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가 문을 두드렸지만 들어오지는 않았고 그녀는 연정훈에게 30분 후에 출발해야 한다고 알렸다.“또 출장을 가나요?” 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나 다녀오세요?”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연정훈은 팔로 그녀를 조금 더 끌어안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네 생일날 돌아올 거야.”안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왠지 모르게 그녀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늘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오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연정훈은 다시 말했다. “그날 저녁에 조씨 가문의 연회에 가야하고 이후에 어른들과 식사를 해야 해. 넌 진서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일이 끝나면 바로 너에게 갈게.”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더 조용해졌다.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과 연정훈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그 청첩장이 얼마나 악의적인지를 더욱 실감했다.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연정훈은 단독으로 초대될 것이다.그들 둘의 이름이 같은 청첩장에 적혀 있다는 것은 연정훈의 집안을 모욕하는 것이었다.안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내며 주지혁의 계략에 빠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혼자 가나요?” 그녀는 시험 삼아 물었다.연정훈은 속을 들킨 듯 아무 말 없이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 “청첩장이 사무실에 있어. 확인해 볼래?”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안시연은 당연히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그럼 그날...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아마 많이 늦을 거야, 네가 심심하면 친구를 불러도 돼.”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기대었으며 얼굴을 그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렸다.“연정훈 씨.”이것은 그녀가 두 번째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연정훈은 잠시 멈췄다가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그날 밤, 아무리 늦어도 나는 당신을 기다릴게요.”“... 알았어.”“안 오면 안 돼요. 저는 자주 생일을 맞는 것도 아니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요.”
연정훈은 출장 중에도 매일 밤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항상 일정한 시간에 그녀가 잠들기 전 반시간쯤이었다. 이런 세심한 배려는 언제나 안시연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가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그를 더욱 그리워했다.생일날, 마침 토요일이라 그녀는 정이슬과 함께 쇼핑을 하기로 했다.“연애하는 사람은 다르긴 다르다, 온몸이 핑크빛으로 물든 것 같아.”안시연은 깜짝 놀랐다.연애?그녀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연정훈이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는 몇 벌이나 바꿔 입었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흰색 한 벌과 검은색 한 벌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정이슬이 다가와 말했다. “이봐, 너 혹시 연정훈을 정말 좋아하는 거 아니야?”안시연은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그 사람 취향을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정이슬은 하얀 드레스로 감싸진 그녀의 몸을 콕콕 찔렀다.안시연은 피하며 말했다. “아니야...”그녀는 부정하려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점점 더 깨달았다.정이슬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옷을 고르지 못한 이유는 연정훈의 취향을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함께 지내는 동안 연정훈이 그녀가 흰색이나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두 가지 색상은 매우 다르지만 그는 둘 다 좋아했다.“나한테 거짓말하네.” 정이슬은 그녀를 흘겨보며 은밀히 말했다. “이 섹시한 옷, 남자들 홀리기에 딱이야. 연정훈이 보면 널 그냥 두지 않을걸?”안시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그녀는 서둘러 정이슬의 입을 막으려 했다.그러나 정이슬은 상관하지 않고 안시연에게 빨리 돈을 내라고 재촉한 후 그녀를 속옷 가게로 끌고 갔다.“지난번에 네가 말한 참을성이 많은 스님이 바로 연정훈이지?”참을성이 많은 스님이라니.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정이슬이 어떻게 그런 말을 떠올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내 말 믿어. 두 벌 사서 순진하면서도 관능적인 매력을
안시연은 잠시 집에 들러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연정훈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 준 기사님을 그녀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지만 오늘 밤은 부르기로 했다.차를 타고 장미가 만발한 산길을 돌아 남산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둠이 내리고저녁 바람 속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고 모두 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안시연은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내고 안내에 따라 로비로 향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주효진을 마주쳤다.안시연이 나타나자 주효진은 그녀가 무언가를 망치러 온 줄 알고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안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따라 진서관으로 갔다. 걸어가는 동안 주효진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밤 우리 오빠가 약혼해요, 당신이 일을 벌이면 목숨 걸고 널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시연은 그저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그 번호를 차단했다.진서관은 독립된 작은 정원으로 내부는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안시연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테이블 위에 있는 촛불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테이블로 다가가 살짝 몸을 숙이자 꽃향기가 났다. 예정된 10시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그녀는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약혼식에 도착했어요?]그가 정말로 그 자리에 있다면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응, 도착했어.]곧바로 답장이 왔다.안시연은 마음이 설레었고 고개를 숙이고 나니 꽃향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7시였다.그래도 그가 온다면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답장을 보내고 차도 멈춰 섰다.양민아가 옆에 앉아 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바빠? 이 시간에까지 메시지를 보내고.”“사적인 메시지야.”양민아는 잠시 머뭇거렸다.“안시연 맞지?”연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차문을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려가자.”양민아는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 차에서 내렸지만 그녀는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자연스럽게 연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오늘 밤은 여자 파트너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는 한 여자가 그의 팔짱을 끼고 그와 함께 동시에 잔을 들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잘 어울려 보였다.안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서 비꼬는 듯한 독설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했다.[진서관에서 남자를 기다리면서 생일을 보내려고 하겠죠?][남자를 유혹해서 방을 잡긴 했는데 어떻게 방 안으로는 못 데려갔나요?][안시연, 당신 정말 비참하군요.]이 말투는 딱 봐도 주효진이었다. 안시연은 전후 상황을 생각해 보니 주효진이 그녀의 생일을 알고 있었고 안시연이 진서관에 온 것을 보았을 때 이곳이 연정훈이 예약한 자리임을 추측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혼식에서 연정훈과 양민아가 함께 나타난 것을 보자마자 그녀를 비웃으려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안시연은 마음이 순간 흔들렸지만 곧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다짐했다.방 안이 갑자기 답답해졌고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꽃향기도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다.웨이터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이 당장 올 것 같지 않아 보였기에 그녀는 정원을 나와 호숫가의 정자에 앉았다. 주효진은 참 한가한 사람이다. 번호를 차단했더니 다른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냈다.연속된 사진과 저주가 담긴 메시지가 이어졌다.[안시연, 내기할까요? 당신이 오늘 밤 기다리던 사람을 기다릴 수 있을지 말이예요.그들은 잠시 후에 또 다른 일정이 있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이고, 당신은 어떻해요?]한두 번은 괜찮았지만 한 무더기의 사진과 많은 메시지를 받으니 안시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녀가 다시 보낸 메시지에 연정훈의 답장이 오지 않자 더욱 그랬다.그녀는 난간에 기댔고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며 발밑이 차가워졌다. 호수 위에 비친 자신의 아름답게 꾸민 모습을 보니 더욱 외로워졌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배고프면 혼자 뭐라도 좀 먹어. 바보같이 기다리지만 말고.”룸에서 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휴대 전화를 탁자 위에 엎어 놓았다.그의 부모님은 모두 옆에서 양지원과 이야기하고 있었다.갑자기 룸 문이 열렸다.연정훈은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는 것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직계 형제 중에서 양수혁 말고는 이렇게 행동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담담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맞은편에서 고의로 의자를 큰 소리 나게 당겨도 연정훈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양지원이 아들을 꾸지람했다.“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예의 없게.”“가족인데 뭘 그렇게 신경 써요?”느긋느긋한 어조로 보아도 양지원은 분명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사랑을 쉽게 얻기도 했다.김세연이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맞아요. 한 집안의 사람들인데 늦게 오면 어때요.”“어머니, 너무 관대하게 대하시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더 예의 없게 놀지도 몰라요.”양민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왜? 질투 나?”양혁수가 한마디 쏘아붙였다.양민아는 동생을 흘겨보았다.오누이 사이의 보편적인 싸움으로 보인다.양지원은 아들에게 왜 늦게 왔냐고 물었다.“길에서 미모의 여자를 만났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양혁수는 젓가락 들어 요리를 한 입 집어 먹었다.“헛소리 좀 그만해!”양혁수는 도발하는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그 미녀분이 1번 룸 근처에서 저의 품으로 정면으로 안겨 왔는걸요.”맞은편의 연정훈이 고개를 돌려 양혁수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마침내 시선이 마주쳤다.양혁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몸을 돌려 양지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눈매가 우리 양 여사를 똑 닮았거든요.”“헛소리하지 말라니깐.”양지원은 겉으로는 화내는 척했지만 얼굴에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김세연은 부러워하며 말했다.“얼마나 좋아요. 우리 아들이랑 달리 말도 예쁘게 하고요. 우리 아들은
10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정원에서 울려 퍼졌다. 안시연은 소파에 기대앉아 단편소설 한 권을 이미 다 읽었다.그녀는 책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맞은편에 남아 있는 촛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웨이터가 다가와 물었다.“제가 음식을 가져가고 다시 새로 올릴까요?”안시연은 연정훈이 약속을 어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케이크 포장을 뜯어드릴까요?”안시연은 바로 거절했다.“케이크는 뜯지 마세요.”“알겠습니다.”웨이터는 요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연정훈에게 보낸 메시지는 답장이 없고 시곗바늘만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다시 오른 요리들은 또다시 식었고 시간은 이미 11시 반이 다 되어갔다.조씨 가문의 약혼 잔치가 끝나갈 때쯤 수많은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안시연은 정원에 덩그러니 서 있었고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지금도 안시연은 여전히 기대를 품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안시연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손끝의 반짝이는 빛을 보면서 안시연의 마음속 마지막 방어선도 무너지고 말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좋아했다.억제할 수 없이 좋아하고 있었다.하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하루도 그녀의 남자인 적 없었다.교대할 시간이 다가온 웨이터는 안시연이 홀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동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시연 씨, 날씨도 추우니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연 대표님께서 오시면 제가 알려드릴게요.”안시연은 고맙다는 눈빛으로 웨이터를 보았다.“그럴 필요 없어요.”이미 바보로 되었는데 더 이상 바보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안시연은 15분만 더 기다려 보려고 했다. 11시 50분까지 기다려도 연정훈이 오지 않으면 그녀는 스스로 케이크를 자르고 스스로 축하하겠다고 다짐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가고 있었다.안시연은 눈을 감더니 다시 정원으로 돌아와 바로 케이크 포장을 뜯었다.케이크에 양초들을 한 올 한 올 꽂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밖
자정 정각, 남산 저택의 하늘은 휘황찬란한 불꽃들로 채워졌다.하늘을 우러러보는 어떤 사람들은 기뻐했고 어떤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었다.주지혁은 하늘의 글씨를 보더니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조이현은 주지혁의 뒤에 서서 눈치채지 못했는지 궁시렁거렸다.“오늘 밤 우리가 이곳을 모두 전세 낸 거 아닌가? 왜 다른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할 수 있지?”주효진은 어떻게 된 건지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고 비위를 맞추며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저택에 많은 단골손님이 살고 있기에 모두 밖으로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극장 입구에서 양민아가 차 안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양혁수는 차에 기대어 말했다.“정훈 씨가 평소 냉랭해 보이지만 그래도 여자 달래는 데는 제법 수단이 훌륭하네요.”양민아는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양혁수는 일부러 허리를 굽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널 달래지 않아서 참 아쉬워. 그치?”양민아는 양혁수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우리 이젠 성인이거든.”양혁수는 눈썹을 치켜들었다.“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그렇게 잘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내 생각엔 오늘 정훈이가 적절하게 행동했다고 봐. 너야말로 오늘 너무 늦게 오고.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 안 해?”양혁수는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는 비아냥거렸다.“내가 알려 줘? 그 여자는 여신처럼 생겼더라고. 남자라면 누구나 다 참을 수 없을걸.”양민아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미녀는 어디에나 다 존재하거든.”양혁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저 여성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 같아.”양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안시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양민아는 잘 알고 있었다.다만 동생까지 이 정도로 칭찬하니 양민아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양혁수는 눈치도 없는지 상처 난 곳만 찾아 푹푹 찔렀다.“우리와 함께 룸에 앉아있는 내내 그분은 시간을 여러 번이나 보고 있었어.”양혁수는 누나를 비웃었다.“누나가 정훈 씨 곁에 앉아있는데도 자꾸만 시계만 쳐다보잖아.”
좋아하고 편애하고 편을 드는 표현이었다.연정훈이 늦은 모습을 본 안시연은 그가 밖에서 먹고 왔을 거로 추측했다.사랑하는 남자의 몇 마디만으로도 그녀는 곧 화가 풀렸다.연정훈은 손수 양초에 불을 붙였고 그 촛불은 곧 눈부시게 빛을 냈다. 안시연은 숨을 들이마셨고 저녁 내내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불빛에 의해 녹아내렸다.“소원을 빌어봐.”연정훈이 말했다.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고 경건하게 눈을 감았다.외할머니께서 건강하시기를 바랐다.그리고 매일매일 맞은 편의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안시연은 마음속으로 묵상하고 난 뒤 눈을 떴고 이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이미 자신의 뒤로 다가간 것을 발견했다.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뒤이어 그녀의 눈앞에는 빨갛고 고풍스러운 나무 상자가 나타났다.“생일 축하해.”연정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들려왔다.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면서 안시연은 입을 오므리며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이건 뭐에요?”“열어봐.”안시연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았다.머리핀이었다.부드러운 옥으로 만들어진 머리핀은 물결처럼 맑고 아름다웠다.안시연은 옥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옥이 매우 귀중한 물건인 것만은 알고 있었다.안시연은 머리핀을 들어 자세히 보았고 그 물건에‘시’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진심으로 그 선물을 좋아하고 있었던 안시연은 그 머리핀을 손에 들고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그녀의 붉어진 눈동자에서는 눈앞의 남자에 대한 깊은 사랑을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었다.연정훈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마음에 들어?”안시연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밤, 일이 너무 많았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그는 손을 뻗어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올리려고 했다.연정훈이 자신의 머리를 묶으려 하는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