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의 핸드폰이 울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정이슬도 처음에는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것으로 생각했었다.그러나 사람들의 놀란 눈빛 사이로 연정훈이 몸을 돌려 그녀를 향했다.그는 인제야 안시연을 발견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왜 이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자코 있었어?”안시연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을 뚫고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교수님과 기분 좋게 얘기 중이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래도 교수님께 먼저 술을 권해야지. 구석에 숨어 있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남자는 꾸짖는 말을 하면서도 안시연을 주시하며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엔 진한 사랑으로 가득했다.안시연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두 테이블 사람은 아직 뇌 정지 상태였다.그래도 장 교수가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이 되었고 안시연이 곁에 걸어 오자 그는 비로소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고는 말했다.“이 기억력 좀 봐, 어쩐지 혜은이가 날 욕하더라니. 아까 시연이가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말했었는데 깜빡했네!”그는 말하면서 다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이 계집애도 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하마터면 웃음거리가 될 뻔했네, 허허. ”안시연의 발그레한 얼굴엔 수줍은 기색이 드러났다.“교수님 오늘 이렇게 바쁘신데 제가 어떻게 저의 일에 신경 써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무슨 신경을 써, 이건 잘된 일이지!”장 교수는 연정훈이 술잔을 내려놓고 안시연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구혜은를 툭툭 치며 다그쳤다.“혜은아, 시연이랑 자리를 바꾸는 건 어떨까? 저렇게 멀리 앉는 것도 불편하잖아.”구혜은의 안색은 똥을 씹은 듯 구겨졌다.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안시연이... 연정훈의... 여자 친구라고?!’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선을 돌리자 마침 안시연이 고개를 숙여 연정훈과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그윽한 눈빛에는 그의 차가운 기질과 하나도 어
연정훈이 그 말을 묻고 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보니 구혜은의 얼굴은 겁을 먹은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안시연은 깨 고소하면서도 연정훈이 정말 나쁜 남자라고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그녀가 구혜은과 얼마나 많은 악연이 엮여있는지 구혜은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자기에 관한 말을 꺼냈다니, 뒷담까진 아니더라도 무조건 좋은 말은 아니었다.“후배, 연 대표님께 내 얘기까지 했어?”구혜은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말했다.그러자 안시연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어떤 속셈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선배가 대학 다닐 때부터 잘 챙겨줬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말을 듣자 구혜은의 안색은 더 나빠졌다.장 교수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얼른 수습하러 끼어들었다.“내 학생 중에서도 혜은이와 시연이는 제일 출중한 편이야. 혜은이는 일을 착실하게 잘 처리하고 시연이는 비록 우리 천문과 학생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고 한 사물을 깊게 파고드는 걸 좋아해 남다른 인상을 남겼었어.”안시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과찬입니다.”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학교를 떠난 뒤로는 천문학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네요.”“천문을 연구하는 데는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끈기가 필요해.”연정훈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역시 넌 여러 전시회를 더 많이 보고 외부의 환경을 넓게 접촉해 보는 게 좋아.”그가 이 말을 꺼내자, 장 교수는 숨겨진 말뜻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그럼 마침 잘됐네, 이번 전시회에 혜은이가 시연이를 데리고 여러 군데 돌아보는 게 좋겠어.”구혜은은 어색하게 치켜드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나?”“그래, 네가 이번 전시회를 주최하잖아, 접해 본 것도 많을 테니 네 시연 후배를 데리고 돌아보는 것도 괜찮지.”장 교수가 말했다.구혜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제가 하기엔 좀...”“선배는 항상 일이 바쁘셔서
안시연은 구혜은의 사람됨 자체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원래 바로 이 자리를 떠나려 했는데, 뜻밖에도 구혜은이 먼저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후배, 이건 내 명함이야, 너 요즘 시간 되면 언제든지 연락해.”안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명함을 받아 쥐고는 두말하지 않고 곧장 밖으로 걸어 나가 연정훈을 찾았다.‘구혜은 같은 사람은 여러 다른 환경에서 쉽게 어울릴 수 있긴 해.’그녀의 핸드폰은 정이슬이 연거푸 보내온 카톡으로 끊임없이 징징 울리고 있었다.“안시연, 너 지금 완전 핫해.”“세상에, 남자 친구가 연정훈이야? 아니, 절친인 나한테 진작 말하지 그랬어!”“난 또 모르고 내 관종 남자 친구를 부를 뻔했잖아!”안시연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정이슬에게 전화를 걸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전화를 끊자마자 복도 모퉁이에서 진수빈을 만났다.“연 대표님은 이미 내려가셨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안시연은 연정훈의 일분일초가 매우 소중한 걸 알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꺼냈다.“장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바로 내려갈게요.”“알겠습니다.”안시연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오는 길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은 이곳에 금방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모르는 사이지만 친한 척을 하며 다가와 그 자리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장 교수의 부인마저 친근하게 “우리 시연이”라고 부르며 시간 날 때 집에 놀러 오라고 청했다.그냥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해도 30분이 걸려 겨우 룸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차장 한가운데 검은색 벤틀리가 세워져 있었다.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차 문을 당겼다.연정훈은 좌석에 기대앉아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부 좌석의 여인은 차 문을 닫더니 뜻밖에도 옆에서 그를 꼭 껴안았다.이 심상치 않은 행동
진수빈은 차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정훈 곁에는 여인이 거의 없었고 그는 또 이런 일을 처음 해 봐서 차 쪽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설령 이렇더라도 그는 여전히 차 속 여자가 겁을 먹은 아기 고양이처럼 깜짝 놀라 외친 나른한 비명을 듣고 말았다.“쯧.”그는 차와 좀 더 멀리했다.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이 그의 눈에 띄었다.그는 속으로 ‘아차’ 했다.양민아도 연회에 참석하러 오던 참이었으나 건물 아래층에서 진수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진수빈이 이곳에 있다면 연정훈도 당연히 이곳에 있을 것이었다.그녀는 웃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차 안, 안시연의 단정했던 옷차림은 어느새 인위적으로 흐트러졌고 그녀의 몸 위에 무겁게 누르고 있는 남자는 반대로 옷차림이 매우 단정했고 머리카락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금테 안경 렌즈 뒤 그윽한 눈동자가 이미 한 층의 뜨거운 욕망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교수님...”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불렀다.몸이 욕망으로 근질근질했고 그의 뜨거운 손아귀에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고 있는 그때, 갑자기 뒷좌석 창문 유리에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깜짝 놀란 사슴처럼 어쩔 줄 몰라 연정훈의 품에 꼭 기대어 그의 넓은 등판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연정훈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던 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는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진수빈은 일을 나름 차분하게 처리하는 성격이라 절대 함부로 하지 않았다.그는 정장 외투를 가져와 안시연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괜찮아, 걱정 마.” 안시연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재빨리 옷을 챙겨입었다.그녀가 거의 다 정리된 후에야 연정훈은 창문을 열었다.진수빈은 감히 안을 들여다 못 보고 몸을 약간 굽힌 채 말했다.“연 대표님, 양민아 씨가 오셨습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등진 상태로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그녀의 머릿속엔 한 사람의 모습이 떠 올랐고 한창
양민아는 태도가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물었지만, 그녀가 먼저 물었을 때 안시연은 말 못 할 불편함을 느꼈다.안시연은 입꼬리를 당기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뇨, 좀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이승우 한 명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다른 몇 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와 이 사람들은 원래 한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양민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시간 날 때 같이 전시회 보러 가자.”“그래요.”양민아가 몸을 일으키자, 안시연은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연정훈이 다가와 그녀가 문을 여는 동작을 막았다.“교수님?”양민아는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이 호칭을 듣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차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위로 한 채 연정훈에게 물었다.“전 택시 타고 갈 테니 진 비서님께 교수님을 데려다 달라고 할까요?”“괜찮아.”연정훈은 차 문에 팔을 걸치고 그녀의 손바닥만 한 얼굴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난 차가 있으니 진 비서더러 널 데려다 달라고 해.”안시연은 자기도 모르게 양민아 쪽을 바라보았다.양민아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하긴, 양민아 씨는 차가 없을 리가 없지.’안시연은 눈을 절반 감아 시무룩한 시선을 감춘 채 걸쳐있던 외투를 연정훈에게 건넸다.연정훈은 몸을 약간 숙였고 바로 그 순간 안시연이 갑자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그녀는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남자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양민아는 이 달콤한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녀는 한순간 몸이 굳더니, 바로 진정하고 무표정한 채 시선을 돌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차창 옆 안시연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부끄러움을 감췄다.연정훈은 그녀가 두 손을 차 문에 놓고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앙증맞은 모습에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아직 시간이 일러. 심심하면 병원에 가서 외할머니를 찾아뵈는 것도 좋아.”“네...”“하지만 저녁에는 꼭 일찍 집에 가
안시연은 그를 집 안으로 들인 뒤 먼저 물을 따랐다. 연정훈은 식탁 가장자리에 기대어 미간을 짚고 쉬고 있었다. 안시연이 물을 그의 손 옆에 놓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 조명을 거슬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일을 하며 안색은 평온했고 입술은 살짝 오므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몸을 돌리고 말했다.“과일 좀 씻어올게요”연정훈의 손은 허공을 잡았지만 그는 전혀 화내지 않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안시연은 주방에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고 다시 나왔을 때는 방울토마토 한 묶음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연정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정훈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리 와.”안시연이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손으로 옆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안시연은 결국 그의 말과 반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그와 싸우자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았으나 그의 품에 안기지는 않았다.연정훈은 다리를 꼬고 편안한 자세로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기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올리며 농담조로 말했다. “낮에는 그렇게 네 얼굴에 자존심을 세워줬는데 밤에는 나한테 좋은 태도도 안 보여주는 거야?”안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태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몸을 바로 세우며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기분이 안 좋아?”그의 뜨거운 눈빛에 안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쳐다보았다. “... 당신 몸에서 술 냄새 나요.”연정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는 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더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안시연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남자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고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그녀에게 말했다.“앞으로는 일찍 올게,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그 순간, 그녀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연정훈은 오늘 밤 일이 있어서 샤워를 하러 갔고 안시연은 옆방 서재를 정리했다.그가 서재로 들어왔을 때 안시연은 나가려고 했다.“나가지 마.” 연정훈이 그녀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금방 끝낼게.”침실은 바로 옆 벽 하나를 두고 있는 곳이었다.안시연은 거절하지 않았고 그가 책상 뒤에서 일할 때 그녀는 소파에 앉았다.그가 일을 마쳤을 때 그녀는 그가 전화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학생증 하나 만들어줘, 권한은 조금 높게 설정해.”“안시연, 편안의 안, 시간의 시, 인연의 연이야”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은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연정훈은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다른 손으로 그녀를 불렀다.그가 전화를 끊자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무릎에 앉아 궁금하게 물었다. “나한테 학생증 만들어줬어요?”“응, 성진대학교.”연정훈은 몸을 세워 그녀를 품에 안았다.“학생증이 나한테 왜 필요해요?” 안시연이 물었다.“시간 있을 때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어. 너한테 나쁠 게 없으니까.”이 말에 안시연은 기뻤다. 성진대학교의 강의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녀는 연정훈이 술자리에서 일부러 장 교수에게 구혜은이 그녀를 전시회에 데리고 가게 하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강의를 듣는 건 좋은데 전시회를 보는 건 가끔씩 보고 싶어요. 전시회 쪽은 내가 잘 몰라요.”“모르면 배우면 돼.”안시연은 잠시 머뭇거렸다.남자의 가슴이 그녀의 등 뒤에 닿아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그는 팔로 그녀를 더 안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천문학을 좋아하는 거 알아. 젊을 때 많이 배워두는 게 좋아.”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험 삼아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집에만 있는 걸 더 좋아할 줄 알았어요.”“내가 그렇게 속 좁아 보였어?”안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배워.” 연정훈이 말했다.다른 애정 표현이나 금전
서재 안에서는 오직 펜이 종이를 지나가는 미세한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안시연은 이 순간을 매우 즐겼고 그녀는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그가 한 획 한 획 가르쳐주는 글씨를 쓰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글자들 속에는 그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느낌은 침대에서의 가장 친밀한 피부 접촉보다도 더 마음을 설레게 했다.그녀는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결국 그들은 서재의 소파로 굴러 떨어졌다.“너의 글씨도 예뻐.”그것은 그녀가 그의 이름을 쓴 후 그가 무심코 던진 칭찬이었다.그녀는 나란히 놓인 두 이름을 보며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나도 나중에 당신 필체를 배우고 싶어요.”“응?”“멋있어요, 보기만 해도 대단한 사람처럼 보여요.” 그녀는 다소 유치한 말투로 말했다.얼굴을 돌리자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코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입맞춤이 코끝에서 시작되어 점차 아래로 내려가 마지막에는 입술에 닿았다.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안시연의 긴장된 손이 점차 느슨해졌다.몸은 여전히 서로를 갈망했지만 마음은 그저 그가 이렇게 자신을 사랑스럽게 대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여지를 남겨두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관계는 더 모호해졌다.만약 단순히 이용하는 사이였으면 그는 그녀를 완전히 차지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순간들이 그녀에게 착각을 일으켰다.마치...마치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그들은 사랑을 하고 있었고 연애를 하고 있었다.아침에 그녀는 그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옷과 넥타이를 정리한 뒤 직접 입혀주었다.안시연의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졌다.그녀도 일을 해야 하기에 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문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연정훈의 옷깃을 정리해주었고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갑자기 말했다. “주지혁이 약혼한대.”안시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계속 움직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그 소리에 양시연은 괜히 연정훈에게 좋은 음식을 먹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노력이 거품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양시연이 다시 생각을 고치고 말했다.“연 대표님, 그 땅의 가치는 그 가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나와의 협력에서 고작 땅만 노린다면 양시연 대표님의 선구안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데요.”“...”양시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연씨 가문의 투자를 받는다는 건 곧 경인에서 입장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입장권으로 50% 받는 것도 과분한 일이 아니지요.”양시연이 침묵했다.가치를 따져본다면 연정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가장 이상적인 결말이라면 연정훈이 땅을 넘기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비현실적인 것 같았다.하지만 30%나 넘기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18%는 어떠세요? 서로 한 걸음만 양보하는 게...”연정훈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삼십.”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그럼 땅은 물론 그 위에 건축한 모든 시설까지 팔게요.”“안 살 겁니다.”“...”정말 말이 통하지 않았다.양시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연정훈이 작게 신음을 뱉는 게 들렸다.고개를 들어 상황을 확인한 양시연이 입을 딱 벌렸다.연정훈의 얼굴에 쉐이빙 크림이 반쯤 지워졌는데 왼쪽 얼굴에 빨간색 상처가 늘어났다.어린 직원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양시연은 빠르게 휴지를 뽑아 상처를 감싸며 큰 소리로 말했다.“빨리 의사 불러요!”양시연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상처가 아주 화끈거렸다. 아마 쉐이빙 크림이 상처를 타고 들어간 것 같았다.그래서 누를 필요가 없다며 되려 감염 우려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고개 들어 긴장한 양시연을 발견하고 그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의사는 아주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양시연은 휴지를 들었고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연정훈을 편한 자리로 옮기게 하고 의사 여러 명이 연정훈을 둘러쌌다.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연정훈은 이렇게 배가 터질 정도로 먹긴 처음이었다. 거의 턱 끝까지 음식이 찬 것 같았다.식사 후 디저트도 삼킬 수가 없었다.양시연은 매실차를 들고 오며 배시시 웃었다.“이걸 마시면 소화에 좋대요.”“...”그렇게 연정훈은 또 매실차를 비웠다.11시를 막 넘긴 시간이라 아침이자 점심을 한 번에 먹은 셈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다가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끌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적인 일을 입에 올렸다.“이 프로젝트는 정인 그룹에 있어 보잘것없는 프로젝트라 해도 저희 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걸음이 될 수 있어요.”양시연이 먼저 약한 모습을 보였다.연정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피해 앞으로 걸었다.양시연이 하루 종일 애를 쓴 건 자신의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시연은 포기하지 않고 그 발걸음을 맞춰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 토지 제공이 어렵다면 혹시 투자는 안 될까요?”연정훈이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고려해 볼 게요.”“그럼 정말 다행이고요.”양시연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때 연정훈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몇 시인지 물었다.“거의 12시가 되어가네요.”“점심 시간엔 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밥 먹고 일 얘기는 하지 말자니, 갑질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시연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방을 잡아드릴 테니 고객으로서 체험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떠세요?”“그렇게 해줘요.”양시연은 연정훈이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접 방을 체크하고 연정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깨끗한 방안에는 누군가 머문 흔적도 없었다. 침대 헤드에는 YSY라는 이니셜이 적힌 카드가 있었다.“다른 방은 이미 예약되어 있는데 제 방 하나만 비어 있어 그곳으로 모실게요.”양시연이 설명했다.“걱정마세요. 저도 아직 묵은 적이 없어 깨끗하답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점심엔 어디에 있을 거예요?”“사무실이요.
제어 버튼은 모두 안전벨트 측에 있었고 그 손잡이를 잡으려면 연정훈의 몸 위를 가로 타야 했다.양시연은 자신이 넘치게 대답했지만 한참 더듬어도 손잡이가 느껴지지 않았다.‘응? 뭐지?’연정훈이 시선을 아래로 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손잡이 찾았어요?”연정훈은 등 뒤로 몸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가 바로 양시연의 귓가에 전해졌다.조금 머쓱해진 양시연이 바로 몸을 뒤로 뺐다.“아, 그건 다른 차량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이 차량은...”버튼이 어디 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연정훈이 손을 뻗어 왼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손쉽게 몸이 뒤로 빠지고 각도가 조절되었다.“...”‘할 줄 알았으면 진작 하지 그랬어?’이런 속마음을 읽은 건지 연정훈은 팔짱 끼는 자세를 취하며 천천히 말했다.“방금 알았어요.”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며 양시연은 시동을 걸었다.그러나 연정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특히 입을 삐죽이는 모습이 방금 사무실보다 많이 편해 보여 만족스러웠다.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양시연은 창을 내려 직접 과일나무와 양어장을 소개했다.대화속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이 많이 변한 게 느껴졌다. 외모와 분위기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논리와 단어 선택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앵두나무를 지나치며 양시연이 물었다.“맛 보실래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먹고 싶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양시연은 바로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문적인 도구로 빠르게 앵두를 땄다.차창 바로 밖에서 양시연은 페트병의 물로 앵두를 씻었고 한 줌을 연정훈에게 넘겼다.“이 앵두는 치라엘 쪽에서 옮겨온 거라 알이 크고 과즙이 많아요.”연정훈은 앵두를 힐끗 살폈다. 양시연은 크고 예쁜 앵두만 자신에게 넘겼다.그래서 하나를 쥐어 입안에 넣으니 단맛이 가득 퍼졌다.“어때요?”양시연이 물었다.“나쁘지 않네요.”그러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빙 돌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