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의 폭탄 같은 질문에 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다행히 연정훈의 얼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아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느라 대화 주제를 넘길 수 있었다.상처를 달고 연정훈은 말을 멈췄다.그러나 그 질문에 양시연은 그날 밤 불면에 시달렸다.하지만 불면에 시달린 건 가장 큰 이유는 연정훈의 조건이었다.‘내 돈... 그게 어떤 돈인데.’양시연은 이튿날 아침까지 생각에 잠겼다. 연정훈이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았는데 부승원은 정인 그룹의 법무팀과 프로젝트 책임자를 대동해 이곳을 찾았다.“투자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얘기를 하셨습니다. 추후의 사항은 저희가 맡을 예정입니다.”양시연은 심장이 철렁했다.연정훈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직원이 아직 쉬고 있다고 전해 감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양시연은 책임자와 배틀을 할 수밖에 없었다.중도에 양시연은 작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웠고 비서를 시켜 몰래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그리고 예상한 대화가 흘렀다.“주 팀장님이 그러던데 연 대표님이 30% 아래로 승낙하셨다네요.”양시연은 화가 났다.어젯밤 고작 긁힌 거로 끝내는 게 아니었다!전 남자 친구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더니 다 사실이었다!사무실 안에서 주지한은 부승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연 대표님이 이미 계약서 초안을 작성했다고 하던데 잠시 후 확인해 볼까요?”부승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주 팀장님이 작성한 게 아닌가요?”주지한은 단순한 사람이라 아무 걱정 없이 답했다.“연 대표님께서 다 생각이 있지 않겠어요? 어젯밤 확인하시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작성했나 보죠.”부승원은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사실 그 이유가 아닐 것이다.주지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시연 씨도 참 대담하시지. 듣자 하니 고작 10%에 우릴 보내려고 하다니.”그리고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꿈이 참 야무지셔요.”“아, 참.”주지한이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말했다.“대표님을 직접 체험하러 오게 한 건 미인계 아니에요?”부승원은 대답하지 않았으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
부승희가 말했다.“결정적인 순간에 잠재력을 좀 발휘할 수는 없겠어?”이승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1대4 싸움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거냐?”‘마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처럼 상대를 한 번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여전히 숨을 몰아쉬었다.“어쨌든 넌 정말 한심하다.”“내가 그런 잠재력이 있어도 쓰지 않아. 상대를 다치게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져?”부승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나한테 책임 떠넘기지 마. 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야.”“그럴 줄 알았다. 네 양심 없는 걸 알고 있었다고.”“나...”부승희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위층 창문에서 소리가 나며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뒷마당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부승희와 이승우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둘은 계단 밑으로 몸을 숨겼고 마침 그곳은 위층에서 내려다볼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집주인은 창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부승희는 이승우를 툭툭 찔렀다.“이제 나가야 하는데 네가 부른 사람들은 도착했어?”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갔고 천천히 걸쇠를 풀기 시작했다.그런데 이 자물쇠가 녹이 슬어서 문을 닫을 땐 잘 닫히지만 열 때는 오히려 더 힘들었다.부승희는 살금살금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살폈다.“할 수 있어?”“조금만 기다려.”부승희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으로는 그를 타박하며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길 준비를 하며 그녀에게 떨어지라고 손짓했고 부승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그녀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이승우는 힘을 주어 걸쇠를 당겼다.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난 뒤에야 걸쇠가 풀렸지만 문이 약간 걸려 있었고 이승우는 그제야 이 집 사람들이 왜 마당 문을 닫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미 소리가 난 이상 그는 아예 힘을
부승희는 이승우에게 이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왜 그래? 가게는 저쪽인데.”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쪽에서 건장한 남자 몇 명이 거칠게 뛰어오더니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바로 저 두 명이 돼지 사육사예요. 아마 우리를 신고한 게 저들일 겁니다. 빨리 막으세요.”부승희는 순간 얼어붙었다.‘돼지 사육사? 내가? 난 유명한 축산 기업가인데.’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돌아 그들에게 해명하려 했지만 이승우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처음 이 골목에 들어설 때도 길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손에 이끌려 뛰는 사이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속에서 술이 요동치며 흔들려 더욱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겨우 끝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도 쫓아오는 사람들이 이쪽까지 미리 막지는 않았다.이승우는 방향 감각이 뛰어나 빠르게 판단한 뒤 왼쪽을 선택했다.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부승희는 여러 번 그에게 무언가를 물었지만 정신없이 뛰는 사이 그의 대답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달리고 또 달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이대로라면 토할 것만 같았다.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머릿속에 7~8년 전 북미에서 보냈던 휴가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때도 그랬다.무료한 하루를 보내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에 나가려 했지만 동행한 사람 중 누구도 선뜻 따라나서지 않았다. 결국 이승우만 그녀에게 끌려 억지로 함께 나왔다.그날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고 그는 케이크를 사러 갔다. 그런데 부승희가 상점에서 나오자마자 거리 한쪽에서 폭동이 일어났다.사람들이 무서운 기세로 몰려왔고 그녀는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있는 앞쪽에는 안전한 것을 떠올렸고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점점 커지는 총소리와 몰려오는 인파에 좁은 거리에서 압사당할 수도 있는 위험도 있었다.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받았지만 이승우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소음 속에서 간신히
전주에 양육을 하러 온 부승희와 이승우는 고향을 떠난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성격상 여린 타입도 아니었고 가정에서 애교 많은 사람도 아니어서 반년이 넘도록 집에서는 전화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남녀 관계를 떠나 같은 지역 출신들이 만나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일이지만 더구나 둘은 함께 자라난 사이였고 큰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부승희는 가끔 전주에서 돼지를 키우는 일이 돈을 벌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자 어린 시절처럼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이승우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일시적인 취미인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진지하게 살아갈 결심을 했는지 궁금해졌다.지켜본 결과 부승희보다 이승우가 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돼지를 양육하는 테스트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항상 감독을 맡았고 판매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이미 해외와의 거래를 성사했다.부승희는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배여진이 보낸 메시지를 꺼내어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평온하게 잠을 청했다.그녀는 조용히 있었고 이승우도 더 조용했다. 더 이상 그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7월 초에 해외 대표가 협상을 위해 찾아왔고 그들의 첫 번째 대형 거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성사되었다.부승희는 손을 휘둘러 팀 전체를 초대해 저녁을 준비했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일행은 급히 흩어졌다.이승우는 마치 집안일을 하는 사람처럼 술을 적게 마시고 부승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술이 깰 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는 그녀를 지켜보며 뒤따라갔다. 부승희는 앞에서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나의 돼지들 사랑해.”이승우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낮게 웃었다.“정말 그렇게 좋아?”부승희는 돌아서며 이승우를 마주 보며 걸어갔다.“이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우리가 예전에 계획했던 3년 계획이 조기에 달성된 거야!”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전주에서 돌아온 후 배여진은 조용히 떠났다.이승우의 말에 따르면 아마 이혼하러 돌아간 듯했고 선기현이 직접 와서 그녀를 데려갔다고 했다.“직접 데리러 왔다면 그래도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거 아니야?”부승희가 말했다.이승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건 감정이 남아서가 아니라 당장 이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지.”‘쓰레기 같은 남자.’부승희는 거칠게 욕을 퍼붓고는 고개를 홱 돌려 물었다.“야 너랑 선기현 씨 친하잖아. 근데 너한테 밥 안 사줬어?”“사줬지. 며칠 전에 도착해서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했어.”“근데 왜 안 갔어?”“나는 흠집 있는 친구 안 사귀어. 깨끗하게 살아야 하니까.”부승희는 어이없었다.“...”‘멍청이.’배여진과 선기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이승우와 부승희의 반면교사 같아서 이승우는 괜히 불안해졌다.그 골칫거리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두 건물에서 키우던 돼지들이 비정상적으로 집단 폐사했다. 게다가 다른 두 곳에서는 식품회사가 찾아와 협력을 논의하면서 일이 급증했다.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한 명은 반바지 차림으로 회의실에서 협상하고 다른 한 명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돼지 수의사들과 함께 치료에 매달렸다.여름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날씨는 더욱 후덥지근해졌다.부승희는 돼지 전염병 문제를 해결한 후 사무실에서 이승우와 협력 건을 논의했다.그녀는 파초심 두 개를 가져와 하나를 이승우에게 건넸다.이건 열대 지역에서 가져온 거였는데 돼지들에게 먹일 수는 있지만 돼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부승희는 두어 번 먹어보니 수분이 많아서 그런지 꽤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이승우는 한입 베어 물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쓰레기통에 던졌다.“돼지도 안 먹는 걸 왜 먹어?”이승우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부승희는 찌꺼기를 뱉으며 말했다.“나중에 남편을 고를 때 ‘파초심을 좋아할 것'이라는 조건을 꼭 추가해야겠다.”이승우가 움찔했다.
저녁 10시.부승희는 농장에서 자리를 찾아 뜨끈한 만둣국을 한 입 크게 넣었다.멀지 않은 곳에 운전기사가 차를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게 보였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홀로 도망 다니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이승우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전화를 돌렸다.“오빠, 적당히 해. 너무 과하게 하지 말고.”부승희의 말에 이승우는 그 앞으로 걸어와 만둣국을 슬쩍 바라봤다.“더 있어?”“아니. 태오 씨가 마지막 하나 남은 만둣국 사준 거야.”정태오는 농장 경비원이었는데 스무살은 막 넘긴 순수한 청년이었다.부승희는 국물을 들이켜며 뿌듯해했다.이승우는 부승희가 대체 어느 부분에서 뿌듯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만둣국을 먹게 돼서 뿌듯한 건가?이승우는 부승희의 앞으로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나 두 개만 줄래?”“싫어. 나 먹을 것도 부족하단 말이야.”이승우는 말이 없었다. 그저 그 옆에 놓인 숟가락으로 만두 하나를 훔쳐 입에 넣었다.“오빠!”“나 경찰에 신고했어.”이승우는 부승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부승희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왜?”“그 사람들이 이 야심한 밤에 무리 지어 다니며 바가지를 씌우는 행위가 합법은 아니잖아.”이승우는 어느새 만두를 두 개째로 입에 넣었다.부승희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들끼리 하산하다가 저 무리를 만났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이승우가 세 번째로 만두를 훔치려 했다.부승희는 모기를 때리듯 이승우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깜짝 놀란 이승우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다툼이라도 하려는데 황규식이 이승우를 향해 걸어왔다.이승우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창피한 줄도 몰랐다.“무슨 일이에요?”황규식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견인된 차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급하게 차량을 구해뒀는데 오늘 밤 떠나실 겁니까? 아니면 하룻밤 묵을 겁니까?”“아니에요. 내일
부승희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그런데 이승우가 대신 외투를 고쳐 덮어주며 다시 제 어깨에 눕혔다.“좀 더 눈 붙여. 도착하면 깨워줄게.”부승희는 정말 피곤했기에 군소리 없이 다시 머리를 기댔고 제 어깨에 올라온 이승우의 손을 휙 내쳤다.“잠시만 눈 좀 붙일게.”부승희는 다시 눈을 감기 전에 저 사람을 혼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승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안심해.”“응...”차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창가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다.고르게 들려오는 부승희의 숨소리에 이승우는 제 어깨를 고정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렇게 부승희가 제 어깨에 기대 잠을 자던 게 언제 적 일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이승우는 여유를 만끽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고개를 드니 기사 남몰래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게 보였다.이승우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더 경계심을 높여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기사는 껌을 꺼내 이승우에게 권했다.“저는 괜찮습니다.”기사는 덤덤하게 껌을 다시 내려놓았고 이따금 말을 걸었다.부승희는 말소리가 거슬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이승우가 말했다.“기사님, 제 여자 친구가 잠이 들어서요.”‘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이승우는 겨우 표정을 풀었으나 허리에 따끔 하고 고통이 느껴졌다.“쓰읍.”이승우가 아픈 곳을 살살 매만지는데 부승희가 나른해진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지금 또 어디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거야.”그러자 이승우는 마른기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잠든 거 아니었어?”“...”[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만큼만 넘어가 줘.]마지막 한 마디는 이승우가 타자해서 부승희에게 보여줬다.부승희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다시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나 다시 잔다.”“그래그래. 푹 자.”차량은 계속 달려 농장으로 향했고 이승우는 직원에게 문자를 보내 여러 사람을 불러 농장 입구에서 대기하라고 했다.바가지 씌우는 것도 모자라 부승희를 힐끔거리는
“두 분 택시 잡으려는 거죠?”가장 앞장선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평범한 택시 기사 같지 않은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이승우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따로 부른 차가 있으니 괜찮습니다.”그 말에 기사는 바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긴 그런 평범한 차량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우리도 엄연히 택시 운전하는 사람인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우리 차에 타도 다 똑같아요.”그때 부승희의 핸드폰이 울렸고 콜택시 운전기사가 걸어온 전화였다.“손님, 차량이 안으로 진입이 불가능해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데 차라리 다른 차량 잡는 게 어때요?”부승희는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이젠 하다 하다 택시 운전기사들도 독점이라는 걸 하는 모양이었다.그들은 두 사람이 콜택시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이승우는 아무나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기사의 더러운 시선이 자꾸 부승희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생각을 바꿨다.이 야심한 시간에 본인 혼자였다면 몰라도 지금은 부승희가 옆에 있었다.저 사람들은 말이 좋아 운전기사였지 독점 운영하는 걸 보아 어쩌면 깡패 일까지 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승우는 먼저 상황을 안정시키고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 생각되었다. “그쪽 차에 타면 바로 떠날 수 있어요?”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두 사람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손님, 우린 미터기로 계산 안 해요. 인수로 계산하지.”“네, 상관없어요. 얼마면 되는데요?”“어디로 가세요?”이승우는 주소를 말했다.“한 사람 오만원.”‘세상에 말도 안 돼.’목적지에서 가백산까지의 거리는 콜택시로 고작 만원이 되지 않는 거리였다.비록 두 사람에게 있어 오만원과 만원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바가지 씌우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부승희는 몰래 이승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이승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부승희의 손을 꼭 잡아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가백산은 낮다면 낮고, 높다면 높은 해발이었다.이승우도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었으나 부승희와의 등산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뒤로는 처음이었다.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고 부승희는 등산하기 싫어 차량에서 버티고 있었다.이승우는 차 안으로 들어가 부승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승희야.”그러나 부승희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산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예쁘다는데?”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이승우는 주변을 뒤적이다가 얇은 잡지를 돌돌 말아 부승희의 귓가에 대고 살살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부승희는 결국 고개를 들어 이승우와 시선을 마주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잡지를 휙 던졌다.“그때의 넌 작은 산도 등산하기 싫어했잖아.”이승우의 말에 부승희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차 안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던 이승우와 따듯하던 바람이 온몸을 간질거리게 했다.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승희는 이승우가 정말 자신의 귓가로 다가온 줄 알고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눈을 뜨니 돌돌 만 잡지가 보였고 순식간에 실망이 찾아왔었다.부승희는 이런 이승우가 참 미웠다.하지만 결국 부승희는 이승우와 함께 등산하게 되었다. 등산하는 내내 수많은 친구가 이승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해 부승희는 또 한 번 화를 내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또 부승희를 달래주었고 부승희를 달래주기 힘든 여왕 같다며 별명까지 지어주었다. 부승희는 서운했다. 하고 싶지 않은 등산도 이승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왔는데 또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으니. 그러나 이승우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친구들의 요청에 응했다.하지만 이제 이승우의 옆엔 오직 부승희 뿐이었다.산을 타고 올라가니 작은 절이 보였고 이승우는 밖에서 짧게 기도를 할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부승희는 이승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뭐해? 안으로 들어와서 향 피워야지.”‘여기까지 와서 안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이승우는 사실 무신론자였으나 부처님 앞에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