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이 갑자기 멈춰 섰고 연정훈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파카의 발소리는 마치 거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걱정된 안시연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연정훈을 밀어냈고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너무 급한 나머지 하마터면 연정훈의 손을 밟을 뻔했다.연정훈은 아랫니를 꽉 깨물며 겨우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혔다.안시연은 빠르게 두 알파카를 다시 작은 방에 가뒀다.안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 옆에 서서 말했다.“문을 잠그려면 키가 필요해요. 나비는 똑똑해서 스스로 문을 열 수 있는데 제가 키를 찾지 못해서...”연정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알파카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듣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불이 꺼진 캄캄한 방에서 안시연은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연정훈은 숨을 참다가 그녀를 순식간에 자신의 아래로 깔아버렸다.안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급하게 작은 방을 다녀왔던 터라 분위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연정훈은 굳어버린 그녀의 몸이 느껴졌고 천천히 다시 애무를 시작했다.그렇게 안시연도 달뜬 숨을 내쉬고 연정훈이 거친 숨을 내쉬게 되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한쪽 손을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꽉 쥐었다.이제 다시 시작해보려는데...탁탁탁!발소리가 또 들려왔다!“...”안시연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나비가 또 방 밖으로 나온 걸까?안시연은 예전부터 연정훈만큼 집중하지 못했으며 연정훈의 리드에 겨우 따라가는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긴장하면 몸도 따라서 굳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몸이 조금씩 굳어가는 걸 보며 짜증 섞인 얼굴로 목에 키스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말했다.“힘 풀어.”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최대한으로 힘을 풀었다.하지만 곧 생리라 그런지 아랫배도 계속 아파오고 오늘 밤은 하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방밖에는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안시연은 또 방 밖으로 나가본다면 연정훈이 기분 나빠할 걸 알았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일을 마치고 나가보면 그만이었다.그래
새벽.안시연은 두 알파카를 재차 작은 방에 가두고 다른 도구로 문손잡이를 고정한 후 방으로 돌아갔다.안방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연정훈은 가운을 입은 채로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가운이 흩어져 있는 걸 보아 분노를 참고 세수를 하느라 가운이 풀어 헤쳐진 거라 생각되었다.안시연은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댔다.몰래 연정훈의 얼굴을 살펴보니 인상이 최대로 찌푸려져 있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 생각만 하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대체 양나비는 어떻게 침착하고 정확하게 연정훈의 얼굴을 묘준할 수 있었던 걸까?그 생각에 안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이 차가운 얼굴을 돌렸다.안시연이 빠르게 웃음을 참았으나 한번 터진 웃음을 끊을 수는 없었고 억지로 입을 틀어막았다.연정훈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양혁수의 성을 이어받은 알파카였다. 그런데 그 알파카가 오늘 밤 잠자리를 방해하고 얼굴에 침까지 뱉어버렸다.게다가 안시연은 이 상황을 아주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연정훈은 말없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안시연은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가고 싶었다. 등 뒤가 바로 문이었음에도 안시연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앞으로 다가갔고 안시연은 기회를 보아 옆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긴 팔로 순식간에 그녀를 낚아챘다.안시연은 바로 그의 품에 안겨버렸고 두 다리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으며 등 뒤로는 문이 닿았다.안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연정훈이 침을 꿀꺽 넘기며 물었다.“지금 이 상황이 웃겨?”“...”깜짝 놀라버려 다시 웃음이 터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연정훈의 물음은 다시 안시연의 웃음 버튼을 눌러버렸다.풉.???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고 있었으나 덕분에 어깨가 자꾸 들썩였다.“죄, 죄송해요. 참지 못하고 그만!”“...”“나비가 기분이 좋지 않은가 봐요..
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입을 다물었다.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아니요.”연정훈은 겁에 질린 그녀를 보며 왠지 마음이 아파졌다.연정훈이 아무 말 없자 안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예전처럼 도와줄 수는 있어요...”대충 말해도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 수 있었다.예전의 연정훈이었다면 스스럼없이 부탁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가지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강제로 가지거나 그녀가 배려하는 건 싫었다.그래서 연정훈은 안시연을 내려주었다.“자자.”안시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연정훈은 벌써 몸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챘다.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한 안시연이 조용히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불 끌게요.”안시연이 말했다.“응.”방안은 다시 어두워졌다.이번에는 알파카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연정훈은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눈을 감았지만 잠에 들 수가 없었다.안시연은 바로 자신의 옆에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녀의 체온과 체향이 그를 둘러쌌다.연정훈은 몸이 들끓는 게 느껴졌으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이러한 마음은 침대 위의 안시연이 아닌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단지 미소일 뿐이었으나 연정훈은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그는 온밤 생각에 뒤척였고 다시 잠에 들 수가 없었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옆자리가 텅 빈 걸 발견했다.연정훈은 옆방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연정훈이 양주를 찾은 소식이 전해진 건지 앞다투어 그와 약속을 잡았다.안시연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알파카의 사료를 챙겨주고 연정훈을 따라 방을 나섰다.“아침 먹으러 가요?”그녀의 물음에 연정훈이 답했다.“옷 갈아입어. 부승희가 아침밥 사준 대.”안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부승희 씨도 양주에 온 거에요?”“응.”안시
부승희는 우유 한 컵을 들이마시며 말했다.“그래요! 당연히 그래야죠!”안시연은 미소로 부승희의 말에 대답했다.연정훈은 덤덤하게 말했다.“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 없어. 적응하는데 어려우면 다시 경인으로 돌아오면 돼. 그건 창피한 일이 아니야.”안시연은 고집이 센 편이었고 연정훈의 앞에서는 특히 뜻을 굽히지 않았다.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한마디 했다.“견뎌낼 수 있어요.”연정훈은 고집을 피우는 그녀의 모습에 두 마리의 알파카가 떠올랐다.양혁수를 고사하고 안시연은 알파카 두 마리와 참 닮았다.이승우는 두 사람 사이 작은 갈등을 눈치채고 빠르게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는 한편으로 연정훈이 말을 참 직설적으로 한다며 나무랐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연정훈의 편을 들어주려고 이렇게 말했다.“양주까지 온건 안시연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며? 또 다른 이유는 없어?”안시연이 자리에 굳었다.‘보... 보고 싶었다고?’연정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승우를 차갑게 노려봤다.이승우는 연정훈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부승희는 바로 구역질했다.연정훈은 이승우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으므로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중요할 볼일이 있었어.”“예를 든다면?”연정훈이 고민하다가 답했다.“주씨 가문과 노인 복지 시설의 전국화에 대해 얘기해 봐야 해.”꽤 자세하게 늘여놓은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안시연은 다시 음식을 입에 넣었다.‘그럼 그렇지.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잖아.’하지만 이승우는 속으로 연정훈이 구제 불능이라며 욕하고 있었다.“주운성네 가문을 말하는 거야?”“응.”이승우는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정인 그룹이 큰돈을 들여 전국에 노인 복지 시설을 놓으려는 거면 주씨 가문이 잘 어울리긴 하지.”“왜?”부승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최근 몇 년 동안 부승희도 개인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연차가 짧아 이승우 무리와는 비길 수가 없었다.이승우가 설명했다.“주씨 가문에는 사람이 많아. 전국 각지의 의료 시스템에
“생일 파티는 무슨. 기일 아니야?”이승우의 말에 안시연도 관심을 보였다.“기일이요?”이승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냅킨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주씨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주씨 할머니가 신경 쇠약이 왔어요.”“노부부는 쭉 사이가 좋으셨어요.”“그렇지.”이승우가 말을 이었다.“하지만 할머니가 그렇게 된 건 또 다른 마음의 병이 있어요. 아이가 일곱이라도 딸은 하나였는데 딸이 스무 살을 넘기자마자 병에 걸려 죽었거든요.”안시연이 탄식했다.“그래서 주씨 가문은 매년 죽은 아가씨 기일을 챙겼는데 할머니가 여든이 넘고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고 생각하셨는지 이번에는 돌아간 아가씨의 생일 파티를 연다는 소식이 있어요.”부승희가 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주씨 가문도 참 효성이 지긋해요. 할머니가 원하는 건 모두 하잖아요.”“할머니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보죠.”안시연이 말했다.“말은 그래도 이번 생일 파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빚지게 되겠어요?”부승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이 오빠만 봐도 그래요. 오빠 같은 사람이 직접 여기까지 왔는데 말을 아직도 꺼내지 못한 걸 봐요. 주씨 가문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안시연은 연정훈이 급하게 이곳까지 온 이유가 그제야 납득이 갔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을 바라봤다.창가 앞 슈트 차림의 연정훈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자세였다. 옆선은 아침 햇살에 비쳐 유난히 차갑고 우아하게 보였다. 상대가 말을 건네도 연정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이번은 우리 두 가문이 처음으로 협력하는 거라 양민아를 보냈어. 우리 민아는 주운덕의 부인에게서 직접 그림을 배웠고 주씨 가문 사람들이 민아를 조금 챙겨줄 거로 생각해.”양지원의 말에 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며 말을 아꼈다.양지원은 바로 눈치채고 말을 돌렸다.“하지만 민아가 요즘 할 일이 있다고 하더니 너와 함께 이동하는 건 어렵겠어.”연정훈은 그제야 대답했다.“저도 양민아의 능력을 믿어요.”양지원은 그의 뻔한 거짓말을 들춰
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정말 집에서 시험공부하고 싶었다.연회는 재미가 없었고 들어본 데에 의하면 무려 고인의 생일 파티라 더욱 가고 싶지 않았다.‘참 나. 연정훈은 점점 알 수가 없어.’그녀는 고개를 묻고 밥을 먹었다.그때 앞접시에 새우 두 알이 놓였다.“고개 들고 밥 먹어.”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마치 괴롭힘을 당한 것 같았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제로 어깨를 쭉 폈다.맞은편에 앉은 부승희가 웃음을 터뜨렸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리자 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두 사람 정말 아빠와 딸 같은 모습이 있어요.”안시여은 할 말이 없었다.가끔 연정훈에게는 고지식한 부분이 있었다.음식 습관, 수면 리듬, 언어 선택 부분에서도 가끔 같은 나이대의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묵인하는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이승우가 일부러 안시연에게 물었다.“연정훈이 좀 심심하지 않아요?”“그런 건 아니에요.”“양혁수랑 비교하면요?”안시연은 갑자기 어젯밤 알파카가 연정훈에게 침을 뱉던 모습이 떠올랐다. 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이를 꽉 깨물었는데 시간이 3, 4초 정도 멈춰진 것 같았다.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승우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양혁수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와요?”???빠르게 웃음을 지우고 안시연이 말을 이었다.“아니에요!”이승우는 쯧쯧 소리를 냈다.안시연은 초조한 얼굴로 연정훈을 바라봤다. 어젯밤 일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무표정의 연정훈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앞접시의 새우를 보며 넋을 놓았다.그때, 젓가락이 휙 나타나 새우를 낚아채 쓰레기통에 확 버렸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이승우와 부승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의 질투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밥 한 끼에 기진맥진해진 안시연은 서둘러 출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드디어 아침 식사가 끝나고 그들은 나란히 레스토랑을 벗어났다.
이승우가 양주를 찾은 건 여행 겸 겸사겸사 부승희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두 사람은 함께 차에 오르며 안시연을 함풍목재로 바래다주었다.안시연이 차에 오르고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안시연 씨.”그러나 상대는 낯선 남자였고 안시연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그쪽은 누구시죠?”“저는 양혁수의 경호원입니다.”“네. 양혁수 씨는요?”“도련님은 방금 양 대표님의 사람들에 의해 경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아마도 자의는 아닐 것이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양혁수에 동정을 표했다.경호원이 말을 이었다.“도련님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네, 하세요.”“연정훈 대표에게 전화로 이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냐, 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안시연이 이마를 쥐었다.“그리고 당분간 나비와 영준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딸과 손자가 함께 있으니 외간 남자와 거리를 지키라고 했습니다.”“...”“다른 말은 없었나요?”“있습니다.”경호원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도련님께서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하셨습니다.”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또 있어요?”“네. 도련님께서 안시연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면 앞으로 매일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을 덧붙여 달라고 하셨어요.”안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네. 모두 전달받았습니다. 저도 같은 말로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안시연은 통화를 마치고 기분이 퍽 좋아졌다.앞좌석의 부승희와 이승우는 서로를 마주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함풍목재에 도착하고 안시연이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안으로 들어섰다.안시연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부승희가 이승우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안시연에게 알려주지 않았어?”“뭘?”“모른 척하지마!”이승우가 입을 삐죽였다.“어젯밤 취한은 아주 이상하잖아. 안시연이 평소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산적이 없다면 임유정이 벌였다는 걸 의미해. 안시연은 지금 연명걸 쪽에서 일하고 있으니 정훈 오빠가 당당하게 안시연을 소개해 연명걸이 건드릴
블라인드 뒤에서.연명걸과 임유정은 끈적이는 스킨십을 나눴다. 임유정은 연명걸의 품에 안겨 냉소적으로 말했다.“내가 저딴 여자를 그렇게 신경 쓸 것 같아요?”연명걸은 임유정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신경 안 쓰여?”임유정이 말했다.“내가 신경 쓰이는 건 당신뿐이에요.”연명걸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가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 임유정이 직설적으로 말했다.“함풍목업은 이미 당신의 손에 쥐어졌잖아요. 앞으로 더 걸어가 보고 싶지 않아요?”연명걸이 눈치채고 물었다.“나도 주씨 가문과 협력을 시도해 보라는 말이야?”“연명훈도 가능한데 당신은 왜 안 되겠어요?”연명걸은 임유정이 아직도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하는 것도 연정훈이 놓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임유정은 멍청했지만 방금 제안은 꽤 마음에 들었다.“연정훈과 경쟁은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양지원도 양주로 왔다고 들었어.”임유정이 인상을 찌푸렸다.“연정훈에게 양지원이 있고, 당신에게는 내가 있는데 뭐가 두려워요?”연명걸은 마음이 점점 동했다.임씨 가문의 재력은 아주 두터웠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더구나 직접 문 앞까지 찾아와준 미인도 있지 않은가?연명걸은 고개를 숙여 임유정의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네가 옆에 있으면 당연히 안심되지. 하지만 다시 안시연을 골탕 먹이는 일은 하지 마. 어젯밤 이철수가 너무 바보같이 움직여 연정훈은 이미 우리가 벌인 일을 알아차렸을 거야. 그러다가 주식 이전에 어려움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떡해!”임유정은 불만이 많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이 일만 끝내면 다시 안시연을 철저히 무너뜨릴 것이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바쁘게 일했고 저녁 시간이 되자 부승희가 직접 그녀 마중을 왔다.“부승희 씨. 저는 가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아요.”안시연이 부드럽게 거절했다.아직 풀어야 하는 문제가 산더미였다.그러나 부승희는 안시연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새 옷 살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