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안에서는 오직 펜이 종이를 지나가는 미세한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안시연은 이 순간을 매우 즐겼고 그녀는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그가 한 획 한 획 가르쳐주는 글씨를 쓰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글자들 속에는 그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느낌은 침대에서의 가장 친밀한 피부 접촉보다도 더 마음을 설레게 했다.그녀는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결국 그들은 서재의 소파로 굴러 떨어졌다.“너의 글씨도 예뻐.”그것은 그녀가 그의 이름을 쓴 후 그가 무심코 던진 칭찬이었다.그녀는 나란히 놓인 두 이름을 보며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나도 나중에 당신 필체를 배우고 싶어요.”“응?”“멋있어요, 보기만 해도 대단한 사람처럼 보여요.” 그녀는 다소 유치한 말투로 말했다.얼굴을 돌리자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코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입맞춤이 코끝에서 시작되어 점차 아래로 내려가 마지막에는 입술에 닿았다.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안시연의 긴장된 손이 점차 느슨해졌다.몸은 여전히 서로를 갈망했지만 마음은 그저 그가 이렇게 자신을 사랑스럽게 대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여지를 남겨두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관계는 더 모호해졌다.만약 단순히 이용하는 사이였으면 그는 그녀를 완전히 차지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순간들이 그녀에게 착각을 일으켰다.마치...마치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그들은 사랑을 하고 있었고 연애를 하고 있었다.아침에 그녀는 그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옷과 넥타이를 정리한 뒤 직접 입혀주었다.안시연의 마음은 한없이 평온해졌다.그녀도 일을 해야 하기에 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문을 나서기 전에 그녀는 연정훈의 옷깃을 정리해주었고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갑자기 말했다. “주지혁이 약혼한대.”안시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계속 움직
“요즘 일 스트레스 많이 받아요?” 나무 아래서 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물었다.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진수빈에게 운전학원 등록하라고 했으니 시간 날 때 운전면허를 따.” 연정훈이 갑자기 말했다. “네.” 자신을 위한 말이라면 안시연은 언제나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다만 이런 말은 언제 해도 되는데 그가 갑자기 멈춰서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말을 다 하고서도 그는 가지 않았다. 안시연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말없이 그녀가 바라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눈빛에 장난기 어린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저녁에 봐요.” “저녁에 봐.” 남자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서로 포옹하면서 잠시 가까워졌고 그의 은은한 남성 향기가 안시연의 숨결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점점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차에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지켜보았다. 이 느낌은 정말 신기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가방을 들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전에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였다. 지하철역으로 가려는 찰나 뒤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안시연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지혁이 차에서 내려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 장면을 그는 똑똑히 본 것이다. 안시연의 부끄러운 모습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연정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이렇게 바뀐 것인가?! 안시연은 그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뒤돌아 걸어가려 했다. “시연 씨.” 주지혁이 그녀를 불렀다. “우리 지난번에 이미 다 얘기 끝냈잖아요.”
차 안에서 연정훈은 아침 뉴스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통화 모드로 전환했다. “여보세요?”김세연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네 엄마 전화를 늦게 받을 수도 있겠구나.”연정훈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바빴어요.”김세연이 말했다. “그래, 넌 정말 바쁜 사람이구나!”“그럼 바쁜 사람의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을 아시겠죠.” 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못된 아들이 태어났을까. 자신을 이 세운에 “유배”시켜 고생하게 하고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 애인의 집에 가서 조금 충고를 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면박을 주다니! “4일에 시간을 비워둬라.” 그녀는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 약속이 있어요.”“내가 시간을 비우라고 한 거지, 그날 약속이 있냐고 물어본 게 아니야.” 김세연도 물러서지 않았다. 연정훈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요?”“내가 아니라 네 아빠가! 그날 시간이 있어서 저녁에 우리 가족이랑 양지원 가족이 함께 식사하기로 했어.” 연정훈은 잠시 멈췄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약속이었고 거절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버지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4일은 안시연의 생일이었다. 그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김세연이 다시 말했다. “마침 조씨 가문 딸의 약혼식도 그날이야, 남산 저택에서 열려. 그때 너랑 양민아가 우리 두 가족을 대표해서 잠깐 얼굴을 비추고 우리는 저택 내 별관 식당에서 너희를 기다릴게.” 연정훈 침묵했다.그는 아침 일찍 안시연을 찾아온 주지혁을 떠올리며 순간 상황을 이해하고 차갑게 웃었다.“공교롭네요.”주지혁의 약혼식이 안시연의 생일날로 잡혀있었다. 김세연은 그의 어투에 담긴 불쾌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속이 상한 채로 전화를 끊었다. 앞쪽에 있는 진수빈은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쳐다봤다. 연정훈은 물었다. “생일 파티는 어디에 예약했지?”
연정훈은 한낮에 안시연을 위층으로 부른 적이 없었기에 안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올라가면서 혹시라도 들킬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비서가 그녀를 조용히 연정훈의 사무실로 안내했다.문을 열었을 때, 그는 책상 앞에 서서 한 손으로 책상에 기대어 아무렇지 않게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안시연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그의 곁으로 다가가 기웃거렸다.그녀가 고개를 내밀자 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에 기대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사무실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연정훈은 천천히 책상에 기대어 돌아섰다. “내가 널 부른 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 거야?”안시연은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고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엄밀히 말하면 점심시간은 근무 시간이 아니니까 사장님이 절 부르신 거라면 그건 초과 근무가 되는 거죠.”연정훈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네 초과 근무 수당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지?”안시연은 숫자를 손으로 가리켰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멈췄다가 손목에 있던 시계를 풀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 시계였다. 그는 그것을 들어 살짝 흔든 후 아무렇지 않게 안시연에게 던졌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가까스로 그것을 받았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그녀는 두 손으로 시계를 꼭 잡고 그를 바라보았다.연정훈은 말했다.“초과 근무 수당이다.”안시연은 시계를 한 번 살펴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핥고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이렇게 높은 초과 근무 수당이라면 제가 뭘 해야 하죠?”연정훈은 손을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검지와 중지를 붙여 깔끔하고 능숙하게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가 한 발 내디뎌 그의 앞에 다가섰다.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서두르지 않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비서가 문을 두드렸지만 들어오지는 않았고 그녀는 연정훈에게 30분 후에 출발해야 한다고 알렸다.“또 출장을 가나요?” 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나 다녀오세요?”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연정훈은 팔로 그녀를 조금 더 끌어안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네 생일날 돌아올 거야.”안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왠지 모르게 그녀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늘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오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연정훈은 다시 말했다. “그날 저녁에 조씨 가문의 연회에 가야하고 이후에 어른들과 식사를 해야 해. 넌 진서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일이 끝나면 바로 너에게 갈게.”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더 조용해졌다.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과 연정훈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그 청첩장이 얼마나 악의적인지를 더욱 실감했다.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연정훈은 단독으로 초대될 것이다.그들 둘의 이름이 같은 청첩장에 적혀 있다는 것은 연정훈의 집안을 모욕하는 것이었다.안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내며 주지혁의 계략에 빠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혼자 가나요?” 그녀는 시험 삼아 물었다.연정훈은 속을 들킨 듯 아무 말 없이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 “청첩장이 사무실에 있어. 확인해 볼래?”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안시연은 당연히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그럼 그날...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아마 많이 늦을 거야, 네가 심심하면 친구를 불러도 돼.”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기대었으며 얼굴을 그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렸다.“연정훈 씨.”이것은 그녀가 두 번째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연정훈은 잠시 멈췄다가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그날 밤, 아무리 늦어도 나는 당신을 기다릴게요.”“... 알았어.”“안 오면 안 돼요. 저는 자주 생일을 맞는 것도 아니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요.”
연정훈은 출장 중에도 매일 밤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항상 일정한 시간에 그녀가 잠들기 전 반시간쯤이었다. 이런 세심한 배려는 언제나 안시연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가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그를 더욱 그리워했다.생일날, 마침 토요일이라 그녀는 정이슬과 함께 쇼핑을 하기로 했다.“연애하는 사람은 다르긴 다르다, 온몸이 핑크빛으로 물든 것 같아.”안시연은 깜짝 놀랐다.연애?그녀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연정훈이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는 몇 벌이나 바꿔 입었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흰색 한 벌과 검은색 한 벌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정이슬이 다가와 말했다. “이봐, 너 혹시 연정훈을 정말 좋아하는 거 아니야?”안시연은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그 사람 취향을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정이슬은 하얀 드레스로 감싸진 그녀의 몸을 콕콕 찔렀다.안시연은 피하며 말했다. “아니야...”그녀는 부정하려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점점 더 깨달았다.정이슬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옷을 고르지 못한 이유는 연정훈의 취향을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함께 지내는 동안 연정훈이 그녀가 흰색이나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두 가지 색상은 매우 다르지만 그는 둘 다 좋아했다.“나한테 거짓말하네.” 정이슬은 그녀를 흘겨보며 은밀히 말했다. “이 섹시한 옷, 남자들 홀리기에 딱이야. 연정훈이 보면 널 그냥 두지 않을걸?”안시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그녀는 서둘러 정이슬의 입을 막으려 했다.그러나 정이슬은 상관하지 않고 안시연에게 빨리 돈을 내라고 재촉한 후 그녀를 속옷 가게로 끌고 갔다.“지난번에 네가 말한 참을성이 많은 스님이 바로 연정훈이지?”참을성이 많은 스님이라니.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정이슬이 어떻게 그런 말을 떠올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내 말 믿어. 두 벌 사서 순진하면서도 관능적인 매력을
안시연은 잠시 집에 들러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연정훈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 준 기사님을 그녀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지만 오늘 밤은 부르기로 했다.차를 타고 장미가 만발한 산길을 돌아 남산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둠이 내리고저녁 바람 속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고 모두 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안시연은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내고 안내에 따라 로비로 향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주효진을 마주쳤다.안시연이 나타나자 주효진은 그녀가 무언가를 망치러 온 줄 알고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안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따라 진서관으로 갔다. 걸어가는 동안 주효진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밤 우리 오빠가 약혼해요, 당신이 일을 벌이면 목숨 걸고 널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시연은 그저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그 번호를 차단했다.진서관은 독립된 작은 정원으로 내부는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안시연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테이블 위에 있는 촛불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테이블로 다가가 살짝 몸을 숙이자 꽃향기가 났다. 예정된 10시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그녀는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약혼식에 도착했어요?]그가 정말로 그 자리에 있다면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응, 도착했어.]곧바로 답장이 왔다.안시연은 마음이 설레었고 고개를 숙이고 나니 꽃향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7시였다.그래도 그가 온다면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답장을 보내고 차도 멈춰 섰다.양민아가 옆에 앉아 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바빠? 이 시간에까지 메시지를 보내고.”“사적인 메시지야.”양민아는 잠시 머뭇거렸다.“안시연 맞지?”연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차문을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려가자.”양민아는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 차에서 내렸지만 그녀는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자연스럽게 연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오늘 밤은 여자 파트너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는 한 여자가 그의 팔짱을 끼고 그와 함께 동시에 잔을 들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잘 어울려 보였다.안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서 비꼬는 듯한 독설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했다.[진서관에서 남자를 기다리면서 생일을 보내려고 하겠죠?][남자를 유혹해서 방을 잡긴 했는데 어떻게 방 안으로는 못 데려갔나요?][안시연, 당신 정말 비참하군요.]이 말투는 딱 봐도 주효진이었다. 안시연은 전후 상황을 생각해 보니 주효진이 그녀의 생일을 알고 있었고 안시연이 진서관에 온 것을 보았을 때 이곳이 연정훈이 예약한 자리임을 추측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혼식에서 연정훈과 양민아가 함께 나타난 것을 보자마자 그녀를 비웃으려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안시연은 마음이 순간 흔들렸지만 곧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다짐했다.방 안이 갑자기 답답해졌고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꽃향기도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다.웨이터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이 당장 올 것 같지 않아 보였기에 그녀는 정원을 나와 호숫가의 정자에 앉았다. 주효진은 참 한가한 사람이다. 번호를 차단했더니 다른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냈다.연속된 사진과 저주가 담긴 메시지가 이어졌다.[안시연, 내기할까요? 당신이 오늘 밤 기다리던 사람을 기다릴 수 있을지 말이예요.그들은 잠시 후에 또 다른 일정이 있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이고, 당신은 어떻해요?]한두 번은 괜찮았지만 한 무더기의 사진과 많은 메시지를 받으니 안시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녀가 다시 보낸 메시지에 연정훈의 답장이 오지 않자 더욱 그랬다.그녀는 난간에 기댔고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며 발밑이 차가워졌다. 호수 위에 비친 자신의 아름답게 꾸민 모습을 보니 더욱 외로워졌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이어 부모님 차례가 되자 양홍두는 자연스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지원이 가장자리에 앉았고 양석진은 그 옆의 소파에 앉아 있었으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거실의 다른 사람을 살폈다. 집사는 양씨 집안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그래서 낮은 소리로 양석진에게 말했다.“엄마 옆으로 가서 앉으세요. 그러면... 우리가 인사하기 편해요.”양지원이 빠르게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 연정훈이 표정 변화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양지원을 향해 눈짓하고 있었다.“옆에 앉아도 될까?”“...”‘그걸 왜 나한테 물어!’‘평소에 내가 엄청 깐깐하게 구는 줄 알고 오해하면 어떡해!’게다가 연정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기에 잠시 고민하던 양지원이 양석진에게 말했다.“그래요 오빠, 여기로 와서 앉아요. 같이 인사를 받는 건데 뭐 어때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도 꾹 다물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몰래 살피고 있었다. 양지원이 소용없는 짓을 하는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그때, 양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원의 옆자리에 앉았다.자리에 앉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빳빳이 펴고 긴장한 듯 두 손을 무릎 위로 모았다.양시연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이어 두 사람은 또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양지원은 양홍두와 달리 덕담 대신 잔소리를 늘여놨다.“시연이는 정훈이 네가 온갖 고생을 해서 겨우 얻은 아내니까 꼭 잘해줘야 해. 네가 우리 시연이 속상하게 하면 절대 체면 따위 봐주지 않고 되갚아 줄 거니까 명심해.”“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네 할머니 쪽도 네가 잘 처리해야 해.”“네 알겠습니다.”“네 엄마가 아이를 재촉하지는 않겠지?”“절대 그럴 일 없어요.”양지원은 한참 꼬치꼬치 캐물으며 사위 앞에서 주름을 잡았다.양석진은 그 옆에 앉아 양지원이 악독 장모님을 연기하는 걸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지원은 하던 말도 멈추고 양석진을 노려보았다.‘
양시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말했다.“일반적으로 누굴 괴롭히는 스타일이 아니에요.”“만약 날 괴롭힌다면?”“그럼 정훈 씨가 그럴 만한 일을 했나 보죠.”“...”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표정을 살폈다. 연정훈이 따로 말이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지원과 양석진의 관계는 비밀까지는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연정훈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에이 됐어.’‘이미 결혼까지 한 사이인데 연정훈 위치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잖아.’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맞은편의 연정훈이 양시연이 까준 달걀에서 노른자위만 빼고 다시 양시연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고개를 드니 연정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먹어.”“네.”양시연은 고개를 숙여 밥을 한 큰술 떠먹다가 흰자위를 입에 넣었다.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부부는 바로 양씨 저택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나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와 어젯밤 너무 힘들어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고 조금 늦게 오라고 했다.“정훈 씨 집에도 연락해요. 우리 점심시간에 맞춰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였다.9시 30분, 두 사람은 양씨 저택으로 떠났다.양씨 저택은 어제 걸어 놓은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입구에 도착하자 집사가 환히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집사부터 도우미까지 감히 아무도 연정훈을 양지원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고 공손히 거실로 모셨다.집안으로 들어서고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건넸다. 그러나 양석진과 양홍두만 보일 뿐 양지원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양석진이 양시연에게 말했다.“너희 엄마는 아직 메이크업이 끝나지 않았어, 금방 내려올 거야.”양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양석진이 연정훈을 힐끗 바라보다가 양시연에게 물었다.“어젯밤엔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보낸 밤인데 적응은 돼?”양시연은 잠시 고민했다.‘이 질문은 아마도 연정훈이 잘 챙겨주는지 물어보는 거 맞겠지?
따뜻한 햇살이 방안을 비추고 양시연이 두 눈을 뜨자 잘생긴 외모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마침 아침 8시가 되었다.이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켠 양시연은 늦장을 부리기 위해 연정훈을 툭툭 밀었다.“오늘 양가 부모님 뵈러 가야 하는데...”눈을 뜬 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봤다. 양시연은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꼭 붙어있었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다.연정훈은 고민도 하지 않고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양시연은 얼떨결에 그 품에 안기게 되었다.눈을 깜빡이던 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연정훈도 고개를 숙여 양시연과 시선을 마주했다.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연정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 눈에 뭐 있어.”‘눈에?’‘아침 댓바람부터 눈에 뭐가 있다고... 설마 눈곱?’양시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를 악문 양시연은 이미지 신경 쓸 겨를 없이 손을 뻗어 연정훈의 볼을 잡아당겼다.“나만 있고, 정훈 씨는 없는 줄 알아요?”“난 없어.”“고개 돌려봐요. 한 번 보게!”연정훈은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양시연의 손을 잡고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러자 양시연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얼굴을 제 앞으로 당겼다.연정훈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이어갔다. 한편으로 피하며 다른 한편으로 양시연의 두 손을 꼭 쥐었다.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자신 있으면 피하지나 말던가요!”“이젠 일어나서 씻어야 하니까 장난은 여기까지.”“쳇. 누구 마음대로. 빨리 고개 돌려봐요! 한 번만 보게!”“양! 시! 연!”아침 일찍 식사 준비를 하던 도우미가 그 소란에 참지 못하고 위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도우미와 몰래 눈짓을 주고받았다.‘신혼이 좋긴 좋네.’위층의 연정훈은 빠르게 일어나 화장실로 도망갔고 서둘러 세수했다.양시연은 치사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어
부승원은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쳤다.도우미가 부승원을 찾아와 물었다.“도련님, 소파 위의 때 묻은 가방을 가져올 가요?”‘때 묻은 가방?’부승원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꼭 끌어안고 있던 두 남녀가 떠올랐다.그래서 부승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버려요.”‘네?’도우미는 의아했지만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버릴 쓰레기였다면 왜 고이 갖고 온 거지? 완전 헛수고잖아.’도우미가 가방을 들고 버리려고 가는데 아직 그곳에 남아 있던 부승희와 마주쳤다.“아가씨.”부승희가 가방을 받아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만약 오빠가 가방에 관해 묻는다면 마당에 있는 큰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하세요.”도우미는 어리둥절했지만, 또 고개를 끄덕였다.부승원은 워커홀릭이었지만 그래도 12시가 되면 잠에 들었다. 그러나 오늘에는 업무가 많은 편인 건 지 12시가 넘어도 방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12시 30분경, 핸드폰이 울렸다.반우희가 걸어온 전화였는데 부승원은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한참 뒤, 반우희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수신 거부.그러다가 반우희는 조심스레 문자 한 통을 남겨 이유를 설명했다.벨 소리가 거의 끊어지려는데 부승원이 굳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변호사님?”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부승원이 인상을 찌푸렸다.‘울었어?’“무슨 일이야?”“제 가방... 혹시 변호사님한테 있는 건가요?”부승원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어.”그 말에 핸드폰 너머가 조용해졌다.“아...아...”반우희는 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작게 탄식을 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탄식 사이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알겠습니다...”반우희는 서둘러 통화를 종료하려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창피하게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그때 부승원이 혼을 내기 시작했다.“본인이 잃어버린 물건인데 운다고 뭐가 달라져?”“그게 아니라...”“근무일에 결혼식 한번 다녀와 실컷 먹고 놀고 했더니
부승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또 부승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라보는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담겼다.부승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집으로 운전해요.”기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우희 씨 가방은...”“성인이 되어서 제 물건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건 본인이 알아서 책임져야죠. 내일 서류 제출하지 못하면 숙제는 두 배로 늘어날 테지만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에요.”“...”‘부승원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이곳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도 부승원인데. 쯧, 기름 아깝게.”기사가 유턴하려고 하자 부승희는 그 틈을 타 반우희를 부르려 했다.부승원이 바로 손을 내밀어 부승희를 잡아당기는 동시에 차창을 올렸다.“...”부승희는 굳은 얼굴로 부승원을 바라봤다.“오빠 점점 이상하게 변하는 거 알지?”부승원은 못 들은 척 제 자리에 앉았고 얼굴을 굳힌 채로 말을 잇지 않았다.기사는 천천히 유턴했다.다른 한편, 아래층의 반우희와 장서진은 한참 서로를 끌어안다가 겨우 서로를 마주 보았다.“날 찾아온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데 그동안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장서진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너한테는 세 동생도 있고 나보다 더 힘들게 뻔한데 어떻게 내 짐까지 나누겠어.”“아무리 힘들어도 예서가 아픈 것보다 큰일인 건 없어.”반우희도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우린 어릴 때부터 같이 크면서 빵 한 조각도 나눠 먹었잖아. 그런 네가 힘들다는데 내가 모른 척할 리가 없잖아.”그 말에 장서진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눈물을 흘리는 장서진에 반우희도 눈물 꼭지가 틀어졌다.같은 보육원 출신인 두 사람은 남들보다 고달픈 삶을 살았다. 하지만 하느님은 항상 힘든 사람에게 더 많은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 장서진이 동생을 만나 같이 지낸 건 겨우 몇 년뿐인데 그 동생이 큰 병에 걸렸다고 한다. 보험 회사에서 절반 비용을 부담한다고 해도 남은 비용은 장서진에게 큰 부담이었다.
“승희 씨!”바깥까지 걸어온 부승희가 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드니 벤츠 좌수석에 앉아 손을 흔드는 반우희가 보였다.‘오호라...’반우희가 제 오빠 부승원의 차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쯧쯧.복잡한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부승희가 차량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뒤쪽 차 문을 여니 평소에 여자 보기를 돌 보듯 하는 부승원이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일부러 마른기침하며 차에 올랐다.부승원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는 오바 액션으로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우희 씨도 있었네요?”반우희가 고개를 돌려 헤헤 웃으며 말했다.“기사님이 두 분의 집이 제 집이랑 같은 방향이라며 태워준다고 했어요.”“그래요?”부승희는 제 집 기사를 보며 말했다.“정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기사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반우희는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고 품에 꼭 안고 있던 작은 배 하나를 건넸다.“승희 씨, 배가 엄청 달아요. 먹어보세요.”“좋아요.”부승희가 배를 건네받고 반우희와 대화를 이어갔다.부승원은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운전하세요.”그러자 부승희와 반우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김이 빠진 표정을 지었고 말없이 제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차는 한참 달려 먼저 반우희의 집 아래에 멈춰 섰다. 위층을 올려다보니 전등이 아직 켜져 있었다. 세 꼬마가 먼저 집으로 돌아가 따로 파티하는 중인 것 같았다.반우희는 안전벨트를 풀고 기사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러나 기사는 몰래 손가락으로 뒷자리를 가리켰고 고개를 끄덕인 반우희가 부승원에게 말했다.“변호사님, 오늘 챙겨주셔서 감사해요.”부승원은 눈을 작게 뜨고 몰래 살폈다.“그래.”“그럼, 이만 돌아가 볼 게요.”반우희는 손을 저어 인사를 건넸고 또 부승희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부승희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그럼 또 봐요.”“네. 다음에 또 만나요.”반우희는 몸을 돌려 몇 걸음 걸다가 뭔가 떠오른 건지 빠르게 다시 차가
“에어컨 틀어놨어요. 빨리 씻고 일찍 자요.”부승희의 말에 모연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왜 갑자기 이렇게 챙겨주는 거예요? 나한테 보상하려는 건가?”부승희는 모연준을 슬쩍 노려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다음엔 인사불성이 되어 경찰서에 잡혀가라고 저주 중인걸요.”모연준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핸드폰 잠금 화면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하고 살짝 표정을 구겼다.그러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부승희에게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고 형님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승희 씨도 빨리 돌아가서 쉬어요. 이젠 나 혼자 알아서 할게요.”“그래요.”부승희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샤워할 때 조심해요.”“알겠어요.”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어 인사를 건네고 방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고 모연준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부승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모연준이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 오면 왠지 조심스러워졌다.오늘 모연준이 한 발 뒤로 물러서 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생각해 보면 모연준은 여러모로 참 좋은 사람이었다. 부승희도 모연준이 참 좋았다.그러니 만족할 법도 한데 자꾸 왠지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뜨거운 사랑?부승희는 양시연에게 가장 부질없다고 말한 게 바로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러나 마침 두 사람 사이에 부족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모연준의 옆에 있으면 부승희는 숙녀가 되어갔다.부승희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승원을 찾으려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에는 모두 대표님 덕분에 무사히 고비를 넘겼는걸요. 안 그러면 골치 아파질 뻔했어요.”“네네. 다음번에 경인시에 오시면 제가 직접 대표님을 모시겠습니다.”부승희는 그 자리에 멈춰서 그곳을 살폈다.이승우였다.아직도 연회장 예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얼굴이 창백한 것이 과음한 것 같았다. 이승우는 술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기다려.나도 네가 날 사랑하게 될 때까지 기다릴게.연정훈의 말 속에 담긴 의미는 이러했고 양시연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좋아요. 어디 한 번 기다려 볼게요.”그리고 연정훈의 뺨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이젠 내려줘요.”명령에 가까운 어투였다.연정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내려주기는커녕 안은 채로 계속 걸어 침대에 양시연을 내려주었다.양시연이 고개를 돌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연정훈이 보였다. 연정훈은 천천히 제 와인색의 파자마 단추를 풀고 있었다.양시연이 침을 꿀꺽 넘기며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없이 단추를 풀고 상의를 벗어 던졌다.‘뭐, 뭐 하자는 거야!’양시연은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고 연정훈은 살짝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이젠 자야지.”“네?”“넌 저기 붙어서 자. 이 선을 넘으면 반칙이니까 넘어오는 즉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쳇.양시연은 입을 삐죽거렸으나 곧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그리고 빠르게 두 다리를 모으고 미적미적 제 이불 안으로 기어갔다.옆자리의 연정훈도 이불 아래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두 사람이 잠자리에 눕고 전등이 꺼졌다.고른 호흡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양시연이 고개를 돌려 농담을 건넸다.“굿나잇.”“빨리 자. 한 번만 더 입 열면 날 꼬시는 거로 알 거야.”“...”‘흥. 하지 말라고? 그럼 더 하고 싶은걸?’양시연이 이불 끝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굿나잇!”“...”어둠 속 연정훈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그러나 또 겨우겨우 자신의 충동을 참아냈다.‘멍청이.’연정훈은 일찍 자리를 비웠지만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즐겼다. 다행히 호텔 방을 미리 잡아둔 터라 대부분 사람은 호텔에서 묵었다.처음 경인시를 찾은 모연준은 인맥을 쌓기 위해 조금 과음을 했다.부승희가 모연준을 찾고 볼멘소리를 했다.“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예요?”모연준은 부승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자연스레 방의 전등을 켰다.“사업하는
양시연이 마른기침을 했다.그러자 나비에게 간식을 먹이던 연정훈의 손이 뚝 멈춰 섰다. 그러나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또 이어 간식을 먹였다.‘쳇.’양시연이 입을 삐죽이고 계단 손잡이에 몸을 기댔다.“큼큼. 셋 셀 동안 계속 모르는 척하면 오늘 밤엔 그냥 소파에서 자요.”“...”‘양시연 정말...’‘내가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지?’연정훈이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바라봤다.양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미소를 지었다.“셋, 둘...”연정훈이 몸을 일으켰다.“...”‘흥.’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기양양해진 양시연은 턱을 살짝 쳐들고 말했다.“이젠 빨리 자요. 술도 많이 마신 사람이 왜 애꿎은 알파카를 잡고 그래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놀릴 거예요.”연정훈은 빠르게 계단으로 올라가 양시연의 앞에 섰다.그렇게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양시연은 눈만 깜빡였다.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오자 양시연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고 연정훈이 멈추지 않자 계속 뒷걸음질을 했다.한참 뒷걸음치던 양시연은 마음이 급해 양손으로 연정훈을 막아섰다.“뭐 하는 거예요?”연정훈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낮은 소리로 말했다.“결혼 첫날 밤을 같이 보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꾹 참고 있는데 내가 알파카랑 대화하는 걸 창피해할 것 같아?”“...”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그리고 연정훈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그래서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해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렇게 큰 노력을 들여 겨우 한 결혼인데 소감이 어때요?”양시연이 인터뷰하듯 물었다.“...”그러자 연정훈이 몰래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꾹 참고 있는 게 보여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미안한 것도 잠시,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또 기쁜 마음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과거의 연정훈은 나이가 많고 가진 게 많다는 걸 빌미로 양시연을 압도했었다. 그러니 이제 과거에 저지른 자기 잘못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 같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