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걸은 이철수를 완전히 컨트롤했으나 이철수는 여전히 욕을 읊조리고 있었다.그러자 연명걸은 이철수의 머리에 찬물 끼얹었고 이철수는 드디어 조용해졌다.옆에 선 안시연은 거의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연명걸의 옷도 물에 흠뻑 젖어버렸으며 그는 몸을 돌려 안시연에게 대신 사과했다.“안시연 씨, 죄송해요. 제 부하 녀석이 과음했나 봅니다.”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그제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술 좀 마셨다고 행패를 부려? 이 세상이 다 네 것이냐고!’안시연은 차가운 얼굴로 연명걸의 말을 무시했고 가방에서 쏟아진 물건을 주워 담았다.연명걸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로 계속 사과를 했다.하지만 몸을 일으킨 안시연은 쌀쌀맞게 말했다.“연 대표님은 직원 관리나 똑바로 하세요. 그러다가 대표님까지 크게 다쳐요.”연명걸은 할 말을 잃었다.뒤에 선 이철수가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화장실을 나서는 안시연을 보며 연명걸도 욕을 입 밖으로 뱉었고 주먹을 날려 이철수의 얼굴에 꽂았다.‘이런 멍청한 녀석!’이철수는 갑작스러운 주먹에 많이 당황해했다.안시연은 화장실 밖으로 달려가 사람이 없는 홀에서 거친 숨을 내쉬었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무서운 게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몸이 떨렸다.이런 자리에서 소리를 질러 일을 크게 만든다면 그 누구에게도 좋은 점이 없었다.연씨 가문은 양주에서 꽤 실력이 있는 가문이었다. 이 일이 공론화되고 연정훈이 또 안시연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밉보이고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다.그래서 이를 꽉 깨물고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빌어먹을 놈...”안시연은 작게 욕을 읊조리며 두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안시연은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사모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연정훈은 샴페인을 여러 잔 들이켰으나 정신은 아직 또렷했고 안시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그리고 드디어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안시연과 시선이 마주쳤다.안시연은 연정훈을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짓고 인파
안시연도 연정훈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고개를 숙여 딴짓하는 사이 연정훈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한참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핸드폰을 찾아 진수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진수빈이 다급하게 홀을 달려 누군가를 안내하고 있는 게 보였다.안시연은 두 사람이 눈에 익었으며 아마도 연정훈의 친구였다는 생각을 했다.‘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불안한 마음에 안시연도 뒤를 따랐다.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위로 올라오는 양민아와 마주쳤다. 양민아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안시연은 의아해하며 계속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더 불안해진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해 양민아를 지나치려는 순간 양민아가 입을 열었다.“너같이 얼굴 믿고 사는 사람은 결국 몸 파는 사람과 뭐가 달라? 넌 남자들에게 골치만 안겨줄 뿐이지 다른 능력도 없잖아.”안시연은 참지 않고 반박하려 했다.그런데 진수빈이 나타나 그녀를 불렀다.“안시연 씨.”안시연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이에요?”진수빈은 양민아를 번갈아 보며 안시연이 가까이 다가오라며 눈짓했다.양민아는 헛웃음을 지었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해 양민아를 무시하고 진수빈을 따라 공터로 향했다.진수빈은 그녀를 주차장으로 안내하며 상황을 설명했다.안시연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연정훈 씨가 폭행했다고요?”“네.”진수빈은 피곤한 얼굴로 답했다.“함풍목재의 이 대표를 심하게 폭행해 지금 병원으로 이송되었어요.”안시연은 귀를 의심했다.연정훈처럼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원수를 만나도 절대 공개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으며, 체면을 구기게 직접 행동하지 않았다.“잘, 잘못 들은 게 아니에요?”진수빈이 발걸음을 멈춰서고 굳은 얼굴로 안시연을 바라봤다.안시연은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 그럼 연정훈 씨는 지금 어디 있어요?”“대표님은 차에서 쉬고 계십니다.”“사람을 때리고 차에서 쉬고 있다고
안시연은 연정훈이 직접 움직인 게 본인 때문일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어쩌면 소유욕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연명걸 씨가 빨리 막아서서 별로 닿지도 않았어요.”안시연은 애써 설명을 했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차 안에서 연정훈은 그녀를 지그시 누르며 탐색했다.안시연은 온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고 연정훈에게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정훈 씨, 우리 이러지 말고 호텔로 돌아가서 해요.”연정훈은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하지만 장소는 차 안 내부가 아니어야 했다.그래서 외투를 벗어 안시연을 꽁꽁 싸매고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진수빈을 불렀다.“호텔로 돌아가자.”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연정훈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움직이는 차 안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으나 가끔 그녀의 입과 코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제 손가락을 안시연의 입안에 넣었다.고개를 쳐든 안시연은 물기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싫어요.’하지만 연정훈은 이미 초점을 잃은 눈이었다.그렇게 연정훈의 손가락은 어느새 흥건하게 되고 그는 안시연의 눈앞으로 가져가 흔들어 보였다.얼굴이 빨갛게 물든 안시연은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오늘은 진수빈이 직접 운전했고 그는 절대로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후끈 데워진 차 내부에서 진수빈은 진땀을 흘렸다.호텔에 도착하고 진수빈은 차량을 가장 깊숙한 곳에 세워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그리고 예상했다시피 연정훈이 안시연을 안아 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안시연은 두 눈을 꼭 감고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길 바랐다.카드 소리가 들려오고 그녀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로 올려두고 가만히 쳐다봤다.시선이 뒤엉키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그러나 몸을 돌려 반대편 소파에 앉은 연정훈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샤워하고
작은 무드 등만 켜진 안방에서 안시연은 얇은 원피스 한 장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소리를 죽였다.연정훈은 침대 끝에 앉아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히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입을 맞췄다.얇은 이불 한 장을 사이 두고 연정훈은 그녀의 향기에 취할 것 같았다.안시연은 온몸에 작은 개미가 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눈을 떠보니 연정훈은 여전히 가운 차림이었고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연정훈은 빨갛게 물든 안시연의 볼과 촉촉이 젖은 눈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널 괴롭혔다고 왜 말하지 않았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확 깨물고 싶었다.질문을 하려면 질문만 하지, 왜 자신을 이렇게 안달 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래서 발가락을 오므리며 달뜬 숨을 숨겼고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훈 씨에게 문제가 될까 봐.”역시 안시연은 연정훈을 위해 참은 게 맞았다.원하는 대답을 들은 그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안시연은 눈앞이 하얗게 변해갔다.그는 그녀의 몸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고 성감대를 정확히 자극해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후끈 달아오른 그녀를 안아 올려 자기 몸 위로 앉게 했다.안시연은 온몸이 나른해 가만히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핫팩처럼 뜨거웠다.안시연이 살짝 지쳐 보여도 연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그녀를 매만졌다.“그날 나한테 거래하고 싶다고 했잖아.”연정훈이 그때의 거래를 입에 올려도 몸이 달아오른 안시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는 그녀의 귓불을 깨물고 그녀를 자극했다.“왜 결국 포기했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어 겨우 이성을 유지했다.그녀는 그를 위해 포기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교수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손실이 생길까 그랬죠.”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주씨 가문에게 다른 조건을 말했어야지. 자신을 위해 퇴로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대화를
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바라봤다.어두운 불빛 아래 그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하지만 연정훈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안시연은 심장이 떨려왔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이성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연정훈은 바로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이어 연정훈이 안시연의 입술을 탐하고 그녀는 겨우 남은 공간으로 숨을 헐떡였으나 그는 남은 숨마저 모조리 빼앗아 갔다.“천천히... 조금만 천천히...”안시연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긴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평소 금욕의 얼굴을 하고 지내던 연정훈은 모든 가면을 벗고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그는 안시연의 얇은 원피스를 벗기지 않고 어깨끈만 내려 치마가 허리춤에서 파도처럼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그녀의 두 손을 뒤로 모으면 더 마음에 들었다.안시연은 숨을 헐떡이며 지쳐 쓰러질 위기였으나 연정훈은 그녀에게 물을 챙겨주며 체력을 보존시켰다.그러나 안시연은 물을 마시다가 또 연정훈에게 입을 뺏겼다.둘은 장소를 거실로 옮겼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로 올렸다. 다시 입을 맞추는 연정훈은 아주 부드러웠다.그렇게 방심한 안시연은 또 천천히 그에게 잠식되었다.이제 눈물 흘릴 힘조차 없었으나 연정훈은 계속 키스를 이어갔다.그는 그녀를 이렇게 다독였다.“조금만 힘 풀어. 힘 풀면 다 괜찮아질 거야.”‘거짓말! 다 거짓말이야!’안시연은 오늘 밤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딸깍.침대 헤드의 무드 등을 켜는 순간 안시연은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이제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연정훈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 위로 눕히고 자리에서 떠났다.겨우 눈을 뜬 안시연은 연정훈이 한 무더기의 무언가를 휴지통에 버리는 걸 목격했다.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나쁜 놈.’마지막에 연정훈이 안전 조치를 제대로 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저번에 아이를 낳아 날 협박하겠다고 했잖아. 기회 줄게. 아기 가져봐.”깜짝 놀란
늦은 밤.안시연은 이불로 온몸을 돌돌 말고 눈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멀지 않은 곳의 주방에서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직접 만든 만둣국이 먹고 싶다는 건 사실 일부러 고집을 피운 것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고작 만둣국 하나는 연정훈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안시연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연정훈이 연락을 돌려 예쁘게 빚은 만두를 배송받아 지금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은근슬쩍 주방을 살폈다.검은색 가운 차림은 정장도 아닌데 고급지고 우아해 보였다.연정훈이 요리를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나 이것저것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꽤 믿음직스러웠다.그러다가 불이 세져 만둣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난 육수 싫어요.”안시연이 입을 열었다.“육수밖에 없어.”“뜨거운 물도 없어요?”‘육수밖에 없긴 바보 같아.’“...”안시연의 날카로운 지적에 연정훈은 말없이 다시 물을 받았다.자신을 온밤 괴롭혔던 연정훈을 생각하며 만약 흐지부지한 만둣국이 완성되면 그녀는 그를 실컷 놀려먹으려고 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완벽한 만둣국이 완성되었다.‘쳇. 배송받은 만두가 좋아서 그런 거야.’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안시연은 경계의 눈초리로 이불을 더 꽁꽁 싸매고 식탁에 앉았다.연정훈은 할 말이 없었다.체력적으로는 연정훈도 똑같이 소모되었을 텐데 그는 배가 고프지도 힘들지도 않은지 그는 안시연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안시연이 드디어 맛을 보았다.예상과는 달리 간이 적당하고 입에 맞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어때?”안시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며칠 전 가게에서 먹었던 만둣국보다 별로예요.”“맛이 없어?”“가게보다 조금 별로?”“이 만두 그 가게 꺼야.”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만두 맛은 같아요.”연정훈은 그제야 안
안시연은 만둣국을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웠다.배를 두드리면 통통 소리도 날 것 같았다.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야식을 먹었으니 조금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그래서 몸에 걸쳐진 이불을 보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이불로 온몸을 두른 안시연이 몸을 일으키자 연정훈이 바로 잡아당겨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버렸고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은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밥 먹고 바로 눕게?”“옷 갈아입고 산책 좀 하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없이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다.안시연은 그제야 입가도 닦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손을 뻗어 직접 닦으려는데 연정훈은 고집을 피우며 안시연이 어린아이인 듯 직접 닦아줬다.입가를 닦은 휴지를 버리고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옷 입고 와.”안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안방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으며 방금까지 입고 있던 원피스는 당연하게도 더럽혀졌다.안시연은 안전하게 긴 소매와 긴 바지로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왔다. 맨발로 거실의 카펫을 밟는 기분이 좋았다.연정훈은 가만히 앉아 안시연을 지켜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안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생각해 보니 배가 그렇게 부른 것도 아닌 듯싶어 안시연은 안방으로 돌아가 씻고 누웠다.“먼저 잘게요.”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이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누운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품에 가뒀다.편히 자고 싶었던 안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전에 기사를 하나 봤는데요. 어느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밤새 팔베개를 해주다가 이튿날에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는 거예요.”연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데?”“병원에서 가서 검사를 해보니 신경이 괴사되어서 팔을 잘랐대요.”그리고 그의 팔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말했다.“지금 우리 이 자세가 바로 그래요.”“.
연정훈이 이철수를 폭행한 사건은 알 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건이었지만 소문이 크게 퍼지지 않았다.재벌가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고 모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은 부승희한테서 이철수가 아직 입원 중이고 연정훈은 병문안 한번을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병문안을 가지 않은 건 그렇다고 해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니까요. 그래도 이철수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승우를 통해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부탁하기도 했어요.”안시연은 묵묵히 주먹밥을 먹었다.그녀는 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주임 사무실에서 호출이 왔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다름 아닌 연명걸이었다.연명걸은 아주 친절한 말투로 그녀더러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연 대표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시연 씨가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해요.”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연명걸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이철수 씨의 사건은 저도 따로 알아봤는데 그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먼저 결례를 범한 것 같네요.”안시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연명걸은 사무실 책상에 몸을 기댄 채로 마치 일상 대화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연정훈이 폭행을 했다더라도 잘못은 이철수 쪽에 있으니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면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에요.”연명걸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연정훈도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니 옆에 원수를 많이 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하고 싶은 말씀 하세요.”연명걸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솔직하게 말할게요. 연정훈 씨에게 대신 부탁드려주세요.”“부탁이요?”“네. 이제 그만 이씨 가문에 대한 억압을 멈추어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안시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이 먼저 주먹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연정훈의 품에서 턱을 치켰다.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의 콧등에 짧게 키스하고 말했다.“이젠 일어나. 우리 시내 구경이나 가자.”양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 급해.”연정훈은 잠시 표정을 굳힌 채로 말을 이었다.“그러는 넌 양혁수 보러 온 거잖아. 마침 시간도 되겠다 온 김에 나도 양혁수 보러 갈까 봐.”양시연이 눈을 부릅 떴다.‘삐진 거 참 오래도 가네.’“나보고 잘 삐진다고 그러더니, 정훈 씨야말로 삐돌이네요.”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신경이 쓰인 연정훈은 행여나 두 사람이 따로 만날 까 안절부절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연정훈은 오늘 양혁수의 앞에서 깨소금을 볶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참 속 보이네.’하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양혁수는 네 오빠잖아. 그러니 보러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참나. 그럼 혁수더러 형님이라고 부르던가요.”연정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나쁘지 않은데?”“...”양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정훈을 살짝 밀어냈다.“빨리 일어나서 옷 좀 챙겨줘요. 나도 씻어야겠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줬고 빠르게 옷을 챙겨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이 직접 옷을 입혀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하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았다. 연정훈에게 맡겨버린다면 아마도 또 한바탕 사달이 날 것이다.어젯밤 일이 있은 뒤로 양시연은 많이 뻔뻔해졌고 연정훈의 앞에서 당당하게 옷을 갈아입었다.갈아입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두 다리가 흐물거리고 허리가 엄청 시큰거렸다.그러자 연정훈이 빠르게 양시연을 부축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보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지금 정훈 씨도 멀쩡한 척하는 거죠? 사실은 엄청 피곤한데 말이에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끌어안고 직접 화장실로 데려갔다. 양시연을 내려놓은 연정훈은 또
“거짓말...”“나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면서...”“그냥 내 얼굴이랑 몸만 좋았던 거잖아요...”정신은 흐릿해지고 땀으로 온몸이 젖어갔다. 그리고 양시연의 두 볼도 붉게 물들었으며 두 사람은 이따금 대화를 이어갔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양시연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그래서 양시연을 달래며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졌다.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시연은 이제 손가락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연정훈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기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안아 들고 샤워를 하러 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오고 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제 화해하는 거로 어때?”‘화해?’‘무슨 화해?’양시연이 머리를 굴리다가 연정훈이 과거 연애 시절을 가리킨다는 걸 깨달았다.“풉...”그래서 웃음이 터졌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정신이 흐릿할 때 서둘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서서히 잠이 들었고 어느새 연정훈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꿈 깨요...”연정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고 고개를 숙여 이마에 키스를 했다.몇 시간 뒤면 해가 뜰 시간이었지만 연정훈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버리고, 소현주 사건도 말해줬으니 이제 마음이 편했다.그래서 잠에 들지 않고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아침.양시연이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맞은편 소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시선이 마주치고 양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고백이 떠오른 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등을 휙 돌려버렸다.그러자 입꼬리를 올린 연정훈이 노트북을 내려 두고 양시연의 등 뒤로 앉았다. 이어 몸을 숙여 양시연의 목에 키스를 했다.입술의 말캉한 촉감이 유난히 선명했다.양시연은 두 눈을
“꼭 그렇게 날 상처 줘야겠어?”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양시연을 바라봤다.그러자 양시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이건 모두 정훈 씨가 자초한 거예요.”“삼촌이 정말 깨어나지 않았다면 정훈 씨는 평생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로 살았을 텐데.”그리고 양시연이 몸을 돌려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어디 보자. 설마 지금도 바보인가?”“...”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속수무책이었고 양시연이 내키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고작 이런 말로 내 믿음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 마요. 소현주 씨를 제외하고 정말 다른 사람은 없어요? 난 믿을 수가 없는걸요. 그때 호텔에서...”양시연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주 익숙해 보였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날 놀리는 거야? 내가 뭐가 익숙해 보였다고 그래.”“...”“네가 멍청한 거지.”‘어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양시연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어쨌든 모두 정훈 씨 탓이에요. 어떻게 교수씩이나 돼서 수업 듣던 학생한테 마음을 품을 수 있어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연정훈은 과거에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그러자 연정훈은 이불을 위로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의 위로 올라타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했다.시선이 얽히고 연정훈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양시연의 귓불에 키스하며 말했다.“나한테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양시연은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연정훈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래서 양손으로 연정훈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는데 머릿속에는 그동안 연정훈과 함께 지내던 추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었다. 처음 만남을 이어가던 그 시절 연정훈은 너무 양시연을 몰아붙여 양시연을 힘들게 했었다.양시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아요? 정훈 씨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자 양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말이 맞죠?”“...”양시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나랑 소현주는 가벼운 교제였지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양시연은 믿지 않았다.“결혼 얘기까지 오갔다면서 해본 적 없다고요?”“없어.”연정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훑었다.그러나 진실이 어찌 되었든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이불을 쭉 당겨 등을 돌려 누웠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을 품에 넣었고 양시연은 팔꿈치로 연정훈의 복부를 가격했다.“나 건드리지 마요!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뒤로 하고 다시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뽀뽀하고 달래도 효과가 없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공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양시연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예요?”“더 자세하게 알려줄게.”“...”양시연은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질색하며 말했다.“누가 듣고 싶대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말해줄 필요 없어요.”연정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은 드디어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소현주는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공휘를 만났었다. 사실 이것도 순화해서 한 말이지, 소현주는 아주 많은 남자들과 돈으로 된 만남을 이어갔다.그러니 성폭행으로 몰아간 영상은 진짜와 거짓이 동시에 존재했다.소현주는 연정훈과 같이 지내며 과거가 들킬까 걱정이 많았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유학을 변명으로 해외에서 여러 번 회복 수술도 받았다.공휘 주변에는 널린 게 여자였고 소현주에게는 이미 질려버린 터였다. 그러나 연정훈의 여자가 된 소현주를 보며 다시 관심이 생겼다.이 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