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너의 여동생이 나를 좋아한다고.”그는 다시 한번 부승원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부승원은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내가 이 말을 듣는 이유는 나를 시험해 보려는 거야? 혹시 나중에 너희가 헤어지면 내가 너랑 사이가 나빠질까 봐 확인하려는 거야?”“이승우 미리 말해둘게. 나는 분명히 너랑 사이가 틀어질 거야. 난 여동생 하나밖에 없어. 네가 부승희를 다치게 하면 친구로서도 끝이야. 두 집안은 다시는 엮이지 않게 될 거야.”‘이거 봐. 얼마나 독하냐.’이승우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감정을 즉시 진정시켰다.그녀는 다름 아닌 부승희였고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승희에게 만큼은 상처를 줄 수 없었다.‘넘겨버리자. 어린 소녀의 마음은 언젠가 변할 수도 있어.’부승희가 이승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그는 이런 이유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그런데도 아쉬움이 밀려왔다. 왜냐하면 혹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이승우는 부승원의 말을 듣고 그 시점부터 부승희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과소평가했다. 그녀는 그가 멀리해도 결국 자신에게 다가오는 방법을 찾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 사이의 거리는 좁혀졌다.그는 계속해서 심리적인 방어를 하고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승희에게 끌려 점점 그 궤도에서 벗어났다.언제부터였을까 부승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승우가 제일 먼저 알아챘고 그녀를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그녀의 집 앞에 걸어놓고 싶었다.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점점 혼란스러워졌지만 부승희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비밀로 남게 되었다.그녀의 사랑은 뜨겁고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하늘로 올라가며 떨어질 때조차 빛을 발하고 있었다.이승우는 점점 혼란스러워지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녀의 좋은 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미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을
부승희가 술에 취했을 때 꼭 해변에 가서 조개를 줍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부승원은 무심한 오빠답게 그녀를 데려가서 재우기로 결심했지만 조개를 주러 가자는 제안에는 절대로 응할 생각이 없었다.“됐어. 내가 데려갈게.”그는 습관적으로 말을 꺼냈고 그동안 몇 년간 부승희의 엄마처럼 엉망이 된 상황을 얼마나 처리했는지 모른다.하지만 해변에 도착한 후 부승희는 두 개만 줍고 나서 그만 돌아가자며 이승우에게 업혀 가자고 했다.부승희가 해변에 앉으려 하자 금방 입은 새 옷이 망가질 것 같아 이승우는 머리가 아픈 듯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알았어. 업어줄게. 정말 넌 대단하다.”부승희는 기뻐하며 이승우에게 등을 돌리라고 한 후 그의 등에 올라탔다.“그만 얌전히 있어.”이승우는 그녀가 술에 취해 얌전히 있지 않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을 하며 허리를 굽혀 등을 두드렸다.“조심히 엎어. 너무 세게 움직이면 내가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어.”부승희는 몇 번 찡얼대며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올라탔고 그사이에 계속해서 그가 버틸 수 있을지 물었다.“나 좀 뚱뚱한데...”‘뚱뚱하다니? 어디가?’부승희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엎으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랐다.“부승희 집에서 학대당해?”“응. 맞아.”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오빠에 관한 일상적인 악성 소문을 퍼뜨렸다.“우리 오빠는 밥도 안 주고 항상 나를 학대해.”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냐?”“응. 진짜 힘들어.”“나중에 네 오빠한테 말할게. 집에서 못 살겠다며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엄마도 딸을 원하고 계셔. 우리 집에서는 절대 너한테 그런 일 없을 거야.”그는 말을 이어갔지만 부승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부승희? 잠들었어? 자지 마. 집에 가서 자야지 감기 걸린다.”“안 자.”부승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 자면 됐어.”그는 그녀가 피곤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한
여름의 해는 일찍 떠올랐고 다섯 시가 넘으면 창밖에서 이미 밝은 빛이 비쳤다.이승우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닫고 부승희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번 그녀를 엿보게 되었다.그 해 그녀를 만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희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대방은 괜찮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치 지난 세월의 일처럼 느껴졌고 그때는 오늘 같은 일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부승희는 이승우의 곁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다.전주로 온 지 반년이 넘었고 부승희는 항상 일을 성실히 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 미팅이 없으면 정성스럽게 화장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어린 시절의 ‘거침없음'과 닮아서 그는 그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사실 부승희는 거의 서른이 되었고 이승우도 이미 서른을 넘었다.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그 시절이 이제는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승우가 어렸을 때 부승희에 대한 첫인상은 친구 집의 말 안 듣는 어린 동생이었고 조금 더 커서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성깔이 있는 소녀였다.부승희가 이승우에게 몰래 입맞춤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신경 쓰게 되었다.그때 이승우는 매우 당황했으며 함께 농구나 수영할 때를 빌미로 부승원에게 그녀를 좀 타일러 달라고 간접적으로 물어봤지만 부승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너는 그냥 평범하고 인품도 평범하고 부승희는 아직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너한테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거니 너무 생각하지 마.”‘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부승원은 이승우보다 두세 살 많았고 이전에는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부승원은 연정훈처럼 공부에 몰두한 타입으로 일찍 대학에 진학했다.그래서 부승희의 초등학교 시절은 친오빠가 돌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처음에는 친구 집의 동생을 돌보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부승희가 자신에게 관
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부승희는 두 팔을 가슴 앞에서 꼬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이제 불만 없지?”이승우는 힘없이 대답했다.“없어. 얌전히 있을게.”부승희가 콧방귀를 뀌며 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느긋하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잘 자.”이승우도 그녀가 피곤하다는 걸 알기에 더 붙잡지 않고 조용히 바라봤다.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듯했고 부승희는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왜 그래?”“용 박사가 그러는데 두 시간 후에 네 체온을 다시 재야 한대.”“너 그냥 가. 내가 알아서 잴게.”‘됐어.’이승우의 무심한 말투를 들어보니 스스로 체온을 잴 가능성은 없었다.부승희는 얼굴을 한 번 문지르며 한숨을 쉬더니 거실로 나가 담요를 집어 들었고 그런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그의 침대 옆 안마의자에 몸을 묻었다.“사람을 돕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야지. 아무튼 네가 완전히 나으면 내게 보답하는 거 잊지 마.”이승우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그냥 옆방 가서 자. 의자에서 자면 불편할 거야.”“시끄러워. 잔소리 그만해.”부승희는 자세를 조금 조정한 후 안마의자를 뒤로 젖혔다.“이거 꽤 편하네. 침대보다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이승우는 입을 열려다 부승희가 눈을 감는 걸 보고는 말을 삼켰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는 옆으로 누운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1초 2초... 많은 시간이 흘렀다.부승희는 중간에 눈을 떴다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방금 만든 사골곰탕이 떠오르며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고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뭘 봐? 안 자고?”“이제 잘 거야.”“안 자면 뒤돌아. 나 쳐다보지 마.”그녀가 말하자마자 이승우는 바로 눈을 감았다.‘쯧.’부승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시 눈을 감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사골곰탕은 성산시를 대표하는 음식이었고 이승우의 어머니는 성산시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력 요리가 되었다.물론 어쩌면 그녀가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요리는 이것 하나뿐일지도 몰랐다.들리는 이야기로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던 이승우의 아버지가 바로 이 요리에 마음과 입맛을 빼앗겼다고 한다.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작은 뚝배기에 담긴 국물을 남김없이 비우고는 팔짱을 낀 채 여운을 곱씹었다.부승희는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얼른 눕기나 하라고 했고 그는 순순히 다시 누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에 앉아 있는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너 이거 영상 보고 배운 거 아니지?”“...”“먹어보니까 알겠어. 꽤 잘 만들었더라.”“...그냥 타고난 거야.”“누구한테 배운 거야?”이승우가 갑자기 그렇게 묻자 부승희는 순간 멈칫했다.“내가 먹고 싶어서 배운 거야. 문제 있어?”“그럴 리가 없는데.”그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갈 기세를 보이자 부승희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 충격받고 쓰러지지 않을 자신 있어?”이승우는 눈을 깜빡였다.“왜?”“정말 알고 싶어?”“말해 봐.”부승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해외에 있을 때 배웠어.”해외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승우의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부승희는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잔인한 소식을 전했다.“모연준 씨, 할머니가 성산시 사람이야. 모연준 씨도 이 요리를 엄청 좋아했어. 그래서 우리가 연애할 때 내가 일부러 배워서 해줬지.”‘푹.’마치 가슴 한가운데 칼이 꽂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이승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이제 만족해?”‘굳이 물어보고는.’이승우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승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의사는 곧 도착했다.“보통 감기일 것 같아요. 여름에 온도 차가 심하니 감기 걸리기 쉽습니다.”부승희는 그 큰 웅덩이를 떠올리며 아마도 이승우가 병에 걸린 이유는 그 물 때문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둘 다 바쁘고 세 끼도 불규칙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아프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그러면 일단 열 내릴 수 있도록 수액 놔주세요.”그녀가 말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준비하고 이승우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새벽 4시 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안마의자에 기대어 졸며 지켜보고 있었다.“좀 어때?”“토할 것 같아.”“다 토했잖아? 아까 상황 보니까 이제 더 이상 토할 게 없을 것 같던데?”부승희가 앉은 자세로 물었다.이승우는 대답했다.“토할 게 없으니까 더 힘들어.”“좀 더 지나고 안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다줄게.”부승희가 말했다.“응...”부승희는 다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이승우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조금 기운을 차려서야 말할 힘이 생겼다.“우리 이렇게 보면 서로 의지하는 그런 느낌이네.”이승우는 또 말장난을 쳤다.“난 아니야. 난 전주에 온 뒤로 아픈 적 없잖아. 그런데 너는 두 번째 아니야?”부승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난 정말 두려워. 창업이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질까 봐.”“그건 안 되지. 아직 너와 결혼도 못 했는데.”부승희는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승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됐어.’“그러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네가 해줄 거야?”“내가 한 걸 너 먹을 수 있어?”“당연하지. 독약이라도 먹을 거야.”‘쳇.’부승희는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너도 시켜줄게. 기다려.”시간이 너무 늦었고 경인에 있는 게 아니어서 주문해도 비싼 배달 음식만 가능했고 부승희는 메뉴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르고 있었는데 맘에 드는 메뉴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학생 시절 이승우는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그보다 몇 년 선배인 연정훈과 부승원도 인기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승우를 압도할 수 없었다.가문이 좋고 외모도 뛰어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였기에 어디서든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경인국중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여학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이승우가 누구와 사귀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모두가 빠르게 큰 화제가 되었다.하지만 그 해 운동회 이후 학교 내에서 매우 비정상적이고 중2병 같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부승희가 이승우의 진정한 사랑이며 두 집안은 이미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승우는 반항적이라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 마음속에서는 부승희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해 부승희는 1등은커녕 완주조차 가까스로 할 뻔했다.그때 그녀를 비웃던 그 남자아이는 화를 삼키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그녀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위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부승희의 리듬이 깨졌고 마지막 한 바퀴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부승희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끝났어. 큰 망신이야. 이승우가 치어리더를 데리고 곡 올 텐데.’이승우는 곧 치어리더를 데리고 올 줄 알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허풍을 떨었다고 생각한 듯 치어리더도 친구들도 없이 혼자만 왔다.마지막 한 바퀴는 그가 그녀와 함께 달려줬다.장거리 달리기는 본래 인기가 없는 종목이었지만 마지막 한 바퀴에서 그들 둘만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가장 큰 화제가 되었다.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학교 웹사이트에서 그들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본 순간이었다. 물론 다양한 추측들이 터무니없고 바보 같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계속 그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심지어 다른 계정을 만들어 그 열기를 즐기려 했다.숨이 가쁘고 죽을 것 같았을 때 그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서 달리며 리듬에 맞춰 숨을 쉬고 괜찮다고 달리지 못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10월의 오후는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다.운동장도 덥
부승희는 반쯤 잠든 채 중학교 2학년 때의 운동회를 떠올렸다. 반의 여자아이들은 좀처럼 참가하려 하지 않았지만 최소 인원 규정 때문에 결국 제비를 뽑아야 했고 운 나쁘게도 반우희가 장거리 달리기에 걸리고 말았다.그때 그녀는 그렇게 날씬하지 않았고 뛰는 모습도 예쁘지 않았다. 반에서 한 남학생이 그녀를 좋아해서 온갖 방법으로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부승희가 관심을 주지 않자 그는 점점 비난으로 태도를 바꿔갔다.“부승희, 너 요즘 살찐 거 알아? 뛰는데 다리가 출렁거리더라.”‘헛소리.’부승희는 원래 기가 센 성격이라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을 이끌고 학교 후문으로 갔다. 그리고 그 멍청이를 붙잡아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다.하지만 그 남자애의 말은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다리가 좀 두꺼운 편이라 달리기도 빠르지 않아서 아마 꼴찌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경인국중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은 연결되어 있었고 고등학교는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고등학생들이 구경하러 오곤 했다.그때 부승희는 만약 이승우가 친구들을 데리고 구경 왔을 때 내가 통통한 몸으로 뒤에서 헉헉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창피할까 하고 생각했다.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방과 후 운동장에서 연습하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다만 대회가 임박했을 때도 그녀는 별로 살이 빠지지 않았고 달리기 속도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어느 날 밤 부승희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었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종아리 살을 꼬집어 보니 왠지 우울했다.부승희는 내일 이승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의자가 톡톡 두드려졌고 고개를 돌려보니 위쪽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승우였다.그는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아마 방금 훈련을 마친 듯했다. 그는 웃으며 위에서 쪼그려 앉았고 여느 때처럼 가벼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게
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