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래?”연정훈은 그녀를 안고 창가에 앉았다.“천문 전시회를 보더니 무슨 억울한 일이 있었어?”안시연은 그의 다리에 앉은 후 왠지 갑자기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장난스럽게 말했다.“당신이 오지 않아서 오후 내내 욕했어요.”연정훈이 씩 웃었다.그는 눈을 감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귀티와 나른함만 남았다.안시연은 안경을 벗기고 손으로 이마를 눌러주었다.남자는 그녀를 껴안은 채 눈을 떴다.“말해봐. 누가 널 괴롭혔어?”안시연은 조금 전까지도 화가 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연정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거짓말하지 마.”안시연은 동작을 멈추고 다시 그의 어깨에 엎드렸다.“오늘 아주 바빴다면서요?”“응.”“그런데 어떻게 여기 왔어요?”연정훈은 말없이 웃었다.안시연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제 일은 다 작은 일이니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연정훈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말은 듣기 좋게 잘하는데, 내가 정말 상관하지 않는다면 오늘 밤 나를 침대에서 차 버리지 않겠어?”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속마음이 들킨 그녀는 다소 민망해하며 습관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모른 척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아직도 말 안 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덤덤하게 경과를 얘기했다.연정훈이 듣기에는 너무 시시하고 유치한 짓거리들이다.그는 이내 핵심을 짚어냈다.“그 선배가 왜 너를 공격해?”이 질문에 안시연은 멈칫했다.“그 선배가 주지혁을 좋아했었어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연적을 만났으니 쌍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안시연은 농담인 줄 모르고 손을 뻗어 그의 귀를 꼬집었다.그녀는 가끔 입을 삐죽 내밀고 화내는데, 그 모습이 매우 어수룩하고 사랑스럽다. 연정훈은 그녀의 입술에 뽀뽀한 후 무심하게 말했다.“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
“원래 장 교수님도 금방 물러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전시회를 개최해야 한대. 자금이 부족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마침 돈이 마련됐지 뭐야. 그래서 교수님은 지금 텐션이 잔뜩 높아져 며칠 뒤 생일 연회에 완전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어.”정이슬이 말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윤서가 안시연에게 다가와서 말했다.“교수님이 아직도 널 생각하고 계셔. 자, 내가 널 위해 청첩장 하나 더 챙겨놨어. 시연아, 너도 참석하러 와.”안시연은 상대방의 뻔한 의도를 금세 알아차렸다.그녀는 모바일 청첩장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정이슬은 고윤서의 속셈을 콕 찔러 말했다.“쟤는 그냥 재미로 너를 부르는 거니까 상대하지 마!”“알아.”고윤서가 계속 부추겼지만, 안시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던 와중 연정훈이 돌아왔다.남자는 시계를 벗으며 대답했다.“가야지, 왜 안 가.”안시연은 고개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교수님, 혹시 저한테 작업 거는 거예요?”안시연은 요즘 갈수록 장난기가 심해졌으나 연정훈은 여태껏 화를 낸 적이 없었다.커다란 창문 앞에서 그는 안시연을 뒤에서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걱정하지 말고 가, 난 항상 네 편이야.”안시연은 눈을 꼭 감고 그와의 입맞춤을 즐기고 있었다.“남들이 우리 사이에 대해 막말하는 게 두렵지 않나요?”남자는 천천히 치마의 지퍼를 당기며 피식 웃었다.“우리가 무슨 사이길래?”안시연은 입술을 깨물고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었다.“남들은 우리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할 거 아냐.”연정훈은 그녀를 안아 식탁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어깨를 눌러 몸을 뒤로 젖히게 한 후, 손으로 외투를 벗기는 동시에 머리를 숙여 그녀의 뽀얀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방금 했던 말을 수정하듯이 말했다.“그게 아니고, 여자를 보는 눈이 있다고 남들은 부러워할 거야.”안시연은 허리를 조금 치켜들었다.그의 손이 치마 아래로부터 점차 다리 안쪽으로 미끄러져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안시연은 결국 연정훈의 말을 듣고 요청을 받게 되었다.장 교수의 생신날, 정이슬은 그녀와 함께 자리에 출석했다.이 나이 든 교수는 퇴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활약할 기회가 이번 생일 연회였으며 그래서 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성진 대학교에서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몇 년 사이에 벌써 사회 엘리트가 되어있었다.룸 하나에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자리에 앉은 사람 중 조금이라도 만만해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안시연이 룸에 들어서자, 그녀를 본 구혜은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반응이 시큰둥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냥 보고만 있었다.구혜은은 감정을 추스르고 얼른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깜짝 놀랐네요, 후배는 당시 우리 천문학회 인기쟁이었는데, 오늘 교수님을 뵈러 왔나요?”말을 마치자마자 안시연은 구석에서 한 여학생이 옆 사람에게 속닥이는 것을 들었다.“인싸 아니고 관종아니야?”그 테이블 사람들은 전부 여자였고 당연히 모두 그 말을 들었을 것이며 입술을 오므리고 낮은 목소리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구혜은도 당연히 들었을 거고, 더 밝은 웃음을 한 채 안시연과 정이슬을 여자 테이블 쪽으로 안내했다.하지만 그 테이블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구혜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모든 것을 꿰뚫어 본 정이슬은 단번에 말했다.“어떻게 된 거죠? 교수님의 생일 연회 준비를 구 선배님이 도와주신 거라며 자리를 미리 많이 예약해 두는 것마저도 돈이 아까우셨던 건가요? ”정이슬의 존재를 방금 발견한 구혜은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쪽은 누구...?”정이슬은 간단히 자아 소개한 뒤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역시 바쁜 사람은 일을 빨리 잊는다는 말이 맞네요. 전에 선배가 주지혁을 하도 구질구질 쫓아다녀서 제가 식당에서 국 한 그릇 뿌린 적 있죠, 벌써 잊었나?”구혜은의 안색이 순간 바뀌었다.구경하던 사람들의 눈빛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폭풍의 스멜을 맡아 흥분하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구혜은을 붙잡더니 빙긋 웃었
“후배, 지금 어디서 일해?”안시연에게 이 물음을 던진 사람은 남자 쪽 테이블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룬 서현빈이었다.상대방의 태도가 온화한 게 괜찮은 사람 같아 보여 안시연은 똑같이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작은 회사에서 재무 관리하고 있어요.”그녀는 정인 과학기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문제는 되도록 피면 하자는 생각이었다.다만, 그녀가 한 사람의 말에 답장을 해주자, 나머지 사람들도 벌떼처럼 모여들었다.“후배처럼 훌륭한 여성은 재무가 좀 아까운데.”“맞아, 우리 서 대표님 회사에 가는 게 낫겠네, 모두 한 가족이고, 서 대표님도 아직 단순한 우리 후배를 잘 챙겨줄 수 있을 거야.”이 말은 안시연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현빈을 띄워주느라 한 말이었다.서현빈은 겸손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안시연 본인만 원한다면 자신의 회사는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입을 열었다.정이슬이 안시연에게 조용히 문자를 보냈다.“허세, 잘난 척 쩌네.”안시연은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룸 안은 가식적인 주고받음으로 넘쳐났다.갑자기 고윤서가 안시연에게 또 다른 캡처 사진을 보내왔다.이번엔 단톡방이 아니라 개인톡이었는데 둘 중 한 명의 프로필 사진과 발언이 모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남성의 프로필 사진을 하고 있었는데 안시연은 그가 바로 서현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X발, 순수하긴.”“주지혁이 3년 동안 갖고 놀았다는 걸 몰랐으면 한 번도 그거 못 해본 여자라고 의심했을 거야.”“자기야, 쟤 밑에 무슨 색깔 입고 있는지 맞혀봐.”“오늘 밤 내가 쟬 갖고 만다.”안시연은 구역질이 났다.머리를 들어보니 맞은편 서현빈은 아직도 꽤 정상적인 사람 모습이어서 캡처 사진 속 더러운 악플러를 해대는 짐승과는 연결되기 어려웠다.정이슬이 몰래 그녀를 콕 찔렀다.“난 오늘 구혜은이 너에게 씌운 누명을 벗기려고 이 자리에 왔는데, 더 자세한 방법은 없어?”‘없다면 괜히 이 자리에 수모를 당하러 온 거 아냐?’한동
“그가 바로 근처에 있어요.”안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말했다.모든 사람은 그녀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기왕 부릴 거면 끝까지 부려봐라는 태도로 그 남자의 등장을 부추겼다.“네, 곧 오실 거예요.”안시연은 온화하게 웃었다.“어떤 사람일지 너무 기대가 되네요.”사람들은 겉으로 이렇게 말하며 실제로는 안시연이 돌 들어 자기 발등 깨는 망신스러운 장면을 보려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구혜은은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현란한 말솜씨로 어떻게든 교수님을 자리에 남겨두려 했고 교수님이 보는 눈앞에서 안시연을 망신시키려 했다.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자, 정이슬은 초조해하며 물었다.“너 그분 진짜 괜찮은 사람 맞아? 내놓을 만하지?”안시연은 음식을 꼭꼭 씹으며 입가를 살짝 닦더니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었다.“응. 괜찮은 사람이야.”“뭘 해? 그 사람.”안시연이 생각해 보니 정인 그룹의 기둥 산업은 꽤 많았다.“뭐든 조금씩 해.”정이슬은 어이가 없었다.‘휴, 이것저것 되는대로 하는 사람이 잘 돼봤자 얼마나 잘 되겠어.’그녀는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안시연에게 문자를 보내어 자기 남자 친구를 불러와 안시연의 체면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아득바득 했다.안시연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뻤다.연정훈은 근처라고 말했지만,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시연을 놀려대는 목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후배, 혹시 우리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그쪽 남자 친구를 놀라게 한 건 아니죠?”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바라보았다.“고작 사람이 많은 걸로 놀라진 않을걸요.”“그렇다면...”정이슬은 입을 닦으며 말을 꺼낸 그 여학생을 바라보았다.“못생긴 거로 놀랄 수는 있지.”그 여학생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됐고, 다 같이 기다려 봅시다. 후배가 우리를 속일 순 없잖아요.”구혜은이 말했다.정이슬은 허위적인 그녀의 모습에 눈을 희번덕거렸다.안시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술잔을 주고
장 교수는 생일 연회를 성대하게 치렀는데, 빈방만 몇십 칸을 잡아두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떻게 마침 그녀가 있는 방으로 정확하게 들어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룸 안에 자리가 모자라 구혜은이 옆 칸 큰 룸으로 연정훈을 청하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단호하게 거절했다.“아, 괜찮습니다.”온 방의 사람들은 모두 연정훈을 다른 방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다들 시선을 후에 들어온 안시연과 정이슬에게 주목했다.‘쓸데없는 사람이 왜 아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냐?’그런데 잠깐 사이에 스태프가 도착해서 현장에 자리를 몇 개 추가했다.안시연과 정이슬은 여자 테이블로 초대되었고, 연정훈은 그녀를 등진 자리에 앉았다.연정훈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저마다 감히 무모하게 굴지 못했다.구혜은은 자신이 프로젝트 책임자라는 신분을 믿고 자신을 내세우기에 바빴다.“연 대표님, 저의 스승님 대신에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낌없이 프로젝트 자금을 내주시고 항상 우리의 천문 사업을 지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장 교수도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었다.“맞아, 연 대표께 돈을 너무 많이 쓰게 했어.”연정훈은 화려한 차림새 없이 일상적인 수트를 입었고 룸에 들어선 후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장 외투를 벗고 심플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언일행에서 남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귀티가 배어 있다. 그의 오뚝한 콧날 위에 걸려있는 금테 안경이 원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몽롱한 눈동자를 가려 더욱 서늘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구혜은이 술을 권하자, 그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이런 행동이 그에겐 이미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정이슬이 귓속말로 말했다.“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얼마나 흥분했으면 저래?”안시연은 미소를 지을뿐 말하지 않았다.구혜은 뿐만 아니라 이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연정훈을 주시하고 신경 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열어보니, 그와의 대화 기록은
안시연의 핸드폰이 울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정이슬도 처음에는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것으로 생각했었다.그러나 사람들의 놀란 눈빛 사이로 연정훈이 몸을 돌려 그녀를 향했다.그는 인제야 안시연을 발견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왜 이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자코 있었어?”안시연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을 뚫고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교수님과 기분 좋게 얘기 중이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래도 교수님께 먼저 술을 권해야지. 구석에 숨어 있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남자는 꾸짖는 말을 하면서도 안시연을 주시하며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엔 진한 사랑으로 가득했다.안시연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두 테이블 사람은 아직 뇌 정지 상태였다.그래도 장 교수가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이 되었고 안시연이 곁에 걸어 오자 그는 비로소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고는 말했다.“이 기억력 좀 봐, 어쩐지 혜은이가 날 욕하더라니. 아까 시연이가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말했었는데 깜빡했네!”그는 말하면서 다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이 계집애도 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하마터면 웃음거리가 될 뻔했네, 허허. ”안시연의 발그레한 얼굴엔 수줍은 기색이 드러났다.“교수님 오늘 이렇게 바쁘신데 제가 어떻게 저의 일에 신경 써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무슨 신경을 써, 이건 잘된 일이지!”장 교수는 연정훈이 술잔을 내려놓고 안시연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구혜은를 툭툭 치며 다그쳤다.“혜은아, 시연이랑 자리를 바꾸는 건 어떨까? 저렇게 멀리 앉는 것도 불편하잖아.”구혜은의 안색은 똥을 씹은 듯 구겨졌다.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안시연이... 연정훈의... 여자 친구라고?!’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선을 돌리자 마침 안시연이 고개를 숙여 연정훈과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그윽한 눈빛에는 그의 차가운 기질과 하나도 어
연정훈이 그 말을 묻고 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보니 구혜은의 얼굴은 겁을 먹은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안시연은 깨 고소하면서도 연정훈이 정말 나쁜 남자라고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그녀가 구혜은과 얼마나 많은 악연이 엮여있는지 구혜은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자기에 관한 말을 꺼냈다니, 뒷담까진 아니더라도 무조건 좋은 말은 아니었다.“후배, 연 대표님께 내 얘기까지 했어?”구혜은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말했다.그러자 안시연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어떤 속셈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선배가 대학 다닐 때부터 잘 챙겨줬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말을 듣자 구혜은의 안색은 더 나빠졌다.장 교수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얼른 수습하러 끼어들었다.“내 학생 중에서도 혜은이와 시연이는 제일 출중한 편이야. 혜은이는 일을 착실하게 잘 처리하고 시연이는 비록 우리 천문과 학생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고 한 사물을 깊게 파고드는 걸 좋아해 남다른 인상을 남겼었어.”안시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과찬입니다.”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학교를 떠난 뒤로는 천문학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네요.”“천문을 연구하는 데는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끈기가 필요해.”연정훈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역시 넌 여러 전시회를 더 많이 보고 외부의 환경을 넓게 접촉해 보는 게 좋아.”그가 이 말을 꺼내자, 장 교수는 숨겨진 말뜻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그럼 마침 잘됐네, 이번 전시회에 혜은이가 시연이를 데리고 여러 군데 돌아보는 게 좋겠어.”구혜은은 어색하게 치켜드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나?”“그래, 네가 이번 전시회를 주최하잖아, 접해 본 것도 많을 테니 네 시연 후배를 데리고 돌아보는 것도 괜찮지.”장 교수가 말했다.구혜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제가 하기엔 좀...”“선배는 항상 일이 바쁘셔서
‘한 통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통 세 통은 뭐지?'양시연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한 채로 연정훈과 소현주의 다른 이메일들을 열었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그중 절반이 그녀가 익숙한 주제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숨을 참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N.S와의 통신을 열어 하나씩 비교하기 시작했고 주제부터 내용까지 높은 중복도를 발견했다.‘뭐지?’양시연은 화면 앞에서 멍하니 멈춰 서 있었는데 갑자기 시선이 N.S라는 두 글자에 떨어졌다.옛날에 양민아가 소현주의 영어 이름은 Nancy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Nancy.Su! 내가 예전에 통신한 사람은 소현주 씨였다는 말인가?’‘이건 말도 안 돼. 너무 황당하잖아.’양시연은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과거에 보냈던 첫 번째 이메일과 연정훈과 소현주가 주고받은 첫 번째 이메일을 찾아봤다. 모두 일치했다.‘온라인 연애? 하. 헛소리.’양시연은 충격을 받았고 곧 분노로 바뀌었다.결국 소현주는 그녀와 연정훈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역할이었고 연정훈과 소현주의 인연은 그녀가 맺어준 셈이었다.양시연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가 책상 앞에서 걸어 다녔다.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우연인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현주가 양시연의 메일을 통해 연정훈에게 답장을 보냈고 연정훈과 대화를 나눈 후 연애를 하고 다시 한 바퀴 돌아서 결국 연정훈과 다시 만났다.‘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양시연은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남은 이메일들을 하나씩 열어봤고 한 통씩 읽을 때마다 답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지나버렸고 휴게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화면을 닫았다.연정훈은 잠을 자고 나서 훨씬 상쾌해 보였다.양시연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소현주와의 ‘온라인 연애’에 질투를 느꼈지만 결국 그와 통신한 건 바로 자
연정훈이 말했다.“인생이 단지 첫 만남 같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소현주의 이미지는 나중에 무너졌어. 처음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 때문에 계속 신경을 썼던 것 같아. 게다가 처음엔 소현주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었잖아.”양시연은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러면 결국 정말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변질된 일로 질투하지 마. 당신이 찝찝하지 않아도 내가 더 찝찝해.”연정훈이 말했다.“내가 질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너는 절대 잘못이 없어.”그는 마치 부드러운 솜처럼 아무리 세게 때려도 무슨 소용인가 싶을 만큼 무력하게 반응했다.양시연은 아무리 화가 나도 결국 그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다.사건은 임성원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연정훈이 양시연의 마음을 달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아침이 되자 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고 거울 속 부은 눈을 보며 어제 그렇게 감정에 휩쓸린 걸 후회했다.연정훈은 그녀에게 더 쉬라고 했지만 양시연은 일이 없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할 것 같다며 출근하기로 했다.아침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정인으로 데려다주었고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그녀를 보러 왔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바쁜 걸 알기에 말했다.“나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하루에 몇 번씩 오지 않아도 돼요.”연정훈은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와서 네가 괜찮은 걸 확인해야 오후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어.”양시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함께 점심을 먹은 뒤 양시연은 연정훈을 휴게실로 데려가 잠시 눈을 붙이게 했다.연정훈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양시연은 잠이 오지 않아 허리를 매만지며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일에 몰두하면 잡생각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고요가 찾아오자 다시 사소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맞은편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시연은 문득 연정훈이 예전에 자신에게 이
방 안 분위기가 차츰 진정되었고 양시연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 곁을 지키며 조용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양시연은 눈을 뜨며 옅은 창백함이 감도는 얼굴로 말했다.“배가 두 번 정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어요. 아기한테 영향이 간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양시연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고 연정훈은 지금 그녀의 상태를 우선시했다. 집에 손님들이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의사를 불렀다.의사가 도착하자 부승희와 몇몇 손님들도 양시연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다행히도 의사는 금방 진찰을 마쳤고 임신부의 정서적 동요로 인해 불편함이 생긴 것이며 아기에게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이 말을 들은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늦게 나타난 반우희는 세 아이를 데리고 양시연을 찾아왔다.희주는 맨 뒤에 서서 망설였지만 양시연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그 사진들은 합성된 거야. 언니가 이미 확인했으니까 걱정하지 마.”그 말을 듣고 나서야 희주는 안도하며 어른인 척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뭐랬어요? 형부는 드라마 속 나쁜 남편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요.”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언니한테 보여주지 말 걸 그랬어요.”양시연은 그들이 비록 어리지만 분명히 고민한 끝에 그녀와 더 가까운 관계인 자신이 속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생각했다.그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 양시연은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의사의 말로 모두가 안심했지만 양시연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손님들은 차례로 자리를 떠났다.저택은 다시 고요해졌고 가정부들은 조용히 집 안을 정리했다.밤이 되자 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정훈이 음식을 들고 와 몇 입이라도 먹으라며 권했지만 양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마음이 상해서 먹고 싶지 않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히고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했다.“좋은 엄마가 되고 싶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랫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앞뒤로 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며 속으로 추측을 시작했다.“싸운 걸까요?”거실의 분위기는 점점 냉랭해졌다.그 옆에서 세 명의 어린아이도 조용하게 있었다. 동준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순수한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승주와 희주는 상황을 감지한 듯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으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기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위층에서 양시연과 연정훈은 비록 서로 소리 내어 다투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양시연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사진을 보낸 사람이 마치 과거에 양민아가 연정훈에게 자신과 양혁수의 에든베타 영상을 보낸 것처럼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전 연인의 친밀한 사진을 보고 차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소현주를 극도로 싫어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신경 쓰는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소현주와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양시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를 등진 채 말없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감정이 격해져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이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소현주가 연정훈과 친밀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위산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결국 양시연은 급히 일어나 욕실로 향했고 연정훈은 그녀를 따라갔다.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의 마음은 무너지는 듯 아팠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의
양시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뭔데?”희주는 양시연의 손을 잡고 작은 방으로 이끌었고 잠시 고민한 후 침대 위에서 한 묶음의 엽서를 꺼냈다.희주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승주 오빠가 언니가 아기를 가진 상태라 화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언니가 모르면 더 속상해할까 봐 저희끼리 의논했거든요...”말을 끝낸 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양시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대체 뭔데 그래?”희주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손에 든 것을 양시연에게 내밀었고 양시연은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고 훑어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빛이 변했다.그것은 엽서가 아니라 사진 묶음이었고 사진 속 장면들을 본 순간 양시연의 손이 떨리고 몸이 굳어졌다.희주는 양시연의 표정을 살피며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고 두 손을 어찌할 바 모르며 만지작거렸다.“언니 이 사진...저희 몇 장만 봤어요. 함부로 다 보지는 않았어요.”양시연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녀는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알았어. 희주, 고마워.”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혹시... 오해일 수도 있어요. 아 맞아요.”그러더니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승주 오빠가 그러는데 이 사진들이 조작된 걸 수도 있대요.”양시연은 살짝 미소 지으며 희주의 어깨를 다독였다.“알겠어. 먼저 가서 놀아.”희주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양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고 의자에 앉아 허리를 살짝 짚은 뒤 사진들을 한 장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첫 번째 사진에는 연정훈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고 소현주는 핸드폰을 들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이 사진 한 장만으로도 희주 같은 어린아이조차 불륜을 떠올릴 법했으니 양시연이 불쾌함을 느낀 것도 충
점심 무렵까지 놀다 보니 사람들도 지쳐 절반 정도의 손님들은 객실로 가서 휴식을 취했고 여전히 에너지를 발산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반우희 집안의 세 아이뿐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앉아 몇몇 임원들과 함께 업계 대기업들의 권력 교체 뒤에 숨겨진 작전들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입이 심심해졌다. 그녀는 술 창고에 여 아주머니가 만든 과일 원액이 생각나 직접 가지러 가기로 했고 연정훈은 그녀가 걱정되어 동행하기로 했다.“겨우 몇 걸음밖에 안 되잖아요.”양시연이 말하자 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내가 집에 있을 땐 나랑 같이 가. 내가 집에 없을 땐 혼자 수영장이나 술 창고에 가지 마.”양시연은 현재 배가 커져 있어 혹시라도 넘어지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필요 없어요...”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뒷문에 도착했고 연정훈이 문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양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확인한 후 여 아주머니의 손자인 탁승호라는 걸 알고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승호 오빠.”탁승호는 양씨 가문 사람이라 연정훈도 그를 예우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배경은 깨끗했다.“방금 창고에 신선한 식자재를 채워 넣고 오는 길에 뒷마당에서 몇몇 아이들이 우체통을 열려고 애쓰는 걸 봤어요. 그래서 열쇠를 찾아주려고 했어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 우체통은 녹슬었을 텐데 아직 열릴 수나 있을까요?”“괜찮아요. 안 열리면 자물쇠를 교체하고 조금만 다듬으면 보기에도 좋을 거예요.”“네. 수고하세요.”탁승호는 서른 정도로 보이는 투박한 남자로 성격도 순박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금세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연정훈과 양시연에게 길을 내어주고 두 사람이 지나가자 조용히 거실로 들어갔고 매우 얌전하게 있었다.양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연정훈과 함께 술 창고로 내려갔다.그녀는 과일 원액을 금세
부승희는 양시연에게서 옷을 빌려 입고 나오던 중 마침 부승원과 반우희를 마주쳤다.‘반우희 씨는 피부가 정말 하얗고 통통하네.’부승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순간 참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부승원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반우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반우희 씨, 가슴이 진짜 풍만하시네요.”반우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듯 가슴을 감쌌다.‘이 여자 변태인가?’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어 부승원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러더니 반우희를 옆으로 끌어당겨 속삭이듯 물었다.“우리 오빠가 만져본 적 있어요?”반우희는 당황했다!반우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승희를 바라봤다.‘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거야?’부승원은 반우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부승희가 불쾌한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객실 문을 열었다.“일단 들어가서 샤워하고 옷부터 갈아입어.”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부승희의 손에서 재빨리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방 밖에서는 남매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부승희는 두 손을 뒤로 모으며 부승원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부승원도 수영을 한 듯 드물게 정장을 벗고 수영복만 입은 모습이었다.반우희는 친오빠마저 그냥 두지 않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오빠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들어가. 절호의 기회잖아.”부승원은 침묵했다.“...”이승우는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아까 이승우랑 같이 있었냐?”‘쳇.’수비가 되지 않자 공격으로 돌리는 것은 정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치사한 수법이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고 대답 없이 자리를 떠났고 부승원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반우희가 샤워를 마친 후인지 그녀의 옷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모습은 전혀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들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잠시 후 반우희가 목욕
부승희는 떠날 때 마음속에 분노를 가득 품고 떠났으며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우와 사귀지 않았지만 그와 모호한 관계를 여러 번 이어왔다.부승희는 속으로 둘이 결국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결국 이승우는 진정한 사랑이라 여긴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녀는 해외로 떠날 때 마음속으로 이승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돌아와서는 모연준과 함께하며 학업과 커리어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로 인해 이승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우에 대한 미움은 여전히 부승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처음에는 모든 환상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승우가 모연준을 대신해 싸워주던 그날 밤 사실 그가 부승희를 위해 싸운 것이었음에도 그녀는 마음 깊이 숨겨왔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이승우가 대체 누구길래 얼굴도 두껍게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싸운다고 하는지 의문스러웠다.이승우가 부승희를 대신해 싸운 것은 결국 그녀에게 창피함을 안겨준 셈이었고 마치 자신이 이승우보다 못한 사람을 찾았다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부승희는 이승우의 머리를 때린 후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 그저 이승우가 알아서 멀리 떨어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두 가문 간의 인연을 생각해 어느 정도 체면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그런데 하하.’그때 이승우는 웃으며 부승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부승희 나는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니야. 내가 너를 도와서 상황을 풀어줄게. 돈을 벌어서라도 이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잖아.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우정이라도 남아 있잖아. 네가 예전에 나와 사귀지 못해서 마음에 담고 있다면 마음이 너무 좁은 거 아니야?”“마음이 좁다고? 감히 이런 말투로 나를 말하다니. 내가 이승우에게 용기를 준 건가?’“어때?”이승우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내가 너의 부하가 되어줄 기회를 줄래? 네가 어디를 지시하면 내가
이승우는 다리를 뻗어 부승희를 부드럽게 끌어올려 무릎 위에 앉혔고 그 일련의 동작은 마치 미리 설정된 것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루어졌다.심지어 부승희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는 동작까지 예상한 듯 그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아 등 뒤로 제압했다.‘이런.’부승희는 속으로 짧게 욕을 내뱉었지만 체면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승우를 응시했다.“이거 무슨 뜻이지?”“실수였어.”이승우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부승희의 다리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부승희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이승우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허리가 아프네. 좀 주물러 줄래?”그 말을 하며 그녀는 이승우의 무릎 위에서 일부러 몸을 살짝 비틀었고 이승우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정말로 주물러줘도 화 안 낼 거야?”“화날 리가 있겠어? 네가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걸 아는데.”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억누르려 애썼다.‘이승우가 좋은 마음으로?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부승희는 허리가 아프다고만 했을 뿐 정확히 어디가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승우도 따지지 않고 그녀의 손을 풀어주며 따뜻한 손바닥으로 천천히 허리를 주물렀다.그는 부승희의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잡담을 나누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만약 부승희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승우의 목덜미를 살짝 꼬집지 않았다면 그 순간은 더 완벽했을 것이다.부승희의 손톱은 정교하게 네일 아트를 한 상태였고 살짝만 꼬집었을 뿐인데도 이승우는 목덜미에 뻐근한 고통을 느꼈다.참다못해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피해내던 이승우를 보며 부승희는 만족스러운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기분 좋지?”이승우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좋아.”‘정말 한심하군.’부승희는 이승우를 흘겨보았다. 그의 손이 허리 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뜨거운 온기가 점점 더 신경 쓰였다.참다못한 부승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손을 들자마자 또다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