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연정훈이 직접 움직인 게 본인 때문일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그래서 어쩌면 소유욕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연명걸 씨가 빨리 막아서서 별로 닿지도 않았어요.”안시연은 애써 설명을 했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차 안에서 연정훈은 그녀를 지그시 누르며 탐색했다.안시연은 온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고 연정훈에게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정훈 씨, 우리 이러지 말고 호텔로 돌아가서 해요.”연정훈은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하지만 장소는 차 안 내부가 아니어야 했다.그래서 외투를 벗어 안시연을 꽁꽁 싸매고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진수빈을 불렀다.“호텔로 돌아가자.”안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연정훈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움직이는 차 안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으나 가끔 그녀의 입과 코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제 손가락을 안시연의 입안에 넣었다.고개를 쳐든 안시연은 물기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싫어요.’하지만 연정훈은 이미 초점을 잃은 눈이었다.그렇게 연정훈의 손가락은 어느새 흥건하게 되고 그는 안시연의 눈앞으로 가져가 흔들어 보였다.얼굴이 빨갛게 물든 안시연은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오늘은 진수빈이 직접 운전했고 그는 절대로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후끈 데워진 차 내부에서 진수빈은 진땀을 흘렸다.호텔에 도착하고 진수빈은 차량을 가장 깊숙한 곳에 세워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그리고 예상했다시피 연정훈이 안시연을 안아 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안시연은 두 눈을 꼭 감고 아무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길 바랐다.카드 소리가 들려오고 그녀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로 올려두고 가만히 쳐다봤다.시선이 뒤엉키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그러나 몸을 돌려 반대편 소파에 앉은 연정훈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샤워하고
작은 무드 등만 켜진 안방에서 안시연은 얇은 원피스 한 장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소리를 죽였다.연정훈은 침대 끝에 앉아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히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입을 맞췄다.얇은 이불 한 장을 사이 두고 연정훈은 그녀의 향기에 취할 것 같았다.안시연은 온몸에 작은 개미가 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눈을 떠보니 연정훈은 여전히 가운 차림이었고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연정훈은 빨갛게 물든 안시연의 볼과 촉촉이 젖은 눈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그 사람이 널 괴롭혔다고 왜 말하지 않았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입을 확 깨물고 싶었다.질문을 하려면 질문만 하지, 왜 자신을 이렇게 안달 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래서 발가락을 오므리며 달뜬 숨을 숨겼고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훈 씨에게 문제가 될까 봐.”역시 안시연은 연정훈을 위해 참은 게 맞았다.원하는 대답을 들은 그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안시연은 눈앞이 하얗게 변해갔다.그는 그녀의 몸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고 성감대를 정확히 자극해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리고 후끈 달아오른 그녀를 안아 올려 자기 몸 위로 앉게 했다.안시연은 온몸이 나른해 가만히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땀에 흠뻑 젖은 그녀는 핫팩처럼 뜨거웠다.안시연이 살짝 지쳐 보여도 연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그녀를 매만졌다.“그날 나한테 거래하고 싶다고 했잖아.”연정훈이 그때의 거래를 입에 올려도 몸이 달아오른 안시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는 그녀의 귓불을 깨물고 그녀를 자극했다.“왜 결국 포기했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어 겨우 이성을 유지했다.그녀는 그를 위해 포기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교수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손실이 생길까 그랬죠.”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주씨 가문에게 다른 조건을 말했어야지. 자신을 위해 퇴로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대화를
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바라봤다.어두운 불빛 아래 그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하지만 연정훈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안시연은 심장이 떨려왔고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이성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연정훈은 바로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이어 연정훈이 안시연의 입술을 탐하고 그녀는 겨우 남은 공간으로 숨을 헐떡였으나 그는 남은 숨마저 모조리 빼앗아 갔다.“천천히... 조금만 천천히...”안시연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긴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평소 금욕의 얼굴을 하고 지내던 연정훈은 모든 가면을 벗고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그는 안시연의 얇은 원피스를 벗기지 않고 어깨끈만 내려 치마가 허리춤에서 파도처럼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그녀의 두 손을 뒤로 모으면 더 마음에 들었다.안시연은 숨을 헐떡이며 지쳐 쓰러질 위기였으나 연정훈은 그녀에게 물을 챙겨주며 체력을 보존시켰다.그러나 안시연은 물을 마시다가 또 연정훈에게 입을 뺏겼다.둘은 장소를 거실로 옮겼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소파 위로 올렸다. 다시 입을 맞추는 연정훈은 아주 부드러웠다.그렇게 방심한 안시연은 또 천천히 그에게 잠식되었다.이제 눈물 흘릴 힘조차 없었으나 연정훈은 계속 키스를 이어갔다.그는 그녀를 이렇게 다독였다.“조금만 힘 풀어. 힘 풀면 다 괜찮아질 거야.”‘거짓말! 다 거짓말이야!’안시연은 오늘 밤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딸깍.침대 헤드의 무드 등을 켜는 순간 안시연은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이제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연정훈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 위로 눕히고 자리에서 떠났다.겨우 눈을 뜬 안시연은 연정훈이 한 무더기의 무언가를 휴지통에 버리는 걸 목격했다.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나쁜 놈.’마지막에 연정훈이 안전 조치를 제대로 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저번에 아이를 낳아 날 협박하겠다고 했잖아. 기회 줄게. 아기 가져봐.”깜짝 놀란
늦은 밤.안시연은 이불로 온몸을 돌돌 말고 눈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멀지 않은 곳의 주방에서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직접 만든 만둣국이 먹고 싶다는 건 사실 일부러 고집을 피운 것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고작 만둣국 하나는 연정훈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안시연이 예상하지 못했던 건, 연정훈이 연락을 돌려 예쁘게 빚은 만두를 배송받아 지금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은근슬쩍 주방을 살폈다.검은색 가운 차림은 정장도 아닌데 고급지고 우아해 보였다.연정훈이 요리를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나 이것저것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꽤 믿음직스러웠다.그러다가 불이 세져 만둣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난 육수 싫어요.”안시연이 입을 열었다.“육수밖에 없어.”“뜨거운 물도 없어요?”‘육수밖에 없긴 바보 같아.’“...”안시연의 날카로운 지적에 연정훈은 말없이 다시 물을 받았다.자신을 온밤 괴롭혔던 연정훈을 생각하며 만약 흐지부지한 만둣국이 완성되면 그녀는 그를 실컷 놀려먹으려고 했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완벽한 만둣국이 완성되었다.‘쳇. 배송받은 만두가 좋아서 그런 거야.’연정훈이 안시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안시연은 경계의 눈초리로 이불을 더 꽁꽁 싸매고 식탁에 앉았다.연정훈은 할 말이 없었다.체력적으로는 연정훈도 똑같이 소모되었을 텐데 그는 배가 고프지도 힘들지도 않은지 그는 안시연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안시연이 드디어 맛을 보았다.예상과는 달리 간이 적당하고 입에 맞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어때?”안시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며칠 전 가게에서 먹었던 만둣국보다 별로예요.”“맛이 없어?”“가게보다 조금 별로?”“이 만두 그 가게 꺼야.”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만두 맛은 같아요.”연정훈은 그제야 안
안시연은 만둣국을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웠다.배를 두드리면 통통 소리도 날 것 같았다.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야식을 먹었으니 조금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그래서 몸에 걸쳐진 이불을 보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이불로 온몸을 두른 안시연이 몸을 일으키자 연정훈이 바로 잡아당겨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버렸고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은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밥 먹고 바로 눕게?”“옷 갈아입고 산책 좀 하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없이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다.안시연은 그제야 입가도 닦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손을 뻗어 직접 닦으려는데 연정훈은 고집을 피우며 안시연이 어린아이인 듯 직접 닦아줬다.입가를 닦은 휴지를 버리고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옷 입고 와.”안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안방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으며 방금까지 입고 있던 원피스는 당연하게도 더럽혀졌다.안시연은 안전하게 긴 소매와 긴 바지로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왔다. 맨발로 거실의 카펫을 밟는 기분이 좋았다.연정훈은 가만히 앉아 안시연을 지켜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안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생각해 보니 배가 그렇게 부른 것도 아닌 듯싶어 안시연은 안방으로 돌아가 씻고 누웠다.“먼저 잘게요.”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이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누운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품에 가뒀다.편히 자고 싶었던 안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전에 기사를 하나 봤는데요. 어느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밤새 팔베개를 해주다가 이튿날에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는 거예요.”연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데?”“병원에서 가서 검사를 해보니 신경이 괴사되어서 팔을 잘랐대요.”그리고 그의 팔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말했다.“지금 우리 이 자세가 바로 그래요.”“.
연정훈이 이철수를 폭행한 사건은 알 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건이었지만 소문이 크게 퍼지지 않았다.재벌가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고 모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은 부승희한테서 이철수가 아직 입원 중이고 연정훈은 병문안 한번을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병문안을 가지 않은 건 그렇다고 해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니까요. 그래도 이철수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승우를 통해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부탁하기도 했어요.”안시연은 묵묵히 주먹밥을 먹었다.그녀는 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주임 사무실에서 호출이 왔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다름 아닌 연명걸이었다.연명걸은 아주 친절한 말투로 그녀더러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연 대표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시연 씨가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해요.”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연명걸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이철수 씨의 사건은 저도 따로 알아봤는데 그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먼저 결례를 범한 것 같네요.”안시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연명걸은 사무실 책상에 몸을 기댄 채로 마치 일상 대화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연정훈이 폭행을 했다더라도 잘못은 이철수 쪽에 있으니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면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에요.”연명걸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연정훈도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니 옆에 원수를 많이 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하고 싶은 말씀 하세요.”연명걸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솔직하게 말할게요. 연정훈 씨에게 대신 부탁드려주세요.”“부탁이요?”“네. 이제 그만 이씨 가문에 대한 억압을 멈추어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안시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이 먼저 주먹
연명걸은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먼저 안시연에게 USB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USB는 암호로 잠겨 있었지만 전문 인력이 손만 보면 해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연명걸은 호텔 담당자를 지시해 안시연에게 전화하게 했다.“안시연 씨,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젯밤 연회에 참석한 고객 중 한 분이 회사 USB를 유실하셨는데 카메라 확인 결과 안시연 씨가 무심결에 챙겨가신 걸 확인했습니다.”안시연은 전화를 받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연명걸이 이철수를 밀어내고 안시연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담았으며 특별한 물건은 기억나지 않았다.“지금은 회사에 있어 확인이 불가능하고 확인 후 저한테 소지품이 있으면 바로 퀵으로 보내드릴게요.”호텔 담당자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안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통화를 종료했다.재고 조사 업무도 거의 막바지에 달하고 이제 경인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주임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다.“함풍목재 경영은 그럭저럭해도 장부는 정말 아무 문제도 찾을 수가 없네요.”안시연도 동감이었다. 정말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여러 선배도 말을 보탰다.“이렇게 문제가 티끌 하나도 없는 장부는 처음이에요.”안시연은 선배를 바라보다가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그때 주임이 말했다.“아무 문제가 없는 건 좋은 일이지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어쩌면 내일이면 경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사무실은 환호성이 이어졌다.출장에 몸이 힘들었지만 수고비와 이어질 휴가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안시연도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오전 소현정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대충 뜻은 연정훈과의 관계가 부적절하니 빨리 끝내라는 것이었다.외할머니도 자주 전화를 걸어와 그녀가 보고 싶다고 전했다.안시연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일에 몰두했다.드디어 퇴근 시간 전으로 모든 업무를 끝마쳤다.주임이 휴가라고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다.안시연은 바로 부승희의 연락을 받았는데 교외
의도와는 다르게 부승원의 비밀을 듣게 된 안시연은 빠르게 걸음을 멈춰 섰다.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부승희는 드롱의 전국 입점권을 따내고 기쁜 마음에 찻집에서 한턱을 내기로 했다.부승원과 한우빈을 제외하고 몇몇 낯선 얼굴도 보였다.찻집은 규모가 꽤 컸으며 저녁 식사는 그중 한 방으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작은 별장 같은 공간에서 커튼만 열면 전체 차밭이 보였다.저녁노을이 진 차밭은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안시연이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사람이 자리에 착석했고 연정훈의 왼쪽 자리만 비어 있었다.부승희가 그녀를 그쪽으로 밀었다.“빨리 앉아요. 안시연 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고요.”안시연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오늘이 축하 파티인 줄도 모르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다음번에 보충해도 될까요?”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편한 대로 해요.”이어 웨이터가 요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웨이터들은 모두 선명한 이목구비에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는데 안시연은 속으로 평범한 웨이터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이 웨이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옆에 앉은 여자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그 여자는 바로 아까 부승원과 함께 있었던 소녀였는데 안시연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활짝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귀여운 송곳니가 톡 튀어나왔다.“...”역시 19살의 소녀는 달랐다.이런 생각에 안시연은 또 몰래 부승원을 살폈다.안시연은 부승원이 연정훈의 친구 중에서 가장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앞접시에 고기 한 점이 놓였다.“얼굴에 금이라도 붙었어?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불만이라는 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시연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귀엽잖아요.”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부승원이 귀여워?’“저 아이는 부승원 변호사님 여자 친구인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