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래?”연정훈은 그녀를 안고 창가에 앉았다.“천문 전시회를 보더니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어?”안시연은 그의 다리에 앉은 후 왠지 갑자기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장난스럽게 말했다.“당신이 오지 않아서 오후 내내 욕했어요.”연정훈이 씩 웃었다.그는 눈을 감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귀티와 나른함만 남았다.안시연은 안경을 벗기고 손으로 이마를 눌러주었다.남자는 그녀를 껴안은 채 눈을 떴다.“말해봐. 누가 널 괴롭혔어?”안시연은 조금 전까지도 화가 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연정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거짓말하지 마.”안시연은 동작을 멈추고 다시 그의 어깨에 엎드렸다.“오늘 아주 바빴다면서요?”“응.”“그런데 어떻게 여기 왔어요?”연정훈은 말없이 웃었다.안시연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제 일은 다 작은 일이니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연정훈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말은 듣기 좋게 잘하는데, 내가 정말 상관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 나를 침대에서 차 버리지 않겠어?”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속마음이 들킨 그녀는 다소 민망해하며 습관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모른 척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아직도 말 안 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덤덤하게 경과를 얘기했다.연정훈이 듣기에는 너무 시시하고 유치한 짓거리들이다.그는 이내 핵심을 짚어냈다.“그 선배가 왜 너를 공격해?”이 질문에 안시연은 멈칫했다.“그 선배가 주지혁을 좋아했었어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연적을 만났으니 쌍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안시연은 농담인 줄 모르고 손을 뻗어 그의 귀를 꼬집었다.그녀는 가끔 입을 삐죽 내밀고 화내는데, 그 모습이 매우 어수룩하고 사랑스럽다. 연정훈은 그녀의 입술에 뽀뽀한 후 무심하게 말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
“원래 장 교수님도 금방 물러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전시회를 개최해야 한대. 자금이 부족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마침 돈이 마련됐지 뭐야. 그래서 교수님은 지금 텐션이 잔뜩 높아져 며칠 뒤 생일 연회에 완전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어.”정이슬이 말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윤서가 안시연에게 다가와서 말했다.“교수님이 아직도 널 생각하고 계셔. 자, 내가 널 위해 청첩장 하나 더 챙겨놨어. 시연아, 너도 참석하러 와.”안시연은 상대방의 뻔한 의도를 금세 알아차렸다.그녀는 모바일 청첩장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정이슬은 고윤서의 속셈을 콕 찔러 말했다.“쟤는 그냥 재미로 너를 부르는 거니까 상대하지 마!”“알아.”고윤서가 계속 부추겼지만, 안시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던 와중 연정훈이 돌아왔다.남자는 시계를 벗으며 대답했다.“가야지, 왜 안 가.”안시연은 고개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교수님, 혹시 저한테 작업 거는 거예요?”안시연은 요즘 갈수록 장난기가 심해졌으나 연정훈은 여태껏 화를 낸 적이 없었다.커다란 창문 앞에서 그는 안시연을 뒤에서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걱정하지 말고 가, 난 항상 네 편이야.”안시연은 눈을 꼭 감고 그와의 입맞춤을 즐기고 있었다.“남들이 우리 사이에 대해 막말하는 게 두렵지 않나요?”남자는 천천히 치마의 지퍼를 당기며 피식 웃었다.“우리가 무슨 사이길래?”안시연은 입술을 깨물고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었다.“남들은 우리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할 거 아냐.”연정훈은 그녀를 안아 식탁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어깨를 눌러 몸을 뒤로 젖히게 한 후, 손으로 외투를 벗기는 동시에 머리를 숙여 그녀의 뽀얀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방금 했던 말을 수정하듯이 말했다.“그게 아니고, 여자를 보는 눈이 있다고 남들은 부러워할 거야.”안시연은 허리를 조금 치켜들었다.그의 손이 치마 아래로부터 점차 다리 안쪽으로 미끄러져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안시연은 결국 연정훈의 말을 듣고 요청을 받게 되었다.장 교수의 생신날, 정이슬은 그녀와 함께 자리에 출석했다.이 나이 든 교수는 퇴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활약할 기회가 이번 생일 연회였으며 그래서 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성진 대학교에서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몇 년 사이에 벌써 사회 엘리트가 되어있었다.룸 하나에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자리에 앉은 사람 중 조금이라도 만만해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안시연이 룸에 들어서자, 그녀를 본 구혜은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반응이 시큰둥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냥 보고만 있었다.구혜은은 감정을 추스르고 얼른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깜짝 놀랐네요, 후배는 당시 우리 천문학회 인기쟁이었는데, 오늘 교수님을 뵈러 왔나요?”말을 마치자마자 안시연은 구석에서 한 여학생이 옆 사람에게 속닥이는 것을 들었다.“인싸 아니고 관종아니야?”그 테이블 사람들은 전부 여자였고 당연히 모두 그 말을 들었을 것이며 입술을 오므리고 낮은 목소리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구혜은도 당연히 들었을 거고, 더 밝은 웃음을 한 채 안시연과 정이슬을 여자 테이블 쪽으로 안내했다.하지만 그 테이블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구혜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모든 것을 꿰뚫어 본 정이슬은 단번에 말했다.“어떻게 된 거죠? 교수님의 생일 연회 준비를 구 선배님이 도와주신 거라며 자리를 미리 많이 예약해 두는 것마저도 돈이 아까우셨던 건가요? ”정이슬의 존재를 방금 발견한 구혜은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쪽은 누구...?”정이슬은 간단히 자아 소개한 뒤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역시 바쁜 사람은 일을 빨리 잊는다는 말이 맞네요. 전에 선배가 주지혁을 하도 구질구질 쫓아다녀서 제가 식당에서 국 한 그릇 뿌린 적 있죠, 벌써 잊었나?”구혜은의 안색이 순간 바뀌었다.구경하던 사람들의 눈빛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폭풍의 스멜을 맡아 흥분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구혜은을 붙잡더니 빙긋 웃었
“후배, 지금 어디서 일해?”안시연에게 이 물음을 던진 사람은 남자 쪽 테이블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룬 서현빈이었다.상대방의 태도가 온화한 게 괜찮은 사람 같아 보여 안시연은 똑같이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은 회사에서 재무 관리하고 있어요.”그녀는 정인 과학기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문제는 되도록 피면 하자는 생각이었다.다만, 그녀가 한 사람의 말에 답장을 해주자, 나머지 사람들도 벌떼처럼 모여들었다.“후배처럼 훌륭한 여성은 재무가 좀 아까운데.”“맞아, 우리 서 대표님 회사에 가는 게 낫겠네, 모두 한 가족이고, 서 대표님도 아직 단순한 우리 후배를 잘 챙겨줄 수 있을 거야.”이 말은 안시연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현빈을 띄워주느라 한 말이었다.서현빈은 겸손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안시연 본인만 원한다면 자신의 회사는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입을 열었다.정이슬이 안시연에게 조용히 문자를 보냈다.“허세, 잘난 척 쩌네.”안시연은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룸 안은 가식적인 주고받음으로 넘쳐났다.갑자기 고윤서가 안시연에게 또 다른 캡처 사진을 보내왔다.이번엔 단톡방이 아니라 개인톡이었는데 둘 중 한 명의 프로필 사진과 발언이 모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남성의 프로필 사진을 하고 있었는데 안시연은 그가 바로 서현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X발, 순수하긴.”“주지혁이 3년 동안 갖고 놀았다는 걸 몰랐으면 한 번도 그거 못 해본 여자라고 의심했을 거야.”“자기야, 쟤 밑에 무슨 색깔 입고 있는지 맞혀봐.”“오늘 밤 내가 쟬 갖고 만다.”안시연은 구역질이 났다.머리를 들어보니 맞은편 서현빈은 아직도 꽤 정상적인 사람 모습이어서 캡처 사진 속 더러운 악플러를 해대는 짐승과는 연결되기 어려웠다.정이슬이 몰래 그녀를 콕 찔렀다.“난 오늘 구혜은이 너에게 씌운 누명을 벗기려고 이 자리에 왔는데, 더 자세한 방법은 없어?”‘없다면 괜히 이 자리에 수모를 당하러 온 거 아냐?’한동
“그가 바로 근처에 있어요.”안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말했다.모든 사람은 그녀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기왕 부릴 거면 끝까지 부려봐라는 태도로 그 남자의 등장을 부추겼다.“네, 곧 오실 거예요.”안시연은 온화하게 웃었다.“어떤 사람일지 너무 기대가 되네요.”사람들은 겉으로 이렇게 말하며 실제로는 안시연이 돌 들어 자기 발등 깨는 망신스러운 장면을 보려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구혜은은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현란한 말솜씨로 어떻게든 교수님을 자리에 남겨두려 했고 교수님이 보는 눈앞에서 안시연을 망신시키려 했다.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자, 정이슬은 초조해하며 물었다.“너 그분 진짜 괜찮은 사람 맞아? 내놓을 만하지?”안시연은 음식을 꼭꼭 씹으며 입가를 살짝 닦더니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었다.“응. 괜찮은 사람이야.”“뭘 해? 그 사람.”안시연이 생각해 보니 정인 그룹의 기둥 산업은 꽤 많았다.“뭐든 조금씩 해.”정이슬은 어이가 없었다.‘휴, 이것저것 되는대로 하는 사람이 잘 돼봤자 얼마나 잘 되겠어.’그녀는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안시연에게 문자를 보내어 자기 남자 친구를 불러와 안시연의 체면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아득바득 했다.안시연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뻤다.연정훈은 근처라고 말했지만,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시연을 놀려대는 목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후배, 혹시 우리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그쪽 남자 친구를 놀라게 한 건 아니죠?”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바라보았다.“고작 사람이 많은 걸로 놀라진 않을걸요.”“그렇다면...”정이슬은 입을 닦으며 말을 꺼낸 그 여학생을 바라보았다.“못생긴 거로 놀랄 수는 있지.”그 여학생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됐고, 다 같이 기다려 봅시다. 후배가 우리를 속일 순 없잖아요.”구혜은이 말했다.정이슬은 허위적인 그녀의 모습에 눈을 희번덕거렸다.안시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술잔을 주고
장 교수는 생일 연회를 성대하게 치렀는데, 빈방만 몇십 칸을 잡아두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떻게 마침 그녀가 있는 방으로 정확하게 들어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룸 안에 자리가 모자라 구혜은이 옆 칸 큰 룸으로 연정훈을 청하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단호하게 거절했다.“아, 괜찮습니다.”온 방의 사람들은 모두 연정훈을 다른 방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다들 시선을 후에 들어온 안시연과 정이슬에게 주목했다.‘쓸데없는 사람이 왜 아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냐?’그런데 잠깐 사이에 스태프가 도착해서 현장에 자리를 몇 개 추가했다.안시연과 정이슬은 여자 테이블로 초대되었고, 연정훈은 그녀를 등진 자리에 앉았다.연정훈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저마다 감히 무모하게 굴지 못했다.구혜은은 자신이 프로젝트 책임자라는 신분을 믿고 자신을 내세우기에 바빴다.“연 대표님, 저의 스승님 대신에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낌없이 프로젝트 자금을 내주시고 항상 우리의 천문 사업을 지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장 교수도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었다.“맞아, 연 대표께 돈을 너무 많이 쓰게 했어.”연정훈은 화려한 차림새 없이 일상적인 수트를 입었고 룸에 들어선 후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장 외투를 벗고 심플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언일행에서 남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귀티가 배어 있다. 그의 오뚝한 콧날 위에 걸려있는 금테 안경이 원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몽롱한 눈동자를 가려 더욱 서늘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구혜은이 술을 권하자, 그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이런 행동이 그에겐 이미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정이슬이 귓속말로 말했다.“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얼마나 흥분했으면 저래?”안시연은 미소를 지을뿐 말하지 않았다.구혜은 뿐만 아니라 이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연정훈을 주시하고 신경 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열어보니, 그와의 대화 기록은
안시연의 핸드폰이 울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정이슬도 처음에는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것으로 생각했었다.그러나 사람들의 놀란 눈빛 사이로 연정훈이 몸을 돌려 그녀를 향했다.그는 인제야 안시연을 발견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왜 이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자코 있었어?”안시연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을 뚫고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교수님과 기분 좋게 얘기 중이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래도 교수님께 먼저 술을 권해야지. 구석에 숨어 있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남자는 꾸짖는 말을 하면서도 안시연을 주시하며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엔 진한 사랑으로 가득했다.안시연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두 테이블 사람은 아직 뇌 정지 상태였다.그래도 장 교수가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이 되었고 안시연이 곁에 걸어 오자 그는 비로소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고는 말했다.“이 기억력 좀 봐, 어쩐지 혜은이가 날 욕하더라니. 아까 시연이가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말했었는데 깜빡했네!”그는 말하면서 다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이 계집애도 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하마터면 웃음거리가 될 뻔했네, 허허. ”안시연의 발그레한 얼굴엔 수줍은 기색이 드러났다.“교수님 오늘 이렇게 바쁘신데 제가 어떻게 저의 일에 신경 써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무슨 신경을 써, 이건 잘된 일이지!”장 교수는 연정훈이 술잔을 내려놓고 안시연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구혜은를 툭툭 치며 다그쳤다.“혜은아, 시연이랑 자리를 바꾸는 건 어떨까? 저렇게 멀리 앉는 것도 불편하잖아.”구혜은의 안색은 똥을 씹은 듯 구겨졌다.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안시연이... 연정훈의... 여자 친구라고?!’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선을 돌리자 마침 안시연이 고개를 숙여 연정훈과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그윽한 눈빛에는 그의 차가운 기질과 하나도 어
연정훈이 그 말을 묻고 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보니 구혜은의 얼굴은 겁을 먹은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안시연은 깨 고소하면서도 연정훈이 정말 나쁜 남자라고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그녀가 구혜은과 얼마나 많은 악연이 엮여있는지 구혜은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자기에 관한 말을 꺼냈다니, 뒷담까진 아니더라도 무조건 좋은 말은 아니었다.“후배, 연 대표님께 내 얘기까지 했어?”구혜은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말했다.그러자 안시연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어떤 속셈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선배가 대학 다닐 때부터 잘 챙겨줬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말을 듣자 구혜은의 안색은 더 나빠졌다.장 교수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얼른 수습하러 끼어들었다.“내 학생 중에서도 혜은이와 시연이는 제일 출중한 편이야. 혜은이는 일을 착실하게 잘 처리하고 시연이는 비록 우리 천문과 학생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고 한 사물을 깊게 파고드는 걸 좋아해 남다른 인상을 남겼었어.”안시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과찬입니다.”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학교를 떠난 뒤로는 천문학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네요.”“천문을 연구하는 데는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끈기가 필요해.”연정훈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역시 넌 여러 전시회를 더 많이 보고 외부의 환경을 넓게 접촉해 보는 게 좋아.”그가 이 말을 꺼내자, 장 교수는 숨겨진 말뜻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그럼 마침 잘됐네, 이번 전시회에 혜은이가 시연이를 데리고 여러 군데 돌아보는 게 좋겠어.”구혜은은 어색하게 치켜드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나?”“그래, 네가 이번 전시회를 주최하잖아, 접해 본 것도 많을 테니 네 시연 후배를 데리고 돌아보는 것도 괜찮지.”장 교수가 말했다.구혜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제가 하기엔 좀...”“선배는 항상 일이 바쁘셔서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