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한낮에 안시연을 위층으로 부른 적이 없었기에 안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올라가면서 혹시라도 들킬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비서가 그녀를 조용히 연정훈의 사무실로 안내했다.문을 열었을 때, 그는 책상 앞에 서서 한 손으로 책상에 기대어 아무렇지 않게 펜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안시연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그의 곁으로 다가가 기웃거렸다.그녀가 고개를 내밀자 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에 기대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사무실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슨 일로 부르셨어요?”연정훈은 천천히 책상에 기대어 돌아섰다. “내가 널 부른 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 거야?”안시연은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고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엄밀히 말하면 점심시간은 근무 시간이 아니니까 사장님이 절 부르신 거라면 그건 초과 근무가 되는 거죠.”연정훈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네 초과 근무 수당은 어떻게 계산해야 하지?”안시연은 숫자를 손으로 가리켰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멈췄다가 손목에 있던 시계를 풀었다. 수백만 원짜리 명품 시계였다. 그는 그것을 들어 살짝 흔든 후 아무렇지 않게 안시연에게 던졌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가까스로 그것을 받았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그녀는 두 손으로 시계를 꼭 잡고 그를 바라보았다.연정훈은 말했다.“초과 근무 수당이다.”안시연은 시계를 한 번 살펴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핥고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이렇게 높은 초과 근무 수당이라면 제가 뭘 해야 하죠?”연정훈은 손을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검지와 중지를 붙여 깔끔하고 능숙하게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가 한 발 내디뎌 그의 앞에 다가섰다.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서두르지 않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비서가 문을 두드렸지만 들어오지는 않았고 그녀는 연정훈에게 30분 후에 출발해야 한다고 알렸다.“또 출장을 가나요?” 안시연이 물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나 다녀오세요?”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연정훈은 팔로 그녀를 조금 더 끌어안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네 생일날 돌아올 거야.”안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왠지 모르게 그녀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늘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오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연정훈은 다시 말했다. “그날 저녁에 조씨 가문의 연회에 가야하고 이후에 어른들과 식사를 해야 해. 넌 진서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일이 끝나면 바로 너에게 갈게.”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더 조용해졌다.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과 연정훈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그 청첩장이 얼마나 악의적인지를 더욱 실감했다.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연정훈은 단독으로 초대될 것이다.그들 둘의 이름이 같은 청첩장에 적혀 있다는 것은 연정훈의 집안을 모욕하는 것이었다.안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내며 주지혁의 계략에 빠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혼자 가나요?” 그녀는 시험 삼아 물었다.연정훈은 속을 들킨 듯 아무 말 없이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 “청첩장이 사무실에 있어. 확인해 볼래?”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안시연은 당연히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그럼 그날...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아마 많이 늦을 거야, 네가 심심하면 친구를 불러도 돼.”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기대었으며 얼굴을 그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렸다.“연정훈 씨.”이것은 그녀가 두 번째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연정훈은 잠시 멈췄다가 그녀의 부름에 응답했다.“그날 밤, 아무리 늦어도 나는 당신을 기다릴게요.”“... 알았어.”“안 오면 안 돼요. 저는 자주 생일을 맞는 것도 아니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요.”
연정훈은 출장 중에도 매일 밤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항상 일정한 시간에 그녀가 잠들기 전 반시간쯤이었다. 이런 세심한 배려는 언제나 안시연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가 떠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그를 더욱 그리워했다.생일날, 마침 토요일이라 그녀는 정이슬과 함께 쇼핑을 하기로 했다.“연애하는 사람은 다르긴 다르다, 온몸이 핑크빛으로 물든 것 같아.”안시연은 깜짝 놀랐다.연애?그녀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연정훈이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는 몇 벌이나 바꿔 입었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흰색 한 벌과 검은색 한 벌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정이슬이 다가와 말했다. “이봐, 너 혹시 연정훈을 정말 좋아하는 거 아니야?”안시연은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그 사람 취향을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정이슬은 하얀 드레스로 감싸진 그녀의 몸을 콕콕 찔렀다.안시연은 피하며 말했다. “아니야...”그녀는 부정하려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점점 더 깨달았다.정이슬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옷을 고르지 못한 이유는 연정훈의 취향을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함께 지내는 동안 연정훈이 그녀가 흰색이나 검은색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두 가지 색상은 매우 다르지만 그는 둘 다 좋아했다.“나한테 거짓말하네.” 정이슬은 그녀를 흘겨보며 은밀히 말했다. “이 섹시한 옷, 남자들 홀리기에 딱이야. 연정훈이 보면 널 그냥 두지 않을걸?”안시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그녀는 서둘러 정이슬의 입을 막으려 했다.그러나 정이슬은 상관하지 않고 안시연에게 빨리 돈을 내라고 재촉한 후 그녀를 속옷 가게로 끌고 갔다.“지난번에 네가 말한 참을성이 많은 스님이 바로 연정훈이지?”참을성이 많은 스님이라니.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정이슬이 어떻게 그런 말을 떠올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내 말 믿어. 두 벌 사서 순진하면서도 관능적인 매력을
안시연은 잠시 집에 들러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연정훈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 준 기사님을 그녀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지만 오늘 밤은 부르기로 했다.차를 타고 장미가 만발한 산길을 돌아 남산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둠이 내리고저녁 바람 속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주변은 사람들로 붐볐고 모두 조씨 가문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안시연은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내고 안내에 따라 로비로 향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주효진을 마주쳤다.안시연이 나타나자 주효진은 그녀가 무언가를 망치러 온 줄 알고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안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따라 진서관으로 갔다. 걸어가는 동안 주효진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밤 우리 오빠가 약혼해요, 당신이 일을 벌이면 목숨 걸고 널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시연은 그저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그 번호를 차단했다.진서관은 독립된 작은 정원으로 내부는 우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안시연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테이블 위에 있는 촛불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테이블로 다가가 살짝 몸을 숙이자 꽃향기가 났다. 예정된 10시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그녀는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약혼식에 도착했어요?]그가 정말로 그 자리에 있다면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응, 도착했어.]곧바로 답장이 왔다.안시연은 마음이 설레었고 고개를 숙이고 나니 꽃향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7시였다.그래도 그가 온다면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답장을 보내고 차도 멈춰 섰다.양민아가 옆에 앉아 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바빠? 이 시간에까지 메시지를 보내고.”“사적인 메시지야.”양민아는 잠시 머뭇거렸다.“안시연 맞지?”연정훈은 대답하지 않고 차문을 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려가자.”양민아는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그와 함께 차에서 내렸지만 그녀는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자연스럽게 연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오늘 밤은 여자 파트너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는 한 여자가 그의 팔짱을 끼고 그와 함께 동시에 잔을 들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잘 어울려 보였다.안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서 비꼬는 듯한 독설이 담긴 메시지가 도착했다.[진서관에서 남자를 기다리면서 생일을 보내려고 하겠죠?][남자를 유혹해서 방을 잡긴 했는데 어떻게 방 안으로는 못 데려갔나요?][안시연, 당신 정말 비참하군요.]이 말투는 딱 봐도 주효진이었다. 안시연은 전후 상황을 생각해 보니 주효진이 그녀의 생일을 알고 있었고 안시연이 진서관에 온 것을 보았을 때 이곳이 연정훈이 예약한 자리임을 추측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혼식에서 연정훈과 양민아가 함께 나타난 것을 보자마자 그녀를 비웃으려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안시연은 마음이 순간 흔들렸지만 곧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다짐했다.방 안이 갑자기 답답해졌고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꽃향기도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다.웨이터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이 당장 올 것 같지 않아 보였기에 그녀는 정원을 나와 호숫가의 정자에 앉았다. 주효진은 참 한가한 사람이다. 번호를 차단했더니 다른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냈다.연속된 사진과 저주가 담긴 메시지가 이어졌다.[안시연, 내기할까요? 당신이 오늘 밤 기다리던 사람을 기다릴 수 있을지 말이예요.그들은 잠시 후에 또 다른 일정이 있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이고, 당신은 어떻해요?]한두 번은 괜찮았지만 한 무더기의 사진과 많은 메시지를 받으니 안시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녀가 다시 보낸 메시지에 연정훈의 답장이 오지 않자 더욱 그랬다.그녀는 난간에 기댔고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며 발밑이 차가워졌다. 호수 위에 비친 자신의 아름답게 꾸민 모습을 보니 더욱 외로워졌다.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배고프면 혼자 뭐라도 좀 먹어. 바보같이 기다리지만 말고.”룸에서 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휴대 전화를 탁자 위에 엎어 놓았다.그의 부모님은 모두 옆에서 양지원과 이야기하고 있었다.갑자기 룸 문이 열렸다.연정훈은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는 것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직계 형제 중에서 양수혁 말고는 이렇게 행동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담담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맞은편에서 고의로 의자를 큰 소리 나게 당겨도 연정훈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양지원이 아들을 꾸지람했다.“왜 이렇게 늦게 왔어. 예의 없게.”“가족인데 뭘 그렇게 신경 써요?”느긋느긋한 어조로 보아도 양지원은 분명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사랑을 쉽게 얻기도 했다.김세연이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맞아요. 한 집안의 사람들인데 늦게 오면 어때요.”“어머니, 너무 관대하게 대하시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더 예의 없게 놀지도 몰라요.”양민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왜? 질투 나?”양혁수가 한마디 쏘아붙였다.양민아는 동생을 흘겨보았다.오누이 사이의 보편적인 싸움으로 보인다.양지원은 아들에게 왜 늦게 왔냐고 물었다.“길에서 미모의 여자를 만났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양혁수는 젓가락 들어 요리를 한 입 집어 먹었다.“헛소리 좀 그만해!”양혁수는 도발하는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그 미녀분이 1번 룸 근처에서 저의 품으로 정면으로 안겨 왔는걸요.”맞은편의 연정훈이 고개를 돌려 양혁수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마침내 시선이 마주쳤다.양혁수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몸을 돌려 양지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눈매가 우리 양 여사를 똑 닮았거든요.”“헛소리하지 말라니깐.”양지원은 겉으로는 화내는 척했지만 얼굴에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김세연은 부러워하며 말했다.“얼마나 좋아요. 우리 아들이랑 달리 말도 예쁘게 하고요. 우리 아들은
10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정원에서 울려 퍼졌다. 안시연은 소파에 기대앉아 단편소설 한 권을 이미 다 읽었다.그녀는 책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맞은편에 남아 있는 촛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웨이터가 다가와 물었다.“제가 음식을 가져가고 다시 새로 올릴까요?”안시연은 연정훈이 약속을 어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케이크 포장을 뜯어드릴까요?”안시연은 바로 거절했다.“케이크는 뜯지 마세요.”“알겠습니다.”웨이터는 요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연정훈에게 보낸 메시지는 답장이 없고 시곗바늘만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다시 오른 요리들은 또다시 식었고 시간은 이미 11시 반이 다 되어갔다.조씨 가문의 약혼 잔치가 끝나갈 때쯤 수많은 풍선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안시연은 정원에 덩그러니 서 있었고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지금도 안시연은 여전히 기대를 품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진 안시연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손끝의 반짝이는 빛을 보면서 안시연의 마음속 마지막 방어선도 무너지고 말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좋아했다.억제할 수 없이 좋아하고 있었다.하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하루도 그녀의 남자인 적 없었다.교대할 시간이 다가온 웨이터는 안시연이 홀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동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시연 씨, 날씨도 추우니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연 대표님께서 오시면 제가 알려드릴게요.”안시연은 고맙다는 눈빛으로 웨이터를 보았다.“그럴 필요 없어요.”이미 바보로 되었는데 더 이상 바보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안시연은 15분만 더 기다려 보려고 했다. 11시 50분까지 기다려도 연정훈이 오지 않으면 그녀는 스스로 케이크를 자르고 스스로 축하하겠다고 다짐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가고 있었다.안시연은 눈을 감더니 다시 정원으로 돌아와 바로 케이크 포장을 뜯었다.케이크에 양초들을 한 올 한 올 꽂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밖
자정 정각, 남산 저택의 하늘은 휘황찬란한 불꽃들로 채워졌다.하늘을 우러러보는 어떤 사람들은 기뻐했고 어떤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었다.주지혁은 하늘의 글씨를 보더니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조이현은 주지혁의 뒤에 서서 눈치채지 못했는지 궁시렁거렸다.“오늘 밤 우리가 이곳을 모두 전세 낸 거 아닌가? 왜 다른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할 수 있지?”주효진은 어떻게 된 건지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체했고 비위를 맞추며 그녀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저택에 많은 단골손님이 살고 있기에 모두 밖으로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극장 입구에서 양민아가 차 안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양혁수는 차에 기대어 말했다.“정훈 씨가 평소 냉랭해 보이지만 그래도 여자 달래는 데는 제법 수단이 훌륭하네요.”양민아는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양혁수는 일부러 허리를 굽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널 달래지 않아서 참 아쉬워. 그치?”양민아는 양혁수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우리 이젠 성인이거든.”양혁수는 눈썹을 치켜들었다.“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그렇게 잘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내 생각엔 오늘 정훈이가 적절하게 행동했다고 봐. 너야말로 오늘 너무 늦게 오고. 너무 무례하다는 생각 안 해?”양혁수는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는 비아냥거렸다.“내가 알려 줘? 그 여자는 여신처럼 생겼더라고. 남자라면 누구나 다 참을 수 없을걸.”양민아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미녀는 어디에나 다 존재하거든.”양혁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저 여성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 같아.”양민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안시연이 어떻게 생겼는지 양민아는 잘 알고 있었다.다만 동생까지 이 정도로 칭찬하니 양민아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양혁수는 눈치도 없는지 상처 난 곳만 찾아 푹푹 찔렀다.“우리와 함께 룸에 앉아있는 내내 그분은 시간을 여러 번이나 보고 있었어.”양혁수는 누나를 비웃었다.“누나가 정훈 씨 곁에 앉아있는데도 자꾸만 시계만 쳐다보잖아.”
“멀쩡히 밥을 먹다가 굳이 이렇게 태클을 걸어 가족 모두가 기분이 망쳐야 하겠어?”연호민이 언짢은 듯 말했다.“시연이도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연정훈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시연이가 괜찮다고 말한 건 예의를 차려 한 말이에요. 그걸 악용해 괴롭히라는 의미가 아니라고요.”“누가 악용을 하고 괴롭혔다고 그래?”민수희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집에 식재료도 없는 요리 하나로 이렇게 상을 뒤엎어야겠어? 너희들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한 음식인데 네가 직접 봐봐. 어느 요리가 평범하고 무난한 요리이지?”“자세히 보면 시연이가 좋아하는 요리는 하나도 없는걸요.”민수희는 말문이 막혔다.연정훈이 냉소를 터뜨렸다.“결혼한지 이튿날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요. 양씨 가문 사람들은 차를 끓여도 내 입맛이 뭔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시연이가 좋아하는 음식은커녕 모든 가족이 할머니 입맛대로 건강식을 먹어야겠어요?”그 말에 민수희가 화를 내기도 전에 연재혁과 표세연이 고개를 갸웃했다.‘정말?’‘네 장모님이 그렇게 잘 챙겨줬다고?’‘지어낸 거지?’양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마른기침했다.가끔 연정훈이 이렇게 안색 한번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때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탁!이번에는 연호민이 수저를 큰 소리로 내리쳤다.민수희는 남편이 제 편을 들어주는 줄 알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너희들이 오늘 이 집을 찾은 이유가 나와 네 할아버지에게 태클을 걸기 위해서였구나! 결혼한 지 둘째 날부터 가문에서 주름을 잡으려는 거지!”연정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 생각이었다.양시연은 앞접시에 놓인 반찬을 젓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불쌍한 척 어깨를 구겼다.분위기가 어느새 살벌해지고 연재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머니, 정훈이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번만 봐주세요.”“정훈이는 입이 없는 거니?”민수희가 냉소를 터뜨렸다.“네 아들이 이사회에서 이사진들을 말로 아주
“시연이가 좋아하지 않는 요리는 치우면 되죠. 그게 뭐가 대수라고.”표세연이 덤덤하게 말하자 정 할머니는 잠시 주춤하다가 얌전히 순대를 가지고 나갔다.그러나 아직 공기 중에 남은 냄새에 양시연은 여전히 속이 불편했다.다행히 다른 요리는 아주 담백했고 모두 입에 맞았다.빨리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 다른 걸 챙겨 먹으면 된다는 생각에 양시연은 말을 아꼈다.연정훈이 제육을 집어 밥 위로 올려주며 물었다.“먹고 싶은 거 있어?”식사 자리가 조용해졌다.국을 마시던 민수희는 조용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양시연은 젓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연정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눈치를 챘다.“사케 푸아그라가 먹고 싶네요. 어제 식장에 수성시에서 온 셰프가 만든 게 입에 맞더라고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이 셰프한테 사케 푸아그라를 준비해달라고 하세요.”“이미 점심 시간대도 지났고 이 셰프도 쉬는 시간이 아니겠느냐?”민수희가 입을 열었다.“굳이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겠어?”정 할머니가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도련님, 우리 집에 푸아그라는 없어요. 그렇게 잔혹한 식재료는 인간적으로 먹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없으면 사 오세요.”연정훈이 젓가락을 내려 두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경인시에 없는 게 어디 있어요?”정 할머니는 말문이 막혔다.정 할머니가 움직이기도 전에 연정훈이 말했다.“제가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제 말은 자꾸 무시하시네요.”“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서둘러 주방에 알리지도 않으시고.”연정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정 할머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연재혁은 먼저 예상했던 일이란 듯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그 옆의 표세연은 아들이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걸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구경했다.민수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연호민이 연정훈을 향해 무덤덤하게 말했다.“정 할머니도 이 집안의 어른인데 예의를 차리거라.”“그럴 수는 없죠.”연정훈의
짧은 대화를 통해 양민아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양시연이 몰래 감탄하는데 차량이 연씨 저택 부근에 도착했다.연씨 가문은 역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답게 저택에서도 그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양지원은 널찍한 시야와 해가 잘 드는 걸 좋아해 양씨 저택은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 많았다.그러나 연씨 가문은 풍수지리를 아주 중요히 여겨 정원부터 뒤뜰까지 거의 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거실도 풍수지리적으로 아주 훌륭한 배치를 가졌다.양시연은 오늘 은색 빛이 도는 원피스를 입고 7센티미터가 되는 하이힐을 신었다. 그리고 머리를 반듯하게 올렸는데 햇빛 아래 피부가 투명하게 빛이 돌았다.거실에는 연재혁 표세연 부부를 제외하고 연호민, 민수희도 함께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창가 자리에 앉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멀리서 보면 꽤 화목해 보였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안으로 들어오자 표세연이 활짝 웃으며 양시연을 반겼다.양시연은 창가의 두 사람을 향해 계산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민수희의 표정도 확인하지 않고 몸을 휙 돌려 표세연의 옆으로 앉았다.“...”표세연은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아들이 드디어 결혼한 것도 기쁜 일인데 이렇게 훌륭한 아내를 맞다니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표세연이 양시연의 손을 잡고 강남시티의 집은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채워 넣거라. 구하기 힘든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그러면 내가 바로 구해줄게.”양시연은 왠지 적응되지 않아 예의상 미소만 지었다.그러나 표세연은 개의치 않고 도우미를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이어지는 인사 순서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시작되었다.조금 의외였던 건 민수희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지만 일부러 양시연을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인사를 건네고, 절을 하고, 용돈을 받는 내내 민수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이어 연정훈의 부모님 차례가 되고 부부는 활짝 웃은 채로 여러 덕담을 건넸다.“시연이랑 정훈이가 여기까지 오도록 많은 고생을
연정훈이 양석진을 아버님이라 호칭하자 점수를 제대로 따게 되었다.별수 없어진 양지원은 몰래 연정훈을 슬쩍 노려보았다.‘이 녀석이!’그러나 연정훈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양석진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석진은 기분이 좋아져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또 연씨 저택으로 가는 시간이 늦어질까 재촉했다.그러자 양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을 살폈다.이번에는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아무도 시연이 괴롭히지 못하게 제가 지킬 겁니다.”“...”‘눈치 한번 빠르네.’양지원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이만 가봐.”그 옆의 양시연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그러다가 싸늘한 표정의 양지원과 시선이 마주치고 마른기침을 해댔다.양지원이 양시연을 잠시 째려보았다.‘이런 속없는 딸내미.’양시연은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고 집을 나서기 전 양지원에게 애교를 부렸다.그렇게 두 사람을 떠나보내고 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양석진과 두 눈이 딱 마주치고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슬쩍 피했다.양석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곧 공항으로 갈 거지?”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백호가 통화에서는 혁수가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했는데 너무 걱정돼서 가봐야겠어요.”“참.”양지원이 양석진을 향해 말했다.“오늘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시간이 이렇게 지체되었는데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괜찮아.”양석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먼저 공항으로 바래다줄게.”양지원은 몰래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집을 떠나지 않을 걸 보아 자신을 바래다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갈 수 있어요.”양석진이 양지원을 힐끗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쳐들었다.“그래. 나도 알아.”“그럼...”“그래도 그냥 바래다주고 싶어서 그래.”양석진은 닭살 돋는 말도 참 무덤덤하게 뱉았다. 방금 연정훈이 아버님이라고 말하던 모습보다도 더 덤덤해 보였다.그동안 양석진과 양지원은 대낮에
이어 부모님 차례가 되자 양홍두는 자연스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지원이 가장자리에 앉았고 양석진은 그 옆의 소파에 앉아 있었으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거실의 다른 사람을 살폈다. 집사는 양씨 집안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그래서 낮은 소리로 양석진에게 말했다.“엄마 옆으로 가서 앉으세요. 그러면... 우리가 인사하기 편해요.”양지원이 빠르게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 연정훈이 표정 변화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양지원을 향해 눈짓하고 있었다.“옆에 앉아도 될까?”“...”‘그걸 왜 나한테 물어!’‘평소에 내가 엄청 깐깐하게 구는 줄 알고 오해하면 어떡해!’게다가 연정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기에 잠시 고민하던 양지원이 양석진에게 말했다.“그래요 오빠, 여기로 와서 앉아요. 같이 인사를 받는 건데 뭐 어때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도 꾹 다물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몰래 살피고 있었다. 양지원이 소용없는 짓을 하는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그때, 양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원의 옆자리에 앉았다.자리에 앉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빳빳이 펴고 긴장한 듯 두 손을 무릎 위로 모았다.양시연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이어 두 사람은 또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양지원은 양홍두와 달리 덕담 대신 잔소리를 늘여놨다.“시연이는 정훈이 네가 온갖 고생을 해서 겨우 얻은 아내니까 꼭 잘해줘야 해. 네가 우리 시연이 속상하게 하면 절대 체면 따위 봐주지 않고 되갚아 줄 거니까 명심해.”“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네 할머니 쪽도 네가 잘 처리해야 해.”“네 알겠습니다.”“네 엄마가 아이를 재촉하지는 않겠지?”“절대 그럴 일 없어요.”양지원은 한참 꼬치꼬치 캐물으며 사위 앞에서 주름을 잡았다.양석진은 그 옆에 앉아 양지원이 악독 장모님을 연기하는 걸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지원은 하던 말도 멈추고 양석진을 노려보았다.‘
양시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말했다.“일반적으로 누굴 괴롭히는 스타일이 아니에요.”“만약 날 괴롭힌다면?”“그럼 정훈 씨가 그럴 만한 일을 했나 보죠.”“...”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표정을 살폈다. 연정훈이 따로 말이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지원과 양석진의 관계는 비밀까지는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연정훈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에이 됐어.’‘이미 결혼까지 한 사이인데 연정훈 위치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잖아.’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맞은편의 연정훈이 양시연이 까준 달걀에서 노른자위만 빼고 다시 양시연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고개를 드니 연정훈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먹어.”“네.”양시연은 고개를 숙여 밥을 한 큰술 떠먹다가 흰자위를 입에 넣었다.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부부는 바로 양씨 저택으로 떠날 생각이었으나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와 어젯밤 너무 힘들어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고 조금 늦게 오라고 했다.“정훈 씨 집에도 연락해요. 우리 점심시간에 맞춰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였다.9시 30분, 두 사람은 양씨 저택으로 떠났다.양씨 저택은 어제 걸어 놓은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입구에 도착하자 집사가 환히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집사부터 도우미까지 감히 아무도 연정훈을 양지원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고 공손히 거실로 모셨다.집안으로 들어서고 두 사람은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건넸다. 그러나 양석진과 양홍두만 보일 뿐 양지원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양석진이 양시연에게 말했다.“너희 엄마는 아직 메이크업이 끝나지 않았어, 금방 내려올 거야.”양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양석진이 연정훈을 힐끗 바라보다가 양시연에게 물었다.“어젯밤엔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보낸 밤인데 적응은 돼?”양시연은 잠시 고민했다.‘이 질문은 아마도 연정훈이 잘 챙겨주는지 물어보는 거 맞겠지?
따뜻한 햇살이 방안을 비추고 양시연이 두 눈을 뜨자 잘생긴 외모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마침 아침 8시가 되었다.이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켠 양시연은 늦장을 부리기 위해 연정훈을 툭툭 밀었다.“오늘 양가 부모님 뵈러 가야 하는데...”눈을 뜬 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봤다. 양시연은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꼭 붙어있었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다.연정훈은 고민도 하지 않고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양시연은 얼떨결에 그 품에 안기게 되었다.눈을 깜빡이던 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연정훈도 고개를 숙여 양시연과 시선을 마주했다.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연정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 눈에 뭐 있어.”‘눈에?’‘아침 댓바람부터 눈에 뭐가 있다고... 설마 눈곱?’양시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를 악문 양시연은 이미지 신경 쓸 겨를 없이 손을 뻗어 연정훈의 볼을 잡아당겼다.“나만 있고, 정훈 씨는 없는 줄 알아요?”“난 없어.”“고개 돌려봐요. 한 번 보게!”연정훈은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양시연의 손을 잡고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그러자 양시연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얼굴을 제 앞으로 당겼다.연정훈은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이어갔다. 한편으로 피하며 다른 한편으로 양시연의 두 손을 꼭 쥐었다.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자신 있으면 피하지나 말던가요!”“이젠 일어나서 씻어야 하니까 장난은 여기까지.”“쳇. 누구 마음대로. 빨리 고개 돌려봐요! 한 번만 보게!”“양! 시! 연!”아침 일찍 식사 준비를 하던 도우미가 그 소란에 참지 못하고 위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도우미와 몰래 눈짓을 주고받았다.‘신혼이 좋긴 좋네.’위층의 연정훈은 빠르게 일어나 화장실로 도망갔고 서둘러 세수했다.양시연은 치사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어
부승원은 집에 도착해 샤워를 마쳤다.도우미가 부승원을 찾아와 물었다.“도련님, 소파 위의 때 묻은 가방을 가져올 가요?”‘때 묻은 가방?’부승원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꼭 끌어안고 있던 두 남녀가 떠올랐다.그래서 부승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버려요.”‘네?’도우미는 의아했지만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버릴 쓰레기였다면 왜 고이 갖고 온 거지? 완전 헛수고잖아.’도우미가 가방을 들고 버리려고 가는데 아직 그곳에 남아 있던 부승희와 마주쳤다.“아가씨.”부승희가 가방을 받아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만약 오빠가 가방에 관해 묻는다면 마당에 있는 큰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하세요.”도우미는 어리둥절했지만, 또 고개를 끄덕였다.부승원은 워커홀릭이었지만 그래도 12시가 되면 잠에 들었다. 그러나 오늘에는 업무가 많은 편인 건 지 12시가 넘어도 방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12시 30분경, 핸드폰이 울렸다.반우희가 걸어온 전화였는데 부승원은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한참 뒤, 반우희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수신 거부.그러다가 반우희는 조심스레 문자 한 통을 남겨 이유를 설명했다.벨 소리가 거의 끊어지려는데 부승원이 굳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변호사님?”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부승원이 인상을 찌푸렸다.‘울었어?’“무슨 일이야?”“제 가방... 혹시 변호사님한테 있는 건가요?”부승원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어.”그 말에 핸드폰 너머가 조용해졌다.“아...아...”반우희는 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작게 탄식을 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탄식 사이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알겠습니다...”반우희는 서둘러 통화를 종료하려 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창피하게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그때 부승원이 혼을 내기 시작했다.“본인이 잃어버린 물건인데 운다고 뭐가 달라져?”“그게 아니라...”“근무일에 결혼식 한번 다녀와 실컷 먹고 놀고 했더니
부승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또 부승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라보는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담겼다.부승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집으로 운전해요.”기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우희 씨 가방은...”“성인이 되어서 제 물건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건 본인이 알아서 책임져야죠. 내일 서류 제출하지 못하면 숙제는 두 배로 늘어날 테지만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에요.”“...”‘부승원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이곳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도 부승원인데. 쯧, 기름 아깝게.”기사가 유턴하려고 하자 부승희는 그 틈을 타 반우희를 부르려 했다.부승원이 바로 손을 내밀어 부승희를 잡아당기는 동시에 차창을 올렸다.“...”부승희는 굳은 얼굴로 부승원을 바라봤다.“오빠 점점 이상하게 변하는 거 알지?”부승원은 못 들은 척 제 자리에 앉았고 얼굴을 굳힌 채로 말을 잇지 않았다.기사는 천천히 유턴했다.다른 한편, 아래층의 반우희와 장서진은 한참 서로를 끌어안다가 겨우 서로를 마주 보았다.“날 찾아온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데 그동안 대체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장서진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너한테는 세 동생도 있고 나보다 더 힘들게 뻔한데 어떻게 내 짐까지 나누겠어.”“아무리 힘들어도 예서가 아픈 것보다 큰일인 건 없어.”반우희도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우린 어릴 때부터 같이 크면서 빵 한 조각도 나눠 먹었잖아. 그런 네가 힘들다는데 내가 모른 척할 리가 없잖아.”그 말에 장서진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눈물을 흘리는 장서진에 반우희도 눈물 꼭지가 틀어졌다.같은 보육원 출신인 두 사람은 남들보다 고달픈 삶을 살았다. 하지만 하느님은 항상 힘든 사람에게 더 많은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 장서진이 동생을 만나 같이 지낸 건 겨우 몇 년뿐인데 그 동생이 큰 병에 걸렸다고 한다. 보험 회사에서 절반 비용을 부담한다고 해도 남은 비용은 장서진에게 큰 부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