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석진이 제대로 자리에 앉고 양지원이 탕약을 건넸다.양석진이 한꺼번에 탕약을 들이켜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이 다 마시기 전에 양창수를 시켜 물을 따르게 했다.양창수는 물을 따르고 양지원의 등 뒤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지원은 물을 건네받고 또 양석진을 도와 물을 마시게 했다.양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걸 바라보던 양창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나 마침 양석진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양창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했다.양석진이 물까지 모두 들이켰고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랍에는 사탕이 있었고 양지원은 빠르게 우유 맛으로 골라 양석진의 입에 넣었다.그러자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창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양석진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아예 의자를 찾아와 앉아서 구경하는 게 어때?”“...”‘아가씨 오니 난 이제 찬밥 신세라는 거지?’‘치사해서 안 봐.’양창수는 떠나기 전 양지원에게 저녁 식사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양지원은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답했다.“알겠어요.”양창수가 떠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양석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다시 눈을 뜨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양지원이 보여 미소가 번졌다.“비행기에서 저녁 먹은 거야?”“네. 먹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말했다.“기분이 좋으니 기내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2인분이나 먹었는걸요.”양석진이 미소를 지었다.“메뉴가 뭐였는데?”“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꼬르륵...양지원은 빠르게 복부에 힘을 주어 소리를 멈추게 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양지원은 이를 꽉 깨물었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되네!’양석진은 고개를 틀어 감히 양지원의 앞에서 웃지 못했다.정말 웃음을 터뜨
양석진은 아직 링거가 남아 있었고 양지원은 작은 테이블을 찾아 침대에 내려두고 음식을 하나하나 옮겼다.“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은 음식을 짚어주며 물었다.“평범한 감기이지 뭐.”“그런데 이렇게 오래 가는 거예요?”“나이를 먹어서 그래.”걱정이 많아 보이는 양지원을 보며 양석진은 농담하듯 말했다.“양창수가 뭐라고 했는데?”“나 때문에 화병 난 거라고 하던데요?”양석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가능성도 있지. 내일 의사가 오면 혹시 화병 때문은 아닌지 다시 검진해 보라고 할게.”“...”양석진이 아픈 걸 보아 양지원은 말없이 양석진을 보살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군밤을 까기 시작했다.양석진은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으나 그중에서 군밤을 제일 좋아했다.오래전 양석진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맛있던 음식이 바로 길거리 음식점 할아버지가 주던 군밤이라고 했다.“밥 먹고 까.”양석진의 말에도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밤을 예쁘게 까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난 배불렀어요. 이따가 또 먹으면 돼요.”양지원은 이미 밥 한 그릇을 비웠기에 양석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양지원은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방안은 다시 정적이 맴돌고 양석진이 마지막 한술까지 비우자 양지원이 직접 테이블을 치웠다.늘 보살핌을 받던 양지원이 누군가를 보살피려다 보니 어딘가 조금 어설펐다.모든 걸 마치고 양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양석진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창수 씨 부를까요?”“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석진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고 링거를 들고 화장실로 가 걸어주었다.그러나 이 모든 걸 마친 뒤에도 양지원은 화장실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다시 말을 반복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양지원은 양석진의 잠옷
“오빠, 내가 다른 건 도와줄 거 없어요?”농담 섞인 양지원의 목소리가 양석진의 등 뒤로 들려오고 옅은 숨소리가 귀에 걸렸다.양석진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아픈 틈을 타 목숨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양석진은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양지원의 손을 잡았다.양석진이 살짝 힘을 주자 양지원은 휙 하고 양석진의 앞에 서게 되었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양지원은 휘청대다가 변기 위로 풀썩 앉아버렸다.고개를 든 양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석진이 그 앞을 가려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그렇게 전세가 역전되었다.양지원은 심장이 쿵쿵 뛰었고 평온하지만 의미심장한 그 눈빛을 보며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항복 자세를 취했다.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살며시 양석진의 바지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양석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입술에 닿고 또 온몸을 훑어내렸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장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양지원은 후회가 되었다. 이어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양석진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한 손으로 양지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병에 걸려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양지원은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몸의 힘을 풀고 양석진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양지원은 바짝 긴장되었다.“...”“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다른 건 도울 게 없냐고.”양석진이 물끄러미 양지원을 바라봤다.‘다른 건...’양지원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생각이 되고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히 소리를 높이며 양석진의 복부를 슬쩍 밀었다.“양석진!”기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양지원은 양석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양석진은 양지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
문밖에 서 있던 양시연은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안쪽 상황을 염탐했다.1시간 전부터 연정훈은 양시연이 다리에서 주워 온 딸이라고 놀려대고 있었다.“아버님은 널 만날 여유가 없어.”양시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체면을 구길 수 없어 아니라고 반박했다.“그럴 리가 없어요. 엄마랑 얘기가 끝나면 날 만날 거예요.”그러나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양시연을 찾지 않았다.부모님의 사랑에 양시연은 동떨어진 존재인 모양이었다.“시간이 많이 늦어 이미 쉬고 계신 게 분명해요.”양시연은 여전히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고 연정훈은 미소만 지을 뿐 굳이 들추지 않았다.연정훈이 노트북을 닫으며 물었다.“우리 산책이나 할래?”“지금요?”“그래.”양시연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너무 늦었잖아요. 그리고 여기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어요?”“시도나 해보자. 안되면 아버님이 구하러 와주시겠지. 그 참에 얼굴도 뵈고 나쁘지 않잖아.”“...”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밤이었고 양시연은 드라이브나 할까 생각했다.그래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양창수는 예상이라도 한 건지 차키를 탁자 위로 올려 두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연정훈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늦은 시간이다 보니 인파가 많지 않았다.연정훈은 어느 레스토랑을 예약해 음식을 주문했다.넓은 공간에 두 사람만 남겨지고 옆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셰프가 있었다. 사방은 어둡고 오직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빛이 비치고 있었다.요리는 아직 세팅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와인 한잔에 얘기를 나눴다.셰프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연정훈은 빠르게 양시연을 품에 안고 키스를 했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와인병으로 시야를 조금이나마 가렸다.입술이 맞닿고 호흡이 가빠질 때쯤 연정훈은 양시연을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무기력하게 품에 안겼다.연정훈은 몸을 돌려 또 양시연의 쇄골에 키스했다.“우리 내일 경인으로 돌아갈까?”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