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 바닥에 남자의 셔츠, 정장 바지와 여자의 롱스커트, 브래지어가 야리꾸리하게 널려 있고 플로어 스탠드 조명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침대 위에서 안시연은 연정훈의 다리에 앉아 참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그녀의 몸에 난 상처가 거의 다 나았고, 오늘 밤 분위기도 괜찮으니 연정훈이 그녀를 완전히 가질 것 같다.연정훈은 확실히 그녀의 몸을 시험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긴장했다.연정훈은 개의치 않고 손바닥을 그녀의 허리에 대고 달래는 자세를 취했다.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을 때쯤, 안시연은 볼이 빨갛게 상기된 채 그의 품에 기댔다.그녀는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연정훈의 자극에 너무 흥분되어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그녀는 살짝 화가 나서 얼굴을 파묻고 말하지 않았다.연정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그윽하게 바라보았다.“시연아, 내가 무서워?”건드리기만 하면 움츠러드니 묻는 말이다.안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그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말했다.“지난번에 아팠어요...”그때 차 안에서 그녀는 약물의 작용으로 영혼이 남자에게 탈탈 털린 듯 통제가 되지 않았는데, 끝나고 집에 돌아온 후 며칠 동안 부어 있었다.연정훈은 당연히 안다. 그때는 정말 거칠었고 끝난 후 약을 발라주는 기회에 또 한 번 괴롭혔으니 지금까지 두려움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여인은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그가 내려다보자, 그녀는 두려운 듯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고, 지극히 의지하는 자세로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조금 전에도 시원치 않았는데, 그녀가 이렇게 무심한 눈빛으로 유혹하는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불 위에 있던 성난 팔뚝이 다시 이불 밑으로 들어갔다.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를 냈다.그녀가 몇 번 피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달랬다.“너 허벅지 멍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으니 오늘은 하지 않을 거야.”안시연은 의아해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연정훈이 몸을 뒤집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안시연은 이미 이상하게 생각했다.그가 다시 한번 생일을 언급하자, 그녀는 조용히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제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연정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나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자가 언제 태어났는지 관심을 가지는 게 그렇게 이상해?”안시연은 묵묵히 연정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감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주지혁과 3년 만났지만 중간 생일밖에 쇠지 못했다. 시작할 때는 주지혁이 그녀의 생일을 몰랐고, 끝날 때는 주지혁이 그녀의 생일을 잊었다.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챘지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뭘 갖고 싶어?”안시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갖고 싶은 것이 없어요.”요즘 그녀는 충분히 많은 것을 받았다.“기회를 놓치면 아무것도 없어.”연정훈이 농담처럼 말하자, 안시연은 방그레 웃었다.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천문 전시회 티켓을 두 장 구해줘요.”“천문 전시회?”“네, 제주 별구경을 주제로 하는데, 시내 중심 전시장에서 열려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어렵지 않아. 두 장?”“동창이랑 같이 갈 거예요.”그런데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드러누워 눈을 감을 줄이야.“그럼 됐어.”안시연은 의아해하며 몸을 일으킨 후 겁 없이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콕 찔렀다.“아까는 어렵지 않다더니.”연정훈은 눈도 뜨지 않고 입을 삐죽거렸다.“아까는 두 장 중에 적어도 한 장은 내 것인 줄 알았지.”“...”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당신이 시간이 없을까 봐 그래요.”연정훈은 얼굴을 돌리고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어깨에 기대며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그럼, 저랑 같이 갈 시간이 있어요?”연정훈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부드러워졌다.“당신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이 말이
진수빈은 요즘 대표님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활기가 넘치고 기분이 좋은 것 같다.그리고 연정훈은 요 며칠 거의 일을 집에 가져가지 않았고 퇴근하면 바로 안시연한테 갔다. 아침에도 시간 맞춰 출근해 조회를 없앨 추세다.연정훈은 뒷좌석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안시연이 올린 인스타를 봤다. 바닥에 햇빛이 가득 내려앉은 사진이었다.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진수빈에게 천문 전시회 티켓을 구하라고 분부한 후 한마디 덧붙였다.“4일 식당을 예약해.”진수빈은 요구사항을 자세히 물었다.“생일이야.”연정훈이 대답하자, 진수빈은 즉시 알아차렸다. 또 미인의 웃음을 사려는 것이다.‘안시연 씨는 재주도 좋아. 어떻게 연정훈을 구워삶았으면 동거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그녀를 위해 신경을 쓰게 만들었을까?’차는 빌딩으로 향했다.연정훈은 진수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그가 안시연의 육체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녀를 아껴주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남녀 사이가 원래 이런 것이 아닌가.그는 안시연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매일 옆에 누워있는 여인이 산송장처럼 그에게 설레는 감정이 전혀 없다면 흥미도 많이 떨어질 것이다.그렇다면 굳이 신경 써서 안시연을 스폰할 필요가 있겠는가?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으로 이해하는 욕망과 분수에 맞게 적당한 설렘이 섞여 있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하물며 안시연은 정말 귀여운 여자가 아닌가.-안시연은 이내 티켓을 받았고, 마침 주말이라 그녀는 시간이 충분했다.하지만 당일 오전 연정훈에게 갑자기 식사 자리가 생겼다.“먼저 가 있어. 이쪽 일이 끝나면 바로 갈게.”연정훈은 전시장 근처의 백화점까지 그녀를 데려다주며 다정하게 말했다.“심심하면 쇼핑해.”안시연은 그의 카드를 손에 쥐고 약간 실망했다.그녀는 그가 다시 못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백화점을 돌면서
구혜은은 안시연의 두 학년 선배로, 학교에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은 껄끄러운 사이였다.천문학회 일도 있고, 주지혁 문제도 있었다.구혜은은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안시연을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안시연은 A브랜드 시즌 신상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힙라인을 살린 흰색 치마는 몸에 잘 맞았고 상의는 등이 반쯤 드러나는 민소매 셔츠에 검은색 재킷이었다.멀리서 보면 완전히 부잣집 아가씨 모습이다.구혜은은 대학 시절에 외모로 남자를 꾀고 다니고, 약간의 재능을 믿고 여기저기서 말재주로 잘난 체하는 후배 안시연이 눈꼴사나웠다.귀국 후, 안시연의 소문을 좀 들었는데 그녀가 주지혁에게 버림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원래 속이 시원했었다.그런데 안시연이 이렇게 잘 지낼 줄이야.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달갑지 않은 감정을 숨긴 채 다가와서 원만히 수습하려고 했다.“시연아, 다 동창인데 이럴 필요 있어?”안시연도 그녀를 알아봤지만 그저 미소만 지었다.구혜은은 안시연이 넘어가려는 줄 알고 경호원을 보냈다.그런데 안시연이 다시 불러세웠다.“실례지만 이분을 내보내세요.”구혜은은 멍해졌다.전민준이 계속 미친개처럼 짖어대자, 같이 온 여자마저 창피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키가 훤칠한 여자가 다가왔다.“무슨 일이에요?”구혜은은 그 여자를 보더니 태도가 확 바뀌었다.양민아는 이번 천문 전시회를 주최한 사람으로, 거의 주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말에 무게가 있었다.그녀는 예의를 갖추어 안시연에게 인사한 후 현장 경호원에게 구체적인 상황을 물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네며 상세한 과정을 설명했다.카드를 받은 양민아의 눈에서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안시연을 힐끗 보고는 카드를 돌려주었다.“관람 체험에 영향을 끼쳐서 죄송합니다.”말하고 나서 그녀는 경호원에게 말했다.“몇 명 더 불러서 저분을 끌어내세요.”그녀는 행동에 결단력이 있고, 말에 보이지 않는 고귀함이 묻어났다.안시연이 쳐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안시연이 나왔을 때 운전기사는 이미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문을 나설 때 신바람이 났고 전시회 관람도 즐거웠지만 돌아갈 때는 차들로 붐비는 도로를 보면서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차 문을 여니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시원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그녀는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그녀가 앉을 자리를 빼고 전부 다양한 색상의 장미꽃으로 덮여 있었다.작업대 위에는 선물함이 놓여 있었는데, 열어보니 안에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운전기사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왜요?”안시연이 의아해하며 묻자, 운전기사가 웃으며 대답했다.“대표님이 차에 타실 때 표정을 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여전히 화가 나 있으면, 저녁에 조심하시겠다고.”안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연정훈이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십중팔구는 진수빈이 시킨 것이다.그녀가 차에 타고 출발하자마자 연정훈의 문자가 도착했다.[사죄 선물은 잘 받았어?]안시연은 등받이에 기대어 아직 물방울이 맺혀 있는 꽃을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는 기분이 풀렸지만 이런 것에 기분 풀리는 것이 불안했다.[목걸이가 너무 예뻐요.][마음에 들면 됐어.]안시연은 손에 든 브로치를 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역시 그는 진수빈이 무슨 선물을 준비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지시만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 뭐 어떤가? 꽃을 보는 순간 기뻤으면 된 것이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음성을 보냈다.[진수빈이 준비한 것은 브로치예요.]건너편에서 잠시 조용하더니 한참 후에야 답장이 왔다.[다시 찾아봐.]안시연은 눈을 깜박이며 똑바로 앉아 꽃 더미를 뒤졌다. 정말 케이스가 하나 더 나왔는데, 그 안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놀란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휴대폰 진동과 함께 연정훈의 문자가 도착했다.[나를 의심해? 저녁에 무슨 벌을 줄까?]안시연은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가슴에
전화를 받은 양민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바쁜 사람이 먼저 전화하다니, 웬일이야?”“미안해.”연정훈이 차분하게 말했다.“요즘 확실히 좀 바빴어.”안시연이 생각난 양민아는 입을 삐죽거렸다.“그럼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났어?”“일은 끝이 없지.”연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정인의 남구 전시홀을 계약하려 한다며?”“응, 1년 쓰려고.”“그쪽은 잠시 비우지 못해.”양민아는 입을 딱 벌렸다.“신관에 네가 쓰기에 적합한 큰 전시 구역이 있어. 이미 비워뒀으니 요 며칠 가서 계약하면 돼.”두 전시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양민아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연정훈의 성격도 안다. 그가 결정한 일은 웬만해서 바뀌지 않는다.“좋아, 내일 직접 가서 계약해.”그녀는 차분하게 일 얘기를 마친 후 넌지시 말했다.“언제 시간 되면 내가 밥 한 번 살게.”“고객이 밥 사는 법은 없어.”연정훈은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지원 이모랑 통화했어. 부모님이 경인에 돌아오시면 환영하는 의미로 우리가 한번 초대할 거야.”“그럼, 전화 기다릴게.”“응.”오후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양민아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걱정을 내려놓았다.연정훈은 여전히 연정훈이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그 여자는 그저 작은 애완동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어떤 권세 있는 재벌가 남자 곁에 여자가 없을까?그녀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유유한 표정을 지었다.‘됐다. 언급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안시연은 집에 돌아온 후 피곤해서 한잠 잤다. 깨어나니 방 안이 캄캄했다.소파에는 그녀가 차에서 안고 내린 장미가 놓여 있고 탁자에는 두 가지 장신구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어둠 속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7시가 다 됐는데 연정훈은 오지 않았다.안시연은 국수 한 그릇을 끓여 창가에 앉아 먹었다.천문 전시회를 보고 왔기 때문에 그녀는 대학 시절의 천문학회 단톡방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단톡방이 보이지 않았다.같은 학회에 있는 동창 고윤서
“왜 그래?”연정훈은 그녀를 안고 창가에 앉았다.“천문 전시회를 보더니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어?”안시연은 그의 다리에 앉은 후 왠지 갑자기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장난스럽게 말했다.“당신이 오지 않아서 오후 내내 욕했어요.”연정훈이 씩 웃었다.그는 눈을 감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귀티와 나른함만 남았다.안시연은 안경을 벗기고 손으로 이마를 눌러주었다.남자는 그녀를 껴안은 채 눈을 떴다.“말해봐. 누가 널 괴롭혔어?”안시연은 조금 전까지도 화가 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연정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거짓말하지 마.”안시연은 동작을 멈추고 다시 그의 어깨에 엎드렸다.“오늘 아주 바빴다면서요?”“응.”“그런데 어떻게 여기 왔어요?”연정훈은 말없이 웃었다.안시연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제 일은 다 작은 일이니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연정훈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말은 듣기 좋게 잘하는데, 내가 정말 상관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 나를 침대에서 차 버리지 않겠어?”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속마음이 들킨 그녀는 다소 민망해하며 습관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모른 척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아직도 말 안 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덤덤하게 경과를 얘기했다.연정훈이 듣기에는 너무 시시하고 유치한 짓거리들이다.그는 이내 핵심을 짚어냈다.“그 선배가 왜 너를 공격해?”이 질문에 안시연은 멈칫했다.“그 선배가 주지혁을 좋아했었어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연적을 만났으니 쌍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안시연은 농담인 줄 모르고 손을 뻗어 그의 귀를 꼬집었다.그녀는 가끔 입을 삐죽 내밀고 화내는데, 그 모습이 매우 어수룩하고 사랑스럽다. 연정훈은 그녀의 입술에 뽀뽀한 후 무심하게 말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
“원래 장 교수님도 금방 물러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전시회를 개최해야 한대. 자금이 부족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마침 돈이 마련됐지 뭐야. 그래서 교수님은 지금 텐션이 잔뜩 높아져 며칠 뒤 생일 연회에 완전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어.”정이슬이 말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윤서가 안시연에게 다가와서 말했다.“교수님이 아직도 널 생각하고 계셔. 자, 내가 널 위해 청첩장 하나 더 챙겨놨어. 시연아, 너도 참석하러 와.”안시연은 상대방의 뻔한 의도를 금세 알아차렸다.그녀는 모바일 청첩장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정이슬은 고윤서의 속셈을 콕 찔러 말했다.“쟤는 그냥 재미로 너를 부르는 거니까 상대하지 마!”“알아.”고윤서가 계속 부추겼지만, 안시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던 와중 연정훈이 돌아왔다.남자는 시계를 벗으며 대답했다.“가야지, 왜 안 가.”안시연은 고개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교수님, 혹시 저한테 작업 거는 거예요?”안시연은 요즘 갈수록 장난기가 심해졌으나 연정훈은 여태껏 화를 낸 적이 없었다.커다란 창문 앞에서 그는 안시연을 뒤에서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걱정하지 말고 가, 난 항상 네 편이야.”안시연은 눈을 꼭 감고 그와의 입맞춤을 즐기고 있었다.“남들이 우리 사이에 대해 막말하는 게 두렵지 않나요?”남자는 천천히 치마의 지퍼를 당기며 피식 웃었다.“우리가 무슨 사이길래?”안시연은 입술을 깨물고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었다.“남들은 우리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할 거 아냐.”연정훈은 그녀를 안아 식탁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어깨를 눌러 몸을 뒤로 젖히게 한 후, 손으로 외투를 벗기는 동시에 머리를 숙여 그녀의 뽀얀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방금 했던 말을 수정하듯이 말했다.“그게 아니고, 여자를 보는 눈이 있다고 남들은 부러워할 거야.”안시연은 허리를 조금 치켜들었다.그의 손이 치마 아래로부터 점차 다리 안쪽으로 미끄러져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