 참지 못하고 빙빙 돌려서 아주머니에게 연정훈의 전 애인에 대해 물었다.아주머니는 말을 아끼는 눈치였지만 그녀가 화를 낼까 봐 몇 마디 했다.“전에 한 분이 계시긴 했지만 이미 헤어졌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안시연은 의아했다. 아주머니의 말에서 그녀는 연정훈의 곁에 오래 있은 사람들조차 전 애인이 연정훈과 어떤 사이였는지, 여자친구였는지, 아니면 그녀와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고 느꼈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주머니조차 그 여자 때문에 연정훈과 싸우면 이득 되는 게 없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그녀는 방긋 웃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여가 시간에는 대학 동창 정이슬이 천문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했다.대학교 때 천문학회 멤버였던 안시연은 전시회 주제가 ‘제주 별구경’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관계자 티켓인데 좀 기다려 봐. 내가 구혜은한테 두 장 달라고 할 테니 같이 가자.”안시연은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하지만 오후에 정이슬에게서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구혜은 말로는 티켓이 부족하대.]안시연은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대학교 때 그는 구혜은 선배와 약간 껄끄러운 사이였다.그녀는 아쉬웠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퇴근 후 연정훈이 지하 주차장으로 오라고 했다.그녀는 연정훈의 차를 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재빨리 문을 열고 올라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