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반우희는 얼굴이 뜨거워져 몰래 손등으로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부승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반짝거렸다.“오늘따라 변호사님이 다르게 보여요.”“뭐가 다른데?”“칭찬을 너무...”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솔직하게 하셔서 말이에요!”“...”부승원은 과거와는 달리 부드러운 얼굴로 반우희를 빤히 바라봤다.“우리 변호사는 증거 없이 허튼 말 하지 않아.”‘헤헤.’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부승원의 품에서 나오지 않았다.“전에는 왜 그렇게 칭찬을 아꼈어요?”“네가 거만해질까 봐.”“그럼 오늘엔 걱정 안 돼요?”부승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순간에도 부승원은 반우희의 연락이 끊기던 공포가 불시에 찾아왔고, 반우희가 불길이 가득한 차량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철렁했다.부승원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을 직접 목격했고 불길이 한순간에 반우희를 집어삼키는 걸 봤었다.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부승원은 다시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할 수 없었다.그리고 전에는 반우희가 마냥 어린 친구로 보여 더 빨리 성장하라고 채찍질을 한 것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반우희는 이미 성숙하고 용감한 사람이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양시연을 구하던 반우희는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채고 가장 빠르게 상황을 안정시켰다.양시연을 구한 뒤 언제 또 폭발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사를 포기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키우다시피 한 동생 승주와 함께 불길에 달려들었다.“변호사님.”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부승원의 볼을 콕콕 찔렀다.그러자 부승원은 반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앞으론 마음대로 거만해도 돼.”“네?”“거만하게 사는 게 뭐 흠도 아니잖아. 적어도 넌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이라는 의미니까.”반우희는 이게 꿈속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평소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다.하지만... 부승원의 이런 변화에 반우희는 너무
10시를 넘기자 병실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춰왔다.양시연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훈도 눈을 떴다.“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고작 몇 시간 눈 붙인 거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그러나 연정훈은 세수를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양시연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했다.“오후에 시간 봐서 또 눈 붙일게. 아버님도 오셨는데 일단 얼굴 뵙는 게 좋겠어.”양시연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지만 연정훈의 말을 듣고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연정훈을 마음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좀 쉬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시켜서 음식 주문해요. 정훈 씨도 밥 챙겨 먹고 아버님도 드셔야죠.”그 말에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어머님이 지금껏 아버님을 굶겼을까 봐?”“정훈 씨 부모님은 생각도 안 해요?”그러자 연정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표세연은 아마도 손자에 정신이 팔려 연재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그래. 아들 노릇이나 하지 뭐.’“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그래요...”비록 병원에서 지냈지만 연정훈이 있어 병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햇살이 느껴져 어제의 악몽 같은 시간은 차츰 잊혀갔다.어젠 정말 악몽 같은 하루였고 오늘은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었다.병실을 비웠다가 다시 찾은 연정훈은 양석진과 양지원, 그리고 표세연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아이는 양석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연재혁은 보이지 않았다.부모님을 보고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조금 버거워 보였다.“움직이지 말고 편하게 누워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우리가 해줄게.”그 모습에 표세연이 서둘러 다가가 말했다.양시연은 기운이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평소 무표정이던 양석진도 오늘만큼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막 태어난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심스러웠다.“자, 시연이한테 보여줘야죠.”양지원이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그
반우희는 세 동생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승주의 목에는 아직도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일부러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다.네 명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병실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양석진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번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으니 다들 감격해했다.표세연은 직접 의자를 당겨와 양시연의 옆자리에 두며 네 명 더러 편히 앉게 했다.양석진은 지금껏 보배처럼 안고 있던 아이를 반우희에게 넘겨줬다.반우희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말했다.“세상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너무 작고 소중해요.”반우희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아이의 향기를 맡았고 또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정말 아기 향이 느껴지는데요!”그 말에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다.반우희의 뒤에 서 있던 부승원도 사차원다운 반우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승주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아기 정말 대단해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잖아요.”그러자 동준이 바로 말을 이었다.“당연하지. 머리카락 몇 올 없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이 터져버렸고 상처가 땅겨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예민하게 발견한 연정훈이 허리를 숙여 양시연에게 물었다.“아파?”양시연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너무 웃다가 상처가 땅겨서 그래요.”반우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준이를 교육했다.“말 함부로 하지마. 금방 태어난 아기는 머리카락이 적어도 곧 자랄 거야.”동준은 발꿈치를 쳐들고 반우희처럼 킁킁거렸다.“정말 아기 향이네요.”“...”아이의 천진난만함에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양시연이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기가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태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우희 씨랑 승주 덕분이에요.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좋은 이모를 알아봤어요.”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가슴팍을 툭툭 내리치며 말했다.“이모 대단하지?”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승
탁호연은 눈앞의 탁승호를 찬찬히 살폈다.비록 멀쩡한 옷차림이었으나 금방 갈아입힌 흔적이 있었고 드러난 얼굴이나 다른 부위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친동생이었으니 탁승호의 멍청함을 탓하다가도 마음이 아파졌다.“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야?”탁호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탁승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착하고 바르던 탁승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이건 누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탁호연은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어? 우리 가문 모든 사람이 양씨 가문에서 먹고 사는데 네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우리 가족 모두가 망한다는 생각 안 해봤어?”탁승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할머니 때문에 널 보러 온 거야. 그러니까 제발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알고 있는 거 모두 말해! 다행히 아가씨 모자가 멀쩡하니 넌 잘하면 살 수 있을 거야!”양시연 모자가 평안하다는 말에 탁승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해 미안하네.”“멍청한 놈!”탁호연은 화가 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양민아가 시킨 거지? 맞지?”탁승호는 대답이 없었다.“대체 왜? 전에 양씨 가문에서 지낼 때 양민아가 너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준 적 있어?”“누나는 몰라!”탁승호는 탁호연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더 이상 삶의 미련이 없다는 듯 천장의 불빛을 직시하며 말했다.“모두가 날 무시해도 그 사람은 달랐다고.”“우리 사이엔 아이가 있어. 이번에 복수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탁호연은 너무 화가 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너 정말 제정신이니? 그 사람이 뭘 잘못 먹었다고 네 아이를 낳아줘?”그 말에 탁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거봐, 누나도 날 무시하잖아.”“...”‘이렇게 멍청한 일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인정하겠어?’친동생만 아니었다면 탁호연은 바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그
큰비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여름 햇볕이 쏟아지자 방안은 찜통이 되었다.조재민은 오전 내내 쉬다가 오후에 집 밖으로 나섰다.‘아직 판 끝난 거 아니야.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재민은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그런데 그때,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했다.몸은 크게 앞으로 쏠리다가 안전벨트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낯선 차량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조재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연정훈이 미치지 않고서 이렇게 밝은 대낮에 움직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누군가 강제로 차량 문을 열고 조재민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입가에 가져다 댄 물수건에 의해 조재민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른 한편 병원에서.임성원이 직접 연정훈을 찾아왔고 연정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양시연의 옆 방으로 향했다. 금방 분유를 먹은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칭얼거리고 있어 잠든 양시연이 깰까 옆방으로 온 것이었다.임성원의 보고를 듣고 연정훈은 표정 변화 없이 쌀쌀맞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 숨통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그 말에 임성원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양민아를 찾지 못했으니 연정훈은 남은 사람을 굴릴 만큼 굴리겠다는 의미였다. 사람을 아직 채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죽일 수는 없었다.“일주일 내로 양민아 찾아내.”연정훈은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임성원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연정훈은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 아니었으나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러니 양민아는 멀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다.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연정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커튼을 내렸지만 병실 안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쳤다.부자는 체격 차이가 컸으며 연정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새끼 고양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았다.연정훈은 이 아이가 양시연이 목숨을 걸고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너무 마음이
양시연과 연정훈이 너무 시끄럽게 군 건지 태양은 살짝 칭얼거렸고 연정훈의 품에 안겨 병실 안을 빙빙 돌고 나니 다시 얌전해졌다.양시연은 부자를 보며 점차 얼굴을 굳힌 채로 현재 상황에 관해 물었다.연정훈은 최대한 간략해 중점만 골라서 양시연에게 전했다.그리고 양민아라는 이름을 들은 양시연은 너무 화가 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민아는 정말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처럼 끝이 없이 매달리고 들러붙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예쁘게 키워줬는데요. 얌전히 있었으면 우리 엄마가 절대 그 사람 섭섭하게 하지 않게 해줬을 거예요!”그해 양지원은 양민아 부모님과의 오랜 정을 보아 양민아의 목숨을 살려줬었다.그런데 양민아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되려 복수를 하려 했다.“그런 사람한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어. 이젠 정말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올랐다.“양민아는 도망을 갔고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탁승호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살려주고 싶어?”연정훈의 질문에 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죽어 마땅하지만 여 아주머니의 손자라 여 아주머니가 마음 아파할 가봐 걱정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이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도심 한복판에서 폭발 사고가 생겼어. 인명 피해는 없어도 사람들의 이목이 많이 집중된 사고야. 우리가 봐준다고 해도 높은 형벌을 피하지 못할 거야.”‘법대로 하려는 건가?’양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점차 의문이 들었다.‘나도 탁승호를 죽이고 싶은 마음인데 정훈 씨는...’양시연은 입술을 매만지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태양이 태어나고 모든 사랑을 태양에게 쏟느라 다른 사람한테는 남겨줄 여유가 없었다.아이한테로 관심이 돌려지고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에게 말했다.“태양이가 아빠를 참 많이 좋아해요. 아빠 품에만 안겨 있으면 보채지도 않는 걸 봐요.”연정훈은 다시 아이를 안고 양시연의 옆으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
새벽 두 시를 넘긴 침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양혁수의 셔츠는 변여름의 겉옷과 뒤엉킨 채 침대 옆 바닥에 나른히 놓여 있었다.거실의 시곗바늘이 똑똑 소리를 내며 양혁수의 심장과 신경을 조여 왔다.양혁수는 자신이 형편없는 놈이라며 N 번째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순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키스하려 다가왔다.양혁수는 약간 불편해서 변여름의 양 볼을 잡았다.“뭐 하려고 그래?”그는 깊은 만족 뒤에 밀려오는 나른함 속에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변여름은 살짝 눈을 굴리더니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물건을 만진 듯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변여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도 자극으로는 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속삭였다.“오빠, 나 졸려요.”양혁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당겨 둘을 덮었다.“자.”지금 변여름을 돌려보낸다 한들 헛수고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변여름은 그의 속내를 알아챈 듯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양혁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눈을 감았다.양혁수는 그녀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섬세한 얼굴 위로 연분홍빛이 감돌았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그는 머리가 아파졌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변여름을 방 안으로 들인 자신을 주저 없이 없애버리고 싶었다.지금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양혁수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아무리 되짚어 봐도 도대체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이 결국 변여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이었다.‘아니면 정말 변여름이 말한 대로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이렇게 쉽게 넘어간 걸까?’양혁수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한강시에서만 몇 년을 지내며 수많은
변여름이 두 번째로 양혁수에게 키스하자 그는 여전히 피하려 했지만 마치 작은 마녀의 마법에 걸린 듯 저항은 미약했다.그녀는 투피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언제 풀었는지 겉옷 단추가 풀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끈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는 잠시 눈길을 돌렸을 뿐인데 그녀의 가슴 라인이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에 분홍색 만화 꽃이 그려져 있었고 그 모습이 그녀의 행동과 대조되어 양혁수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입술이 닫히자 변여름은 그의 목을 감싸며 손끝으로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돌려 무심한 듯 두 번 당겼다.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자극되어 그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이번에는 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양혁수의 입술을 따라갔다. 중간에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그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그의 턱에 입맞춤을 했다. 그 후 더 애정을 담아 양혁수의 목젖에 부드럽게 입술을 옮겼다.양혁수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며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게 두었다.심장 박동과 호흡이 서로 경쟁하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로 눌러 내려가며 누가 먼저 참지 못할지 시험하려는 듯했다.그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가 그를 껴안고 무심하게 척추를 쓸어내리자 날카로운 전류가 온몸을 타고 내려가 배까지 흘러갔다.변여름이 양혁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며 그의 옆얼굴에 가만히 입맞췄다.“오빠, 이런 거 좋아해요? 좋아하면 저한테도 이렇게 해도 돼요…아니면 오빠가 다른 걸 원해도 뭐든 저한테 해도 괜찮아요.”변여름의 태도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마치 겸손해 보였지만 양혁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 같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약탈 방식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이 전부였다.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녀의 덫에 걸려들어 단단히 붙잡힐 테고 다시는 벗
“바디워시에요.”“변여름.”변여름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로 우유 향이 나는 바디워시에요.”양혁수는 방금 그 순간 특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핥던 단 몇 초 동안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말도 안 돼.’그는 분명 그녀의 향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변여름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은은한 향이 퍼지더니 이상하게도 양혁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변여름이 키스하려 하자 그는 마치 폭발할 것 같았다.변여름은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미동도 없이 침착했다.“오빠, 어디 불편해요?”“네가 그 이유를 더 잘 알잖아.”“...?”변여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가빠진 호흡과 붉어진 귀 끝을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흥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오빠, 제가 오빠한테 약이라도 먹였다고 생각해요?”양혁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요동쳤고 침묵이 곧 대답이 되었다.변여름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진짜 아니에요.”“오빠는 경험이 부족해서 딥 키스 한 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양혁수는 순간 멍해졌다.???방금 키스 때조차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려는 본능을 꾹 참으며 조용히 손을 빼려 했다.그러나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또 멋대로 움직이면?”변여름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에 희미한 물기를 맺었다.“오빠, 아파요.”양혁수는 변여름이 꾀병을 부린다고 90% 확신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변여름은 손을 빼냈다.양혁수는 얼굴에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경계했고 변여름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잠시 팽팽한 정적이 흐른 후 변여름은 애원하는 듯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