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워 시간대의 지하철에서 안시연은 아침 식사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연정훈과 가장 익숙할 때는 아마 침대 위에 있을 때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침대에서 내려오면 그 남자는 냉담했다.하지만 원래부터 연인 사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원하고 그녀는 그의 권세와 돈을 원하니 누구도 손해 보는 것은 없다.그녀는 회사에 들어갔고, 점심 때쯤 진수빈이 전화로 어떤 집과 차를 좋아하는지 물었다.“자그마한 집에, 튀지 않는 차로 해주세요.”“50평 정도의 집에, 8,000만 원 정도의 차로 하면 될까요?”“...”진 비서는 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무슨 오해가 있는 건가?“혼자 살 거니까 10여 평짜리 원룸이면 충분하고, 차는 4,000만 정도 가격대면 될 것 같아요.”진수빈이 씩 웃었다.“농담이시죠?”안시연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가 사는 곳에 연정훈도 갈 거니까 완전히 그녀의 기준에 따를 수는 없다.“알아서 하세요. 저는 다 좋아요.”“네.”오후에 회사에서 나와 병원에 가기 전에 외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빨리 와. 너의 시부모님이 오셨어.”기쁨에 겨운 외할머니의 말을 듣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주지혁과 결혼 얘기가 오갔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말하는 시부모는 당연히 주지혁의 부모다.그녀는 주지혁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 밖에 도착하니 안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안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미연이 반갑게 맞이했다.“시연아, 이제 퇴근해?”주씨 집안이 이전에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지혁의 부모님은 동년배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중년 여성의 소박하고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안시연은 한순간 마음이 헷갈렸다.그녀가 인사하자, 박미연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유능하다고 한바탕 칭찬했다.“시연이 더 예뻐졌네.”그녀는 말하면서 안시연의 옷을 훑어보았다.“이 치마도 예쁘네.”안시연은 침묵했다.그녀가 입은 것은 엄청나게 비싼 새 치마였다.박미연은 알아본 눈치다.
안시연은 화가 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주씨 집안의 사실 왜곡 능력은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 틀림없다.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또박또박 말했다.“주효진이 회사에서 잘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저와는 상관없습니다. 주지혁의 사업에 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신분 상승을 했으니 좋든 나쁘든 다 그 사람 일이죠.”박미연은 화를 냈다.“시연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하룻밤 부부라도 그 정은 오래간다고 했는데.”“저는 주지혁과 부부였던 적이 없습니다.”박미연은 할 말이 없었다.전혀 먹히지 않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우리 지혁이 쉽지 않은 거 너도 알잖아.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일해서 여기까지 왔어. 시연아, 너는 젊고 예뻐서 얼마든지 대단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만 지혁이는 너와 달라.”“지혁이 그동안 너의 외할머니를 돌봐드렸던 것을 봐서라도 너그러이 용서하고, 그 사장님한테 우리 지혁이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해줘.”주지혁이 부지런하고 착실하다고? 안시연은 역겨워 토할 것 같았다.주지혁이 변심하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빌붙은 것이고, 그녀는 단지 반격했을 뿐인데, 박미연은 모두 그녀의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안시연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이를 본 박미연은 급히 그녀를 잡았고, 옆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무릎을 꿇으려 했다.안시연은 깜짝 놀랐다.“시연아, 제발 도와줘.”“엄마!”박미연이 무릎을 꿇기 전에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 나는 쪽을 보니 주지혁과 주효진이 왔다.주효진은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오더니 박미연을 일으켜 세운 후 안시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양심이 있어? 우리 엄마가 그래도 어른인데.”허! 안시연은 입을 삐죽거렸다.주지혁이 외할머니를 가지고 협박할 때는 외할머니를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나?박미연은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여전히 안시연에게 사정했다.주지혁이 앞에 나서며 미간을 찌푸렸다.“엄마, 소란을 피우지 마세요.”박미연은 눈 밑이 거뭇한 아들을
“너 정말 연정훈과 사귀어?”주지혁의 질문에 안시연은 부인하지 않았다.주지혁은 눈을 감고 몹시 마음 아파했다.“시연아.”“돌아서라고 설득하고 싶다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구역질 날 뿐이니까.”주지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내뱉지 못했다.그는 안시연이 어느 날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는 쓰라린 감정을 억누르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너를 말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진짜 모습을 알려주려는 거야.”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사람이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지?”주지혁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안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위선자야. 그동안 너에게 관심이 없는 척했어. 강 건너 불구경하면서 네가 궁지에 몰려 제 발로 찾아오길 기다린 거야.”안시연이 사무실에서 연정훈에게 키스하는 순간, 그는 자기가 직접 안시연을 연정훈에게 밀어냈다는 것을 알았다. 연정훈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안시연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연정훈이 자기에게 어떤 감정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육체적인 관계일 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그렇다면 그가 수단을 좀 썼다고 해서 크게 비난할 것은 없다.“그 사람이 위선적이라고? 난 상관없어. 당신이 그 사람을 비난할 자격도 없고. 어쨌든 나를 압박하라고 당신 목에 칼을 들이댄 사람은 없었으니까.”주지혁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후회막급이었다.“내 방식이 잘못됐지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야.”그는 안시연을 바라보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연정훈이 너를 위해 효진을 해고하고 내가 진행 중인 몇 개 큰 프로젝트를 망쳐버렸는데, 이 모든 것은 단지 자기 권리를 과시해 네가 순순히 말을 듣게 하기 위한 거야.”안시연은 놀랐다.“연정훈이 네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망쳤다고?”그녀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주지혁은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어서 말했다.“기다려 봐. 며칠 있으면 알려줄 거야. 그걸 가지고 너를 감지
양혁수는 휴대폰을 맞은편의 귀부인 앞에 던지고는 건들거리며 턱을 치켜올렸다.“보세요. 굉장한 미녀예요.”양지원은 여자가 뺨을 때릴 때부터 끝까지 아래층의 해프닝을 구경했다.그녀는 권력자에게 빌붙는 이런 여자를 질색하는데, 연정훈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50대의 나이에도 관리를 잘해서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별로 남지 않았고 30-40대로 보이는 얼굴에는 도도함과 부티가 철철 흘렀다.눈앞의 싸구려 커피를 그녀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물 한 잔만 마셨다.아들의 휴대폰에서 동영상을 힐끗 훑어본 후 그녀는 이마를 찡그렸다.양혁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의자에 기대앉아 시비를 걸었다.“이 여자가 이렇게 매혹적인 외모에 뺨을 때린 것으로 봤을 때 성깔도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연정훈이라도 그녀의 손에 죽고 싶었을 거예요. 이렇게 강력한 경쟁상대가 있는데도 양민아를 연정훈에게 시집보내고 싶어요?”양지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누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너나 잘해.”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거칠고 버릇없이 행동했다.양지원은 휴대폰을 던져주며 센 말투로 말했다.“누나한테 전화해서 언제 도착하는지 물어봐. 벌써 15분이나 늦었어.”“알았어요.”-정인그룹의 어느 탁 트인 공간,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연정훈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상관없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연정훈은 탁자 옆에 앉아서 아무 감정 기복이 없는 덤덤한 얼굴로 자사호를 들고 최고급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차향이 사방으로 퍼졌다.그의 어깨 너머로는 강향단 나무가 파릇파릇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그는 차를 마신 후 몸을 뒤로 기대며 휴대폰의 영상을 정지시켰다.그때 전화가 울렸다. 남자가 휴대폰을 집어 들자, 손목에서 시계가 번쩍번쩍 빛났다.일어나서 창가로 간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원 이모, 모처럼 경인에 오셨는데, 제 체면부터 깎네요?”“어찌 감히 우리 연 대
안시연은 똑똑하고 자기 처지도 잘 알지만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도 마음속으로 살짝 기뻤다.브랜드 매장 직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면서 그저 안시연에게 보석의 디테일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2019년 4월 17일 연정훈 씨가 이 스타티스-라벤더 목걸이를 주문하셨습니다. 메인 보석은...”직원이 목걸이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었다.2019년이라는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안색이 변하더니 문득 안시연을 쳐다보았다.안시연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확인이 끝나셨으면 사인해 주세요.”직원의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사인했다.화려하고 값비싼 보석 목걸이를 그녀는 그저 슬쩍 엿보았다. 2019년 그 당시 연정훈은 그녀에게 아주 먼 전설에 불과했다.이 목걸이는 그녀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직원이 떠난 후 아주머니는 조리대 뒤에 서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시연 아가씨...”안시연은 방긋 웃으며 보석을 내려놓았다.“괜찮아요. 교수님이 돌아오시면 제가 말씀드릴게요.”아주머니는 머쓱해하며 대답하더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차분하게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목걸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그 목걸이의 주인은 누굴까?’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그녀가 일어나서 문어귀로 가니 연정훈이 밖에서 들어왔다. 옷에서 살짝 술 냄새가 나고 얼굴은 멀쩡한 것을 보니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것 같다.“뭐 좀 드시겠어요?”안시연이 묻자, 연정훈은 손목시계를 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헐렁한 셔츠와 옅은 색의 프린트 스커트 차림에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마치 그림 속의 사람처럼 아름다웠다.살뜰히 챙기는 것을 보고,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연정훈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는 어젯밤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물었다.“뭐 했어?”“너무 늦었어요. 제가 만둣국을 끓여드릴까요?”안시연이 어깨에 기대자 남자는 그녀에게 키스했다.“좋아.”안시
그날 밤 안시연은 연정훈의 서재에 가지 않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연정훈이 지금 자기와 만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연정훈은 11시가 다 되어서야 침실로 돌아왔다.그는 이불을 젖히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안시연이 눈치 있게 돌아눕자, 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아직 안 잤어?”안시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당신을 기다리고 싶었어요.”여인의 따뜻한 한마디는 연정훈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오래된 주름살을 펴주었다. 그는 살며시 몸을 뒤집어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연정훈이 흥분하며 스탠드 조명을 어둡게 조절하자, 안시연은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고 받아주는 자세를 취했다.그녀는 키스할 때 몸이 나른해지고 고양이처럼 가볍게 읊조리는데 그것이 정말 매혹적이다.연정훈은 안시연 같은 여자가 집에 두고 데리고 놀기 좋다고 생각했었다. 몸매가 예쁘고 나른해 빠져들게 된다.다만 오늘 밤 그는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누비다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했다.그녀는 매혹적이고 충분히 농염한 요물이다.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고혹미만 있고 사랑은 없다.연정훈은 갑자기 동영상에서 그녀가 당당하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이 생동한 눈동자에 사랑을 담아 한 남자를 바라본다면 어떤 유혹일까?남자의 원시적인 영역 본능이 작용한 것인지, 연정훈은 갑자기 손에 힘을 주더니 안시연의 귀에 키스하며 저음의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전에 주지혁과 이런 거 했었어?”안시연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여 그에게 다가가던 그녀는 갑자기 이 질문을 듣고 즉시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남자의 속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을 안다.연정훈 같은 남자는 여자의 순결을 더 중요시할 것이다.그녀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목에 키스했다.“저의 첫 경험은... 교수님과 했어요.”연정훈은 당연히 안다. 다만 그날 밤 차 안에서 한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돈과 보석만 준 것이 아니다.그날 밤이 지나고 안시연은 외할머니의 주치의와 간병인이 모두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진수빈이 직접 처리한 것이다. 어르신이 눈치챌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면 연정훈은 병원까지 옮길 생각이었다.집도 이내 구했고, 진수빈이 안시연의 취향에 따라 긴박하게 인테리어를 진행했다.심지어 회사에서도 안시연은 아랫사람을 잘 이끌고 키우는 베테랑 팀장 밑에서 일하게 됐다.처음에는 감동했다. 하지만 얻는 것이 많아지니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졌고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훔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어느 날 오전 결국 참지 못하고 빙빙 돌려서 아주머니에게 연정훈의 전 애인에 대해 물었다.아주머니는 말을 아끼는 눈치였지만 그녀가 화를 낼까 봐 몇 마디 했다.“전에 한 분이 계시긴 했지만 이미 헤어졌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안시연은 의아했다. 아주머니의 말에서 그녀는 연정훈의 곁에 오래 있은 사람들조차 전 애인이 연정훈과 어떤 사이였는지, 여자친구였는지, 아니면 그녀와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고 느꼈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주머니조차 그 여자 때문에 연정훈과 싸우면 이득 되는 게 없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그녀는 방긋 웃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여가 시간에는 대학 동창 정이슬이 천문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했다.대학교 때 천문학회 멤버였던 안시연은 전시회 주제가 ‘제주 별구경’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관계자 티켓인데 좀 기다려 봐. 내가 구혜은한테 두 장 달라고 할 테니 같이 가자.”안시연은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하지만 오후에 정이슬에게서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다.[구혜은 말로는 티켓이 부족하대.]안시연은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대학교 때 그는 구혜은 선배와 약간 껄끄러운 사이였다.그녀는 아쉬웠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퇴근 후 연정훈이 지하 주차장으로 오라고 했다.그녀는 연정훈의 차를 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재빨리 문을 열고 올라
문에 들어서니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고, 현관 쪽 선반에는 화분이 줄지어 있었다.안을 들여다보니, 얇은 리넨 커튼으로 가려진 구석 쪽 공간에 가야금이 놓여 있고 선반에는 피리가 걸려 있었다.연정훈은 놀라는 그녀의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눈시울이 뜨거워진 그녀는 한참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식탁, 책꽂이, 책상 등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새로 추가된 가구도 있었지만, 이런 익숙한 물건들은 그녀를 외할머니와 함께 20년 가까이 살았던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그녀는 식탁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지나 정신을 차린 그녀는 코끝이 찡했고 본능적으로 돌아서서 뒤에 있는 남자의 목을 꽉 껴안았다.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소리 없이 위로했다.안시연은 코를 훌쩍이며 나지막이 물었다.“교수님, 이걸 어떻게 했어요?”“네가 살던 집을 구매한 사람이 집 구조를 바꾸지 않았어.”그렇구나. 그에게는 말 한마디면 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너무나도 감동이었다.연정훈은 그녀를 안아주고 귀에 입맞춤했다.“울지 말고 베란다로 가봐. 선물이 있어.”안시연은 손을 놓고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쳐다보았다.“또 선물이 있어요?”“집을 꾸미는 것을 선물로 친다면 너무 달래기 쉽잖아.”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안시연은 씩 웃었다.그녀는 돌아서서 그가 말한 대로 베란다 방향으로 갔다.폐쇄형의 베란다에는 전동 문이 설치돼 있었다.문이 천천히 열리고 선물의 형태가 점차 안시연의 눈에 들어왔다.천체망원경이다!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그녀는 연정훈이 그녀의 속마음을 어떻게 아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걸음을 옮겨 망원경에 가까이 다가갔다.이 집은 안시연이 예전에 살던 집의 두 배 정도로 매우 큰 면적인데도 망원경을 베란다에 놓으니 공간이 협소해 보였다.천문학 지식이 좀 있는 안시연도 한순간 망원경 모델을 알지 못해 조심스럽게 만졌다.그녀는 너무 흥분해서 한참 동안 지켜보았고, 흥분이
양시연이 마른기침을 했다.그러자 나비에게 간식을 먹이던 연정훈의 손이 뚝 멈춰 섰다. 그러나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또 이어 간식을 먹였다.‘쳇.’양시연이 입을 삐죽이고 계단 손잡이에 몸을 기댔다.“큼큼. 셋 셀 동안 계속 모르는 척하면 오늘 밤엔 그냥 소파에서 자요.”“...”‘양시연 정말...’‘내가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지?’연정훈이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바라봤다.양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미소를 지었다.“셋, 둘...”연정훈이 몸을 일으켰다.“...”‘흥.’양시연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기양양해진 양시연은 턱을 살짝 쳐들고 말했다.“이젠 빨리 자요. 술도 많이 마신 사람이 왜 애꿎은 알파카를 잡고 그래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놀릴 거예요.”연정훈은 빠르게 계단으로 올라가 양시연의 앞에 섰다.그렇게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양시연은 눈만 깜빡였다.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오자 양시연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고 연정훈이 멈추지 않자 계속 뒷걸음질을 했다.한참 뒷걸음치던 양시연은 마음이 급해 양손으로 연정훈을 막아섰다.“뭐 하는 거예요?”연정훈이 살짝 고개를 숙여 낮은 소리로 말했다.“결혼 첫날 밤을 같이 보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꾹 참고 있는데 내가 알파카랑 대화하는 걸 창피해할 것 같아?”“...”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그리고 연정훈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그래서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해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렇게 큰 노력을 들여 겨우 한 결혼인데 소감이 어때요?”양시연이 인터뷰하듯 물었다.“...”그러자 연정훈이 몰래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꾹 참고 있는 게 보여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미안한 것도 잠시,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또 기쁜 마음이 스멀스멀 찾아왔다. 과거의 연정훈은 나이가 많고 가진 게 많다는 걸 빌미로 양시연을 압도했었다. 그러니 이제 과거에 저지른 자기 잘못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 같았
양시연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딸깍.욕실 문이 열리고 양시연은 빠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연정훈은 수건으로 목에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척하는 양시연을 향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연기 참 못해.”연정훈이 톡 쏘는 말 한마디에 양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내 체면이 뭐가 돼.’눈꺼풀에 경련이 올 것 같았지만 양시연은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잠결에 뒤척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등을 돌렸다.이에 연정훈은 몰래 웃음을 터뜨렸고 수건을 내려 두고 바로 침대로 향하지는 않았다.술기운이 올라오고 머리도 살짝 어지러웠던 연정훈은 잠기운은 이미 모두 사라진 터였다. 그리고 왠지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양시연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던 연정훈은 시선을 거두고 컵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위층에는 도우미 하나 없었다.오직 검은색과 흰색의 알파카가 걱정 하나 없는 얼굴로 간식을 먹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두 알파카는 평소보다 더 풍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영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고 나비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입속의 음식을 씹으며 빤히 바라봤다.연정훈은 왠지 나비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물을 따르러 가는 내내 나비는 연정훈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연정훈이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자, 나비는 말린 바나나 간식을 머리로 밀어 연정훈의 곁에 내려놓았다.‘먹여줘.’마침 한가한 연정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한 입 한 입 먹이기 시작했다.나비는 쉬지도 않고 삼켰다.이런 나비를 보고 있자니 절로 양시연의 생각이 나고 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갔다.“바나나가 그렇게 맛있어? 이번 달에 살이 얼마나 쪘는지 알기나 해?”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나비는 입안의 바나나를 꿀꺽 삼키고 또 간식을 빤히 바라봤다.연정훈은 간식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쪽!양시연은 가볍게 키스를 마친 후 바로 자리에 누웠다.“이 정도면 된 거죠?”연정훈은 내려다보며 말했다.“아까 내가 너한테 한 키스랑 똑같아? 그렇게 대충 넘어가려고?"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있어요? 규칙도 어기고 기준까지 올리겠다고요?”“난 몰라. 그냥 네가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양시연은 혀를 차며 그와 말싸움을 벌일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말싸움하기 싫었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밀릴 걸 알았기에 아예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다.그는 그냥 다시 다가가 입술을 가까이 댔다.양시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연정훈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알았어요! 내가 다시 제대로 키스해 줄게요. 됐죠?”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그럼 해봐.”양시연은 이를 악물고 가볍게 기침을 내었다.그녀는 다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눈빛이 조금 더 진지해졌고 살짝 몸을 일으키며 눈을 깜빡이며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쪽.마치 식전의 애피타이저를 먹는 것처럼 가볍게 했다.그러고는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목을 더 세게 감아 붙잡았다. 입술이 서로 스치며 한 번 더 그 사이를 깊게 탐색했다.연정훈은 그녀가 발휘하는 모습을 지켜보려 했으나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양시연이 지치지 않도록 손을 뻗어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양시연을 자신의 팔 안에 부드럽게 안았다.처음엔 약속된 조건에 따라 금방 끝내야 했지만, 연정훈의 부드러운 태도와 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이 더해져 키스는 점점 깊어졌다.둘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교차하더니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더욱 깊은 밀착으로 이어졌다.“음...”양시연의 몸이 완전히 풀렸다.어느새 그녀는 그의 손바닥을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목을 감싸고 있던 손은 점점 힘을 잃고 느슨해졌다.연정훈은 몸을 낮춰 양시연을 거의 완전히 눌렀다.잠시 숨을 고르는 틈에 그는 양시연의 입술을 한 번 더
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양시연의 피부를 달구는 듯했다양시연은 눈앞이 아찔해지며 순간 별이 떠오르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턱이 다시 잡히고 그는 또다시 입술을 차지했다.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억지로 이번 깊은 키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연정훈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자 양시연은 힘없이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걸 알기에 그녀는 그의 입술을 손으로 급히 막았다.그녀의 손바닥이 연정훈의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에 닿았다.양시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그를 통제할 수 없을까 봐 다른 손까지 내밀어 양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힘을 주어 떼려던 순간 그녀의 화가 섞인 숨 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정훈.”연정훈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어둠 속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눈빛은 서로 빛났다.양시연은 헐떡이며 짜증과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이 밤중에!’연정훈은 태연하게 양시연의 손을 뿌리쳤다.“신혼 첫날 밤인데 내가 뭘 하는 것 같아?”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입안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빠르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따졌다.“약속 어겼잖아요! 저와 한 약속 기억 안 나요? 사기꾼!”양시연은 연정훈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 했다.연정훈은 천천히 물었다.“네가 기분 좋으면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기억하는데도 왜 이러는데요!”“오늘 네 기분이 꽤 좋아 보이던데.”연정훈은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누가 그래요!”연정훈은 대답했다.“결혼식 같은 날도 안 좋다면 대체 언제 좋겠어?”“저...”연정훈은 이어서 말했다.“오늘도 안 된다면 이번 생엔 절대 못 하겠네.”양시연은 여전히 어이없었다.“...”‘이 여우 같은 남자.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해.’양시연은 그를 째려보며 온화한 가면을 벗어던지며 이불 아래서 연
방 안이 갑자기 어둠에 잠겼다.연정훈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멈춰 섰다.그 순간 양시연이 말했다."저도 너무 피곤해요. 정말 졸려요."마지막 말은 하품하며 입을 벌리는 바람에 한층 더 나약하고 안쓰럽게 들리게 했다.연정훈은 침묵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연정훈은 어금니를 꽉 물며 순간적으로 기세가 꺾였다.어둠 속에서 양시연의 숨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호흡이 점차 고르게 변하며 금세 깊은 잠에 빠질 듯 보였다.연정훈은 같은 자세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화가 나 몸을 침대에 세게 던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양시연은 귀를 기울이다 몰래 한쪽 눈을 떠 근처에 있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잠들었다.양시연은 곧 깊이 잠들었지만, 연정훈은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연정훈은 옆으로 돌아누워 낮에 남산 저택에서 그녀가 민희수와 나눴던 대화와 USB에 담긴 수많은 영상을 떠올렸다.그리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이 인생에서 겪은 모든 억울함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처럼 느껴졌다.‘다른 건 그렇다 치고 신혼 첫날 밤에 이렇게 적반하장이라니.’게다가 조금 전 욕실에서 곁에 있어 주겠다던 그녀는 중간에 사라졌고 연정훈은 욕실에서 넘어져 자칫 큰일 날 뻔했다.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화가 날수록 그 일이 계속 떠올랐다.결국 연정훈은 다시 돌아누워 양시연을 마주했다.어둠에 익숙해진 연정훈의 눈에는 양시연의 얼굴 윤곽이 또렷이 보였다.양시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표정은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연정훈은 손을 뻗어 양시연의 얼굴을 한번 꼬집고 싶었다!그런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꼬집어서 뭐 하겠어? 무슨 의미가 있다고?’결국 연정훈은 몸을 양시연 쪽으로 기울여 양손을 그녀의 옆에 두고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너무 가까워져 서로의 숨결이 섞이기 시작했다.연정훈의 숨소리는 점점 거
연정훈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 분노가 절반쯤 가라앉았는데 방금 넘어지면서 다시 화가 났다.‘이 잔인한 여자 아프다고 해서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연정훈의 머리는 윙윙거리며 바닥에 앉아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양시연은 아래층에서 올라오며 작은 오이 하나를 들고 안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듣고 아무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잠시 후 양시연은 유리문을 두드렸다."연정훈 씨, 괜찮아요?”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뭐지?’양시연은 눈을 깜박이며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이번에는 안에서 물소리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나왔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톡톡 쳤다.“빨리 나와요 너무 오래 있지 말고요.”양시연은 말을 끝내고 돌아섰다.실내에서 연정훈은 샤워기 아래에 서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있었다. 이전에는 화가 치솟았지만, 양시연이 다가와서 대충 걱정하는 척하자 그 분노는 또 다시 사라졌다.양시연의 그의 마음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아 더 짜증이 났다.그는 급히 물을 틀어놓던 수도꼭지를 세게 잠갔다.양시연은 영리하게 물이 멈춘소리를 듣었다. 연정훈이 빨리 씻고 나오려는 줄 알고 옷을 가져와 욕실로 갔다.두 사람은 방에서 마주쳤고 연정훈은 머리를 말리며 양시연을 보았다.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보고 약간 불안한 느낌을 받았고 힘없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물컵을 들고 나가며 마치 물을 따르러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선물과 돈을 보관하는 큰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찾으러 와도 그녀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양시연은 커다란 카펫 위에 앉아 기쁜 마음으로 돈을 셈하기 시작했다.침실에서 연정훈은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오지 않는 걸 보며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다.‘그래. 버텨보자.’그녀가 하룻밤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기다려 볼 작정이었다.양시연은 선물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졌고 결국 시간이 흐르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고 깜짝 놀랐다. 양시연은 얼른 몸을 돌려 가슴 부분의 지퍼를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휴.’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소파에 손을 올리고 눈을 돌리며 말했다.“어때요? 괜찮아요? 힘들면 제가 위층으로 모시고 올라갈까요?”연정훈은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머리가 좀 어지러워.”연정훈은 자신의 상태를 말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해장국 좀 끓여 드릴까요?”연정훈은 대답 없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괜찮아.”“그럼 잠깐 누워 있으세요. 저는 짐 정리 좀 할게요.”“...응.”양시연은 연정훈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쁜 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기쁜 마음으로 빨간색 캐리어를 열었다.며칠 전 양시연의 일상용품은 이미 일부 보내졌고 연정훈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지만, 양시연은 최근에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져왔다.그녀는 짐을 안방에 놓을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연정훈이 차가운 눈빛으로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캑캑.’나쁜 짓만 안 하면 된다. 다른 방에서 자는 건 너무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한참을 생각한 후 양시연은 결국 짐을 안고 안방으로 갔다.그때 연정훈이 일어나 위층으로 가려는 길이었다. 계단에서 마주친 양시연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속이 안 좋으면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요.”양시연은 말하면서도 한 발자국도 멈추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방에 도착한 양시연은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연정훈을 보며 바쁘게 움직였다.기운이 넘치는 양시연은 부엌에서 오이를 꺼냈다.한참을 들락날락하다가 마침내 연정훈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샤워 안 해요?”“너 먼저 해.”“먼저 해요.”양시연은 예의 있게 말했다.“이 상태로는 걱정돼요. 먼저 씻으세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들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옷이 젖어도 괜찮아요.”연정훈은 그녀가 말로만 하는 것이라 짐작했고 실제
양지원은 양혁수의 상황을 방금 알았지만, 양시연이 말하자 양혁수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양혁수는 양시연의 결혼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했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마 양혁수가 양시연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바로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을 것 같았다.양지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혁수가 나에게 큰 문제 없다고 말했어.”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다행이네요.”양지원은 양시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시간도 많이 늦었어.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집에 가서 푹 쉬어. 내일 아침에 집에 가서 아침 먹고 어머니가 아주머니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할게.”양시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양지원을 꼭 안았다.“오늘 밤은 집에 가면 안 되는 거예요?”양지원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가능하지만, 연정훈한테 먼저 물어봐야지. 그래도 연정훈에게 조금의 체면은 줘야지.”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고 싶으면 갈 거예요.”양지원은 애정 어린 손길로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들은 잠시 더 이야기한 후 양지원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서 양시연은 손을 흔들며 먼저 가 보라고 했다.복도에서 양지원은 전화를 받으며 급히 걸어갔다.양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지원이 ‘연정훈에게도 체면을 줘야 한다’는 말이 양시연의 마음에 남았다.‘신혼 밤 정도는 함께 보내겠지.’그녀는 계속 속으로 생각했다.연정훈이 모든 손님을 다 보내고 같이 차를 타고 강남시티로 돌아갈 때 그녀의 마음은 결혼식 날 연정훈을 향해 걸어갔을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집 가는 길은 조용했고 연정훈은 술을 꽤 마신 상태여서 눈에 띄게 취한 기색이 있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았다.‘취했구나. 취한 게 좋겠다. 집에 돌아가서 그냥 곯아떨어질 수 있겠네.’양시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속
이승우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동생이라니? 내 작은고모!”부승희는 가볍게 받아넘겼다.“안 믿어.”이승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신 양시연과 잡담을 나누며 웨이터에게 간단한 간식을 부탁했다.“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어?”그러다 부승희가 갑작스레 이승우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양시연은 호기심을 숨길 수 없었지만, 부승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다.옆에서 연정훈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 상황을 구경했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말했다.“왜? 내 약점을 들춰내려는 거야?”부승희는 물러설 기미 없이 말을 이었다.“전에 말했잖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한다고.”이승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양시연과 연정훈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이승우의 어색한 침묵을 지켜보았다.그러나 이승우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성격답게 대답을 내뱉었다.“헤어졌어.”부승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그래? 왜?”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그는 결국 혀를 차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부승희의 머리를 밀칠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그때 모연준이 화원에서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이승우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려다 잠시 멈칫하고 다시 넣었다.부승희는 드레스를 이승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동생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아니지, 고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승희는 이승우가 받기도 전에 손을 놓아 종이봉투가 떨어질 뻔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어 앉아 이승우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과 눈을 맞췄다.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그녀의 시선에 연정훈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불편한 상황이 더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조용히 양시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옷 갈아입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