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무드 등만 켜진 안방에서 안시연은 얇은 원피스 한 장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소리를 죽였다.연정훈은 침대 끝에 앉아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히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입을 맞췄다.얇은 이불 한 장을 사이 두고 연정훈은 그녀의 향기에 취할 것 같았다.안시연은 온몸에 작은 개미가 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눈을 떠보니 연정훈은 여전히 가운 차림이었고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연정훈은 빨갛게 물든 안시연의 볼과 촉촉이 젖은 눈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널 괴롭혔다고 왜 말하지 않았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확 깨물고 싶었다.질문을 하려면 질문만 하지, 왜 자신을 이렇게 안달 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래서 발가락을 오므리며 달뜬 숨을 숨겼고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훈 씨에게 문제가 될까 봐.”역시 안시연은 연정훈을 위해 참은 게 맞았다.원하는 대답을 들은 그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안시연은 눈앞이 하얗게 변해갔다.그는 그녀의 몸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고 성감대를 정확히 자극해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후끈 달아오른 그녀를 안아 올려 자기 몸 위로 앉게 했다.안시연은 온몸이 나른해 가만히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핫팩처럼 뜨거웠다.안시연이 살짝 지쳐 보여도 연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그녀를 매만졌다.“그날 나한테 거래하고 싶다고 했잖아.”연정훈이 그때의 거래를 입에 올려도 몸이 달아오른 안시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는 그녀의 귓불을 깨물고 그녀를 자극했다.“왜 결국 포기했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어 겨우 이성을 유지했다.그녀는 그를 위해 포기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교수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손실이 생길까 그랬죠.”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주씨 가문에게 다른 조건을 말했어야지. 자신을 위해 퇴로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대화를
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바라봤다.어두운 불빛 아래 그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하지만 연정훈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안시연은 심장이 떨려왔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이성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연정훈은 바로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이어 연정훈이 안시연의 입술을 탐하고 그녀는 겨우 남은 공간으로 숨을 헐떡였으나 그는 남은 숨마저 모조리 빼앗아 갔다.“천천히... 조금만 천천히...”안시연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긴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평소 금욕의 얼굴을 하고 지내던 연정훈은 모든 가면을 벗고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그는 안시연의 얇은 원피스를 벗기지 않고 어깨끈만 내려 치마가 허리춤에서 파도처럼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그녀의 두 손을 뒤로 모으면 더 마음에 들었다.안시연은 숨을 헐떡이며 지쳐 쓰러질 위기였으나 연정훈은 그녀에게 물을 챙겨주며 체력을 보존시켰다.그러나 안시연은 물을 마시다가 또 연정훈에게 입을 뺏겼다.둘은 장소를 거실로 옮겼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로 올렸다. 다시 입을 맞추는 연정훈은 아주 부드러웠다.그렇게 방심한 안시연은 또 천천히 그에게 잠식되었다.이제 눈물 흘릴 힘조차 없었으나 연정훈은 계속 키스를 이어갔다.그는 그녀를 이렇게 다독였다.“조금만 힘 풀어. 힘 풀면 다 괜찮아질 거야.”‘거짓말! 다 거짓말이야!’안시연은 오늘 밤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딸깍.침대 헤드의 무드 등을 켜는 순간 안시연은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이제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연정훈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 위로 눕히고 자리에서 떠났다.겨우 눈을 뜬 안시연은 연정훈이 한 무더기의 무언가를 휴지통에 버리는 걸 목격했다.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나쁜 놈.’마지막에 연정훈이 안전 조치를 제대로 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저번에 아이를 낳아 날 협박하겠다고 했잖아. 기회 줄게. 아기 가져봐.”깜짝 놀란
늦은 밤.안시연은 이불로 온몸을 돌돌 말고 눈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멀지 않은 곳의 주방에서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직접 만든 만둣국이 먹고 싶다는 건 사실 일부러 고집을 피운 것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고작 만둣국 하나는 연정훈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안시연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연정훈이 연락을 돌려 예쁘게 빚은 만두를 배송받아 지금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은근슬쩍 주방을 살폈다.검은색 가운 차림은 정장도 아닌데 고급지고 우아해 보였다.연정훈이 요리를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나 이것저것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꽤 믿음직스러웠다.그러다가 불이 세져 만둣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난 육수 싫어요.”안시연이 입을 열었다.“육수밖에 없어.”“뜨거운 물도 없어요?”‘육수밖에 없긴 바보 같아.’“...”안시연의 날카로운 지적에 연정훈은 말없이 다시 물을 받았다.자신을 온밤 괴롭혔던 연정훈을 생각하며 만약 흐지부지한 만둣국이 완성되면 그녀는 그를 실컷 놀려먹으려고 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완벽한 만둣국이 완성되었다.‘쳇. 배송받은 만두가 좋아서 그런 거야.’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안시연은 경계의 눈초리로 이불을 더 꽁꽁 싸매고 식탁에 앉았다.연정훈은 할 말이 없었다.체력적으로는 연정훈도 똑같이 소모되었을 텐데 그는 배가 고프지도 힘들지도 않은지 그는 안시연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안시연이 드디어 맛을 보았다.예상과는 달리 간이 적당하고 입에 맞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어때?”안시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며칠 전 가게에서 먹었던 만둣국보다 별로예요.”“맛이 없어?”“가게보다 조금 별로?”“이 만두 그 가게 꺼야.”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만두 맛은 같아요.”연정훈은 그제야 안
안시연은 만둣국을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웠다.배를 두드리면 통통 소리도 날 것 같았다.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야식을 먹었으니 조금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그래서 몸에 걸쳐진 이불을 보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이불로 온몸을 두른 안시연이 몸을 일으키자 연정훈이 바로 잡아당겨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버렸고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은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밥 먹고 바로 눕게?”“옷 갈아입고 산책 좀 하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없이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다.안시연은 그제야 입가도 닦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손을 뻗어 직접 닦으려는데 연정훈은 고집을 피우며 안시연이 어린아이인 듯 직접 닦아줬다.입가를 닦은 휴지를 버리고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옷 입고 와.”안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안방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으며 방금까지 입고 있던 원피스는 당연하게도 더럽혀졌다.안시연은 안전하게 긴 소매와 긴 바지로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왔다. 맨발로 거실의 카펫을 밟는 기분이 좋았다.연정훈은 가만히 앉아 안시연을 지켜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안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생각해 보니 배가 그렇게 부른 것도 아닌 듯싶어 안시연은 안방으로 돌아가 씻고 누웠다.“먼저 잘게요.”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이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누운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품에 가뒀다.편히 자고 싶었던 안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전에 기사를 하나 봤는데요. 어느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밤새 팔베개를 해주다가 이튿날에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는 거예요.”연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데?”“병원에서 가서 검사를 해보니 신경이 괴사되어서 팔을 잘랐대요.”그리고 그의 팔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말했다.“지금 우리 이 자세가 바로 그래요.”“.
연정훈이 이철수를 폭행한 사건은 알 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건이었지만 소문이 크게 퍼지지 않았다.재벌가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고 모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은 부승희한테서 이철수가 아직 입원 중이고 연정훈은 병문안 한번을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병문안을 가지 않은 건 그렇다고 해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니까요. 그래도 이철수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승우를 통해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부탁하기도 했어요.”안시연은 묵묵히 주먹밥을 먹었다.그녀는 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주임 사무실에서 호출이 왔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다름 아닌 연명걸이었다.연명걸은 아주 친절한 말투로 그녀더러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연 대표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시연 씨가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해요.”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연명걸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이철수 씨의 사건은 저도 따로 알아봤는데 그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먼저 결례를 범한 것 같네요.”안시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연명걸은 사무실 책상에 몸을 기댄 채로 마치 일상 대화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연정훈이 폭행을 했다더라도 잘못은 이철수 쪽에 있으니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면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에요.”연명걸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연정훈도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니 옆에 원수를 많이 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하고 싶은 말씀 하세요.”연명걸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솔직하게 말할게요. 연정훈 씨에게 대신 부탁드려주세요.”“부탁이요?”“네. 이제 그만 이씨 가문에 대한 억압을 멈추어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안시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이 먼저 주먹
연명걸은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먼저 안시연에게 USB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USB는 암호로 잠겨 있었지만 전문 인력이 손만 보면 해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연명걸은 호텔 담당자를 지시해 안시연에게 전화하게 했다.“안시연 씨,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젯밤 연회에 참석한 고객 중 한 분이 회사 USB를 유실하셨는데 카메라 확인 결과 안시연 씨가 무심결에 챙겨가신 걸 확인했습니다.”안시연은 전화를 받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연명걸이 이철수를 밀어내고 안시연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담았으며 특별한 물건은 기억나지 않았다.“지금은 회사에 있어 확인이 불가능하고 확인 후 저한테 소지품이 있으면 바로 퀵으로 보내드릴게요.”호텔 담당자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안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통화를 종료했다.재고 조사 업무도 거의 막바지에 달하고 이제 경인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주임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다.“함풍목재 경영은 그럭저럭해도 장부는 정말 아무 문제도 찾을 수가 없네요.”안시연도 동감이었다. 정말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여러 선배도 말을 보탰다.“이렇게 문제가 티끌 하나도 없는 장부는 처음이에요.”안시연은 선배를 바라보다가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그때 주임이 말했다.“아무 문제가 없는 건 좋은 일이지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어쩌면 내일이면 경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사무실은 환호성이 이어졌다.출장에 몸이 힘들었지만 수고비와 이어질 휴가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안시연도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오전 소현정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대충 뜻은 연정훈과의 관계가 부적절하니 빨리 끝내라는 것이었다.외할머니도 자주 전화를 걸어와 그녀가 보고 싶다고 전했다.안시연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일에 몰두했다.드디어 퇴근 시간 전으로 모든 업무를 끝마쳤다.주임이 휴가라고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다.안시연은 바로 부승희의 연락을 받았는데 교외
의도와는 다르게 부승원의 비밀을 듣게 된 안시연은 빠르게 걸음을 멈춰 섰다.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부승희는 드롱의 전국 입점권을 따내고 기쁜 마음에 찻집에서 한턱을 내기로 했다.부승원과 한우빈을 제외하고 몇몇 낯선 얼굴도 보였다.찻집은 규모가 꽤 컸으며 저녁 식사는 그중 한 방으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작은 별장 같은 공간에서 커튼만 열면 전체 차밭이 보였다.저녁노을이 진 차밭은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안시연이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사람이 자리에 착석했고 연정훈의 왼쪽 자리만 비어 있었다.부승희가 그녀를 그쪽으로 밀었다.“빨리 앉아요. 안시연 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고요.”안시연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오늘이 축하 파티인 줄도 모르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다음번에 보충해도 될까요?”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편한 대로 해요.”이어 웨이터가 요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웨이터들은 모두 선명한 이목구비에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는데 안시연은 속으로 평범한 웨이터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이 웨이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옆에 앉은 여자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그 여자는 바로 아까 부승원과 함께 있었던 소녀였는데 안시연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활짝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귀여운 송곳니가 톡 튀어나왔다.“...”역시 19살의 소녀는 달랐다.이런 생각에 안시연은 또 몰래 부승원을 살폈다.안시연은 부승원이 연정훈의 친구 중에서 가장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앞접시에 고기 한 점이 놓였다.“얼굴에 금이라도 붙었어?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불만이라는 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시연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귀엽잖아요.”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부승원이 귀여워?’“저 아이는 부승원 변호사님 여자 친구인
안시연은 심장이 덜컹했다.하지만 우 대표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고 술잔을 들어 짠을 요청했다.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안시연도 예의를 갖춰 응했다.술잔을 내려 두고 안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연정훈은 이런 그녀의 모습에 두 사람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도 노래 부르라고 시키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먹어.”안시연이 깜짝 놀라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는 가끔 안시연은 왜 이렇게 눈치가 무딜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연정훈이 직접 음식을 앞접시에 덜어주며 챙기는데 감히 누가 그녀에게 장기 자랑을 시킬 수 있겠는가?평소 생각은 많아 보이는데 이런 쪽으로는 참 무딘 모양이었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식사 자리에 꼭 장기 자랑을 해야 해요?”“그건... 다른 사람들의 룰이야.”“멈춰 달라고 할 수 없어요?”“안돼.”안시연은 조금 실망했다.“난 내 사람만 지키지 다른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그래도 연정훈 씨가 말하면 다 들을 텐데요?”연정훈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누가 그래?”“꼭 말해줘야 알아요? 이철수 씨를 폭행하고 사과도 안 하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오히려 이철수 쪽에서 사과하고 싶다고 난리던데.”연정훈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지금 폭행한 사건을 비꼬는 건가?”안시연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아니요. 그냥 연 대표님은 전지전능하고 못 하는 게 없다는 소리네요.”세상에 어떤 남자가 제 애인이 자신을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걸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당연히 연정훈도 예외는 아니었다.물을 한 모금 들이켠 연정훈은 계속해서 수육을 앞접시로 옮겼다.벌써 세 앞접시에 가득 찬 수육을 보며 안시연은 어이가 없어졌다.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푸념했다.“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왜 넌 꼭 내가 빌런이라는 것처럼 말하지?”안시연은 심장이 찌르르했다.‘정말 모두 날 위해서 그런 거라고?’안시연이 고개를 들었다.“그럼 이씨 가문을 억압한 것도 모두 어젯밤 이철수가... 날 괴롭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