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는 휴대폰을 맞은편의 귀부인 앞에 던지고는 건들거리며 턱을 치켜올렸다.“보세요. 굉장한 미녀예요.”양지원은 여자가 뺨을 때릴 때부터 끝까지 아래층의 해프닝을 구경했다.그녀는 권력자에게 빌붙는 이런 여자를 질색하는데, 연정훈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50대의 나이에도 관리를 잘해서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별로 남지 않았고 30-40대로 보이는 얼굴에는 도도함과 부티가 철철 흘렀다.눈앞의 싸구려 커피를 그녀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물 한 잔만 마셨다.아들의 휴대폰에서 동영상을 힐끗 훑어본 후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양혁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의자에 기대앉아 시비를 걸었다.“이 여자가 이렇게 매혹적인 외모에 뺨을 때린 것으로 봤을 때 성깔도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연정훈이라도 그녀의 손에 죽고 싶었을 거예요. 이렇게 강력한 경쟁상대가 있는데도 양민아를 연정훈에게 시집보내고 싶어요?”양지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누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너나 잘해.”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거칠고 버릇없이 행동했다.양지원은 휴대폰을 던져주며 센 말투로 말했다.“누나한테 전화해서 언제 도착하는지 물어봐. 벌써 15분이나 늦었어.”“알았어요.”-정인그룹의 어느 탁 트인 공간,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연정훈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없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연정훈은 탁자 옆에 앉아서 아무 감정 기복이 없는 덤덤한 얼굴로 자사호를 들고 최고급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차향이 사방으로 퍼졌다.그의 어깨 너머로는 강향단 나무가 파릇파릇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그는 차를 마신 후 몸을 뒤로 기대며 휴대폰의 영상을 정지시켰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남자가 휴대폰을 집어 들자, 손목에서 시계가 번쩍번쩍 빛났다.일어나서 창가로 간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원 이모, 모처럼 경인에 오셨는데, 제 체면부터 깎네요?”“어찌 감히 우리 연 대
안시연은 똑똑하고 자기 처지도 잘 알지만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도 마음속으로 살짝 기뻤다.브랜드 매장 직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면서 그저 안시연에게 보석의 디테일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2019년 4월 17일 연정훈 씨가 이 스타티스-라벤더 목걸이를 주문하셨습니다. 메인 보석은...”직원이 목걸이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었다.2019년이라는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안색이 변하더니 문득 안시연을 쳐다보았다.안시연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확인이 끝나셨으면 사인해 주세요.”직원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사인했다.화려하고 값비싼 보석 목걸이를 그녀는 그저 슬쩍 엿보았다. 2019년 그 당시 연정훈은 그녀에게 아주 먼 전설에 불과했다.이 목걸이는 그녀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직원이 떠난 후 아주머니는 조리대 뒤에 서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시연 아가씨...”안시연은 방긋 웃으며 보석을 내려놓았다.“괜찮아요. 교수님이 돌아오시면 제가 말씀드릴게요.”아주머니는 머쓱해하며 대답하더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차분하게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목걸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그 목걸이의 주인은 누굴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그녀가 일어나서 문어귀로 가니 연정훈이 밖에서 들어왔다. 옷에서 살짝 술 냄새가 나고 얼굴은 멀쩡한 것을 보니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것 같다.“뭐 좀 드시겠어요?”안시연이 묻자, 연정훈은 손목시계를 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헐렁한 셔츠와 옅은 색의 프린트 스커트 차림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마치 그림 속의 사람처럼 아름다웠다.살뜰히 챙기는 것을 보고,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연정훈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는 어젯밤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물었다.“뭐 했어?”“너무 늦었어요. 제가 만둣국을 끓여드릴까요?”안시연이 어깨에 기대자 남자는 그녀에게 키스했다.“좋아.”안시
그날 밤 안시연은 연정훈의 서재에 가지 않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연정훈이 지금 자기와 만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연정훈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침실로 돌아왔다.그는 이불을 젖히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안시연이 눈치 있게 돌아눕자, 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아직 안 잤어?”안시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당신을 기다리고 싶었어요.”여인의 따뜻한 한마디는 연정훈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오래된 주름살을 펴주었다. 그는 살며시 몸을 뒤집어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연정훈이 흥분하며 스탠드 조명을 어둡게 조절하자, 안시연은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고 받아주는 자세를 취했다.그녀는 키스할 때 몸이 나른해지고 고양이처럼 가볍게 읊조리는데 그것이 정말 매혹적이다.연정훈은 안시연 같은 여자가 집에 두고 데리고 놀기 좋다고 생각했었다. 몸매가 예쁘고 나른해 빠져들게 된다.다만 오늘 밤 그는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누비다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했다.그녀는 매혹적이고 충분히 농염한 요물이다.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고혹미만 있고 사랑은 없다.연정훈은 갑자기 동영상에서 그녀가 당당하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이 생동한 눈동자에 사랑을 담아 한 남자를 바라본다면 어떤 유혹일까?남자의 원시적인 영역 본능이 작용한 것인지, 연정훈은 갑자기 손에 힘을 주더니 안시연의 귀에 키스하며 저음의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전에 주지혁과 이런 거 했었어?”안시연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던 그녀는 갑자기 이 질문을 듣고 즉시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남자의 속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안다.연정훈 같은 남자는 여자의 순결을 더 중요시할 것이다.그녀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목에 키스했다.“저의 첫 경험은... 교수님과 했어요.”연정훈은 당연히 안다. 다만 그날 밤 차 안에서 한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돈과 보석만 준 것이 아니다.그날 밤이 지나고 안시연은 외할머니의 주치의와 간병인이 모두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진수빈이 직접 처리한 것이다. 어르신이 눈치챌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면 연정훈은 병원까지 옮길 생각이었다.집도 이내 구했고, 진수빈이 안시연의 취향에 따라 긴박하게 인테리어를 진행했다.심지어 회사에서도 안시연은 아랫사람을 잘 이끌고 키우는 베테랑 팀장 밑에서 일하게 됐다.처음에는 감동했다. 하지만 얻는 것이 많아지니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졌고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훔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어느 날 오전 결국 참지 못하고 빙빙 돌려서 아주머니에게 연정훈의 전 애인에 대해 물었다.아주머니는 말을 아끼는 눈치였지만 그녀가 화를 낼까 봐 몇 마디 했다.“전에 한 분이 계시긴 했지만 이미 헤어졌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안시연은 의아했다. 아주머니의 말에서 그녀는 연정훈의 곁에 오래 있은 사람들조차 전 애인이 연정훈과 어떤 사이였는지, 여자친구였는지, 아니면 그녀와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고 느꼈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주머니조차 그 여자 때문에 연정훈과 싸우면 이득 되는 게 없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그녀는 방긋 웃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여가 시간에는 대학 동창 정이슬이 천문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했다.대학교 때 천문학회 멤버였던 안시연은 전시회 주제가 ‘제주 별구경’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관계자 티켓인데 좀 기다려 봐. 내가 구혜은한테 두 장 달라고 할 테니 같이 가자.”안시연은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하지만 오후에 정이슬에게서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구혜은 말로는 티켓이 부족하대.]안시연은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대학교 때 그는 구혜은 선배와 약간 껄끄러운 사이였다.그녀는 아쉬웠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퇴근 후 연정훈이 지하 주차장으로 오라고 했다.그녀는 연정훈의 차를 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재빨리 문을 열고 올라
문에 들어서니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고, 현관 쪽 선반에는 화분이 줄지어 있었다.안을 들여다보니, 얇은 리넨 커튼으로 가려진 구석 쪽 공간에 가야금이 놓여 있고 선반에는 피리가 걸려 있었다.연정훈은 놀라는 그녀의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눈시울이 뜨거워진 그녀는 한참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식탁, 책꽂이, 책상 등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새로 추가된 가구도 있었지만, 이런 익숙한 물건들은 그녀를 외할머니와 함께 20년 가까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그녀는 식탁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지나 정신을 차린 그녀는 코끝이 찡했고 본능적으로 돌아서서 뒤에 있는 남자의 목을 꽉 껴안았다.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소리 없이 위로했다.안시연은 코를 훌쩍이며 나지막이 물었다.“교수님, 이걸 어떻게 했어요?”“네가 살던 집을 구매한 사람이 집 구조를 바꾸지 않았어.”그렇구나. 그에게는 말 한마디면 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너무나도 감동이었다.연정훈은 그녀를 안아주고 귀에 입맞춤했다.“울지 말고 베란다로 가봐. 선물이 있어.”안시연은 손을 놓고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쳐다보았다.“또 선물이 있어요?”“집을 꾸미는 것을 선물로 친다면 너무 달래기 쉽잖아.”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안시연은 씩 웃었다.그녀는 돌아서서 그가 말한 대로 베란다 방향으로 갔다.폐쇄형의 베란다에는 전동 문이 설치돼 있었다.문이 천천히 열리고 선물의 형태가 점차 안시연의 눈에 들어왔다.천체망원경이다!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그녀는 연정훈이 그녀의 속마음을 어떻게 아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걸음을 옮겨 망원경에 가까이 다가갔다.이 집은 안시연이 예전에 살던 집의 두 배 정도로 매우 큰 면적인데도 망원경을 베란다에 놓으니 공간이 협소해 보였다.천문학 지식이 좀 있는 안시연도 한순간 망원경 모델을 알지 못해 조심스럽게 만졌다.그녀는 너무 흥분해서 한참 동안 지켜보았고, 흥분이
침실 바닥에 남자의 셔츠, 정장 바지와 여자의 롱스커트, 브래지어가 야리꾸리하게 널려 있고 플로어 스탠드 조명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침대 위에서 안시연은 연정훈의 다리에 앉아 참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그녀의 몸에 난 상처가 거의 다 나았고, 오늘 밤 분위기도 괜찮으니 연정훈이 그녀를 완전히 가질 것 같다.연정훈은 확실히 그녀의 몸을 시험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긴장했다.연정훈은 개의치 않고 손바닥을 그녀의 허리에 대고 달래는 자세를 취했다.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을 때쯤, 안시연은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 그의 품에 기댔다.그녀는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연정훈의 자극에 너무 흥분되어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그녀는 살짝 화가 나서 얼굴을 파묻고 말하지 않았다.연정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그윽하게 바라보았다.“시연아, 내가 무서워?”건드리기만 하면 움츠러드니 묻는 말이다.안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그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말했다.“지난번에 아팠어요...”그때 차 안에서 그녀는 약물의 작용으로 영혼이 남자에게 탈탈 털린 듯 통제가 되지 않았는데,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 며칠 동안 부어 있었다.연정훈은 당연히 안다. 그때는 정말 거칠었고 끝난 후 약을 발라주는 기회에 또 한 번 괴롭혔으니 지금까지 두려움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여인은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그가 내려다보자, 그녀는 두려운 듯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고, 지극히 의지하는 자세로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조금 전에도 시원치 않았는데, 그녀가 이렇게 무심한 눈빛으로 유혹하는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불 위에 있던 성난 팔뚝이 다시 이불 밑으로 들어갔다.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냈다.그녀가 몇 번 피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달랬다.“너 허벅지 멍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으니 오늘은 하지 않을 거야.”안시연은 의아해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연정훈이 몸을 뒤집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안시연은 이미 이상하게 생각했다.그가 다시 한번 생일을 언급하자, 그녀는 조용히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제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연정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나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자가 언제 태어났는지 관심을 가지는 게 그렇게 이상해?”안시연은 묵묵히 연정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주지혁과 3년 만났지만 중간 생일밖에 쇠지 못했다. 시작할 때는 주지혁이 그녀의 생일을 몰랐고, 끝날 때는 주지혁이 그녀의 생일을 잊었다.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챘지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뭘 갖고 싶어?”안시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갖고 싶은 것이 없어요.”요즘 그녀는 충분히 많은 것을 받았다.“기회를 놓치면 아무것도 없어.”연정훈이 농담처럼 말하자, 안시연은 방그레 웃었다.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천문 전시회 티켓을 두 장 구해줘요.”“천문 전시회?”“네, 제주 별구경을 주제로 하는데, 시내 중심 전시장에서 열려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어렵지 않아. 두 장?”“동창이랑 같이 갈 거예요.”그런데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드러누워 눈을 감을 줄이야.“그럼 됐어.”안시연은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킨 후 겁 없이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콕 찔렀다.“아까는 어렵지 않다더니.”연정훈은 눈도 뜨지 않고 입을 삐죽거렸다.“아까는 두 장 중에 적어도 한 장은 내 것인 줄 알았지.”“...”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당신이 시간이 없을까 봐 그래요.”연정훈은 얼굴을 돌리고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어깨에 기대며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그럼, 저랑 같이 갈 시간이 있어요?”연정훈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부드러워졌다.“당신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이 말이
진수빈은 요즘 대표님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활기가 넘치고 기분이 좋은 것 같다.그리고 연정훈은 요 며칠 거의 일을 집에 가져가지 않았고 퇴근하면 바로 안시연한테 갔다. 아침에도 시간 맞춰 출근해 조회를 없앨 추세다.연정훈은 뒷좌석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안시연이 올린 인스타를 봤다. 바닥에 햇빛이 가득 내려앉은 사진이었다.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진수빈에게 천문 전시회 티켓을 구하라고 분부한 후 한마디 덧붙였다.“4일 식당을 예약해.”진수빈은 요구사항을 자세히 물었다.“생일이야.”연정훈이 대답하자, 진수빈은 즉시 알아차렸다. 또 미인의 웃음을 사려는 것이다.‘안시연 씨는 재주도 좋아. 어떻게 연정훈을 구워삶았으면 동거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그녀를 위해 신경을 쓰게 만들었을까?’차는 빌딩으로 향했다.연정훈은 진수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그가 안시연의 육체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녀를 아껴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남녀 사이가 원래 이런 것이 아닌가.그는 안시연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매일 옆에 누워있는 여인이 산송장처럼 그에게 설레는 감정이 전혀 없다면 흥미도 많이 떨어질 것이다.그렇다면 굳이 신경 써서 안시연을 스폰할 필요가 있겠는가?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으로 이해하는 욕망과 분수에 맞게 적당한 설렘이 섞여 있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하물며 안시연은 정말 귀여운 여자가 아닌가.-안시연은 이내 티켓을 받았고, 마침 주말이라 그녀는 시간이 충분했다.하지만 당일 오전 연정훈에게 갑자기 식사 자리가 생겼다.“먼저 가 있어. 이쪽 일이 끝나면 바로 갈게.”연정훈은 전시장 근처의 백화점까지 그녀를 데려다주며 다정하게 말했다.“심심하면 쇼핑해.”안시연은 그의 카드를 손에 쥐고 약간 실망했다.그녀는 그가 다시 못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백화점을 돌면서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