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양시연이 막 다리를 들려던 순간 연정훈이 무릎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아픈 듯한 소리를 내자 본능적으로 힘을 약간 풀었다.바로 그 순간 양시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들어 연정훈의 얼굴을 내리쳤다.연정훈이 얼굴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양시연의 손톱이 연정훈의 반창고를 긁으며 상처가 나서 피가 났다.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양시연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공격했다.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양시연을 완전히 풀어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결국 탁자 근처까지 밀려났다.양시연은 재빨리 가방을 집어 들고 연정훈의 머리를 향해 세차게 휘둘렀다.연정훈은 당황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붙잡으려다 스스로 억제하며 그저 가만히 서서 타격을 견뎠다.순간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양시연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연정훈을 탁자 위로 밀어붙이고 손톱이 다치든 말든 그의 얼굴을 다시 내리쳤다.연정훈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을 감고 양시연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양시연이 지쳐 멈추려 할 때 연정훈이 정확히 양시연의 두 손목을 붙잡고 미간을 찌푸렸다.양시연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연정훈의 잘생긴 얼굴에는 양시연이 남긴 상처 자국들이 남아 마치 고양이에게 할퀸 듯했다.양시연은 내심 후련해졌고 속에 쌓인 화도 어느 정도 풀렸다.“놔요!”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화 다 풀렸어?”“놓으라고요!!”그녀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연정훈은 양시연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은 한참 동안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양시연의 손목을 놓아주었다.‘때리고 싶으면 때려.’마음대로 하라는 듯하였다.양시연은 손을 들어 옷과 머리를 정리하려 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다시 때릴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않았다.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조금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표정을 유지하며 웃음을 참았다.‘흥.'“피할 줄도 아
“카메라 영상을 가지고 나를 협박할 생각이야?”“저의 기분에 따라 달라요.”양시연은 한 글자씩 천천히 또렷하게 말했다.“알았어.”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위층으로 같이 가자.”“싫어요!”양시연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증거를 주려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사건을 만들려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여기서 기다려.”양시연은 속으로 연정훈을 비웃었다. 누군가 증거를 요구하는데도 그가 기다리라고 말하는 모습이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잠시 후 연정훈은 영상 복사본을 양시연에게 내밀었다.양시연은 물건을 받자마자 그대로 떠났다.연정훈은 술기운이 올라 머리가 아찔하고 시야가 흐려지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따라가며 그녀에게 사람을 보내줄지 고민했다.양시연이 계단 아래에 다다르자 연정훈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예요?”“사람을 보내서 집에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양시연은 퉁명스럽게 거절하며 위에서 아래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의 엉망진창인 얼굴을 보고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양시연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본 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거실의 장식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응시했다.그 순간...연정훈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그때 나비가 다가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연정훈에게 고개를 내밀고 연정훈을 바라봤다.연정훈은 미간을 찡그리며 나비를 노려봤다.“뭘 그렇게 봐?”나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쳇, 못생겼다!정원에서 양시연은 차를 몰고 빠르게 떠나갔다.속에서 불끈 화가 치솟아 운전이 거칠어졌고 강남시티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경찰서로 향했다.하하.‘내가 나중에 복수한다고 생각하겠지?’양씨 성을 가진 후 양지원이 가르쳐준 첫 번째 교훈은 바로 ‘복수는 망설이지 말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액셀을 다시 밟으며 목적지에 도달했다.경찰서에 도착한 양시연은 말없
양시연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실망스러운 표정을 억지로 정리한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문을 열자마자 양지원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쁘면 굳이 안 와도 돼요.”‘응?’양시연은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양지원은 부드럽게 말했다.“나 화 안 났어요. 왜 화를 내겠어요. 석진 씨는 일에 집중하세요.”양시연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이건 누가 봐도 애교 섞인 말투였다.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대가 양석진이 분명했다.양지원은 거실 창가 쪽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 양석진의 대답 때문인지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댄 채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잠시 후 양석진이 말을 마친 것인지 그녀는 짧게 답했다.“마음대로 하세요.”그리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예상대로 양석진은 또다시 길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양시연은 양지원이 손을 바꿔 휴대폰을 바꾸어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소파 팔걸이에 있는 장식 진주를 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몇 초 후 양지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무심한 얼굴을 유지했다.“그래서...몇 시쯤 집에 올 거예요?”“...알겠어요.”분명히 기분이 좋아 보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양지원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리를 교차하며 상큼한 멜론 한 조각을 집어 여유롭게 입에 넣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고 조용히 헛기침했다.양지원은 놀라 고개를 돌리더니 양시연을 발견하고 약간 어색해졌다.“언제 들어왔어?”연정훈으로 인해 엉망이었던 양시연의 기분이 몇 분 사이에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그녀는 두 손을 뒤로 하고 생각하는 척했다.“조...좀 전부터요.”양지원은 침묵했다.“...”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으로 불러 앉혔다.양시연은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테이블 위 초대장을 슬쩍 보았다. 순간 떠올랐다.“엄마, 다음 주 수요일이 생신이죠?”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실 거예요?”양시연이 물
“세상에!”“너 누구랑 싸운 거야?”연정훈은 식탁 옆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집에는 그와 김세연 단둘뿐이었고 김세연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이건 긁힌 거지? 아니, 아니야. 이건 날카로운 걸로 베인 거 같은데!”김세연은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연정훈의 얼굴에 이런 상처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웠다.김세연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식탁 쪽으로 살짝 밀었다.“엄마, 밥이나 드세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요.”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뭐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이 멀쩡하던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됐네!”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된 거야. 어릴 때 말썽 피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네 얼굴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알지 않니?”연정훈은 무심하게 국물을 떠주며 다시 말했다.“밥이나 드세요.”김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 승진한 후로 명절 때나 겨우 집에 돌아오고 나 혼자 남겨졌잖니. 너도 집에 안 오고.”연정훈은 김세연을 한 번 보며 말했다.“그러면 엄마도 아버지 따라 세운으로 가시면 되잖아요.”“싫어. 그곳은 너무 황량해서 경인처럼 살기 좋은 데가 아니야.”“그러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서 아버지를 신고해요. 그러면 강등돼서 다시 경인으로 오겠죠.”김세연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전 그대로 철없기야.”김세연은 진지하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이 얼굴에 난 상처 혹시 여자한테 긁힌 거 아니야?”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들었다.“네.”김세연은 눈을 감고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속으로 외쳤다.‘세상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드디어 아들이 여자와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몇 년 전 양시연이라는 아이가 떠나고 소현주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김세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혹시 몰라서 양시연은 사장에게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계단에서 김세연과 마주쳤을 때도 양시연은 여전히 태연했다.하지만 김세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했다.‘이게...’정오에는 연정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 오후에 양시연을 만났다.양시연이 귀국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혹시 연정훈의 새로운 여자도 양시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했다.만약 정말 양시연이라면 연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분명 같은 편이었다.김세연은 계단 위에서 발끝을 들고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이모, 왜 그래요?”같이 온 조카딸 연희가 물었다.김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위층에 올라가 보자.”“좋아요.”아래층의 방에서 양시연은 유리창 너머로 위층을 잠깐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물건이 많아 사장이 먼저 도감으로 보여주고 실물을 가져오기로 했다.“이걸로 할게요.”양시연은 핑크 다이아몬드로 된 플라밍고 모양 브로치를 골랐다.“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잠시 후 사장이 몇 가지 고급품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양시연이 고른 브로치는 없었다.양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진 사장님, 제가 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볼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자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양시연이 양씨 가문의 집사로부터 소개받은 손님이었기에 사장은 양시연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데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저와 같은 제품을 고른 사람이 있네요.”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2층을 지나왔는데 김세연 씨와 함께 온 아가씨가 한눈에 반해 잠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곧 다시 가져다드릴 겁니다.”하하.집안에서 귀염받다 보니 상대방이 당연히 양보해 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양시연은
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이 퇴근하자마자 양지원이 웃으며 오후의 해프닝을 이야기했다.양지원은 김세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연정훈이 겨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또다시 너에게 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물었다.“연정훈을 때렸다고 들었어.”양시연은 야식을 먹으며 대답했다.“정훈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양시연의 이런 모습에 양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양지원은 이제야 자신의 딸답다는 생각에 오후에 김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김세연은 또 양시연이 어떤 남자에게 의지하는 거로 의심하다니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푹 자고 내일은 기운 차려야 해.”양지원은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알았다는 신호를 보이며 웃었다.며칠 동안 연정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마 다친 걸 치료하느라 바쁜 듯했다.‘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양시연은 방으로 돌아와 반우희에게 전화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생일 파티에 오라고 부탁했다.반우희가 말했다.“내일 승주도 생일이에요!”양시연은 답했다.“잘됐네요. 애들 데리고 와서 함께 놀고 나중에 우리끼리 승주 생일 파티도 해요.”“좋아요!”통화를 끝낸 후 양시연은 꿀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반우희가 먼저 도착했다.아이들이 키가 조금씩 자랐지만, 여전히 양시연을 ‘누나’라고 부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양씨 가문은 인원이 적다 보니 집안이 이렇게 맑고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니 공기마저 상쾌해지는 듯했다.양지원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양혁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녀석, 자기 엄마 생일인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니.’양시연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양지원의 쓸쓸한 표정을 눈치챘다. 그녀는 조용히 양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양혁수는 드물게 즉시 답장을 보냈다.[왜 나 보고 싶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엄마가 널 보고 싶어 해!]잠시 정적이 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주와 아이들은 숙제하러 방으로 돌아갔다.반우희는 부승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고 부승원에게 자리를 찾아준 뒤 열심히 문제지를 풀었다.부승원은 그제야 반우희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자신이 반우희에게 잘해주는 날이면 반우희는 보답을 하기 위해 문제지를 푸는 것이었다.‘정말 바보 같긴.’“2년 안으로 사법고시 넘을 자신 있어?”반우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자신 있습니다!”“사법고시 넘으면 뭘 할 건데?”“음... 사건 받아야죠?”“...”“꿈도 야무져. 그렇게 쉽게 사건 의뢰가 들어올 것 같아?”반우희는 또 바보같이 웃었다.그때, 부승원은 부모님이 했던 말이 떠올라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 있어?”“지금 하고 있잖아요?”“그거 말고. 좋은 대학 다니고 싶은 그런 거 말이야.”“에이. 학력도 안 좋은데 누가 절 받아주겠어요?”“그게 뭐가 중요해. 너만 좋다면 내가 다 해줄 수 있어.”“어느 대학인데요?”“세계 어디든.”반우희는 멈칫하더니 펜을 내려두고 부승원을 바라봤다. 왠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날... 해외로 보내려는 거예요?”반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연애를 실컷 하고 해외로 보내, 반 헤어짐 상태로 끝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설명하려고 했으나 말 대신 볼을 쭉 잡아당겼다.“해외 연수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금 성적으로는 돈 가득 쏟아부어도 안 돼.”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그쵸? 아무리 나한테 반했다고 해도 그렇게 뭐든지 해주면 안 되는 거죠.”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렸다.“해외 연수 가고 싶어?”부승원은 다시 떠보듯 물었고 반우희는 당황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요.”“왜?”반우희는 대답 대신 노래를 불렀다.“동해 물과 백두산이...”“...”부승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반우희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요?”반우희가 다가오자 희주는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비밀이에요.”반우희는 몰래 혀를 찼다.다른 한편, 배가 부른 승주는 애어른처럼 요즘 가정 상황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우리가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신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모두 한 사람 덕분이죠.”그러자 반우희가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바로 누나... 의 남자 친구 덕분이에요!”“...”“야!”반우희는 승주는 슬쩍 노려봤으나 승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리고 몰래 맥주 맛을 보더니 쓴맛에 혀를 두르며 말했다.“매형, 솔직히 우리 셋이 발목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 말에 집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꼬맹이들은 모두 부승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털털한 반우희와는 달리 세 아이는 아닌 척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다.그래서 자신의 돈을 쓰는 게 불편하고 누나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부승원은 가재를 입에 넣더니 승주와 짠을 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 실력으론 너희 셋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승주는 몰래 숨을 돌리며 부승원과 하이 파이브를 했다.식사 막바지에 다다르니 가재는 줄지 않고 오로지 대화만 오갔다.반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찾았다.희주도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웠다.부승원은 승주가 아직도 저에게 할 얘기가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누나한테 들어보니 매형 어머니가 오늘 누나 만났다면서요?”부승원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말했다.“그래. 조금 긴장한 건지 딸꾹질했는데 그것도 너한테 말한 거야?”“별건 아니고, 너무 창피했다면서 누나가 용기를 달라고 했어요.”“어머니가 우희 괴롭힌 거 아니야. 우희가 지레 겁을 먹은 거지.”“누나는 언젠간 삼촌 어머니가 드라마처럼 수표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에 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 누나는 어떻게 할 대책이었는데?”“대책이라
부승원은 승주의 초대를 받고 반우희의 집으로 향했다.집 안은 벌써 떠들썩했는데 승주와 반우희가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이 달랐기 때문이었다.“마늘 향이 제일 맛있어!”“에이 마라가 찐이죠!”승주가 반우희를 타이르듯 말했다.“마늘 향 먹으면 양치해도 마늘 향이 남는데 남자 친구랑 뽀뽀할 수 있겠어요?”“...”반우희는 순식간에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틈을 타 승주가 마지막 승부사를 날렸다.“그러니까 내 말이 맞아요. 우리 마라 맛으로 해요!”“마늘 맛 조금만.”반우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마늘 맛도 조금 해줘. 너희 누나 정말 먹는 거에 진심이라니까.”부승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 목소리에 승주와 반우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반우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왔어요?”승주는 그사이에 삶은 가재를 한입 먹으며 부승원을 불렀다.“삼촌, 여기로 와서 앉아요. 동준아, 우리 매형한테 술 따라드려!”“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승주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삼촌이었다가 매형이었다가 호칭 좀 통일하면 안 돼?”“나한테는 삼촌이지만 누나의 남자 친구일 때는 매형이니까 틀린 거 없잖아요!”승주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어휴. 좀 조용히 해!”그러나 승주는 이런 일로 풀이 죽을 아이가 아니었고 바로 가재를 입안 가득 넣었다.부승원은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고 소매를 걷어붙였다.“남은 거 뭐 있어? 내가 할게.”그러자 반우희가 말했다.“오이무침할 줄 알아요?”“응.”“그럼 부탁할게요.”주방에는 거실의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온도가 아주 뜨거웠다.부승원은 언젠간 이 집의 가전제품을 다 새것으로 갈아주겠다고 몰래 다짐했다.손놀림이 빠른 부승원은 빠르게 오이무침을 완성했다.반우희는 가재를 입맛별로 나눠 상에 올렸고 작은 상이 부러질 듯한 한 상 차림이 완성되었다.부승원은 그전에도 여러 번 집을 오갔던 터라 이젠 익숙하게 밥상 앞에 앉았다.희주는 부승
날이 어두워지고 부승원은 본가로 향했다.부승희는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원을 발견한 채애정은 활짝 웃으며 손 씻고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약속인 것이냐?”아버지 부형석의 질문에 부승원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대답했다.“네.”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니 부모님은 부승원을 잡아 둘 수가 없었다. 대신 꿀물로 속을 채우게 했다.“네 어머니가 오늘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어. 복스럽게 생겼다던데.”“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예쁘던데 나이가 좀 어려요.”채애정의 말에도 부승원은 묵묵히 꿀물을 마시며 대꾸하지 않았다.한참 뒤 부혁석이 물었다.“그 아이랑은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무슨 말씀인지?”부형석은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바라봤고 채애정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 마요. 우리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그래요?’부형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질문을 이어가기로 했다.“나와 네 어머니의 생각은 그 아이가 나이가 어리니 네 옆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해외 연수를 다녀와 몇 년 뒤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그러자 채애정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본인 생각이면서 왜 나까지 함께 묶고 그래요?’부형석은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게를 잡았다.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이런 부승원의 모습에 채애정과 부형석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도우미 아주머니는 내려놓은 잔만 챙겨서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도련님 부승원에게 쉽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부승원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시선에 두 사람은 절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졌다.“몇 년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가 결혼하면 그래도 짝으로 걸맞으니 창피하지 않으실 거고, 내가 그동안 견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실 거잖아요. 그 아이는 돈과 명예를 가졌으니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그렇죠?
부승원의 사무실에서.소파에 앉은 반우희는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처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가 너무 웃겨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당당하더니 우리 어머니 만나고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반우희는 영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요...”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렇게 넋이 빠진 모습으로 있지 말고 여기로 와.”반우희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그리고 턱받침을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어머님이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면 어떡해요?”부승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마음에 안 들면 뭐 어때?”반우희가 입을 삐죽이더니 평소대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이게 다 변호사님을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부승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정말? 네가 내 생각을 했다고?”반우희는 작게 콧방귀를 뀌더니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어머님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변호사님이 날 만나지 못할 테니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으로 조금 더 당겨 앉으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이도 들고 나한테 이렇게 돈도 많이 쏟았는데 결혼까지 가지 못하면 변호사님만 억울하잖아요.”그리고 반우희는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꽤 양심 발언이네? 내가 억울할 가봐 걱정도 하고?”반우희는 다시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난 늘 그랬어요. 다른 사람한테 빚지고는 못 살아요.”“내가 제안 하나 할까?”부승원은 펜을 내리고 옆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 아마도 옆방에 계실 거야. 그러니까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그 말에 반우희는 바로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이에 부승원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결국 너도 말뿐이네.”반우희는 한숨만 풀풀 내쉬었고 더 고민에 휩싸였다.‘정신 차려 반우희! 너 왜 이렇게 나약해졌어?’그리고 머리를 싸매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승주한테 조언을 받아야겠어요.”‘승주한테 조언을 받는
딸꾹!딸꾹!반우희는 부승원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도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부승원은 몸을 돌려 반우희를 살폈다.“왜 그래?”‘그게 아니라.’반우희는 서둘러 부승원을 당겨 채애정의 시선을 가렸다.지금 딸꾹질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졌을 게 뻔했고 못생기게 보일 수는 없었다.부승원은 자기 셔츠 끝자락을 잡은 반우희를 보며 빠르게 자리에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 그리고 채애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우린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게...”채애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부승원이 반우희를 챙기느라 손이 부족하자 채애정은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우희 씨, 괜찮아요?”“딸꾹... 네! 딸꾹... 괜... 찮습니다!”“...”부승원은 물을 건네받고 직접 반우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병원 갈까?”반우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어머님만 가면 괜찮아질 거예요.’부승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부승원이 옆에 있었기에 반우희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드디어 딸꾹질을 멈출 수 있었다. 이에 채애정이 다가가 또 말을 걸었다.그런데!반우희는 더 긴장되어, 또 딸꾹, 하고 딸꾹질하고 말았다.“...”딸꾹!딸꾹!결국 다시 시작이 되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긴장이 되어 딸꾹질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거의 자신의 품에 가두다시피 하며 채애정을 향해 손을 저었다.채애정은 더 이상 대화는 무리라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먼저 가볼게. 내가 뭐 겁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란 거야?”“오신다고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정말 연애 좀 한다고 이 엄마는 뒷전인 거니?’‘어휴. 그래도 드디어 연애한다니 다행이긴 해.’채애정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걸었다.그때, 반우희가 빠르게 부승원의 셔츠를 잡아당겼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려 반우희가 핸드폰에 적은 문자를 확인하고 채애정을 다시 불렀다.채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부
“이름은 뭐예요?”“반우희입니다. 넉넉할 우와 기쁠 희입니다.”“그래요?”“그럼, 나이는?”“스물두 살입니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반우희는 도시락을 손에 쥐었지만 한 입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물어보는 질문에만 꼬박꼬박 대답했다.“괜찮아요. 편하게 먹어요.”채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크게 한 입 떠먹었다.채애정은 다정한 말투로 또 질문을 이었다.“승원이가 없어도 혼자 사무실에 있었던 거예요?”반우희는 채애정이 아직 본인과 부승원의 사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조금 머리를 굴려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평소에 사내 식당을 이용하고 자주 사무실에 오는 않는 편은 아닙니다.”채애정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며 반우희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반우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아니에요.”채애정은 동그란 얼굴의 반우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부승희가 반우희에 대한 좋은 말을 많이 했기에 좋은 인상도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우희의 나이를 들은 채애정은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제 아들이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부승희의 말 대로 그동안 할 건 다 하고 산 모양이었다.게다가 그 깔끔하던 아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것도 용납하고 있다니,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그래 스물둘이면 미성년자도 아니고 괜찮지, 뭐.’반우희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채애정이 계속 반찬을 집어주는 덕에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채애정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뭐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수표 한 장 던져주면서 아들이랑 헤어지라는 전개는 아닌 것 같은데.’‘설마 내가 마음에 드는 건가?’‘음... 머리를 굴리자. 머리를!’그러나 그렇다 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위가 감당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반우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내가 가서 밥 먹여줄까?”“좋죠.”“그래.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연정훈이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치자 양시연은 다급하게 말렸다.“그러지 마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그럼 밥 먹을 때 영상 통화할까? 같이 먹고 싶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좋아요.”한참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다가 회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양시연은 방금 주지혁과 만났던 사실을 입에 올렸다.“지혁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조이현을 말리지 못한다고 해도 간섭은 할 거예요. 앞으로도 조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조이현이 가문을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애초에 조씨 가문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게 한 건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주지혁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바로 조이현을 처리할 것이다.하지만 주지혁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오늘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는 건 되려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연재혁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있는데 더 이상 조씨 가문이 논란을 만들게 하지 막아야만 했다.만약 주지혁이 계속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고 굳이 논란을 피운다면 그건 결국 본인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이러한 얘기를 했었고 양시연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시켜 주 대표 조사하라고 해.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주는 건 좋은 데 우리가 위험해져서는 안 되잖아.”“나도 알아요.”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양시연도 회사에 도착했다.이어 점심을 주문하고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반우희는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요즘엔 사내 식당도 아닌 양시연의 사무실로 직행했는데 양시연은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혼자 먹기엔 버거워 반우희와 함께 나눴었다.그런데 멀리서 보니 오늘엔 연정훈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반우희는 도시락을 들고 양시연의 사무실로 향하려다가 부승원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오늘 부승원은 점심 약속이 있어 사무실을 비웠다.그래서 부승원의 큰
점심시간이 되자 양시연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주지혁 앞에서 게걸스레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간단히 배만 채우며 바로 조이현이 신고한 일을 입에 올렸다.주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이 일은 정말 나도 몰랐어.”양시연은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현 씨가 이러는 건 정말 난동이고 민폐예요. 난 이현 씨에게 잘못한 거 하나 없고 잘못이라면 오히려 두 사람이 내게 저지른 거죠.”주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아, 내가 미안해.”“지난 일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제발 본인 아내 간수를 잘하라고 말하러 왔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말아줘요.”양시연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손끝을 바라봤다. 과거의 양시연은 일하는 데 불편하고 집안일하는데 거슬린다며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그리고 차라리 네일 하는 돈으로 간식이나 사는 게 이득이라 했다.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게 더 현실적이라며, 힘들게 돈을 버는 주지혁을 마음 아파하며 선물한 팔찌도 마다했었다.돈 모아서 결혼하자고 말했던 과거 양시연을 떠올리며 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쓴 차를 들이켰다.“돌아가서 잘 얘기해 볼게.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그러길 바랄게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우린 이제 책임질 가족도, 사업도 있는 사람이에요. 조씨 가문은 경인에서 좋은 입지를 가졌고 지혁 씨도 승승장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자고요.”‘행복이라...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미친 조이현은 평생 내게 들러붙으러 작정을 한 것 같은데.’주지혁은 더 올라가려면 피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죽을힘을 다해야 조이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주지혁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양시연이 본인을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연정훈의 부담을 덜어주려 온 것 같았고, 진심으로 연정훈을 아끼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는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