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가 양주를 찾은 건 여행 겸 겸사겸사 부승희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두 사람은 함께 차에 오르며 안시연을 함풍목재로 바래다주었다.안시연이 차에 오르고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안시연 씨.”그러나 상대는 낯선 남자였고 안시연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그쪽은 누구시죠?”“저는 양혁수의 경호원입니다.”“네. 양혁수 씨는요?”“도련님은 방금 양 대표님의 사람들에 의해 경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아마도 자의는 아닐 것이다.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양혁수에 동정을 표했다.경호원이 말을 이었다.“도련님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네, 하세요.”“연정훈 대표에게 전화로 이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냐, 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안시연이 이마를 쥐었다.“그리고 당분간 나비와 영준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딸과 손자가 함께 있으니 외간 남자와 거리를 지키라고 했습니다.”“...”“다른 말은 없었나요?”“있습니다.”경호원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도련님께서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하셨습니다.”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또 있어요?”“네. 도련님께서 안시연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면 앞으로 매일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을 덧붙여 달라고 하셨어요.”안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네. 모두 전달받았습니다. 저도 같은 말로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안시연은 통화를 마치고 기분이 퍽 좋아졌다.앞좌석의 부승희와 이승우는 서로를 마주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함풍목재에 도착하고 안시연이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안으로 들어섰다.안시연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부승희가 이승우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안시연에게 알려주지 않았어?”“뭘?”“모른 척하지마!”이승우가 입을 삐죽였다.“어젯밤 취한은 아주 이상하잖아. 안시연이 평소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산적이 없다면 임유정이 벌였다는 걸 의미해. 안시연은 지금 연명걸 쪽에서 일하고 있으니 정훈 오빠가 당당하게 안시연을 소개해 연명걸이 건드릴
블라인드 뒤에서.연명걸과 임유정은 끈적이는 스킨십을 나눴다. 임유정은 연명걸의 품에 안겨 냉소적으로 말했다.“내가 저딴 여자를 그렇게 신경 쓸 것 같아요?”연명걸은 임유정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신경 안 쓰여?”임유정이 말했다.“내가 신경 쓰이는 건 당신뿐이에요.”연명걸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가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 임유정이 직설적으로 말했다.“함풍목업은 이미 당신의 손에 쥐어졌잖아요. 앞으로 더 걸어가 보고 싶지 않아요?”연명걸이 눈치채고 물었다.“나도 주씨 가문과 협력을 시도해 보라는 말이야?”“연명훈도 가능한데 당신은 왜 안 되겠어요?”연명걸은 임유정이 아직도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하는 것도 연정훈이 놓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임유정은 멍청했지만 방금 제안은 꽤 마음에 들었다.“연정훈과 경쟁은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양지원도 양주로 왔다고 들었어.”임유정이 인상을 찌푸렸다.“연정훈에게 양지원이 있고, 당신에게는 내가 있는데 뭐가 두려워요?”연명걸은 마음이 점점 동했다.임씨 가문의 재력은 아주 두터웠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더구나 직접 문 앞까지 찾아와준 미인도 있지 않은가?연명걸은 고개를 숙여 임유정의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네가 옆에 있으면 당연히 안심되지. 하지만 다시 안시연을 골탕 먹이는 일은 하지 마. 어젯밤 이철수가 너무 바보같이 움직여 연정훈은 이미 우리가 벌인 일을 알아차렸을 거야. 그러다가 주식 이전에 어려움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떡해!”임유정은 불만이 많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이 일만 끝내면 다시 안시연을 철저히 무너뜨릴 것이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바쁘게 일했고 저녁 시간이 되자 부승희가 직접 그녀 마중을 왔다.“부승희 씨. 저는 가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아요.”안시연이 부드럽게 거절했다.아직 풀어야 하는 문제가 산더미였다.그러나 부승희는 안시연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새 옷 살
상대는 바로 양지원이었다.부승희는 바로 안시연을 옆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원 언니. 제가 예약한 거예요.”양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피팅실 직원을 바라봤다.직원은 당황해 두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부승희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고 양지원도 침착하게 답했다.두 사람의 대답이 끝나고 예약을 확인한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예약하신 게 맞습니다. 하지만 모두 연정훈 님 이름으로 예약하셔서 같은 분으로 착각했습니다.”부승희가 낮게 욕을 읊조렸다.안시연은 부승희가 연정훈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하지만 부승희는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고 직원에게 말했다.“그래도 선후 순서라는 게 있지 않겠어요?”“예약한 시간을 보면 부승희 씨가 먼저 예약을 잡은 게 맞습니다.”부승희가 당당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지원 언니, 어떡해요? 이번에는 저희한테 양보하셔야겠는데요?”양지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따라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승희 씨. 피팅 예약한 건 승희 씨가 입을 옷을 맞추려는 거예요?”양지원의 물음에 부승희는 가방을 소파 위로 휙 던지고 털털하게 자리에 앉았다.“제가 아니라 안시연 씨에게 맞춰주려는 거예요.”양지원은 그 말에 덤덤하게 안시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안시연 씨도 드레스 좋아하시나 봐요?”안시연은 무뚝뚝하게 말했다.“딱히요.”“그럼, 저한테 양보하시죠.”“왜요!”부승희가 불만을 터뜨렸다.“승희 씨. 오늘은 제가 예약한 게 아니에요.”“그럼 누가 예약했다고...”“사모님이 대신 예약해 주셨어요.”“...”‘젠장!’부승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양지원만 보면 화가 났으므로 안시연에게 눈치를 줬다.‘빨리 한 방 먹여줘요!’‘가만히 서서 뭐 해요!’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양지원을 무시한 채로 낮은 소리로 부승희에게 물었다.“드레스 좋아해요?”“그건 왜요?”“좋아하면 연정훈 씨에게 전화를 걸
여자 셋이 모이면 바가지가 깨진다는데 여자 넷이 모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양지원은 사이즈를 모두 재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와 드레스를 골랐다.양지원과 임유정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같은 적인 안시연이 있을 때는 오히려 쿵짝이 맞았다.부승희는 안시연을 도와 드레스를 골랐으나 마음에 드는 건 모두 양지원과 임유정이 후보 드레스로 가져가 버렸다.“오직 한 벌만 맞출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굳이 이렇게 많이 후보로 가져갈 필요 있어요?”부승희가 분노를 터뜨리자 양지원은 덤덤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오직 한 벌만 맞출 수 있으니 더 신중해야죠.”임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말에 동의해요.”부승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안시연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언니들, 제가 평소 직설적인 편이라 솔직하게 말할게요. 드레스는 어리고 예쁜 사람이 입어야 어울려요. 아무나 다 어울리는 게 아니라고요.”양지원과 임유정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봤다.안시연은 아직도 고개를 파묻고 문제를 풀고 있었다.부승희는 안시연의 볼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이 콜라겐 꽉 찬 얼굴을 봐요.”안시연은 문제에 정신이 팔려 대화를 듣지 못했고 볼을 찌른 부승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부승희는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이 미모를 좀 봐요!”???“...”부승희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2층은 잠시 평화를 되찾았다.그때 직원이 양지원을 찾았다. 피팅 해줄 선생님이 도착했다.양지원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부승희는 크게 쳇 하고 소리를 냈다.임유정도 안시연에게 시비 걸려는 마음을 지웠다. 자신의 상대는 별 볼 것 없는 안시연이 아닌 양지원이라고 주문을 걸었다.이번 주씨 가문 연회에서는 반드시 양지원을 외모로 이길 거라고 다짐했다.그리고 임유정은 마음에 드는 드레스 두 가지를 골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에는 부승희가 안시연을 위해 골라 놓은 드레스가 포함되었다.부승희는 화가 나 임유
안시연은 한 번에 회계사 시험 세 과목을 넘길 생각이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벌써 빠듯했다.더구나 낮에는 회사도 나가야 했다.스트레스가 많을수록 안시연을 자신을 감췄다.이런 상황에서 연정훈을 상대하는 건 오히려 더 쉬웠다.더 이상 연정훈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옷을 맞추지 않은 게 다른 사람한테 뺏겨서 그래?”연정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제대로 듣지 못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네?”연정훈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잠시 고민하던 안시연이 펜을 내려두고 연정훈을 향해 걸어갔다.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다리 위로 올렸다.그는 평소에도 이런 행동을 자주 했었으나 방금 생리를 시작한 안시연은 배가 아파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왜 그래?”안시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살살 해요.”“어디 아파?”안시연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생리가 와서 배가 아파요.”그 말에 연정훈은 손의 힘을 풀고 그녀를 부드럽게 품에 안아 가슴에 얼굴을 기대게 했다.“많이 아파?”“그 정도는 아니에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안시연의 얼굴을 살폈다. 어쩐지 오늘따라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매달 아픈 거야?”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가끔 아파요.”“내일 병원 가자.”“아니에요. 병원 가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왜 이런 병엔 약도 없는 거야?”안시연이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이며 말했다.“병원 여러 번 다녀왔는데 큰 문제는 없대요. 의사가 결혼하면 병이 낫는다는데 결혼이 만병통치인 것처럼 말하더라고요.”처음에는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는데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에 안시연이 말을 덧붙였다.“아이 낳으면 나아질 거래요.”연정훈의 침묵에 안시연이 당황했다.자꾸 그에게 결혼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래서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다.연정훈은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사람을 시켜 생강차를 사 올게.”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얇은 옷차림의 안시연을 보며 옆에 놓인 담요를 둘둘 말아
안시연은 다정한 연정훈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디저트는 정말 달고 맛있었으며 단 음식은 기분 전환에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입가에 가져대는 족족 삼키는 안시연에 연정훈은 그녀를 아기 돼지처럼 떠먹였다.그러다가 질린 안시연이 고개를 돌렸다.연정훈이 스푼을 내려두며 말했다.“이건 별로야?”안시연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테이블을 가리켰다.“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연정훈은 디저트를 쭉 살폈다.뭐든지 한입씩만 먹어 티도 안 났다.안시연이 마지막으로 케이크 한입을 삼키고 연정훈은 드디어 스푼을 완전히 내려뒀다.“너무 많이 시켰어요.”“남은 건 알파카 두 마리 줘.”그 말에 멀지 않은 곳에서 양나비가 귀를 쫑긋 세웠다.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어느 알파카가 케이크를 먹어요?”“알파카는 잡식 동물이잖아.”“그래도 케이크는 안 먹죠.”연정훈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알파카를 보며 말했다.“저 아이 불러와 봐.”“왜 직접 부르지 않고요?”“이름이 별로야.”“...”‘그래.’안시연이 입술을 매만지다가 양나비 이름을 두어 번 불렀다.탁탁탁.나비가 걸어왔다.연정훈은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똑똑하지 않은 애완동물은 싫어했다.지금까지 알파카는 연정훈의 비호감 애완동물 1순위에 놓였다.그는 스푼으로 접시 끝을 두어 번 두드려 먹어도 된다는 표시를 했다.알파카는 고개를 내밀고 여러 케이크를 킁킁 냄새 맡았다.향이 꽤 마음에 든 건지 나비는 바로 입을 벌렸다.연정훈이 안시연을 향해 말했다.“봐봐, 뭐든지 다 먹잖아.”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비는 먹는 행동을 멈추고 차가운 눈길로 연정훈을 바라봤다.예민한 안시연은 이 녀석이 입을 벌리는 행동을 예측해 빠르게 손으로 막아섰다.“뱉지 마! 뱉지 마!”연정훈도 얼굴을 굳혔다. 옆으로 피하는 것과 동시에 안시연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손에 뱉지 못하도록 했다.두 사람 모두 바짝 긴장해했다.그러나 양나비는 아무것도 뱉지 않았다.안시연은 손바닥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안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정훈은 흥미를 잃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몸을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그녀를 안고 얼굴을 보면서 귀여워하는 것도 몸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일이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한 후 손바닥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덮었다.“아프면 일하지 말고 오늘 밤에는 일찍 쉬어.”안시연은 약간 의아했다. 적어도 다른 방법으로 시중 들어야 하는 줄 알았다.그녀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녀를 안고 있으니 하루의 피로가 싹 다 풀렸다.안시연은 조용히 그의 관자놀이를 만지더니 살살 문질렀다.그렇게 한참 조용히 있다가 연정훈은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알카파 두 마리는 서브룸에 가둬두었다.안시연은 잠자리에 들 때, 달그락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다시는 뛰어나오지 않을까요?”“열쇠를 가져다가 문을 잠갔어.”“...”이렇게 진지할 일인가? 그녀는 너무 웃겼다.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안시연은 대답한 후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연정훈은 그녀에게 옷을 맞춰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 약속을 지켰다.주씨 가문 파티 당일, 밖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그는 직접 함풍에 그녀를 데리러 왔다.여전히 전철웅의 가게로 갔는데, 이번에는 뒷문으로 들어갔다.전철웅의 막내 아들 전이수가 문을 열어주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전이수는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아버지가 요 몇 년 몸이 안 좋아서 옷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요. 이틀 동안 야근해서 만든 새 옷을 방금 보냈고, 지금 쉬러 들어가셨어요.”설명을 들은 안시연은 그 새 옷이 양민아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이수는 그녀와 연정훈을 데리고 뒷건물로 가면서 말했다.“사실 지금 제작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에요. 아버지가 손재간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어쨌든 연세가 있으셔
전이수가 설명했다.“이 옷장 안에 있는 옷 두 벌 다 아버지께서 가장 자랑스러워하셨던 작품이에요. 안타깝게도 옷 주인들은 다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요. 옷이 완성되기도 전에 먼저 떠나버렸으니, 아쉽게 된 거죠.”그 말을 듣는 안시연의 마음이 쓰라렸다.하지만 안시연은 진심으로 그 옷이 마음에 들었다.“정말 예뻐요.”안시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전이수는 다른 옷 몇 벌도 꺼내 보여주었지만 안시연의 눈에는 옷장 속에 있던 그 옷밖에 들어오지 않았다.“저 옷 좀 입어 봐도 될까요?”결국, 안시연이 입을 열었다.전이수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했다.“왼쪽 옷의 유래는 저도 알고 있지만 오른쪽 옷의 내력은 아버지께서 말해주신 적이 없어요.”“그럼…”“됐어요.”전이수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꿀벌은 예쁜 꽃에 끌리는 법이죠.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라면 이 예쁜 옷도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가만히 둬봤자 그냥 낭비일 테니까요.”안시연은 그런 전이수의 말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그럼 우선 입어볼게요.”전이수가 말했다.“옷 다 갈아입으시면 불러주세요. 나중에 제가 올라와서 헤어도 해드릴게요.”말을 마친 전이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안시연은 어딘가 의아한 기색으로 말했다.“제가 탈의실로 가면 돼요. 굳이 내려가실 필요 없습니다.”전이수는 아래층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래도 남녀는 다른 법이잖아요. 연 대표님께서 질투라도 하시면 저는 감당할 자신 없습니다.”그 말에 안시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리 없어요.”안시연은 연정훈 같은 성숙한 사람이 그렇게 유치하게 질투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전이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재빨리 눈치껏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안시연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야 전이수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왔다.그러는 사이, 전이수는 여자 도우미까지 불러 간단히 마실 것이라도 가져다주게 하며 최대한 안시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했다.안시연은 전이수가 정말 재미있는 사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
새벽 두 시를 넘긴 침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양혁수의 셔츠는 변여름의 겉옷과 뒤엉킨 채 침대 옆 바닥에 나른히 놓여 있었다.거실의 시곗바늘이 똑똑 소리를 내며 양혁수의 심장과 신경을 조여 왔다.양혁수는 자신이 형편없는 놈이라며 N 번째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순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키스하려 다가왔다.양혁수는 약간 불편해서 변여름의 양 볼을 잡았다.“뭐 하려고 그래?”그는 깊은 만족 뒤에 밀려오는 나른함 속에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변여름은 살짝 눈을 굴리더니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물건을 만진 듯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변여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도 자극으로는 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속삭였다.“오빠, 나 졸려요.”양혁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당겨 둘을 덮었다.“자.”지금 변여름을 돌려보낸다 한들 헛수고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변여름은 그의 속내를 알아챈 듯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양혁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눈을 감았다.양혁수는 그녀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섬세한 얼굴 위로 연분홍빛이 감돌았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그는 머리가 아파졌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변여름을 방 안으로 들인 자신을 주저 없이 없애버리고 싶었다.지금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양혁수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아무리 되짚어 봐도 도대체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이 결국 변여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이었다.‘아니면 정말 변여름이 말한 대로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이렇게 쉽게 넘어간 걸까?’양혁수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한강시에서만 몇 년을 지내며 수많은
변여름이 두 번째로 양혁수에게 키스하자 그는 여전히 피하려 했지만 마치 작은 마녀의 마법에 걸린 듯 저항은 미약했다.그녀는 투피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언제 풀었는지 겉옷 단추가 풀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끈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는 잠시 눈길을 돌렸을 뿐인데 그녀의 가슴 라인이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에 분홍색 만화 꽃이 그려져 있었고 그 모습이 그녀의 행동과 대조되어 양혁수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입술이 닫히자 변여름은 그의 목을 감싸며 손끝으로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돌려 무심한 듯 두 번 당겼다.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자극되어 그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이번에는 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양혁수의 입술을 따라갔다. 중간에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그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그의 턱에 입맞춤을 했다. 그 후 더 애정을 담아 양혁수의 목젖에 부드럽게 입술을 옮겼다.양혁수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며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게 두었다.심장 박동과 호흡이 서로 경쟁하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로 눌러 내려가며 누가 먼저 참지 못할지 시험하려는 듯했다.그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가 그를 껴안고 무심하게 척추를 쓸어내리자 날카로운 전류가 온몸을 타고 내려가 배까지 흘러갔다.변여름이 양혁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며 그의 옆얼굴에 가만히 입맞췄다.“오빠, 이런 거 좋아해요? 좋아하면 저한테도 이렇게 해도 돼요…아니면 오빠가 다른 걸 원해도 뭐든 저한테 해도 괜찮아요.”변여름의 태도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마치 겸손해 보였지만 양혁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 같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약탈 방식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이 전부였다.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녀의 덫에 걸려들어 단단히 붙잡힐 테고 다시는 벗
“바디워시에요.”“변여름.”변여름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로 우유 향이 나는 바디워시에요.”양혁수는 방금 그 순간 특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핥던 단 몇 초 동안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말도 안 돼.’그는 분명 그녀의 향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변여름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은은한 향이 퍼지더니 이상하게도 양혁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변여름이 키스하려 하자 그는 마치 폭발할 것 같았다.변여름은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미동도 없이 침착했다.“오빠, 어디 불편해요?”“네가 그 이유를 더 잘 알잖아.”“...?”변여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가빠진 호흡과 붉어진 귀 끝을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흥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오빠, 제가 오빠한테 약이라도 먹였다고 생각해요?”양혁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요동쳤고 침묵이 곧 대답이 되었다.변여름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진짜 아니에요.”“오빠는 경험이 부족해서 딥 키스 한 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양혁수는 순간 멍해졌다.???방금 키스 때조차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려는 본능을 꾹 참으며 조용히 손을 빼려 했다.그러나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또 멋대로 움직이면?”변여름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에 희미한 물기를 맺었다.“오빠, 아파요.”양혁수는 변여름이 꾀병을 부린다고 90% 확신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변여름은 손을 빼냈다.양혁수는 얼굴에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경계했고 변여름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잠시 팽팽한 정적이 흐른 후 변여름은 애원하는 듯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